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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97화

지워진 수첩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차가운 쇳조각과 결단의 무게

 

상도동 147번지 목공 작업실의 낡은 나무문을 닫고 들어선 순간, 골목길의 축축한 비 냄새는 멎고 코끝을 찌르는 건조한 톱밥 향과 서늘한 침묵이 강우진을 감싸 안았다.

 

우진은 등 뒤로 빗장을 걸어 잠그지 않았다.

 

문을 잠근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지난 수년간의 지옥 같은 사투를 통해 뼛속 깊이 배웠기 때문이었다.

 

우진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작업대 중앙의 두꺼운 참나무 상판 위에 내려놓았다.

 

탁.

 

묵직하면서도 날카로운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

 

그것은 방금 전 작업실 문 앞 계단 바닥, 인과율 압축 충격파로 인해 수분이 분자 단위로 하얗게 타버린 석재 틈새에서 주워 올린 티타늄 합금 밸브 파편이었다.

 

15년 전, 넥스트 큐브 지하 7층 차폐벽 속에서 1세대 피실험자들을 영하 수십 도의 초저온 액체 냉매 속에 가두어 두었던 화학적 동면 챔버의 핵심 배관 조각.

 

그 얼어붙을 듯 차가운 쇳조각 아래에는 거칠게 찢긴 누런 갱지 한 장이 깔려 있었다.

 

[너희가 부숴버린 오르비스의 폐허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건져 올렸는지 보게 될 것이다.

 

홀로 자유를 훔쳐 달아난 대가는 너와 네 아비의 피로 치러질 것이다.]

 

비틀린 글씨체마다 15년간 암흑 속에 봉인되어 있던 자의 지독한 냉기와 살의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우진은 손가락 끝으로 차가운 티타늄 파편의 모서리를 쓸어내렸다.

 

감각은 지극히 현실적이었고, 손끝에 닿는 금속의 냉기는 소름이 돋을 만큼 선명했다.

 

더 이상 관자놀이의 4cm 흉터에서 뇌를 바늘로 쑤시는 듯한 편두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쇳조각을 쥐고 있어도, 눈앞에 붉게 회전하는 파멸의 세모(△)나 사각 격자의 꼭두각시 줄 같은 허상은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초인적인 감각 왜곡 인터페이스, 상대의 다음 공격을 0.3초 전에 내다보던 변화 감지, 공간의 인과율을 일그러뜨려 탄환을 튕겨내던 절대 척력은 이미 역삼역 지하 100미터 오리진 코어가 소각되던 날 깨끗하게 소멸했다.

 

지금의 그는 그저 살을 베이면 피를 흘리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뼈가 부러지는 평범한 서른두 살의 목수일 뿐이었다.

 

‘하지만 도망치지 않는다.’

 

우진의 눈동자 속에는 흔들림 없는 단단함이 서려 있었다.

 

소나기를 피해 들어갔던 모퉁이 서재에서 낯선 이들과 마주 앉아 나누었던 따뜻한 옥수수의 온기, 헐거워진 책꽂이를 고쳐 세울 때 맞물리던 나무의 삐걱거림, 실패와 우연을 온몸으로 긍정하던 사람들의 살아 숨 쉬는 눈빛.

 

그 불완전하고도 눈부신 자유의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서라면, 그는 과거의 망령이 던져온 선전포고를 맨몸으로라도 마주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우진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작업실 구석, 오래된 주철 난로 앞으로 걸어갔다.

 

2. 서랍 깊은 곳의 낡은 기록

 

기름집 시절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던 원통형 주철 난로는 작업실의 습기를 말리고 밤의 한기를 쫓아내는 데 제격이었다.

 

우진은 성냥을 켜 난로 속 잘 마른 참나무 대패밥에 불을 붙였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주황색 불꽃이 매캐한 연기를 뿜으며 피어올랐고, 얇은 대패밥들이 바스락거리며 타들어가자 굵직한 참나무 장작 두 토막을 화구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타닥, 타다닥.

 

장작이 불길을 머금으며 규칙적인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붉은 불빛이 쇠창살 틈으로 새어 나와 어둑한 작업실 바닥과 벽면에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우진은 불꽃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몸을 돌려, 작업대 구석 벽면에 매달린 낡은 2단 서랍장으로 향했다.

 

끼이익.

 

나무 레일이 마찰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깊숙한 하단 서랍이 열렸다.

 

그 서랍 안에는 최근 한서연 기자에게서 전달받은 1세대 피실험자 격리 보고서 케이스, 그리고 며칠 전 제천의 아버지가 돌려준 유품 노트가 조심스럽게 놓여 있었다.

 

하지만 우진의 손길이 향한 곳은 그것들이 아니었다.

 

서랍 맨 안쪽, 빛바랜 검은색 인조가죽으로 싸인 손바닥만 한 두꺼운 수첩 하나.

 

모서리가 닳고 닳아 헤어진 그 수첩은, 우진이 지하철 2호선 역삼역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의 머리 위에 뜬 기하학적 도형을 목격했던 그 첫날부터 매일같이 품에 지니고 다니며 기록했던 개인 관찰 일지였다.

 

우진은 수첩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손때가 타서 반질반질해진 표지에는 아무런 제목도 적혀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게는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그가 세상의 모든 인간을 '규격'과 '도형'으로 재단하고, 보이지 않는 통제 시스템의 거대한 격자망에 짓눌려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던 시절의 공포와 발버둥이 고스란히 봉인된 기록물이었기 때문이다.

 

우진은 주철 난로 앞 낡은 목제 스툴을 끌어당겨 앉았다.

 

무릎 위에 수첩을 얹고, 조심스럽게 첫 장을 넘겼다.

 

사각거리는 종이 넘김 소리가 고요한 작업실 안에 낮게 울려 퍼졌다.

 

3. 빽빽한 규칙, 닫힌 세계의 낙서들

 

수첩의 첫 장에는 서투르고 날카로운 필체로 큼지막하게 적힌 기호들이 가득했다.

 

[□ (네모) : 큰 변화 없이 반복되는 안정된 일상.

 

시스템의 기본 규격.

 

백색은 개인의 순응, 칠흑빛 검은색은 외부의 조작과 외압.

 

검은 네모의 주변에는 허공으로 이어지는 가느다란 꼭두각시 실선이 존재함.]

 

[△ (세모) : 삶의 궤도가 급격히 꺾이는 파동.

 

죽음, 파멸, 파산, 극단적 비극.

 

회전 속도가 빨라질수록 사건 집행의 시각이 임박함을 의미.

 

붉은빛은 물리적 참사, 검은빛은 인위적 제거 공작.]

 

[○ (동그라미) : 기존 시스템의 궤도를 벗어난 이레귤러.

 

꼭두각시 줄이 연결되지 않음.

 

비간섭 척력 특성 보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잉크의 농도와 글씨의 떨림이 달라졌다.

 

어떤 페이지는 지하철 안에서 급하게 휘갈겨 쓴 탓에 글자가 심하게 뭉개져 있었고, 어떤 페이지는 밤마다 관자놀이를 쥐어뜯으며 겪었던 살인적인 편두통 때문에 피가 배어 나온 자국마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도형 심층 분석 시의 반작용 : 형태의 내부 구조를 꿰뚫어 보려 할 때 시신경과 뇌간에 극심한 압박 발생.

 

유년기 흉터 부근에 바늘로 찌르는 듯한 맹렬한 편두통 유발.

 

2단계 집중 한계 시간 약 40초.]

 

[인과율 보존 법칙 : 한 개인의 정해진 파멸(세모)을 강제로 개입하여 일상(네모)으로 되돌릴 경우, 방출된 파멸적 에너지는 소멸하지 않고 시공간적으로 가장 인접한 타인의 궤도로 전이됨.

 

참사의 총량은 보존된다.]

 

그 모든 기록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공식이었다.

 

세상이 왜곡되어 있다는 것을 홀로 깨달았을 때, 언제 어디서 머리 위로 검은 세모가 쏟아져 내릴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청년 강우진의 공포가 그 좁은 격자 칸마다 빽빽하게 갇혀 있었다.

 

‘나는 이 공식들을 진리라고 믿었지.’

 

우진은 입가에 쓰디쓴 미소를 머금었다.

 

네모는 일상이고, 세모는 파멸이며, 동그라미는 예외라고 규정짓던 오만한 분석.

 

인간의 삶을 기하학적 형태 안에 가두고, 그들이 언제 웃고 언제 쓰러질지를 수학적 확률로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은 다름 아닌 넥스트 큐브의 수장 서지훈이었다.

 

그리고 우진 자신 역시, 그 시스템에 맞서 싸운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도 실상은 그들이 만들어 놓은 기하학적 잣대를 고스란히 답습하며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수첩의 중반부를 넘기자, 거칠게 그어놓은 밑줄과 물음표들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자연적 궤도 복원력 : 외압이 아닌 당사자의 우발적 선택이나 실수로 위기를 벗어났을 때, 인과율 전이 없이 세모가 스스로 네모로 재구성됨.

 

시스템의 수식이 개입하지 못하는 틈새.]

 

[변화 감지 : 미래 예측 0.3 0.5초.

 

푸른 잔상.

 

시신경 과부하 위험.]

 

[특이점 (Error: ?) : 시스템이 해를 산출할 수 없는 절대적 수식 거부 상태.]

 

그 수많은 메모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우진의 글씨는 비로소 날카로운 긴장을 털어내고 완만하게 번져 있었다.

 

가장 마지막 페이지.

 

테헤란로 지하 100미터 오리진 코어로 내려가기 전날 밤, 파주 거점 7번 벙커의 백열전구 아래서 적었던 마지막 메모였다.

 

[도형의 본질 : 이것은 권능이 아니다.

 

15년 전 신경 궤도 절제술로 인해 궤도가 끊겨 나간 뇌간과 시신경이 세상의 사각 격자 압력을 억지로 해석하려 들며 발생한 공감각적 왜곡 노이즈.

 

우리는 애초에 도형 따위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우진의 손가락이 그 마지막 문장 위에서 멈추었다.

 

그렇다.

 

인간은 네모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아니었다.

 

인간은 정해진 선을 따라 굴러가는 기하학적 파편이 아니라, 넘어지고 비틀거리며 스스로 길을 만들어 나가는 살아있는 생명 그 자체였다.

 

4. 타오르는 불꽃, 소멸하는 공식들

 

우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손에 쥔 낡은 수첩을 들고, 붉게 타오르는 주철 난로의 철문을 활짝 열었다.

 

화르륵!

 

장작불이 산소를 머금으며 거센 열기를 토해냈다.

 

벌겋게 달아오른 숯과 넘실거리는 주황색 불꽃이 우진의 얼굴을 뜨겁게 달구었다.

 

이 수첩은 지난 수년간 그의 나침반이자 방패였다.

 

지하철 2호선 승강장에서, 태성C&I의 답답한 사무실에서, 여의도 증권가의 폭락장과 어두컴컴한 지하 터널 속에서 그를 버티게 해 주었던 유일한 생존 지침서였다.

 

이 수첩을 버린다는 것은, 지난날의 자신을 지탱해 준 가장 강력한 방어기제를 스스로 해체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이제는 필요 없다.’

 

우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규칙과 공식에 매달리는 한, 그는 영원히 시스템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도형이 사라진 세상에서 또다시 과거의 수식을 들여다보고 있다면, 그것은 서지훈이 남겨둔 사각 감옥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우진은 수첩의 첫 장을 쥐었다.

 

북.

 

종이가 찢어지는 맑고 명쾌한 소리가 고요한 작업실 안에 메아리쳤다.

 

[□, △, ○ 3대 도형의 정의]가 빽빽하게 적혀 있던 첫 페이지가 우진의 손끝에서 떨어져 나와, 활활 타오르는 난로의 화구 속으로 던져졌다.

 

화르륵!

 

종이는 불길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가장자리부터 검게 오그라들었다.

 

안정된 일상을 뜻한다던 사각형의 선들이 붉은 불꽃에 먹혀 들어가며 재로 바스러졌다.

 

파멸을 뜻한다던 삼각형의 꼭짓점들이 연기를 내뿜으며 까맣게 타올랐다.

 

우진은 연이어 다음 장을 찢었다.

 

북.

 

북.

 

[인과율 보존 법칙과 연쇄 전이].

 

[궤도 강제 덮어쓰기 알고리즘].

 

[0.3초의 인과율 지연 시간과 변화 감지].

 

수년간 그를 옭아매고, 밤마다 악몽 속에서 식은땀을 흘리게 만들었던 절대적인 법칙들이 한 장, 한 장 뜯겨 나가 불길 속으로 던져졌다.

 

불꽃은 굶주린 짐승처럼 종이를 집어삼켰다.

 

파란 불티가 공중으로 튀어 오르고, 검게 그을린 종잇장들이 화구 안쪽에서 회오리치며 재가 되어 날렸다.

 

우진의 귓가에 과거의 소리들이 스쳐 지나갔다.

 

‘세상은 거대한 격자망이야, 우진아. 그들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통제한다.’

 

15년 전, 피투성이가 된 채 자신의 관자놀이를 메스로 째던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면 파멸뿐이다! 통제된 사각의 틀 안에서만 평화가 유지될 수 있어!’

 

무너지는 서버 랙에 깔려 사라지던 서지훈의 광기 어린 절규.

 

‘아저씨, 저 이제 제 맘대로 그릴 수 있어요.’

 

미소를 지으며 스케치북을 들어 올리던 채린의 맑은 음성.

 

그 모든 목소리들이 타닥거리는 장작 소리 속으로 녹아들어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수첩의 두꺼운 가죽 표지마저 화구 한가운데로 던져졌다.

 

쿵.

 

두꺼운 가죽이 불길을 덮치자 잠시 주춤하던 불꽃은, 이내 더욱 거센 기세로 치솟으며 검은 가죽을 시뻘겋게 집어삼켰다.

 

잉크가 타들어 가는 매캐한 냄새가 난로의 연통을 타고 작업실 천장으로 흩어졌다.

 

수첩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오직 붉게 이글거리는 참나무 숯과, 허공으로 하얗게 흩어지는 잿가루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우진은 주철 난로의 문을 닫았다.

 

철컥.

 

무거운 걸쇠가 걸리는 소리와 함께, 닫힌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던 붉은빛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5. 텅 빈 손, 가벼워진 어깨

 

난로 앞을 물러난 우진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바위덩어리가 통째로 떨어져 나간 기분이었다.

 

머릿속은 더없이 맑았고, 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

 

공식을 버렸다.

 

규칙을 지웠다.

 

이제 그에게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어떤 단서도, 닥쳐올 위기를 사전에 경고해 줄 어떤 기하학적 도형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무력함이 아니었다.

 

그것은 온전한 해방이었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 정해진 미래의 노예가 된다는 뜻이었다.

 

다음에 일어날 비극을 미리 보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어야 했고, 인접 노드로 튀어갈 인과율의 불똥을 계산하느라 한 걸음도 온전히 내딛지 못했던 나날들.

 

그 저주 같은 각본에서 벗어난 지금, 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갈 권리뿐이었다.

 

우진은 작업대로 다가섰다.

 

참나무 상판 위에는 여전히 1세대 피실험체 백도현이 남겨두고 간 차가운 티타늄 밸브 파편과 협박 쪽지가 놓여 있었다.

 

우진은 쪽지를 집어 들었다.

 

[너희가 부숴버린 오르비스의 폐허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건져 올렸는지 보게 될 것이다.]

 

그는 쪽지를 구기지 않았다.

 

대신 작업대 한구석, 연필꽂이 옆에 반듯하게 펴서 올려놓았다.

 

피할 수 없다면 마주하면 된다.

 

그들이 15년간 얼어붙어 있던 원한과 잔류 기술을 들고 찾아온다면, 그는 능력이 아닌 인간의 의지와 책임으로 그들을 막아설 것이다.

 

그때, 작업실 벽면에 걸려 있던 구형 벽시계가 묵직한 소리를 내며 정각을 알렸다.

 

뻐꾹.

 

뻐꾹.

 

오후 4시.

 

비가 완전히 그친 골목길 너머로, 방과 후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자전거 벨 소리가 맑게 번져 들어왔다.

 

우진은 작업대 아래에서 굵은 물푸레나무 각재 하나를 꺼내 작업대 바이스에 물렸다.

 

그리고 선반에서 손때 묻은 쇠대패를 집어 들었다.

 

6. 나무를 깎는 시간, 인간의 궤적

 

슥.

 

슥.

 

대패날이 거친 물푸레나무 표면을 미끄러지듯 깎아내기 시작했다.

 

얇고 투명한 나무 대패밥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사뿐히 떨어져 내렸다.

 

우진의 손놀림은 서두르지 않았고, 호흡은 일정했다.

 

대패질을 할 때마다 손바닥으로 전해져 오는 나무 본연의 나이테와 옹이의 저항.

 

나무는 자라온 계절에 따라 단단함이 달랐다.

 

가뭄이 들었던 해의 나이테는 촘촘하고 억셌으며, 비가 넉넉했던 해의 나이테는 무르고 부드러웠다.

 

기계로 찍어낸 공산품이라면 그 불균일함이 결함이겠지만, 원목을 다루는 목수에게는 그 굴곡이야말로 나무가 살아온 고유한 역사이자 아름다움이었다.

 

‘삶도 이와 같겠지.’

 

우진은 대패질을 멈추고 거친 손바닥으로 나뭇결을 매만졌다.

 

상처가 있고, 뜻대로 되지 않는 옹이가 박혀 있어도, 그것을 억지로 파내거나 네모난 규격으로 잘라내지 않고 그대로 품어 안을 때 비로소 하나의 온전한 가구가 완성된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가 제천의 숲속에서 말했던 '통계의 본질'이자, 소나기 속에서 만난 사람들이 보여준 '우연의 미학'이었다.

 

탕, 탕.

 

그때, 작업실의 나무문이 가볍게 두드려졌다.

 

우진은 대패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조심스럽게 열린 문틈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고개를 내밀었다.

 

단정한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어깨에 카메라 가방을 멘 한서연 기자였다.

 

"우진 씨? 안에 있어요?"

 

서연의 맑은 목소리가 톱밥 흩날리는 작업실 안으로 따스하게 울려 퍼졌다.

 

우진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어서 와요, 서연 씨."

 

서연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코끝을 킁킁거렸다.

 

"어라? 무슨 냄새지? 작업실에서 종이 태웠어요? 매캐한 냄새가 나는데."

 

우진은 주철 난로 쪽을 힐끗 바라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오래된 메모들을 좀 정리했어요. 이제는 필요 없는 것들이라서."

 

서연은 난로를 한 번 바라보고는, 이내 우진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 안도와 호기심이 동시에 어렸다.

 

"얼굴이…… 훨씬 편해 보이네요. 제천 다녀와서 많이 피곤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머리가 맑아졌어요. 아버지는 건강하게 잘 적응하고 계세요. 제천 산골이 아버지한테는 딱 맞는 연구실인 것 같더군요."

 

"다행이에요, 정말로. 박태호 씨한테도 연락받았어요. 동생들 주민등록 복구 절차도 순조롭게 끝나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서연은 작업실 한편에 놓인 원목 스툴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다가왔다.

 

그러다 작업대 위에 놓인 낯선 물건에 시선이 멎었다.

 

차갑게 식어 있는 티타늄 합금 밸브 파편, 그리고 그 옆에 놓인 거친 협박 쪽지.

 

서연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흔들렸다.

 

"이거…… 설마?"

 

7. 폐허에서 건져 올린 것

 

서연의 목소리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기자 특유의 예리한 직관이 즉각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것이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쪽지로 손을 뻗어 적힌 글귀를 읽어 내려갔다.

 

"오르비스의 폐허 속에서 건져 올린 것…… 백도현이에요? 백도현이 여기까지 다녀간 거예요?"

 

서연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 우진을 올려다보았다.

 

"언제 다녀간 거예요? 다친 데는 없어요? 왜 나한테 바로 연락 안 했어요!"

 

"괜찮아요, 서연 씨. 내가 제천에서 돌아왔을 때 이미 문앞에 놓여 있었어요. 마주치진 않았습니다."

 

우진은 서연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서연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떨리는 숨을 뱉었지만, 표정의 긴장감은 전혀 풀리지 않았다.

 

"우진 씨, 방금 대검찰청 특수본 쪽에서 긴급한 첩보를 하나 들었어요. 그것 때문에 급하게 여기로 달려온 거였는데…… 쪽지를 보니까 확실해졌어요."

 

서연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취재 수첩과 소형 녹음기를 꺼냈다.

 

"테헤란로 지하 100미터, 우리가 빠져나왔던 그 매몰 현장이요. 며칠 전부터 지상 싱크홀 주변 암반층에서 정체불명의 굴착 흔적이 발견됐대요. 경찰은 단순 지반 침하로 인한 붕괴인 줄 알고 통제선만 쳐뒀는데, 특수본 포렌식 팀이 조사해 보니까 누군가 지하 6층 잔해 속으로 침투했던 자국이 있었어요."

 

우진의 눈빛이 깊어졌다.

 

"지하 6층…… 예비 코어 볼트와 양자 슈퍼컴퓨터의 잔해."

 

"네. 그 잔해 속에서 가장 위험한 하드웨어 블록 하나가 물리적으로 절단되어 사라졌대요."

 

서연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오르비스 양자 코어의 예비 인과율 축전 유닛…… 서지훈이 유사시 도시 전체의 전력망을 쇼트시켜 인과율을 강제로 압축 송출하려 했던 프로토타입 핵이 통째로 털렸어요. 백도현과 유진아가 그걸 노리고 지하로 숨어들었던 거예요."

 

우진은 말없이 작업대 위의 티타늄 파편을 내려다보았다.

 

1세대 피실험체들은 단순히 분노에 눈이 멀어 날뛰는 맹수가 아니었다.

 

그들은 15년간 시스템의 통제 격자를 거부하다 봉인되었던 자들이었고, 그만큼 시스템의 약점과 파괴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오르비스의 폐허에서 고밀도 인과율 축전 유닛을 회수했다면, 그것은 과거 넥스트 큐브가 저지르려 했던 도심 테러 이상의 참사를 일으킬 수 있는 시한폭탄을 손에 쥐었다는 뜻이었다.

 

"그들이 노리는 게 뭘까요?"

 

서연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진 씨와 아버님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일까요? 아니면……"

 

"둘 다겠죠."

 

우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들은 15년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어요. 세상이 어떻게 변했는지, 사람들이 어떤 자유를 되찾았는지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아요. 그들이 아는 것은 자신들을 가둔 시스템에 대한 증오, 그리고 홀로 탈출해 살아남은 나에 대한 배신감뿐입니다."

 

"우진 씨에게는 이제 능력이 없잖아요!"

 

서연의 목소리에 애틋한 절박함이 묻어났다.

 

"도형도 보이지 않고, 위험을 미리 피할 수도 없어요. 그런데 저들은 오르비스의 잔류 무기까지 손에 쥐었어요.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8. 지워진 수첩 너머, 새로운 길

 

우진은 서연을 바라보며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에는 일말의 불안도, 도망치고 싶은 기색도 없었다.

 

"서연 씨. 방금 내가 난로 속에 뭘 태웠는지 알아요?"

 

서연이 눈을 깜빡이며 우진을 쳐다보았다.

 

"뭘 태웠는데요?"

 

"내가 역삼역에서 처음 능력을 각성했던 날부터 적어두었던 관찰 수첩이요. 네모가 뭔지, 세모가 뭔지, 인과율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빽빽하게 적어두었던 내 모든 규칙과 공식들."

 

서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걸…… 전부 태웠다고요? 그건 우진 씨한테 목숨이나 다름없는 기록이었잖아요."

 

"맞아요. 목숨처럼 매달렸죠. 하지만 그 수첩을 쥐고 있는 한, 나는 여전히 서지훈이 만든 사각 격자 안에서 살아가는 죄수일 뿐이었어요."

 

우진은 작업대 옆 창가로 다가섰다.

 

두꺼운 방범 유리 너머로,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붉은 저녁노을이 상도동 골목길을 부드럽게 감싸 안고 있었다.

 

길 건너 슈퍼 앞 평상에서는 복덕방 할머니가 다듬던 파단을 정리하고 있었고, 자전거를 탄 중학생들이 페달을 밟으며 비탈길을 힘차게 내달리고 있었다.

 

어디에도 머리 위의 도형은 없었다.

 

어디에도 허공으로 이어진 꼭두각시 줄은 없었다.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에 불공평한 게 아니에요. 능력이 사라졌기 때문에, 비로소 나는 진짜 인간으로서 그들과 마주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우진의 목소리는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바위조차 쪼갤 수 없는 단단한 신념이 깃들어 있었다.

 

"공식에 기대어 싸우는 게 아니라, 내가 지켜야 할 사람들과 이 불완전한 자유를 위해 내 두 발로 버티고 설 겁니다. 아버지가 제천에서 말씀하셨어요. 삶은 정답을 맞추는 시험지가 아니라, 실패와 우연 속에서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요."

 

서연은 우진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처음 태성C&I 로비에서 마주쳤을 때의 그는 언제나 쫓기는 사람처럼 위태로웠다.

 

관자놀이를 누르며 홀로 고통을 삼키고, 타인의 불행을 미리 보며 죄책감에 짓눌려 있던 청년.

 

하지만 지금 우진의 얼굴에는 어떤 그림자도 드리워져 있지 않았다.

 

텅 빈 수첩처럼 깨끗하고, 막 대패질을 끝낸 원목처럼 단단하며 따뜻했다.

 

서연의 입가에도 서서히 엷은 미소가 번졌다.

 

"우진 씨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대단하긴요. 그저 지키고 싶은 게 많아진 평범한 사람일 뿐입니다."

 

우진은 서연을 향해 돌아서며 티타늄 밸브 파편을 집어 들었다.

 

"서연 씨, 특수본에 연락해서 백도현 일행의 예상 이동 경로를 파악해 줘요. 그들이 오르비스의 축전 유닛을 가동하려면 고압 전력선이나 과거 넥스트 큐브의 지하 거점 인프라가 반드시 필요할 겁니다."

 

"알겠어요. 당장 편집국으로 돌아가서 인프라망 지도와 대조해 볼게요."

 

서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과거의 공식은 난로 속에서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그들이 함께 만들어갈 내일의 도화지는 그 어느 때보다 넓고 자유롭게 펼쳐져 있었다.

 

저녁노을이 상도동 작업실의 창문을 붉게 물들이는 가운데, 우진은 다시 대패를 쥐었다.

 

끝나지 않은 과거와의 마지막 매듭을 짓기 위한, 가장 인간다운 결전의 시간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