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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95화

아버지의 퇴원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병실의 짐을 싸다

 

서울 아산병원 704호 병실 창가로 스며드는 오전의 햇살은 더없이 정갈했다.

 

간밤에 내렸던 가랑비가 먼지를 씻어낸 덕분인지 한강 너머로 펼쳐진 도심의 윤곽이 칼날처럼 선명했다.

 

불과 보름 전까지만 해도 빌딩 숲 위로 자욱하게 얽혀 있던 푸른색과 붉은색의 사각 격자망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정수리 위 10센티미터 허공을 맴돌며 일상의 반복과 파멸의 순번을 점지하던 백색 네모와 검은 세모, 그리고 보이지 않는 꼭두각시 줄선도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강우진(姜宇鎭)은 침대 옆 서랍장 위에 놓인 여행용 가방의 지퍼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가방 안에는 갈아입을 셔츠 몇 벌과 세면도구, 그리고 법원에서 증거물 조사를 마치고 반환해 준 아버지의 낡은 가죽 피혁 수첩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다.

 

오랜 세월 환자복에 갇혀 있던 강정호(姜正浩) 박사는 헐렁한 감색 카디건의 단추를 채우며 엷은 미소를 지었다.

 

오른쪽 어깨를 관통했던 서지훈의 총상은 봉합선이 아물어 단단한 흉터로 굳어 있었고,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다리는 여전히 감각이 온전치 못했으나 그의 눈빛만큼은 15년 만에 깊은 생기를 되찾고 있었다.

 

"우진아, 서랍 맨 아래에 둔 안경집도 챙겼느냐?"

 

"네, 아버지. 가방 안쪽 주머니에 넣어 뒀어요. 병원 약도 한 달 치 빠짐없이 챙겼고요."

 

우진은 가방을 닫고 침대 맡으로 다가가 아버지의 무릎 위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관자놀이에 손을 얹지 않아도, 시야를 억지로 비틀지 않아도 편두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한때 시신경을 바늘로 후벼 파며 0.3초 뒤의 미래 잔상을 강제로 흩뿌리던 공감각적 왜곡 인터페이스는 오르비스 코어가 지하 100미터 아래로 매몰되던 그 새벽에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이제 우진의 눈에 비치는 아버지는 어떤 기하학적 수식으로도 정의되지 않는, 단지 주름진 뺨과 하얗게 센 머리칼을 지닌 늙고 병약한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다.

 

그 담담한 평범함이 가슴 한구석을 뻐근하게 채웠다.

 

병실 문이 조용히 열리며 모친이 작은 보온병과 과일 바구니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지난 보름간의 간병으로 쌓인 피로가 역력했지만, 15년 동안 응어리졌던 눈물 자국 대신 잔잔하고 편안한 미소가 자리 잡고 있었다.

 

"퇴원 수속은 다 끝났단다. 원무과 직원이 말하길, 검찰 특별수사본부에서 파견 나온 경호 인력도 오늘부로 병원 철수를 완료했다더구나."

 

어머니는 남편의 카디건 옷깃을 매만지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진우인가 하는 감사관도, 그 잔당들도 전부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니 이제 정말로 끝난 모양이야. 우진아, 너도 고생 많았다."

 

우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가방 손잡이를 쥐었다.

 

어제저녁 상도동 작업실 골목길에서 엄습했던 서늘한 적의와, 창문에 새겨졌던 섬뜩한 경고 문구는 부모님 앞에서 일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시스템의 사각 격자에서 풀려난 대중이 새로운 자유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 지금, 15년 전 화학적 동면 챔버에 갇혀 있던 1세대 피실험체들이 깨어났다는 사실까지 얹어 아버지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온전한 인간으로서, 살아남은 아들인 자신이 짊어져야 할 몫이었다.

 

2. 서울을 등지는 길

 

병원 지하 주차장에는 서연이 미리 수배해 둔 은색 카니발 승합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운전석에는 넥스트 큐브 시절의 기계화 제어 칩을 벗어던지고 인간다운 미소를 되찾은 박태호가 앉아 있었다.

 

태호는 우진 일행을 발견하자마자 운전석에서 내려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박사님, 사모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자네 덕분에 아주 편안하게 퇴원하네. 동생들은 좀 어떤가? 지혜랑 영훈이도 새 거처에 잘 적응하고 있나?"

 

강정호 박사가 휠체어 손잡이를 짚으며 따뜻하게 물었다.

 

"네, 검찰 특수본 피해자 지원 센터에서 임시로 마련해 준 복지 주택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서연 기자님이 주민등록 재발급 절차도 거의 다 마쳐 주셨고요. 아이들이…… 아침에 눈을 뜨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걸 제일 신기해합니다. 정수리 위에 아무것도 떠 있지 않다는 게 아직도 꿈같다고 하더군요."

 

태호의 목소리에는 깊은 안도와 벅찬 감정이 묻어났다.

 

한때 살상 알고리즘만을 반사적으로 수행하도록 개조되었던 피실험자 소년의 얼굴에서 차가운 기계의 그림자는 완전히 씻겨 나가 있었다.

 

우진은 태호와 눈빛을 교환하며 휠체어를 들어 차 뒷좌석에 조심스럽게 안착시켰다.

 

"태호야, 고맙다."

 

"아닙니다, 우진이 형.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승합차가 부드럽게 지하를 빠져나와 올림픽대로로 접어들었다.

 

차창 밖으로 여의도와 강남의 마천루들이 뒤로 밀려났다.

 

테헤란로 한복판에서 솟구치던 검은 위성 송수신 파라볼라 안테나도, 도시 전역의 신호등을 조작해 참사를 유도하던 궤도 청소 구역의 서슬 퍼런 감시선도 이제는 없었다.

 

도로 위를 달리는 수천 대의 차량은 더 이상 시스템이 사전에 배정한 시간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차는 차선을 바꾸다 가볍게 경적을 울렸고, 어떤 차는 양보를 받자 비상등을 두어 번 깜빡이며 감사를 표했다.

 

사소한 엇갈림과 작은 양보, 그리고 예측할 수 없는 인간의 선택들이 얽혀 도로 위에는 살아 숨 쉬는 활기가 흐르고 있었다.

 

강정호 박사는 턱을 괸 채 지나쳐 가는 창밖의 풍경을 한참 동안 말없이 응시했다.

 

15년 동안 지하 7층 액체 챔버 속에서 생체 프로세서로 착취당하며, 5,100만 명의 생체 궤도를 연산하느라 뇌세포를 불태웠던 노학자의 눈가에 복잡한 회한이 서렸다.

 

차량이 한강 다리를 건너 경기도 남부의 고즈넉한 국도로 접어들었을 때, 우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정말 서울에 남지 않으셔도 괜찮으시겠어요? 대학 병원 통원 치료도 그렇고, 서연 씨가 연구소 피해자 명예 회복 위원회 쪽 자문직도 추천해 주겠다고 했었는데요."

 

강정호 박사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아니다, 우진아. 내가 도심 한복판에 서서 위원회니 명예니 하는 자리에 앉는 것은 염치가 없는 일이다. 나는 속죄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야. 네 머리에 메스를 대었던 흉터도, 서지훈의 손에 넘어가 국가적 괴물로 자라났던 그 시스템도…… 결국은 내가 세상의 불확실성을 통제해 보겠다는 오만에서 시작된 비극이었으니까."

 

"여보, 그건 당신 탓만이 아니에요. 서지훈 그 악마들이 당신 연구를 왜곡하고 강탈했던 거지……."

 

어머니가 안타까운 마음에 남편의 메마른 손을 꼭 쥐었다.

 

하지만 강정호는 엷게 웃으며 아내의 손등을 토닥였다.

 

"알아요, 임자. 하지만 뿌리를 심은 자가 책임을 피할 수는 없는 법이지. 나는 그저…… 흙냄새가 나는 조용한 곳에서 남은 생을 보내고 싶소. 데이터의 감옥이 아니라, 자연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우진은 조용히 룸미러를 통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도시의 소음이 멀어지고, 차창 밖으로 푸른 들판과 완만한 야산의 능선이 끝없이 펼쳐지고 있었다.

 

3. 숲속의 작은 연구실

 

승합차가 멈춰 선 곳은 충청북도 제천의 한적한 산자락 끝에 위치한 낡은 단층 목조 가옥이었다.

 

뒤편으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고, 마당 앞쪽으로는 맑은 계곡물이 자갈을 스치며 졸졸 흐르는 평화로운 터였다.

 

본래 폐교된 시골 분교의 사택으로 쓰이던 건물을 한민우 부소장과 언체인드의 조력자들이 십시일반 힘을 보태 작은 주거 겸 연구 공간으로 개조해 둔 곳이었다.

 

차에서 내리자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풀잎 향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흙을 밟는 발바닥의 감촉이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 익숙해져 있던 감각을 부드럽게 일깨웠다.

 

"공기가 참 좋구나. 병원 냄새에 질려 있었는데, 이제야 숨통이 트인다."

 

강정호 박사는 휠체어에 앉아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마당 한편에는 오래된 원목 평상과 텃밭이 일구어져 있었고, 집 안으로 들어서는 완만한 경사로가 새로 설치되어 있었다.

 

우진과 태호는 짐을 실어 나르며 방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거실 안쪽에는 이미 몇 개의 원목 책장과 커다란 오크 원목 책상이 정갈하게 놓여 있었다.

 

벽면을 채운 책장에는 과거 연구소 시절의 논문들이 아니라, 식물 생태학, 기상학, 그리고 낡은 수학 원서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그 책상 위에는 최신형 컴퓨터나 반짝이는 모니터 대신, 노란색 격자 노트와 흑연 연필, 그리고 황동으로 주조된 낡은 수동 계산기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전자파와 광케이블의 숨결이 철저히 배제된, 완벽하게 아날로그적인 공간이었다.

 

"태호야, 짐 정리는 이쯤이면 됐다. 먼 길 운전하느라 고생 많았으니 시내 나가서 따뜻한 국밥이라도 한 그릇 먹고 쉬려무나."

 

강정호 박사의 말에 태호는 깍듯이 인사하고 마당으로 나섰다.

 

어머니 역시 텃밭과 부엌을 둘러보며 저녁 찬거리를 준비하겠다며 바깥으로 나갔다.

 

방 안에는 어느덧 긴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오후의 고요 속에서 강우진과 강정호, 두 부자만이 오롯이 남겨졌다.

 

우진은 책상 옆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시원한 산바람이 들이치며 책상 위에 놓인 빈 노트의 모서리를 파르르 흔들었다.

 

우진은 가방에서 꺼낸 아버지의 가죽 수첩을 책상 정중앙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검찰 특수본에서 압수를 해제하고 돌려준 연구 노트예요. 아버지 필적으로 가득한…… 15년 전의 기록이요."

 

강정호 박사는 떨리는 손으로 수첩의 낡은 가죽 표면을 어루만졌다.

 

모서리가 닳고 불에 그을렸던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수첩은, 한때 세상을 통제하는 거대한 괴물의 청사진으로 쓰였던 피 묻은 역사였다.

 

박사는 수첩을 펼치지 않은 채, 책상 서랍을 열어 그 안에 조용히 밀어 넣었다.

 

그리고 서랍을 딸깍 소리가 나도록 닫았다.

 

마치 지나간 과거의 망령을 마침내 땅속 깊이 묻어버리듯 단호한 손길이었다.

 

4. 수치의 의미

 

"우진아."

 

강정호 박사가 휠체어를 돌려 창가를 바라보며 나직하게 아들을 불렀다.

 

"네, 아버지."

 

"네가 보기에…… 내가 이곳 산골짜기에 내려와 다시 펜을 쥐고 숫자를 다루겠다는 것이 여전히 어리석은 집착으로 보이느냐?"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자책과 조심스러운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평생을 확률과 데이터, 궤도 방정식에 바쳤다가 그 학문으로 인해 아들의 뇌를 도려내고 세상을 지옥으로 몰아넣었던 자의 깊은 죄의식이었다.

 

우진은 책상 모서리를 짚으며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버지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우진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당 한구석 참나무 가지 사이로 작은 박새 두 마리가 날아와 앉았다가, 바람의 방향에 맞춰 날개를 퍼덕이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 비행에는 어떤 사각의 궤적도, 사전에 계획된 낙하 좌표도 존재하지 않았다.

 

순수한 바람과 생명의 약동만이 만들어내는 유려한 곡선이었다.

 

"아버지가 쫓으셨던 건 세상을 억누르는 법칙이 아니라,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 그 자체였잖아요."

 

우진의 말에 강정호 박사는 굽은 등을 천천히 펴며 책상 위에 놓인 노란색 격자 노트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그의 시선이 연필 흑연이 닿지 않은 백지의 순백색 여백에 머물렀다.

 

"내가 젊은 시절…… 통계학을 처음 접했을 때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혼돈 속에 숨겨진 질서를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신의 섭리에 닿는 길이라 믿었단다. 불규칙하게 흩어지는 낙엽의 궤적에서도, 비 오는 날 우산을 든 사람들의 걸음걸이 속에서도 숫자는 언제나 정직한 진실을 속삭이고 있었지."

 

박사는 흑연 연필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연필을 쥐는 자세만큼은 학자의 기품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어. 내가 도달했던 그 오만한 수식들이…… 살아 있는 인간의 존엄을 지워버리는 족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서지훈은 내 수식에서 '확률'을 빼앗아 가고, 그 자리에 '강제'를 집어넣었지. 오차와 불확실성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모든 인간을 단 하나의 닫힌 네모 속에 가두어 버린 거야."

 

강정호 박사는 노란 종이 위에 작은 점 하나를 찍었다.

 

그 점은 어떤 선으로도 이어지지 않은 채, 종이 한가운데에서 외롭게 숨 쉬고 있었다.

 

"숫자는 죄가 없다, 우진아. 자연이 내뿜는 무수한 변수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참으로 경이로운 작업이지. 봄이 오면 꽃이 피는 확률, 가을철 바람의 평균 풍속, 저 계곡물에 떠내려가는 나뭇잎의 퇴적 속도…… 그것들은 누구에게도 복종을 요구하지 않는다."

 

박사는 고개를 들어 아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는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뎌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맑고 투명한 지혜가 담겨 있었다.

 

"통계는 본래 세상을 통제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 목소리는 산바람처럼 낮고 단단하게 방 안을 채웠다.

 

"통계는 통제하기 위한 게 아니라…… 단지 그 불완전하고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어."

 

우진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묵직한 응어리가 탁 하고 풀려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15년 전, 테헤란로 연구소의 지하 밀실에서 칩을 도려내던 메스의 차가운 감촉.

 

그리고 그 뒤로 이어졌던 만성 편두통과 세상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던 잔혹한 도형들.

 

그 모든 비극의 시작점에 서 있던 학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 한마디는, 과거의 모든 상처를 보듬는 진정한 학문적 참회이자 구원이었다.

 

"이해하기 위한 것……."

 

우진이 그 말을 나직하게 되뇌었다.

 

"그렇다. 우리는 내일 비가 올지 안 올지 100% 확신할 수 없지. 단지 70%의 확률로 비가 올 것이라는 걸 예측하고 우산을 준비할 뿐이다. 그 우산을 들고 나갈지, 아니면 비를 맞으며 뛸지는 오롯이 그 사람의 자유의지야. 실패할 가능성, 젖을 가능성, 길을 잃을 가능성까지 전부 끌어안는 것……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인간의 삶이란다."

 

강정호 박사는 종이 위에 찍어두었던 작은 점 옆에 또 다른 점 하나를 찍었다.

 

두 점은 일직선으로 굳게 결속되지 않은 채, 서로의 거리를 존중하듯 담담하게 놓여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다시 시작할 거다. 자연의 숨결을 숫자로 번역하고, 인간이 얼마나 아름답게 불완전한 존재인지를 증명하는 순수한 통계학을 말이다. 권력의 도구도, 돈벌이의 수단도 아닌…… 그저 세상에 대한 겸허한 찬가로서."

 

우진은 미소를 지으며 아버지의 어깨를 가볍게 감싸 쥐었다.

 

"응원할게요, 아버지. 아버지가 쓰실 논문이라면 저도 꼭 읽어보고 싶네요."

 

부자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고, 계곡물의 맑은 물소리가 청아한 배경음악이 되어 방 안을 감싸 안았다.

 

5.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

 

저녁 식사는 소박하지만 따뜻했다.

 

마당 텃밭에서 갓 뜯어낸 쌉싸름한 상추와 된장찌개, 그리고 시골 장터에서 사 온 두부가 밥상에 올랐다.

 

어머니는 남편의 밥그릇에 연신 반찬을 올려주었고, 강정호 박사는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그릇을 깨끗이 비워냈다.

 

15년 만에 온 가족이 병원 침상이 아닌 온전한 식탁에 둘러앉아 나누는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온 우진은 툇마루 끝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심의 네온사인이 차단된 시골의 밤하늘은 쏟아질 듯 빽빽한 은하수로 가득 차 있었다.

 

수억 광년의 시공간을 건너 날아온 별빛들은 제각기 다른 밝기와 주기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 반짝임 속에는 어떤 인위적인 질서도 없었으나, 그 자체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때, 외투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발신자는 한서연이었다.

 

우진은 조용히 일어나 마당 바깥쪽 계곡가로 걸어가며 전화를 받았다.

 

"서연 씨."

 

- 우진 씨, 제천엔 잘 도착했어요?

 

박사님 몸은 좀 어떠시고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서연의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특유의 활기가 넘쳤다.

 

"네, 잘 도착했습니다. 공기도 맑고 조용해서 아버지가 아주 마음에 들어 하세요. 식사도 잘 하셨고요."

 

- 다행이네요, 정말.

 

어머님도 한시름 놓으셨겠어요.

 

"서연 씨는요? 대검찰청 취재는 잘 마무리됐습니까?"

 

잠시 수화기 너머에서 종이 서류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연의 숨소리가 조금 전보다 차분하고 낮게 가라앉았다.

 

- 네…… 민경택 차장과 넥스트 큐브 임원진에 대한 첫 공판 기일이 잡혔어요.

 

정관계 로비 명단도 추가로 확보돼서 내일 조간 1면에 단독으로 실릴 예정이고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서연 씨 덕분에 도시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어요."

 

- 아니에요, 우진 씨가 없었다면 진실은 영원히 테헤란로 지하에 묻혔을 거예요.

 

그런데…….

 

서연이 말을 멈추었다.

 

계곡의 물소리 사이로 서연의 망설임이 묵직하게 전해져 왔다.

 

- 우진 씨, 사실 전화를 건 건…… 낮에 발생했던 사건의 추가 보고서 때문이에요.

 

우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낮에 발생했던…… 옛 넥스트 큐브 사옥 인근의 압력 폭발 사고 말인가요?"

 

- 네.

 

경찰 특공대와 검찰 수사관들이 현장을 감식했는데, 일반적인 폭발물이나 가스 누출의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어요.

 

도로 아스팔트와 가로등 철골이 고열에 녹아내린 게 아니라,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유압 프레스로 짓누른 것처럼 분자 단위로 으스러져 있었대요.

 

수화기 너머 서연의 목소리에 팽팽한 긴장감이 실렸다.

 

- 그리고 현장 인근 폐쇄회로 화면을 복원했는데…… 후드를 뒤집어쓴 두 남녀의 모습이 찍혔어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얼굴 윤곽을 대조한 결과, 15년 전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에서 화학적 동면 처리되었던 1세대 피실험체 명단과 일치한대요.

 

Subject-01 백도현, 그리고 Subject-03 유진아.

 

우진은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었다.

 

손끝에 어젯밤 상도동 작업실 창문에 박혀 있던 깨진 유리 조각의 서늘한 잔상이 스치는 듯했다.

 

"그들의 행방은요?"

 

- 폭발을 일으킨 직후 인근 하수관로를 통해 사라졌어요.

 

그런데 이상한 건…… 그들이 파괴한 지점이 단순한 도로가 아니었어요.

 

과거 넥스트 큐브가 서울 지하 암반에 매설해 두었던 지하 통신망 집수정 바로 위였어요.

 

마치…… 15년 동안 시스템에 억눌려 있던 무언가를 강제로 뜯어내려는 것처럼요.

 

서연의 숨이 가빠졌다.

 

- 우진 씨, 그들이 원하는 건 단순한 사회적 혼란이 아닌 것 같아요.

 

검찰 기록을 뒤져봤는데, 백도현과 유진아는 15년 전 연구소 화재 당시 강정호 박사님이 직접 '규격 부적합 결손체' 판정을 내리고 챔버에 격리했던 아이들이에요.

 

그들에게는 강 박사님과…… 그 박사님의 아들이자 유일하게 살아남아 칩을 제거받았던 우진 씨에 대한 증오가 뼈에 사무쳐 있을 거예요.

 

"알고 있습니다."

 

우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 차분한 어조에 오히려 서연이 놀란 듯 숨을 삼켰다.

 

- 알고…… 있었다고요?

 

"어젯밤에 제 상도동 작업실 창문이 깨졌습니다. 인과율 충격파였어요. 유리에 경고 문구를 남기고 갔더군요."

 

- 뭐라고요?!

 

우진 씨, 그걸 왜 이제야 말해요!

 

지금 혼자 있는 작업실에 그런 위험한 자들이……!

 

"괜찮습니다, 서연 씨. 그들은 저를 바로 해치려는 게 아니었어요. 자신들이 겪었던 15년의 지옥을, 저 역시 똑같이 느끼기를 바라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곳 제천에 계시니 안전해요. 태호도 함께 있고요."

 

- 하지만 우진 씨는 이제 능력이 없잖아요!

 

척력도, 미래를 보는 눈도 전부 사라졌는데 어떻게 그 괴물들을 혼자 감당하겠다는 거예요?

 

서연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단순한 기자의 직업적 우려를 넘어,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사지로 보낼 수 없다는 절박한 공포와 애정이 뒤섞인 외침이었다.

 

우진은 밤하늘의 은하수를 올려다보며 나직하게, 그러나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말했다.

 

"능력이 없기 때문에 마주해야 하는 겁니다."

 

- 우진 씨…….

 

"15년 전,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나 혼자만 그 지옥에서 도망쳤습니다. 내 관자놀이의 흉터는 백신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아이들을 어둠 속에 내버려 두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비겁한 생존의 표식이기도 했어요. 그들이 품은 분노와 결손 엔트로피는 시스템이 만든 괴물이지만, 그 뿌리에는 우리 부자의 과거가 얽혀 있습니다."

 

우진은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인 평범한 인간의 손이었다.

 

하지만 그 주먹 안에는 오르비스의 절대 통제조차 깨부수었던 확고한 인간의 의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도망치지 않을 겁니다. 그들이 세상을 부수고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기 전에, 내가 직접 그 분노를 끝내야 해요. 서연 씨, 특수본과 경찰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해 주세요. 그들이 다음에 노릴 장소를 알아내야 합니다."

 

서연은 한참 동안 침묵을 지켰다.

 

마침내 수화기 너머에서 깊은 체념과, 그보다 더 깊은 신뢰가 담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 알겠어요.

 

절대로 무모하게 혼자 부딪히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무슨 일이 생기면 나한테 제일 먼저 연락하고요.

 

알았죠?

 

"약속합니다. 취재 끝나면 밥 잘 챙겨 먹어요, 서연 씨."

 

전화를 끊은 우진은 차가운 밤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어둠이 짙게 깔린 숲속에서 바람이 불어와 옷자락을 흔들었다.

 

6. 밤의 문턱에서

 

통화를 마치고 돌아온 마당은 고요했다.

 

방 안에서는 희미한 백열등 불빛 아래, 강정호 박사가 노란 격자 노트 위에 연필로 사각사각 숫자를 적어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시간의 모래시계가 올바른 방향으로 천천히 흘러내리는 소리처럼 평화로웠다.

 

문턱 너머로 보이는 아버지의 등은 굽어 있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평온해 보였다.

 

'통계는 통제하기 위한 게 아니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그 깨달음이 우진의 귓가에 맴돌았다.

 

세상을 완벽한 사각 규격에 가두려 했던 자들은 파멸했고, 불완전함을 인정한 아버지는 비로소 학문의 본질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평화의 이면에는, 아직 15년 전의 어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세상을 향해 결손 엔트로피를 토해내려는 상처받은 망령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우진은 마당 한편에 세워둔 자신의 낡은 가죽점퍼를 집어 들었다.

 

내일 아침 일찍 상도동 작업실로 돌아가야 했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과거와의 정면 승부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때, 집 뒤편 소나무 숲속에서 바스락거리는 미세한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에 스치는 소리와는 확연히 다른, 일정한 무게를 지닌 인간의 발소리였다.

 

우진의 온 신경이 찰나의 순간 팽팽하게 곤두섰다.

 

도형을 보는 능력도, 0.3초 뒤의 미래를 읽어내는 푸른 잔상도 없었지만, 6년간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며 단련되었던 인간 본연의 육감과 반사 신경이 등줄기를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우진은 숨을 죽인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려 어두운 숲의 능선을 응시했다.

 

달빛조차 닿지 않는 빽빽한 소나무 가지 사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두 개의 시선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넥스트 큐브의 기계화된 감시관들이 뿜어내던 차가운 데이터 락온이 아니었다.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15년 동안 얼어붙은 어둠 속에서 벼려낸 처절하고도 맹렬한 증오의 시선이었다.

 

어둠 속에서 나뭇가지 하나가 뚝 부러지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우진은 물러서지 않고 그 어둠을 향해 한 걸음 내딛으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왔군."

 

숲의 그림자 속에서, 바람을 타고 서늘한 기압의 뒤틀림이 번져오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