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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14화

비밀스러운 프러포즈 준비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늦가을 아침의 모의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로 스며드는 늦가을 아침 공기는 살갗을 파고들 만큼 제법 서늘했다.

 

새벽안개가 요천의 물안개와 뒤섞여 낮게 깔렸다가 서서히 흩어지는 길목, 처마 끝에 매달린 낡은 놋쇠 풍경이 마른 바람결에 맑고 청아한 쇳소리를 흔들어 깨웠다.

 

지유의 김밥집 맞은편, 낡은 2층 목조 건물 창가에 성재환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짙은 남색 모직 코트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그는 조금 열린 유리창 틈새로 피어오르는 찬 공기를 들이마시며 아래쪽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목공소 윤 씨가 지리산 육송을 대패로 깎아 걸어준 간판, '끝까지 남은 사랑'이라는 글귀가 아침 햇살을 받아 단정한 나뭇결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처마 아래에서 한지유가 긴 고무호스를 쥐고 가게 앞 돌바닥의 물청소를 막 끝내는 중이었다.

 

머리칼을 뒤로 단정하게 묶어 올리고 물방울이 튄 앞치마를 두른 모습, 찬물에 닿아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뺨과 코끝이 투명한 가을볕 속에서 그림처럼 도드라졌다.

 

허리를 펴며 가볍게 숨을 몰아쉬는 지유의 작은 어깨와 손끝을 눈에 담는 재환의 입가에 형언할 수 없이 깊고 다정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피와 눈물, 쇠파이프의 파열음과 거짓 조작 기사, 그리고 살얼음판 같았던 법정의 고함으로 얼룩졌던 지난 7년의 세월이었다.

 

백부의 각인 만년필에 흑청색 잉크를 채워 넣고 목숨을 건 사법의 칼날을 휘둘러 마침내 거악을 교도소 담장 안으로 몰아넣은 뒤에야 비로소 찾아온 아침이었다.

 

부친 성호석의 30년 원죄까지 법정에서 정면으로 마주하고 눈물로 씻어낸 끝에 되찾은 이 소박한 일상은, 세상 그 어떤 화려한 출세나 영광보다 눈부시고 벅찼다.

 

조용하던 나무 계단을 쿵쾅거리며 급하게 뛰어 올라오는 발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덜컹하는 소리와 함께 낡은 문이 벌컥 열렸다.

 

"어이, 성 변호사! 아침부터 무슨 넋을 그렇게 놓고 아래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어?"

 

목에 굵은 털실 머플러를 두르고 옆구리에 손때 묻은 두툼한 취재 수첩을 낀 최민재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성큼 들어섰다.

 

민재의 얼굴에는 며칠 전 아내 윤하은의 임신 소식을 들은 이후로 도무지 가실 줄 모르는 싱글벙글한 미소가 만면을 덮고 있었다.

 

재환이 창가에서 천천히 돌아서며 곧장 검지를 입술에 대어 보였다.

 

"목소리 좀 낮춰라, 민재야. 창문 조금 열어뒀다. 바로 아래에서 지유가 청소하고 있단 말이다."

 

민재는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까치발을 한 채 살금살금 창가로 다가왔다.

 

유리창 틈새로 고개를 삐죽 내민 민재가 속삭이듯 혀를 찼다.

 

"아이고, 우리 한 사장님 새벽부터 부지런도 하시네. 돌바닥을 아주 거울처럼 닦아놨구먼. 그래, 지유한테는 오늘 나랑 어디 간다고 둘러대 놨냐?"

 

"군청 지적과랑 남원지원 민사과에 들러서 서류 대조할 게 있다고 했다. 105인 농민들 토지 등기 원상회복 촉탁 정리 때문이라고 하니 아무 의심도 안 하더군."

 

"크으, 역시 검사 밥 먹던 놈이라 알리바이 하나는 칼같이 짜는구먼. 그래, 서울 혼자 몰래 올라가서 구해왔다는 그 물건은 어디 있냐? 구경이나 좀 시켜줘 봐라."

 

재환은 묵직한 평상형 원목 책상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책상 위에는 농민들의 승소 판결문과 지적도 등본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고, 그 가장자리 두툼한 법서 옆에 손바닥만 한 짙은 남색 벨벳 상자가 놓여 있었다.

 

재환이 상자를 조심스레 집어 들어 뚜껑을 열었다.

 

작은 경첩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창가로 스며든 가을 햇살 아래 은은하게 윤기를 뿜어내는 백금 반지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이 굵은 보석 따위로 사치스럽게 치장된 반지가 아니었다.

 

물결처럼 유려하고 단정한 곡선을 지닌 밴드형 반지였으며, 장식 하나 없이 매끄러운 표면은 지유가 평생을 지켜온 순결하고 단단한 심성을 그대로 닮아 있었다.

 

민재가 상자 가까이 고개를 들이밀며 감탄 섞인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야…… 이거 진짜 태가 기가 막히다. 번쩍거리지도 않으면서 어쩜 이렇게 속 깊은 빛이 나냐? 종로 귀금속 골목까지 기차 타고 혼자 올라가서 밤새 뒤져 맞췄다는 게 빈말이 아니었네."

 

"남원 시내 금은방들은 서로 빤히 아는 처지라 소문이 반나절도 안 돼서 다 퍼질 테니까. 지유 귀에 들어가면 안 되니 어쩔 수 없었지."

 

재환이 상자에서 반지를 살포시 꺼내 햇살에 비추어 보였다.

 

반지 안쪽 내경을 따라 지극히 미세하고 정교한 글씨가 음각으로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다.

 

라틴어로 적힌 'Mane nobiscum(우리와 함께 머무소서)'.

 

그리고 그 법언의 끝자리에는 지유의 흑청색 잉크 빛깔을 머금은 짙은 청색 안료로 '끝까지 남은 사람에게'라는 한글 여덟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민재가 그 글귀를 찬찬히 읽어 내리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재환의 어깨를 툭 쳤다.

 

"하여간 성재환 너다운 짓이다. '우리와 함께 머무소서'라니. 7년을 남원에 홀로 남겨두고 떠났던 놈이 이제는 평생 곁을 떠나지 않고 머물겠다고 아주 못을 박아버리는구나."

 

"두 번 다시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이니까."

 

"하긴, 그 고생을 시키고 그 모진 풍파를 홀로 견디게 했으니 이 정도 맹세는 박아 넣어야지. 하은이도 어제저녁에 네 계획 듣더니 침대 머리맡에서 코를 훌쩍이면서 무조건 성공시키라고, 조금이라도 어설프게 굴면 성 변호사 가만두지 말라고 난리를 치더라."

 

재환의 입가에 엷은 걱정이 어렸다.

 

"하은이 입덧은 좀 가라앉았나? 임신 초기인데 무리하면 안 될 텐데."

 

"말도 마라. 아침마다 헛구역질을 해대서 진이 다 빠지는데, 희한하게 지유가 매일 새벽에 끓여서 올려 보내주는 맑은 콩나물국에 밥 세 숟가락 말아 먹으면 속이 싹 가라앉는단다. 지유가 그 바쁜 와중에도 하은이 챙기느라 정성이 보통이 아니야. 그런 지유를 두고 만약 네가 길거리에서 흔해 빠진 꽃다발 하나 불쑥 내밀고 때우려 했어 봐라. 내가 먼저 널 멱살 잡고 요천에 처넣었을 거다."

 

재환은 반지를 다시 부드러운 벨벳 홈에 끼워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상자를 짙은 남색 코트 안주머니, 심장에 가장 가까운 안감 깊숙한 곳에 조심스레 찔러 넣었다.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가만히 누르는 그의 눈빛은, 과거 법정에서 거악 강태석을 향해 서슬 퍼런 12개 죄목을 낭독하던 그 어느 순간보다 진지하고 엄숙했다.

 

"단순히 꽃을 주고 반지를 건네는 요식행위로 끝낼 수는 없어, 민재야. 지유와 내가 함께 걸어온 지난 시간들…… 그 애가 차가운 빗속에서, 흙먼지 날리는 아스팔트 위에서, 테러당한 김밥집 깨진 유리창 앞에서 홀로 울며 버텼던 상처의 자리마다 온전하고 따뜻한 기억을 새로 덮어주고 싶다. 그 길목마다 이제는 우리가 함께 웃을 수 있도록."

 

민재는 장난기 어린 표정을 천천히 거두고 친구의 진중한 얼굴을 응시했다.

 

열여덟 살에 피눈물을 흘리며 헤어져 서울과 남원에서 각자의 지옥을 건너온 두 사람이었다.

 

재환이 품은 그 마음의 무게가 얼마나 깊고 무거운지, 옆에서 그 모든 피비린내 나는 과정을 함께 취재하고 싸워온 민재로서는 누구보다 뼈저리게 이해할 수 있었다.

 

"좋아. 네가 머릿속으로 수없이 그렸다는 그 3단계 동선, 오늘 나랑 한 걸음 한 걸음 다 밟아보자. 지유 걸음걸이 속도부터 시작해서 해 질 무렵 빛이 떨어지는 각도까지 내가 기자 감각으로 완벽하게 맞춰줄 테니까."

 

2. 요천 둑길의 자전거와 노을

 

두 사람은 2층 사무실을 나와 발소리를 죽이며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내려왔다.

 

김밥집 정문 앞을 피해 골목 뒤편의 좁은 샛길로 돌아 나온 그들은 남원 시내를 완만하게 가로지르는 요천 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골목을 벗어나 제방 위로 올라서자, 늦가을의 차가운 강바람이 옷깃을 파고들며 둑길을 따라 길게 늘어선 벚나무들의 마른 잎을 우수수 흔들어 떨어뜨렸다.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 요천의 은빛 수면은 가을 햇살을 받아 잔잔한 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불과 몇 달 전, 강태석 카르텔과 결탁한 건설업자들이 공사비 40억을 빼돌리며 저질 잡석과 규격 미달 철근으로 날림 시공해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던 제1공구 제방 옹벽은 이제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성재환이 남원지청에 부임하자마자 철저한 현장 감식과 사법적 강제 처분을 통해 전면 재시공을 명령했던 구간이었다.

 

단단하게 다져진 화강암 석축이 수면 깊숙이 박혀 있었고, 강변 둔치에는 흙탕물에 쓸려갔던 풀밭 대신 가지런한 잔디와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었다.

 

재환과 민재는 제방길 중간쯤, 수양버들 가지가 강물 쪽으로 부드럽게 늘어진 낡은 나무 벤치 앞에 멈춰 섰다.

 

"기억나냐, 재환아? 열여덟 살 봄에 너 서울에서 전학 내려와서 교복 단추 단정하게 잠그고 여기서 자전거 타던 거."

 

민재가 제방 난간에 두 팔을 얹고 강물을 내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때 지유가 학교 끝나고 김밥 배달하러 가다 말고 요 둑길 풀밭에 쭈그리고 앉아서 작은 스케치북에 연필로 네 뒷모습이랑 저 건너편 팽나무를 그렇게 몰래 그렸었잖아. 너는 또 그걸 모르는 척하면서 자전거 뒤에 지유 태우고 이 둑길을 바람처럼 내달렸고."

 

재환은 시선을 멀리 요천의 은빛 물결과 그 너머 지리산 자락의 능선에 두었다.

 

눈을 감으면 그 시절의 푸르스름한 봄 노을과, 자전거 은빛 바큇살이 바람을 가르며 내던 청명한 쇠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자전거 뒤에 매달린 지유의 교복 치맛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며 풍기던 순수한 비누 냄새, 그리고 그의 교복 허리춤을 조심스레 쥐고 있던 떨리던 손가락의 감촉까지 생생했다.

 

"그때 지유가 그렸던 자전거 스케치는…… 내가 통일호 기차에 실려 서울로 압송당할 때 교복 안주머니에 품고 갔었다."

 

재환의 나지막한 음성이 강바람 속에 낮게 가라앉았다.

 

"신림동 9동 고시촌 세 평짜리 단칸방, 곰팡내 나는 벽면에 그 낡은 스케치 조각을 붉은 압정으로 꽂아두었지. 새벽 두 시, 세 시까지 형법 판례를 외우다 코피가 터지고 머리가 깨질 것 같을 때마다, 불을 끄고 누워 그 연필 선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버텼다. 내가 이 시험을 반드시 부수고 남원으로 돌아가야만 저 그림 속 소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매일 밤 그렇게 다짐하면서."

 

민재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림 한 장, 엽서 한 장으로 7년을 버텨낸 놈들이지, 너희 둘 다. 지유도 어머니 병간호에 가게 일에 시달리면서 밤마다 네 생각에 편지 쓰던 그 양철 상자가 한가득이더만."

 

"지유에게 첫 번째 단서를 건넬 장소는 바로 여기여야 해."

 

재환이 코트 주머니에서 백부의 각인 만년필로 정갈하게 글씨를 써 내려간 짙은 미색 편지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 겉면에는 단정한 필체로 '처음 바람이 머물렀던 길'이라고 적혀 있었다.

 

"민재야. 내일 오후 네 시 반이 되면 네가 지유한테 전화를 걸어라. 군청 지적과에서 급하게 넘어온 서류 봉투가 있는데 취재 일정이 꼬여서 못 가니, 요천 둑길 벤치 위에 놓아둔 봉투를 좀 챙겨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오호, 심부름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여기까지 걸어 나오게 만든다 이거지? 지유가 의심 없이 여기 오면 벤치 위에 이 봉투가 놓여 있을 테고."

 

"그래. 봉투 안에는 고등학교 시절 지유가 내게 건넸던 그 자전거 스케치를 정밀하게 복사한 종이, 그리고 다음 장소로 향하는 글귀가 들어 있다."

 

민재가 손바닥으로 난간을 가볍게 치며 씩 웃었다.

 

"기가 막힌다. 지유가 그 봉투를 열어보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겠네. 자기가 열여덟 살에 그렸던 그림이 7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눈앞에 불쑥 나타날 테니까."

 

두 사람은 벤치 주변을 서성이며 걸음 수와 시간을 치밀하게 계산했다.

 

김밥집 문을 열고 나와 골목을 지나 요천 둑길 벤치까지 보통 걸음으로 정확히 7분.

 

해가 서쪽 산자락으로 뉘엿뉘엿 넘어가며 강물 위에 붉은 노을빛이 부서져 내리는 시간대는 정확히 오후 4시 40분에서 5시 사이였다.

 

지유가 둑길에 도착해 강바람을 맞으며 봉투를 열어볼 그 무렵, 온 세상은 가장 애틋하고 따스한 황금빛으로 물들어 있을 터였다.

 

그 시절, 지유가 스케치북에 담았던 바로 그 노을빛 그대로.

 

3. 빗물 젖은 처마 밑의 온기

 

요천 둑길의 바람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남원 구도심의 오래된 골목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섰다.

 

울퉁불퉁한 흙길과 금이 간 시멘트 담벽, 녹슨 철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이곳은 수십 년 전 남원의 시간이 고스란히 멈추어 선 듯한 구역이었다.

 

골목 모퉁이를 돌자, 오래전에 문을 닫은 낡은 양조장 건물 옆에 기와 처마가 유난히 깊게 드리워진 흙벽 빈집 하나가 나타났다.

 

비바람에 씻겨 회색빛으로 바랜 기와지붕 아래로는 성인 두어 명이 비를 피하기에 족한 좁은 처마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밑에는 길쭉하고 반질반질한 디딤돌 하나가 묵직하게 놓여 있었다.

 

재환이 디딤돌 앞에 걸음을 멈추고 우두커니 서서 처마 끝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에 깃든 감회는 요천 둑길의 바람보다 한층 더 짙고 아릿했다.

 

"여길 어떻게 잊겠냐."

 

재환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해 여름,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것처럼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어. 아버지가 내무부로 영전하면서 나를 서울로 강제 전학시키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비를 맞으며 무작정 뛰쳐나왔지. 온몸이 물에 젖어 정신없이 헤매고 있는데, 지유가 우산도 없이 단발머리가 흠뻑 젖은 채 나를 뒤쫓아왔다."

 

민재가 팔짱을 낀 채 골목길 바닥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난다. 그때 지유가 너 손목을 붙잡고 이 처마 밑으로 거의 끌어당기다시피 데려왔었지. 둘 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해가지고는."

 

"그때 지유가 앞치마 주머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냈어. 빗물에 젖은 내 얼굴이랑 이마, 머리칼을 떨리는 손으로 정성스럽게 닦아주더군.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떨어져 진흙탕에 구를 뻔했던 내 백부의 각인 만년필을 주워, 그 젖은 손수건으로 정갈하게 싸서 내 손에 꼭 쥐여줬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는 글자가 새겨진 그 펜을."

 

재환이 코트 안주머니에서 두 번째 편지 봉투를 꺼내 가만히 쓸어내렸다.

 

봉투 겉면에는 흑청색 잉크로 '폭우 속에서도 식지 않던 온기'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그날 이 처마 밑에서 지유가 건네준 그 하얀 손수건의 온기가 없었다면, 나는 서울 신림동의 그 삭막한 고시원 독서실에서 진작에 스스로 무너져 내렸을 거다. 내 아버지가, 내 가문이 지유네 과수원을 강탈하고 그 집안을 파멸로 몰아넣었다는 참혹한 진실을 문서로 확인했을 때…… 세상 모든 것이 역겹고 내 핏줄이 저주스러워 펜을 꺾어버리고 싶었을 때도 나를 붙들어준 건 오직 이 처마 밑에서 지유가 내 얼굴을 닦아주던 그 손길의 온기였어."

 

민재는 가슴 한구석이 아릿하게 저려오는 것을 느끼며 재환의 어깨를 묵묵히 다독였다.

 

성재환이라는 인간은 법정에서는 그 어떤 외압이나 협박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서슬 퍼런 칼날이었지만, 한지유라는 이름 앞에서는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상처 입기 쉬운 소년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래서 여긴 어떻게 할 생각인데?"

 

"요천 둑길에서 첫 번째 스케치를 확인한 지유는 글귀를 보고 곧장 이 처마 밑으로 달려오게 될 거야. 여기 디딤돌 위에는…… 지유가 내게 건넸던 그 하얀 손수건, 그리고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용돈을 모아 내게 사주었던 그 단정한 유리병 흑청색 잉크를 놓아둘 거다."

 

"그 손수건…… 네가 서울 올라갈 때 지유가 네 주머니에 다시 찔러 넣어줬던 그 손수건 말이냐?"

 

"그래. 내가 사법시험 1차를 치르고, 2차 논술을 쓰고, 연수원을 거쳐 특수부 검사가 되어 남원으로 돌아올 때까지…… 단 하루도 내 가슴팍 안주머니에서 떼어놓지 않았던 바로 그 손수건이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내 눈물을 닦아주었던 손수건이지."

 

민재가 깊은 숨을 내쉬며 헛기침을 삼켰다.

 

"지유가 이 처마 밑에 와서 그 손수건이랑 잉크병을 보면…… 아마 주저앉아서 눈물을 쏟겠구나. 자기가 건넸던 그 작디작은 온기가 7년 동안 어떻게 널 살리고 지켜냈는지 단박에 깨달을 테니까."

 

"그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닐 거다. 우리가 그 모진 비바람을 끝내 견뎌내고, 마침내 서로의 온기 속으로 온전히 돌아왔다는 확인이어야 해."

 

재환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디딤돌 표면에 쌓인 마른 흙먼지와 낙엽 부스러기들을 정성스럽게 닦아냈다.

 

지유가 달려와 멈춰 서서 물건을 집어 올릴 자리였다.

 

돌 표면이 차가운 햇살 아래 말끔하게 결을 드러낼 때까지, 재환은 몇 번이고 손을 놀려 주변을 정돈했다.

 

사랑하는 이를 맞이하는 사내의 손길에는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4. 광한루원, 맹세의 오작교

 

골목길의 처마 밑을 벗어난 두 사람의 발걸음은 남원의 심장이자 상징인 광한루원(廣寒樓苑)을 향했다.

 

수백 년 된 고목들과 기와 누각들이 요천의 물길을 끌어들인 연못을 둘러싸고 있는 유서 깊은 누원이었다.

 

춘향과 몽룡의 설화가 깃든 곳이자, 벚꽃이 눈처럼 날리던 열여덟의 봄날 재환과 지유가 처음으로 시선을 마주치고 비밀스러운 교감을 나누었던 운명의 무대.

 

정문을 지나 정원에 들어서자, 만추의 정취가 완연한 붉은 단풍나무와 황금빛 은행나무 잎들이 고요한 수면 위로 쉼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연못 저편 완월정의 날렵한 처마 곡선이 잔잔한 물그림자로 비쳐 들었고, 수령 수백 년을 헤아리는 거대한 팽나무 고목은 장엄한 가지를 뻗어 연못가를 호위하듯 묵묵히 서 있었다.

 

그리고 연못의 수면을 가로지르는 육중한 화강암 돌다리, 오작교(烏竹橋).

 

다리 위에 올라선 재환은 난간석의 거칠고 단단한 표면을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7년 전, 남원 시장 관사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도망쳐 나와 서울행 통일호 기차에 오르기 직전의 기억이 돌난간 틈새마다 서려 있었다.

 

아버지 성호석의 수행원들에게 양팔을 붙들려 끌려가던 순간, 무릎이 깨져 피를 흘리며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왔던 열여덟의 한지유.

 

그 피투성이 무릎으로 오작교 위로 뛰어올라왔던 지유를 향해, 재환은 품에서 학생증 모서리를 잘라 건넸었다.

 

지유가 선물했던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로 뒷면에 꾹꾹 눌러썼던 서약.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그 약속의 증명사진은 지유가 7년간 삼거리 김밥집 단칸방에서 가슴에 품고 살았고, 강태석 일파에게 납치당하던 절체절명의 순간 깨진 액자 속에서 지유의 선혈로 붉게 물들었던 영혼의 징표였다.

 

재환이 그 피 묻은 사진을 되찾아 품에 안고 밤재 터널을 시속 140km로 질주했던 그 밤의 전율이 여전히 심장 밑바닥을 서늘하게 울렸다.

 

"민재야."

 

오작교 한가운데, 돌난간이 가장 완만하게 휘어진 자리에 선 재환이 나지막이 불렀다.

 

"듣고 있다, 재환아."

 

"처마 밑에서 손수건과 잉크병을 확인한 지유가 마지막으로 숨을 헐떡이며 달려올 곳이 바로 여기 오작교다. 그때쯤이면 사방에 어스름이 깔리고, 광한루원 정원에는 밤의 침묵이 내려앉겠지."

 

민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완월정과 팽나무 주변의 가로등, 그리고 연못가를 비추는 조명 시설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 시간대면 일반 관람객들은 다 빠져나갈 시간이야. 관리사무소 조명 담당 계장님한테는 내가 미리 손을 써둘게. 남원일보에서 광한루원 야경 특집 기사 사진 찍는다고 둘러대고, 오작교 쪽으로 은은한 주황색 조명이 가장 아늑하게 떨어지도록 타이머를 딱 맞춰놓으마."

 

민재가 취재 수첩에 분 단위로 일정을 기록하며 말을 이었다.

 

"요천 둑길에서 바람을 마주하고 첫 설렘을 되살린 뒤, 골목길 처마 밑에서 서로의 상처를 닦아주던 온기를 확인하고, 마지막으로 이 오작교 위로 올라와 7년의 약속이 완성되는 거다. 이건 단순한 이벤트가 아니야. 너희 둘이 피 흘리며 써 내려온 7년의 고통스러운 문장 끝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이야기의 첫 줄을 여는 거지."

 

"그래. 약속의 마지막 문장."

 

재환이 코트 안주머니로 손을 넣어 벨벳 상자 속 반지의 윤곽을 지그시 매만졌다.

 

서늘한 금속의 형태 너머로,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뜨겁고 묵직한 맥박이 손가락을 타고 전해져 왔다.

 

그는 더 이상 가문의 죄악에 짓눌려 서울로 유폐되듯 끌려가던 무력한 소년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거악을 베어 넘기기 위해 스스로 얼음장 같은 칼날이 되었던 고독한 특수부 검사도 아니었다.

 

남원의 흙 묻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억울한 약자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공익 변호사이자, 한 여자를 온 생을 다해 섬기고 지켜내기로 맹세한 온전한 한 사내였다.

 

5. 약속의 종착점을 향하여

 

오작교 난간의 조명 각도와 발걸음 동선 점검을 마친 두 사람은 광한루원 후문을 빠져나와 춘향관 뒤란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며 부서지는 마른 낙엽 소리가 늦가을 한낮의 고요를 조용히 채웠다.

 

가을바람이 제법 쌀쌀해졌지만, 두 사람의 얼굴에는 기분 좋은 긴장감과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민재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씩 웃으며 슬쩍 팔꿈치로 재환의 옆구리를 찔렀다.

 

"그런데 재환아, 지유가 정말 눈치 하나도 못 채고 있을까? 한 사장이 워낙 눈치가 백 단이고 촉이 귀신같은 아이잖아. 네가 어제오늘 그렇게 넋 나간 놈처럼 서성거리고 종로까지 다녀왔는데, 설마 아무 낌새도 못 챘을까?"

 

재환이 엷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를 거다. 요즘 지유는 머릿속에 온통 하은이 생각뿐이야. 매일 새벽같이 방앗간 들러서 좋은 쌀 빻아다 죽 쑤고, 입덧에 좋다는 과일 구해 나르느라 정신이 없거든. 게다가 이번에 승소한 105인 농민들이 고맙다고 가져다준 햅쌀이며 배추며 무를 골목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느라 하루 스물네 시간이 모자란 지경이다. 내가 어제 종로 다녀온 것도 서울고검 권진태 사건 공판 기록 최종 정리하러 대검 파견 검사실 다녀온다고 철저하게 공문서 위장까지 했으니까."

 

민재가 혀를 끌끌 차며 감탄했다.

 

"하여간 무서운 놈이라니까. 대검 특수부에서 기업 비자금 장부 털고 피의자들 알리바이 깨부수던 그 살벌한 수사 기법을 자기 마누라 될 사람 프러포즈 비밀 작전에 써먹고 자빠졌으니. 법무부 놈들이 알면 관 뚜껑 열고 튀어나오겠구먼."

 

두 사람은 마주 보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 시원한 웃음소리 속에는 7년간 가슴을 짓누르던 피비린내와 절망을 마침내 완전히 털어내고, 평범한 청춘의 장난과 행복으로 돌아온 이들의 깊은 해방감이 묻어 있었다.

 

어느덧 태양이 중천에 걸리며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남원 시내 저편에서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이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로 돌아왔을 때, 골목길은 점심거리 김밥을 사러 나온 이웃 주민들과 인근 직장인들로 활기차게 붐비고 있었다.

 

"어머나, 성 변호사님! 최 기자님이랑 오전 나절에 나갔다 오신다더니 이제 오시오?"

 

공설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가 고소한 통깨 볶는 냄새를 풍기며 김밥집 앞 평상에 걸터앉아 있다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네, 배 씨 아주머니. 군청이랑 법원 쪽 행정 서류 정리가 생각보다 매끄럽게 끝나서 막 들어오는 길입니다."

 

재환이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김밥집 통유리창 너머, 참기름 냄새가 고소하게 진동하는 조리대 앞에서 바쁘게 칼을 놀리던 지유가 인기척을 느끼고 번쩍 고개를 들었다.

 

가을 햇살이 유리를 통과해 지유의 맑은 이마와 단정한 콧날 위에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드럽게 얽혔다.

 

지유의 까만 눈동자 속에는 그 어떤 의심도, 그 어떤 불안도 없었다.

 

오직 세상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깊고 온전한 신뢰, 그리고 재환을 바라볼 때마다 피어나는 순수한 다정함만이 가득 차 있었다.

 

지유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조리대 앞 유리문을 활짝 열었다.

 

"재환 씨, 민재야! 마침 밥 새로 뜸 들이고 방금 국 새로 끓였는데 딱 맞춰 왔네. 오전에 찬 바람 쐬고 돌아다녀서 배고프지? 얼른 들어와서 점심부터 먹어."

 

재환은 코트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 자리한 벨벳 상자를 손끝으로 다시 한번 지그시 눌렀다.

 

차가운 백금 반지가 전해오는 무게감 뒤편으로,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내일 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저 투명하고 아름다운 여자의 네 번째 손가락에는 평생 벗겨지지 않을 약속의 반지가 끼워져 있을 것이다.

 

'Mane nobiscum.' 우리와 함께 머무소서.

 

끝까지 남은 사람에게 바치는,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삶의 맹세.

 

오랜 세월을 돌고 돌아 마침내 도달한 약속의 종착점을 눈앞에 둔 채, 재환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김밥집 문지방을 천천히 넘어섰다.

 

"그래, 지유야. 배고팠는데 정말 잘됐다."

 

가게 안을 가득 채운 따스한 밥 냄새와 지유의 다정한 온기가, 내일 밤 오작교 위에서 펼쳐질 기적 같은 순간을 조용하고도 찬란하게 예고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