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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15화

추억의 보물찾기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남겨진 쪽지와 심부름

 

늦가을의 맑고 서늘한 바람이 남원 시내의 나직한 골목길을 따라 잔잔하게 흘러들었다.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정갈하게 자리 잡은 삼거리 김밥집의 편백나무 출입문이 바람결에 맑은 풍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처마 끝에 달린 놋쇠 풍경은 7년 전 지유의 어머니가 손수 매달아 두었던 그대로였다.

 

그 맑은 쇳소리는 언제나처럼 모녀의 평온한 아침을 알리는 다정한 신호였다.

 

새벽부터 가마솥 밥솥에서 피어오른 구수한 쌀밥 냄새와 공설 방앗간에서 갓 짜온 참기름의 고소한 향이 가게 안을 빈틈없이 채우고 있었다.

 

한지유는 단정하게 맨 하얀 면 앞치마를 매만지며 참기름을 바른 김밥을 일정한 두께로 썰어냈다.

 

칼날이 단단한 편백 도마에 닿으며 내는 경쾌한 파열음이 고요한 아침 공기를 맑고 청아하게 울렸다.

 

단무지와 당근, 시금치, 계란 지단이 알록달록하게 박힌 단면 위로 맑은 참기름 윤기가 촉촉하게 흘렀다.

 

가게 안팎은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웠다.

 

유리창을 부수고 붉은 유성 페인트를 칠하던 조폭들의 그림자도, 영세 상인들을 겁박하던 시청 위생과와 소방과의 표적 단속 공문도 이제 남원 땅 어디에도 없었다.

 

처마 밑에 굳건하게 걸린 지리산 육송 간판만이 아침 햇살을 정면으로 받아 은은한 금빛을 띠고 있었다.

 

간판 한쪽에 흑청색 잉크빛 안료로 정교하게 새겨진 여덟 글자, '끝까지 남은 사랑'.

 

그 글씨를 올려다볼 때마다 지유는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벅찬 온기를 느끼곤 했다.

 

지유는 조리대 옆 선반에 정갈하게 놓인 유리병 하나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깊고 푸른빛이 감도는 흑청색 잉크병이었다.

 

재환이 서울에서 내려와 그 잉크와 백부의 각인 만년필로 공익 소송의 첫 소장을 쓰고, 억울하게 땅을 빼앗겼던 105명의 농민들에게 환한 웃음과 문전옥답을 되찾아준 지 불과 며칠이 지나지 않았다.

 

골목 맞은편 2층, 목공소 윤 씨와 이웃들이 합심하여 수리해 준 성재환 법률사무소의 덧창은 활짝 열려 있었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일찍 나와 책장을 넘기거나 차를 끓이고 있을 재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침 일찍 최민재와 함께 군청과 법원에 들러 105인 소송의 잔여 등기 열람 서류를 정리하겠다며 나선 그였다.

 

지유가 썰어낸 김밥을 2단 찬합에 정갈하게 담고 있을 때였다.

 

골목 어귀에서부터 자전거 바퀴가 자갈을 긁는 소리와 함께 요란한 방울 소리가 울려 퍼졌다.

 

따르릉, 따르릉.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소리와 함께 김밥집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지유야! 지유야!"

 

목에 묵직한 취재용 카메라를 걸고 어깨에 두툼한 서류 가방을 멘 최민재가 들이닥쳤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민재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연신 소매로 훔쳐내며 헉헉거렸다.

 

지유는 깜짝 놀라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도마 위에 내려놓고 행주로 손을 닦으며 다가섰다.

 

"민재야, 숨 좀 돌리고 말해. 도대체 무슨 일이야? 하은이가 어디 아파? 입덧이 또 심해졌어? 아니면…… 재환이한테 무슨 일 생긴 거야?"

 

"아, 아니! 아니야! 하은이도 괜찮고 단비도 아주 무탈해. 아침에 지유 네가 끓여준 맑은 콩나물국을 하은이가 한 대접 다 비우더니 입덧도 싹 가라앉았다고 아주 기운이 넘쳐."

 

민재는 손사래를 치며 허겁지겁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지유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치지 못하고 허공을 바쁘게 맴돌고 있었다.

 

지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동무였다.

 

민재가 무언가 엄청난 비밀을 숨기고 있을 때 짓는 특유의 당황한 표정을 지유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 재환이는? 법원에 서류 떼러 같이 간 거 아니었어? 왜 너 혼자 그렇게 넋이 나가서 뛰어와?"

 

"그게 말이다…… 재환이가 지금 요천 수변 공원 제방 복구 현장 쪽에 나가 있거든. 지난번 폭우 때 터졌던 1공구 제방 보강 공사가 제대로 됐는지 군청 도로과 직원들이랑 현장 감리를 대조하고 있어. 그런데 글쎄, 그 녀석이 꼭 필요한 현장 측량 참고 도면을 2층 사무실에 깜빡 두고 나갔지 뭐냐!"

 

"참고 도면을 깜빡했다고? 재환이가?"

 

지유의 목소리에 짙은 의구심이 묻어났다.

 

성재환이라는 사내가 어떤 사람인가.

 

수만 장에 달하는 대기업과 지방 토건 카르텔의 비자금 계좌 원장을 머릿속에 통째로 꿰고 다니던 대한민국 최고의 특수부 검사 출신이었다.

 

단 1원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치밀한 사내가, 직접 나선 현장 실태 조사에 필요한 핵심 서류를 책상 위에 두고 나갔다는 말은 지유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민재는 지유의 예리한 시선에 찔렸는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목덜미를 거칠게 긁적였다.

 

"어, 그래!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워낙 아침부터 일정이 빡빡했잖아. 2층 사무실 평상 탁자 위에 보면 갈색 대봉투 하나가 올려져 있을 거야. 그걸 좀 급하게 현장으로 가져다 달래. 내가 가야 마땅한데, 지유 너도 알다시피 내가 지금 하은이 도립병원 정기 검진 예약 서류를 대신 제출하러 바로 튀어가야 하거든. 이거 시간 못 맞추면 하은이한테 진짜 등짝 박살 난다. 남원일보 정식 기자가 마누라한테 쫓겨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네가 좀 도와줘라, 응?"

 

민재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더니, 지유가 미처 되물을 틈도 주지 않고 재빨리 몸을 돌렸다.

 

"지유야, 딴생각하지 말고 얼른 2층에 가봐! 재환이가 요천 둑길 첫 번째 벤치에서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 바람도 서늘한데 그 녀석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래? 난 진짜 간다! 늦으면 죽음이야!"

 

민재는 문이 쾅 닫히도록 뛰어나가 자전거 페달을 거칠게 밟았다.

 

골목길 모퉁이를 쏜살같이 돌아 사라지는 민재의 뒷모습을 보며 지유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무슨 서류길래 저렇게 호들갑을 떨어……."

 

지유는 조리대에 놓인 김밥 찬합 뚜껑을 닫고, 앞치마를 벗어 단정하게 벽걸이에 걸어두었다.

 

가게 문을 잠근 뒤, 맞은편 2층 건물로 향하는 붉은 벽돌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목조 계단을 한 칸씩 디딜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뭇결의 울림이 정겹게 귓가를 맴돌았다.

 

과거 한약방과 복덕방이 거쳐 갔던 낡은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남원의 가난하고 억울한 민초들이 흙 묻은 신발을 신고도 편히 찾아올 수 있는 문턱 없는 사법의 쉼터였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지리산 육송으로 짠 평상형 원목 탁자에서 풍기는 은은한 솔향과 책장에 꽂힌 법전들의 묵직한 종이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창가 쪽 탁자 위에는, 민재의 말대로 두툼한 서류 봉투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지유는 걸음을 재촉해 탁자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나 봉투를 집어 들려던 지유의 손길이 공중에서 우뚝 멈추어 섰다.

 

'남원군청 도로과 수변공원 참고 도면' 같은 딱딱한 관공서 문구가 아니었다.

 

누런 서류 봉투 한가운데, 단정하면서도 곧은 흑청색 필체로 정갈하게 적힌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기억의 둑길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지유의 가슴속에서 쿵, 하고 깊고 묵직한 울림이 번져 나갔다.

 

흑청색 잉크.

 

남원여고 시절, 골목길 문구점에서 재환을 생각하며 용돈을 모아 선물했던 바로 그 빛깔이었다.

 

지난 7년 동안 차가운 신림동 고시촌의 단칸방에서, 그리고 서울지검과 대검찰청의 혹독한 밤들 속에서 재환이 가슴에 품고 불의를 심판하는 데 썼던 그의 영혼의 색채였다.

 

지유는 가늘게 떨리는 손가락으로 봉투를 들어 올렸다.

 

입구는 풀칠조차 되어 있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봉투 안쪽을 들여다보자, 여러 겹으로 단정하게 접힌 도톰한 스케치북 종이 한 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유는 멎을 듯한 숨을 삼키며 천천히 종이를 펼쳤다.

 

2. 요천 둑길의 자전거와 첫 번째 매듭

 

종이가 완전히 펼쳐진 순간, 지유의 시야가 순식간에 눈물로 흐려졌다.

 

그것은 7년 전, 열여덟 살의 한지유가 요천 제방 둑길 벤치에 웅크리고 앉아 몽당연필로 정성스레 그렸던 스케치의 정밀한 복사본이었다.

 

수양버들 가지가 강바람에 부드럽게 흩날리는 강둑길의 풍경.

 

그 길가에 낡은 쌀집 자전거를 세워둔 채, 먼 노을을 응시하며 서 있던 성재환의 호리호리하면서도 곧은 뒷모습이 그곳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당시 남원 시장이었던 부친 성호석의 무거운 가문의 멍에와 엄격한 규율에 짓눌려, 열여덟 소년의 어깨는 언제나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소년의 굽은 등 뒤에서 그 어깨가 부러지지 않기를, 언젠가는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온전히 자유로워지기를 기도하며 떨리는 손으로 그렸던 뒷모습이었다.

 

스케치 하단의 여백에는 재환의 친필이 또박또박, 서늘하지만 다정하게 적혀 있었다.

 

'열여덟의 나는 네가 그려준 내 뒷모습을 보며 비로소 넘어지지 않는 법을 배웠다.

 

가문의 죄악과 아버지의 기대가 나를 짓누를 때마다, 내 등 뒤에 머물던 너의 시선이 나를 버티게 했다.

 

바람이 불어오던 그 둑길 벤치에서, 너의 자전거는 여전히 멈추지 않고 달리고 있을까.

 

첫 번째 바람이 머물던 요천 둑길 수양버들 아래로 와주겠니.'

 

지유는 종이를 가슴 한가운데에 꼭 품어 안았다.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거세게 방망이질 쳤다.

 

'도면을 깜빡했다니…….'

 

민재가 땀을 뻘뻘 흘리며 늘어놓았던 어설픈 핑계의 실체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것은 서류 심부름 따위가 아니었다.

 

지난 7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서로의 가슴에 맺혀 있던 아프고 애틋한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어 온전한 사랑으로 보듬어주려는 성재환만의 지극히 다정한 보물찾기였다.

 

지유는 코트 자락을 여미고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가을바람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지만, 뺨에 닿는 공기는 조금도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뜨거운 피가 온몸을 따뜻하게 덥히고 있었다.

 

삼거리 김밥집 골목을 빠져나와 요천 제방을 향해 걷는 지유의 발걸음은 점점 빨라져 이내 가벼운 달음박질로 변했다.

 

골목 어귀 공설 방앗간의 배 씨 아주머니가 고추를 다듬다 말고 고개를 들어 달리는 지유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유야! 날씨 참 좋다! 잘 다녀와라!"

 

동문 우체국 계단에 서 있던 집배원 박 씨 아저씨도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지유의 등 뒤에 대고 허허 웃어 보였다.

 

온 동네 이웃들이 이미 이 은밀하고 아름다운 여정을 다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요천 제방 둑길에 올라서자, 탁 트인 시야 사이로 은빛 억새 군락이 가을 햇살을 받아 황금빛 물결을 이루며 춤추고 있었다.

 

지난여름, 강태석 일파의 비자금 횡령과 저질 골재 납품으로 무너져 내려 구도심 상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제방 옹벽은 이제 찾아볼 수 없었다.

 

견고한 화강암 석축이 반듯하게 쌓아 올려져 남원 시민들의 삶의 터전을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었다.

 

그 평화로운 둑길 한편, 오래된 수양버들이 긴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낡은 나무 벤치가 눈에 들어왔다.

 

열여덟 살의 재환이 삐걱거리는 자전거 짐받이에 지유를 태우고 달리다 멈추어 서서, 노을빛을 바라보며 말없이 땀을 식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지유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벤치를 향해 다가갔다.

 

벤치에는 재환의 모습 대신, 낯익은 물건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녹슨 자전거 바퀴살 대신 가죽 왁스로 윤이 나게 닦인 낡은 자전거 안장 가방이었다.

 

그리고 가방 손잡이에는 정갈하게 접힌 하얀 리본으로 묶인 작은 편지봉투가 매달려 있었다.

 

지유는 무릎을 꿇고 앉아 떨리는 손으로 리본을 풀었다.

 

봉투 안에는 엽서 크기의 도톰한 한지가 들어 있었다.

 

그 위에도 역시 흑청색 잉크로 재환의 마음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기억하니, 지유야.

 

이 둑길에서 네가 내 교복 옷자락을 꼭 쥐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내가 짊어져야 할 가문의 무게보다, 내 등 뒤에 맞닿은 네 작은 손의 온기가 훨씬 더 무겁고 소중하다는 것을.

 

그때 너는 내게 말했지.

 

세상에 흉터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그러니 너무 아파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남원을 떠나던 날, 네 무릎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참혹한 흉터를 남기고 말았다.

 

차창 밖으로 아스팔트 위에 붉게 물들던 너의 피를 보며, 나는 지옥 같은 서울에서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돌아오겠노라고.

 

돌아와 너의 그 피 흘린 상처를 내 모든 삶으로 덮어주고, 다시는 네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지 않게 하겠노라고.

 

지유야.

 

너의 그 눈물을 닦아주었던 그 처마 밑은, 지금도 비를 피할 온기를 품고 있을까.'

 

편지를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가던 지유의 눈에서 마침내 맑은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종이 모서리를 적셨다.

 

가슴 한구석이 아리도록 저려왔다.

 

재환은 단 하루도, 단 한순간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서울로 강제 압송되던 관용차를 뒤쫓다 남원 톨게이트 아스팔트 바닥에서 넘어져 무릎이 깨졌던 그 비극의 날을.

 

그리고 그 끔찍한 이별보다 앞서, 여름날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피해 뛰어들었던 골목길 빈집 처마 밑의 그 아늑하고 서늘했던 숨소리를.

 

지유는 편지를 가슴에 꼭 쥔 채, 코트 주머니 깊숙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제방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향해야 할 다음 장소가 어디인지, 마음속 나침반은 이미 명확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3. 처마 밑의 온기와 하얀 손수건

 

요천 둑길을 내려와 동충동과 하정리의 경계선으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수십 년 된 흙돌담 위로 붉게 타오르는 담쟁이덩굴이 늦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사람 둘이 나란히 걷기에도 비좁은 고샅길 모퉁이를 돌아서자, 오래된 고택의 깊은 기와 처마가 드리워진 빈집이 나타났다.

 

고교 시절, 갑작스럽게 하늘이 뚫린 듯 쏟아지던 장대비를 피해 교복이 흠뻑 젖은 채 뛰어들었던 바로 그 처마 밑이었다.

 

천둥 번개가 치고 처마 끝에서 굵은 낙숫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던 그날.

 

차가운 빗물에 젖어 입술이 파랗게 질려 떨고 있던 재환의 얼굴을 보며, 지유는 주머니에서 소중히 간직하던 하얀 면 손수건을 꺼내 그의 뺨과 젖은 이마를 조심스레 닦아주었었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던 소년의 미세한 떨림과, 처마 끝 낙숫물 소리를 집어삼킬 만큼 거세게 뛰던 두 사람의 심장 소리.

 

그 좁은 처마 밑에서 두 소년 소녀는 처음으로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서서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영혼의 진심을 마주했었다.

 

처마 밑 디딤돌 앞에 다다랐을 때, 지유는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멈추었다.

 

거친 흙바닥 한가운데 놓인 평평한 화강암 디딤돌은 먼지 한 톨 없이 정갈하게 닦여 있었다.

 

그리고 그 돌 한가운데, 옻칠이 곱게 입혀진 작은 목함 하나가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지유는 떨리는 무릎을 굽혀 디딤돌 앞에 꿇어앉았다.

 

목함의 뚜껑을 조심스럽게 밀어 열자,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저미는 물건들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깨끗하게 세탁되어 티끌 하나 없이 반듯하게 다려진 하얀 면 손수건.

 

폭우 속에서 재환의 얼굴을 닦아주었고, 7년 전 서울로 떠나던 날 눈물로 각인 만년필을 소중히 싸서 그의 품에 안겨주었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그리고 손수건 위에는 손때가 묻지 않은 단정한 사각 유리병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지유가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용돈을 털어 샀던, 깊은 밤하늘의 빛깔을 닮은 단아한 흑청색 잉크병이었다.

 

손수건 밑에서 세 번째 편지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유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종이를 펼쳐 들었다.

 

'세상이 폭우처럼 나를 짓누를 때마다, 너의 하얀 손수건은 내게 세상에서 유일한 지붕이었고 안식이었다.

 

네가 건넨 흑청색 잉크로 나는 신림동 고시촌의 긴 밤을 버텼고, 가문의 죄악을 단죄할 법복을 입었으며, 마침내 우리를 집어삼키려던 거악의 어둠을 부술 수 있었다.

 

너의 순결한 진심이 내 가슴속에 살아 숨 쉬지 않았다면, 나는 진작에 권력의 차가운 괴물로 타락했거나 절망의 밑바닥에서 길을 잃었을 것이다.

 

지유야.

 

나의 법은 서초동의 거대한 법전에 있지 않았다.

 

나의 법은 폭우 속에서도 내 차가운 얼굴을 닦아주던 너의 떨리는 손끝에 있었고, 7년 동안 차가운 김밥을 말며 홀로 터전을 지켜낸 너의 거친 손마디에 있었다.

 

이제 그 잉크로, 우리 생의 마지막이자 가장 온전한 약속을 적으려 한다.

 

우리가 처음으로 눈을 맞추고, 서로의 이름을 영혼에 새겼던 곳.

 

오작교의 달빛이 차오르는 누원으로 와주겠니.

 

네가 오지 않는다면, 나는 천 년이라도 그 돌다리 위에서 너를 기다릴 것이다.'

 

글자를 읽어 내려가는 지유의 시야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하얀 손수건 위로 툭툭 떨어졌다.

 

지유는 손수건을 들어 코끝에 가져갔다.

 

손수건에서는 볕에 바짝 말린 풀잎 냄새와 함께, 재환의 단정하고 묵직한 체향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그것은 지난 7년 동안 겪어야 했던 모든 수모와 서러움을 단숨에 씻어내는 기적 같은 온기였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도, 조폭들이 김밥집 문을 부수고 쇠파이프를 휘둘렀을 때도 지유는 쉽게 소리 내어 울지 못했다.

 

자신이 무너지면 서울에서 홀로 싸우고 있을 재환의 등 뒤가 무너질까 봐,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켰던 날들이었다.

 

단칸방 양철 과자 상자에 차곡차곡 쌓여 가던 백여 통의 부치지 못한 편지들.

 

그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재환의 글씨 하나하나가 온몸으로 증명해주고 있었다.

 

지유는 목함 속에서 흑청색 잉크병과 하얀 손수건을 소중히 꺼내 품에 안았다.

 

차가운 유리병 너머로 재환의 뜨거운 심장 박동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서산 너머로 붉은 노을이 잦아들고, 짙은 남색 어스름이 남원의 하늘을 덮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동쪽 하늘 위로, 맑고 청아한 상현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광한루원.

 

7년 전 봄날, 흩날리는 벚꽃 잎 아래서 검은 옻칠 만년필을 떨어뜨렸던 소년과, 그 만년필을 주워 건네며 운명처럼 얽혀버렸던 소녀의 첫 만남의 장소.

 

지유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물을 닦아낸 그녀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맑고 깊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4. 황혼의 광한루원과 울려 퍼지는 발걸음

 

광한루원의 정문인 청허부(淸虛府) 앞에 다다랐을 때, 남원 시내에는 이미 푸른 어스름이 짙게 깔려 있었다.

 

시민들과 관광객들의 발길이 모두 끊긴 늦은 저녁의 누원은 장엄할 정도로 고요했다.

 

수령 수백 년 된 아름드리 팽나무 고목과 수양버들이 호수 주변에 거대한 침묵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고, 맑은 연못 수면 위에는 완월정과 영주각의 고풍스러운 처마 선이 거울처럼 투영되어 흔들렸다.

 

정문 매표소의 불은 꺼져 있었지만, 육중한 솟을대문은 안쪽으로 반쯤 열려 있었다.

 

문틈 사이로 은은한 호롱 불빛이 호숫가를 따라 길게 이어져 밤길을 밝히고 있었다.

 

지유는 가슴에 손을 얹고 숨을 고른 뒤, 조심스럽게 문턱을 넘어섰다.

 

자갈길을 밟는 지유의 단정한 발자국 소리가 고요한 누원의 정적을 사각사각 깨뜨렸다.

 

연못을 따라 춘향관 뒤란으로 이어진 오솔길 양옆에는 작은 한지 등롱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었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노란 등불들은 완월정을 지나, 연못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돌다리를 향해 곧게 이어져 있었다.

 

오작교(烏竹橋).

 

전설 속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단 한 번 만나 피눈물의 해후를 나눈다는 돌다리.

 

하지만 지유와 재환에게 오작교는 단순한 설화 속 다리가 아니었다.

 

7년 전, 서울로 강제 압송되기 직전의 열여덟 성재환이 학생증 모서리를 잘라 자신의 증명사진을 건네며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이라는 친필 서약을 새겨주었던 운명의 제단이었다.

 

지유는 한 걸음, 한 걸음 다리를 향해 걸어갔다.

 

가슴속에 품은 흑청색 잉크병과 하얀 손수건이 걸음마다 묵직한 안도감으로 와닿았다.

 

밤공기는 살갗을 에일 듯 서늘했지만, 지유의 온몸은 뜨거운 혈류로 가득 차올라 추위를 느낄 겨를이 없었다.

 

지난 2,500여 일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신림동 고시촌에서 광화문 우체국 소인을 찍어 보내왔던 첫 번째 관제엽서.

 

어머니의 주검이 누워 있던 영안실 앞을 가로막고 상속 포기를 강요하던 토건 조폭들의 비열한 웃음.

 

삼거리 김밥집을 짓밟으러 들이닥쳤던 세무서 특별조사반과 법원의 굴착기.

 

그리고 마침내 검사의 푸른 법복을 입고 돌아와 30년 토착 카르텔을 법으로 단죄하고, 다시 그 권력의 칼날마저 약자들을 위해 내려놓은 채 자신을 향해 돌아온 단 한 사람.

 

오작교 초입의 웅장한 석축에 발을 올렸을 때, 은은한 달빛 아래 우뚝 서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이 지유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5. 달빛 아래, 멈춰 선 시간

 

돌다리의 가장 높은 정점, 홍예교의 둥근 곡선 한가운데에 그가 서 있었다.

 

성재환.

 

평소 법률사무소에서 입던 편안한 셔츠나 소매를 걷어붙인 차림이 아니었다.

 

구김 하나 없이 단정하게 떨어지는 짙은 감색 정장에 눈부시게 하얀 드레스 셔츠, 그리고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은빛 실크 넥타이를 맨 완벽한 모습이었다.

 

단단하고 넓은 그의 어깨 너머로 늦가을 밤하늘의 맑은 달빛이 은빛 폭포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호수에서 불어온 서늘한 산들바람이 그의 이마를 덮은 단정한 머리칼을 부드럽게 흔들었다.

 

재환은 다리 아래 석축을 밟고 올라오는 지유의 조심스러운 발소리를 듣고, 천천히 몸을 돌렸다.

 

달빛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그의 깊고 그윽한 눈동자가 지유를 온전히 담아냈다.

 

그 눈동자에는 더 이상 취조실에서 거악을 쏘아보던 서슬 퍼런 살기나, 가문의 굴레에 짓눌려 고뇌하던 소년의 위태로운 슬픔 따위는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한 여자를 향한 끝없는 경외와 벅찬 사랑,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유일한 안식처에 도달한 자만이 품을 수 있는 지극한 평온함만이 가득 차 있었다.

 

지유는 다리 난간의 차가운 돌을 짚고 서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달빛 아래 선 재환의 모습이 아련한 수채화처럼 번져 보였다.

 

재환이 천천히, 한 걸음씩 지유를 향해 걸어 내려왔다.

 

화강암 돌다리를 울리는 그의 단단한 구두 굽 소리가, 쿵쾅거리는 지유의 심장 박동과 완벽하게 포개어졌다.

 

마침내 지유의 바로 한 걸음 앞에 멈춰 선 재환은, 떨리는 손을 들어 지유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훔쳐냈다.

 

거칠지만 따뜻한 그의 손가락 끝에서, 지유의 살갗을 어루만지는 조심스럽고도 애틋한 온기가 전해졌다.

 

"지유야."

 

재환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단단하게 떨리고 있었다.

 

"추억의 길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걸어와 주었구나."

 

지유는 가슴에 품고 있던 하얀 면 손수건과 흑청색 잉크병을 꼭 쥔 채,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구멍이 뜨겁게 메어와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재환은 지유가 품에 안고 온 손수건과 잉크병을 내려다보며, 붉어진 눈시울 속에서도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가 이 작은 손으로 지켜낸 온기들이, 결국 나를 살리고 남원을 살렸다."

 

재환의 오른손이 천천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정장 안주머니를 향해 움직였다.

 

그의 단정한 손가락이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꺼내어질 물건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천 년의 돌다리 위에서 완성될 두 사람의 마지막 문장이 무엇인지 직감한 순간, 지유의 숨결이 멎을 듯 가빠져 왔다.

 

달빛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눈부신 은빛 축복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