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연의 취재 파일
1. 활자 속에 새겨진 파동
상도동 147번지 언덕길의 목공 작업실에는 아침 일찍부터 서늘한 솔바람이 불어 들었다.
창틀을 새로 갈아 끼운 두꺼운 접합 방범 유리 너머로, 가을빛을 머금은 맑은 햇살이 작업대 위에 길쭉한 사각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사각의 그림자.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정수리 위에서 서슬 퍼렇게 억압하던 그 사각형의 기하학체는 이제 단지 창틀을 통과한 자연스러운 빛과 그늘의 형태일 뿐이었다.
강우진은 대패의 날을 미세하게 조정한 뒤, 작업대 위에 단단히 물려 둔 물푸레나무 상판을 천천히 밀어냈다.
스으윽, 하는 맑고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얇디얇은 나무 대팻밥이 투명한 리본처럼 말려 올라왔다.
나무 결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자 미세한 굴곡과 거친 숨결이 피부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기계처럼 완벽한 평면도 아니고, 알고리즘이 깎아낸 무결점의 규격도 아니었다.
나무가 비바람을 맞고 햇볕을 쬐며 자라난 시간만큼 제각기 휘어지고 뒤틀린 자연 그대로의 결이었다.
그 불완전한 결을 손가락 끝으로 어루만질 때마다, 우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선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단단한 안도감이 차올랐다.
"기자님 오셨어요?"
등 뒤에서 문에 달린 작은 황동 풍경이 딸랑이며 맑은 쇳소리를 냈다.
우진이 대패를 내려놓고 고개를 돌리자, 옅은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한서연이 문가에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갓 인쇄되어 나온 묵직한 양장본 단행본 대여섯 권이 종이 끈으로 단단히 묶여 들려 있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그녀의 뺨이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고, 그 눈동자에는 피로 속에서도 감출 수 없는 찬란한 생기가 넘쳐흘렀다.
"아직 잉크 냄새도 다 안 빠졌어요."
서연이 작업대 한구석, 대팻밥이 닿지 않는 깨끗한 합판 위에 책 묶음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웃었다.
"오늘 아침에 인쇄소에서 1쇄 3만 부가 서점으로 깔리기 시작했거든요. 출판사 대표님이 직접 차 트렁크에 싣고 방송국 데스크까지 달려오셨더라고요. 세상에서 제일 먼저 보여주고 싶은 사람한테 가져왔어요."
우진은 목장갑을 벗어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가섰다.
종이 끈을 풀자 짙은 감청색 표지에 은박으로 박힌 활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선택할 권리》.
부제로는 작고 정갈한 고딕체로 적혀 있었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궤도, 그리고 불확실성을 되찾은 인간들의 기록].
책장을 넘기자 서걱거리는 종이의 감촉과 함께 알싸한 유성 잉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첫 장에는 한서연 특유의 곧고 힘 있는 친필 서명이 만년필 잉크로 적혀 있었다.
[모든 틀을 깨부수고 우리에게 '불완전하게 헤맬 자유'를 되찾아준 강우진 대리님께.
- 한서연 드림].
우진은 그 글귀를 한동안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대리님'이라는 호칭이 묘하게 낯설면서도 가슴 한구석을 뭉클하게 자극했다.
시스템이 정해준 만년 대리의 사각 틀에서 걸어 나온 지 고작 보름 남짓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이 지나온 궤적은 몇 번의 생을 새로 산 것만큼이나 아득하고 거대했다.
"목차를 보니까…… 그때 그 이야기들이 전부 들어 있네요."
우진이 책장을 천천히 넘기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제1장 '보이지 않는 사각 격자', 제2장 '통제된 불행과 조작된 운명', 제3장 '우리는 왜 안전한 감옥을 갈망했는가', 그리고 마지막 장인 '불확실성의 바다로'.
차분히 목차를 훑어내려가는 우진의 시선 끝에 서연의 맑은 미소가 맺혔다.
2. 침묵을 깬 증언들
한서연은 작업실 한편에 놓인 우진이 만든 첫 번째 원목 의자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의자는 삐걱거림 없이 서연의 몸을 편안하고 묵직하게 받쳐주었다.
"단순한 폭로 르포로 쓰고 싶지 않았어요."
서연이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말을 이었다.
우진이 전기 주전자로 끓여 내온 구수한 보리차 김이 두 사람 사이로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넥스트 큐브의 페이퍼 컴퍼니들, 국가안전기획처의 결탁, 테헤란로 지하 100미터의 오르비스 슈퍼컴퓨터…… 그런 기술적인 내막이나 정치적 비리는 이미 특수본 수사와 제 보도 기사로 다 까발려졌으니까요. 제가 이 책에 진짜로 담고 싶었던 건 시스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시스템 밑바닥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살아갔던 보통 사람들의 목소리였어요."
서연의 손가락이 책의 200페이지 언저리를 펼쳤다.
그곳에는 익숙한 사연들이 촘촘한 활자가 되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미러 큐브의 인공지능 추천 알고리즘에 영혼까지 맡겼다가 친동생의 사채 빚을 떠안고 쓰러졌던 편의점 김 씨의 인터뷰.
태성C&I 최종 면접장에서 '희생 노드'로 분류되어 기계적으로 탈락의 절망을 맛보아야 했던 청년 이진혁의 자필 수기.
정략결혼이라는 이름의 가짜 사랑에 신경망을 결속당할 뻔했던 상류층 자제들의 고백.
그리고 지하철 강남역 선로로 떨어질 뻔했던 아이와, 그 아이의 구원으로 인해 도미노처럼 튕겨 나간 인과율의 충격파를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던 20대 청년 승객 준호의 이야기까지.
"편의점 김 씨 아저씨는 지난주에 의식을 완전히 회복하셨어요."
서연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친동생이 남기고 간 사채 채무는 검찰 특수본이 큐브 네트웍스를 불법 금융 다단계 조직으로 기소하면서 전액 사기 무효 처분이 내려졌고요. 아저씨가 병상에서 제 손을 잡고 그러시더라고요. '처음엔 그 앱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내 인생이 완벽한 정답일 줄 알았다. 그런데 내 발로 넘어지고 내 손으로 털고 일어나는 게 진짜 사는 거였다'라고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속 깊은 응어리 하나가 스르륵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우진의 내면을 무겁게 짓눌러왔던 것은 바로 '인과율 보존 법칙'이라는 잔혹한 굴레였다.
누군가의 파멸을 막으면, 그 파멸의 에너지가 갈 곳을 잃고 인접한 타인에게 튀어 새로운 비극을 만들어내던 기괴한 시스템의 저주.
그 저주 때문에 자신이 손을 뻗어 사람을 구하는 행위조차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오르비스의 중앙 코어가 불타고, 도시를 옭아매던 사각 격자망이 영구 소각되면서 그 인위적인 보존 법칙은 깨어졌다.
사람들은 이제 타인의 희생을 담보로 한 완벽한 궤도를 강요받지 않는다.
넘어지면 아프고, 길을 잃으면 헤매지만, 그것은 시스템이 배정한 파멸이 아니라 삶이라는 여정에서 겪는 지극히 당연한 시행착오일 뿐이었다.
"출판사 편집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예약 판매 첫날부터 서버가 세 번이나 다운됐다고요."
서연의 목소리에 벅찬 감정이 묻어났다.
"사회학 교수들, 철학자들, 그리고 일반 독자들까지 서평을 쏟아내고 있어요.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끔찍한 '효율과 확정의 독재'에 길들어 있었는지, 불확실성을 두려워한 나머지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노예의 삶을 택했던 건 아니었는지 반성하는 목소리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어요."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던가요?"
우진이 나직이 물었다.
그는 며칠 전 도심 한복판에서 목격했던 풍경을 기억하고 있었다.
미러 큐브의 알림이 꺼지고,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가르쳐주는 각본이 사라졌을 때 거리로 뛰쳐나와 '안전한 네모를 돌려달라'고 절규하던 군중들의 공황.
서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책의 마지막 장을 가리켰다.
"처음엔 다들 미칠 것처럼 무서워했죠. 아침에 눈을 떴는데 몇 시 몇 분에 지하철 몇 번 칸을 타야 최적의 동선인지, 점심엔 무엇을 먹어야 영양 균형이 맞는지, 누구를 만나야 승진에 유리한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으니까요. 온 세상이 거대한 안개 속에 던져진 것 같았을 거예요. 하지만 인간은 생각보다 나약하지 않더라고요."
서연의 눈빛이 투명하게 빛났다.
"책에 쓴 마지막 문장이 뭔지 아세요? '인간의 존엄은 완벽한 정답에 있는 것이 아니라, 틀릴 줄 알면서도 스스로 선택하는 그 서툰 발걸음에 있다.' 사람들이 그 문장에 가장 많은 밑줄을 긋고 있대요. 불안하지만, 그 불안을 견뎌내는 것이 곧 살아있다는 증거라는 걸 다들 깨달아가고 있는 거예요."
3. 사라진 도형과 남겨진 상처
두 사람은 작업실 앞 작은 툇마루로 자리를 옮겼다.
따스한 가을 햇살 아래로 언덕길 골목의 일상이 평화롭게 펼쳐져 있었다.
저 멀리 삼거리 슈퍼 앞 평상에서는 복덕방 할머니가 동네 노인들과 둘러앉아 콩나물을 다듬으며 두런두런 웃음꽃을 피우고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는 자전거를 탄 중학생들이 비틀거리면서도 서로의 어깨를 치며 페달을 밟아 지나갔다.
우진은 가만히 그들의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허공은 맑고 푸르렀다.
백색 네모도, 파멸을 예고하던 붉은 세모도, 이레귤러의 은빛 동그라미도 없었다.
하늘 높은 곳으로 뻗어 올라가 인간의 정수리를 옭아매던 칠흑 같은 꼭두각시 줄선 역시 단 한 가닥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바람에 흔들리는 은행나무 잎사귀와 높고 투명한 가을 하늘만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우진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새겨진 4센티미터의 수술 흉터는 더 이상 욱신거리지 않았다.
15년 동안 그를 괴롭히던 시신경 압박과 살인적인 편두통, 미래를 0.3초 앞서 보여주며 망막을 불태우던 푸른 잔상 인터페이스는 완전히 꺼져 있었다.
그는 이제 온전한 인간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참, 서연 씨."
우진이 문득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작고 묵직한 물건 하나를 꺼냈다.
티타늄 합금으로 주조된 밸브 파편이었다.
백도현이 상도동 작업실 문앞에 남겨두고 갔던, 15년 전 화학적 동면 챔버의 잔해였다.
서연의 표정이 순식간에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백도현…… 그 사람의 흔적인가요?"
"네. 며칠 전 작업실 문앞에 두고 갔더군요. 그리고 어젯밤에는…… 제 수첩을 난로에 다 태웠습니다."
서연이 놀란 눈으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수첩을요? 대리님이 그동안…… 아니, 역삼역 지하철에서 처음 도형을 보았을 때부터 기록해 온 그 관찰 일지요?"
"네. 네모의 정의, 세모의 회전각, 꼭두각시 줄의 인장력, 엔트로피 보존 수식…… 그 모든 규칙들을 전부 불 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우진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 수첩을 쥐고 있는 한, 저 역시 시스템이 만들어둔 규칙의 감옥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규칙을 분석하고 예측하려 드는 순간, 저 역시 서지훈이나 넥스트 큐브처럼 세상을 수식으로 재단하려는 오만에 빠지게 되니까요. 이제 제게 필요한 건 지난 과거의 공식이 아니라, 오늘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인간의 손발입니다."
서연은 말없이 우진의 단단해진 손등을 바라보았다.
거친 대패질로 굳은살이 박이고 잔상처가 난 목수의 손.
하지만 그 손은 과거 세상을 파멸로 몰고 가던 인과율의 집속 탄환을 막아내던 어떤 초능력보다도 강인하고 따뜻해 보였다.
"그렇지만 대리님, 방심할 수는 없어요."
서연이 목소리를 낮추며 품 안에서 취재 수첩을 꺼냈다.
단행본으로 출간된 원고에는 실리지 않은, 가장 최근의 긴급한 취재 메모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특수본 내부 취재원을 통해 확인했어요. 백도현과 유진아가 테헤란로 넥스트 큐브 본사 지하 매몰지에서 빼돌린 물건…… 단순한 부품이 아니에요. 오르비스 슈퍼컴퓨터의 프로토타입 보조 연산 장치인 '예비 인과율 축전 유닛'이에요."
"예비 인과율 축전 유닛……."
우진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지하 6층 코어가 소각될 때, 그 거대한 연산 부하와 결손 엔트로피의 일부를 비상 흡수하도록 설계된 특수 축전기예요. 쉽게 말해, 시스템이 붕괴하면서 사방으로 흩어졌어야 할 15년 치의 왜곡된 에너지 찌꺼기가 그 유닛 하나에 고밀도로 압축되어 갇혀 있다는 뜻이에요. 백도현 일행은 그걸 기폭 장치로 쓰려고 하고 있어요."
"그 정도의 고밀도 에너지를 방출하려면 엄청난 양의 외부 전력이 필요할 텐데요."
우진의 날카로운 지적에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그래서 놈들이 노리는 곳이 바로 서울 도심의 초고압 변전 인프라예요. 특수본과 한국전력 보안팀이 수도권 주요 변전소 14곳에 긴급 경계 태세를 발령했지만, 아직 놈들이 정확히 어느 지점을 파고들지 특정하지 못했어요."
4. 거부당한 자들의 망령
바람이 툇마루를 스치며 낙엽 한 점을 서연의 발치로 굴려 보냈다.
우진은 손안의 티타늄 파편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생각에 잠겼다.
백도현.
15년 전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의 지하실에서, 자신과 마찬가지로 머리에 칩을 박혀야 했던 아이.
하지만 우진이 아버지 강정호 박사에 의해 궤도 신경을 절제당하고 백신을 품은 채 탈출했던 것과 달리, 백도현은 시스템의 사각 격자망을 뇌세포가 거부했다는 이유로 '규격 부적합 결손체'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리고 영하 수십 도의 차가운 액체 냉매가 흐르는 유리 챔버 속에 갇혀, 15년이라는 잔혹한 세월을 강제 동면 상태로 박제당해야 했다.
그들이 느꼈을 어둠과 절망의 깊이를 우진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오르비스 코어가 파괴되면서 비로소 봉인이 풀려 깨어났지만, 그들의 시간은 여전히 15년 전 차가운 고문실에 멈춰 있었다.
그들에게는 우진과 서연이 되찾아준 이 찬란한 가을 햇살과 자유가, 도리어 자신들을 버리고 떠난 자들이 누리는 역겨운 위선으로 보였을 터였다.
"그 사람들은…… 자유를 원하는 게 아니에요."
우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자신들이 15년 동안 갇혀 있던 그 차가운 지옥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맛보여주고 싶어 하는 겁니다. 우리가 만든 이 불완전한 자유가 얼마나 덧없고 취약한지 증명하려 들겠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무고한 사람들을 다시 파멸로 몰아넣게 둘 수는 없어요."
서연의 눈빛이 단호해졌다.
"대리님, 이번 싸움은 과거처럼 초능력이나 기하학적 궤도를 보고 피하는 싸움이 아니에요. 대리님에게도, 채린이에게도 이제 능력이 없어요. 오직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그들의 광기와 마주해야 해요."
"알고 있습니다."
우진이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서연 씨, 능력이 없다고 해서 무력해진 건 아닙니다. 오히려 정해진 궤도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매 순간 우리가 내리는 선택에 모든 것을 걸 수 있어요. 저들이 가진 건 15년 전에 멈춘 증오뿐이지만,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오늘과 내일이 있으니까요."
그때였다.
작업실 안쪽에 놓여 있던 서연의 업무용 휴대전화가 날카로운 진동음을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작업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진도 자리에서 일어나 서연의 뒤를 따랐다.
전화를 받아 든 서연의 표정이 통화가 이어질수록 차갑게 굳어갔다.
"네, 특수본 상황실이죠?…… 네? 방금 어디라고요?"
서연이 수화기를 쥔 손에 하얗게 힘을 주었다.
"지하철 2호선 당산철교 하부 변전 시설…… 경비 인력 세 명이 원인 불명의 급격한 기압 파열로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고요?"
우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당산철교.
강남과 강북을 잇는 2호선의 핵심 대동맥이자, 한강을 가로지르는 수만 볼트의 초고압 전력선이 교차하는 지하 공동구였다.
"현장에 남겨진 흔적이…… 유리 파편과 함께 벽면에 새겨진 그을음이라고 합니다."
서연이 전화를 끊으며 우진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PROJECT NEMO : EXCLUSION 01]. 백도현의 서명이에요. 놈들이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5. 선택의 무게
작업실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한 긴장감으로 물들었다.
더 이상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백도현과 유진아가 탈취한 예비 인과율 축전 유닛이 도심 변전 시설과 결합하는 순간, 서울 한복판에 15년 전의 왜곡된 파동이 다시 덮칠 것이 분명했다.
"당산철교 하부 변전 시설은 2호선 열차 전력망의 심장부입니다."
우진이 작업대 위에 놓인 서울 지하철 노선도를 펼치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들이 그곳의 고압 간선을 끊거나 과전압을 유도하면, 강남에서 강북으로 이어지는 순환선 전체가 멈추는 것은 물론이고 한강 하저 터널의 배수 펌프까지 전부 마비됩니다."
서연이 코트 깃을 여미며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특수본 기동대가 이미 출동했다고 하지만, 백도현이 다루는 건 일반적인 화약이나 무기가 아니에요. 15년 동안 응축된 그 끔찍한 인과율 압축 충격파를 평범한 경찰들이 감당할 수 있을 리 없어요."
우진은 벽에 걸려 있던 낡은 점퍼를 집어 들었다.
초능력도, 미래를 내다보는 푸른 잔상도, 날아오는 탄환을 튕겨내던 절대 척력도 이제 그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남은 것은 오직 두 발로 땅을 딛고 서 있는 한 인간의 육체와, 물러서지 않겠다는 확고한 의지뿐이었다.
"가야 합니다."
우진이 단호하게 말했다.
"15년 전, 아버지와 연구소가 저지른 과오의 마지막 파편입니다. 그리고 제가 짊어져야 할 마지막 책임이기도 합니다."
서연은 우진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두려움 대신 차분한 결의가 그 안에서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서연이 자신의 책 《선택할 권리》에 그토록 간절히 기록하고자 했던,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한 자의 얼굴이었다.
"함께 가요, 우진 씨."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업실 문을 열었다.
"우리가 되찾은 이 자유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저들에게 똑똑히 보여줘야 하니까요."
딸랑, 하는 황동 풍경 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작업실 문을 닫고, 가을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상도동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정해진 각본도, 보장된 결말도 없는 불확실성의 세계 속에서, 두 사람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굳건하고 선명하게 아스팔트 바닥을 딛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