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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약속] 끝까지 남은 사랑 · 제 1화

광한루의 봄바람

📅 2026-09-23 17:51•✍️ 만우자•👁️ 4•
첫 회차

1. 꽃잎 날리는 오후

 

사월의 바람은 언제나 조금은 성급하게 강물을 건너왔다.

 

남원(南原) 시내를 관통하는 요천의 둔치에는 갓 터진 벚꽃 멍울들이 솜사탕처럼 부풀어 있었고, 돌담 너머 광한루원(廣寒樓苑)의 누각은 해묵은 기와 위에 연분홍 꽃그늘을 겹겹이 두르고 있었다.

 

춘향교를 건너는 자전거 바퀴살마다 비껴드는 봄볕이 은빛 비늘처럼 부서져 내렸다.

 

"야, 성재환! 같이 좀 가자니까!"

 

뒤쪽에서 헐떡이며 페달을 밟아 대는 최민재의 고함이 바람을 가르고 날아왔다.

 

하복 셔츠 단추를 두 개나 풀어헤친 민재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재환은 핸들을 잡은 손목을 가볍게 꺾으며 속도를 늦추었다.

 

잘 다려진 교복 깃 위로 미풍이 스쳐 지나가며 단정한 옆얼굴을 드러냈다.

 

"모의고사 오답 노트는 다 끝내고 따라오는 거냐?"

 

"말도 마라. 학주 그 인간이 교무실 청소까지 시키는 바람에 아주 잡혀 죽는 줄 알았다니까. 시장님 아들이신 우리 성재환 도련님이야 전교 1등에 학생회장이니 교무실 문턱도 융단 깔고 넘겠지만, 나 같은 평민은 숨만 쉬어도 벌점이라고."

 

민재가 억울하다는 듯 핸들을 탕탕 치며 불평을 늘어놓았다.

 

재환은 픽 웃으며 가방끈을 고쳐 멨다.

 

'시장 아들'이라는 꼬리표는 늘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칭찬을 받아도 가문의 덕이었고, 조금만 흐트러져도 아버지의 이름에 흠집을 내는 격이 되었다.

 

완벽해야만 한다는 강박은 언제부턴가 재환의 가슴 한구석을 차가운 활자처럼 옥죄고 있었다.

 

오직 이른 봄날의 요천 둔치나 오래된 정원의 고요 속에 들어설 때만이 그 무게를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순간이었다.

 

"오늘 야자 빠지고 광한루원 가자는 게 누구였더라. 억울하면 지금이라도 도서관으로 돌아가든가."

 

"누가 간대? 미쳤냐? 이 날씨에 독서실에 처박혀 있는 건 청춘에 대한 모독이야. 게다가 하은이가 아까 지유 데리고 그쪽으로 간다고 했단 말이지."

 

민재가 실실 웃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재환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지유? 그게 누군데."

 

"아, 그 2반 한지유 몰라? 학교 앞 골목에서 어머니랑 삼거리 김밥집 하는 애 있잖아. 하은이랑 단짝인데, 평소엔 수업 끝나자마자 가게 일 돕느라 얼굴 보기도 힘든 애야. 오늘 웬일로 하은이가 끌고 나왔다더라."

 

재환은 어깨를 으쓱하며 더 묻지 않았다.

 

교복 재킷 안주머니에서 묵직한 원통형 쇠붙이가 느껴졌다.

 

지난겨울, 서울 명문 로스쿨을 졸업한 백부(伯父)가 건네주었던 검은 만년필이었다.

 

'법을 다루는 자의 손끝은 언제나 한 치의 흔들림도 없어야 한다.'

 

차갑고 단단한 독일제 만년필의 닙에는 금빛으로 벼려진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재환의 장래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궤도와 같았다.

 

법대에 진학해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가문의 기대를 짊어지는 법조인이 되는 것.

 

그 길에 대한 의심은 없었으나, 궤도를 도는 별처럼 삶은 늘 일정한 온도로 식어 있었다.

 

광한루원 정문 앞 팽나무 그늘 아래 자전거를 세운 두 소년은 매표소를 지나 경내로 들어섰다.

 

평일 늦은 오후의 정원은 인적이 드물었다.

 

연못 위로 드리워진 수양버들이 연둣빛 실가지들을 수면에 담그고 있었고, 완월정(翫月亭) 처마 끝에 걸린 풍경이 바람을 탈 때마다 맑은 쇳소리를 댕그랑 울렸다.

 

수면 위로 벚꽃 잎이 점점이 흩어져 흰 비단 폭처럼 일렁였다.

 

재환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물비린내와 은은한 흙냄새, 그리고 달착지근한 꽃향기가 폐부 깊숙이 들이찼다.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2. 돌다리 위의 우연

 

"어, 저기 있다! 야, 윤하은!"

 

민재가 호들갑을 떨며 오작교(烏竹橋) 쪽을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홍예를 튼 무지개다리 위, 반대편 버드나무 그늘 아래에 서 있던 여학생 둘이 돌아보았다.

 

챙이 둥근 모자를 쓴 하은이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고, 그 곁에 서 있던 다른 한 아이가 놀란 듯 멈칫거렸다.

 

연하늘색 카디건 소매를 단정하게 걷어붙인 소녀였다.

 

어깨선에 닿을락 말락 한 단발머리가 바람에 흩날리며 하얗고 둥그스름한 뺨을 간질였다.

 

소녀의 품에는 낡은 스케치북과 나무 연필통이 안겨 있었다.

 

햇살을 받아 맑게 빛나는 눈동자가 다리 난간을 향해 걸어오는 재환과 허공에서 맞물렸다.

 

바람이 문득 거세게 불어왔다.

 

연못가에 줄지어 선 아름드리 벚나무들이 일제히 몸을 뒤흔들자, 수천수만의 꽃잎이 소용돌이치며 오작교 위로 쏟아져 내렸다.

 

분홍빛 눈보라 사이로 소녀의 머리칼이 나부꼈다.

 

재환은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가슴 안쪽 어딘가가 덜컹거리며 낯선 파문이 일었다.

 

활자나 공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지극히 감각적이고 선명한 침묵이었다.

 

"최민재! 넌 여기까지 와서 목청을 돋우냐? 품위 없게."

 

하은이 땋은 머리를 찰랑거리며 다가와 민재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아얏! 반가워서 그랬지, 반가워서. 거 참 손맛 맵네. 야, 여기는 우리 반 회장 성재환. 말 안 해도 누군지 알지?"

 

하은이 혀를 차며 재환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알다마다. 교내 방송에서 이름이 하도 불려 나와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인데. 인사해, 여긴 내 친구 한지유야."

 

지유가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안녕……."

 

나직하면서도 맑은 목소리였다.

 

재환은 품 안의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가 천천히 풀었다.

 

"안녕. 성재환이야."

 

지유의 뺨에 엷은 홍조가 번져 나갔다.

 

"응, 알고 있어. 입학식 때 신입생 선서하는 거 봤었거든."

 

지유의 손끝에는 지우개 가루와 연필 흑연이 옅게 묻어 있었다.

 

김밥을 마느라 거칠어졌을 법도 한 손가락마디는 가늘고 곧았으나, 엄지손가락 안쪽에는 자그마한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재환은 그 작은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펜대만 굴려온 제 매끄러운 손바닥과는 사뭇 다른, 삶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온 자의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너 그림 그리는구나."

 

재환이 스케치북을 가리키며 묻자, 지유는 부끄러운 듯 책을 뒤로 숨기며 웃었다.

 

"아냐, 그냥 낙서야. 엄마 가게 메뉴판에 들어갈 그림이나 누각 같은 거…… 흉내만 내보는 거야."

 

"흉내는 무슨! 지유 그림 진짜 잘 그려. 미술 선생님도 미대 공모전 나가보라고 하셨는데, 얘가 바쁘다고 뺀 거라니까?"

 

하은의 자랑 섞인 타박에 지유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하은아, 제발……."

 

난간 아래 잉어들이 밥을 바라는 듯 붉은 주둥이를 뻐끔거리며 몰려들었다.

 

물결이 찰랑이며 돌다리 기둥을 때리는 소리가 청아하게 퍼졌다.

 

네 사람은 나란히 난간에 기대어 서서 물밑을 들여다보았다.

 

특별한 화제가 없어도 어색하지 않은 온기가 봄바람을 타고 흘렀다.

 

3. 춘향관 뒤란의 그늘

 

민재와 하은은 자판기 음료수를 뽑아 오겠다며 잔디밭 너머 매점으로 달려갔다.

 

순식간에 둘만 남겨진 오작교 위로 다시금 바람이 지나갔다.

 

벚꽃 잎 하나가 나풀거리며 지유의 왼쪽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재환은 손을 뻗으려다 말고 제 주머니 안으로 손을 도로 집어넣었다.

 

"삼거리 김밥집이면, 동문 우체국 골목 안쪽 맞지?"

 

정적을 깬 것은 재환이었다.

 

지유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동그란 눈에 호기심이 어렸다.

 

"어? 우리 집 알아?"

 

"오며 가며 간판은 봤어. 아침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골목 밖까지 나던데."

 

지유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며 말갛게 올라갔다.

 

"맞아, 우리 엄마가 방앗간에서 직접 짠 참기름만 쓰시거든.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서 밥 짓고 우엉 조릴 때가 제일 냄새가 진해. 너네 집은 관사 쪽에 있댔지? 큰길 건너편."

 

"응. 조용하긴 한데, 좀 삭막해. 늘 닫혀 있는 서재 문이랑 두꺼운 법서들뿐이라서."

 

털어놓고 나서 재환 스스로도 놀랐다.

 

집안 분위기나 내면의 결핍을 민재에게조차 이렇게 쉽게 꺼내놓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유의 맑은 시선 앞에서는 어쩐지 굳건한 방어벽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는 것만 같았다.

 

지유는 재환을 동정하거나 신기해하는 대신, 그저 물끄러미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겠네. 기대가 큰 만큼 어깨도 무거울 테니까."

 

그 짧은 위로가 재환의 가슴 밑바닥을 가만히 두드렸다.

 

'너는 시장 아들이니까', '너는 수재니까'라는 당연한 전제 뒤에 가려져 있던 소년의 피로를 정확히 알아채 준 첫 마디였다.

 

"저기, 광한루 뒤쪽에 팽나무 고목 있는 거 알아?"

 

지유가 문득 손가락으로 누각 뒤편의 둔덕을 가리켰다.

 

"아니, 늘 누각 앞쪽 연못만 봤어."

 

"거기 가보면 진짜 멋있어. 지리산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줄기가 그 나무 가지 사이로 제일 먼저 지나가거든. 잠깐 보러 갈래? 하은이랑 민재 오려면 아직 멀었을 텐데."

 

지유의 제안에 재환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오작교를 건너 회랑 뒤편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춘향관 뒤뜰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아 푸른 이끼가 융단처럼 깔려 있었다.

 

수령이 수백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팽나무가 거대한 그늘을 드리운 채 묵묵히 서 있었다.

 

나무 아래로 다가서자 서늘하고 웅장한 기운이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바닥에 황금빛 모자이크를 그렸다.

 

지유는 나무 밑동의 평평한 돌 위에 스케치북을 올려놓고 숨을 골랐다.

 

"난 마음이 복잡할 때마다 여기 와. 가게 일 돕다가 손목이 아프거나, 모의고사 성적이 떨어져서 속상할 때 여기 앉아 있으면 나무가 그러는 것 같거든. '괜찮다, 별일 아니다' 하고."

 

지유가 나무껍질에 조심스레 손바닥을 대며 속삭였다.

 

재환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부신 봄볕 속에서 지유의 단발머리가 금빛으로 타올랐다.

 

가난과 고단한 일상 속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제 삶의 고요한 쉼터를 가꿀 줄 아는 아이.

 

늘 완벽을 강요받으며 메말라가던 재환에게 지유는 한 줄기 신선한 샘물처럼 다가왔다.

 

4. 흘려둔 약속

 

지유가 연필통에서 몽당연필을 꺼내 스케치북을 폈다.

 

거친 결의 도화지 위에 팽나무의 뒤틀린 줄기가 유려한 선으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재환은 그 옆에 서서 지유의 손끝이 움직이는 궤적을 쫓았다.

 

흑연이 종이를 긁는 사각사각 소리가 바람결에 섞여 귓가를 간지럽혔다.

 

"연필 쥐는 손이 단단하네."

 

"응? 아, 칼로 깎아 쓰다 보니까 연필이 짧아져서 꽉 쥐어야 하거든."

 

몽당연필 꽁무니에는 볼펜 깍지가 끼워져 있었다.

 

알뜰하게 닳아버린 그 연필을 보는 순간, 재환은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묵직한 만년필이 손에 잡혔다.

 

옻칠을 한 듯 매끄러운 검은 배럴과 금빛 클립이 달린 귀한 물건이었다.

 

'이걸로 그리면 종이가 찢어지려나.'

 

재환은 만년필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금속 표면에 온기가 배어들고 있었다.

 

그에게 이 펜은 짊어져야 할 법의 무게였고 가문의 엄격한 규율이었지만, 지유의 하얀 도화지 위에 닿는다면 어떤 선을 그려낼지 문득 궁금해졌다.

 

그때 저 멀리 회랑 모퉁이에서 요란스러운 발소리와 함께 민재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야! 성재환! 한지유! 어디 갔냐? 매점에 포도맛 탄산음료 다 떨어져서 사이다 사 왔다!"

 

하은의 앙칼진 목소리도 이어졌다.

 

"지유야! 너 팽나무 밑에 있지? 빨리 와, 학주 순찰 도는 거 봤단 말이야!"

 

'학주'라는 단어에 지유의 어깨가 움찔했다.

 

"어떡해, 벌써 학생부 선생님들이 순찰 도실 시간인가 봐. 걸리면 교복 입고 무단이탈했다고 교무실 끌려갈 텐데."

 

지유가 허둥지둥 스케치북을 덮고 연필통을 챙겨 품에 안았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재환은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지유의 옷소매를 가볍게 잡았다.

 

"담장 뒤쪽에 쪽문 있어. 수리 중이라 빗장만 걸려 있으니까 거기로 나가면 서문 주차장 쪽으로 바로 빠져."

 

"정말? 가자!"

 

지유가 앞장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풀잎을 밟는 발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재환도 서둘러 뒤를 따르려던 찰나, 발을 헛디뎌 돌부리에 구두 코를 채였다.

 

몸이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는 사이, 재킷 주머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빠져나와 푹신한 풀숲으로 떨어졌다.

 

재환은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한 채 지유를 쫓아 달려갔다.

 

팽나무 굵은 뿌리 옆, 연분홍 벚꽃 잎이 수북이 쌓인 풀숲 한가운데 묵직한 만년필이 조용히 박혀 있었다.

 

봄날의 기울어진 석양이 금빛 닙 위에 내려앉아 길고 날카로운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5. 손끝에 남은 이름

 

비상 쪽문을 빠져나온 넷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돌담 아래 주저앉았다.

 

민재는 캔 사이다를 따서 벌컥벌컥 들이켰고, 하은은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씩씩거렸다.

 

"하아, 심장 떨어질 뻔했네. 학주 자전거 바퀴 보고 기절하는 줄 알았잖아."

 

"그러게 내가 뭐랬냐, 진작 매점에서 튀었어야지."

 

티격태격하는 둘의 모습을 보며 지유는 조용히 웃음을 터뜨렸다.

 

가슴이 콩닥거렸지만, 묘한 해방감이 전신을 감돌았다.

 

매일 학교와 가게, 집만을 쳇바퀴 돌듯 오가던 일상에 불현듯 끼어든 작은 모험이었다.

 

재환 역시 숨을 고르며 지유를 바라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뺨과 바람에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엿보이는 지유의 눈빛이 봄날의 개울물처럼 청량했다.

 

둘의 시선이 다시 한번 허공에서 얽혔다.

 

이번에는 아무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야, 이제 진짜 해 떨어진다. 가게 문 열 시간 다 됐어. 지유야, 가자."

 

하은이 지유의 팔을 잡아끌며 일어섰다.

 

지유는 흙이 묻은 치맛자락을 털어내며 재환에게 목례를 건넸다.

 

"오늘 고마웠어, 재환아. 쪽문 아니었으면 벌점 백 점은 받았을 거야."

 

"조심해서 가. 김밥집…… 언젠가 들를게."

 

재환의 말에 지유는 눈을 반짝이며 활짝 웃었다.

 

"응, 오면 내가 우엉 제일 많이 넣어서 말아줄게!"

 

두 소녀가 깔깔거리며 큰길 쪽으로 멀어져 갔다.

 

민재가 재환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냐, 너네 둘? 언제 그렇게 통성명하고 통했냐? 성재환이 웬일로 여자애한테 먼저 말을 다 걸고."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자. 저녁 자율학습 시작하겠다."

 

재환이 무심하게 대꾸하며 교복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그 순간, 얼어붙었다.

 

손가락 끝에 닿아야 할 차갑고 묵직한 쇠의 감촉이 없었다.

 

비어 있는 주머니 안쪽 천만이 허탈하게 만져질 뿐이었다.

 

"……!"

 

'만년필.'

 

백부가 건네주며 가문의 명예를 당부했던, 언젠가 그가 법정에 서는 날까지 품에 지녀야 한다던 그 만년필이었다.

 

재환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야, 왜 그래? 뭐 두고 왔냐?"

 

민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지만 재환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돌부리에 걸렸을 때다.'

 

팽나무 아래, 수북하게 쌓여 있던 벚꽃 잎들.

 

재환은 뒤를 돌아 다시 돌담 쪽문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야! 성재환! 어디 가!"

 

등 뒤에서 민재가 소리쳤지만 멈출 수 없었다.

 

쪽문은 이미 밖에서 굳게 닫혀 잠겨 있었고, 서편 하늘은 붉은 노을로 짙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한편, 골목길을 꺾어 들어가던 지유는 제 주머니를 뒤적이다 멈춰 섰다.

 

아까 돌담을 넘어올 때 발밑에 채여 무심코 주워 담았던 묵직한 물건.

 

벚꽃 잎 속에 파묻혀 있던 그것을 품에서 꺼내든 순간, 지유의 숨이 멎었다.

 

황혼의 붉은 빛을 받아 은은한 금빛과 흑요석 같은 광택을 뿜어내는 고급 만년필이었다.

 

캡 상단에는 정교하게 음각된 세 글자가 또렷하게 박혀 있었다.

 

'成 宰 桓 (성재환)'

그리고 그 아래, 아주 작고 날카로운 필체로 새겨진 라틴어 한 문장.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워라).'

 

지유는 두 손으로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서늘한 금속의 표면 뒤로 소년의 단정하고도 서글펐던 눈빛이 겹쳐졌다.

 

사월의 봄바람이 다시금 골목길을 훑고 지나가며, 소녀의 귓가에 아득한 파도 소리 같은 운명의 서막을 속삭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

첫 회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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