오작교의 달빛
1. 달빛 내리는 완월정 뒤란
광한루원(廣寒樓苑)의 밤은 낮과는 다른 결의 침묵을 품고 있었다.
낮 동안 경내를 가득 메웠던 관광객들의 웅성거림과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노을과 함께 물러갔다.
완월정(玩月亭) 처마 끝에 걸린 은은한 청사초롱 불빛만이 잔잔한 호수 표면을 비추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수면에 드리운 달그림자가 잘게 부서지며 비단결처럼 일렁였다.
호수를 둘러싼 수백 년 수령의 팽나무 고목들은 푸르스름한 어둠 속에서 묵직한 거인처럼 서 있었다.
가을밤 특유의 서늘하고 맑은 공기가 피부에 닿을 때마다 가슴속 깊은 응어리를 씻어내는 듯했다.
한지유는 품에 안은 것들을 한 번 더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낮 동안 재환이 남겨둔 편지를 따라 찾아갔던 요천 둑길의 자전거 스케치 복사본.
폭우가 쏟아지던 날 서로의 상처를 가려주었던 빈집 처마 밑의 하얀 손수건.
그리고 작은 유리병 안에서 고요하게 흔들리는 흑청색 잉크병.
이 세 가지 물건은 지난 7년 동안 그녀가 흘렸던 피눈물과 견뎌낸 외로움의 무게였다.
동시에 어떤 칼날과 협박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두 사람의 맹세 그 자체였다.
지유는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완월정 뒤편의 흙길을 걸었다.
신발 밑창에 밟히는 마른 낙엽 소리가 사각거리며 고요한 밤공기를 울렸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뛰고 있었다.
골목길 처마 밑 디딤돌에서 세 번째 편지를 읽었을 때부터 멈추지 않던 전율이었다.
'마지막 조각을 들고 오작교(烏竹橋)로 와 주겠니. 달빛 아래에서, 내가 처음 너를 마주했던 그 다리 위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을게.'
편지에 적혀 있던 정갈한 글씨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서울로 떠나던 날, 남원역 플랫폼에서 피 흘리는 무릎으로 주저앉았던 자신을 향해 울부짖던 열여덟 살의 소년.
그리고 검사의 서슬 퍼런 칼날을 쥐고 돌아와 마침내 거악을 무릎 꿇리고,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은 채 약자들의 방패가 되어 돌아온 청년.
지유는 옷깃을 여미며 호수 위로 둥글게 솟아오른 돌다리를 바라보았다.
2. 돌다리 위의 기다림
오작교는 네 개의 수구(水口)를 둔 반월형의 홍예교였다.
선조 시절에 세워진 이래 수백 년 동안 수많은 연인들의 발길과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돌다리였다.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단 한 번 만나 눈물을 흘린다던 전설의 다리.
그러나 지유와 재환에게 이 다리는 일 년이 아니라 무려 칠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가로막혀 있던 벽이자, 다시 서로에게 닿기 위해 건너야 했던 눈물의 강이었다.
다리 초입의 수양버들 가지 사이로 은백색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 달빛의 정점, 오작교의 가장 높은 둥근 호(弧) 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성재환이었다.
그는 평소 입던 편안한 법률사무소의 셔츠 차림이 아니었다.
구김 하나 없이 단정하게 떨어지는 짙은 감색의 정장 차림이었다.
재환은 뒷짐을 진 채 고요히 흐르는 호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넓고 곧은 어깨, 서늘하면서도 지적인 옆모습, 그리고 밤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
그 모습은 7년 전 이 다리 위에서 백부의 만년필을 쥐고 가문의 무게에 짓눌려 고뇌하던 소년의 위태로움이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불의와 폭압을 제 손으로 부수고, 마침내 지키고자 했던 사람의 곁으로 온전히 걸어 돌아온 자의 단단한 평온이었다.
지유는 숨을 죽인 채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남원 톨게이트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을 짓찧으며 멀어지는 차를 바라보던 순간부터, 영안실 앞에서 깡패들의 협박에 시달리던 밤들까지.
그 수많은 어둠 속에서 지유를 버티게 한 유일한 등불이 바로 저 남자였다.
인기척을 느낀 것인지, 재환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달빛을 등진 그의 얼굴에 지유의 모습이 비쳤다.
재환의 입가에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하고 깊은 미소가 번졌다.
그의 눈동자는 밤하늘의 은하수를 통째로 담아낸 것처럼 맑고 벅차올라 있었다.
"지유야."
재환이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는 바람결을 타고 흘러와 지유의 귓가를 부드럽게 감쌌다.
3. 지나온 칠 년의 궤적
지유는 가슴에 품은 세 가지 물건을 쥔 채 천천히 돌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디딜 때마다 지나간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열여덟 살의 봄, 벚꽃이 눈꽃처럼 흩날리던 이 자리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재환의 서늘한 눈빛.
각인 만년필을 주워 건네며 나누었던 수줍은 대화.
요천 둑길에서 함께 자전거를 타며 처음으로 가문의 상처와 비밀을 털어놓던 푸른 노을.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정신없이 뛰어가다 넘어져 무릎에 깊게 패였던 상흔.
남원역 플랫폼에서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며 삼켰던 피눈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날, 피 묻은 만년필 글씨로 날아왔던 그의 결전 서신.
그리고 마침내 법복을 입고 돌아와 포클레인 앞을 가로막고, 어머니의 묘소 앞에서 가문의 죄악을 사죄하던 그의 무릎 꿇은 모습.
오작교의 돌계단은 불과 열 몇 개에 불과했지만, 지유에게는 그 이천오백 일이 넘는 나날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과 같았다.
재환은 다리 한가운데서 서두르지 않고 그녀를 기다렸다.
지유가 마침내 다리의 가장 높은 지점에 이르러 재환의 코앞에 섰을 때,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가을밤의 은은한 풀벌레 소리만이 흘렀다.
가까이서 마주한 재환의 눈가에는 옅은 눈물범벅의 흔적이 서려 있었다.
"다 찾았구나."
재환의 시선이 지유의 품에 안긴 자전거 스케치와 하얀 손수건, 흑청색 잉크병에 머물렀다.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유는 떨리는 손으로 품에 안고 있던 것들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민재가 서류 심부름이라면서 호들갑을 떨길래 깜짝 놀랐잖아. 사무실에 갔더니 관공서 서류는 없고 편지만 덩그러니 놓여 있고."
지유의 눈에서 마침내 맑은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울면서도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요천 둑길 벤치에 갔을 때 알았어. 네가 오늘 아침부터 민재랑 어딜 그렇게 바쁘게 다니는지. 그리고 빈집 처마 밑에 놓인 손수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무너지는 줄 알았어, 재환아."
"미안해. 널 너무 많이 울게 했지."
재환이 손을 뻗어 지유의 뺨에 맺힌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그의 손가락 끝은 따뜻했고, 지유의 살결에 닿는 손길은 부서지기 쉬운 보물을 만지듯 한없이 조심스러웠다.
"그 길들을 다시 걸으면서 생각했어. 지난 7년 동안 너한테 남겨진 건 상처와 기다림뿐이었는데, 나는 늘 너한테 지켜달라는 약속만 강요했던 건 아닐까 하고."
"아니야. 난 단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지유가 고개를 저으며 재환의 손등을 감싸 쥐었다.
"네가 서울로 떠나던 날, 기차 안에서 네가 적었다던 그 수첩…… 그리고 신림동 고시촌 단칸방 벽면에 남원의 지도를 붙여놓고 피를 토하듯 공부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알았어. 넌 나를 두고 도망친 게 아니라, 나를 살리기 위해, 남원을 구하기 위해 사지로 뛰어든 거였다는 걸."
4. 가슴에서 꺼낸 약속
달빛이 두 사람의 발치를 하얗게 물들였다.
호수 저편에서 불어온 가을바람이 지유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재환은 지유의 품에서 자전거 스케치와 하얀 손수건, 흑청색 잉크병을 조심스럽게 건네받았다.
그는 오작교 난간의 편평한 돌 위에 그 소중한 기억의 파편들을 정갈하게 내려놓았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묵직한 유리 잉크병으로 스케치와 손수건 모서리를 눌러두었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서 지유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재환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맑았다.
그는 정장 안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지유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재환의 손끝에서 먼저 나온 것은 검은 옻칠이 단정하게 빛나는 독일제 만년필이었다.
캡 상단에 금빛으로 새겨진 '成宰桓'이라는 한자 이름과 'Fiat justitia, ruat caelum'이라는 라틴어 법언.
가문의 규율이자 숙명이었고, 지유에게 건네져 두 사람을 이어주었던 그 만년필이었다.
재환은 만년필을 오른손에 쥐더니, 이내 안주머니에서 짙은 남색 벨벳으로 감싸인 작은 상자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손바닥만 한 상자가 달빛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지유는 숨을 들이켜며 입을 틀어막았다.
"지유야."
재환이 나지막하게 부르며, 한쪽 무릎을 천천히 꿇었다.
단단한 오작교의 화강암 바닥 위에 그의 무릎이 닿았다.
대한민국 검찰의 최연소 특임수사팀장이었고, 거악을 무릎 꿇렸던 서슬 퍼런 법률가가, 오직 한 여인의 발치 앞에서 가장 낮고 겸허한 자세로 무릎을 꿇은 것이다.
"재환아……."
지유의 목소리가 젖어 들어갔다.
재환은 벨벳 상자를 천천히 열었다.
달빛을 받아 은은하고도 투명한 백색의 광채를 뿜어내는 반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된 반지가 아니었다.
군더더기 없이 매끄럽고 단정하게 다듬어진 유려한 곡선의 백금 반지였다.
그러나 그 단순함 속에 깃든 기품과 순결함은 세상 그 어떤 다이아몬드보다 눈부셨다.
재환은 반지를 꺼내 들며 지유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서울 종로의 오래된 귀금속 골목을 홀로 찾아가서 맞춘 반지야. 장인에게 부탁해서 안쪽에 글귀를 새겼어."
재환이 반지의 안쪽을 지유에게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아주 정교하고 가느다란 흑청색 음각으로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Mane nobiscum.'
그리고 그 라틴어 바로 아래에, 단정한 한글 정자체로 또 하나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끝까지 남은 사람에게.'
지유의 두 뺨 위로 굵은 눈물방울들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가게 처마 밑에 걸린 육송 간판에 새겨진 글귀, 그리고 재환이 신림동과 서울의 거악 속에서 하루도 빼놓지 않고 가슴에 품었던 그 문장이었다.
5. 백금 반지에 새겨진 법언
재환은 반지를 든 채, 지유의 떨리는 왼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 마디마디는 지난 7년간 김밥을 말고, 차가운 물에 채소를 씻고, 붉은 페인트를 철 수세미로 문질러 닦아내느라 거칠어져 있었다.
손톱 밑은 닳아 있었고, 손등에는 잔상처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재환은 그 거칠어진 손등에 자신의 입술을 길게 내리눌렀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재환의 눈물이 지유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Mane nobiscum'. 우리와 함께 머무소서라는 뜻이야."
재환이 고개를 들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평생을 떠나는 사람으로 살았어. 남원을 빼앗기듯 떠났고, 서울에서 유폐되듯 살았고, 검사가 되어서도 늘 칼을 쥐고 어둠 속을 헤맸지. 하지만 지유야, 너는 언제나 그 자리에서 남은 사람이었어. 폭우가 쏟아져도, 용역들이 가게를 부수고 붉은 페인트를 칠해도, 너는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남아서 남원의 양심을 지켰어."
재환의 목소리에 사무치는 경외와 사랑이 실렸다.
"내가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네가 그 자리에 남아 있어 주었기 때문이야. 네가 없었다면 난 정의도, 법도, 돌아갈 고향도 모두 잃어버린 채 복수의 괴물이 되었을 거야."
지유는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지만, 재환의 눈빛만은 또렷하게 가슴에 박혔다.
재환은 백금 반지를 쥔 손을 더 굳게 쥐며 말을 이었다.
"이제 내 차례야. 나는 검사의 화려한 출세길도, 서울의 높은 권력도 모두 버리고 남원으로 돌아왔어. 더 이상 널 혼자 남겨두고 어디로도 떠나지 않을 거야. 네가 지켜낸 이 남원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너와 함께 평생을 머물고 싶어."
재환의 눈가에서도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려 턱 끝으로 떨어졌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간절하고 경건한 목소리로 마지막 문장을 건넸다.
"지유야. 내 남은 모든 생을 네 곁에 머물게 해 주겠니? 나와 결혼해 줘."
6. 마주 잡은 손, 완성된 맹세
바람조차 멎은 듯한 정적 속에서,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만이 오작교 위를 채웠다.
지유는 주체할 수 없이 터져 나오는 흐느낌을 참지 않았다.
그것은 아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7년 동안 얼어붙어 있던 가슴속 깊은 응어리가 봄눈 녹듯 완전히 녹아내리는 해원의 눈물이었다.
지유는 무릎을 꿇고 있는 재환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그를 일으켜 세우는 대신, 자신 역시 조용히 치맛자락을 모으며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었다.
오작교의 가장 높은 다리 위, 환한 달빛 아래에서 두 사람은 마침내 같은 눈높이로 마주 앉았다.
"재환아."
지유가 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녀의 손이 재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남원역에서 기차가 떠나던 날…… 내 무릎이 깨지고 피가 철철 흐르던 그날, 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어. 너를 원망하지도 않았어. 그저 네가 다치지 않고, 네가 믿는 정의를 세우고 돌아오기만을 매일 밤 양철 상자에 편지를 쓰며 기도했어."
지유는 재환의 손에 들린 백금 반지를 바라보았다.
달빛을 품은 그 반지는 그 어떤 화려한 보석보다 순수하게 빛나고 있었다.
"난 단 한 번도 네가 돌아올 거라는 약속을 의심한 적 없어. 네가 서울로 올라가 대검에서 싸울 때도, 난 네가 반드시 이 골목으로 걸어 돌아올 걸 알고 있었어. 넌 내게 한 약속을 어긴 적이 없으니까."
지유는 왼손을 내밀어 재환의 손바닥 위에 얹었다.
"머물러 줘, 재환아. 내 곁에,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이 남원의 사람들 곁에 영원히 머물러 줘. 내 대답은 언제나 하나뿐이었어. 너와 함께라면, 그 어떤 삶이라도 난 감사하며 살아갈 거야."
재환의 입술에서 안도와 벅찬 환희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백금 반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지유의 거칠어진 네 번째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반지는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를 위해 존재했던 것처럼, 조금의 틈도 없이 완벽하게 지유의 손가락에 맞아떨어졌다.
달빛 아래서 백금의 맑은 빛과 지유의 하얀 살결이 눈부시게 어우러졌다.
재환은 반지를 끼운 지유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가슴에 대었다.
그의 심장이 마치 폭풍처럼 거세게 뛰고 있는 것이 지유의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7. 오작교의 입맞춤
재환은 난간 위에 놓여 있던 각인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지유의 손을 펴고 그 작은 손바닥 위에 만년필을 올려놓았다.
"이 만년필은 이제 네 거야. 정의를 세우라는 가문의 무거운 규율이 아니라, 약자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내 영혼을 네게 맡기는 거야."
지유는 만년필을 꼭 쥐었다.
캡 상단에 새겨진 'Fiat justitia, ruat caelum'이라는 문구 위에 지유의 엄지손가락이 닿았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 서슬 퍼런 법언은 이제 두 사람에게 세상을 향한 증오나 복수가 아니었다.
어떤 불의와 권력 앞에서도 서로를 지키고, 힘없는 이들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가장 따뜻한 사랑의 서약으로 완성되어 있었다.
재환은 손을 뻗어 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유 역시 재환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재환의 단단한 품에서 풍겨오는 정갈한 잉크 냄새와 서늘한 밤바람 냄새가 지유의 온몸을 감쌌다.
재환이 천천히 지유의 턱을 들어 올렸다.
달빛을 받아 은색으로 반짝이는 지유의 눈동자와, 눈물로 젖은 붉은 입술이 드러났다.
재환은 망설임 없이 그녀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7년의 고통과 기다림, 수천 일의 밤 동안 삼켜왔던 그리움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는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
수양버들 잎을 스치는 바람 소리와 완월정 연못에 이는 잔물결 소리만이 두 사람의 곁을 맴돌았다.
오작교의 돌다리는 견우와 직녀의 슬픈 전설을 넘어, 마침내 온갖 풍파를 이겨내고 영원한 사랑을 맹세한 두 청춘의 승리를 축복하듯 은백색 달빛 속에서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8. 밤하늘에 피어난 새날의 서막
입맞춤을 마친 두 사람은 서로의 이마를 맞댄 채 가쁜 숨을 골랐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때마다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벅찬 행복감에 두 사람의 입가에는 떠나지 않는 미소가 걸렸다.
재환이 지유를 품에 안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오작교 난간에 나란히 기대어 섰다.
호수 수면에는 보름달이 거울처럼 온전한 원을 그리며 떠 있었다.
지유의 손가락에 끼워진 백금 반지가 달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어머니가 보고 계실까?"
지유가 호수 건너편, 교룡산(蛟龍山) 능선 너머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재환은 지유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 계실 거야. 그리고 가장 환하게 웃고 계실 거야."
재환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내일 아침 일찍, 어머니 산소에 가자. 이 반지를 보여드리고, 우리가 평생 남원에서 함께 살아가겠다고 말씀드리자."
"응. 꼭 그러자."
지유가 재환의 품에 기댔다.
그녀의 손에는 여전히 재환의 각인 만년필이 소중하게 쥐여 있었다.
그때, 광한루원 정문 쪽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한 경내에 울려 퍼지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에헴! 거 다리 위에서 남사스럽게 둘이서 뭐 하는 거요?"
돌아보니, 완월정 옆 오솔길에서 최민재와 윤하은이 걸어오고 있었다.
하은은 양손으로 배를 감싼 채 얼굴 가득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민재는 카메라를 목에 건 채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혀를 차고 있었다.
"내가 아래서 망보느라 모기한테 세 방이나 뜯겼다고, 성재환 변호사! 성공했으면 신호를 줘야 할 거 아냐!"
민재의 투정에 재환과 지유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은이 다가와 지유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를 보더니 탄성을 질렀다.
"어머, 지유야! 반지 좀 봐…… 정말 너무 예쁘다!"
하은이 지유의 손을 맞잡으며 제 일처럼 눈시울을 붉혔다.
지유는 쑥스러워하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민재는 재환의 어깨를 툭 치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축하한다, 재환아. 진짜 멋있었다, 임마."
"고맙다, 민재야. 네 덕분이야."
재환이 진심 어린 눈빛으로 친구의 손을 굳게 맞잡았다.
네 사람은 오작교 위에서 환한 달빛을 받으며 함께 웃었다.
거악의 폭압과 오랜 법정 투쟁, 그리고 7년간의 시련을 이겨낸 남원의 청춘들이었다.
그들의 머리 위로 펼쳐진 지리산 자락의 밤하늘은 티끌 하나 없이 맑고 깊었다.
내일이면 삼거리 김밥집 골목에는 다시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퍼질 것이고, 맞은편 2층 법률사무소에는 억울한 농민들의 눈물을 닦아줄 따뜻한 등불이 켜질 터였다.
그리고 그 모든 일상의 중심에서, 두 사람은 영원히 흩어지지 않을 단단한 맹세로 서로의 곁을 지킬 것이다.
오작교 아래로 잔잔히 흐르는 물결 위로, 새날의 새벽을 예고하는 서늘하고도 맑은 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