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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05화

지유의 배려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어둠 속에 멈춰 선 관용차

 

자정을 향해 치닫는 밤하늘은 물감을 쏟아부은 듯 짙고 먹먹했다.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을 타고 쏜살같이 질주하던 검은 관용차가 비상등을 깜빡이며 천안 부근 졸음쉼터 갓길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엔진이 낮게 가르랑거리다 멎자, 차 안에는 숨 막힐 듯한 침묵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앞좌석에 앉아 있던 대검찰청 한진우 부장검사가 고개를 돌려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뒷좌석 창가에 기댄 성재환 검사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그의 두 손은 코트 안주머니 위에 닿아 있었다.

 

그 안에는 한지유가 손수 꽂아준 각인 만년필과, 빗물과 눈물로 얼룩졌던 새하얀 면 손수건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성 검사."

 

한진우가 낮게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정까지 서초동 대검 청사 8층 중수부 회의실로 들어서야 하네. 총장님께서 직접 특임수사팀 현판을 걸고 자네에게 구속집행정지 취소 신청 결재권을 넘기기로 하셨어. 만약 1분이라도 늦으면, 서울고검 공판부와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야밤을 틈타 강태석의 병보석 인용 서류를 법원에 접수시킬 걸세. 그놈이 서울대병원 특실로 옮겨지는 순간, 사법부의 문은 닫히고 밀항선이 뜰 거야."

 

성재환은 대답 대신 창밖의 메마른 어둠을 응시했다.

 

차창 유리 위로 비친 자신의 얼굴은 7년 전 남원을 떠나던 열여덟 소년의 얼굴과 기묘하게 겹쳐 있었다.

 

그때도 야간열차의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눈빛은 이렇게 서슬 퍼렇고, 동시에 피눈물 나도록 시렸다.

 

'내가 남원을 떠나온 건…… 오직 돌아가기 위함이었는데.'

 

재환의 손끝이 코트 안쪽 만년필의 금빛 닙 부분을 바스러져라 쥐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Fiat justitia, ruat caelum).'

 

만년필 캡 상단에 음각된 그 서슬 퍼런 법언이 손바닥 살갗을 파고들었다.

 

남원에 남아 지유의 곁에서, 새로 단장한 김밥집의 작은 평상에 마주 앉아 평범한 내일을 살아가고 싶었던 갈망이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불덩이처럼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 안락을 선택하는 순간, 강태석은 풀려나고 남원의 수많은 피눈물은 다시 권력의 발밑에 짓밟힐 터였다.

 

부친 성호석이 참회의 눈물로 되돌려준 토지 원상회복 증서도, 교룡산 어머니 산소 앞에 바쳤던 판결문 정본도 한낱 종이쪽지로 전락할 것이 뻔했다.

 

재환은 눈을 감았다.

 

가슴속에서 지유의 맑은 눈망울과 애절한 목소리가 물결처럼 밀려왔다.

 

2. 떠나보내던 순간의 기억

 

불과 몇 시간 전,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 앞마당의 풍경이 재환의 뇌리를 칼날처럼 베고 지나갔다.

 

대검의 관용차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들이닥치고, 한진우가 내민 강제 소환장을 받아 든 순간 재환의 발걸음은 돌처럼 굳어 있었다.

 

그때 재환은 주저하고 있었다.

 

평생을 부친의 죄악과 남원의 거악을 단죄하기 위해 스스로를 채찍질해 왔지만, 지유를 다시 차가운 기다림 속에 내버려 두고 싶지는 않았다.

 

검사직을 내려놓고 남원에 주저앉아서라도 지유의 온기 곁에 머물고 싶었다.

 

가게 처마 밑에 걸린 '끝까지 남은 사랑'이라는 현판의 옻칠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그런 재환의 흔들림을 누구보다 먼저 눈치챈 것은 지유였다.

 

지유는 놀라지도, 슬픈 기색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조리대 앞으로 걸어가 깨끗한 행주로 손을 닦은 뒤, 재환의 앞에 섰다.

 

그리고 재환의 흐트러진 정장 옷깃을 단정히 여며주었다.

 

지유의 손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으나, 눈빛만은 바위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재환아."

 

그 목소리는 차분하고 깊었다.

 

오히려 지난 7년 동안 온갖 수모와 쇠파이프 테러,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그 단단한 심지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망설이지 마. 네가 가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잖아."

 

"지유야, 난……."

 

재환의 목소리가 젖어 들어갔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울컥 치미는 뜨거운 회한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남원에 남겠다고 너한테 약속했어. 광한루원에서도, 어머니 산소 앞에서도…… 이제는 네 곁에서 평범하게 살겠다고 맹세했단 말이다. 그런데 또다시 널 두고 서울로 올라가라고? 그 시궁창 같은 권력의 싸움터로?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싸움에 널 또 혼자 버려두란 말이냐?"

 

지유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 안에 재환의 일그러진 얼굴이 오롯이 담겼다.

 

지유는 손을 뻗어 재환의 굳은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거친 일상에 트고 굳은살이 박인 지유의 손바닥이었지만, 그 어떤 비단보다 따스한 온기가 재환의 차가운 볼을 타고 스며들었다.

 

"버려두는 게 아니야. 네가 그곳으로 가는 건 나를 지키기 위해서잖아. 저들이 풀려나면, 우리가 지켜낸 이 작은 골목도, 어머니의 넋도, 남원 사람들의 눈물도 다 거짓말이 되어버려. 너는 그런 세상을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잖아."

 

지유는 주머니에서 새하얀 면 손수건을 꺼내 재환의 떨리는 손에 쥐여주었다.

 

그 손수건은 7년 전 폭우가 쏟아지던 광한루원 처마 밑에서 재환의 빗물을 닦아주었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수많은 계절이 지나고 모진 풍파를 겪었음에도, 지유가 매일 밤 정갈하게 빨아 다려두어 여전히 은은한 비누 향기를 품고 있었다.

 

"난 괜찮아, 재환아. 난 여기서 기다리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아. 7년을 기다렸는데, 몇 달을 더 못 기다리겠어? 그러니까 뒤돌아보지 말고 가. 더 넓은 서울로 가서, 저 높은 곳에 있는 악한 자들을 모조리 법으로 무릎 꿇리고 와."

 

그것은 단순한 양보가 아니었다.

 

자신의 안위와 외로움보다, 사랑하는 이가 지닌 신념의 숭고함을 먼저 지켜주고자 하는 지유만의 거룩하고도 처절한 배려였다.

 

남원에 안주하여 평범한 행복에 머무르는 것보다, 그가 검사로서 품었던 숭고한 법치와 정의의 불꽃을 온전히 피워 올리기를 바라는 지극한 연심이었다.

 

3. 흑청색 잉크의 맹세

 

지유는 조리대 위에 놓여 있던 각인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검은 옻칠 위로 은은한 금빛 광택을 내뿜는 백부의 유품.

 

지유는 그 펜촉을 조심스레 어루만진 뒤, 재환의 양복 안주머니, 심장에 가장 가까운 곳에 깊숙이 꽂아 넣었다.

 

만년필 안에는 며칠 전 지유가 새로 채워 넣은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가 가득 차 있었다.

 

남원여고 앞 문구점에서 시작되어, 7년의 유폐와 고통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았던 바로 그 빛깔이었다.

 

"이 만년필로 네가 써 내려갈 공소장에는 어머니의 한과 남원 사람들의 억울함이 담겨 있어. 그러니까 멈추지 마. 네가 망설이면 저들은 웃을 거고, 네가 물러서면 법은 다시 돈 있는 자들의 노리개가 될 거야. 네가 그랬잖아. 법은 권력자의 방패가 아니라 약자의 약속이어야 한다고."

 

지유의 손가락이 재환의 단단한 가슴팍을 꾹 눌렀다.

 

그 손끝에서 전해지는 압력은 무거운 책임감이자, 동시에 세상을 다 짊어질 수 있을 것 같은 든든한 방패였다.

 

"그 약속을 서울에 가서 똑똑히 보여주고 와. 난 여기서 이 가게를 지키고 있을게. 손님들에게 정직한 김밥을 말고, 우리 간판에 적힌 '끝까지 남은 사랑'을 매일 닦으면서 널 기다릴 거야. 네가 돌아왔을 때, 부끄럽지 않게 활짝 웃으며 맞이할 수 있도록 내 자리를 지킬게."

 

재환은 차오르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지유의 어깨를 와락 끌어안았다.

 

지유의 작은 몸에서 풍기는 은은한 참기름 냄새와 솔잎 향내가 가슴을 저미도록 파고들었다.

 

재환은 그녀의 좁은 어깨에 얼굴을 묻고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세상 모든 권력과 타협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검사의 심장이, 오직 한 여인의 품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울먹이고 있었다.

 

지유는 재환의 등을 가만히 토닥였다.

 

마치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로 나아가는 전사에게 갑옷을 입혀주듯, 그녀의 손길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했다.

 

등을 어루만지는 손바닥의 따스함이 재환의 얼어붙은 골수를 녹여냈다.

 

"울지 마, 성재환 검사님. 당신은 정의를 세우러 가는 사람이야. 남원은 당신을 믿고, 나는 당신을 사랑해. 그거면 충분하잖아."

 

그 말을 끝으로 지유는 천천히 재환의 품에서 물러섰다.

 

그녀의 입가에는 엷고 찬란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관용차 뒷좌석에 올라타도록, 지유는 등을 꼿꼿이 세운 채 가게 문앞에 서서 손을 흔들었다.

 

관용차가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사이드미러에 비친 지유의 모습뚱한 그림자는 단 한 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녀는 울지 않았다.

 

오직 재환이 떠나가는 길목에 어둠이 내리지 않도록, 자신이 등대가 되어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을 뿐이었다.

 

4. 가슴에 박힌 손수건

 

"성 검사,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나?"

 

한진우의 굵직한 목소리가 과거의 회상 속에 잠겨 있던 재환을 현실로 불러냈다.

 

재환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숨을 골랐다.

 

어느새 차창 밖으로는 경기도 평택을 지나 수원으로 접어드는 이정표가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차창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거친 파도처럼 귓전을 때렸다.

 

"지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재환의 낮게 가라앉은 대답에 한진우는 룸미러로 재환의 눈을 슬그머니 살폈다.

 

거기에는 조금 전까지 보이던 고뇌와 번민의 흔적이 깨끗이 지워져 있었다.

 

오직 서슬 퍼런 칼날 같은 냉혹함과, 절대 꺾이지 않을 단단한 결의만이 서려 있었다.

 

사냥감을 노려보는 매의 눈빛보다 더 서늘하고 날카로운 기백이었다.

 

한진우가 나직하게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아가씨더군. 보통의 연인이라면 가지 말라고 매달렸을 텐데. 자신의 평온을 헐어서 자네의 칼을 벼려주더군. 그런 여자를 곁에 둔 자네는 복이 많은 놈이야."

 

"복이 아니라, 빚입니다."

 

재환이 코트 깃을 바로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 음성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섞여 있지 않았다.

 

"평생을 다 바쳐 갚아도 모자랄 빚입니다. 그 빚을 갚는 유일한 방법은, 지유가 지켜준 이 칼로 한 획의 부끄러움도 없이 거악의 목을 베는 것뿐입니다."

 

재환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지유의 하얀 손수건을 꺼내 무릎 위에 반듯하게 폈다.

 

모서리에 작게 수놓아진 '지유'라는 푸른빛 실밥이 가로등 불빛에 스쳐 지나갔다.

 

그 손수건을 바라보는 재환의 눈빛에 살벌한 안광이 번뜩였다.

 

"한 부장님."

 

"말하게."

 

"서울대병원으로 향하는 호송 차량의 이동 경로는 확보하셨습니까?"

 

한진우가 서류철을 넘기며 보고했다.

 

"이미 특임수사팀 1호 차량이 서울고검 지하 주차장 출구를 감시하고 있네. 서울고검 공판부장이 직접 구속집행정지 인용 통지서를 들고 전주교도소와 서울구치소를 오가며 서류를 조작하고 있어. 오늘 밤 12시 정각, 서울중앙지법 당직 판사에게 병보석 청구서를 기습 제출할 계획이야. 당직 판사는 세율 출신의 전관들과 이미 선이 닿아 있는 자네."

 

"그렇다면 법원으로 갈 필요도 없습니다."

 

재환의 입술에서 얼음장보다 차가운 말이 흘러나왔다.

 

차량 안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곤두박질치는 듯했다.

 

"대검 청사로 가기 전에, 서울고검 공판부장의 집무실을 먼저 엎어버리겠습니다."

 

한진우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핸들을 잡은 수사관마저 룸미러로 재환을 쳐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뭐라고? 서울고검 공판부장을? 자네 미쳤나? 아무리 대검 특임팀장이라도 같은 검찰 선배의 집무실을 영장도 없이……."

 

"영장은 이미 제 가슴속에 있습니다."

 

재환이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걸어 들어가는 장수의 살기가 묻어났다.

 

"검찰청법 제7조 제2항, 상급자의 위법한 지휘에 대한 이의제기권 및 긴급 직무정지 청구권. 그리고 피고인 강태석의 스위스 계좌 동결 결정문 원본이 제 손에 있습니다. 공판부장이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청탁을 받고 뇌물성 병보석을 결재하려 한 순간, 그는 더 이상 검사가 아니라 뇌물수수 및 직권남용의 현행범입니다. 지유가 제 등을 밀어준 건, 적당히 타협하고 모양새나 갖추라고 보낸 게 아닙니다. 남원의 피눈물을 서울의 한복판에 그대로 들이붓겠습니다. 뿌리째 뽑아버리겠습니다."

 

재환의 결연한 기세에 한진우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그 어떤 규율이나 관례도 이 젊은 검사의 질주를 가로막을 수 없음을 직감한 까닭이었다.

 

5. 서초동의 늑대들

 

밤 11시 40분.

 

서울 서초동 검찰청사 일대는 적막 속에 잠겨 있었으나, 그 내부는 거대한 음모의 악취로 진동하고 있었다.

 

대검찰청 맞은편에 우뚝 솟은 서울고등검찰청 본관 6층, 공판부장 집무실의 불은 대낮처럼 환하게 켜져 있었다.

 

블라인드가 굳게 내려진 방 안에는 뿌연 담배 연기가 안개처럼 자욱했다.

 

가죽 소파에는 여당 대선 경선 캠프의 핵심 법률 브로커인 전직 검사장 출신 변호사 둘이 초조하게 담배를 피워 물고 있었다.

 

재떨이에는 이미 장초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공판부장 권진태는 책상 위에서 만년필을 쥔 채 연신 손목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초침이 째깍거리며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방 안 사내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댔다.

 

"권 부장, 결재는 다 끝났소?"

 

소파에 앉아 있던 노변호사가 헛기침을 하며 재촉했다.

 

기름진 얼굴에 탐욕과 불안이 뒤섞여 흉측한 주름을 만들고 있었다.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도 방금 확인 전화가 왔소. 자정이 넘어가면 대검 중수부에서 특임수사팀 발령을 공식 통보할 텐데, 그전에 법원 당직실에 병보석 의견서를 접수해야 탈이 없소. 강태석이가 입을 열면 우리 캠프만 날아가는 게 아니야. 법무부, 검찰 수뇌부 할 것 없이 줄초상이 난단 말이요."

 

권진태의 이마에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와이셔츠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책상 위에는 서울대병원 심혈관센터에서 허위로 발급된 '급성 심근경색 및 대동맥 박리 위험으로 인한 긴급 입원 필요 소견서'가 놓여 있었다.

 

그 밑에는 피고인 강태석에 대한 구속집행정지 신청에 '검찰 측 이의 없음'이라는 날인이 찍히기 직전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선배님. 하지만 남원에서 올라오고 있다는 그 미친개 놈…… 성재환이가 마음에 걸립니다. 그놈이 제 애비까지 피의자로 법정에 세운 독종인데, 정말 오늘 밤 안으로 서울에 못 오는 게 확실합니까?"

 

"걱정 붙들어 매시오."

 

다른 변호사가 비열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금테 안경 너머로 번들거리는 눈빛이 교활하기 짝이 없었다.

 

"충청도 진입로에서 도로공사와 경찰 쪽에 손을 써서 대형 화물차 사고를 위장해 길을 막아두었소. 그놈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자정 전에는 한강 다리 구경도 못 해. 우리가 법원에 서류를 넣고 강태석을 구급차에 태우는 순간 게임은 끝나는 거요. 자, 어서 도장이나 찍으시오."

 

권진태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붉은 인주를 묻힌 결재인을 집어 들었다.

 

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붉은 인주가 서류의 결재란을 향해 천천히 내려앉으려는 바로 그 찰나였다.

 

콰아아앙!

 

육중한 공판부장실의 방음 목재 문이 경첩째 뜯겨 나가며 거대한 굉음과 함께 안쪽으로 처박혔다.

 

문틀이 부서지며 하얀 석고 가루가 폭풍처럼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방 안에 있던 세 사내가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커피잔이 바닥에 나뒹굴며 갈색 액체가 카펫을 적셨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검은색 롱코트를 걸친 장신의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성재환이었다.

 

그의 어깨에는 차가운 밤안개와 빗방울이 서려 있었고, 그 뒤로 한진우 부장검사와 대검 중수부 특임수사관 여덟 명이 장총 같은 압수수색 영장 가방을 든 채 일렬로 도열했다.

 

"누, 누구야!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권진태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성재환은 대답 대신 서늘한 보폭으로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눈빛은 거대한 암흑을 단칼에 베어낼 듯 푸른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재환은 권진태가 손에 쥐고 있던 상아 결재인을 사정없이 낚아채 바닥으로 내던져버렸다.

 

와장창!

 

값비싼 상아 결재인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며 붉은 인주 파편을 사방으로 튀겼다.

 

"서울고검 공판부장 권진태."

 

재환의 입에서 서슬 퍼런 음성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그리고 범인도피교사 혐의의 피의자로 긴급 체포합니다."

 

6. 어둠을 찢는 사법의 칼

 

공판부장실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서, 소파에 앉아 있던 전관 변호사들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붉히며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삿대질을 하며 집무실이 떠나가라 고함을 질렀다.

 

"성재환! 네놈이 아무리 대검 파견 검사라 해도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난입이야! 이분은 네 까마득한 사법연수원 10기수 선배님이시다! 피비린내 나는 지방 바닥에서 구르다 오더니 눈에 뵈는 게 없느냐? 법도 모르는 후레자식 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재환은 그들의 비명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코트 안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지유의 손수건과 만년필의 감촉이 심장을 단단하게 벼려주었다.

 

재환은 서류 한 장을 꺼내 권진태의 책상 위에 거칠게 내던졌다.

 

탁, 하고 메마른 종이 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그 서류는 스위스 취리히 주 검찰청에서 대검 중수부로 직통 타전된 긴급 사법공조 전문 사본이었다.

 

"당신들이 강태석의 스위스 비밀 계좌 102억 원에서 수임료 명목으로 쪼개 받은 15억 원의 세탁 경로입니다. 국내 시중은행 차명 계좌 다섯 개를 거쳐 바로 오늘 오후 4시, 권진태 공판부장의 처남 계좌로 3억 원이 입금된 내역까지 완벽히 포섭되어 있습니다."

 

재환의 시선이 사시나무 떨듯 떠는 권진태의 눈을 꿰뚫었다.

 

그 서늘한 눈빛 앞에 권진태는 숨이 턱 막히는 압박감을 느끼며 다리를 후들거렸다.

 

"선배님이라고 부를 가치도 없습니다. 선배님이라는 탈을 쓰고 사법의 정의를 팔아먹은 모리배일 뿐입니다. 병보석 청구서에 도장을 찍는 대가로 받은 그 3억 원, 당신 아들의 미국 유학비 계좌로 송금하려 하셨습니까?"

 

"이, 이건 음해다! 조작이야! 스위스 은행 서류가 어떻게 이렇게 빨리……!"

 

권진태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치다 의자에 걸려 바닥으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성재환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허위 소견서와 병보석 의견서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남원의 수많은 눈물과 피를 덮으려 했던 추악한 종이쪽지였다.

 

재환은 양손으로 서류를 쥐어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촤아아악!

 

갈기갈기 찢겨진 종이 파편들이 허공에 눈송이처럼 흩날려 권진태의 정수리 위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강태석의 병보석은 없습니다. 그자는 서울대병원 특실이 아니라, 대검 중수부 지하 특별조사실 철창으로 직행할 것입니다."

 

재환은 차갑게 돌아보며 한진우를 향해 지시했다.

 

"한 부장님, 지금 즉시 서울구치소로 특임수사관들을 급파하십시오. 피고인 강태석에 대한 신병을 서울고검에서 대검 특임수사팀으로 전격 인치합니다. 저항하는 자는 누구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특수공무집행방해 현행범으로 현장에서 결박하십시오."

 

"알겠네!"

 

한진우의 호령이 떨어지자 대검 특임수사관들이 일사불란하게 덮쳐들었다.

 

비명을 지르는 권진태와 두 변호사의 등 뒤로 차가운 쇠 수갑이 채워졌다.

 

찰칵, 찰칵 하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공판부장실을 울렸다.

 

아수라장이 된 방 안에서 성재환은 천천히 옷깃을 여몄다.

 

그의 코트 안쪽, 심장 위에 꽂힌 만년필이 마치 살아 숨 쉬는 생명체처럼 뜨겁게 고동치고 있었다.

 

'지유야.'

 

재환은 가슴속으로 지유의 이름을 나직이 읊조렸다.

 

'네가 열어준 길이다.

 

네가 지켜준 이 칼날로, 내가 서울의 어둠을 모조리 베어내마.'

 

재환의 걸음걸이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복도를 향해 뻗어 나갔다.

 

7. 남원의 밤, 삼거리의 불빛

 

같은 시각, 남원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

 

시계탑의 종소리가 자정을 알리는 열두 번의 둔탁한 파음을 허공에 흩뿌렸다.

 

골목의 상점들은 모두 셔터를 내리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지만, 삼거리 김밥집의 작은 알전구만은 따뜻한 주황빛을 내뿜으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가게 처마 밑에 걸린 지리산 육송 간판, '끝까지 남은 사랑'이라는 글귀가 은은한 달빛을 받아 깊고 푸른 흑청색으로 빛났다.

 

가게 안에서 한지유는 홀로 깨어 있었다.

 

그녀는 새로 깐 편백나무 도마 앞에 서서, 내일 아침 손님들에게 내놓을 속재료들을 정갈하게 다듬고 있었다.

 

채 썬 당근을 달달 볶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작은 가게 안에 포근하게 번져나갔다.

 

도마 위로 부딪히는 칼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다 잠시 멎었다.

 

지유는 앞치마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고, 조리대 한구석에 놓인 작은 트랜지스터라디오의 볼륨을 조심스럽게 올렸다.

 

지지직거리는 잡음 끝에 숨 가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긴급 속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오늘 자정을 기해 피고인 강태석 전 남원시장의 비자금 게이트와 관련하여 특별임무수사팀을 전격 가동했습니다.

 

파견 주임검사로 임명된 성재환 검사는 서울고검 공판부의 병보석 석방 기도를 전격 저지하고, 뇌물수수 혐의로 고검 간부 및 전관 변호사들을 긴급 체포했습니다.

 

검찰은 여당 대선 경선 자금 전반으로 수사를 전면 확대할 방침이라고 밝혔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재환의 이름을 들으며, 지유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마침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것은 슬픔의 눈물이 아니었다.

 

세상의 거대한 불의 앞에서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당당하게 정의를 바로 세우고 있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남자를 향한 긍지와 안도의 눈물이었다.

 

지유는 조용히 손을 뻗어 창가에 놓아둔 흑청색 잉크병을 매만졌다.

 

차갑지만 맑은 유리병의 감촉이 손끝을 통해 심장으로 전해졌다.

 

"잘했어, 재환아."

 

지유는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저 멀리 북쪽 하늘, 서울의 빌딩 숲 위로 번쩍이고 있을 거친 번개를 떠올리며 그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더 높이 날아올라. 더 거침없이 부숴버려. 네가 싸우는 동안, 난 여기서 네가 돌아올 자리를 지키고 있을 테니까."

 

바람이 불어와 처마 끝에 매달린 낡은 놋쇠 풍경을 맑게 울렸다.

 

땡그랑, 청아한 쇳소리가 적막한 남원의 밤거리를 메우며 멀리 요천 둑길을 향해 퍼져나갔다.

 

그것은 기다림의 고통을 넘어선, 영원한 사랑과 신뢰가 빚어낸 가장 아름다운 배려의 멜로디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어둠에 잠긴 골목 어귀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삼거리 김밥집의 불빛을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내의 품속에서 은밀한 무전기가 붉은 불빛을 깜빡였다.

 

"……타깃 확인. 성재환의 계집이다. 서울 쪽에 신호 보내. 놈이 칼을 휘두를수록, 이 계집의 목숨줄이 먼저 끊어질 거라고."

 

새로운 파란의 불씨가 남원의 밤안개 속에서 소리 없이 타오르기 시작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