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천변의 평화
1. 둑길에 이는 바람
초가을의 볕은 맑고 투명했다.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소란과 2층 법률사무소의 묵직한 서류철들을 뒤로하고 걸어 나온 요천(蓼川) 둑길 위에는, 지나간 여름의 상흔을 지워내려는 듯 유난히 시원한 강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성재환은 지유의 곁에서 보폭을 나란히 맞추며 천천히 발을 디뎠다.
검은색 정장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치고 셔츠 소매를 가볍게 걷어 올린 그의 손끝에 지유의 가녀린 손가락이 스쳤다.
잠시 망설이던 재환이 먼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지유의 손등을 덮었다.
작고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 안으로 파고들었다.
수년 동안 거친 칼바람과 피비린내 나는 압박 속에서 늘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그의 심장에, 형용할 수 없는 안도감이 파문처럼 번져 나갔다.
"지유야."
"응, 재환아."
지유가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을 햇살을 머금은 지유의 맑은 눈동자가 잔잔하게 일렁였다.
두 사람의 시선이 머문 곳은 둑길 아래로 넓게 펼쳐진 요천 변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규격 미달의 철근과 부실 콘크리트 잡석이 드러나 흉물스럽게 무너져 내렸던 제1공구 제방은, 이제 단단하고 육중한 화강암 축대와 정갈한 흙더미로 견고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그 위로 푸른 잔디가 촘촘히 뗏장을 이루며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검붉은 흙탕물 대신 푸르고 맑은 강물이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흐르고 있었다.
"제방이…… 참 단단해졌네."
지유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녀의 시선은 새로 쌓아 올린 둑길 너머, 저 멀리 보이는 하정리와 동충동의 정겨운 기와지붕들을 향해 있었다.
"그러게. 이제는 아무리 큰 폭우가 쏟아져도 이 물길이 구도심으로 넘쳐흐르지 않을 거야."
재환이 맞잡은 손에 부드럽게 힘을 주며 대답했다.
이 둑길을 무너뜨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을 흙탕물 속으로 밀어 넣었던 탐욕의 옹벽은 법정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정직한 흙과 돌, 시민들의 피땀 어린 손길이 그 자리를 메웠다.
바람이 수양버들 가지를 스치며 사각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오랜 악몽 끝에 찾아온 남원의 숨소리 같았다.
2. 자전거의 기억
둑길 중간쯤에 놓인 커다란 수양버들 그늘 아래에 이르자, 지유가 문득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기억나, 재환아? 우리 열여덟 살 봄에 여기서 마주쳤던 거."
재환의 눈가에도 아련한 그리움이 어렸다.
"내가 어떻게 잊겠어."
그 봄날, 완월정 뒤란에서 우연히 인연을 맺고 오작교를 지나 이 둑길로 달려왔을 때였다.
체인이 덜컹거리던 낡은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앞서 달리던 지유의 교복 치맛자락이 바람에 나부끼던 모습이 눈앞에 선연했다.
그때 지유가 그에게 선물했던 흑청색 잉크병, 그리고 가문의 죄악을 알지 못한 채 품고 있던 백부의 각인 만년필.
모든 비극과 기나긴 이별이 시작되기 전, 두 사람에게 허락되었던 가장 눈부신 계절이었다.
지유가 수양버들 줄기에 손을 얹으며 잔잔하게 말했다.
"그때 넌 항상 등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어. 남원 시장의 아들이라는 무게, 집안에서 거는 기대…… 어린 나이였는데도 네 눈빛이 너무 외로워 보여서,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네 등 뒤를 보면 가슴이 시렸어."
재환은 조용히 지유를 바라보았다.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자신이 짊어지고 있던 외로움의 근원이 부친의 뒤틀린 권력욕과 남원을 파괴하던 정경유착의 그늘이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자신이 떠나야만 했던 이유가 지유의 가정을 짓밟았던 거악의 횡포 때문이었다는 것을.
"그 짐을 내려놓는 데 7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어. 지유야, 그때 널 이 둑길에 홀로 남겨두고 서울행 기차를 탔던 그날부터…… 내 시간은 단 하루도 평온하게 흐른 적이 없었어."
재환의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차가운 신림동 단칸방에서 흑청색 잉크로 법전을 파고들던 밤들, 서초동 검찰청사 1142호에서 붉은 핀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검사가 되고, 법복을 입고, 남원으로 내려와 마침내 강태석을 법정에 세웠을 때까지도 난 내가 온전히 돌아왔다고 생각하지 못했어. 그놈들이 죗값을 치르고, 아버지의 원죄를 법으로 단죄하기 전까지는 내 발이 이 땅에 닿아 있는 것 같지 않았거든."
지유는 잡고 있던 재환의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두 뺨 사이에 부드럽게 감쌌다.
그녀의 따스한 살결이 재환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하지만 넌 돌아왔잖아. 도망치지 않고, 약속을 지키며, 가장 바르고 정직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주었어. 재환아, 이제는 그 무거운 짐 다 내려놓아도 돼. 넌 이미 남원을 지켰고, 우리 어머니의 한을 풀어주었고, 나를 지켜냈으니까."
지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이 맑은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라, 길고 험난했던 가시밭길을 지나온 자들만이 나눌 수 있는 숭고한 위로의 눈물이었다.
3. 흉터 위에 닿은 입맞춤
재환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지유의 발목 위, 단정한 무명 치마 아래로 드러난 무릎 언저리에 시선이 닿았다.
그곳에는 7년 전, 서울로 떠나던 관용차를 울며 뒤쫓다 남원 톨게이트 진입로 아스팔트에 넘어져 패였던 상흔이 여전히 희미한 흉터로 남아 있었다.
그 흉터는 지유가 겪어낸 인내의 증표이자, 재환의 가슴속에 평생 씻을 수 없는 죄책감으로 박혀 있던 가시였다.
재환이 천천히 무릎을 굽혔다.
둑길의 부드러운 풀밭 위에 한쪽 무릎을 꿇은 그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지유의 무릎 흉터 언저리를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그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재환아, 왜 이래…… 길 한복판에서……."
"미안하다, 지유야."
재환의 깊고 그윽한 눈동자가 오직 지유만을 담고 있었다.
"널 두고 떠났던 날, 네가 피를 흘리며 주저앉아 있을 때 달려와 안아주지 못했던 것. 그 7년 동안 차가운 김밥을 말며 홀로 거악의 폭압을 견디게 했던 것. 어머니의 빈소 앞에서도 손 한번 편히 잡아주지 못했던 것…… 전부 미안해."
재환은 떨리는 입술을 지유의 무릎 흉터 위에 조심스럽게 가져다 대었다.
거칠었던 아스팔트의 상처 위로 재환의 따스하고 경건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지유의 어깨가 작게 떨렸다.
그녀의 손이 재환의 단단한 어깨를 감싸 안았다.
흉터에 닿은 온기는 단순한 연인의 애정을 넘어, 과거의 모든 피눈물과 비극을 사르고 새살을 돋아나게 하는 성스러운 치유의 의식 같았다.
"재환아, 일어나…… 어서."
지유가 눈물을 흘리며 미소 지었다.
재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유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지유는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재환의 가슴팍에서 배어 나오는 은은한 비누 향과 지유의 옷깃에 밴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바람 속에서 하나로 섞여 들었다.
요천 물결 위로 부서지는 햇살처럼 찬란하고도 포근한 포옹이었다.
둑길 저편을 지나가던 자전거 탄 노인이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보며 사람 좋은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지나갔다.
더 이상 숨을 필요도, 두려워할 그림자도 없었다.
남원의 하늘은 끝없이 푸르고 높았다.
4. 평상에서 나눈 김밥
두 사람은 다시 손을 잡고 둑길을 내려와 요천 변 둔치에 마련된 소박한 나무 평상으로 향했다.
지유는 들고 온 작은 피크닉 바구니를 평상 위에 내려놓았다.
하얀 면보를 걷어내자, 은박지에 정갈하게 싸인 김밥 세 줄과 따뜻한 옥수수차가 든 보온병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무실 일 돕느라 점심도 제대로 못 챙겨 먹었잖아. 아침에 햅쌀 안쳐서 윤 씨 아저씨네 방앗간 참기름으로 싼 거야."
지유가 은박지를 조심스럽게 벗겨냈다.
반질반질 윤기가 흐르는 검은 김 위로 고소한 통깨가 듬뿍 뿌려져 있었고, 칼로 단정하게 썰어낸 단면에는 주황빛 당근, 초록빛 시금치, 노란 단무지와 계란지단이 꽉 들어차 있었다.
어머니 박순례가 평생을 지켜왔고, 이제는 지유가 온전히 이어받은 그 정직하고 깊은 맛의 김밥이었다.
재환은 젓가락도 쓰지 않고 손가락으로 김밥 한 조각을 집어 입에 넣었다.
입안 가득 퍼지는 고소한 참기름 향과 밥알의 찰기, 아삭거리는 채소들의 조화가 지친 몸과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었다.
"정말 맛있다, 지유야. 세상 그 어떤 진수성찬도 이 한 줄에 비할 수가 없어."
재환의 진심 어린 감탄에 지유의 얼굴에 수줍은 홍조가 번졌다.
지유도 김밥 하나를 집어 들며 작게 웃었다.
"엄마가 살아계실 때 늘 그러셨어. 음식 만드는 사람은 재료를 속이면 안 된다고, 먹는 사람의 하루를 지켜주는 마음으로 밥을 지어야 한다고. 강태석 그 사람들이 위생과를 보내고 참기름병을 깨뜨리며 짓밟으려 했던 것도, 결국 그 정직함이었던 것 같아."
"맞아. 불의는 정직함을 가장 두려워하니까."
재환이 보온병 뚜껑에 따뜻한 차를 따라 지유에게 건넸다.
"어제 박성두 어르신이 사무실을 찾아오셨을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만약 서울에 남아 대검 중수부의 칼날을 쥐고 있었다면, 그 어르신의 흙 묻은 신발과 굽은 등을 평생 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
지유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르신이 소장을 받아 들고 눈물 흘리실 때, 나도 뒤에서 가슴이 먹먹했어. 그분에게 필요했던 건 거창한 국가 권력이 아니라, 자기 억울한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편이 되어줄 단 한 사람이었잖아."
"그래. 법은 높은 누각 위에 있는 게 아니라, 이렇게 사람들의 발밑에서 흙탕물을 막아주는 디딤돌이어야 해. 그걸 가르쳐준 건 서울의 법전이 아니라, 바로 너였어, 지유야."
재환의 깊은 눈빛에 지유는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평상 위로 드리운 나뭇잎 사이로 초가을의 햇살이 금가루처럼 쏟아져 내렸다.
두 사람은 천천히 김밥을 나누어 먹으며, 지난 7년간 단 한 번도 누려보지 못했던 평범하고도 찬란한 식사의 기쁨을 온몸으로 음미했다.
소박한 김밥 두 줄이 안겨주는 행복은, 권력의 정점에서 누릴 수 있는 그 어떤 영예보다 달콤하고 단단했다.
5. 약속의 증표
식사를 마친 재환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검은 벨벳 케이스를 꺼냈다.
지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향했다.
케이스가 열리자, 검은 옻칠 위로 은은한 광택을 뿜어내는 독일제 각인 만년필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빛 닙과 캡 상단에 새겨진 성재환의 이름, 그리고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이라는 라틴어 법언.
그리고 그 곁에는 지유가 학창 시절 용돈을 모아 선물했던, 이제는 절반쯤 비어 있는 흑청색 잉크병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재환이 만년필을 꺼내 들어 지유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서늘하면서도 묵직한 옻칠의 감촉이 지유의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이 만년필로 강태석의 구속영장을 썼고, 아버지의 병합 기소장을 썼고, 마지막 징역 15년의 공소장을 완성했어. 그리고 어제는…… 힘없는 농민의 억울함을 밝힐 첫 번째 소장을 적었지."
재환이 지유의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지유야, 이 펜에 새겨진 글귀처럼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겠다는 내 신념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어. 하지만 그 정의를 끝까지 지탱할 수 있었던 건, 네가 준 이 흑청색 잉크와 네가 보내준 무조건적인 믿음 덕분이었어."
지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만년필 캡을 매만지는 그녀의 손가락 끝에 깊은 감동이 서렸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재환이 이 작은 도구에 자신의 온 영혼과 청춘, 그리고 남원을 향한 맹세를 담아왔다는 것을.
"재환아……."
"이제 이 만년필은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고 죄를 단죄하는 칼날이 아니라, 억울한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빼앗긴 권리를 되찾아주는 약속의 펜이 될 거야. 그리고 그 약속의 시작은, 너와 내가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서약이어야 해."
재환이 지유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재판정에서의 최종 구형보다 더 단호하고 웅장한 진심이 실려 있었다.
"지유야. 남원에서, 내 평생을 네 곁에서 살아가고 싶어. 삼거리 김밥집의 불이 켜질 때 네 마주편에서 문을 열고, 네가 지친 하루를 마칠 때 곁에서 손을 잡아주는 남편이 되고 싶어. 나와 결혼해 주겠니?"
바람이 멈춘 듯 요천 변 일대가 일순간 고요해졌다.
흐르는 강물 소리와 두 사람의 가쁜 숨소리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지유의 입술이 가늘게 떨려왔다.
광한루원 완월정에서의 혼례식 날 부케를 받았을 때 나누었던 무언의 약속이, 이제는 현실의 가장 아름다운 고백이 되어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지유는 만년필을 두 손으로 소중히 쥐고 가슴에 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녀의 입가에는 세상에서 가장 눈부신 미소가 피어올랐다.
"응, 재환아. 천 번을 물어도 내 대답은 같아. 평생 네 곁에서, 네가 가는 길을 함께 걸을게."
재환이 지유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심장이 맞닿아 하나의 박동으로 뛰기 시작했다.
7년의 고통과 인내, 피눈물로 얼룩졌던 남원의 비극이 마침내 두 사람의 지고지순한 사랑 속에서 온전한 구원을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6. 우포리에서 온 그림자
노을이 붉게 타오르며 요천 물결을 황금빛으로 물들일 무렵, 두 사람은 둑길을 따라 천천히 삼거리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정답게 겹쳐졌다.
골목 어귀에 들어서자 목공소 윤 씨가 대패질을 멈추고 환하게 손을 흔들었고, 공설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가 고소한 깨 볶는 냄새를 풍기며 눈인사를 건넸다.
동문 우체국 창가에서는 집배원 박 씨가 편지 분류 작업을 하다 말고 유리창 너머로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남원 구도심 삼거리는 이제 공포와 폭압의 그늘에서 벗어나, 이웃들의 온기와 정이 넘쳐나는 평화로운 삶의 터전으로 완전히 되살아나 있었다.
지유의 김밥집 처마 밑에 걸린 원목 간판, '끝까지 남은 사랑'이라는 글귀가 석양빛을 받아 깊고 그윽한 흑청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재환아, 잠깐만 기다려. 저녁에 민재랑 하은이 오기로 했잖아. 사무실에서 먹을 따뜻한 국물 좀 끓여서 올라갈게."
지유가 김밥집 문을 열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 난 사무실에 올라가서 박성두 어르신 사건 기록을 마저 검토하고 있을게."
재환은 지유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맞은편 2층 법률사무소 계단을 올랐다.
계단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소리가 정겨웠다.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재환은 창문을 활짝 열어 가을 저녁의 선선한 바람을 맞이했다.
지리산 육송으로 짠 넓은 평상형 원목 탁자 위에는 어제 접수한 토지수용처분 무효확인 소장과 지적도 등본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재환은 책상 앞에 앉아 각인 만년필의 뚜껑을 열었다.
흑청색 잉크를 머금은 금빛 닙이 백지 위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지며 법리 검토 의견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권력의 칼날을 내려놓고 약자의 방패를 든 자의 손길은 더없이 침착하고 확신에 차 있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밖이 어둑어둑해지고 골목길에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질 무렵이었다.
사무실 아래 1층 계단 쪽에서 조심스럽고도 거친 발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거리며 계단을 딛는 발걸음은 어딘가 절뚝거리는 듯 불규칙했고, 가쁜 숨을 몰아쉬는 거친 소리가 2층 복도까지 울렸다.
재환이 펜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단순한 손님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극심한 절박함과 불안이 실려 있는 무거운 발소리였다.
이윽고 낡은 유리문이 조심스럽게 밀리며, 남루한 차림의 중년 사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흙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은 허름한 작업복 조끼를 입은 사내였다.
한쪽 다리를 가볍게 절고 있는 그의 얼굴은 햇볕에 검게 그을려 있었고,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리고 있었다.
사내는 떨리는 눈빛으로 사무실 안을 둘러보다가, 책상 앞에 앉은 성재환을 발견하자마자 문간에 털썩 주저앉듯 무릎을 꿇었다.
"여, 여기가…… 성재환 변호사님 계신 곳 맞습니까요?"
사내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심하게 갈라져 있었다.
재환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사내에게 다가갔다.
"네, 맞습니다. 제가 성재환입니다. 어르신, 바닥이 차갑습니다. 어서 일어나서 이쪽 평상으로 올라오십시오."
재환이 사내의 겨드랑이를 부축해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사내는 재환의 소매를 부여잡은 채 완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친 손마디가 재환의 옷자락을 으스러지도록 쥐고 있었다.
사내의 눈에 차오른 눈물이 주름진 뺨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변호사님…… 제발, 제발 저희 좀 살려주십시오. 신문에서 변호사님이 남원에 법률사무소를 여셨다는 기사를 보고…… 새벽부터 지리산 자락에서 트럭을 얻어 타고 여기까지 단숨에 달려왔습니다."
재환의 눈빛이 순식간에 예리하게 가라앉았다.
"지리산 자락에서 오셨습니까? 무슨 일이십니까, 진정하시고 말씀해 보십시오."
사내는 떨리는 손으로 품속을 뒤적였다.
그가 꺼내놓은 것은 흙과 땀에 찌들어 모서리가 닳아빠진 낡은 서류 봉투였다.
봉투 겉면에는 붉은 매직으로 삐뚤빼뚤하게 '남원군 산내면 우포리 산 14번지 대책위원회'라는 글씨가 적혀 있었다.
사내가 울부짖듯 말을 토해냈다.
"강태석 시장 놈이 감옥에 들어갔다고 해서 세상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아닙니다요, 변호사님! 그놈 밑에서 지리산 땅을 헐값에 강탈해 가던 토건 놈들이, 강태석이 징역을 살게 되자 추징금을 피하려고 벌써부터 다른 깡패 놈들한테 땅을 팔아치우고 불법 공사를 밀어붙이고 있습니다요! 당장 내일 아침이면 저희 마을 논밭 위로 불도저가 들어온다고 합니다! 군청에 가도, 경찰서에 가도 시장이 바뀌는 과도기라며 아무도 우리 말을 들어주지 않습니다!"
사내의 절규가 좁은 사무실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그것은 강태석이라는 거악의 수괴가 쓰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 남원 땅 깊숙이 뿌리내린 토착 비리의 잔뿌리들이 여전히 살아 숨 쉬며 힘없는 농민들의 목을 조르고 있다는 참혹한 증언이었다.
바로 그때, 지유가 쟁반에 따뜻한 찻잔과 갓 끓인 된장국을 받쳐 들고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간에 엎드려 오열하는 농민과, 그 앞에 서늘한 눈빛으로 낡은 서류 봉투를 응시하고 있는 성재환의 모습이 지유의 시야에 들어왔다.
지유의 눈빛이 흔들렸다.
재환이 천천히 허리를 숙여 사내가 내민 서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를 뜯어내자, 1993년 산내면 일대 임야와 농지를 강제로 수용하며 날조했던 허위 매매계약서와 조폭들의 폭력 각서가 쏟아져 나왔다.
각인 만년필을 쥔 재환의 손가락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요천 변의 평화는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원의 가장 낮고 어두운 곳에서 여전히 고통받고 있는 이들을 지켜내기 위한, 또 다른 거대한 싸움의 시작이었다.
재환이 고개를 들어 지유를 바라보았다.
지유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고 농민에게 다가갔다.
성재환의 가슴속에서, 약자를 위한 방패가 되어 법을 세우겠다는 사법적 소명의 불꽃이 다시금 뜨겁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