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맑은 오후
1. 당산철교의 침묵
거센 바람이 한강의 둔치를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변전 시설 외곽으로 뻗어 나온 수만 볼트의 초고압 케이블들은 금방이라도 날카로운 스파크를 튀길 듯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강우진은 무릎을 굽힌 채 굳게 닫힌 변전실 철제 출입문의 틈새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야를 어지럽히던 푸른 궤적선이나 허공을 부유하던 기하학적 도형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머릿속을 바늘로 찌르듯 파고들던 편두통도, 시신경을 짓누르던 끔찍한 안압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의 오감은 오롯이 생생한 인간 본연의 날것으로 깨어나 있었다.
바람에 실려 오는 차가운 강물 냄새와 비릿한 오존 냄새, 그리고 변전실 환풍구를 통해 희미하게 배어 나오는 기계유 냄새가 콧등을 스쳤다.
"경비 인력들은 모두 외곽으로 이송됐어요."
서연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손에는 한 손에 쥐기 편한 아날로그 녹음기와 휴대전화가 단단히 쥐여 있었다.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에 찬 소형 손전등을 매만졌다.
"안에 녀석들이 남아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문손잡이는 이미 날카로운 충격에 의해 안쪽으로 비틀려 뜯겨 나가 있었다.
열화나 화약의 폭발 흔적이 아니었다.
오직 공간의 인과율과 압력을 한 점으로 우그러뜨려 분자 구조를 강제로 찢어발긴, 1세대 결손체 특유의 파열 흔적이었다.
우진은 조심스럽게 문을 밀어젖혔다.
끼이익 하는 둔탁한 마찰음과 함께 지하로 통하는 계단실의 서늘한 냉기가 훅 끼쳐왔다.
변전 시설 하부 공동구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거대한 변압기들이 내는 웅웅거리는 진동음만이 바닥을 울릴 뿐,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우진이 먼저 계단을 밟고 내려섰다.
계단 난간 곳곳에 선명한 핏자국이 말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 핏자국 너머, 지하 중앙 제어실 바닥 한가운데에 놓인 것은 뜻밖의 광경이었다.
초고압 배전반에 연결되었던 흔적이 역력한 굵은 접지선들이 어지럽게 잘려 나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 위에는 잿빛 그을음과 함께 뜯겨 나간 회로 기판의 파편들만이 널브러져 있었다.
"……없어요?"
서연이 우진의 등 뒤에서 숨을 삼켰다.
우진은 무릎을 꿇고 바닥에 흩어진 파편 하나를 집어 들었다.
영하 수십 도의 냉매를 견디도록 특수 설계되었던 티타늄 합금 외피의 일부였다.
표면에는 넥스트 큐브의 푸른 육면체 로고가 희미하게 각인되어 있었으나, 내부의 양자 셀과 초전도 코일은 이미 통째로 적출된 뒤였다.
"예비 인과율 축전 유닛을 완전히 해체해서 알맹이만 빼 갔습니다."
우진이 낮게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여기서 기폭시킬 생각이 아니었던 겁니다."
"네? 그렇다면 왜 이곳을 습격한 거죠?"
"충전이었을 겁니다."
우진의 시선이 까맣게 타버린 메인 변전 콘솔로 향했다.
"오르비스가 붕괴하면서 챔버에 잠들어 있던 결손체들이 깨어났지만, 그들이 탈취한 축전 유닛은 완전히 방전된 상태였을 겁니다. 15년간 응축된 왜곡된 엔트로피를 현실 세계로 쏟아부으려면, 이 유닛을 다시 가동할 막대한 규모의 기폭 전력이 필요했던 거죠. 당산철교 하부의 15만 볼트 순환선 전력을 빨아들여 유닛의 잔류 코어에 강제로 인가한 겁니다."
바닥 한구석, 녹색 페인트가 칠해진 배전반 철판 위에 붉은 래커로 휘갈겨 쓴 글자가 드러나 있었다.
[PROJECT NEMO : EXCLUSION 01]
그리고 그 아래, 날카로운 금속으로 긁어 새긴 서늘한 문장이 이어져 있었다.
[빛을 빼앗긴 자들이, 너희의 그 오만한 백지에 가장 깊은 어둠을 새겨주마.]
서연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우진 씨…… 이자들은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걸까요? 축전 유닛을 완전히 충전했다면, 다음 목표는……."
우진은 파편을 내려놓고 천천히 일어섰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분했다.
"도심 한복판이겠죠.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이고, 시스템의 통제가 사라져 혼란과 자유가 뒤섞인 곳. 자신들이 잃어버렸던 15년의 대가를 세상 전체에 돌려주려 할 겁니다."
"경찰과 특수본에 즉시 연락해야 해요. 전력망 공격은 막았지만, 축전 유닛을 들고 이동했다면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몰라요."
"알고 있습니다. 서연 씨, 특수본의 최 차장검사에게 바로 이 흔적을 넘기세요. 축전 유닛의 특성상 고압 방전 잔류 펄스가 남을 테니, 전파 측정반을 동원하면 이동 경로를 좁힐 수 있을 겁니다."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전화를 귀에 댔다.
그녀가 다급하게 현장 상황을 보고하는 동안, 우진은 다시 한번 난간을 올려다보았다.
과거의 망령은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가슴속을 짓누르던 막막한 공포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도형이 보이던 시절, 그는 언제나 예정된 비극의 숫자를 세며 두려움에 떨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는 것은, 그 파멸을 막아낼 가능성 역시 온전히 열려 있다는 뜻이었다.
2. 상도동으로 돌아오는 길
당산철교를 빠져나왔을 때는 정오를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강변북로를 타고 달리는 차량들의 엔진 소리가 낮게 깔려 흘렀다.
특수본 기동대가 현장에 도착해 증거물 수거와 이동 경로 추적에 돌입했고, 서연은 언론사 데스크와 검찰청을 오가며 후속 취재를 정리하기 위해 여의도로 향했다.
"우진 씨, 작업실로 바로 가실 거예요?"
헤어지기 직전, 서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었다.
"네. 일단 작업실을 정리해 둬야죠. 그리고…… 기다릴 겁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도현이라는 그 사람, 그리고 1세대 결손체들…… 그들은 15년 전의 상처 속에서 멈춰버린 괴물들이에요. 우진 씨 혼자 짊어질 짐이 아니에요."
"혼자가 아닙니다."
우진은 엷은 미소를 지으며 서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서연 씨가 쓴 책처럼, 우리 모두가 각자의 몫을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지하철 7호선 상도역에서 내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는 우진의 발걸음은 담담했다.
초여름으로 접어드는 한낮의 햇살이 가파른 아스팔트 바닥 위에 길게 부서져 내렸다.
골목길 양옆으로 늘어선 붉은 벽돌 주택들의 옥상에는 빨래들이 바람에 하얗게 나부끼고 있었다.
어느 집 담벼락 밑에서는 주황색 길고양이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햇볕을 쬐고 있었고, 활짝 열린 빌라 1층 창문 너머로는 된장찌개 끓는 구수한 냄새와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우진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하늘은 티 없이 맑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이 골목을 걷는 사람들의 머리 위에는 저마다의 사각 규격이 둥둥 떠 있었다.
출근길의 초조함을 담은 백색 네모, 사채 빚과 질병에 짓눌려 붉은빛으로 비틀리던 세모, 그리고 하늘 저 높은 곳에서 내려와 목덜미를 옭아매던 칠흑빛 꼭두각시 줄선들.
그 모든 족쇄가 지금은 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정수리 위에는 오직 부드러운 바람과 따스한 햇살만이 머물고 있었다.
우진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이 들어오는 공기가 서늘하면서도 달콤했다.
상도동 147번지, 낡은 2층 목조 단독주택의 1층.
과거 참기름집이었던 자리를 개조해 만든 그의 목공 작업실이 저만치 보였다.
가게 앞 유리창에는 어젯밤 자신이 철물점에서 구해 손수 갈아 끼운 8밀리미터 접합 방범 유리가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충격파로 깨져 나갔던 흔적은 말끔히 지워져 있었고, 새로 맞춘 나무 창틀에서는 은은한 오일 스테인 냄새가 풍겼다.
작업실 앞에는 그가 며칠 전 단단한 물푸레나무를 깎아 만든 소박한 평상형 원목 벤치가 놓여 있었다.
우진은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벤치 앞으로 다가가 털썩 걸터앉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대자 따스하게 달구어진 나무의 온기가 척추를 타고 전해졌다.
바지 주머니 속에서 손때 묻은 작은 열쇠고리가 만져졌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비록 도심 어딘가에 충전된 예비 축전 유닛을 쥔 채 복수를 벼르는 백도현 일행이 숨어 있다 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상도동의 골목길에 흐르는 시간은 더없이 온전한 인간의 것이었다.
3. 벤치 위에 쏟아지는 햇살
오후 2시의 햇살은 눈부시도록 찬란했다.
우진은 두 팔을 벤치 등받이에 걸친 채 나직하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골목 저편, 삼거리 모퉁이에 위치한 작은 슈퍼마켓 앞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날이 이렇게 좋은데 왜 집구석에만 박혀 있어? 나와서 콩나물이나 좀 다듬어 봐."
꽃무늬 일바지를 입은 복덕방 할머니가 플라스틱 소쿠리를 평상 위에 탕 내려놓으며 건너편 세탁소 주인을 향해 혀를 찼다.
세탁소 주인은 목에 줄자를 두른 채 담배를 태우러 밖으로 나오다가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형수님, 오늘 배달할 와이셔츠가 스무 벌이에요, 스무 벌. 통제 앱인지 뭔지 사라지고 나니까 사람들이 다시 양복을 입고 출근을 하잖아. 다림질하느라 팔 빠지겠어요."
"좋은 일이지, 그럼! 사람 사는 게 바빠야 생기가 도는 법이야."
할머니가 콩나물 대가리를 톡톡 분지르며 맞받아쳤다.
"그나저나 저기 총각, 밥은 먹고 일하는지 몰라. 어제 보니까 유리창 간다고 땀을 뻘뻘 흘리던데."
할머니의 시선이 우진의 작업실 쪽을 향했다.
벤치에 앉아 있던 우진과 눈이 마주치자, 할머니는 이가 빠진 환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총각! 밥 안 먹었으면 일루 와! 점심에 삶은 감자 남은 거 있어!"
우진은 자리에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손을 내저었다.
"괜찮습니다, 할머니! 조금 전에 먹고 들어왔어요!"
"거짓말하네, 얼굴이 반쪽인데! 이따 저녁에 찌개 끓이면 냄비 들고 건너와!"
"네, 감사합니다!"
우진의 입가에 절로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가파른 언덕길 아래쪽에서 덜컹거리는 자전거 페달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소년 둘이 교복 셔츠를 풀어헤친 채 자전거를 타고 씩씩거리며 올라오고 있었다.
"야, 내가 먼저 삼거리 슈퍼 도착하면 네가 아이스크림 쏘는 거다!"
"웃기지 마! 내 자전거 기어가 더 높아!"
앞서가던 소년이 핸들을 거칠게 꺾으며 가속을 붙였지만, 골목길 모퉁이에 놓인 배수구 뚜껑을 미처 보지 못하고 덜컹 흔들렸다.
순간 자전거 바퀴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우진의 눈앞에 즉각 푸른 궤적선이 허공을 가르며 낙하 지점과 충돌 각도를 0.3초 전에 계산해 주었을 것이다.
위험을 경고하는 붉은 세모가 소년의 정수리 위에서 미친 듯이 회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진의 시야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직 날카롭게 꺾이는 은빛 자전거 바퀴와,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뜬 소년의 표정만이 보일 뿐이었다.
소년은 본능적으로 두 다리를 땅으로 뻗어 아스팔트를 좍 끌었다.
운동화 밑창이 타는 냄새와 함께 자전거는 기우뚱하다가 전신주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으아, 씨! 심장 떨어질 뻔했네!"
뒤따라오던 친구가 자전거를 멈추며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꼴좋다, 민호야! 아이스크림 아까워서 묘기 부리냐?"
"야, 너 웃지 마라! 진짜 뒤질 뻔했거든?"
넘어질 뻔했던 소년이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이며 씩 웃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시스템이 정해둔 '사고의 확률'도, 누군가의 개입으로 인해 인근 타인에게 튀어 나가야 할 '인과율의 결손'도 존재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면 발을 뻗어 스스로 균형을 잡는다.
넘어질 뻔한 실수는 친구의 유쾌한 웃음 속에서 한바탕 소동으로 녹아내린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수만 년 동안 살아온 방식이었고, 네모 프로젝트가 그토록 두려워하며 지워버리려 했던 '불확실성의 탄력'이었다.
우진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깊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토록 서툴고, 이토록 불완전하기에 세상은 비로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4. 다채로운 표정들의 행렬
오후의 골목길은 끊임없이 새로운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채워졌다.
상도역 쪽에서 올라오는 사람들마다 저마다의 사연과 감정을 얼굴 가득 품고 있었다.
단 한 사람도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양손에 식료품이 가득 담긴 장바구니를 든 삼십대 주부는, 봉투 밖으로 삐져나온 파 단을 보며 저녁 메뉴를 고민하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찌푸림은 고통이나 파멸의 징조가 아니었다.
오늘 저녁 가족들에게 어떤 찌개를 끓여줄지, 아이가 좋아하는 계란말이를 할지 고민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따뜻한 일상의 무게였다.
그 뒤를 따라 걸어오는 낡은 정장 차림의 청년은 한 손에 이력서 서류 봉투를 쥐고 있었다.
면접에서 쓴잔을 마신 것인지 어깨가 축 늘어져 있었지만,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 너머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에 맞춰 발끝으로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그 청년의 얼굴에는 좌절과 오기, 그리고 내일은 다시 다른 곳에 지원해 보겠다는 막연한 희망이 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저 표정이다.'
우진은 청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과거 미러 큐브의 추천 알고리즘에 영혼을 맡겼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저런 표정이 없었다.
그들의 표정은 언제나 차갑게 식어 있거나, 시스템이 정해준 가이드라인을 맹목적으로 따르며 감정이 거세된 무채색의 가면 같았다.
순응도가 95%를 넘어가면 머리 위에 검은 네모가 떠오르고, 결국 희생 노드로 지정되어 파멸의 낭떠러지로 떠밀려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조차 알지 못했던 가련한 꼭두각시들.
하지만 지금 저 청년은 실패했음에도 살아 있었다.
자신의 선택으로 시험을 치렀고, 자신의 선택으로 낙방의 씁쓸함을 맛보았으며, 그렇기에 다시 일어설 권리 또한 온전히 자신의 손에 쥐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강 사장님!"
쾌활한 인사 소리에 우진이 고개를 돌렸다.
인근 빌라 단지에서 택배 배송을 하던 청년 기사가 손수레를 끌며 지나가고 있었다.
땀에 젖은 이마를 수건으로 훔치는 청년의 얼굴에는 고된 노동의 피로가 역력했지만, 눈빛만큼은 활기찼다.
"수고 많으십니다. 날이 많이 덥죠?"
우진이 벤치에서 일어나며 인사를 건넸다.
"에이, 그래도 오늘은 좀 살만합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길 안내 앱이 먹통이 돼서 골목길마다 헤맸는데, 이제 슬슬 눈에 익더라고요. 기계가 가르쳐 주는 길보다 내 발로 익힌 지름길이 훨씬 빨라요!"
청년이 씨익 웃으며 손수레 손잡이를 고쳐 잡았다.
"역시 사람은 머리를 굴려야 하나 봅니다. 사장님도 더운데 쉬엄쉬엄 하세요!"
"네, 운전 조심하시고요."
손수레를 밀며 멀어져 가는 택배 기사의 등 뒤로 햇살이 길게 쏟아졌다.
기계의 최적화 알고리즘이 멈추었을 때 사람들은 길을 잃었다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불과 며칠 지나지 않아, 인간은 자신의 발과 눈으로 스스로의 길을 다시 찾아내고 있었다.
골목길 건너편 담벼락 아래에서는 어린 소녀 하나가 쪼그리고 앉아 개미 떼의 행렬을 관찰하고 있었다.
소녀는 작은 나뭇가지를 주워 개미들의 길 앞을 살짝 막아섰다.
개미들이 나뭇가지를 피해 우회로를 만들자, 소녀의 얼굴에 터져 나오는 천진난만한 호기심과 환희.
그 얼굴에는 어떤 규격도, 어떤 계산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것은 온전히 세계와 부딪히며 새로운 질서를 발견해 나가는 어린 생명의 순수한 경이였다.
우진은 벤치에 앉아 그 모든 표정들을 하나하나 가슴속에 새겨 넣었다.
기쁨, 슬픔, 초조함, 안도, 분노, 사랑, 체념, 그리고 용기.
어떤 인공지능도, 어떤 양자 슈퍼컴퓨터의 인생 궤도 방정식도 결코 완벽히 시뮬레이션해 낼 수 없는 무수한 인간의 마음들.
그 마음들이 만들어내는 불협화음이야말로 이 세계를 굴러가게 만드는 가장 거대하고 아름다운 하모니였다.
5. 백지 위에 남겨질 것
바람이 불어와 작업실 처마 끝에 매달린 작은 풍경을 짤랑거리며 울렸다.
맑고 청아한 쇳소리가 골목길의 공기 속으로 은은하게 퍼져 나갔다.
우진은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려다, 이내 손을 멈추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의 주머니 속에는 더 이상 수첩이 없었다.
어제 오후, 상도동 작업실의 주철 난로 속에서 15년간 자신을 옭아맸던 관찰 일지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완전히 타올라 사라졌다.
□, △, ○.
세 가지 기하학적 도형으로 인간의 삶을 재단하고, 인과율의 균열과 엔트로피의 보존 법칙을 증명하려 했던 그 빽빽한 기록들은 이제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기록할 필요가 없으니까.'
우진은 벤치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더 이상 관찰할 도형이 없었다.
분석해야 할 꼭두각시 줄도 없었고, 대비해야 할 미래의 궤적선도 없었다.
남은 것은 오직 이 텅 빈 하늘과, 그 아래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온전한 발걸음뿐이었다.
"우진아."
그때, 귓가에 문득 며칠 전 제천 연구실 마당에서 아버지가 건넸던 목소리가 환청처럼 스쳐 지나갔다.
[통계는 통제하기 위한 게 아니라, 불완전한 세상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오차와 우연을 없애려 했던 내 연구는 결국 오만이었어.
인간은 정답으로 사는 게 아니라, 수많은 오답을 고쳐가며 비로소 어른이 되는 거란다.]
아버지는 지금쯤 제천의 숲자락 아래서 흑연 연필을 쥐고 노란 격자 노트 위에 순수한 자연의 숫자를 적어 내려가고 있을 터였다.
바람의 세기, 소나무 잎이 떨어지는 주기, 냇물이 굽이쳐 흐르는 유속.
어떤 강제도, 어떤 조작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불완전함을 겸허히 관찰하는 순수한 학문의 길.
그리고 채린은 노량진의 작은 학원 독서실에서 연필을 쥐고 새하얀 도화지 위에 선을 긋고 있을 것이다.
손끝에서 은빛 척력이 사라진 대신, 온전히 자신의 근육과 시선으로 종이 위에 새겨 넣는 서툴지만 정직한 데생.
그것이야말로 채린이 그토록 바랐던 '내 마음대로 그릴 수 있는 세상'이었다.
우진은 손바닥을 펴 자신의 거친 손을 바라보았다.
손바닥 곳곳에 대패와 끌을 쥐며 생긴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여 있었다.
나무를 깎는 일은 결을 거스르지 않는 일이다.
단단한 옹이가 나오면 그것을 파내어 없애는 대신, 옹이의 굴곡에 맞춰 칼날의 각도를 비스듬히 눕혀야 한다.
사람의 삶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상처와 불행이라는 옹이를 억지로 도려내려 했던 네모 프로젝트의 시도는 결국 세상을 거대한 괴물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상처가 있다면 그 상처를 품은 채로, 결이 비틀렸다면 그 비틀림마저 자신의 고유한 무늬로 받아들이며 자라나는 것이 진짜 인간의 나무였다.
"총각! 물 좀 마시고 해!"
맞은편 세탁소 주인이 시원한 보리차가 담긴 유리컵을 들고 길을 건너왔다.
"아, 감사합니다."
우진이 벤치에서 일어나 두 손으로 컵을 받아들었다.
얼음이 짤랑거리며 부딪히는 유리컵 표면에 맺힌 물방울들이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단숨에 들이켠 보리차가 목구멍을 타고 시원하게 흘러내렸다.
"아주 날씨가 기가 막혀. 비 온 뒤라 그런지 하늘이 꼭 가을 하늘 같네."
세탁소 주인이 허리에 손을 얹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그러게요. 정말 맑습니다."
우진 역시 비어버린 컵을 쥔 채 함께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높고 푸른 창공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선은 없었다.
인간을 얽매던 거대한 격자망(Grid)은 완전히 찢겨 나갔고, 도시의 상공을 뒤덮었던 칠흑빛 통제선들은 영원한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우진은 알고 있었다.
백도현과 1세대 결손체들이 남아 있는 한, 이 평화는 언제든 깨어질 수 있는 살얼음판과 같다는 것을.
그들은 넥스트 큐브의 폐허에서 건져 올린 예비 인과율 축전 유닛을 들고 기어이 이 거리에 불길을 지피려 할 것이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이능이 사라진 평범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에게는 지켜야 할 일상이 있었고, 함께 내일을 만들어갈 이웃들과 동료들이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거대한 어둠을 끌고 온다 한들, 이미 자유의 빛을 맛본 사람들의 다채로운 발걸음을 다시 사각의 틀 속에 가둘 수는 없을 것이다.
세탁소 주인이 컵을 받아 들고 돌아간 뒤, 우진은 다시 벤치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따스한 햇살이 그의 감긴 눈꺼풀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골목길 저편에서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메아리쳤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불확실성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였다.
우진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어느 맑은 오후의 햇살 속에서 조용히 깊어지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