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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04화

재환의 거취 고민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밤안개 속의 불청객

 

골목 어귀를 비추던 외등 불빛이 밤안개에 젖어 희뿌옇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

 

갓 새로 칠한 삼거리 김밥집의 크림색 외벽과 지리산 육송으로 깎아 올린 새 간판 아래에서, 짙은 어둠을 뚫고 미끄러져 들어온 검은색 관용 세단 한 대가 길게 멎어 섰다.

 

차량 보닛 앞머리에 매달린 검찰 깃발이 축축한 밤바람에 작게 펄럭였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흙바닥에 깔린 잔돌과 골목길의 낡은 보도블록을 차갑게 훑고 지나갔다.

 

차문이 열리며 검은 바바리코트를 단정하게 여며 입은 한진우 부장검사가 성큼 걸어 나왔다.

 

그의 뒤를 이어 대검 수사관 두 명이 육중한 서류 가방을 양손에 쥔 채 바짝 뒤따랐다.

 

평상에 앉아 옻칠 목기를 정리하던 성재환은 낮게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조리대 위에 놓인 흑청색 잉크병 곁에 서 있던 한지유 역시 굳은 표정으로 불청객들의 얼굴을 응시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동네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막걸리 잔 부딪치는 소리로 가득 찼던 골목에, 날카로운 긴장감이 살얼음처럼 내려앉았다.

 

가을밤의 풀벌레 소리마저 일순간 숨을 죽였다.

 

"한진우 부장님."

 

재환의 목소리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오랜 격무와 밤샘 수사로 다져진 단단한 턱선 위로 팽팽한 경계심이 스쳐 지나갔다.

 

"야심한 시각에 남원 구도심의 영세 분식점까지 무슨 일로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한진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쓰고 있던 뿔테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렸다.

 

안경 렌즈 너머로 비치는 그의 눈빛에는 지독한 피로와 함께 감출 수 없는 초조함이 짙게 깔려 있었다.

 

"성재환 검사, 인사치레를 길게 나눌 만한 여유가 없네. 자네도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겠지."

 

한진우의 시선이 조리대 옆에 선 지유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재환에게로 향했다.

 

지유의 앞치마에 묻은 옅은 밀가루 자국과 방금 깎아낸 편백나무의 은은한 향내가 차가운 법조의 공기와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었다.

 

"서울이 뒤집혔어.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여당 최고 지도부가 전면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네."

 

"강태석의 병보석 건 때문입니까."

 

재환의 서늘한 질문에 한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양복 안주머니에서 붉은 직인이 선명히 찍힌 대외비 서류 한 장을 꺼내 들었다.

 

서류 봉투 겉면에 찍힌 '극비(極秘)'라는 두 글자가 가로등 불빛 아래 핏빛처럼 도드라져 보였다.

 

"오늘 오후, 서울고검 공판부에서 전주교도소에 수감된 강태석에 대한 구속집행정지 건의안을 법무부에 올렸네. 명분은 급성 협심증과 뇌혈관 질환에 따른 긴급 통원 치료야. 하지만 그 이면에 뭐가 있는지 자네가 누구보다 잘 알지 않나."

 

서류를 받아 든 재환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였다.

 

그의 시선이 종이 위에 적힌 몇 줄의 활자를 읽어 내려가는 동안, 굳게 다문 입술 새로 낮고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140억 비자금의 종착역이 여당 대선 경선 자금으로 흘러 들어간 정황이 드러나자, 그 입을 막기 위해 빼내려는 거로군요.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자를, 잉크도 마르기 전에 병보석으로 빼돌리겠다? 대한민국 사법부가 그렇게 만만합니까."

 

재환의 서슬 퍼런 일갈에 한진우는 고개를 무겁게 가로저었다.

 

"정치라는 괴물 앞에서는 사법부도 종종 눈을 감는 법이야. 그들은 지금 강태석을 서울대병원 특실로 빼돌린 뒤, 병보석 허가가 떨어지는 즉시 해외로 밀항시킬 계획까지 세워두고 있어. 전직 법원장과 대검 차장 출신들이 이미 배후에서 법무부 결재 라인을 틀어쥐었단 말일세. 서초동과 여의도가 손을 잡았어."

 

한진우의 목소리에 짙은 초조함과 비장함이 배어 있었다.

 

그의 등 뒤에 버텨 선 두 명의 수사관들 역시 입을 굳게 다문 채 마른침을 삼켰다.

 

2. 붉은 직인의 소환장

 

한진우는 곁에 서 있던 수사관에게 무거운 눈짓을 보냈다.

 

수사관이 들고 있던 가죽 서류 가방에서 묵직한 서류철 하나를 꺼내 재환의 눈앞에 정중히 내밀었다.

 

서류철 표지에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 특별임무수사팀 설치 및 주임검사 보직 명령'이라는 글귀가 검은 활자로 또렷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 아래로 날인된 검찰총장과 법무부 장관의 직인이 불길한 붉은 광택을 내뿜고 있었다.

 

"이게 뭡니까."

 

재환이 차갑게 묻자 한진우가 똑바로 재환의 눈을 마주 보았다.

 

한진우의 눈가에 깊게 파인 주름이 긴장으로 파르르 떨렸다.

 

"검찰총장 직속 특별임무수사팀장 발령장일세. 자네를 대검 중수부로 긴급 복귀시키고, 이 사건에 관한 전권을 위임한다는 총장의 친필 재가가 떨어졌어. 여당의 외압을 뚫고 정면 돌파할 수 있는 칼은 대한민국에 자네 하나뿐이라는 판단일세."

 

"저는 이미 남원지청에 잔류하겠다는 의사를 수차례 밝혔습니다. 남원지청 특별수사전담 검사로 남아, 이곳 구도심의 무너진 법치를 바로잡고 남원 시민들의 억울함을 닦아주겠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재환의 단호한 거절에 한진우는 가슴을 치듯 탄식하며 숨을 토해냈다.

 

그는 한 걸음 다가서며 재환의 어깨를 짓누르듯 말했다.

 

"성 검사, 현실을 직시하게! 자네가 남원에 남아 있는 동안 강태석이 서울에서 풀려나 비행기를 타면, 자네가 여기서 목숨 걸고 싸워 얻어낸 징역 12년 판결이 무슨 의미가 있나? 저 무너진 요천 제방과 피눈물을 흘린 시민들의 고통은 누가 보상한단 말인가? 온갖 협박과 테러 속에서도 법을 믿었던 저 민초들의 희망은 어떻게 되는 거냐고!"

 

한진우는 손을 뻗어 김밥집 처마 밑에 걸린 육송 간판을 가리켰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끝까지 남은 사랑'이라는 글귀가 어스름하게 흔들렸다.

 

"'끝까지 남은 사랑'? 그래, 참으로 눈물겹고 아름답지. 하지만 그 사랑을 지키는 울타리는 결국 힘 있는 법이어야 하네. 자네가 서울로 올라와 칼을 쥐지 않으면, 저 간판마저도 권력자들의 발길질에 다시 박살 날 수밖에 없어. 저들이 권력을 쥐고 흔드는 한, 남원은 언제든 다시 짓밟힐 수 있는 외딴 섬일 뿐이야."

 

재환의 턱선이 팽팽하게 굳어졌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분노와 함께 뼈를 깎는 듯한 통증이 치밀었다.

 

7년이었다.

 

서울 신림동 고시촌의 단칸방에서 피눈물을 삼키며 법전을 파고들었던 이유, 연수원 수석의 영예를 안고도 가장 험악한 특수부 시궁창으로 뛰어들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남원으로 돌아와, 짓밟힌 지유의 손을 잡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함이었다.

 

가문의 원죄를 제 손으로 단죄하고, 아비의 죄악을 법정에 세우면서까지 지키려 했던 것은 지유와 남원의 평화였다.

 

그런데 겨우 그 약속을 지켜내고, 부서진 가게를 함께 고치며 평온한 아침을 꿈꾸던 바로 그날 밤에 또다시 서울의 어둠이 자신을 불러들이고 있었다.

 

"부장님."

 

재환이 낮게 읊조렸다.

 

목구멍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남원에 남는 것은 제 도피가 아닙니다. 제가 지켜야 할 사람과의 맹세입니다."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서울로 가야 해!"

 

한진우가 목소리를 높였다.

 

바바리코트 자락이 가을바람에 거칠게 펄럭였다.

 

"자네가 올라오지 않으면 이 특임수사팀은 해체되고, 사건은 서울고검 친여 성향 검사들에게 배당될 걸세. 그러면 강태석은 다음 주 월요일이면 보석으로 풀려나. 오늘 밤 자정까지 서초동 대검 청사에 출석하지 않으면, 자네의 인사 발령은 항명으로 간주되어 직무 배제 처분이 내려질 걸세. 총장님께서도 더는 여당의 외압을 버텨낼 재간이 없어. 자네가 쥐고 있는 칼자루를 스스로 버리겠다는 건가?"

 

골목의 적막 속에 자정을 향해 가는 시계탑의 희미한 종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남은 시간은 불과 두 시간 남짓이었다.

 

두 시간 안에 고속도로를 타지 않는다면, 사법부의 명줄은 권력의 손아귀로 완전히 넘어가게 될 터였다.

 

3. 조리대 위의 침묵

 

한진우와 수사관들이 골목 어귀의 관용차로 물러나 대기하는 사이, 삼거리 김밥집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유리창을 통해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이 편백나무 도마와 정갈하게 닦인 스테인리스 조리대를 비추었다.

 

새로 칠한 페인트 냄새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스쳤다.

 

재환은 차마 지유를 바라보지 못한 채, 벽면에 기대어 서서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맺힐 지경이었으나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왜 또다시…… 왜 늘 이런 순간마다 세상은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가.'

 

자신의 손으로 아비를 법정에 세웠을 때도 느끼지 못했던 지독한 무력감이 온몸을 옭아맸다.

 

"재환아."

 

조용하고 맑은 음성이 정적을 깼다.

 

지유가 조리대 앞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재환의 곁에 섰다.

 

그녀의 두 눈은 울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깊고 그윽한 호수처럼 담담하게 재환의 고통스러운 얼굴을 담아내고 있었다.

 

지유의 눈동자 속에는 수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단련된 단단한 침묵이 깃들어 있었다.

 

"부장검사님 말씀…… 다 들었어."

 

"지유야."

 

재환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차마 마주 보지 못하던 시선이 지유의 단정한 눈매에 닿았다.

 

"난 안 가. 서울로 가지 않을 거야. 내 손으로 사직서를 쓰는 한이 있더라도, 너를 두고 다시 그 시궁창 같은 권력 싸움터로 올라가지 않아. 내게 남은 삶은 오직 너를 위해 쓰겠다고 맹세했어."

 

지유는 말없이 재환의 떨리는 손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거친 대패질과 김밥 재료를 다듬느라 살짝 굳은살이 박인 지유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그 온기는 한겨울 서리꽃 같던 재환의 얼어붙은 심장을 녹여내듯 서서히 퍼져 나갔다.

 

"내가 왜 너한테 흑청색 잉크를 선물했었는지 기억해?"

 

지유의 나직한 물음에 재환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7년 전, 남원여고 앞 낡은 문구점에서 용돈을 털어 사주었던 작은 잉크병.

 

'이 푸른빛으로 세상에서 가장 올바르고 곧은 글을 써줘.'

 

소녀였던 지유가 수줍게 건넸던 그 한마디가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귓가에 맴돌았다.

 

"기억해. 하루도 잊은 적 없어. 신림동 독방에서도, 법정에 설 때도 늘 그 잉크로 내 양심을 기록했어."

 

"그 만년필과 잉크는 나 한 사람을 지키라고 준 게 아니었어."

 

지유는 조리대 위로 다가가, 정갈한 융단 천 위에 놓여 있던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캡 상단에 새겨진 황금빛 법언,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지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만년필 캡을 매만진 뒤, 재환의 가슴팍 양복 주머니에 단정하게 꽂아주었다.

 

그녀의 손길은 더없이 경건했다.

 

"네가 서울에서 7년 동안 버틴 건 나에게 돌아오기 위해서였지만, 네가 검사가 된 건 억울하게 짓밟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였잖아. 우리 엄마 같은 사람, 남원 구도심의 시장 상인들 같은 사람 말이야. 법이 없어서, 힘이 없어서 눈물 흘려야 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넌 그 고통을 견뎠던 거잖아."

 

"지유야, 하지만 강태석은 이미 법정에서 12년을 받았어. 판결문도 나왔다고! 우리가 이겼단 말이야!"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시 풀어주려 하잖아."

 

지유의 눈동자에 흔들림 없는 결기가 서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서릿발 같은 엄숙함이 묻어났다.

 

"그 악마 같은 인간이 풀려나서 다시 거리를 활개 치고 다니면, 우리 엄마 무덤 앞에 올렸던 그 판결문은 가짜 종이쪽지가 되는 거야. 남원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지켜냈던 그 희망도 전부 물거품이 되는 거고. '결국 돈 있고 힘 있는 놈들은 다 빠져나간다'는 절망이 다시 이 땅을 덮어버릴 거야."

 

"그렇다고 또 너를…… 이 험한 골목에 홀로 두고 떠날 수는 없어. 지난 7년 동안 네가 어떤 지옥을 겪었는지 내가 다 보았는데, 내가 어떻게 또 너를 남겨두고 서울로 간단 말이야! 난 검사이기 전에 네 곁을 지키겠다고 약속한 사람이야!"

 

재환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남원 토착 카르텔의 협박과 총칼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청년 검사가, 지유의 얼굴 앞에서는 한없이 무너져 내리며 어깨를 떨었다.

 

그의 가슴속에서 사랑과 사명이 무섭게 부딪치며 파열음을 내고 있었다.

 

4. 두 갈래 길의 무게

 

지유는 부드러운 손길로 재환의 젖은 뺨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닿는 재환의 거친 숨결이 안쓰러워 지유의 가슴도 미어졌다.

 

어머니 박순례가 세상을 떠나던 날 아침, 차가운 영안실 바닥에서 홀로 삼켜야 했던 외로움과 공포.

 

그 끔찍한 시간 속에서도 지유를 버티게 해 준 것은 오직 하나, 재환이 보내왔던 엽서와 그가 언젠가 돌아오리라는 믿음이었다.

 

"재환아, 난 이제 혼자가 아니야."

 

지유가 미소를 지으며 처마 밑을 가리켰다.

 

가게 밖 어둠 너머로 불을 밝히고 있는 우체국과 이웃 가게들의 실루엣이 보였다.

 

"우체국 박 씨 아저씨도 있고,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도 있고, 민재랑 하은이도 있어. 그리고 이 골목 전체가 우리 가게의 울타리가 되어주고 있잖아. 무엇보다…… 난 네가 어디에 있든 네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아."

 

"지유야……."

 

"네가 서울에 가서 싸우는 건 출세를 위해서가 아니잖아. 그 악인들이 남원에 다시는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그 뿌리까지 완전히 잘라내기 위해 가는 거잖아. 그건 도망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지키기 위해 가장 높은 성벽 위로 올라가는 거야."

 

지유의 단호한 목소리가 재환의 심장을 울렸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남원지청에 남아 소소한 민원 사건을 처리하며 평온을 누리는 것은 일견 아름다워 보이지만, 강태석을 비호하는 서울의 거악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그 평화는 모래 위에 지은 성에 불과했다.

 

청와대와 여당 지도부, 그리고 서울고검의 부패한 사법 카르텔이 살아 있는 한, 제2의 강태석, 제3의 삼거리 토건은 언제든 남원을 다시 유린할 수 있었다.

 

권력의 카르텔은 뿌리를 뽑지 않는 한, 반드시 비를 맞고 다시 자라나는 독초와 같았다.

 

그러나 서울행을 택하는 순간, 재환은 대한민국 최고 권력층의 심장부를 정조준해야 했다.

 

그 길은 지난 7년의 고시촌 생활보다 훨씬 더 위험하고 참혹한 가시밭길이 될 터였다.

 

부친 성호석이 경고했던 대로, 중앙 정계의 거물들은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사법부의 명줄마저 끊어버릴 만큼 잔혹한 자들이었다.

 

사법연수원 시절부터 보아왔던 수많은 선배 검사들이 권력의 칼날에 베여 옷을 벗고 쫓겨나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었다.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인가.'

 

재환은 가슴속에 꽂힌 만년필의 차가운 금속 감촉을 느끼며 깊은 번민에 빠져들었다.

 

남원에 남아 지유와 함께 소박한 가정을 꾸리고, 억울한 농민들과 상인들을 변호하는 삶.

 

그것은 재환이 지난 7년간 매일 밤 꿈꾸어 왔던 가장 따뜻한 안식이었다.

 

아침이면 요천 둑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고, 저녁이면 지유가 만 김밥을 나누어 먹으며 마주 앉는 평범한 삶.

 

하지만 그 안식을 택하는 대가로, 피고인 강태석은 호화 병실에서 풀려나 비웃음을 흘리며 태평양을 건널 것이다.

 

법이 권력 앞에 다시 무릎을 꿇는 꼴을, 검사 성재환의 양심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것은 지유의 어머니 영전에 바쳤던 맹세를 배신하는 일이었고, 남원 시민들의 양심을 저버리는 일이었다.

 

그때, 조리대 한구석에 놓여 있던 낡은 전화기가 날카로운 벨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정적을 깨뜨리는 기계음이 김밥집 안을 무겁게 흔들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긴장감이 전선을 타고 공간 전체를 압박해 왔다.

 

5.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

 

재환은 붉은 불빛이 깜빡이는 수화기를 잠시 응시하다 천천히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

 

"남원 삼거리 김밥집입니다."

 

-

"성재환 검사인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대검찰청 인사과장이었다.

 

차분하지만 서릿발 같은 위압감과 엄중함이 실려 있는 음성이었다.

 

배경으로는 서울 대검찰청 복도의 소란스러운 소음이 희미하게 섞여 들려왔다.

 

-

"대검 인사과장일세. 한진우 부장에게서 보고 들었네.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과장님."

 

재환이 침착하게 대답하자 인사과장의 숨소리가 깊어졌다.

 

-

"성 검사, 자네의 심정을 모르는 바가 아니야. 남원에서 자네가 치른 싸움이 얼마나 처절했는지, 그리고 그곳에 두고 온 인연이 얼마나 각별한지도 익히 알고 있네. 지방 검찰청에 남아 지역 주민들과 호흡하고 싶다는 자네의 뜻도 훌륭해. 하지만 자네는 대한민국 검사야. 국가와 법치가 자네를 필요로 하고 있네."

 

인사과장의 목소리가 한층 무거워졌다.

 

그것은 단순한 회유가 아니라, 법조인의 명예를 건 마지막 호소였다.

 

-

"지금 서울 중앙지검과 대검 중수부 전체가 숨을 죽이고 있네. 여당 대선 후보 경선 캠프의 비자금 장부가 강태석의 스위스 계좌와 연결되어 있어. 이 수사는 자네가 아니면 아무도 첫 단추를 꿸 수 없네. 계좌의 흐름과 자금 세탁 구조를 완전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 자네뿐이니까. 자네가 아니면 다른 검사들은 엄두조차 내지 못해."

 

"제가 올라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됩니까."

 

재환이 차분하지만 날카롭게 묻자,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냉혹한 답변이 돌아왔다.

 

수화기 너머의 인사과장 역시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한 어조였다.

 

-

"내일 아침 9시부로 법무부 장관 명의의 수사 종결 지침이 내려올 걸세. 강태석의 병보석은 정오를 기해 서울고법에서 인용될 것이고, 남원 특수수사 기록 일체는 중앙지검 특수1부로 이첩되어 '혐의없음' 내지 '공소권 없음'으로 캐비닛에 처박히겠지. 그렇게 되면 자네가 작성한 공소장과 법원의 판결문은 종이 쓰레기가 되는 거야. 남원의 정의는 완성이 아니라 미완의 비극으로 끝나버리는 걸세."

 

재환의 눈빛이 매섭게 타올랐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수화기를 꽉 쥐었다.

 

-

"자네에게 출세의 길을 열어주려는 게 아니네. 이건 부귀영화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권력의 심장부에 칼을 꽂아야 하는 단두대야. 살아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사지(死地)란 말일세. 수사가 실패하면 자네는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파면당할 수도 있어. 하지만 자네가 아니면 이 나라의 법치는 오늘 밤으로 사망 선고를 받게 돼. 남원에 남아 영웅으로 남을 텐가, 아니면 서울로 올라와 괴물들과 맞서 싸우다 부서질 텐가?"

 

인사과장은 말을 맺고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재환의 대답을 기다렸다.

 

수화기 너머로 서초동 대검 청사의 숨 가쁜 타자기 소리와 긴박한 발걸음 소리가 희미하게 전해져 왔다.

 

대한민국의 사법 시계가 바로 이 순간, 남원 구도심의 작은 김밥집 단칸방에 걸려 있었다.

 

재환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달칵, 소리와 함께 통화가 끊겼다.

 

선택의 순간이 도래했음을, 더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갈림길에 섰음을 온몸의 감각으로 깨달았다.

 

양 갈래의 길 중에서 하나는 평온한 안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건 혈투였다.

 

6. 지유의 손수건

 

가게 밖에서 대기하던 한진우 부장검사가 다시 김밥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는 그의 얼굴은 잿빛으로 질려 있었다.

 

밖에서 몰아친 찬 밤바람이 그의 코트 자락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이닥쳤다.

 

"성 검사, 밤 11시 20분일세.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고속도로를 아무리 밟아도 자정까지 서초동에 도착할 수 없어. 총장님께서도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시네."

 

재환은 대답 대신 조리대 앞에 선 지유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조용히 얽혔다.

 

그 짧은 찰나에 7년의 세월과, 함께 나누었던 고통과 눈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유는 조용히 앞치마 주머니에서 하얗게 풀을 먹인 면 손수건 한 장을 꺼냈다.

 

모서리에 작고 단정한 꽃자수가 놓여 있는, 7년 전 비 내리는 처마 밑에서 재환의 젖은 머리칼을 닦아주었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지유는 손수건을 정갈하게 네모반듯하게 접어 재환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재환아."

 

그녀의 목소리는 더없이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거대한 바위처럼 단단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네가 법복을 입고 남원으로 내려왔을 때, 난 네가 얼마나 많은 것을 짊어지고 왔는지 보았어. 네 친아버지를 법정에 세우면서까지 네가 지키려 했던 건,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이 땅의 정의였잖아. 법이 힘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눈물을 닦아줄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했잖아."

 

지유의 따뜻한 손가락이 재환의 가슴에 꽂힌 만년필을 가볍게 톡 건드렸다.

 

황금빛 법언이 가로등 불빛 아래 선명하게 반짝였다.

 

"그 정의가 서울에서 부서지게 내버려 둘 거야? 남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넌 지금 서울로 가야 해. 그 괴물들이 남원을 다시 비웃지 못하게 만들어야 해."

 

"지유야…… 너는, 너는 또 홀로 남아서 어떻게 견디려고 그래."

 

재환의 목소리가 갈라져 터져 나왔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에 재환의 눈가로 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유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는 세상의 어떤 비바람도 꺾을 수 없을 만큼 찬란하고 강인했다.

 

어머니 박순례가 남겨준 가장 위대한 유산, 그것은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당당한 자존심이었다.

 

"난 기다리는 법을 알아. 7년도 기다렸는데, 몇 달을 못 기다리겠어? 이 가게를 지키고, 따뜻한 김밥을 말고, 매일 밤 너를 위해 기도하며 여기서 기다릴 거야. 그러니까 넌 뒤돌아보지 말고 가."

 

지유는 까치발을 들어 재환의 삐뚤어진 양복 깃을 반듯하게 여며주었다.

 

그 손길 하나하나에 깊은 신뢰와 사랑이 스며 있었다.

 

"가서, 그 권력자들에게 똑똑히 보여줘. 남원의 법이, 삼거리 김밥집의 약속이 얼마나 무겁고 서슬 퍼런 것인지.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바로 서야 한다는 걸 자네 손으로 보여주고 와."

 

재환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거대한 감정에 휩싸였다.

 

눈앞의 여인은 더 이상 7년 전 남원 톨게이트 진입로에서 무릎을 붉게 물들이며 울던 연약한 여고생이 아니었다.

 

그녀는 재환의 영혼을 지탱하는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성벽이었으며, 그 어떤 권력의 칼날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닻이었다.

 

재환은 지유가 건넨 하얀 손수건을 소중히 쥐어 가슴 안주머니에 품었다.

 

손수건에서 전해지는 옅은 비누 향과 온기가 심장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리고 조리대 위에 놓여 있던 흑청색 잉크병을 집어 들어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지유야."

 

재환의 눈빛에서 망설임과 고뇌가 완전히 걷히고, 서늘하고 푸른 검사의 안광이 되살아났다.

 

그것은 불의를 멸하기 위해 나아가는 전사의 눈빛이었다.

 

"반드시 끝내고 돌아올게. 강태석의 명줄을 끊고, 그 배후에 숨은 거악들을 전부 법정에 세운 뒤…… 완전히 자유로운 몸이 되어 네 곁으로 돌아올게."

 

"응. 믿어. 언제나 그랬듯이."

 

지유의 눈가에 마침내 맑은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지만, 그녀의 입술은 여전히 굳건하고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7. 밤길을 가르는 불빛

 

재환은 몸을 돌려 한진우 부장검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고뇌로 젖어 있던 청년의 얼굴은 온데간데없고, 대한민국 검찰 역사상 가장 날카로운 칼이라 불리던 특수부 검사의 형형한 기세가 그를 감싸고 있었다.

 

"부장님."

 

"말하게, 성 검사."

 

한진우가 마른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서초동으로 갑니다."

 

재환의 입에서 떨어진 단호한 한마디에, 한진우의 얼굴에 안도와 함께 온몸을 관통하는 거대한 전율이 스쳐 지나갔다.

 

곁에 서 있던 수사관들의 눈빛도 일제히 번뜩였다.

 

"좋아. 즉시 출발하세. 자네 차는 수사관이 운전하게 하고, 자네는 내 관용차에 타서 수사 기록을 검토하게. 이동하는 동안 대검 중수부에서 올라온 특임수사팀 명단과 여당 비자금 계좌 분석표를 브리핑하겠네. 서울에 도착하는 즉시 총장님께 대면 보고를 올릴 걸세."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자,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밤안개는 더욱 짙어져 골목길 전체를 하얗게 감싸고 있었다.

 

골목길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처마 밑에 걸린 육송 간판의 글귀가 푸른빛으로 선명하게 빛났다.

 

'끝까지 남은 사랑.'

 

그것은 성재환이라는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였고, 검사 성재환이 칼을 쥐는 유일한 명분이었다.

 

재환은 차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가게 문 앞에 서 있는 지유를 바라보았다.

 

지유는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밤바람 속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배웅하고 있었다.

 

그녀의 단아한 모습이 어둠 속에서 한 송이 백련처럼 빛났다.

 

쾅, 관용차의 문이 육중하게 닫혔다.

 

엔진이 깊은 포효를 내뿜으며 어두운 골목길을 박차고 나아갔다.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박차는 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헤드라이트의 붉은 미등이 짙은 밤안개를 가르며 남원 나들목을 향해 맹렬하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남원 시내의 어둠이 차창 밖으로 쏜살같이 밀려났다.

 

달리는 차 안에서 재환은 한진우가 건넨 두툼한 서류철을 펼쳤다.

 

여당 대선 경선 캠프, 청와대 민정수석실, 서울고검 공판부, 그리고 스위스 은행의 차명 계좌들.

 

대한민국을 쥐고 흔드는 거대한 권력형 악의 그물망이 수천 장의 문서 속에 얽혀 있었다.

 

재환은 가슴팍에서 백부에게 물려받았던 독일제 각인 만년필을 꺼내 손에 쥐었다.

 

지유의 흑청색 잉크가 가득 채워진 금빛 닙이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 서늘하게 번뜩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출세의 유혹도, 권력의 협박도 아닌, 오직 남원에 남겨둔 가장 순결한 사랑과 약속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전쟁.

 

청년 검사 성재환을 태운 검은 세단은, 대한민국 사법 역사의 가장 거대한 폭풍이 기다리고 있는 서울을 향해 어둠을 뚫고 무섭게 질주해 갔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