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는 빈자리
1. 멈춰 선 승강장의 침묵
철로 위를 집어삼킬 듯 흩날리던 흰 연기가 마침내 흩어졌다.
기적 소리가 멎은 구 남원역(舊 南原驛) 승강장에는 매캐한 석탄 냄새와 축축하게 젖어 드는 초여름의 비린 풀내음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서울로 떠나간 통일호 열차가 남기고 간 철로의 진동은 이미 완전히 잦아들었지만, 한지유는 여전히 플랫폼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텅 빈 궤도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릎에서 배어 나온 핏방울이 빗물 고인 콘크리트 틈새로 천천히 번져 나갔다.
얇은 여름 교복 치마 아래로 찢어진 천 조각 사이, 자갈길에 긁혀 붉게 짓무른 상처가 심장 박동에 맞춰 욱신거렸지만 지유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멍하니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 안에는 방금 전까지 재환의 체온이 묻어 있던 학생증 증명사진이 구겨지지 않도록 쥐여 있었다.
모서리가 거칠게 잘려 나간 반명함판 흑백 사진.
그 뒷면에는 자신이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사주었던 바로 그 흑청색 잉크로, 결코 지워지지 않을 단단한 필체의 서약이 새겨져 있었다.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
"지유야…… 일어나야 돼.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돼."
떨리는 목소리로 어깨를 감싸 안아 오는 윤하은의 손길에 지유의 굳어 있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하은은 땀과 눈물로 엉망이 된 지유의 뺨을 자신의 마른 수건으로 닦아내며 연신 훌쩍이고 있었다.
"피가 이렇게 많이 나는데…… 어떡해, 지유야. 일단 읍내 의원부터 가자, 응? 내가 업어줄게. 일어설 수 있겠어?"
"하은아."
지유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바람결처럼 파리했다.
그러나 그 속에 깃든 울림은 결코 부서지지 않는 바위처럼 단단했다.
지유는 손바닥에 쥔 사진을 가슴 안쪽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밀어 넣고는, 하은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무릎을 세웠다.
살점이 뜯겨 나간 상처가 당겨오며 날카로운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지만, 지유는 단 한 번도 신음을 내뱉지 않았다.
오히려 플랫폼 저편, 열차가 사라진 북쪽 하늘을 똑바로 쳐다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나 괜찮아. 정말 괜찮아."
"어떻게 괜찮아, 이 바보야! 시장실 비서 그 인간들이 재환이를 억지로 끌고 갔잖아! 네가 기차 유리창 두드리면서 그렇게 불러도 문 한번 안 열어주던 그 지독한 인간들인데……!"
하은이 분통을 터뜨리며 지유의 팔을 꼭 붙잡았다.
역 구내를 정리하던 늙은 역무원이 빗자루를 든 채 혀를 차며 다가왔다.
"학생들, 이제 나가야 해. 곧 여수발 화물 열차가 들어올 시간이야. 거기 다리 다친 학생, 역사 의무실에 소독약이라도 발라줄까?"
"아닙니다, 아저씨. 저희 이제 갈게요. 폐 끼쳐서 죄송합니다."
지유는 단정하게 고개를 숙였다.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허리를 꼿꼿이 편 채 개찰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역사 밖으로 나서자, 남원 시내를 감싸 안은 요천의 습한 바람이 지유의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역전 광장 한구석에 세워둔 민재의 낡은 삼천리 자전거가 눈에 들어왔다.
민재는 자전거 핸들을 부여잡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재환이 탄 기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던 민재의 주먹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지유야."
민재가 고개를 들었다.
땀에 젖은 이마 위로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 그의 눈동자에는 친구를 강제로 떠나보내야 했던 무력감과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무릎은…… 괜찮냐?"
"응, 민재야. 살짝 긁힌 거야. 네가 재환이한테 해준 말, 나 다 들었어."
지유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처연하면서도 맑은 미소에 민재는 가슴이 턱 막히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성재환 그 자식이…… 나한테 부탁하고 갔어. 너 혼자 두지 말라고. 남원에 남아서, 지유랑 김밥집 꼭 지켜달라고."
민재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난 남원에 남을 거다, 지유야. 대학이든 뭐든, 난 여기서 내 두 발 딛고 서서 네 뒤 지킬 거야. 재환이가 돌아올 때까지, 삼거리 김밥집 앞마당에 흙먼지 하나 못 날리게 할 테니까…… 넌 아무 걱정 말고 버텨라."
"고마워, 민재야."
지유는 가슴 안주머니에 닿아 있는 서약의 온기를 느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울지 않을 거야. 재환이가 남원에 올 때, 부끄러운 모습으로 서 있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우리,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매일을 살아내자."
셋은 비 갠 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속을 걸어 요천 둑길을 향했다.
재환이 떠난 남원의 하늘은 야속하리만치 푸르렀고, 지유의 걸음걸이는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핏빛 자국을 남겼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2. 삼거리의 참기름 냄새
동문 우체국 골목을 돌아 삼거리 김밥집 앞에 다다랐을 때, 가게 안에서는 익숙하고 고소한 참기름 냄새와 함께 밥 뜸 들이는 수증기가 자욱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낡은 푸른색 차양 아래에는 방금 전 들이닥쳤던 관용차의 바퀴 자국이 흙탕물 속에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지유는 가게 문을 열기 전, 손등으로 눈가를 거칠게 문지르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엄마, 나 왔어."
드르륵, 낡은 알루미늄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방 안쪽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당근 채를 볶고 있던 어머니의 손길이 우뚝 멈췄다.
어머니는 헐레벌떡 뛰쳐나와 지유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 흙투성이가 된 운동화, 그리고 무릎에 감긴 하은의 피 묻은 손수건을 본 순간 어머니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지유야! 너 다리가 이게 무슨 꼴이냐! 어디서 넘어진 거야, 응?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어머니의 거칠고 투박한 손이 지유의 떨리는 다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부엌일로 마디마디가 굵어지고 굳은살이 박인 어머니의 손에서 짙은 방앗간 참기름 냄새와 따스한 온기가 배어 나왔다.
곁에 서 있던 하은이 지유 대신 울먹이며 나섰다.
"아줌마, 지유가 역전까지 뛰어가다가…… 자갈길에서 넘어졌어요. 의원 가서 꿰매야 할지도 몰라요."
"남원역엔 뭣하러…… 아까 그 시청 차 타고 온 험상궂은 양반들 때문에 그런 게지? 그 시장 댁 도련님이랑 무슨 일 있었던 게지?"
어머니의 목소리에 두려움과 원망이 뒤섞여 있었다.
평생을 남원에서 힘없는 서민으로 살아오며 관청 사람들과 토건패들의 횡포에 치를 떨었던 어머니였다.
남편 한석규가 과수원을 강탈당하고 홧병으로 피를 토하며 세상을 떠났을 때도, 어머니는 그저 관청 앞바닥에 엎드려 울 수밖에 없었던 약자였다.
그런 어머니에게 시장 관사의 비서실장이란 존재는 그 자체로 불길한 재앙의 전조였다.
"엄마, 재환이 잘못 아니야."
지유는 어머니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재환이는 그냥……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이 나서 갑자기 전학을 가게 된 것뿐이야. 나한테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가서, 내가 배웅하러 역에 다녀온 거야. 그뿐이야, 엄마."
"그래도 그렇지, 관용차를 타고 온 사람들이 우리 가게 문을 걷어차듯 들어와서 행패를 부리고…… 너를 무슨 죄인 다루듯 쳐다보는데 내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지유야, 높은 집안사람들이랑은 엮이는 게 아니야. 우리 같은 것들은 저 사람들 발끝에 차이는 돌멩이만도 못한 취급을 받아. 네 아버지가 왜 그렇게 억울하게 눈을 감았는데……."
어머니는 지유의 상처를 내려다보며 앞치마로 연신 눈물을 훔쳤다.
아버지가 빼앗긴 과수원.
1990년대 초, 남원 일대 토지 구획 정리라는 그럴싸한 명목 아래 강제로 소유권을 뜯어가고 끝내 패소 판결을 안겨주었던 그 거대한 권력의 사슬.
지유는 어머니가 그 비극의 배후에 성재환의 부친 성호석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에 안도하면서도, 가슴 한편이 도려내지는 듯한 죄책감을 느꼈다.
'재환이는 달라, 엄마. 재환이는 그들과 같지 않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이 목구멍 뒤에서 뜨겁게 맴돌았다.
재환이 남긴 마지막 눈빛,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이라는 만년필의 각인, 그리고 기차 안에서 부친의 비리를 적어 내려가던 그 서슬 퍼런 결의를 지유는 알고 있었다.
그는 도망친 것이 아니었다.
가문의 죄악과 맞서 싸울 칼날을 벼리기 위해, 스스로 적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었다.
"엄마, 나 얼른 씻고 올게. 점심 단체 김밥 주문 들어온 거 있잖아. 우체국이랑 농협에서 열 줄씩 맞춰놓았다고 했지?"
지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씩씩하게 팔을 걷어붙였다.
"너 미쳤냐, 한지유! 의원부터 가자니까!"
하은이 기겁하며 지유를 가로막았지만, 지유는 고개를 저었다.
"약국 가서 빨간약 바르고 붕대 단단히 감으면 돼. 오늘 주문 펑크 내면 단골 다 떨어져 나가. 하은아, 나 도와줄 거지?"
지유의 단호한 눈빛을 마주한 하은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못 말린다, 정말…… 알았어. 대신 밥통 나르는 건 내가 다 할 테니까 너는 의자에 앉아서 김밥만 말아. 알겠지?"
민재 역시 가게 문밖에서 짐칸을 정리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배달은 내가 자전거로 싹 돌릴 테니까 걱정 마라, 지유야! 남원 시내 어디든 십 분 안에 쏜다!"
세 친구의 온기가 작은 김밥집 안을 가득 메웠다.
지유는 주방 구석 수돗가에서 흐르는 찬물에 무릎의 흙과 핏덩이를 씻어냈다.
살이 에이는 듯한 쓰라림 속에서도, 지유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상처는 아물 것이다.
흉터가 남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재환을 기다리겠다고 맹세한 가장 거룩한 징표가 될 터였다.
3. 춘향관 뒤란의 빈자리
사흘이 흘렀다.
계절은 완연한 초여름으로 접어들어, 광한루원의 벚꽃 잎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짙푸른 녹음이 누원을 뒤덮었다.
학교 수업이 끝나자마자 지유는 습관처럼 가방을 메고 요천 둑길을 달렸다.
붕대를 감은 오른쪽 무릎 때문에 걸음이 다소 기우뚱거렸지만, 지유의 발길은 망설임 없이 광한루원 서문으로 향했다.
관리인 아저씨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들어선 경내에는 평일 오후의 한적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완월정의 붉은 난간을 지나, 오작교의 완만한 돌다리를 건넜다.
잉어 떼가 수면 위로 뻐끔거리며 파문을 일으키는 연못을 지나쳐 지유가 멈춰 선 곳은 춘향관 뒤란, 수령 수백 년 된 팽나무 고목 아래였다.
거대한 그늘을 드리운 팽나무 둥치에는 여전히 재환과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그날의 공기가 박제되어 있는 듯했다.
지유는 조심스럽게 나무 밑동에 손을 얹었다.
거친 나무껍질의 감촉 사이로, 처음 만났던 날 재환이 떨어뜨렸던 검은 옻칠 만년필의 서늘한 금빛 닙이 떠올랐다.
'남원의 힘은 썩었다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하지만 지유야, 난 남원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아. 네가 사는 이곳을, 네가 지키는 이 따뜻한 곳을 나는 반드시 지킬 거야.'
노을빛 속에서 흔들리던 재환의 깊은 눈동자.
지유는 가방 안에서 낡은 스케치북과 4B 연필을 꺼냈다.
지난번 재환에게 뜯어주었던 자전거 스케치의 다음 장이었다.
텅 빈 종이 위로 사각거리는 연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유는 기억을 더듬어 팽나무 둥치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던 재환의 옆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칼, 조금은 차갑지만 지유를 바라볼 때면 한없이 부드러워지던 입매, 그리고 교복 옷깃 사이로 언뜻 비치던 굳은 쇄골.
선 하나하나를 그어 내릴 때마다 가슴속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남원 시내 어디를 가도 재환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었다.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렸던 요천 둑길의 수양버들 가지, 갑작스러운 소나기를 피해 뛰어들었던 김밥집 처마 밑, 손수건으로 빗물을 닦아주며 마주 잡았던 그 뜨거운 손의 감촉.
불과 나흘 전의 일들이 마치 아득한 전생의 기억처럼 아련했다.
그러나 지유는 이것이 끝이 아님을 알았다.
품속에서 꺼낸 학생증 증명사진 뒷면의 글자를 손끝으로 천천히 매만졌다.
흑청색 잉크로 눌러쓴 '반드시 돌아온다'는 글귀는 팽나무의 단단한 뿌리처럼 지유의 영혼 속에 박혀 있었다.
"재환아, 서울은 어떤 곳이니?"
지유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을 올려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곳은 여기보다 훨씬 춥고 복잡하겠지. 네 아버지는 여전히 무섭고, 너를 가두려 하겠지. 하지만 지치지 마. 네가 돌아올 자리는 내가 여기서 꼭 지키고 있을 테니까."
그때, 저 멀리 완월정 쪽에서 하은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유야! 한지유! 여기 있었어?"
하은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작교를 건너 뛰어오고 있었다.
지유는 얼른 스케치북을 덮고 일어섰다.
"하은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우체국……! 방금 동문 우체국에 들렀는데, 집배원 아저씨가 너네 가게로 가려던 참이었어!"
하은은 손에 쥔 네모난 종이 한 장을 가슴에 꼭 품은 채 지유의 코앞까지 달려와 멈춰 섰다.
헐떡이는 하은의 손가락 사이로 언뜻 붉은색 우표와 낯선 소인이 찍힌 엽서 한 귀퉁이가 삐져나와 있었다.
지유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4. 관악산 아래서 온 전갈
지유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은이 건네준 것은 서울 광화문 우체국 소인이 선명하게 찍힌 관제엽서였다.
발신인 란에는 아무런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그저 수신인 란에만 정갈하고 힘 있는 한자 필치로 '全羅北道 南原市 東門外 三巨里 韓智宥 貴下(전라북도 남원시 동문외 삼거리 한지유 귀하)'라고 적혀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지유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백부에게 물려받았다는 각인 만년필의 예리한 닙으로, 자신이 선물했던 깊은 흑청색 잉크를 듬뿍 머금어 꾹꾹 눌러쓴 그 필체.
성재환의 글씨였다.
지유는 숨을 멈춘 채 엽서를 조심스럽게 뒤집었다.
뒷면에는 빽빽하지는 않으나 한 자 한 자 고뇌와 결의가 배어 있는 단정한 문장들이 채워져 있었다.
'지유에게.
기차 창밖으로 멀어지던 네 하얀 손수건과, 자갈밭에 쓰러지던 네 모습을 보며 내 심장은 그 플랫폼에 그대로 두고 왔다.
서울의 하늘은 온통 잿빛 매연과 육중한 회색 빌딩뿐이다.
요천의 맑은 물소리도, 팽나무 그늘의 바람도 이곳에는 없다.
아버지는 나를 성북동 사저의 높은 담장 안에 가두고 대치동 학원가로 매일 같이 몰아세우고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종하는 꼭두각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새벽마다 나는 관악산 자락이 올려다보이는 신림동 고시촌 헌책방 골목을 걷는다.
낡은 법전들의 곰팡내와, 밤을 새워 사법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의 서늘한 눈빛 속에서 나는 내가 가야 할 길을 똑똑히 보았다.
네가 준 잉크는 내 만년필 속에서 여전히 푸르게 살아 숨 쉬고 있다.
나는 이 잉크로 이 땅의 썩은 권력을 벨 사법의 칼을 벼릴 것이다.
지유야, 다친 무릎은 어떠니.
흉터가 남지 않아야 할 텐데, 멀리서 약 한 첩 지어 보내지 못하는 내 무력함이 살을 에는 듯 아프다.
부디 아프지 마라.
어머니 김밥집 일손 돕느라 네 손이 거칠어지지 않기를, 밤마다 호롱불 아래서 너무 무리하게 책을 보지 않기를 기도한다.
내가 반드시 법복을 입고, 가장 떳떳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광한루원 오작교 위에서 네게 내 사진을 돌려받으러 갈 때까지…… 부디 남원을 지켜다오.
나를 믿어다오.
1996년 초여름, 관악의 기슭에서.
재환.'
엽서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지유의 큰 눈망울에 고여 있던 눈물이 툭, 떨어져 흑청색 잉크 자국 옆 종이를 둥글게 적셨다.
지유는 얼른 소맷자락으로 글자가 번지지 않도록 조심스레 눈물을 닦아냈다.
'관악산 자락, 신림동 고시촌…….'
재환은 성북동의 화려한 사저에 안주하지 않고 있었다.
부친의 통제와 감시 속에서도 홀로 법전의 바다로 뛰어들어, 스스로를 혹독한 시험의 칼날 위에 세우고 있는 것이었다.
곁에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던 하은이 지유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재환이 맞지? 지유야…… 재환이 편지 맞지?"
"응. 재환이야."
지유는 엽서를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심장 언저리에서 재환의 고동 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져 오는 것만 같았다.
슬픔은 어느새 씻은 듯 가라앉고, 그 자리에는 어떤 시련도 버텨낼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용기가 솟아올랐다.
"하은아, 나 이제 하나도 안 슬퍼. 재환이는 서울에서 자기 싸움을 하고 있어. 나도 여기서 내 싸움을 해야 해."
"네 싸움이라니?"
"어머니 김밥집 지키고, 학교 공부도 일등 놓치지 않을 거야."
지유의 눈동자가 오작교 연못의 맑은 물빛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재환이가 남원에 돌아왔을 때, 내가 초라하게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되잖아. 나도 내 삶을 당당하게 세워둘 거야. 재환이가 부끄럽지 않게."
하은은 코끝을 찡긋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있잖아. 민재도 있고! 우리 셋이서 똘똘 뭉치면 남원 시내 어떤 놈들도 널 못 건드려!"
지유는 엽서를 조심스레 접어 교복 안주머니, 재환의 증명사진 바로 곁에 소중히 갈무리했다.
두 사람의 약속은 이제 단순한 기억이 아니었다.
그것은 서울과 남원, 300킬로미터가 넘는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서로의 영혼을 단단히 옭아맨 붉은 실이었다.
5. 일상이라는 이름의 방파제
재환의 첫 엽서가 도착한 이후, 지유의 일상은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새벽 다섯 시 반이면 지유는 어김없이 일어나 삼거리 김밥집의 셔터를 올렸다.
밤새 불려둔 쌀을 대형 밥솥에 안치고, 가스 불 위에 시금치 데칠 물을 올리는 것으로 지유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지유 어머니는 무릎에 아직 붕대를 감고 있는 딸이 안쓰러워 몇 번이고 만류했다.
"지유야, 넌 방에 들어가서 단어장이라도 더 외워라. 이 어미 혼자서도 다 할 수 있는 일인데 왜 사서 고생을 해."
"엄마 혼자 하면 허리 끊어져. 나 이거 십 분이면 다 볶아. 그리고 손 움직이면서 머릿속으로 영어 지문 외우면 공부가 더 잘돼."
지유는 능숙한 솜씨로 길쭉하게 썬 당근과 우엉을 볶아냈다.
프라이팬 위에서 달콤 짭조름한 간장 냄새가 퍼져 나가면, 어머니는 대야에 밥을 쏟아붓고 갓 짠 방앗간 참기름과 굵은 소금을 뿌려 주걱으로 밥알을 갈랐다.
김밥을 마는 지유의 손놀림은 날이 갈수록 정교해졌다.
김 위에 밥을 얇고 고르게 펴고, 단무지, 계란 지단, 햄, 시금치, 당근, 우엉을 한가운데 가지런히 올린 뒤 손끝에 힘을 주어 단단하게 말아 쥐었다.
참기름을 바른 칼로 일정한 두께로 썰어낼 때마다 단면의 색색깔 재료들이 꽃잎처럼 피어났다.
아침 일곱 시가 되면 동문 우체국 집배원들과 군청 하급 공무원들이 출근길에 들러 은박지에 싼 김밥 두세 줄씩을 사 들고 갔다.
"지유 학생, 오늘 김밥도 아주 찰지네! 어머니 손맛 똑 닮았어."
"감사합니다, 아저씨. 오늘 비 온다니까 우산 챙겨 다니세요."
지유의 맑고 상냥한 목소리는 삼거리 골목의 아침을 밝히는 비타민 같은 존재였다.
일곱 시 반, 앞치마를 벗고 교복으로 갈아입은 지유는 책가방을 둘러메고 남원여고로 향했다.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도 지유는 교실 자리를 거의 비우지 않았다.
책상 구석에는 항상 수학 정석 책과 영어 독해 문제집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옆에는 재환이 남기고 간 엽서의 모서리가 책갈피처럼 꽂혀 있었다.
졸음이 쏟아지거나 잡념이 고개를 들 때면 지유는 흑청색 잉크로 적힌 엽서의 문장을 마음속으로 소리 내어 읽었다.
'부디 아프지 마라. 내가 반드시 법복을 입고 돌아갈 때까지…….'
그 문장은 지유에게 차가운 얼음물 한 바가지보다 더 매섭게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드는 채찍이자 등대였다.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올 때마다 담임교사는 지유의 성적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한지유, 너 집안일 돕느라 야간자율학습도 못 하면서 점수가 계속 오르는 비결이 뭐냐? 이러다 서울에 있는 명문대 국문과나 법대도 거뜬히 가겠는데?"
"열심히 해야죠, 선생님. 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요."
지유는 조용히 미소 지을 뿐이었다.
하교 후 다시 김밥집으로 돌아와 저녁 장사를 돕고, 밤 열 시에 가게 문을 닫은 뒤에야 지유는 작은 단칸방의 책상 앞에 앉을 수 있었다.
삐걱거리는 형광등 불빛 아래, 지유는 남원여고 문구점에서 새로 사 온 단정한 편지지 한 장을 펼쳤다.
재환에게 답장을 쓸 시간이었다.
엽서에는 보내는 사람의 정확한 번지수가 적혀 있지 않았기에, 지유는 부치지 못할 편지를 일기처럼 써 내려갔다.
언젠가 재환이 돌아왔을 때, 자신이 그를 기다리며 보낸 모든 날의 숨결을 그대로 건네주기 위함이었다.
'재환아.
오늘은 남원에 초여름 소나기가 내렸어.
네가 우산을 씌워주던 김밥집 차양 밑에서 한참 동안 빗소리를 들었어.
네 엽서는 내 가슴속에서 매일매일 새로운 힘을 줘.
무릎 상처는 이제 딱지가 앉아서 거의 다 나았으니 걱정하지 마.
네가 관악산 아래서 법전을 파고들고 있다면, 나는 이곳 남원에서 우리 삶의 터전을 단단히 지키고 있을게.
너의 정의가 흔들리지 않도록, 나도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될게.'
지유의 글씨는 재환의 필체처럼 단정하고 깊은 고요를 품고 있었다.
편지지를 곱게 접어 책상 서랍 안쪽, 낡은 양철 과자 상자 안에 넣었다.
그 상자 속에는 벌써 서너 통의 부치지 못한 편지가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6. 골목에 드리운 불길한 그림자
칠월로 접어들면서 남원 시내의 공기는 턱턱 숨이 막힐 정도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지유를 짓누르는 것은 비단 무더위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호석 시장이 내무부 기획조정실장으로 영전하여 서울로 떠난 지 한 달여가 지나면서, 남원 시정은 전례 없는 권력 공백 상태에 빠져들었다.
시청 안팎은 물론이고 읍내 장터와 골목길까지 흉흉한 소문들이 파다하게 번져 나갔다.
"성 시장 그 양반, 서울 가더니 청와대 문턱까지 밟았다는구먼. 대선 자금 만지는 실세가 됐다지 뭐야."
"그럼 뭐 해! 남원에 남은 우리는 끈 떨어진 갓 신세지. 안 그래도 이번 가을에 시장 보궐선거 치른다는데, 벌써부터 삼거리 토건 강태석 회장이 돈을 물 쓰듯 뿌리고 다닌다더군."
김밥집 평상에 앉아 막걸리를 들이켜던 노인들의 대화가 지유의 귓전을 날카롭게 긁었다.
강태석.
남원 일대의 관급 공사를 독점하며 조폭들을 거느리고 음지의 이권을 쥐고 흔들던 토착 토건 세력의 거두.
재환이 관사에서 탈출하던 날 밤, 서재 문틈으로 언뜻 보았던 그 육중하고 비열한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사내가 10년 전, 지유 아버지 한석규의 과수원을 헐값에 강탈하고 소송을 조작했던 삼거리 토건의 우두머리라는 사실을 지유는 잊지 않고 있었다.
오후 네 시경, 손님이 뜸한 시간이었다.
김밥용 밥을 짓기 위해 쌀을 일고 있던 지유는 골목 어귀에서 들려오는 거친 타이어 마찰음에 고개를 들었다.
검은색 현대 그랜저 한 대가 삼거리 김밥집 바로 앞 공터에 거칠게 멈춰 섰다.
흙먼지가 풀썩이며 가게 안으로 들이쳤다.
차 문이 열리며 짙은 선글라스를 낀 건장한 깍두기 머리의 사내 둘이 내렸고, 이어서 뒷좌석에서 흰색 마 모시 적삼을 걸친 육중한 체구의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굵은 금목걸이를 목에 두르고 악어가죽 구두를 신은 사내, 강태석이었다.
"어이구, 참기름 냄새 지독하네."
강태석은 코를 찡그리며 부채질을 해댔다.
그의 뱀 같은 눈동자가 김밥집의 낡은 간판을 훑더니, 주방 문간에 서 있는 지유를 향해 꽂혔다.
지유의 손에 쥐여 있던 바가지가 잘게 떨렸다.
그자가 뿜어내는 음습하고 폭력적인 기운은 삼거리 김밥집의 소박한 평화를 일순간에 얼어붙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주방 안쪽에서 설거지를 하던 지유 어머니가 황급히 뛰어나왔다.
강태석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 어머니의 안색이 사색이 되었다.
"가, 강 회장님……? 여기가 어디라고 여길……."
어머니의 목소리가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남편을 파멸로 몰고 갔던 원수 중의 원수, 남원에서 가장 두려운 악귀가 제 발로 가게에 들어선 것이었다.
강태석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평상 위로 털썩 걸터앉았다.
"아따, 한씨 댁 아주머니, 얼굴 보기 참 힘드네. 내가 남원 시내를 눈코 뜰 새 없이 돌아다니다가, 마침 이 골목을 지나는데 고소한 냄새가 나길래 들렀지. 십 년 전 일로 아직도 나한테 앙금이 남았는가 보네? 다 지난 일인데 털어낼 건 털어내야지, 안 그래?"
"우린 강 회장님한테 팔 김밥 없습니다! 당장 나가주세요!"
지유가 어머니의 앞을 가로막아서며 서슬 퍼런 목소리로 외쳤다.
교복을 입은 어린 여학생의 당돌한 기세에, 뒤에 서 있던 깍두기 사내 하나가 인상을 쓰며 한 걸음 내디뎠다.
"이 기집애가 어디서 어른한테 눈을 부라려? 말버릇이 그게 뭐야!"
"됐어, 가만있어."
강태석이 손을 들어 부하를 제지했다.
그는 선글라스를 슬쩍 코끝으로 내리며 지유를 위아래로 흥미진진하게 뜯어보았다.
그 징그러운 시선에 지유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눈길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그자를 쏘아보았다.
"네가 그 한석규 딸년이로구나. 눈매가 지 애비를 쏙 빼닮았어. 독기가 바짝 올랐어, 아주."
강태석이 껄껄거리며 웃어젖혔다.
"성 시장 댁 도련님이 남원을 떠나기 전까지 밤낮으로 찾아왔다는 계집애가 너라지? 참 대단해. 그 귀하신 도련님의 혼을 쏙 빼놓고 말이야."
지유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자는 재환과 자신의 관계를 낱낱이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영업 방해하지 마시고 나가세요. 경찰 부르기 전에요."
"경찰? 하하하! 야, 얘 경찰 부른단다!"
강태석과 부하들이 배를 잡고 비열하게 웃어댔다.
남원 경찰서장조차 강태석의 술자리에서 형님 동생 하는 처지였다.
강태석은 웃음을 거두더니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지유와 어머니를 번갈아 보았다.
"잘 들어라, 과부댁. 이번 가을이면 남원의 주인이 바뀐다. 성호석이는 서울로 튀었고, 이제 이 남원은 명실공히 내 손바닥 안이야. 내가 시장 완장 차고 나면, 이 삼거리 일대부터 싹 밀어버리고 국책 유통 상가를 올릴 생각이다."
지유 어머니의 다리가 풀리며 바닥에 주저앉을 뻔한 것을 지유가 간신히 부축했다.
"이, 이 가게마저 뺏겠다는 거요? 우리 모녀더러 길바닥에 나앉아 굶어 죽으라는 말이오?"
"누가 굶어 죽인대? 권리금 섭섭지 않게 쳐줄 테니까 곱게 도장 찍고 남원을 뜨라는 소리지. 어설프게 서울 간 도련님 믿고 뻐기다간, 네 애비 꼴 난다. 명심해라."
강태석은 침을 탁 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육중한 몸을 이끌고 검은 세단으로 향하던 그가 차 문을 열기 전, 뒤를 돌아보며 지유에게 비릿한 미소를 날렸다.
"성재환이는 다신 남원에 안 와, 아니 못 와. 그놈 애비가 어떤 인간인데 제 자식을 이 촌구석에 썩게 놔두겠냐? 헛꿈 깨고 현실을 봐라, 어린년아."
쿠웅 소리와 함께 차 문이 닫히고, 그랜저는 매연을 뿜으며 흙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골목에는 짓밟힌 참기름 냄새와 어머니의 서러운 오열만이 길게 이어졌다.
7. 팽나무에 새긴 맹세
어머니를 방으로 모셔 눕히고 청심환을 달여 먹인 뒤, 지유는 가게 앞마당의 흙탕물을 빗자루로 쓸어내렸다.
빗자루를 쥔 손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삼거리를 밀어버리겠다고? 성재환은 다시 오지 못한다고?'
강태석의 비열한 음성이 귓가에서 끊임없이 맴돌며 가슴을 후벼 팠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 거대한 탐욕의 괴물이, 이제는 어머니와 자신이 피땀 흘려 지켜온 마지막 보금자리마저 집어삼키려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성호석이 떠난 남원의 권력을 강태석이 차지하려 하고 있었다.
그 부패의 사슬이 얼마나 깊고 질긴지, 지유는 뼈저리게 실감했다.
날이 저물고 남원 시내에 푸른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민재가 땀투성이가 된 채 헐레벌떡 김밥집으로 뛰어 들어왔다.
"지유야! 강태석 그 개자식이 다녀갔다며! 너 다친 데는 없어? 아주머니는?"
민재는 씩씩거리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소식을 듣고 남원 시내 철물점 배달 일을 하던 도중 자전거 페달이 부러져라 밟고 달려온 것이었다.
"난 괜찮아, 민재야. 어머니도 방금 진정하고 주무셨어."
"그 새끼가 시장 보궐선거 나온다고 벌써부터 안하무인이야! 읍내 상가 번영회 사람들을 협박하고 돈을 찔러 넣고 난리도 아니래. 지유야, 너랑 아주머니…… 내가 지킬게.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 새끼들 이 가게에 손가락 하나 못 대게 할 거야."
민재의 거친 숨소리와 진심 어린 눈빛에 지유는 비로소 얼어붙었던 가슴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고마워, 민재야. 하지만 무모하게 맞서면 안 돼. 저들은 법도 경찰도 다 제 손안에 쥐고 있는 자들이야. 우리가 감정적으로 덤비면 저들이 쳐놓은 덫에 걸려들어."
"그럼 어떡하냐? 가만히 앉아서 당해?"
"버텨야 해."
지유는 단호하게 말했다.
"가게도, 우리 삶도,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여기서 버텨낼 거야. 재환이가 서울에서 법을 공부하고 있어. 저들이 가진 가짜 권력을 진짜 법으로 부숴버릴 칼을 만들고 있어."
지유는 앞치마를 벗어 개어두고 밖으로 나섰다.
"어디 가려고, 지유야?"
"광한루원에."
지유는 뒤돌아보지 않고 어둠이 내린 요천 둑길을 향해 걸었다.
밤의 광한루원은 낮의 소란스러움을 지우고 깊은 고요에 잠겨 있었다.
완월정에 켜진 몇 개의 보안등 불빛만이 은은하게 연못 물결을 비추고 있었다.
지유는 춘향관 뒤란, 팽나무 고목 앞으로 걸어갔다.
어둠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거대한 고목.
지유는 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아, 품속에서 재환의 학생증 증명사진과 흑청색 잉크로 적힌 엽서를 꺼냈다.
달빛 아래 비친 재환의 굳은 표정이 지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환아.
남원이 다시 어두워지고 있어.
네 아버지가 남겨두고 간 썩은 자리에, 더 흉측한 독버섯이 자라나고 있어.
강태석이 우리 가게를 빼앗겠다고 찾아왔어.
너는 다시 오지 못할 거라고 비웃었어.'
지유는 사진 뒷면에 적힌 '약속. 반드시 돌아온다. 成宰桓'이라는 글자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치밀어 올랐다.
절망이 아니었다.
슬픔도 아니었다.
그것은 억압과 불의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약하지만 결코 꺾이지 않는 들꽃 같은 저항의 불꽃이었다.
"난 믿어, 재환아."
지유의 목소리가 고요한 밤의 누원에 맑게 울려 퍼졌다.
"네가 아무리 높은 곳으로 올라가도, 세상이 너를 아무리 흔들어대도…… 너는 네가 한 약속을 저버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아."
지유는 일어서서 팽나무 둥치에 얼굴을 묻었다.
수백 년의 비바람을 견뎌낸 거목의 깊은 고요가 지유의 떨리는 영혼을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네가 올 때까지, 내가 이 남원을 지킬 거야. 삼거리 김밥집도, 우리 어머니도, 그리고 네가 돌아올 이 오작교도…… 내 목숨을 다해서 지켜낼 거야. 그러니까 너는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가. 가장 날카로운 정의의 칼이 되어서 돌아와."
남원의 밤하늘 위로 은하수가 푸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서울 성북동과 신림동 고시촌의 잿빛 골목에서 밤을 새우고 있을 소년과, 남원 팽나무 그늘 아래서 약속을 품에 안은 소녀.
두 사람의 계절은 잔인하도록 혹독한 시련을 예고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흑청색 맹세는 어둠 속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