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 사회의 신뢰
1. 밀려드는 탄원
낡은 목조 계단이 비명을 지르듯 삐걱거렸다.
성재환은 평상 탁자 위에 펼쳐진 서류철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흑청색 잉크가 짙게 묻어난 만년필을 쥔 손가락에 가만히 힘을 주었다.
계단 아래에서부터 번져오는 발소리는 한두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흙먼지가 묻은 고무신과 낡은 작업화가 층계를 딛는 소리, 거칠고 메마른 숨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억눌린 세월이 삐져나오는 웅성거림이 2층 복도를 가득 채웠다.
창가에 서 있던 한지유가 조용히 뒤돌아보며 재환과 시선을 마주쳤다.
지유의 단정한 눈매 속에는 당혹감 대신 깊은 연민과 단단한 결기가 서려 있었다.
"변호사님 계시오? 성 변호사님!"
반쯤 열린 유리 미닫이문 틈새로 허리가 굽은 노인 한 명이 조심스레 얼굴을 들이밀었다.
볕에 그을려 가뭄 든 논바닥처럼 갈라진 얼굴, 남루한 모시 적삼 소매 끝에는 아직 채 털어내지 못한 붉은 황토가 엉겨 붙어 있었다.
그의 뒤로 주천면, 산내면, 송동면에서 올라온 수십 명의 농민들이 계단참을 지나 좁은 복도 끝까지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누구 하나 큰소리로 재촉하지 못하고, 혹여나 문전박대를 당할까 저어하며 떨리는 손으로 낡은 서류 봉투와 누렇게 뜬 영수증 쪽지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있었다.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미닫이문을 활짝 열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어르신들. 밖에 서 계시지 말고 안으로 드세요."
"아이고, 신발에 흙이 잔뜩 묻었는데…… 이런 누추한 발로 올라가도 되는지 모르겄소."
앞장선 노인이 벗겨진 고무신 코를 내려다보며 안절부절못하자, 지유가 먼저 다가가 노인의 주름진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괜찮습니다, 어르신. 여기는 땅 일구시는 분들 편히 쉬어가시라고 만든 자리예요. 어서 들어오세요."
지유의 온기 어린 목소리에 노인의 눈시울이 일순 붉어졌다.
스무 평 남짓한 사무실 바닥은 순식간에 흙 묻은 신발과 땀 냄새로 가득 찼다.
평상 탁자 위로는 농민들이 십수 년간 장롱 밑바닥과 양철 궤짝에 숨겨두었던 낡은 종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1991년 군청에서 일방적으로 보낸 토지 편입 통지서, 보상금 한 푼 제대로 적히지 않은 수용 영수증, 그리고 강태석 일파의 토건 용역들이 들이닥쳐 강제로 찍게 만들었던 백지 위임장들이었다.
"변호사님, 우리 박성두 영감이 요천 변 땅 찾겠다고 소장 냈다길래 염치 불고하고 달려왔소."
주천면에서 농사를 짓는다는 강 노인이 떨리는 손으로 종이쪽지를 내밀었다.
"관광도로를 낸다고 과수원 삼천 평을 뺏어가더니, 길은커녕 강태석 그놈 사돈네 모텔이 떡하니 올라갔소. 항의하러 군청에 갔더니 빨갱이 소리나 듣고, 밤중에 괴한들이 찾아와 몽둥이질을 해대는 통에 이 다리가 병신이 되었소. 나라 법이 어찌 이럴 수가 있소?"
노인의 목소리가 울분에 떨렸다.
주변에 둘러앉은 다른 농민들도 저마다 품고 있던 한 맺힌 사연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우리 집은 선산까지 홀라당 잡종지로 둔갑시켜 뺏어갔소."
"내 동생은 땅 뺏기고 홧병으로 피를 토하고 죽었소!"
사무실 안은 삽시간에 피눈물 섞인 통곡의 장으로 변했다.
재환은 그들의 거친 손을 하나하나 맞잡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들이 털어놓는 날짜와 지번, 빼앗긴 땅의 면적은 방금 최민재 기자가 가져온 '1991년 1995년 남원군 특별 환지 정리 대장'의 기록과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권력이 장부 위에 휘갈겨 쓴 차가운 지번 하나하나는, 누군가의 목숨이었고 피눈물이었으며 한 가정이 통째로 도륙당한 참상의 흔적이었다.
2. 만년필의 맹세
소란이 잦아들 무렵, 윤하은이 2층으로 뛰어 올라와 지유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유야, 아래 골목길에도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고 있어. 점심때가 훌쩍 지났는데 다들 새벽차 타고 나오셔서 물 한 모금 못 드셨대."
지유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앞치마를 고쳐 맸다.
"하은아, 가게로 내려가자. 쌀부터 안쳐야겠어."
지유와 하은은 맞은편 삼거리 김밥집으로 건너갔다.
가게 안에는 이미 소식을 들은 공설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와 동문 우체국 박 씨가 팔을 걷어붙이고 기다리고 있었다.
"지유야! 저 어르신들 굶기면 안 된다. 내가 방앗간에서 햅쌀 두 가마니랑 참기름 넉넉히 가져왔다."
"나도 우체국 당직실에서 대형 보온 물통이랑 종이컵 챙겨왔네. 저 양반들 목이라도 축여야지."
이웃들의 손길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가마솥에서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갓 지은 햅쌀밥에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골목 안을 가득 메웠다.
지유는 조리대 앞에 서서 정성껏 단무지와 시금치, 계란 지단을 얹어 김밥을 말아 올렸다.
어머니 박순례가 살아생전 그러했듯, 밥 한 톨에도 서러운 이들의 배를 곯리지 않겠다는 정성을 꾹꾹 눌러 담았다.
따뜻한 보리차 주전자와 큼직하게 썰어낸 김밥 접시들이 쉴 새 없이 맞은편 2층 법률사무소로 날라졌다.
한편, 2층 사무실 평상 탁자에 마주 앉은 성재환은 최민재가 입수한 극비 대장과 농민들이 가져온 서류들을 대조하며 본격적인 법리 검토에 착수했다.
옆자리에 앉은 최민재 기자는 카메라와 취재 수첩을 꺼내 들고 농민들의 증언을 한 자도 빠짐없이 받아적고 있었다.
"재환아, 상태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해. 단순한 수용 절차 위반이 아니야."
민재가 서류 한 장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이를 갈았다.
"1992년과 1993년 집중적으로 이뤄진 수용들을 봐. 공익사업법상 도로 개설 명목으로 고시해 놓고는, 실제로는 실시계획 인가조차 받지 않았어. 그래놓고 3개월 만에 강태석의 삼거리 토건과 동서개발에 단독 수의계약으로 소유권을 넘겨버렸잖아. 이건 명백한 당연무효 사유야."
재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 행정처분의 하자가 외관상 명백하고 중대해. 공익 목적이 완전히 결여된 위법한 공권력 행사야."
재환은 품속에서 백부의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캡 상단에 선명하게 새겨진 라틴어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가문의 굴레였고, 아버지가 저지른 죄악의 사슬이었던 그 펜촉에 지유가 채워준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가 스며들었다.
재환은 백지 위에 굵은 글씨로 소장의 제목을 적어 내려갔다.
'원고 박성두 외 104인, 피고 남원시장 및 주식회사 동서개발 외 3.'
사무실 안의 농민들이 숨을 죽이고 재환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사각거리는 만년필 펜촉 소리가 적막한 공간을 울렸다.
재환은 고개를 들어 눈물을 훔치고 있는 백여 명의 농민들을 둘러보았다.
"어르신들, 잘 들으십시오. 이 싸움은 단순히 땅 몇 평을 돌려받는 소송이 아닙니다. 지난 세월 동안 권력이라는 이름으로, 법이라는 허울로 여러분의 삶을 짓밟았던 자들의 죄를 묻는 재판입니다."
재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어떤 법정의 판결문보다 단호하고 엄숙했다.
"제가 여러분의 소송대리인이 되겠습니다. 착수금도, 성공보수도 일절 받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의 빼앗긴 땅과 짓밟힌 명예를 온전히 되찾을 때까지, 제가 여러분의 방패가 되겠습니다."
순간, 평상 앞에 웅크리고 있던 노인들의 입에서 참았던 오열이 터져 나왔다.
강 노인이 바닥에 이마를 찧으려 하자, 재환이 다급히 몸을 숙여 노인을 부축해 일으켰다.
"변호사님…… 고맙소, 참말로 고맙소……."
거친 손마디가 재환의 정장 소매를 붙잡고 파르르 떨렸다.
재환은 노인의 어깨를 감싸 쥐며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엄숙한 무게를 받아냈다.
검사복을 벗고 이곳으로 내려온 이유가 바로 이 눈물 속에 있었다.
3. 법정에 울려 퍼진 이름들
이틀 뒤, 전주지방법원 남원지원 제1호 민사대법정.
초가을의 서늘한 바람 속에서도 법원 앞마당은 새벽부터 몰려든 남원 시민들과 농민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남원일보 1면에 최민재 기자가 터뜨린 '10만 평 농지 강탈의 진실, 105인의 농민 성재환 변호사와 함께 서다'라는 기사가 시내 전역을 뒤흔든 탓이었다.
법정 문이 열리자 방청석 백여 석은 순식간에 메워졌고, 들어가지 못한 수백 명의 주민들이 복도와 창문에 달라붙어 법정 안을 주시했다.
원고석에는 성재환 변호사가 단정한 감청색 정장 차림으로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낡은 검정 고무신을 신은 박성두 노인과 지팡이를 짚은 강 노인이 떨리는 숨을 몰아쉬며 앉아 있었다.
반대편 피고석에는 남원시청 법무담당관과, 강태석의 은닉 재산을 관리하며 토지를 불법 점유하고 있던 토건 잔당 측의 거물 변호사들이 거만한 표정으로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다.
법관 출신의 피고 측 변호인 정진택이 일어나 비아냥 섞인 목소리로 변론을 시작했다.
"재판장님, 이 사건 토지수용처분은 1991년부터 1995년 사이에 적법한 공익사업 고시와 토지수용위원회의 재결을 거쳐 완료된 사안입니다. 행정소송법상 취소소송의 제소 기간인 처분일로부터 1년, 안 날로부터 90일은 이미 수년 전에 도과하였습니다. 원고들은 이미 적법하게 보상금을 수령했거나 공탁된 상태에서 뒤늦게 시세 차익을 노리고 억지 주장을 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즉각 각하 판결을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피고 측의 파렴치한 주장에 방청석에서 격앙된 야유가 터져 나왔다.
"무슨 놈의 보상금이야! 한 푼도 못 받았는데!"
"거짓말하지 마라, 이 도둑놈들아!"
문성현 부장판사가 법봉을 두드려 방청석을 진정시켰다.
"조용히 하십시오. 소란을 피우면 퇴정 조치하겠습니다. 원고 대리인, 변론하십시오."
모두의 시선이 성재환에게 집중되었다.
재환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두툼한 서류철과 함께, 지유의 흑청색 잉크로 빼곡하게 작성된 준비서면이 들려 있었다.
"피고 측은 제소 기간 도과를 이유로 각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이 사건 처분의 본질적인 하자를 철저히 외면한 궤변입니다."
재환의 서늘하고 맑은 음성이 법정 공기를 단숨에 가라앉혔다.
"대법원 판례에 의하면, 행정처분의 하자가 중대하고 명백한 경우 그 처분은 애초부터 효력이 없는 '당연무효'입니다. 그리고 무효인 행정처분에는 제소 기간의 제한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재환은 서류철을 들어 올렸다.
"여기 군청 문서고에서 적법하게 압수된 '1991년 1995년 남원군 특별 환지 정리 대장'과 실제 측량 원부를 보십시오. 피고 남원시는 공익 목적의 도로 개설을 명분으로 원고들의 농지를 강제 수용했습니다. 그러나 고시된 도로 계획선은 수용 완료 불과 3주 만에 흔적도 없이 폐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강태석 전 시장의 처남 조상태가 실소유한 동서개발과 세창물산의 모텔, 상업용 위락시설이 들어섰습니다."
재환은 피고 측 변호인단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농민들의 목숨줄을 헐값에 강탈한 뒤, 사익을 위해 토건 족벌에게 헐값 불하한 이 파렴치한 처분이 어찌 단순한 취소 사유에 불과합니까? 이는 국가 권력과 지방 토착 세력이 결탁하여 국민의 헌법상 기본권인 재산권을 원천적으로 침탈한 중대하고도 명백한 불법 행위입니다!"
법정 안이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피고 측 변호인이 당황하여 서류를 뒤적이며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것은 정책적 판단의 변경에 따른 환지 조정일 뿐……."
"환지 조정이라 하셨습니까?"
재환은 차가운 미소를 띠며 결정적인 서류 한 장을 재판부를 향해 내보였다.
"그렇다면 1993년 5월, 강태석 전 시장이 동서개발 대표와 체결한 이 '관광특구 편입 토지 이면 양도 각서'는 무엇입니까? 수용 처분이 내려지기도 전에 이미 민간 업자에게 평당 3만 원에 넘기기로 사적 계약이 체결되어 있었습니다. 관공서의 직인이 찍힌 이 서류가, 이것이 정녕 적법한 공용수용입니까, 아니면 백주 대낮에 자행된 관제 강도질입니까!"
쿵!
재환이 책상을 내리치듯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방청석에 앉아 있던 농민들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문성현 부장판사는 굳은 표정으로 서류의 인영과 날짜를 꼼꼼히 대조했다.
피고 측 변호인들은 낯빛이 하얗게 질린 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재환은 문 판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재판장님, 법은 힘 있는 자들의 탐욕을 가려주는 차광막이 아닙니다. 법은 비바람에 떨고 있는 가장 약한 자들의 마지막 지붕이어야 합니다. 피고 남원시가 원고들에게 내린 토지수용처분 및 일체의 소유권 이전 등기는 원천 무효임을 선언해 주십시오. 30년간 권력의 군홧발에 짓밟혔던 이 백다섯 명의 농민들에게, 정의가 살아있음을 판결로 밝혀주십시오!"
법정 안은 깊은 침묵 속에 잠겨 들었다.
문성현 판사의 눈빛에 깊은 고뇌와 함께 결연한 빛이 스쳤다.
4. 승소의 눈물
"주문."
문성현 부장판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판결 주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법정 안의 모든 이들이 숨을 멈추었다.
옆자리에 앉은 박성두 노인은 두 손을 모아 쥐고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피고 남원시가 1991년 4월부터 1995년 6월까지 원고들에게 행한 별지 목록 기재 각 토지에 대한 수용처분은 모두 무효임을 확인한다."
순간, 방청석에서 작게 헉 하는 숨소리가 터져 나왔다.
문 판사의 엄숙한 낭독이 이어졌다.
"피고 주식회사 동서개발 및 피고 등은 원고들에게 별지 목록 기재 각 토지에 관하여 경료된 소유권 이전 등기의 말소 등기 절차를 이행하라. 소송 비용은 피고들이 부담한다."
땅!
땅!
땅!
법봉이 세 번 울렸다.
완벽한 원고 전부 승소 판결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법정 안이 거대한 함성으로 뒤흔들렸다.
"이겼다! 우리가 이겼어!"
"어머니! 우리 땅을 찾았소!"
박성두 노인이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지팡이를 짚고 있던 강 노인은 재환의 손을 부여잡고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방청석을 가득 메운 농민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어떤 이는 바닥에 엎드려 흙 묻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고, 어떤 이는 허공을 향해 죽은 가족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다.
피고 측 변호인들은 굳은 표정으로 서류 가방을 챙겨 도망치듯 법정을 빠져나갔다.
법원 복도로 쏟아져 나온 농민들과 시민들은 성재환을 헹가래 치듯 둘러쌌다.
"성 변호사님! 고맙습니다, 평생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남원에 이런 법관이, 이런 변호사가 있다는 게 꿈만 같습니다!"
수많은 거친 손들이 재환의 손을 잡고, 등을 두드렸다.
최민재 기자는 상기된 얼굴로 플래시를 터뜨리며 그 감격스러운 순간들을 카메라에 담았다.
법원 정문 계단을 내려서는 재환의 눈앞에, 인파 너머에서 하얀 면 손수건을 꼭 쥔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한지유의 모습이 들어왔다.
지유의 두 뺨 위로 맑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군중의 환호와 박수 소리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따뜻하게 얽혔다.
재환은 천천히 인파를 헤치고 지유에게 다가갔다.
"지유야."
"재환아…… 해냈구나. 정말로 해냈어."
지유가 떨리는 손으로 재환의 정장 깃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며 미소 지었다.
그 손길에는 지난 7년간의 비극을 견뎌낸 사람만이 나눌 수 있는 깊은 안식과 신뢰가 담겨 있었다.
재환은 지유의 손을 꼭 쥐었다.
"우리가 함께 해낸 거야. 네가 지켜준 남원이고, 네가 채워준 잉크로 쓴 판결이야."
두 사람을 둘러싼 남원 시민들의 박수 소리가 가을 하늘 높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불의와 공포로 얼룩졌던 남원의 지난 30년 어둠이 걷히고, 진정한 신뢰와 정의가 민초들의 가슴속에 뿌리내리는 순간이었다.
5. 골목의 사랑방
그날 저녁,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은 건국 이래 유례없는 잔칫집으로 변했다.
삼거리 김밥집 앞마당과 맞은편 법률사무소 1층 공터에는 평상 대여섯 개가 길게 이어 붙여졌다.
평상 위에는 멍석이 깔리고, 목공소 윤 씨가 가져온 큼직한 백일홍 원목 상들이 차려졌다.
동문 우체국 집배원 박 씨는 퇴근길에 막걸리 세 말 통을 어깨에 메고 나타났고, 공설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는 갓 쪄낸 시루떡을 함지박 가득 이고 골목으로 들어섰다.
과일전 김 씨는 제일 달고 굵은 나주 배와 사과를 궤짝째 날랐다.
"오늘 삼거리 김밥집 음식은 전부 공짜다! 내가 다 쏠 테니 배 터지게들 드셔!"
박성두 노인이 막걸리 잔을 높이 치켜들며 목청을 돋우자, 골목 가득 호탕한 웃음꽃이 터졌다.
"영감님, 공짜는 무슨 공짜요! 우리가 쌀이며 배추며 다 들고 왔는데!"
"맞소! 오늘 김밥은 우리 백다섯 명 농민들이 변호사님하고 지유 아가씨한테 대접하는 거요!"
삼거리 김밥집 주방 안은 열기로 가득했다.
지유와 윤하은, 그리고 시장 아주머니 서넛이 나란히 서서 김밥을 말고 있었다.
참기름 냄새가 골목 안을 고소하게 채웠고, 커다란 양은 솥에서는 멸치와 다시마를 푹 우려낸 따뜻한 장국이 보글보글 끓어올랐다.
지유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밖을 내다보았다.
평상에 둘러앉은 이웃들의 얼굴마다 수년 만에 찾아온 환한 웃음이 가득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태석 일파의 쇠파이프 테러와 붉은 페인트로 얼룩졌던 공포의 골목이었다.
어용 상인회의 눈치를 보며 서로를 외면하고 문을 걸어 잠그던 적막의 거리였다.
그러나 지금, 그 어둠과 침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권력이 떠나간 자리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와 신뢰가 기적처럼 싹터 오르고 있었다.
가게는 더 이상 힘없는 모녀가 핍박받던 고립된 외딴섬이 아니었다.
남원의 서민과 농민들이 억울함을 털어놓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가장 따뜻한 사랑방이 되어 있었다.
재환은 마당 한구석에서 강 노인의 막걸리 잔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변호사님, 서울에서 그 대단한 벼슬자리 다 마다하고 여길 내려와 주셔서…… 참말로 고맙소."
강 노인의 눈가에 어린 진심 어린 신뢰에 재환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닙니다, 어르신. 제가 있어야 할 자리가 바로 여깁니다. 앞으로도 억울한 일 있으시면 언제든 2층 문을 두드리십시오."
"그럼, 두드리고말고. 이제 우리한테 성 변호사님이 계시는데 무서울 게 뭐가 있겄소!"
골목 안에 유쾌한 건배사가 울려 퍼졌다.
6. 평상 위의 온기
밤이 깊어가자 잔치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이웃들은 저마다 그릇을 정리하고 평상을 닦으며 내일의 일상을 위해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최민재와 윤하은도 골목 어귀까지 배웅을 나온 지유와 재환에게 손을 흔들었다.
"재환아, 내일 조간신문 기대해라. 남원 법조 역사상 가장 통쾌한 승소 기사가 1면 톱으로 나갈 테니까!"
민재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씩 웃었다.
"고생 많았다, 민재야. 네 기사가 없었으면 이 대장의 진실도 빛을 못 봤을 거야."
재환이 민재의 어깨를 툭 쳤다.
하은은 지유의 손을 꼭 쥐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지유야,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 푹 쉬어."
"응, 언니도 조심해서 들어가요."
친구들이 떠나고, 골목 안에는 은은한 가로등 불빛과 귀뚜라미 울음소리만이 남았다.
지유와 재환은 김밥집 앞 평상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가을밤 공기는 서늘했지만, 두 사람이 어깨를 맞대고 앉은 자리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지유는 품에서 따뜻한 보리차 잔 두 개를 꺼내 하나를 재환에게 건넸다.
"피곤하지, 재환아?"
재환은 찻잔을 감싸 쥐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피곤하기는커녕, 태어나서 오늘처럼 마음이 가볍고 벅찬 날이 없었어."
재환은 고개를 들어 맞은편 2층 법률사무소를 올려다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목공소 윤 씨가 다듬어 달아준 '성재환 법률사무소'라는 하얀 나무 간판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리고 그 시선은 자연스레 자신들이 앉아 있는 김밥집 처마 밑, 지리산 육송으로 만든 새 간판으로 내려앉았다.
'삼거리 김밥 - 끝까지 남은 사랑.'
재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내가 검사 시절에 휘두르던 법은 늘 차가웠어. 누군가를 감옥에 집어넣고, 벌을 주고, 단죄하는 것만이 법인 줄 알았지. 하지만 오늘 법정에서 농민들의 손을 잡으면서 깨달았어."
재환은 지유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법의 진짜 힘은 벌을 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빼앗긴 사람들에게 제자리를 돌려주고 내일을 살아갈 희망을 품게 하는 데 있다는 걸 말이야. 네가 이곳에서 김밥을 말며 끝까지 버텨준 덕분에, 내가 그 법의 본래 얼굴을 볼 수 있었어."
지유는 가만히 재환의 손을 잡아 자신의 무릎 위에 얹었다.
가을바람에 지유의 귓가 머리칼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어머니가 늘 말씀하셨어. 밥을 짓는 일이나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나 똑같다고. 뜸을 들이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면 설익은 밥이 되고 말지만, 끝까지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구수하고 따뜻한 밥이 된다고."
지유의 눈동자가 별빛처럼 맑게 빛났다.
"우리가 지나온 그 모진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던 것 같아. 어머니도 하늘에서 오늘 판결을 보시고 기뻐하셨을 거야."
재환은 지유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입술을 조심스레 가져다 대었다.
거친 세월을 버텨내느라 군살이 박인 지유의 손등에서 애틋하고 깊은 온기가 전해졌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했다.
더 이상의 긴 설명도, 거창한 맹세도 필요하지 않았다.
고통의 터널을 함께 뚫고 나온 연인들의 침묵은 그 자체로 완벽한 사랑의 고백이었다.
7. 팽나무 아래의 그림자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재환은 지유를 가게 안 단칸방으로 들여보내고, 찻잔을 정리하기 위해 마당으로 내려섰다.
골목 어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재환은 손을 멈추고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 모퉁이를 응시했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전봇대 그늘 뒤편에,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남루한 바바리코트 깃을 세운 사내는 삼거리 김밥집의 환한 불빛과 평상을 한참 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재환의 눈빛이 순식간에 예리하게 좁혀졌다.
토건 잔당인가, 아니면 또 다른 위협인가.
재환이 평상에서 내려서며 서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십니까?"
사내는 인기척에 흠칫 놀란 듯 몸을 떨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가로등 불빛이 사내의 옆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 재환의 숨이 턱 멎었다.
완전히 백발이 되어버린 머리칼, 깊게 파인 미간의 주름, 그리고 핏기 없이 메마른 입술.
그것은 며칠 전 남원을 떠나 서울로 올라간 줄로만 알았던 아버지, 성호석 전 차관이었다.
성호석은 아들과 눈이 마주치자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황망히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앙상한 손에는 신문 한 장이 쥐여 있었다.
오늘 낮 문성현 판사가 선고한 농민 승소 판결문 전문이 실린 호외 신문이었다.
재환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성호석의 앞으로 다가갔다.
부자간의 거리는 불과 대여섯 걸음이었지만, 그 사이에는 30년의 악연과 참회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
재환의 부름에 성호석은 어깨를 가늘게 들썩였다.
성호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재환아…… 신문을 보았다."
성호석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내가…… 내가 군수로 있으면서 내 손으로 도장을 찍었던 그 흉측한 죄악을, 네가 오늘 법정에서 바로잡았더구나."
성호석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려 메마른 뺨을 적셨다.
그는 쥐고 있던 신문을 차마 펴보지도 못한 채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네가 백다섯 명 농민들의 손을 잡고 법원을 나서는 사진을 보면서…… 내가 평생 짊어지고 갈 지옥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진 것 같아 염치없이 발걸음을 돌려 이곳으로 왔다."
성호석은 김밥집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따뜻한 불빛을 아프게 바라보았다.
"지유에게는…… 차마 얼굴을 보일 면목이 없어 먼발치에서 불빛만 보다가 가려 했다. 재환아, 나는 내일 아침 일찍 서울로 올라간다. 성북동 집과 남은 패물들을 전부 처분해서, 남원 농민들과 구도심 상인들을 위한 공익 장학재단에 전액 출연하기로 공증을 마쳤다."
성호석은 주머니에서 낡은 가죽 수첩 하나를 꺼내 재환의 손에 쥐여주었다.
수첩 겉면에는 30년 전 성호석이 초임 공직자 시절 직접 적었던 글귀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공평무사(公平無私).'
"이건…… 내가 공직을 시작할 때 가슴에 품었던 마음이다. 탐욕과 비겁함에 눈이 멀어 잃어버렸던 내 초심이지. 네가 오늘 법정에서 보여준 모습이야말로, 내가 꿈꾸었으나 끝내 도달하지 못했던 참된 법률가의 길이었다."
성호석은 아들의 손을 꼭 쥐었다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
그 메마른 손길에는 평생의 원죄를 내려놓은 자의 깊은 참회와, 자신보다 훨씬 크고 곧게 자라난 아들을 향한 뼈아픈 경외가 담겨 있었다.
"고맙다, 재환아. 내 죄를 대신 갚아주어서…… 정말로 고맙다."
성호석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깊이 허리를 숙여 아들에게 절을 올리듯 고개를 숙인 뒤, 어둠 속으로 천천히 발걸음을 돌렸다.
골목길 가로등 불빛 아래로 길게 늘어지는 아버지의 초라한 뒷모습을, 재환은 묵묵히 바라보았다.
부모의 죄를 법으로 베어내야 했던 아들의 가슴속에서, 비로소 오랜 비극의 상흔이 아물어가고 있었다.
8. 밤하늘의 맹세
성호석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골목길에 가을바람이 스쳐 지나갔다.
재환은 아버지가 건네준 낡은 수첩을 품속 깊은 곳에 넣었다.
그것은 더 이상 단죄해야 할 증거물이 아니었다.
과거의 죄악을 딛고 더 바르고 굳건한 정의를 세워나가야 한다는 엄숙한 경계석이었다.
가게 문이 살그머니 열리며 한지유가 밖으로 나왔다.
지유는 재환의 어깨에 두툼한 털가디건을 덮어주며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어르신…… 다녀가셨지?"
재환은 놀란 눈으로 지유를 돌아보았다.
지유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 창문 틈으로 다 보고 있었어. 골목 모퉁이에 오래 서 계시던 그 쓸쓸한 그림자를 모를 리가 없잖아."
"지유야……."
"잘하셨어. 아버지의 참회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원망도, 오늘 저 어둠 속으로 다 날아간 것 같아."
지유의 눈동자는 맑고 투명했다.
복수와 증오의 사슬을 끊어내고 완전한 용서에 도달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거룩한 평온이었다.
재환은 지유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지유는 자연스럽게 재환의 품에 머리를 기대었다.
동문 우체국 너머 요천 변 쪽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에 청아한 쇳소리가 실려 왔다.
김밥집 처마 끝에 매달린 낡은 놋쇠 풍경이 바람을 타고 맑게 울리고 있었다.
7년 전, 지유의 어머니가 손수 매달아 두었던 그 풍경 소리였다.
어머니가 하늘에서 두 사람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주듯, 풍경 소리는 길고 다정하게 골목 안을 맴돌았다.
재환은 품속에서 만년필을 꺼내 달빛에 비추어 보았다.
칠흑 같은 검은 옻칠 위로 차가운 금빛이 아닌, 따뜻한 은백색 달빛이 내려앉아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던 라틴어 법언은, 이제 힘없는 이웃들의 손을 잡는 '약자의 약속'으로 새롭게 숨 쉬고 있었다.
"지유야."
"응, 재환아."
"우리의 봄날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지유가 재환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쏟아지는 남원의 밤하늘에는, 수만 개의 별들이 눈부신 은하수를 이루며 찬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권력이 짓밟고 간 폐허 위에, 비로소 사람이 사람을 믿고 사랑하는 진정한 평화가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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