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익 법률 사무소의 꿈
1. 먼지 쌓인 유리창 너머
동문 우체국 뒷골목의 새벽안개는 늘 서늘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밤새 남원을 적시던 실비는 멎었으나, 처마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좁은 골목길의 침묵을 일정하게 두드리고 있었다.
성재환은 삐걱거리는 목조 계단을 밟고 2층으로 올라섰다.
과거 한약방과 복덕방이 차례로 거쳐 가며 남긴 낡은 냄새가 켜켜이 밴 공간이었다.
달착지근하게 말라붙은 감초 냄새와 눅눅한 회반죽 냄새, 그리고 오랫동안 사람의 온기가 닿지 않아 굳어버린 차가운 먼지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감돌았다.
손을 뻗어 두껍게 먼지가 앉은 통유리창을 쓸어내렸다.
손끝을 따라 맑은 궤적이 그어지며, 길 건너편의 풍경이 흐릿한 안개 너머로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곳에는 전날 밤 이웃들의 손길로 단정하게 새단장을 마친 삼거리 김밥집이 서 있었다.
가게 처마 밑, 지리산 육송(陸松)으로 깎아 만든 원목 간판 위에는 짙은 흑청색 안료로 새겨진 글귀가 어스름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끝까지 남은 사랑.'
재환의 입가에 엷고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30년 동안 이어진 토착 카르텔의 폭압과 쇠파이프, 붉은 페인트의 공포 앞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자리를 지켜낸 지유의 결기이자, 남원의 힘없는 이웃들이 함께 피워 올린 기적의 이름이었다.
"그렇게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으면, 김밥집 간판이 닳아 없어지겠습니다."
뒤편에서 익숙하고 쾌활한 목소리가 계단 난간을 울리며 올라왔다.
취재 수첩을 옆구리에 낀 최민재였다.
어깨에 카메라 가방을 둘러멘 민재는 막 인쇄되어 나온 따끈한 조간신문 한 뭉치를 겨드랑이에 끼고 있었다.
민재의 이마에는 옅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새벽이슬처럼 맑고 또렷했다.
"민재 너였구나. 이른 아침부터 어쩐 일이야?"
"남원일보 수습 딱지 떼고 정식 사회부 기자가 됐는데, 이 역사적인 현장을 어떻게 지나칩니까? 서울 대검찰청 특임팀장이자 서초동의 살아 있는 전설이 될 뻔했던 성재환 검사님이, 전라북도 남원 구도심 곰팡내 나는 2층 목조 건물에 눌러앉겠다는데 말입니다."
민재는 성큼성큼 다가와 바닥에 굴러다니던 낡은 사과 궤짝 하나를 발로 툭 차서 먼지를 털어내더니 털썩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들고 온 신문 한 부를 재환에게 불쑥 내밀었다.
신문 1면 톱기사에는 굵은 활자가 박혀 있었다.
[서울고검 공판부 비자금 수수 긴급 체포… 강태석 전 남원시장 병보석 기도 완전 분쇄]
[남원지청 특별수사전담 성재환 검사, 거악의 줄기 끊어내다]
재환은 활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이름 석 자가 활자화되어 전국에 뿌려졌지만, 심장은 놀라울 정도로 고요했다.
어젯밤 서울고검 공판부장실의 문을 박차고 들어가 스위스 비자금 장부를 들이밀던 순간에도, 대검찰청 복도에서 부장검사들이 보내던 그 뜨겁고도 탐욕스러운 시선 앞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온전한 평온이 지금 이 먼지투성이 방 안에 감돌고 있었다.
"기사 잘 나왔네. 서울 본사에서 특종을 뺏겼다고 난리가 났겠어."
"난리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중앙 일간지 선배들이 나한테 전화해서 성재환 검사 인터뷰 한 번만 잡아달라고 애걸복걸을 하더군요. 대검 중수부 특임팀장이면 대한민국 검사로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꽃길인데, 왜 새벽차를 타고 남원으로 도망치듯 내려갔냐고요."
민재가 장난기 섞인 눈으로 재환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도 그게 참 궁금하거든, 성 검사님? 그 잘난 검사 배지 달고 대검 중수부에서 호령하면 청와대든 재벌이든 다 무릎 꿇릴 수 있었을 텐데. 도대체 왜 다 집어던지고 여기로 온 겁니까?"
2. 법복을 벗는 이유
재환은 양복 안주머니에서 묵직한 물건 하나를 꺼냈다.
백부에게 물려받아 수험 시절과 특수부 검사 시절 내내 품에 지녔던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이었다.
캡 상단에는 한자로 '成宰桓'이라는 이름과 함께, 라틴어 법언이 선명히 새겨져 있었다.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재환은 만년필의 매끄러운 옻칠 표면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지유가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용돈을 모아 사주었던 흑청색 잉크의 냄새가 펜촉 끝에서 아스라이 풍겨오는 듯했다.
"민재야, 어제 서울고검 공판부장실에 들이닥쳤을 때 말이다."
재환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방 책상 위에 수억 원짜리 무기명 양도성예금증서와 스위스 비밀 계좌 전표가 널브러져 있었어. 그 늙은 부장검사는 손을 벌벌 떨면서도 내게 그러더군. '성 검사, 우리가 같은 식구 아니냐. 이번 한 번만 눈감아주면 자네 앞길은 대검 차장까지 탄탄대로다'라고."
민재의 표정에서 장난기가 걷히고 진중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순간 깨달았어. 국가가 내 손에 쥐여준 그 막강한 기소권과 수사지휘권이라는 칼날이, 서울 한복판에서는 권력자들의 목숨을 연명하고 제 잇속을 채우는 비단옷으로 둔갑해 있더라는 걸."
재환은 창밖을 응시했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한 삼거리 골목길 너머로, 이른 새벽부터 리어카를 끌고 채소를 나르는 동문 청과물 김 씨와 자전거를 타고 우편물을 정리하는 집배원 박 씨의 모습이 보였다.
"그 비단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는 동안, 정작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남원의 농민들과 상인들은 어떻게 살았지? 시장이라는 자가 조폭을 끼고 들어와 멀쩡한 과수원을 빼앗아 자갈밭으로 바꿔치기하고, 말 안 듣는다고 처마를 뜯어내고, 붉은 페인트를 칠하고 쇠파이프를 휘둘러도…… 법은 그들 곁에 없었어."
재환의 눈빛에 묵직한 결의가 실렸다.
"법은 힘 있는 자들이 제 성채를 지키기 위해 쌓아 올린 철옹성이 아니야.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이 오늘 하루를 버티고 내일을 꿈꿀 수 있게 해주는 최소한의 약속이어야 해. 내가 검사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은 강태석과 그 배후들의 숨통을 법적으로 끊어놓는 것까지였어. 그 뒤에 남겨진 사람들의 삶을 지키는 건, 검찰청 높은 의자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래서…… 검사를 그만두겠다는 겁니까? 진심으로?"
민재가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어제 대검 중수부장님 집무실에 사직서를 올려두고 내려왔어. 총장님 결재가 나는 대로 정식 수리될 거다."
재환은 담담하게 미소를 지었다.
"난 이제 검사가 아니라 변호사로 살 거다. 관청의 높은 담벼락 뒤에서 피의자를 불러다 윽박지르는 관료가 아니라,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디 하소연할 데 없어 가슴을 치는 이 골목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변호사. 돈이 없어서 소송 서류 한 장 쓰지 못해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서류를 대신 써주는 그런 법률가가 될 거야."
민재는 궤짝에서 천천히 일어나 재환의 어깨를 툭 쳤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제길, 역시 성재환답네. 하긴, 네가 서울에서 부장검사 달고 으스대며 살았으면 난 너 취재도 안 하고 친구 끊었을 거다."
민재는 신문 뭉치를 탁자 대용으로 쓰이던 낡은 합판 위에 내려놓으며 씩 웃었다.
"좋습니다, 성 변호사님. 남원일보 1면에 대문짝만하게 박아주죠. '서초동을 버리고 요천 변으로 돌아온 검사, 약자들의 방패가 되다'라고."
3. 2층 방의 설계도
두 사람은 팔소매를 걷어붙였다.
방치되어 있던 2층 사무실은 손볼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바닥 곳곳에는 썩은 장판이 뜯겨 나가 있었고, 벽면의 낡은 도배지는 누렇게 바래 흉물스럽게 들떠 있었다.
"일단 쓸고 닦는 것부터 시작하자."
재환이 구석에 놓여 있던 낡은 싸리빗자루를 집어 들자, 민재가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잠깐만요, 성 변호사님. 법 조문은 달달 외워도 노가다는 초짜 아닙니까? 이런 건 전문가의 손길이 닿아야지, 빗자루질 몇 번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민재가 창문을 활짝 열고 길 아래를 향해 목청을 높였다.
"윤 씨 아저씨! 잠깐만 위로 올라와 보세요! 특종 감입니다!"
길 건너편 목공소 앞에서 지리산 대패를 손질하던 윤 씨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작업복 차림의 윤 씨는 굵은 팔뚝을 털며 헐레벌떡 계단을 뛰어 올라왔다.
"무슨 일인데 아침부터 호들갑이여, 최 기자? 아니, 성 검사님 아니신가! 서울 가셨다고 들었는디 언제 또 남원에 내려오셨소?"
윤 씨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재환의 손을 덥석 잡았다.
거칠고 투박하지만 더없이 따뜻한 목수의 손이었다.
"어젯밤에 완전히 내려왔습니다, 아저씨. 이제 서울 갈 일 없습니다."
재환이 허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하자, 민재가 옆에서 거들었다.
"윤 씨 아저씨, 놀라지 마세요. 우리 성 검사님이 글쎄 검사 때려치우고 이 자리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겠답니다. 그것도 돈 많은 양반들 변호하는 게 아니라, 우리 같은 서민들 억울한 일 무료로 봐주는 공익 법률사무소를요!"
"뭐, 뭐시여?!"
윤 씨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재환의 단정한 얼굴과 낡은 사무실 내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니…… 그 귀하디귀한 나랏님 벼슬을 버리고, 이 꾀죄죄한 골목 바닥에서 변호사를 한단 말이요? 지유 각시 곁에 있으려고?"
"지유 곁에 있고 싶은 마음도 맞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재환은 창문 너머 골목길을 가리켰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남원은 힘 있는 자들의 놀이터였습니다. 시청과 경찰, 토건 업자들이 결탁해서 힘없는 상인들의 점포를 헐값에 강탈하고, 농민들의 땅을 서류 한 장으로 가로챘습니다. 지유 어머니께서도 그 지독한 공권력의 횡포에 피눈물을 흘리시다 돌아가셨고요. 다시는 남원에서 법을 몰라 억울하게 눈물 흘리는 사람이 없도록, 제가 이 자리에서 문을 열고 기다리려 합니다."
윤 씨의 눈가가 잘게 떨렸다.
그는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거친 손등으로 눈두덩을 쓱 훔쳐냈다.
"참말로…… 참말로 고마운 양반이네. 성 검사님, 아니 성 변호사님. 이 윤가 놈이 목수 인생 삼십 년인데, 오늘처럼 가슴 뛰는 날이 없었소. 내 당장 목공소 연장 싹 다 긁어모아 올랑게, 인테리어 걱정일랑 허덜 마시오!"
윤 씨는 계단이 부서져라 쿵쾅거리며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잠시 후, 골목길은 요란한 활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윤 씨의 목공소에서 망치와 톱, 수평계와 대패가 올라왔고, 동문 우체국의 박 씨는 배달을 나가기 전 짬을 내어 대걸레와 양동이를 들고 뛰어왔다.
공설 방앗간의 배 씨 아주머니는 갓 쪄낸 따끈한 시루떡을 함지박에 담아 머리에 이고 올라왔다.
"세상에, 성 검사님이 우리 동네 변호사님이 되신다며? 아이고, 이제 남원 군청 놈들이 우리한테 억지 부리면 몽둥이 대신 성 변호사님한테 달려가면 되겠네!"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낡은 건물 안을 가득 메웠다.
민재는 벽면에 붙어 있던 낡은 도배지를 신나게 뜯어냈고, 윤 씨는 삐걱거리던 창틀을 편백나무 각재로 덧대어 수리하기 시작했다.
재환 역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바닥의 깨진 타일을 걷어내며 구슬땀을 흘렸다.
그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이웃들의 손길 하나하나가 모여 흉물스럽던 폐가는 서서히 사람의 온기가 숨 쉬는 안식처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4. 지유의 찻잔과 첫 번째 약속
점심나절이 가까워지자, 계단 쪽에서 조심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은은한 들기름 냄새와 구수한 보리차 향기가 계단을 타고 먼저 올라왔다.
하얀 앞치마를 두른 한지유였다.
양손에는 갓 말아낸 통통한 김밥 접시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보리차 주전자가 들려 있었다.
지유의 단정한 이마에는 맑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지만, 재환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호수처럼 깊고 따뜻했다.
"다들 땀 흘리시는데, 요기라도 하시면서 하세요."
지유의 맑은 목소리에 분주하던 공구 소리가 일제히 멈추었다.
"아이고, 지유 각시! 안 그래도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요천 둑 터지듯 났는디, 어찌 알고 이리 맛난 김밥을 가져왔소!"
윤 씨가 톱을 내려놓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민재는 잽싸게 합판 위에 신문지를 깔고 김밥 접시를 받아 들었다.
"지유야, 너 진짜 대단하다. 성 변호사님이 오늘 새벽에 서울 버리고 내려왔다고 하길래 너한테 등짝이라도 맞을 줄 알았더니, 아침부터 내조가 아주 완벽하네."
민재의 짓궂은 농담에 지유는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지만, 이내 고개를 들어 재환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재환 씨가 있어야 할 자리가 바로 여기니까요. 서울의 높은 자리보다, 이 낡은 골목에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는 게 재환 씨가 진짜 행복해지는 길이라는 걸 아니까요."
재환은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7년 전, 서울로 강제 압송되던 기차 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쥐었던 만년필.
어머니를 잃고 쇠파이프와 붉은 페인트의 테러 속에서도 김밥집을 지켜냈던 지유의 처절한 인내.
그 모든 고통의 시간들이 바로 오늘, 이 작고 따스한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만 같았다.
이웃들이 둘러앉아 김밥을 나누어 먹으며 웃음꽃을 피우는 사이, 재환과 지유는 창가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서 나란히 섰다.
지유는 품 안에서 하얀 도자기 찻잔 두 개를 꺼냈다.
어머니 박순례가 생전에 가장 아끼던, 은은한 청자 빛이 감도는 소박한 찻잔이었다.
지유는 따뜻한 보리차를 조심스레 따라 재환의 손에 쥐여주었다.
"어머니가 쓰시던 잔이에요. 가장 귀한 손님이 오시면 내어놓으시던 잔인데…… 오늘 이 방에 제일 먼저 두고 싶었어요."
찻잔을 감싼 재환의 손바닥으로 깊은 온기가 전해졌다.
"고마워, 지유야."
재환은 찻잔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속삭였다.
"어젯밤에 결심했어. 이 방에 커다란 소파나 화려한 유리 탁자는 놓지 않을 거야. 대신 아주 소박하고 넓은 평상 같은 원목 탁자를 둘 생각이야. 누구든 흙 묻은 고무신을 신고 올라와도 부끄럽지 않고, 차 한잔 마시며 억울한 사연을 편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자리."
지유의 눈가에 투명한 감동이 어렸다.
"참 재환 씨다운 생각이에요. 법이라는 게, 늘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은 쳐다보기도 힘들었잖아요. 시청 민원실에 가도 문턱이 높아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 붙이고 돌아오던 이웃들이 태반이었어요."
"그래. 그래서 사무실 이름도 거창하게 짓지 않을 생각이야. 그냥 '성재환 법률사무소'라고만 쓰고, 문패 밑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어둘 거야."
재환은 지유의 맑은 눈을 바라보며 힘주어 말했다.
"'억울한 눈물을 닦아주는 곳'."
지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이 재환의 거친 손등 위에 포개졌다.
두 사람의 시선은 창밖 요천의 푸른 물결과, 그 너머로 우뚝 솟은 지리산 자락의 능선을 향해 길게 이어졌다.
5. 첫 번째 의뢰인의 발소리
오후가 되자 작업은 한층 속도를 냈다.
뜯겨 나갔던 벽면에는 화사한 미색 한지가 정갈하게 발라졌고, 윤 씨의 솜씨로 다듬어진 지리산 육송 책상이 방 한가운데에 당당하게 자리를 잡았다.
책상 뒤편 벽면에는 민재가 구해다 준 두툼한 법률 서적들이 가지런히 꽂혔다.
육법전서와 형사소송법 주해, 대법원 판례집, 그리고 재환이 신림동 고시촌 시절부터 손때 묻혀가며 정리했던 방대한 판례 노트들이 서가를 채웠다.
재환은 자신의 책상 정중앙에 검은 옻칠 만년필과 지유의 흑청색 잉크병을 경건하게 올려놓았다.
사무실 한구석에는 지유가 가져다 놓은 작은 풍경(風磬) 하나가 걸렸다.
바람이 창문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맑고 청아한 쇳소리가 방 안을 맑게 울렸다.
"이제 제법 그럴듯한 법률사무소 꼴이 납니다, 성 변호사님."
민재가 땀에 젖은 수건으로 목을 닦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웃들은 내일 간판을 정식으로 달아주겠다며 각자의 일터로 돌아갔고, 사무실에는 재환과 민재, 그리고 지유 세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노을이 붉게 타오르며 2층 유리창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때였다.
계단 아래에서 몹시 조심스럽고 불안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절뚝거리는 듯 불규칙한 발걸음 소리.
누군가 올라올까 말까 망설이며 한참을 서성이다가, 삐걱거리는 목조 난간을 부여잡고 천천히 계단을 밟아 올라오는 소리였다.
세 사람의 시선이 일제히 계단 입구로 쏠렸다.
이윽고 문턱 너머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흙먼지가 잔뜩 묻은 낡은 점퍼를 입은 예순 남짓의 노인이었다.
남원 외곽에서 농사를 짓는 듯 햇볕에 까맣게 탄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고, 거친 손에는 꼬깃꼬깃하게 접힌 누런 서류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노인은 사무실 안의 깨끗한 풍경과 단정한 세 사람의 모습을 보더니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아이고…… 죄, 죄송합니다. 내가 길을 잘못 들었는갑소. 여그가…… 여그가 억울한 일 봐주는 변호사님이 계시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디…… 아직 문을 안 연 모양이구만요."
노인은 흙 묻은 장화가 바닥을 더럽힐까 두려운 듯 문밖으로 발을 빼려 했다.
재환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문가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노인의 거칠고 메마른 두 손을 덥석 잡았다.
"아닙니다, 어르신. 잘 찾아오셨습니다."
재환의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성재환 법률사무소 맞습니다. 오늘 막 문을 열었습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하지맨…… 내 신발에 흙이 잔뜩 묻어서…… 새로 칠한 방을 버릴 텐디……."
노인이 안절부절못하자, 지유가 다가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노인의 팔을 부축했다.
"괜찮아요, 어르신. 흙은 털어내면 그만이에요. 이 방은 어르신 같은 분들을 위해 만든 방인걸요. 어서 와서 따뜻한 차 한잔 드세요."
지유는 노인을 방 한가운데 놓인 육송 탁자 의자로 정중히 안내했다.
그러고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도자기 잔에 보리차를 따라 노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노인은 따뜻한 찻잔을 쥐고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벌벌 떨리는 노인의 손을 통해 찻잔 속의 물결이 잘게 흔들렸다.
재환은 노인의 맞은편에 단정하게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어르신, 어떤 일 때문에 저를 찾아오셨습니까? 제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편안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품 안에서 꼬깃꼬깃한 누런 서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1992년도 남원군청의 직인이 찍힌 낡은 토지 수용 확인서였다.
"변호사님…… 내가 요천 밑바닥에서 삼십 년 동안 피땀 흘려 일군 논 다섯 마지기가 있었소. 근디 삼거리 토건 강태석 패거리들이…… 군청 놈들하고 짜고 관광단지 도로를 낸답시고 공시지가도 안 되는 헐값에 강제로 뺏어갔소."
노인의 눈에서 마침내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서류 위로 번졌다.
"이의신청을 하려고 군청에 갔더니 몽둥이로 두들겨 패서 쫓아내고, 법원에 소송을 내려고 전주까지 찾아갔는디 변호사 놈들이 착수금 천만 원을 내놓으라며 문전박대를 합디다. 돈 없는 놈은 논을 뺏겨도 하소연할 데가 없어서…… 지난 오 년 동안 화병으로 마누라는 죽고, 나는 농약 먹고 죽으려다가…… 오늘 신문에서 성 검사님이 남원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보고 염치없이 달려왔소."
노인은 마침내 의자에서 바닥으로 풀썩 무릎을 꿇으며 통곡했다.
"변호사님…… 제발 우리 마누라 눈 좀 감게 해주시오. 내 논을 다 되찾지 못해도 좋응게, 그놈들이 도둑놈이었다는 것만이라도 법으로 밝혀주시오! 수임료는…… 수임료는 내가 올가을에 벼를 베면 쌀 두 가마니라도 꼭 갚겠소……!"
6. 흑청색 잉크의 맹세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은 노인을 양팔로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노인의 마르고 앙상한 어깨가 서러움으로 심하게 들썩거리고 있었다.
"어르신, 바닥에 앉지 마십시오. 법 앞에 억울한 눈물을 흘리는 분이 무릎을 꿇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재환은 노인을 다시 의자에 앉히고, 지유가 건네준 하얀 손수건으로 노인의 눈물을 정성스레 닦아주었다.
민재는 취재 수첩을 꺼내 들고 서류의 날짜와 수용 필지 번호를 묵묵히 받아 적기 시작했다.
재환은 탁자 위의 낡은 토지 수용 확인서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1992년 가을, 강태석과 결탁했던 남원군청 지적계가 허위 공익사업 명목으로 토지를 헐값 수용하고, 그 배후에서 삼거리 토건 명의로 환지 처분을 조작한 명백한 행정 사기 사건이었다.
강태석은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철창에 갇혔으나, 그자가 남긴 거대한 부패의 잔재와 힘없는 피해자들의 피눈물은 여전히 남원 땅 곳곳에 흩어져 신음하고 있었던 것이다.
재환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는 것을 느꼈다.
검사로서 거악의 수괴를 잡아넣은 것은 끝이 아니었다.
진정한 정의의 완성은, 바로 이렇게 짓밟히고 빼앗긴 채 버려진 이들의 상처를 하나하나 어루만지고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이었다.
재환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검은 옻칠 만년필을 쥐었다.
캡을 열자 금빛 닙이 저녁노을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그는 지유가 선물한 흑청색 잉크병의 뚜껑을 열고, 만년필의 피스톤을 천천히 돌려 깊고 푸른 잉크를 가득 빨아올렸다.
'약속은 살아 있다.'
재환은 깨끗한 백지 한 장을 노인의 서류 옆에 펼쳐놓았다.
그리고 만년필 촉을 종이 위에 대었다.
사각, 사각.
고요한 사무실 안에 단호하고 힘찬 필기음이 울려 퍼졌다.
종이 위에는 흑청색 글씨로 선명한 표제가 적혀 내려갔다.
[남원군 토지 강제수용처분 무효확인 및 소유권이전등기 말소 청구의 소]
[원고: 박성두 / 소송대리인: 변호사 성재환]
재환은 펜을 멈추고 노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법정에 섰던 그 어떤 순간보다 서슬 퍼렇고, 동시에 한없이 자애로웠다.
"어르신, 쌀 두 가마니는 넣어두십시오. 이 소송의 수임료는 이미 받았습니다."
"예……? 내가 돈 한 푼 안 드렸는디, 무얼 받으셨단 말씀이오?"
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재환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만년필을 가리켰다.
"어르신께서 흘리신 그 억울한 눈물과, 법을 다시 믿어보겠다고 이 낡은 계단을 올라와 주신 그 용기. 그것이 제게는 세상 그 어떤 착수금보다 무거운 대가입니다."
재환은 다시 펜을 놀려 소장의 청구 원인을 거침없이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유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눈가에도 벅찬 눈물이 맺혀 있었다.
7년 전 요천 둑길에서 자전거를 타며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던 소년.
신림동 고시촌의 피눈물 나는 밤을 견뎌내고 검사가 되어 돌아와 거악을 심판했던 청년.
그리고 이제는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약자들의 손을 잡아주는 참된 법률가가 된 성재환.
창밖으로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고 있었지만, 삼거리 김밥집 맞은편 2층 '성재환 법률사무소'의 불빛은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등대처럼 골목길을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것은 권력의 횡포에 짓밟혔던 남원의 모든 약자들에게 건네는, 가장 따뜻하고 정의로운 첫 번째 약속이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