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재와 하은의 아이
1. 늦가을 아침의 온기
지리산 줄기를 타고 내려온 맑고 서늘한 바람이 남원 시가지의 골목마다 내려앉는 늦가을 아침이었다.
동문 우체국 뒷골목 어귀에는 이른 시간부터 구수한 밥 짓는 냄새와 달착지근한 참기름 내음이 잔잔하게 번져 나갔다.
삼거리 김밥집의 목조 미닫이문 너머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다란 양은 솥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앞에서는 한지유가 단정한 앞치마를 두른 채 갓 지어낸 햅쌀밥을 큰 양푼에 퍼 담고 있었다.
소금 한 꼬집과 볶은 참깨, 그리고 공설 방앗간에서 갓 짜온 진갈색 참기름을 두르자 고소한 향미가 좁은 주방 안을 가득 메웠다.
유리창 너머 맞은편 2층 목조 건물 창가에는 단정한 흰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성재환이 서 있었다.
재환은 막 등기소로 발송할 농민 105인의 토지 소유권 이전 등기 말소 및 원상회복 촉탁 신청서의 마지막 장에 도장을 찍고 있었다.
책상 한구석에는 여전히 은은한 광택을 뽐내는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과 지유가 선물했던 유리 잉크병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서류 정리를 마친 재환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보자, 김밥집 조리대 앞에서 허리를 펴던 지유와 시선이 마주쳤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주 보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피비린내 나는 폭압과 테러, 숨 막히는 법정 공방 속에서 7년을 버텨낸 끝에 찾아온 기적 같은 평화였다.
권력의 탐욕에 짓밟혔던 요천 변 논밭들이 본래의 주인인 농민들에게 온전히 되돌아갔고, 가문을 옥죄던 원죄의 사슬마저 완전히 끊어졌다.
재환은 결재 서류철을 정갈하게 덮어 책상 한편에 밀어둔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왔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딛고 내려와 골목을 건너자, 김밥집 처마 끝에 매달린 놋쇠 풍경이 가을바람에 흔들리며 청아한 소리를 냈다.
"재환아, 서류 정리는 다 끝났어?"
지유가 밥주걱을 내려놓으며 다정한 눈빛으로 그를 맞이했다.
"응. 방금 105분 농민 어르신들의 등기 촉탁 서류 검토를 다 마쳤어. 오늘 오후에 남원지원 등기과에 직접 접수만 하면 돼. 이제 정말로 어르신들의 땅이 온전히 돌아가는 거야."
재환은 지유의 곁으로 다가가 조리대 옆 작은 나무의자에 걸터앉았다.
지유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보며, 재환은 자연스럽게 주머니에서 정갈한 손수건을 꺼내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살결에 닿는 온기에 지유의 뺨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고생 많았어. 며칠 밤을 꼬박 새우면서 서류 수백 장을 일일이 검토하느라 눈도 제대로 못 붙였잖아."
"네가 싸준 김밥이랑 끓여준 보리차가 있었는데 고생은 무슨. 오히려 그 서류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가슴이 벅차오르더라. 법이 사람을 살리고, 억울한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는 걸 매 순간 실감했으니까."
재환의 나지막한 목소리에는 깊은 자부심과 맑은 평안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더 이상 가문의 죄악에 짓눌려 고통스러워하던 소년도, 서슬 퍼런 칼날만을 갈던 고독한 특수부 검사도 아니었다.
남원의 소외된 민초들을 위해 제 자리를 찾은 참된 법률가의 얼굴이었다.
지유는 말없이 갓 말아낸 김밥 한 줄을 칼로 정갈하게 썰어 작은 접시에 담아 내밀었다.
"일단 이것부터 먹어. 아침도 거르고 내려왔지?"
"고마워, 지유야."
재환이 김밥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는 순간, 골목 입구 저편에서 요란한 자전거 벨 소리와 함께 숨 가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성 변호사! 지유야! 안에 있냐!"
2. 기별을 품고 달려온 발걸음
목소리의 주인공은 남원일보 사회부 정식 기자가 된 최민재였다.
낡은 자전거 페달을 거칠게 밟으며 골목길을 미끄러져 들어온 민재는 김밥집 앞에 자전거를 거의 내던지듯 세웠다.
그의 얼굴은 늦가을 찬 바람 속에서도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민재야, 아침부터 무슨 일인데 그렇게 숨이 턱에 닿도록 달려와? 신문사에 또 무슨 급한 특종이라도 터진 거야?"
지유가 놀란 표정으로 물 한 컵을 따라 건네며 물었다.
민재는 단숨에 찬물을 들이켜고는 손등으로 입가를 거칠게 훔쳤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긴박한 사건 사고를 쫓을 때의 날카로움이 아니었다.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환희와 감격이 뒤섞여 당장이라도 춤이라도 출 것 같은 표정이었다.
"특종? 하, 특종이지! 남원일보 1면 톱기사 백 번을 써도 이것보다 큰 특종은 세상에 없을 거다!"
민재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팡팡 쳤다.
재환이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봐. 그래, 이번엔 중앙지에서 우리 105인 농민 승소 판결을 어떻게 대서특필했길래 그래? 아니면 또 다른 비리 제보라도 들어온 거야?"
"아니, 법률 소송이고 나발이고 그딴 게 아니라니까! 야, 성재환! 한지유! 너희 둘 다 똑똑히 들어라!"
민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이내 골목길 저편을 돌아보며 안달이 난 듯 발을 굴렀다.
"하은이가…… 우리 하은이가 말이야!"
"하은이가 왜? 어디 아파? 몸이라도 안 좋은 거야?"
지유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듯 조리대 앞으로 바짝 다가서며 다급하게 물었다.
지난 몇 달간 강태석 카르텔의 폭압에 맞서 싸우고 김밥집을 지키느라 하은 역시 온갖 궂은일을 도맡으며 몸을 아끼지 않았던 탓이었다.
민재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아프긴 왜 아파! 아니,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다가 갑자기 헛구역질을 심하게 하길래 깜짝 놀라서 내가 남원의료원으로 들쳐업고 뛰었거든?"
"의료원에? 그래서 의사 선생님이 뭐라시는데?"
재환도 김밥을 내려놓으며 진지한 눈빛으로 민재를 응시했다.
민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마침내 양팔을 번쩍 치켜들며 골목이 떠나갈 듯 고함을 질렀다.
"임신이란다! 우리 하은이가…… 임신 6주 차래! 나 이제 아빠 된다, 이 자식들아!"
순간 삼거리 김밥집 앞마당에 정적이 흘렀다.
바람에 흔들리던 풍경 소리만이 맑게 울려 퍼지는 찰나, 지유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더니 이내 맑은 눈물이 차올랐다.
"정말이야? 하은이가…… 하은이가 임신을 했다고?"
"그래! 의사 선생님이 아기집이 아주 단단하고 건강하게 자리 잡았다고 직접 확인해 줬어! 6주래, 딱 6주!"
민재의 목소리가 벅찬 감격에 잠겨 울컥 갈라졌다.
재환의 입가에도 경이로운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민재의 어깨를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민재야……! 세상에, 축하한다! 진짜 축하해, 친구야!"
"재환아…… 나 진짜 아빠 되는 거 맞지? 꿈 아니지? 아까 병원에서 나오는데 다리에 힘이 다 풀려서 주저앉을 뻔했다니까!"
민재는 재환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뜨릴 뻔한 얼굴로 웃어댔다.
골목길 건너편 목공소에서 대패질을 하던 윤 씨가 연장을 든 채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아니, 최 기자가 방금 뭐라고 외친 거여? 하은 새댁이 아기를 가졌다고?!"
우체국 창구에서 우편물을 분류하던 집배원 박 씨와 골목 어귀 공설 방앗간의 배 씨 아주머니도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달려왔다.
"아이고, 세상에! 최 기자, 그게 참말이여? 경사 났네, 경사 났어!"
"남원에 드디어 새 생명이 찾아왔구먼! 아이고 하은 새댁 복도 많지!"
순식간에 삼거리 김밥집 앞은 온 동네 이웃들의 환호와 축하의 말로 떠들썩해졌다.
지난 수년간 최루탄 냄새와 쇠파이프 테러, 불법 강제 철거의 위협으로 얼룩졌던 이 어두운 골목에, 마침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알리는 거룩한 축복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3. 새 생명이 가져온 눈물
이웃들의 축하 인사가 한바탕 쏟아지고 난 뒤, 골목 어귀에서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도톰한 겨자색 카디건을 여미고 머플러를 두른 윤하은이 쑥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남원의료원 산부인과에서 받아온 하얀 봉투가 소중하게 쥐여 있었다.
"하은아!"
지유는 앞치마를 벗어 던질 새도 없이 단숨에 달려가 하은의 두 손을 덥석 맞잡았다.
하은의 창백하지만 화사하게 빛나는 얼굴을 마주한 지유의 눈에서 끝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은아…… 정말이지? 정말로 우리 하은이한테 천사가 온 거지?"
하은도 지유의 손을 꼭 쥐며 눈시울을 붉혔다.
"응, 지유야. 아침에 속이 너무 메스껍고 어지러워서 그저 몸살인 줄만 알았는데…… 병원에 가보니까 우리 아이가 찾아왔대."
지유는 조심스럽게 하은의 품을 안았다.
혹여 배 속에 자리 잡은 여린 생명에게 작은 충격이라도 갈까 봐, 깃털을 감싸 안듯 조심스럽고도 깊은 포옹이었다.
지유의 어깨가 들썩이며 참아왔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어머니 박순례가 남원의료원 차가운 중환자실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쇠파이프를 든 조폭들이 가게를 때려부수며 칼을 들이밀었을 때, 하은은 늘 지유의 곁에서 함께 피눈물을 흘려주던 피붙이보다 더 가까운 벗이었다.
그 고통의 계절을 온몸으로 버텨낸 끝에, 바로 그 친구의 품 안에 새로운 생명의 숨결이 깃들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뭉클하게 적셨다.
"정말 다행이야…… 정말 너무 고마워, 하은아…… 네가 건강해서, 우리 곁에 이렇게 기쁜 소식을 들려줘서……"
하은도 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눈물을 글썽였다.
"지유야, 네가 김밥집을 지켜내고, 재환이가 남원의 불의를 바로잡아줬기 때문에 우리 아이가 이렇게 평화로운 남원에서 태어날 수 있게 된 거야. 난 정말 그게 제일 감사해."
재환도 다가와 하은에게 깊은 축하의 고개를 숙였다.
"하은아, 진심으로 축하해. 민재가 아까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는데 바퀴가 공중에 떠 있는 줄 알았어."
그 말에 민재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하은의 곁으로 다가와 허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내가 언제 그랬다고 그래! 난 침착하게 운전해서 왔구먼."
"침착하긴 뭐가 침착해! 자전거를 패대기치듯 던져두고 온 동네가 떠나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면서."
하은이 눈을 흘기며 핀잔을 주자, 모여 있던 윤 씨와 배 씨 아주머니가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최 기자 심정이 오죽했겠어! 첫 아이를 가졌는디 눈에 뵈는 게 있었겄어?"
목공소 윤 씨가 껄껄 웃으며 헛기침을 했다.
"어이, 최 기자! 내 당장 지리산 편백나무 최고급으로 골라다가 아기 침대부터 짜줄 테니께 그리 알어! 남원 바닥에서 제일 튼튼하고 향 좋은 침대로 맹글어 줄 텡게!"
"어르신, 진짜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공설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도 지지 않고 거들었다.
"임산부한테는 들깨랑 찹쌀이 최고여! 내 오늘 방앗간에서 제일 곱게 빻은 찹쌀가루랑 갓 짠 참기름 한 말 딱 챙겨서 하은 새댁 줄 테니께, 매일 아침마다 고소하게 죽 끓여 먹여! 알겄지?"
"배 씨 아주머니, 저 정말 괜찮은데요……"
하은이 몸 둘 바를 몰라 하자, 지유가 하은의 손을 꼭 쥐며 웃었다.
"하은아, 이웃분들이 주시는 정성이야. 감사히 다 받아. 넌 이제 남원에서 제일 귀한 몸이니까."
온 골목이 따스한 온정과 웃음으로 물결쳤다.
가장 낮고 힘겨운 자리에서 서로의 손을 놓지 않았던 남원의 민초들이었기에, 이 작은 생명의 잉태는 어느 한 가정의 경사를 넘어 골목 전체의 승리이자 희망의 결실이었다.
4. 네 사람의 아지트
이웃들의 축하가 한바탕 지나가고 난 뒤, 네 사람은 김밥집 문을 반쯤 닫고 안쪽 평상으로 모여 앉았다.
가게 안은 가을 햇살이 통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포근한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지유는 조리대로 가 멸치와 다시마를 진하게 우려낸 육수에 표고버섯과 애호박을 듬뿍 넣고 맑은 온면을 끓여냈다.
거기에 하은을 위해 간을 심심하게 맞추고 달걀지단을 곱게 얹은 특별한 소면 한 대접을 정성스럽게 차려냈다.
따뜻한 김밥도 참기름 냄새를 풍기며 접시 가득 놓였다.
"하은아, 속 메스꺼울 때는 기름진 것보다 이런 따뜻하고 맑은 국물이 좋을 거야. 천천히 조금씩 먹어봐."
지유가 숟가락을 쥐여주며 살뜰히 챙겼다.
하은은 김이 피어오르는 국물을 한 모금 넘기더니, 이내 편안해진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지유 네 음식은 정말 마법 같아. 속이 확 풀리면서 편안해져."
"다행이다. 앞으로 입덧 심해지면 참지 말고 언제든 말해. 내가 먹고 싶은 거 다 만들어 줄게."
민재는 옆에서 면을 후루룩 들이켜며 연신 하은의 눈치를 살폈다.
"여보, 국물 더 줄까? 김밥에 단무지 빼줄까? 의사 선생님이 찬 거 먹지 말랬는데, 물도 데워다 줄까?"
안절부절못하며 호들갑을 떠는 민재의 모습에 재환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민재야, 하은이 숨 막히겠다. 좀 진정하고 앉아서 밥이나 먹어."
"야, 성재환. 너도 나중에 지유 임신해 봐라. 내가 유난 떠는 건지 아닌지 그때 가서 똑같이 물어볼 테니까!"
민재의 돌직구 같은 한마디에, 국물을 따르던 지유의 손이 멈칫하며 뺨이 새빨개졌다.
재환 역시 들고 있던 젓가락을 허공에 멈춘 채 헛기침을 연거푸 내뱉었다.
"크흠…… 쓸데없는 소리 말고 국수나 불기 전에 먹어."
재환의 귀밑까지 붉어진 모습을 보며 하은과 민재가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지난 7년 동안 차가운 법전과 피비린내 나는 수사 기록만을 마주하며 살았던 서슬 퍼런 검사 성재환을 이렇게 무장해제 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지유와 이 오랜 친구들뿐이었다.
하은이 배를 가만히 어루만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까 병원에서 초음파 화면을 보는데…… 콩알보다 더 작은 점 하나가 뛰고 있더라. 심장 소리가 '쿵쾅쿵쾅' 하고 울리는데, 정말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
"심장 소리가 들렸어?"
지유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응.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어. 우리가 봄날에 광한루원 오작교에서 다시 만났을 때, 그리고 요천 제방이 터지고 덤프트럭이 덮쳤을 때…… 그 모든 지옥 같던 시간들을 견뎌내지 못했다면 이 작은 생명이 이렇게 숨 쉴 수 있었을까 하고."
하은의 눈에 다시금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민재가 하은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묵직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맞아. 강태석 그놈이 구속되고, 서울의 거악들이 무너지고, 어제 105분 농민 어르신들이 땅을 되찾았잖아. 성 변호사, 그리고 지유야. 너희 둘이 목숨을 걸고 이 남원의 정의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내 아이는 여전히 깡패들이 판치고 불의가 당연시되는 썩어빠진 세상에서 태어났을 거야. 난 정말…… 내 자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남원을 물려줄 수 있게 됐다는 게 가장 벅차다."
민재의 진심 어린 고백에 평상 안에는 잔잔하고도 숭고한 침묵이 흘렀다.
재환은 조용히 지유의 손을 식탁 아래서 꼭 쥐었다.
지유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가 재환의 심장을 깊게 울렸다.
그들이 지난 세월 동안 흘렸던 피와 눈물, 법정에서 목이 터져라 외쳤던 정의의 언어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한 아이의 심장 소리가 증명해 주고 있었다.
5. 태명, 그리고 네 사람의 맹세
"그래서 태명은 지었어?"
지유가 분위기를 바꾸듯 생기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민재와 하은은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미 병원에서 걸어오는 길에 상의를 마친 모양이었다.
하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단비'라고 지었어. 최단비."
"단비……?"
재환이 그 이름을 입안에서 가만히 굴려보았다.
민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가뭄이 너무 길었잖아. 우리 남원에도, 우리 네 사람의 청춘에도 메마르고 잔인한 가뭄이 너무 길었어. 피눈물만 흐르던 그 메마른 땅에 마침내 모든 불의가 씻겨 나가고 평화가 찾아왔을 때 내려준 축복 같은 생명이니까…… 온 세상을 촉촉하고 푸르게 적셔주는 단비 같은 사람이 되라고, 그렇게 짓기로 했어."
"단비…… 정말 예쁜 이름이다. 너무 잘 어울려."
지유가 감탄하며 손뼉을 쳤다.
재환도 깊은 공감을 표하며 잔에 보리차를 가득 채웠다.
"단비라…… 훌륭한 이름이야. 메마른 대지를 적시고 모든 상처 입은 생명을 다시 돋아나게 하는 비. 우리 네 사람이 걸어온 길과 앞으로 살아갈 남원의 내일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이름은 없겠어."
재환이 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자, 우리 조카 단비의 건강한 탄생과, 민재, 하은이의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단비를 위하여!"
네 사람의 유리잔이 청아한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따뜻한 보리차가 목을 타고 넘어가며 가슴속까지 포근한 열기를 전해주었다.
식사를 마친 뒤, 민재는 조리대 옆에 걸린 달력으로 다가갔다.
볼펜을 꺼내 든 민재는 내년 초여름 즈음으로 표시된 출산 예정일 동그라미를 굵게 쳤다.
"성 변호사, 너 단비 삼촌인 거 알지? 나중에 우리 단비 태어나면 돌잔치 사회도 네가 보고, 한글도 네가 가르치고, 법도 네가 가르쳐라. 공부 못하면 다 삼촌 탓이다!"
"허, 벌써부터 짐을 떠넘기네. 지유 닮아서 착하고 지혜롭게 크면 됐지, 법은 뭐 하러 가르쳐? 골치만 아프지."
재환의 능청스러운 대꾸에 하은이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재환이 말이 맞아. 우리 단비는 지유 이모 닮아서 속 깊고 따뜻한 사람으로 키울 거예요. 민재 씨 닮아서 덜렁거리면 큰일 나요."
"여보! 내가 어디가 덜렁거린다고 그래? 남원일보에서 제일 날카롭고 꼼꼼한 최 기자더러!"
민재가 억울한 표정으로 가슴을 치자, 지유와 하은의 웃음소리가 김밥집 처마를 넘어 파란 가을 하늘로 높이 번져 나갔다.
폭압과 테러의 잿더미 위에서, 마침내 청춘들은 뿌리를 내렸고, 그 뿌리 끝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생명의 싹을 틔워내고 있었다.
6. 맞은편 2층 창가에서
점심시간이 지나고, 하은의 안정을 위해 민재는 조심스레 하은을 부축하며 집으로 향했다.
골목길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재환과 지유는 김밥집 앞 평상에 나란히 서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민재는 몇 걸음 걷지도 않아 하은의 발밑에 돌부리가 채일까 봐 연신 땅바닥을 살피며 야단법석을 떨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어찌나 다정하고도 우스꽝스러운지, 지유는 입을 가린 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민재 저러는 거 보니까, 정말 좋은 아빠가 될 것 같아."
"응. 세상에서 제일 따뜻하고 든든한 아빠가 되겠지. 민재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선 물불 안 가리는 녀석이니까."
재환이 지유의 옆얼굴을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친구들의 모습이 골목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배웅한 두 사람은 맞은편 2층 성재환 법률사무소로 자리를 옮겼다.
오후의 부드러운 가을 햇살이 2층 원목 창틀을 넘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지유는 탁자 위에 놓인 빈 찻잔들을 정갈하게 정리하며, 재환의 책상 위에 놓인 두툼한 등기 촉탁 서류철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보았다.
"오늘 오후에 등기소 가면, 정말 다 끝나는 거지?"
"응. 농민 어르신들 105분의 등기 명의가 본래대로 회복되는 명령서가 오늘 자로 송달될 거야. 다음 주부터는 어르신들이 직접 자기 땅에 들어가서 흙을 만지고 씨를 뿌리실 수 있어."
재환이 책상 앞으로 다가와 의자를 빼주며 지유를 앉혔다.
그리고 자신은 책상 모퉁이에 걸터앉아 지유의 부드러운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창밖으로는 남원 구도심의 기와지붕들과 저 멀리 유유히 흐르는 요천의 은빛 물결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성북동 사저의 높은 담장도,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의 차가운 회색 복도도 아닌, 온전히 민초들의 삶과 맞닿아 있는 남원의 품이었다.
"지유야."
재환이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응, 재환아."
"민재랑 하은이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이 들었어."
재환의 깊고 맑은 눈동자가 지유의 시선과 단단하게 얽혔다.
"우리가 열여덟 봄날, 벚꽃이 흩날리던 광한루원 오작교에서 처음 만났잖아."
지유의 눈동자가 잔잔하게 흔들렸다.
7년 전, 교복을 입고 오작교 난간에 기대어 바람을 맞던 재환의 모습, 백부에게 물려받은 각인 만년필을 떨어뜨리고 그것을 주워주며 시작되었던 그 운명적인 첫 만남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때 넌 참 맑고 곧은 아이였어. 그리고 난…… 가문의 무거운 규율과 아버지의 비뚤어진 기대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던 껍데기뿐인 녀석이었지. 남원을 강제로 떠나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난 내 인생이 완전히 지옥으로 곤두박질치는 줄 알았어."
재환의 손에 살며시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신림동 고시촌의 그 눅눅한 단칸방에서 컵라면 하나로 끼니를 때우며 버틸 수 있었던 건, 네가 선물해 줬던 그 흑청색 잉크병 때문이었어. 그 잉크로 엽서를 쓰고, 법전을 파고들면서 매일 밤 다짐했지. 반드시 법복을 입고 남원으로 돌아가 너를 지키겠다고.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 너와 남원의 약자들에게 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지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맺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눈물은 슬픔이 아니라, 기나긴 시련을 지나 마침내 당도한 안식의 증표였다.
7. 가슴속에 품은 또 하나의 결심
재환은 품에서 지유의 하얀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을 조심스레 닦아주었다.
그 손수건은 서울 대검 중수부로 홀로 상경하던 밤, 지유가 재환의 가슴팍에 꽂아주었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이제 법정에서의 싸움은 끝났어. 거악 강태석은 죗값을 치르고 있고, 아버지는 속죄의 길을 떠나셨지. 그리고 농민 어르신들은 땅을 되찾았어."
재환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요천 둑길을 따라 늦가을 수양버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고, 그 너머로 수백 년 된 광한루원의 팽나무 고목들이 웅장하게 서 있었다.
"우리가 지켜낸 이 남원에서, 나도 이제 너와 함께 진정한 내일을 시작하고 싶어."
지유는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는 것을 느꼈다.
재환의 목소리는 한없이 다정하면서도, 그 어떤 법정에서의 최종 변론보다 더 단단하고 확고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놓인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금빛 닙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가문의 억압을 상징하던 그 만년필은, 이제 지유의 흑청색 잉크를 머금고 약자를 위한 희망을 쓰는 사법의 지팡이가 되어 있었다.
재환은 만년필을 지유의 작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쥐여주었다.
"이 만년필은 평생 네가 맡아줘. 그리고 내가 흔들릴 때마다, 네가 처음 내게 주었던 그 순수한 마음을 일깨워줘."
지유는 만년필을 가슴에 품어 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재환아. 평생 내가 지킬게. 당신의 곁에서, 당신이 쓰는 모든 정의로운 글자들의 받침이 되어줄게."
두 사람은 창가에 나란히 서서 서로의 어깨를 기댔다.
살갗을 스치는 가을바람이 더 이상 시리지 않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골목 아래에서는 우체국 집배원 박 씨가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며 2층 창가의 두 사람을 향해 반갑게 모자를 벗어 흔들었다.
삼거리 김밥집 처마 밑에서는 '끝까지 남은 사랑'이라는 짙은 청색 글씨가 오후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모든 비극과 고통의 장벽을 넘어 마침내 도달한 완벽한 평화였다.
하지만 지유의 곁에서 창밖을 응시하던 재환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는, 지유에게 아직 털어놓지 못한 또 하나의 거대하고 은밀한 계획이 조용히 고동치고 있었다.
'광한루원 오작교, 우리가 처음 만났던 팽나무 그늘, 함께 자전거를 달리던 요천 둑길, 그리고 비를 피하던 김밥집 처마 밑…….'
재환의 머릿속에는 지난 7년간 두 사람의 아픈 사랑과 눈물이 아로새겨졌던 남원의 모든 추억의 장소들이 한 폭의 지도처럼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민재와 하은에게 찾아온 새 생명의 축복을 바라보며, 재환은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단순히 검사직을 내려놓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7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며 홀로 남원에 남아 자신을 기다려준 이 거룩하고 고귀한 여인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잊을 수 없는 영원한 서약을 바쳐야만 했다.
'지유야, 너에게 온전한 내 평생을 바칠 준비를 시작하마.'
재환의 입가에 깊고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지유 모르게 최민재를 불러내어 남원 곳곳을 돌며 비밀스러운 '보물찾기'를 준비할 생각이었다.
지유가 걸어온 고통의 발자국들을 하나하나 눈부신 사랑의 축복으로 바꾸어 놓을, 단 하나뿐인 청혼의 시간표가 조용히 태동하고 있었다.
남원의 푸른 가을 하늘 위로, 맑은 햇살이 축복처럼 두 사람의 머리 위에 쏟아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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