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노벨
← 목록
3x
1.0
[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03화

김밥집의 새단장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씻겨 나간 흔적들

 

아침 안개가 요천(蓼川) 물안개와 뒤섞여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로 스며들던 시간이었다.

 

축축한 공기 사이로 아직 설익은 가을바람이 처마 끝을 가볍게 흔들고 지나갔다.

 

한지유는 가게 문턱에 서서 손에 쥔 열쇠 꾸러미를 가만히 응시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붉은 유성 페인트로 피칠갑이 되어 있던 벽면은, 몇 날 며칠을 석유 냄새와 철 수세미로 문지른 끝에야 비로소 본래의 회색 시멘트 빛깔을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온갖 상처를 억지로 긁어낸 벽면은 거칠기 짝이 없었고, 쇠파이프에 찍혔던 자국과 박스 테이프로 얼기설기 버텨낸 유리창틀은 지난 폭압의 세월을 고스란히 웅변하고 있었다.

 

끼이익.

 

낡은 나무 미닫이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스치는 것은 어머니의 손때가 밴 고소한 참기름 내음, 그리고 바닥 깊숙한 곳에서 풍겨 나오는 서늘한 흙냄새였다.

 

지유는 조리대 한구석을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강태석의 사주를 받은 세무서 특별조사반이 들이닥쳐 뒤엎으려 했던 그 자리였다.

 

그러나 어머니 박순례가 남긴 3개년 일일 결산록과 1원의 오차도 없던 수불 원장은 그 거대한 공권력의 칼날을 정면으로 부러뜨렸다.

 

"엄마."

 

지유의 입술에서 작고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머니의 묘소에 판결문 정본을 올리고 성호석의 무릎 꿇은 사죄를 받았던 교룡산의 바람이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광한루원 완월정에서 하은이 던져준 수국 부케를 안아 들고, 재환이 백부에게 물려받은 각인 만년필을 제 손에 쥐여주며 청혼했을 때만 해도 세상의 모든 비극이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어제 완월정 마당을 찢어발기듯 달려온 대검찰청 관용차와, 한진우 부장검사가 들이민 서슬 퍼런 인사 발령 통지서가 머릿속을 차갑게 꿰뚫었다.

 

'강태석의 140억 비자금이 중앙 대선 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

 

'성 검사가 서울로 올라와 중수부 특임팀장을 맡지 않으면, 강태석은 대법원에서 풀려나 다시 남원으로 내려올 것이다.'

 

지유는 두 손을 모아 가슴팍을 꾹 눌렀다.

 

재환은 남원에 남아 평생 지유의 곁에서 약자를 지키는 검사가 되겠노라 맹세했다.

 

하지만 그 맹세가 재환의 숨통을 조이고, 결국 그가 목숨 걸고 세운 법의 정의마저 무너뜨릴 덫이 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지유야! 지유야, 문 열었네!"

 

골목 어귀에서 청량하고 씩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복잡하게 엉켜 있던 상념의 실타래를 끊어낸 것은 어제 갓 새신부가 된 윤하은의 발걸음 소리였다.

 

2. 골목을 채운 온기

 

머리를 곱게 땋아 올린 하은이 양손에 커다란 양은 주전자와 광주리를 든 채 성큼성큼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남원일보 완장을 찬 최민재가 묵직한 사다리와 뼁끼 통, 붓 몇 자루를 짊어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나타났다.

 

"야, 최민재! 조심해서 들어오라니까! 페인트 통 문지방에 부딪히면 어쩌려고 그래?"

 

"아이고, 마나님. 사다리 무게가 얼만데 잔소리부터 하십니까? 어제 혼례 치른 새신랑한테 벌써부터 부역을 시키다니, 남원일보 사회부 기자의 체면이 말이 아니구먼."

 

민재가 투덜거리면서도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바닥에 짐을 쿵 내려놓았다.

 

지유는 깜짝 놀라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하은아, 민재야. 어제 큰일 치르고 피곤할 텐데 여긴 왜 이 아침부터……."

 

"피곤하긴 뭐가 피곤해! 신혼여행이고 뭐고, 우리 지유 김밥집부터 싹 뜯어고치기로 한 약속이 먼저지!"

 

하은이 앞치마를 척 둘러메며 광주리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광주리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수수팥떡과 시루떡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어제 완월정 잔치 떡 남은 거, 동네 어르신들 드리고 우리 먹으려고 챙겨왔지. 자, 그리고 오늘 하루 만에 끝내야 해. 목공소 윤 아저씨랑 우체국 박 씨 아저씨도 곧 연장 챙겨서 오시기로 했단 말이야."

 

"맞아, 지유야. 강태석 그놈이 구속되고 나니까 남원 바닥 공기가 달라졌어. 그동안 저놈들 무서워서 김밥집 앞을 눈치 보며 지나다니던 상인들이, 오늘은 제 손으로 팔 걷어붙이고 돕겠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민재가 소매를 걷어붙이며 벽면을 툭툭 쳤다.

 

"이 흉물스러운 핏빛 자국, 오늘 싹 밀어버리고 남원에서 제일 따뜻하고 환한 집으로 만들 거다. 성 검사도 지청에 잠깐 잔무 정리하러 갔다가 곧장 일손 도우러 온다고 했어."

 

성재환의 이름이 나오자 지유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하은은 그 찰나의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하은이 조용히 다가와 지유의 차가운 손을 감싸 쥐었다.

 

"지유야. 어제 서울서 내려온 그 양반 때문에 그러지?"

 

"……하은아."

 

"재환이가 어떤 사람인데 그래. 너 두고 어디 도망갈 사람 아니잖아. 7년 전에도 그 모진 세월 버텨서 너한테 돌아온 바보 같은 남자야.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마."

 

하은의 따뜻한 위로에 지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에 내려앉은 돌덩이는 쉬이 가벼워지지 않았다.

 

'재환이가 나를 두고 떠날까 봐 두려운 게 아니야. 나 때문에…… 그 사람이 세워야 할 더 큰 세상을 포기할까 봐, 그게 무서운 거지.'

 

지유는 속으로 그 말을 삼키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가게 밖에서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문이 활짝 열렸다.

 

"어이쿠, 지유 아가씨! 벌써 시작했는가?"

 

목공소 윤 씨가 어깨에 매끈하게 대패질 된 편백나무 판자들을 짊어지고 들어왔다.

 

그 뒤로는 동문 우체국 집배원 박 씨가 목장갑을 낀 채 망치와 끌이 든 공구 상자를 양손에 들고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섰다.

 

"윤 형님, 내가 먼저 못질한다고 안 했소? 허허, 지유야! 우체국 소장님이 오늘 오전 근무 특별히 빼주셨다. 우리 골목의 보물을 고치는 일인데 공무원이 빠져서야 쓰겠냐고 하시면서 말이다!"

 

"아저씨들……."

 

지유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수해의 흙탕물 속에서도, 굴착기가 가게 앞을 짓밟으려던 순간에도 꽹과리와 몽둥이를 들고 인간 방파제가 되어주었던 이웃들이었다.

 

"자, 잔말 말고 시작합시다! 오늘 해 지기 전까지 이 가게, 새색시 방처럼 번쩍거리게 만들어놓지 않으면 내 목수 인생 간판 내릴 테니까!"

 

윤 씨의 호탕한 외침과 함께 삼거리 김밥집의 기적 같은 새단장이 시작되었다.

 

3. 묵은 상처를 벗겨내다

 

가게 안팎은 삽시간에 활기와 분주함으로 가득 찼다.

 

가장 먼저 손을 댄 곳은 쇠파이프 테러로 거미줄처럼 금이 가고 박스 테이프로 흉하게 기워져 있던 전면 통유리창이었다.

 

"자, 조심해라! 유리 파편 튄다!"

 

윤 씨와 박 씨가 양쪽에서 틀을 잡고, 민재가 지렛대로 창틀을 들어 올리자 삐걱거리던 낡은 철제 창틀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뜯겨 나왔다.

 

7년 전 그 공포스러웠던 밤, 지유가 깨진 유리 조각을 맨손으로 주워 담으며 피눈물을 삼켰던 상처가 마침내 세상 밖으로 완전히 뜯겨 나가는 순간이었다.

 

윤 씨는 미리 치수를 재어 맞춰 온 맑고 두터운 강화 통유리를 조심스럽게 끼워 넣었다.

 

은은한 나뭇결이 살아있는 통원목 창틀이 유리를 단단하게 감싸 안았다.

 

"어떠냐, 지유야? 이제 저 밖에서 햇살이 들어오면 가게 안이 대낮처럼 훤할 게다. 저 요천 변 벚나무 가지까지 다 보일 테지."

 

"정말 예뻐요, 아저씨. 꼭 꿈만 같아요."

 

지유는 깨끗해진 유리창 너머로 쏟아지는 아침 햇살을 바라보았다.

 

유리창에 박스 테이프를 붙이며 '어떤 폭압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눈물을 삼키던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편 가게 안쪽에서는 하은과 민재가 뼁끼 칠에 여념이 없었다.

 

하은은 롤러를 들고 칙칙한 시멘트 벽면 위에 따뜻한 크림색 수성 페인트를 고르게 펴 발랐다.

 

"민재야, 거기 모퉁이 덜 칠해졌잖아! 꼼꼼하게 좀 해봐."

 

"알았어, 알았어. 거 참, 우리 어머니보다 더 엄하시네. 그래도 이 색깔 참 좋다. 가게가 한결 포근해 보여."

 

붉은 페인트의 지독했던 흔적, '빨갱이 소굴'이니 '불태워 죽인다'며 악을 쓰던 조폭들의 낙서가 부드러운 우윳빛 페인트 아래로 영원히 파묻혀 들어갔다.

 

지유는 걸레를 들고 주방 안쪽 찬장과 비밀 벽감을 닦아냈다.

 

찬장 뒤편, 어머니가 1968년 토지 매각 이면계약서 원본을 숨겨두었던 흙벽 틈새.

 

남원세무서의 표적 수색과 조폭들의 난입 속에서도 지켜냈던 그 은닉처를 매만지는 지유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엄마, 우리가 이겼어요. 어머니가 목숨 걸고 지킨 종이 한 장이, 그 악마 같던 사람들을 전부 법정에 세웠어요.'

 

그때 문밖에서 맑고 청아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딸랑, 딸랑딸랑.

 

7년 전 어머니가 처마 끝에 매달아 두었던 낡은 놋쇠 풍경이었다.

 

바람이 불어 풍경이 울리자, 가게 안에서 일하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출입문 쪽으로 쏠렸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선 이는 성재환이었다.

 

4. 다시 돌아온 사람

 

재환은 검사 법복 대신 소매를 걷어올린 흰 셔츠에 수수한 면바지 차림이었다.

 

하지만 그의 단정한 이마와 깊은 눈매에는 숨길 수 없는 품격과 결기가 서려 있었다.

 

지청에서 밤을 새우고 온 것인지 눈가에 옅은 그늘이 져 있었으나, 지유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더없이 온화했다.

 

재환의 양손에는 커다란 참나무 상발과 남원 옻칠 목기 접시들이 한가득 들려 있었다.

 

"성 검사! 일찍 왔네!"

 

민재가 붓을 든 채 손을 흔들었다.

 

"민재 너, 혼례 다음 날부터 이렇게 중노동을 해도 되는 거냐? 하은 씨한테 소박맞지 않으려면 몸 사려야지."

 

재환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받아치며 짐을 조리대 위에 내려놓았다.

 

하은이 까르르 웃으며 롤러를 내려놓았다.

 

"성 검사님, 제가 부려먹는 게 아니라 민재가 자청한 거예요! 그나저나 그 멋진 그릇들은 다 뭐예요?"

 

"남원 옻칠 목공예 단지에서 특별히 맞춰 온 겁니다. 지유 김밥을 담아낼 그릇인데, 플라스틱이나 멜라민 그릇을 쓸 수는 없으니까요."

 

재환의 시선이 지유에게 닿았다.

 

지유는 젖은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며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재환이 가져온 옻칠 목기들은 은은한 흑갈색 윤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것은 7년 전 재환이 지유에게 건넸던 독일제 검은 옻칠 만년필의 빛깔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지유야."

 

재환이 조용히 다가와 지유의 앞치마에 묻은 하얀 페인트 자국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털어내 주었다.

 

"손톱은…… 이제 다 나았어?"

 

붉은 페인트를 지우느라 살갗이 벗겨지고 피가 배어 나왔던 지유의 손가락 끝이었다.

 

지유는 부끄러운 듯 손을 뒤로 감추려 했으나, 재환은 부드럽게 지유의 손을 잡아끌어 자신의 따뜻한 두 손 안에 감싸 쥐었다.

 

거칠어진 손마디를 매만지는 재환의 손끝에서 깊은 자책과 애정이 전해졌다.

 

"다 나았어, 재환아.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지유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재환의 눈동자 속에는 지유가 감추고 있는 불안과 고뇌가 투명하게 비치고 있었다.

 

재환은 지유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어제…… 한진우 부장이 찾아왔던 일 때문에 마음 쓰는 거지?"

 

지유의 어깨가 작게 움찔했다.

 

재환은 지유의 손을 놓지 않은 채,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 마음은 변하지 않아. 난 이미 광한루원에서 너에게 내 전부를 맡겼어. 그러니까 지유야, 아무 생각 말고 오늘을 즐기자. 우리가 함께 되찾은 이 가게잖아."

 

재환의 단호하면서도 다정한 음성에 지유는 왈칵 차오르는 눈물을 겨우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이, 거기 두 사람! 대낮부터 그렇게 손 꼭 잡고 눈빛 교환하면 일하는 사람들 힘 빠집니다!"

 

박 씨 아저씨가 망치 자루를 흔들며 짓궂게 소리치자, 가게 안은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되었다.

 

재환도 쑥스러운 듯 헛기침을 하며 팔을 걷어붙였다.

 

"제가 조리대 상판 대패질을 돕겠습니다. 윤 목수님, 대패 이리 주십시오."

 

"오호, 서울 특수부 검사님이 대패질도 할 줄 아는가?"

 

"어릴 적에 아버지 서재 책상 고칠 때 몇 번 해봤습니다. 힘 하나는 자신 있습니다."

 

재환이 윤 씨에게 대패를 넘겨받아 능숙하게 대팻밥을 밀어내기 시작하자, 뽀얀 편백나무 향이 조리대 주변으로 향긋하게 퍼져 나갔다.

 

5. 간판을 올리며

 

정오가 지나자 골목의 상인들이 하나둘씩 음식을 들고 김밥집으로 모여들었다.

 

남원 공설 방앗간 배 씨 아주머니는 갓 볶아낸 고소한 통깨와 진짜 들기름 두 병을 들고 왔고, 동문 청과물 가게 김 씨는 싱싱한 오이와 당근을 궤짝째 짊어지고 왔다.

 

"지유야! 우리 가게에서 제일 달고 단단한 놈들로만 골라왔다. 이제 새 가게에서 돈 세느라 밤잠 못 자게 생겼네!"

 

"배 아주머니, 김 삼촌…… 이러시면 제가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몸 둘 바를 모르긴 뭐가 몰라! 그동안 강태석 그 도둑놈 밑에서 우리가 찍소리도 못하고 숨죽이고 살 때, 우리 대신 피 흘리며 맞서 싸워준 게 너랑 네 어머니 박 씨 댁인데! 이 정도는 남원 구도심 상인들의 자존심이야, 자존심!"

 

배 씨 아주머니가 눈시울을 붉히며 지유의 등을 토닥였다.

 

모두가 둘러앉아 하은이 가져온 팥떡과 시원한 동치미를 나누어 마시며 땀을 식혔다.

 

고단했던 세월의 파편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로 녹아내리고 있었다.

 

오후 세 시가 넘어갈 무렵, 가게 내부 정리가 거의 마무리되었다.

 

거칠었던 바닥은 붉은 황토 타일로 깔끔하게 마감되었고, 낡아 삐걱거리던 의자와 탁자는 윤 씨가 직접 짜 맞춘 편백나무 가구로 교체되었다.

 

조리대 위에는 스테인리스 위생 덮개와 정갈한 옻칠 도마가 놓였고, 그 한구석에는 지유가 목숨처럼 아끼던 흑청색 잉크병이 조용히 자리 잡았다.

 

비록 잉크병은 예전에 강태석이 바닥에 내던져 깨진 뒤 새로 구한 것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깊고 푸른빛은 7년 전 지유가 문구점에서 떨리는 손으로 샀던 그 순수한 진심 그대로였다.

 

"자! 이제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남았네!"

 

민재가 가게 밖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가게 밖 처마 밑으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가게 앞 골목길에는 커다란 천막 천으로 덮인 묵직한 목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윤 씨가 며칠 밤을 새워 지리산 육송(陸松)을 다듬고 조각해 만든 새 간판이었다.

 

"성 검사, 지유 아가씨. 이리 와서 이 천 좀 같이 벗겨보쇼."

 

윤 씨가 호탕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재촉했다.

 

재환과 지유가 나란히 서서 밧줄 끝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이 밧줄 위에서 자연스럽게 겹쳐졌다.

 

재환이 지유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둘, 셋!"

 

촤르륵.

 

두꺼운 천막 천이 미끄러지듯 벗겨지며 눈부신 오후 햇살 아래 새 간판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와아……!"

 

하은과 상인들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깊고 짙은 옻칠이 입혀진 원목 간판 한가운데에, 힘차고도 단정한 양각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삼거리 김밥]

 

그리고 그 굵직한 상호 바로 밑, 오른편 귀퉁이에 지유의 흑청색 잉크 빛깔을 닮은 짙은 청색 안료로 작고 정갈하게 새겨 넣은 한 줄의 문구가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끝까지 남은 사랑'

 

그 글귀를 본 순간, 지유는 숨을 멈추었다.

 

그것은 어머니 박순례가 병상에서 남긴 마지막 유언이자, 폭압의 칼날 앞에서도 결코 가게를 버리지 않고 서울행 기차표를 찢어버렸던 지유 자신의 맹세였다.

 

그리고 7년의 세월을 뚫고 법복을 입은 채 약속을 지키러 돌아온 성재환의 침묵의 대답이기도 했다.

 

"이 글씨…… 윤 목수님이 파신 거예요?"

 

지유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윤 씨가 머리를 긁적이며 껄껄 웃었다.

 

"글씨체는 성 검사님이 흑청색 잉크로 직접 종이에 써준 것을 내가 그대로 본떠서 칼질만 한 게요. 성 검사님 필체가 아주 서슬이 시퍼러면서도 속정이 깊어서, 끌질하는 내내 손이 다 떨리더구먼."

 

지유는 재환을 올려다보았다.

 

재환은 담담한 눈빛으로 새 간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유야. 이 집은 그냥 김밥을 파는 가게가 아니야."

 

재환의 음성이 골목의 바람을 타고 고요하게 번져나갔다.

 

"권력이 아무리 짓밟아도, 거짓이 아무리 세상을 뒤덮어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남겨진 사랑이 무엇인지를 온 남원 사람들에게 가르쳐준 집이지. 어머니의 사랑이었고, 네 사랑이었고, 이제는 이 골목 모든 사람들의 사랑이야."

 

재환의 말에 배 씨 아주머니가 옷소매로 눈물을 훔쳤고, 우체국 박 씨 아저씨는 헛기침을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민재와 윤 씨, 박 씨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처마 밑 육중한 쇠고리에 새 간판을 단단히 고정했다.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간판이 제자리를 잡자, 처마 끝 놋쇠 풍경이 바람을 받아 청아하게 울렸다.

 

맑은 쇳소리가 골목 너머 요천 변까지 울려 퍼지는 듯했다.

 

어둠과 공포로 물들었던 삼거리 김밥집이, 마침내 세상에서 가장 정갈하고 따뜻한 빛을 품은 채 다시 태어난 순간이었다.

 

6. 평상에 찾아온 노을

 

해가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며 요천 변 둑길을 붉은 노을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새단장을 마친 가게 앞 평상에는 둥근 소반이 차려졌다.

 

새로 깐 편백나무 도마 위에서 지유가 정성스레 말아낸 첫 김밥들이 옻칠 목기 접시에 정갈하게 담겨 나왔다.

 

고슬고슬한 햅쌀밥에 공설 방앗간의 통깨와 참기름 냄새가 진동했고, 아삭한 오이와 노란 단무지, 짭조름한 우엉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자, 다들 오늘 하루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리 삼거리 김밥집의 새 출발을 위하여!"

 

민재가 막걸리 사발을 번쩍 들어 올리며 건배를 외쳤다.

 

"위하여!"

 

상인들과 이웃들이 술잔을 부딪치며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모두가 김밥을 한 입씩 베어 물며 감탄사를 연발했다.

 

"아따, 지유야! 네 어머니 손맛하고 아주 판박이다! 아니, 고생을 겪어서 그런가 밥맛이 더 깊어졌어!"

 

"맞아요, 정말 꿀맛이네!"

 

웃음소리와 정겨운 대화가 골목의 저녁 공기를 따스하게 덥혔다.

 

어느덧 잔치가 무르익고, 상인들은 하나둘씩 감사의 인사를 건네며 각자의 일터와 집으로 돌아갔다.

 

하은과 민재 역시 내일 신문사 출근과 신혼집 정리를 위해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지유야, 내일 아침에 또 올게! 성 검사님이랑 오붓하게 이야기 나눠!"

 

하은이 윙크를 던지며 민재의 팔짱을 끼고 골목길을 걸어 나갔다.

 

골목에는 다시 고요가 찾아왔다.

 

처마 밑 새로 단 백열전구가 켜지며 주황빛 따스한 빛을 평상 위로 쏟아냈다.

 

지유는 평상 한쪽에 단둘이 남은 재환에게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건넸다.

 

"오늘…… 정말 고생 많았어, 재환아."

 

재환은 찻잔을 받아 들고 한 모금 마신 뒤, 지유의 곁으로 한 걸음 다가앉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백열등 불빛 아래 하나로 길게 겹쳐졌다.

 

가을바람이 지유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재환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정갈하게 접힌 하얀 손수건을 꺼내 지유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7년 전 폭우 쏟아지던 광한루원 처마 밑에서, 지유가 재환의 빗물을 닦아주었던 바로 그 손수건이었다.

 

"지유야."

 

재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지유는 그 목소리만 듣고도,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피할 수 없는 시간, 마주해야만 하는 현실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7. 서늘한 바람, 갈림길의 그림자

 

"어제 한진우 부장이 가져온 발령장…… 봤지?"

 

재환이 물었다.

 

지유는 시선을 떨어뜨리지 않고 재환의 깊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응. 봤어."

 

"난 거절할 생각이었다. 지청장에게 사직서를 내고 남원에 남아서, 변호사 개업을 하든 김밥집 배달을 하든 네 곁을 지키겠다고 결심했어."

 

재환의 음성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의 손이 지유의 차가운 손을 단단히 쥐었다.

 

"7년 전, 널 두고 서울로 끌려가던 기차 안에서 난 맹세했어. 다시는 널 홀로 남겨두지 않겠다고. 내 인생의 모든 법과 정의는 너에게 돌아오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어. 그런데…… 또다시 서울로 올라가라니. 난 그럴 수 없다, 지유야."

 

재환의 눈가에 맺힌 고통을 보며 지유의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듯했다.

 

그는 진심이었다.

 

자신의 모든 야망과 천재적인 법조인으로서의 앞날을 던져버리고서라도, 오직 이 작은 삼거리 김밥집의 평상 위에 남아 지유의 울타리가 되어주겠다는 맹세.

 

하지만 지유는 알고 있었다.

 

재환의 품속에 들어 있는 각인 만년필에 새겨진 라틴어 법언을.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그것은 성재환이라는 인간의 뼈와 혈관을 이루고 있는 숙명이었다.

 

"재환아."

 

지유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기이할 정도로 맑고 단단했다.

 

"한진우 부장님이 말씀하셨지. 강태석이 빼돌린 140억 비자금이 서울 대선 자금으로 흘러들어갔다고. 그 뿌리를 뽑지 못하면, 강태석은 대법원에서 풀려날 거라고."

 

"……."

 

"강태석이 풀려나면 어떻게 될까?"

 

지유의 시선이 처마 밑 새 간판, '끝까지 남은 사랑'이라는 문구로 향했다.

 

"그자는 다시 남원으로 내려올 거야. 그리고 우리가 오늘 피땀 흘려 고친 이 가게를, 우리 어머니의 무덤을, 그리고 너와 나를 다시 짓밟으려 하겠지. 그 악마 같은 권력은 서울의 거대한 괴물들과 손을 잡고 있으니까."

 

"지유야, 내가 남원에서 막아내면 돼. 남원지청에서도 충분히……."

 

"아니, 넌 막을 수 없어."

 

지유가 부드럽게, 그러나 단호하게 재환의 말을 끊었다.

 

지유는 재환의 손등 위에 제 다른 한 손을 얹었다.

 

"너도 알잖아, 재환아. 남원지청의 일개 검사 힘으로는 저 청와대와 여당 실세들이 얽힌 거대한 게이트를 건드릴 수 없다는 걸. 오직 대검 중수부 특임팀장의 칼자루를 쥐어야만, 그 괴물들의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다는 걸."

 

"……."

 

재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부인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11층에서 뿜어져 나오는 거대한 외압의 냄새를,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은 재환 자신이었다.

 

강태석의 징역 12년 판결은 끝이 아니라, 저 거대한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열쇠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때였다.

 

끼이익-!

 

정적이 감돌던 골목 어귀에서 날카로운 타이어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길 저편에서, 검은색 흑단 세단 한 대가 서서히 헤드라이트를 켠 채 삼거리 김밥집 앞을 향해 미끄러져 들어왔다.

 

눈이 멀 것 같은 강렬한 상향등 불빛이 평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을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탁.

 

세단의 운전석과 뒷좌석 문이 동시에 열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온 인물은 대검찰청 수사기획관실의 검은 양복을 입은 수사관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어제 완월정에 나타났던 한진우 부장검사가 서류 가방을 든 채 서늘한 표정으로 걸어 나왔다.

 

한진우의 구둣발 소리가 적막한 골목길 바닥을 딱딱하게 울렸다.

 

"성재환 검사."

 

한진우의 목소리는 낮고 차가웠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 방금 전 18시를 기해, 서울고검에서 강태석 측이 제출한 구속집행정지 신청서를 병보석 명목으로 전격 인용 검토하기 시작했다."

 

"뭐라고요?"

 

재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특수부 검사의 서슬 퍼런 살기로 번뜩였다.

 

"1심에서 징역 12년이 선고된 중범죄자입니다! 판결문이 잉크도 마르기 전에 병보석이라니, 대체 서울 놈들이 무슨 짓을 꾸미는 겁니까!"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여당 최고위층이 움직였다."

 

한진우가 품속에서 붉은 직인이 찍힌 대검 긴급 소환 및 특임수사팀 강제 편성 명령서를 꺼내 재환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강태석의 입을 막기 위해 서울의 거악들이 사법부를 통째로 쥐고 흔들고 있어. 오늘 밤 자정까지 네가 대검 중수부로 상경해 특임팀장 지휘봉을 잡고 압수수색 영장을 재청구하지 않으면, 강태석은 내일 아침 서울대병원 특실로 걸어 나온다. 그리고 그 즉시 스위스 잔여 계좌를 털어 해외로 밀항할 거다."

 

골목의 공기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버렸다.

 

한진우의 시선이 평상 위에 굳은 채 서 있는 한지유에게 닿았다.

 

"한지유 씨. 당신이 이 사람을 붙잡는다면, 성재환은 검사복을 벗고 당신 곁에 남을 거요. 하지만 그 대가로 강태석은 면죄부를 받고, 당신 어머니의 억울한 죽음과 당신들이 지켜낸 이 가게의 정의는 영원히 휴지 조각이 될 거요. 선택하시오."

 

잔인하도록 냉혹한 현실의 칼날이 두 사람의 심장을 겨누었다.

 

재환은 주먹을 꽉 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그의 시선이 한진우의 명령서와, 처마 밑 '끝까지 남은 사랑' 간판, 그리고 지유의 얼굴을 차례로 훑었다.

 

이 자리에서 법을 버리고 사랑을 택할 것인가, 아니면 사랑을 지키기 위해 다시 한번 지옥 같은 서울의 아가리로 뛰어들 것인가.

 

그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지유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유의 손이 조리대 위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 놓여 있던 재환의 각인 만년필을 조용히 집어 들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