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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01화

민재와 하은의 청첩장

📅 2026-10-02 18:04•✍️ 만우자•👁️ 0•

1. 삼거리 김밥집의 아침

 

동문 우체국(東門郵遞局) 뒷골목을 타고 스며드는 아침 햇살은 유난히도 희고 투명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붉은 유성 페인트의 지독한 기름 냄새와 쇠파이프가 깨부순 유리 파편의 날카로운 긴장감이 짓누르던 골목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참혹했던 공기는 흔적조차 없이 씻겨 내려가 있었다.

 

가게 처마 끝에 매달려 있던 오래된 놋쇠 풍경이 요천(蓼川) 쪽에서 불어오는 부드러운 초가을 바람을 맞아 청아한 쇳소리를 울렸다.

 

맑고 은은하게 번지는 그 소리는 지난 7년 동안 이 골목을 옭아매었던 야만의 시간과 모진 폭압이 마침내 종식되었음을 알리는 평화로운 타종과도 같았다.

 

한지유(韓智유)는 이른 새벽부터 정갈하게 쓸어낸 평상 앞마당에 서서 커다란 무쇠 솥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새하얗게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 사이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남원 햅쌀밥의 구수한 냄새가 좁은 골목길을 가득 채웠다.

 

지유는 공설 방앗간에서 갓 짜온 짙은 갈색의 참기름을 나무 주걱 끝에 듬뿍 묻혀 밥알 하나하나에 골고루 스며들도록 부드럽게 비벼냈다.

 

소금 한 꼬집과 볶은 참깨를 뿌려 간을 맞추는 지유의 가느다란 손끝에는 더 이상 어떤 망설임이나 위태로운 떨림도 묻어나지 않았다.

 

어머니 박순례(朴順禮)가 쓰러져 피를 흘리던 참기름병의 악몽도, 영안실을 봉쇄하겠다며 들이닥쳤던 조폭들의 비열한 협박도 모두 지나간 일이었다.

 

그 잔혹했던 어둠은 성재환(成宰桓) 검사의 서슬 퍼런 공소장과 문성현(文成鉉) 부장판사의 징역 12년, 추징금 140억 원이라는 준엄한 판결문 정본 앞에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거기에 성호석(成虎錫) 전 차관이 교룡산(蛟龍山) 선산 아래 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물로 건넨 4,500평 토지 원상회복 증서와 공익 신탁서는 30년 동안 이어진 두 가문의 원죄를 온전히 씻어내는 마지막 매듭이 되어 주었다.

 

지유는 조리대 한구석에 얌전히 놓여 있는 짙은 밤색 가계부 일기장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법정에 증 제42호증으로 제출되어 어머니의 한을 증명해 냈던 그 낡은 장부 위로 따스한 아침 볕이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다.

 

'엄마, 이제 정말로 다 끝났어. 아무도 우리 가게를 부수러 오지 않아.'

 

지유가 마음속으로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김밥 발 위에 바삭한 김을 얹고 간이 밴 밥을 얇게 펴 바르고 있을 때였다.

 

골목 어귀에서 자갈을 밟으며 굴러오는 경쾌한 자전거 바퀴 소리가 들려왔다.

 

차르륵거리는 체인 소리와 함께 나타난 그림자는 단정한 흰 셔츠에 짙은 감색 면바지 차림을 한 성재환이었다.

 

법복을 벗어 두고 검사실의 서류 뭉치 대신 자전거 핸들을 잡은 그의 얼굴에는 지난 몇 달간 밤을 지새우며 굳어 있던 수사 검사 특유의 날카로움 대신, 열여덟 소년 시절 요천 둑길을 달리던 순수한 생기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재환은 김밥집 앞 느티나무 그늘 아래 능숙하게 자전거를 세우고 익숙한 걸음으로 평상 앞마당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셔츠 가슴 주머니 안쪽에는 캡 상단에 'Fiat justitia, ruat caelum'이라는 법언과 한자 이름이 새겨진 독일제 검은 옻칠 각인 만년필이 단단하게 꽂혀 있었다.

 

지유가 선물했던 깊고 푸른 흑청색 잉크가 가득 채워져 있는 그 만년필은, 이제 피고인을 옭아매는 사법의 칼날이 아니라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새로운 내일을 써 내려가는 약속의 징표로 그의 심장 곁을 지키고 있었다.

 

재환이 평상 모퉁이에 낡은 가죽 서류 가방을 내려놓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골목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하네. 오늘 아침 밥 냄새는 유난히 달콤해."

 

지유가 도마 위에서 김밥을 일정한 두께로 썰어내며 고개를 돌려 웃음을 지었다.

 

"매일 맡는 참기름 냄새인데 새삼스럽게 그래요. 지청 204호실 검사님이 아침부터 김밥 냄새에 홀려서 출근도 잊으시면 어쩌려고요?"

 

"출근이야 조금 늦으면 어때. 지청장님도 요새는 내 눈치 보느라 아무 말도 못 하는데."

 

재환이 평상 끝에 걸터앉으며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답했다.

 

과거 조동식 지청장의 부당한 수사 축소 지휘와 3억 뇌물 수수 문건을 압도적인 법리로 제압했던 재환이었기에, 그의 농담 섞인 한마디는 두 사람 사이에 잔잔한 웃음을 자아냈다.

 

재환은 지유의 앞치마 주머니 부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녀의 뺨에 살짝 붙어 있던 밥풀 한 톨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떼어냈다.

 

지유의 얼굴이 순간 붉어지며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남들 보면 어쩌려고요. 길목이라 오가는 동네 분들도 많은데."

 

"동네 분들이 보면 뭐 어때. 지유 너랑 내가 어떤 세월을 건너서 여기까지 왔는지 온 남원 사람들이 다 아는데."

 

재환의 목소리는 한없이 낮고 다정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7년 전 서울행 완행열차 안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맹세했던 비장함 대신, 마침내 온전하게 지켜낸 사람을 곁에 둔 자만이 품을 수 있는 깊은 안도와 지극한 애정이 물결치고 있었다.

 

지유는 갓 썰어낸 따뜻한 김밥 한 줄을 나무 접시에 정갈하게 담아 평상 위에 올려놓고 그 옆에 맑은 보리차 한 잔을 받쳐 놓았다.

 

"자요. 어서 먹어요. 아침 거르면 하루 종일 속 쓰리다고 했잖아요."

 

재환이 젓가락을 들어 김밥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우엉의 달콤 짭조름한 풍미와 단무지의 아삭함, 그리고 지유의 손맛이 배어 있는 고슬고슬한 밥알이 씹힐 때마다 그의 입가에 깊은 미소가 번졌다.

 

이 소박하고 따뜻한 김밥 한 줄을 지키기 위해, 지유는 손톱 밑이 벗겨지도록 붉은 페인트를 긁어냈고 재환은 목숨을 걸고 거대한 토착 권력의 몸통을 향해 칼을 겨누었다.

 

남원 땅을 짓누르던 30년의 악연이 걷히고 찾아온 평온은, 거창한 기념비가 아니라 바로 이 작은 평상 위 김밥 한 줄의 온기 속에 온전히 깃들어 있었다.

 

2. 문을 두드리는 소리

 

두 사람이 평상에 마주 앉아 조용히 아침 햇살을 나누며 담소를 나누고 있던 그때였다.

 

동문 우체국 방향 골목길 저편에서 숨가쁜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지유야! 성 검사 형님! 안에 계십니까!"

 

익숙하고도 낭랑한 목소리가 좁은 골목의 고요를 단번에 깨뜨렸다.

 

지유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고, 재환 역시 웃음을 머금은 채 골목 어귀를 바라보았다.

 

달려오고 있는 인물은 남원일보사의 최민재(崔珉宰) 기자였다.

 

취재 수첩과 카메라가 든 낡은 숄더백을 어깨에 메고 숨을 헐떡이며 달려오는 그의 뒤편으로, 단정한 감색 원피스를 곱게 차려입은 윤하은(尹夏恩)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뒤따르고 있었다.

 

하은의 양 볼은 아침부터 내달린 탓인지 분홍빛으로 상기되어 있었지만,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수줍고도 화사한 미소가 가득 번져 있었다.

 

민재가 김밥집 앞마당에 뛰어들어와 무릎을 짚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아, 하아…… 형님, 여기 계실 줄 알았습니다. 지청 관사에 들렀더니 자전거 타고 삼거리로 가셨다고 해서 아주 단숨에 뛰어왔잖아요."

 

지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안쪽에서 시원한 보리차 두 잔을 얼른 가져와 건넸다.

 

"민재 씨, 하은아, 아침부터 무슨 일인데 그렇게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와? 어디 또 큰 사건이라도 터진 거야? 설마 교도소 쪽에서 무슨 소식이라도……?"

 

지유의 목소리에 무의식적인 경계심이 살짝 묻어났다.

 

강태석이 전주교도소로 압송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혹여 또 다른 음모나 불길한 소식이라도 전해진 것인가 하는 불안이 스친 탓이었다.

 

그러자 뒤따라온 하은이 손을 내저으며 지유의 손을 따뜻하게 맞잡았다.

 

"아니야, 지유야. 나쁜 일 아니야. 절대 그런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하은의 다정한 눈빛에 지유의 굳었던 어깨가 부드럽게 풀렸다.

 

민재는 지유가 건넨 보리차 한 컵을 단숨에 들이켠 뒤,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 안에서 정성스럽게 포장된 두툼한 서류 봉투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의 얼굴에는 남원의 토착 비리 특종 기사를 1면 톱으로 터뜨렸을 때보다도 훨씬 더 벅차고 상기된 환희가 차올라 있었다.

 

민재가 숨을 고르며 재환과 지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형님, 그리고 지유야. 우리 남원 바닥에서 지난 몇 년 동안 죽을 고비 넘기면서 별의별 꼴을 다 봤잖아. 제방 붕괴 현장 바닥을 기어 다니며 잡석 시편 주워 담고, 덤프트럭 테러에 쇠파이프 난동까지 겪으면서 솔직히 난 우리가 진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었던 날도 많았거든. 그런데 형님이 법정에서 그 망할 놈들 다 쓸어 담아 주고, 지유 네가 이 가게를 기적처럼 지켜내 준 덕분에 마침내 우리한테도 이런 날이 오더라."

 

민재의 목소리가 살짝 떨려 나왔다.

 

하은은 곁에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지유가 의아한 표정으로 민재의 손에 들린 봉투를 바라보았다.

 

"민재 씨, 그게 뭔데요? 서류 봉투를 왜 그렇게 소중하게 품고 있어요?"

 

민재가 서류 봉투의 매듭을 풀고, 그 안에서 새하얗고 단아한 종이 묶음을 한 움큼 꺼내어 평상 한가운데에 경건하게 내려놓았다.

 

그것은 매끄러운 전통 한지에 은은한 금박 테두리가 둘러쳐진 고급스러운 청첩장 묶음이었다.

 

겉면에는 붓글씨의 단아한 필체로 수놓아진 글귀가 맑은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최민재 · 윤하은 혼인식'

지유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유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숨을 들이켜며 떨리는 손끝으로 맨 위에 놓인 청첩장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하은은 부끄러운 듯 두 손으로 뺨을 감싸 쥐며 배시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은아…… 이거, 정말이야? 진짜로 너희 둘……?"

 

지유의 목소리가 벅찬 감격에 젖어 파르르 떨렸다.

 

하은이 지유의 손을 꼭 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유야. 우리 드디어 날 잡았어. 어제 인쇄소에서 갓 찍어 나온 첫 번째 청첩장이야. 다른 누구보다도, 너랑 재환 형님한테 제일 먼저 가져와서 보여주고 싶었어."

 

민재가 곁에서 가슴을 쫙 펴며 재환을 향해 특유의 장난기 섞인 당당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형님, 보셨죠? 남원 최고의 열혈 기자가 결국 이 아름다운 하은 씨를 제 색시로 맞이하게 됐습니다. 솔직히 형님이랑 지유 누나가 먼저 갈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우리 쪽이 행동력이 조금 더 빨랐던 것 같네요. 남원 4인방 중에서 선두는 저희가 끊습니다!"

 

재환이 멍하니 청첩장을 바라보다가 이내 호탕한 파안대소를 터뜨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민재의 단단한 어깨를 우직하게 쥐어 흔들었다.

 

"최민재, 축하한다! 진짜 대단하다. 그 험한 취재 현장 누비면서 언제 이렇게 속 깊은 준비까지 다 끝내 둔 거야?"

 

재환의 진심 어린 축하에 민재의 얼굴이 붉어지며 멋쩍은 긁적거림이 이어졌다.

 

지유는 청첩장의 첫 장을 넘겼다.

 

정갈하게 박혀 있는 혼인 안내문과 함께 신랑 최민재, 신부 윤하은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지유의 눈가에 순식간에 뜨거운 이슬이 맺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동문 우체국 골목을 함께 뛰어다니며 떡볶이를 나누어 먹고, 김밥집에 닥친 수많은 위기마다 제 일처럼 울고 분노해 주었던 소중한 친구였다.

 

어머니가 병원에 계실 때 지유 대신 김밥집 문을 열어 참기름을 발라주던 하은이었고, 카메라 하나와 녹음기 한 대를 들고 조폭들의 협박 속에서도 비리 장부를 추적해 성재환 검사의 손에 쥐여주었던 민재였다.

 

그 피눈물 나는 세월을 함께 버텨낸 두 사람이 마침내 가장 눈부신 행복의 문턱에 서 있는 것이었다.

 

지유가 하은을 와락 끌어안았다.

 

"하은아, 정말 축하해. 너무 축하해…… 너희 둘 고생 많았잖아. 진짜 고생 많았잖아."

 

하은 역시 지유의 등을 토닥이며 참았던 눈물을 한 방울 떨구었다.

 

"지유야, 네가 우리 곁에 있어 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 네가 끝까지 도망치지 않고 버텨준 것처럼, 나도 민재 씨 믿고 견딜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우리의 새로운 시작을 축복해 줄 첫 번째 주인공은 반드시 너여야 해."

 

두 여인의 따뜻한 포옹 너머로, 평상 위 청첩장 묶음이 눈부신 햇살 속에서 조용히 숨을 쉬고 있었다.

 

3. 광한루원의 축복

 

한바탕 눈물과 웃음이 교차한 뒤, 네 사람은 평상 위에 둥글게 모여 앉았다.

 

지유는 눈가를 손수건으로 닦아낸 뒤 청첩장 안쪽에 적힌 일시와 장소를 다시금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장소란에 적힌 글귀를 발견한 지유의 시선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장소: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 완월정(玩月亭) 앞마당'

지유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민재와 하은을 바라보았다.

 

"예식장이…… 광한루원 완월정이야? 일반 예식장이 아니라?"

 

민재가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가슴 주머니에서 남원시청 직인이 찍힌 공문 사본 한 장을 펄럭여 보였다.

 

"그렇지. 요즘 다들 들어가는 그 답답하고 뻔한 콘크리트 예식장 건물은 딱 질색이거든. 우리가 어떤 사람들이야? 남원의 흙을 밟고 자라서 남원의 역사를 바로잡은 토박이들 아니야? 그래서 내가 시청 문화관광과에 정식으로 신청서를 넣었지. 제방 부실공사 터뜨리고 강태석 게이트 단독 보도한 최민재 기자가 결혼한다는데 시청에서 어떻게 안 내주겠어? 시장 직무대리가 직접 사인해 줬어. 완월정 앞 푸른 잔디밭에서 전통 혼례 방식으로 치르기로 완벽하게 허가받았지!"

 

완월정.

 

그 이름을 듣는 순간, 재환과 지유의 시선이 허공에서 은밀하고도 깊숙하게 마주쳤다.

 

광한루원 완월정과 그 곁을 흐르는 연못, 그리고 수령 수백 년 된 팽나무 고목과 오작교(烏竹橋).

 

그곳은 바로 7년 전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던 봄날, 열여덟의 소년 성재환과 소녀 한지유가 처음으로 마주쳐 운명 같은 인연의 실타래를 엮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재환이 떨어뜨렸던 각인 만년필을 지유가 주워 품에 안았고, 담장 밑에서 흑청색 잉크병을 건네며 비밀스러운 교감을 나누었던 곳.

 

그리고 서울로 강제 압송되기 직전, 학생증 증명사진 모서리를 잘라 건네며 '반드시 법복을 입고 돌아오겠다'고 맹세했던 비극과 약속의 원천이었다.

 

그동안 그 유서 깊은 누원은 강태석 일파가 요천각(蓼川閣) 밀실과 춘향 테마랜드 사업을 주무르며 온갖 추악한 이권과 뇌물을 거래하던 토착 비리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거악이 쓸려 나가고 진정한 사법 정의가 바로 선 남원에서, 완월정 앞마당은 친구들의 새로운 삶을 축복하는 가장 순결하고 눈부신 혼례의 무대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었다.

 

지유의 가슴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동이 소용돌이쳤다.

 

"완월정 잔디밭이라니…… 정말 근사하다. 가을 햇살 아래서 전통 혼례를 올리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은아, 너 족두리 쓰고 연지곤지 찍으면 세상에서 제일 고운 신부가 될 거야."

 

하은이 뺨을 붉히며 수줍게 웃었다.

 

"지유야, 그래서 말인데…… 네가 내 옆에 꼭 있어 줘야 해. 신부 들러리든, 수태모든 내 곁에서 손잡아 주고 가마 탈 때 옷고름 챙겨줄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우리 둘이 함께 맞춰 입을 고운 한복도 이미 남원 시내 주단집에 예약해 뒀어. 네 치수 재러 오늘 같이 가야 해."

 

지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은의 손을 꼭 쥐었다.

 

그때 민재가 품 안에서 붉은 비단 리본으로 묶인 또 하나의 단정한 봉투를 꺼내어 성재환 검사의 손에 쥐여주었다.

 

재환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이건 또 뭐냐, 민재야?"

 

민재가 진지하면서도 결연한 표정으로 재환의 두 손을 덥석 잡았다.

 

"형님, 이건 선택이 아니라 절대 명령입니다. 완월정 앞마당에서 열리는 우리 혼례식의 총괄 집례와 사회는 무조건 성재환 검사 형님이 맡아주셔야 합니다."

 

"내가 사회를?"

 

재환이 당황한 듯 허허 웃음을 터뜨렸다.

 

"민재야, 난 법정에서 피고인들한테 징역 구형하고 공소사실 낭독하는 거나 익숙하지, 남의 경사스러운 결혼식 사회를 어떻게 보냐. 자칫하다가 '신랑 신부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에 따라 평생 행복에 처한다' 같은 헛소리라도 나오면 어쩌려고 그래?"

 

재환의 위트 있는 자조에 평상 위가 웃음바다로 변했다.

 

지유도 소리 내어 웃었고, 하은도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민재는 손을 내저으며 정색을 했다.

 

"아닙니다, 형님.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에요. 형님이 이 남원에 내려와서 법의 정의를 세워주지 않았다면, 우리 신문사는 폐간당했을 거고 저랑 하은이는 덤프트럭에 치여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있었을지도 몰라요. 형님이 우리 목숨을 살려주셨고, 우리 사랑을 지켜주신 은인입니다. 그런 형님이 우리 두 사람의 첫 출발을 선언해 주지 않으시면 그 어떤 혼례도 의미가 없습니다. 남원지원 1호 대법정에서 울려 퍼졌던 그 멋진 목소리로, 이번에는 완월정 하늘 아래서 우리 결혼을 선언해 주십시오!"

 

민재의 진심 어린 눈빛과 떨리는 호소에, 재환은 들고 있던 봉투를 내려다보며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가슴속에서도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

 

사법연수원 수석 수료와 서울지검 특수부의 화려한 요직을 마다하고 홀로 남원으로 내려왔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친부의 목줄을 죄어야 했던 고통, 가문의 죄악을 도려내야 했던 피눈물 나는 결단 끝에, 마침내 지켜낸 친구들의 내일이 바로 이 손바닥만 한 청첩장 안에 담겨 있었다.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붉은 봉투를 품에 소중히 넣었다.

 

"좋다, 민재야. 내가 맡으마. 남원 역사상 가장 당당하고 멋진 혼례 선언을 해줄게."

 

민재가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질렀다.

 

재환은 주머니에서 각인 만년필을 꺼내어 손가락 사이에 굴리며 민재를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런데 민재야, 취재 소식통에 따르면 서울 중앙 일간지 보도국에서 너한테 스카우트 제의 공문을 보냈다던데, 그건 어떻게 할 생각이냐? 남원일보 1면 특종을 그렇게 연속으로 터뜨렸으니 서울 유력지에서 가만둘 리가 없지. 결혼하고 서울로 훌쩍 떠나버리는 건 아니겠지?"

 

재환의 예리한 질문에 지유와 하은의 시선도 동시에 민재에게 쏠렸다.

 

민재는 전혀 망설이지 않고 피식 웃음을 흘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에이, 형님도 참. 제가 서울 가서 뭐 하겠습니까? 거기 가면 정관계 거물들 밥 먹는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면서 팩트 확인도 안 되는 지라시나 받아 적어야 할 텐데요. 저는요, 요천 둑길 흙먼지 마시면서 우리 남원 사람들 사는 이야기 쓰고, 억울한 시장 상인들 눈물 닦아주는 기사 쓰는 게 백배 천배는 더 행복합니다. 하은이 직장도 남원에 있고, 지유 김밥집도 여기 있고, 형님도 남원지청에 버티고 계시는데 제가 어디를 가겠어요? 저 최민재는 이 남원 땅에 하은이랑 뼈를 묻을 겁니다!"

 

민재의 거침없고 호기로운 선언에 하은이 감동한 얼굴로 그의 팔짱을 꼭 꼈다.

 

지유 역시 벅차오르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활짝 웃었다.

 

"민재 씨다운 대답이네요. 우리 남원에 진짜 기자가 남아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하은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평상 너머로 지유와 재환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민재 씨 이야기는 됐고…… 이제 진짜 중요한 건 두 사람 아니에요? 우리 청첩장 날짜가 다음 달 셋째 주 토요일인데, 성재환 검사님이랑 한지유 사장님은 도대체 언제 국수 먹여줄 거예요? 남원 바닥에 두 사람 소문이 파다해요. 검사님이 매일 아침마다 김밥집으로 자전거 타고 출근 도장 찍는 거 모르는 사람이 없다니까요?"

 

하은의 직설적인 돌직구에 지유의 얼굴이 새빨간 단풍잎처럼 물들었다.

 

지유는 당황하여 애꿎은 손수건만 만지작거리며 말을 더듬었다.

 

"하, 하은아…… 무슨 소릴 그렇게 해. 재환 씨는 지금 지청 일도 바쁘고, 정리할 잔여 사건도 많은데……."

 

재환은 쑥스러워하는 지유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팔을 뻗어 그녀의 가녀린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단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늦지 않게 할 겁니다. 민재와 하은 씨가 광한루원에서 행복하게 첫 테이프를 끊어주면, 그다음 순서는 절대 다른 사람한테 양보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재환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고백에 하은이 손뼉을 치며 환호했고, 민재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지유는 부끄러움 속에서도 재환의 따뜻한 품에 살며시 기대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동문 우체국 뒷골목 삼거리 김밥집 앞마당에 쏟아지는 초가을 햇살은 그 어느 때보다 눈부시고 따사로웠다.

 

처마 끝 놋쇠 풍경이 바람을 타고 다시 한번 맑은 소리로 딸랑거렸다.

 

기나긴 비극과 폭압의 터널을 뚫고 나온 청춘들이 마침내 남원 땅 위에 일구어낸 진정한 사랑과 연대,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청첩장이 네 사람의 웃음소리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