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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94화

익숙한 두려움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깨진 유리와 가라앉은 밤

 

유리 파편이 바닥에 흩어지며 내는 마찰음은 밤의 적막 속에서 유난히 날카로웠다.

 

상도동 골목의 차가운 밤공기가 창문의 거친 균열을 타고 작업실 안으로 사납게 들이쳤다.

 

강우진은 목공용 작업대 앞에 멈춰 서서 바닥에 떨어진 두꺼운 유리 조각들을 내려다보았다.

 

유리창 표면을 가로지르며 깊게 패인 파열 흔적은 물리적인 둔기나 쇠구슬 따위로 만들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어떠한 소음도, 화약 냄새도 없이 공간의 밀도를 강제로 한 점에 압축해 터뜨린 국소 인과율의 충격파였다.

 

유리 표면에 자국처럼 남아 있는 글귀가 가로등의 희미한 주황빛을 받아 섬뜩한 음영을 드리우고 있었다.

 

'혼자만 자유를 누리는 대가는 잔혹할 것이다.'

 

글자는 뾰족한 칼날로 긁어낸 것이 아니었다.

 

손가락 끝으로 공간을 짓눌러 분자 결합을 깨뜨린 듯, 거칠고 파괴적인 압력의 흔적이 유리 단면에 화상처럼 각인되어 있었다.

 

우진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채우며 서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본능적으로 오른쪽 관자놀이 부근으로 손이 올라갔다.

 

손가락 끝에 닿는 것은 15년 전 신경 궤도 절제술로 남겨졌던 4센티미터의 메마른 흉터뿐이었다.

 

언제나 비정상적인 파동이나 위험을 감지할 때마다 바늘로 쑤시듯 욱신거리던 맹렬한 편두통은 없었다.

 

시야의 귀퉁이를 뒤덮던 백색의 노이즈도, 대상을 향해 뻗어나가던 푸른 궤적선도 떠오르지 않았다.

 

골목길 모퉁이 너머로 사라진 습격자의 머리 위에 무엇이 떠 있었는지, 그가 검은 세모를 품고 있는지 혹은 뒤틀린 원환을 지니고 있는지 우진은 알 수 없었다.

 

망막에 비치는 것은 그저 밤안개가 얇게 내려앉은 상도동 달동네의 좁고 어두운 비탈길뿐이었다.

 

완전한 인간의 눈이었다.

 

초인적인 예측도, 시스템의 격자망을 투시하는 감각도 완전히 박탈당한 평범한 시야였다.

 

우진은 코트 주머니 속에서 손을 꺼내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들을 빗자루로 쓸어 담기 시작했다.

 

사각사각 빗자루가 시멘트 바닥을 긁는 소리가 적막한 공방 안에 울려 퍼졌다.

 

쓰레받기에 쓸려 들어가는 깨진 조각들이 부딪치며 짤랑거리는 소리를 냈다.

 

두려움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익숙하게 겪어온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언제 어디서 날아들지 모르는 불의의 사고,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보이지 않는 적의,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내일의 행방.

 

그러나 지금 가슴 한구석을 조여오는 이 감각은, 시스템의 사각 격자에 묶여 누군가의 계획된 각본 아래서 사육당하던 시절의 무력한 공포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우진은 쓰레받기를 쓰레기통에 비우고, 구석에 놓여 있던 합판 한 장과 목공용 못, 망치를 들고 깨진 창가로 다가섰다.

 

탕, 탕, 탕.

 

망치질 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합판 모서리를 창틀에 대고 단단히 못을 박아 넣자, 방 안으로 들이치던 차가운 외풍이 비로소 멎었다.

 

임시로 막아둔 합판 벽을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려 고정 상태를 확인한 우진은 조용히 작업대 서랍을 열었다.

 

어제 전직 요원에게 건네받았던 묵직한 알루미늄 케이스가 서랍 안쪽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우진은 케이스를 꺼내 작업대 위에 올려놓고 걸쇠를 풀었다.

 

딸깍 하는 금속음과 함께 뚜껑이 열렸다.

 

내부에는 15년 전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의 인장이 찍힌 빛바랜 극비 문서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15년 전 특수 시설 1세대 피실험체 폐기 및 격리 보고서 (CLASS-O)]

 

첫 장을 넘기자 낯선 이름들과 흑백 사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Subject-01 : 백도현. 신경 동기화율 12.4%. 시스템 사각 격자 수용 거부. 공간 인과율 비정상 압축 변이 발현. 화학적 동면 격리 판정.'

 

'Subject-03 : 유진아. 생체 궤도 거부 및 감각 과민성 폭주. 격리.'

 

'Subject-09 : 송태석. 골격 및 인과율 충격 전이 저항체. 격리.'

 

총 일곱 명.

 

15년 전, 어린아이였던 자신(K-07)과 함께 연구소의 어두운 복도에 갇혀 있던 또 다른 희생양들이었다.

 

자신은 아버지 강정호 박사가 뇌신경 궤도를 절제해 주어 세상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이 아이들은 규격에 맞지 않는 불량품으로 낙인찍혀 차가운 유리 챔버 속에 봉인된 채 15년의 세월을 통째로 박탈당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르비스 코어가 파괴되던 날, 지하 7층의 생체 방화벽이 일제히 꺼지며 그들은 스스로 챔버를 부수고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우진은 서류에 찍힌 소년 시절 백도현의 서늘한 눈빛을 손끝으로 가만히 쓸어내렸다.

 

자신을 향해 날아든 그 비틀린 충격파와 증오 섞인 문구의 주인이 누구인지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15년 동안 멈춰 있던 시간 속에서 깨어났다.

 

세상은 이미 변했고, 자신들을 가두었던 시스템은 무너졌지만, 그들의 가슴속에 남은 지옥 같은 고통과 배신감은 여전히 15년 전 화재의 열기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우진은 서류를 덮고 케이스를 닫았다.

 

두려움이 심장 언저리를 차갑게 옥죄어왔지만, 물러서거나 피하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이것은 시스템이 강제로 덮어씌운 각본이 아니었다.

 

자신이 내린 선택, 자신이 부숴버린 세계의 파편들이 만들어낸 현실의 무게였다.

 

2. 아침의 거리와 횡단보도의 풍경

 

짧은 선잠을 자고 일어난 이튿날 아침, 상도동 언덕길은 평소와 다름없는 소란으로 깨어나고 있었다.

 

작업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코끝을 스치는 쌉싸름한 늦가을 아침 공기가 머리를 맑게 깨워주었다.

 

동네 골목에는 인근 빌라에서 쏟아져 나온 출근길 직장인들과 가방을 멘 학생들이 쾡한 얼굴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우진은 얇은 겉옷을 걸친 채 천천히 언덕을 내려가 상도역 방면으로 걸었다.

 

밤새 긴장했던 몸을 풀고, 동네 철물점에 들러 깨진 창문을 교체할 두꺼운 강화유리와 실리콘을 주문하기 위해서였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삼거리 슈퍼 앞을 지날 때였다.

 

가게 앞 평상에 앉아 채소를 다듬던 복덕방 할머니가 우진을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총각! 좋은 아침이네. 어제 이사 떡은 입에 맞았누?"

 

"네, 할머니. 덕분에 아주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꿀떡이 특히 맛있더라고요."

 

우진이 걸음을 멈추고 허리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할머니의 얼굴 주름 사이로 번지는 소박한 온기가 어젯밤의 서늘한 긴장감을 조금씩 밀어내 주었다.

 

할머니의 정수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예전 같았으면 반복되는 하루의 노동과 늙어가는 삶의 관성을 상징하는 희미한 백색 네모가 묵묵히 떠 있었을 자리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희끗희끗한 백발 사이로 아침 햇살이 따스하게 부서져 내릴 뿐이었다.

 

그녀가 오늘 아침 어떤 사고를 당할지, 언제 세상을 떠날지, 그 어떤 정보도 공중에 떠오르지 않았다.

 

"나무 깎는 소리가 제법 씩씩하게 나대? 젊은 사람이 손재주가 좋아. 점심때쯤 들러, 콩나물국 끓여둘 테니 밥 한술 뜨고 가."

 

"감사합니다. 철물점 다녀와서 작업하다가 꼭 들를게요."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다시 걷기 시작한 우진은 상도역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섰다.

 

신호등은 붉은 불이었고, 보도블록 위에는 수십 명의 시민들이 초조한 기색으로 발을 구르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는 하나같이 텅 비어 있었다.

 

출근길 지각을 모면하려는 불안, 오늘 있을 회의에 대한 걱정, 간밤에 가족과 나눈 사소한 다툼의 찌꺼기들이 사람들의 얼굴에 저마다의 표정으로 묻어났다.

 

그 누구도 사각 규격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었다.

 

그때,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내려오던 한 학생이 급하게 브레이크를 잡았다.

 

끼이익 하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도로 위를 갈랐다.

 

바닥에 젖어 있던 살얼음에 바퀴가 미끄러지며 자전거가 휘청거렸다.

 

순간, 우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도 모르게 상체가 앞으로 튕겨 나가듯 굳어졌다.

 

'위험해.'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예전 같았다면 학생의 머리 위에 붉은빛으로 회전하는 파멸의 세모가 떠올랐을 순간이었다.

 

0.3초 뒤에 학생이 도로 위로 굴러떨어질 궤적선이 망막 위에 푸른 잔상으로 그려지고, 달려오던 덤프트럭의 탄도가 시각화되어야 마땅했다.

 

우진은 숨을 멈추고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푸른 궤적도, 회전하는 도형도 없었다.

 

시야는 지독할 정도로 고요했고, 현실의 시간은 단 1초의 지연도 없이 있는 그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학생은 넘어지지 않았다.

 

비틀거리던 발로 잽싸게 아스팔트 바닥을 짚으며 균형을 잡았고, 우회전하려던 소형 승용차는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

 

승용차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소리를 질렀다.

 

"야, 꼬마야! 앞 좀 똑바로 보고 다녀야지! 다칠 뻔했잖아!"

 

학생은 얼굴이 빨개진 채 헬멧을 고쳐 쓰며 연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저씨!"

 

그것으로 끝이었다.

 

붉은 세모도, 인접 노드로 튀어 오르는 인과율의 균열도, 파멸을 향한 시스템의 대체 사건 투입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길을 가다 일어날 수 있는 아주 사소하고 우발적인 위험이었고, 인간 본연의 반사 신경과 양보로 가볍게 모면된 평범한 일상의 한순간일 뿐이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일제히 횡단보도를 건너기 시작했다.

 

우진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자신은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머리 위에 도형이 뜨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누군가가 갑작스러운 비극에 휘말리지 않을까 하는 원초적인 공포가 불쑥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능력이 사라졌다는 것은, 타인의 위험을 미리 알아채고 구해줄 수 있는 수단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예전의 우진이라면 저 학생의 머리 위에 뜬 도형을 보고 미리 다가가 자전거를 멈춰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누가 오늘 다칠지, 누가 오늘 불행해질지, 자신이 어떤 위험에 직면하게 될지 그 무엇도 사전에 연산할 수 없었다.

 

우진은 천천히 발을 떼며 사람들의 물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득 입가에 쓰라린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이게 맞는 거다.'

 

모든 것을 미리 알고 통제하려 했던 서지훈의 오만함이 어떤 파멸을 불러왔는지 우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미래를 알지 못하기에 조심하고, 위험을 예견할 수 없기에 서로에게 주의를 당부하며, 사소한 실수 속에서도 서로를 배려하는 것.

 

내일을 모른다는 익숙한 두려움이야말로, 살아 있는 인간이 짊어져야 할 가장 자연스럽고 온전한 삶의 무게였다.

 

능력의 부재는 결핍이나 상실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신경을 비틀고 뇌를 갉아먹던 기형적인 감각의 왜곡에서 벗어나, 마침내 온전한 인간의 상태로 회복되었음을 증명하는 안도감의 다른 이름이었다.

 

3. 철물점과 대팻밥 향기

 

상도역 뒤편 골목에 자리 잡은 낡은 철물점은 온갖 쇠붙이 냄새와 기름 냄새로 가득했다.

 

벽면에는 굵기별 철사와 나사못, 망치, 톱 등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고, 바닥에는 시멘트 포대와 배관 자재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우진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안쪽 평상에서 라디오를 듣고 있던 주름투성이의 철물점 주인이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쇼. 뭐 찾으시나?"

 

"어제 그 낡은 기름집 단독주택 1층에 새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창문 유리가 깨져서 새로 맞추려고 하는데요."

 

"아, 그 참기름집 자리? 젊은 사람이 거기 들어왔다고 복덕방에서 얘기 들었지. 유리가 왜 깨졌어? 바람이 세게 불었나?"

 

주인이 돋보기안경을 고쳐 쓰며 줄자와 메모지를 집어 들었다.

 

"네, 바람이 좀 사나워서요. 가로 90센티에 세로 120센티 정도 되는 규격인데, 일반 유리 말고 이중 강화유리로 맞출 수 있을까요? 두께는 8밀리미터 이상으로요."

 

주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우진을 쳐다보았다.

 

"8밀리 강화유리? 허허, 총각. 그건 상가 방폭창이나 은행에서나 쓰는 두께요. 일반 가정집 창문에 그렇게 두꺼운 걸 넣으면 창틀이 무게를 못 이길 텐데? 가격도 만만치 않고."

 

"목재로 창틀을 새로 짜서 보강할 생각입니다. 제가 목공을 해서 무게는 지탱할 수 있습니다. 튼튼한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우진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1세대 피실험체들이 지닌 인과율 충격파가 어느 정도 위력인지 아직 정확히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어젯밤 같은 기습적인 파편 비산이라도 막아내려면 일반적인 창문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주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손님이 원한다면야 그렇게 해줘야지. 마침 창고에 재단해 둔 두꺼운 접합 방범 유리가 하나 있긴 하오. 오후에 배달 기사 편으로 트럭에 실어 보내줄 테니, 실리콘이랑 고정 브래킷도 넉넉히 챙겨가쇼."

 

"감사합니다. 비용은 지금 바로 계산하겠습니다."

 

지갑에서 지렛대처럼 빳빳한 지폐를 꺼내 건네는 우진의 손등에 엷은 굳은살이 잡혀 있었다.

 

사무실에서 마우스와 키보드만 두드리던 대기업 대리 시절에는 없던 흔적이었다.

 

태성C&I의 기획조정실 총괄 팀장 자리였다면 지금쯤 깔끔한 정장을 입고 수억 원짜리 프로젝트 결재판에 사인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진은 자신의 손등에 밴 나무 향과 거친 굳은살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철물점을 나와 다시 언덕길을 올라 작업실로 돌아왔다.

 

합판으로 막아둔 창문 틈새로 얇은 햇살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우진은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어두고 두꺼운 작업용 앞치마를 둘렀다.

 

작업대 한가운데에는 며칠 전부터 결을 다듬기 시작한 단단한 참나무 각재들이 놓여 있었다.

 

창틀을 보강할 지지대를 만들고, 어제 완성했던 첫 번째 의자에 이어 서연에게 선물할 작은 차탁(茶卓)을 짤 계획이었다.

 

스륵, 스륵.

 

손대패의 날을 비스듬히 세워 참나무 표면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칼날이 지나갈 때마다 얇고 투명한 대팻밥이 도로록 말려 올라오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은은하고 구수한 참나무 특유의 향기가 좁은 작업실 안에 가득 찼다.

 

우진은 대패질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져 오는 나무의 거친 숨결, 옹이의 단단함, 결의 방향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칼날의 저항감.

 

이 모든 촉각적인 정보들은 과거 그가 보아왔던 기하학적 도형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의 언어였다.

 

도형은 차갑고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네모는 안주였고, 세모는 파멸이었으며, 꼭두각시 줄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족쇄였다.

 

그것들은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머리 위에 떠올라 모든 것을 단정 짓고 재단했다.

 

하지만 나무는 달랐다.

 

바람을 맞고 자란 방향에 따라 나이테의 간격이 제각각이었고, 메마른 가뭄을 견뎌낸 자리에는 깊은 흉터 같은 옹이가 박혀 있었다.

 

나무는 옹이를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 거칠고 억센 옹이 주변의 나뭇결이 가장 아름답고 단단한 무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상처가 있는 자리가 가장 단단해진다.'

 

우진은 대패질을 멈추고 손끝으로 참나무의 거친 옹이를 매만졌다.

 

자신의 관자놀이에 새겨진 4센티미터의 흉터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손에 의해 궤도 신경이 잘려 나가며 새겨진 끔찍한 상처.

 

15년 동안 자신을 버림받은 괴물로 여기게 만들었던 그 비극적인 흔적이, 역설적이게도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방화벽 백신이 되었고 마침내 시스템의 족쇄를 부수는 열쇠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그 상처의 자리에 남은 것은 초능력의 잔재가 아니라 평범한 인간으로서 현실을 살아갈 수 있는 단단한 의지였다.

 

우진은 다시 대패를 쥐었다.

 

일정한 리듬으로 대팻밥을 깎아내는 소리가 작업실 안을 평온하게 채워나갔다.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자신이 디딜 수 있는 유일한 발판은, 지금 손에 쥔 이 도구와 정직하게 땀을 흘려 만들어내는 현실의 조각들뿐이었다.

 

4. 수첩 속의 기록과 새로운 위협

 

오후가 되자 철물점 주인이 보낸 소형 화물 트럭이 골목길로 들어섰다.

 

배달 기사와 함께 조심스럽게 하차한 강화유리는 우진이 요구한 대로 묵직하고 단단했다.

 

두 장의 유리 사이에 특수 방탄 필름을 겹쳐 압착한 8밀리미터 접합 방범 유리였다.

 

우진은 합판을 떼어내고, 미리 참나무 각재로 단단하게 덧대어 짠 창틀에 강화유리를 끼워 넣었다.

 

유리 모서리마다 고정용 브래킷을 덧대고 전동 드릴로 나사를 조인 뒤, 틈새마다 짙은 회색의 방수 실리콘을 두껍게 쏴 발랐다.

 

헤라로 실리콘 표면을 매끄럽게 정리하자, 어젯밤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견고하고 투명한 창문이 완성되었다.

 

작업을 마친 우진은 걸레로 유리 표면에 묻은 지문을 닦아내며 밖을 내다보았다.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상도동 골목의 풍경은 왜곡 없이 맑았다.

 

하지만 우진은 알고 있었다.

 

이 두꺼운 유리가 완전한 방패가 되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그것은 단지 시간을 벌어줄 가림막일 뿐, 과거의 어둠 속에서 깨어난 자들의 원망과 증오를 원천적으로 막아낼 수는 없었다.

 

손을 씻고 작업대 앞에 앉은 우진은 가방 안쪽에서 가죽 표지로 감싸인 낡은 하드커버 일지를 꺼냈다.

 

한서연이 대검찰청 특수본 압수물 검증을 거쳐 돌려주었던 아버지 강정호의 친필 연구 노트였다.

 

빛바랜 종이를 넘기자 15년 전 아버지가 만년필로 빽빽하게 적어 내려간 수식과 도형 모식도들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 궤도 모델링과 항상성 네트워크(Homeostasis Network)]

 

□, △, ○ 세 가지 도형의 상태 전이 방정식, 그리고 단일 노드 개입 시 발생하는 인접 노드의 결손 엔트로피 보존 법칙.

 

노트의 후반부에는 시스템의 잔인성을 깨달은 아버지가 연구를 중단하고 남겨둔 비상 메모들이 적혀 있었다.

 

우진의 시선이 노트 말미의 한 페이지에 멈추었다.

 

거기에는 푸른색 잉크로 거칠게 갈겨쓴 아버지의 필적이 남아 있었다.

 

'닫힌 계의 엔트로피는 스스로 감소하지 않는다.'

 

'통제 시스템이 인위적으로 질서를 유지하려 할 때, 그에 상응하는 파멸적 에너지는 반드시 규격 밖의 결손 노드로 전이되어 축적된다.'

 

'결손체(Reject)들은 소멸하지 않는다. 그들은 시스템의 억압이 붕괴하는 순간, 축적된 15년 치의 인과율 결손을 온몸에 두른 채 현실의 가장 취약한 균열부로 분출될 것이다.'

 

우진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아버지는 이미 15년 전에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이 시스템의 중앙 코어를 부수고 오르비스를 소각했을 때, 그동안 억눌려 있던 거대한 엔트로피의 파도가 어디로 흘러갈 것인지를.

 

시스템의 사각 틀을 거부하다 지하 7층 차폐벽에 강제로 동면 봉인되었던 1세대 피실험체들.

 

그들은 단순히 세뇌를 당하거나 개조된 인간 병기가 아니었다.

 

시스템의 격자망과 동기화되지 못해 튕겨져 나간 자들이었고, 시스템이 전 인류의 안정을 유지한다는 명목 아래 15년 동안 억압하고 배제했던 '살아있는 결손 엔트로피' 그 자체였다.

 

그렇기에 그들이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향할 곳은 명확했다.

 

자신들을 가두었던 시스템의 수뇌부, 그리고 그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홀로 자유를 되찾아 평온을 누리고 있는 'Node-1 : K-07', 바로 강우진 자신이었다.

 

'혼자만 자유를 누리는 대가는 잔혹할 것이다.'

 

어젯밤 창문에 새겨졌던 그 말이 귓가에 쟁쟁하게 울렸다.

 

그들에게 우진은 시스템의 희생양이자 동료가 아니었다.

 

아버지가 최초 설계자였기에 홀로 궤도를 절제받고 빠져나가 15년 동안 평범한 삶을 누렸으며, 마침내 시스템마저 파괴하고 영웅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파렴치한 배신자로 보일 터였다.

 

그들의 분노와 원망은 논리나 이성으로 설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15년간 빼앗긴 삶에 대한 박탈감, 그리고 육체와 신경계에 각인된 참혹한 고통의 기억이 그들을 괴물로 만들어버린 것이었다.

 

우진은 노트를 덮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작업대 구석에 놓여 있던 스마트폰의 진동이 요란하게 울렸다.

 

발신자 화면에는 '한서연 기자'의 이름이 떠 있었다.

 

우진은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누르고 수화기를 귀에 댔다.

 

"서연 씨."

 

- 우진 씨!

 

지금 작업실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서연의 목소리는 평소의 차분함과 달리 몹시 가쁘고 다급했다.

 

주변에서 자동차 경적과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뒤섞여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이동 중인 듯했다.

 

"네, 작업실이에요. 무슨 일 있습니까? 목소리가 많이 급해 보이는데."

 

- 방금 경찰청 출입 기자 선배한테서 긴급 연락을 받았어요.

 

서울 도심에서 이상 사건이 터졌어요.

 

"이상 사건이요?"

 

우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 오늘 오후 두 시경에, 옛 넥스트 큐브 본사 사옥 인근… 그 지하 함몰 사고 현장 주변 도로에서 원인 불명의 압력 폭발 사고가 일어났대요.

 

가스 누출이나 테러 징후도 없는데, 지나가던 대형 화물차 한 대가 공중으로 반쯤 들렸다가 내려앉으면서 바퀴가 통째로 터졌어요.

 

운전자는 중상을 입었고요.

 

서연의 숨소리가 거칠게 이어졌다.

 

- 그런데 그 사고 직전에, 현장 인근 CCTV에 검은 후드를 뒤집어쓴 젊은 남녀 두 명이 찍혔어요.

 

그중 한 사람의 인상착의가… 우진 씨가 어제 보여줬던 그 알루미늄 케이스 속 1세대 피실험체 명단의 얼굴과 거의 일치해요.

 

우진의 심장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백도현… 그자입니까?"

 

- 맞아요.

 

Subject-01 백도현.

 

그리고 그 옆에 있던 여자는 Subject-03 유진아로 추정돼요.

 

경찰 특공대가 현장으로 출동했는데, 둘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대요.

 

그런데 현장에 남겨진 흔적이… 일반적인 폭약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찌그러진 듯한 비정상적인 파열흔이었대요.

 

우진은 어젯밤 자신의 작업실 창문을 부쉈던 그 압축 충격파의 흔적을 떠올렸다.

 

틀림없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며 행동을 개시한 것이었다.

 

- 우진 씨, 어젯밤에 혹시 작업실 주변에 아무 일도 없었죠?

 

제가 지금 바로 상도동으로 갈게요.

 

걱정으로 가득 찬 서연의 목소리에 우진은 잠시 망설였다.

 

어젯밤 창문이 깨지고 경고 문구가 새겨졌다는 사실을 지금 말한다면 서연은 사색이 되어 달려올 것이 뻔했다.

 

그러나 그녀를 이 위험의 한가운데로 무작정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서연 씨, 저는 괜찮습니다. 일단 진정해요."

 

-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그자들은 15년 동안 갇혀 있던 원한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에요.

 

우진 씨를 노리고 있을 가능성이 제일 높다고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작정 움직이면 서연 씨가 더 위험해질 수 있어요. 그자들이 노리는 건 저예요. 서연 씨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 저는 지금 광화문 프레스센터 앞이에요.

 

후속 취재 때문에 나와 있었는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요.

 

"서연 씨, 부탁입니다. 대검찰청 특수본이나 믿을 수 있는 취재 데스크 안으로 들어가 있어요. 거기는 공권력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이잖아요. 그자들이 노리는 표적 옆에 있으면 서연 씨까지 휘말립니다."

 

- 우진 씨 혼자서 어쩌려고요!

 

지금 우진 씨한테는… 예전 같은 능력도 없잖아요!

 

그자들의 공격을 어떻게 예측하고 피하겠다는 거예요?

 

서연의 절박한 외침이 우진의 가슴을 아프게 찔렀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자신에게는 이제 위험을 미리 감지할 붉은 세모도, 미래의 공격 궤도를 읽어낼 푸른 잔상도, 탄환을 튕겨낼 절대 척력도 없었다.

 

그저 평범한 인간의 육체와 오감만을 지닌 나약한 존재일 뿐이었다.

 

하지만 우진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능력이 없기 때문에, 도망치지 않는 겁니다."

 

- …네?

 

"예전의 저는 도형을 보며 사람들을 피하거나, 미리 계산된 궤적 뒤로 숨기만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내 눈앞에 닥쳐올 위험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는 법을 배우고 있어요. 이 일은 15년 전 우리 연구소에서 시작된 일이고, 제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우진은 창가로 다가가 견고하게 새로 끼워 넣은 강화유리 너머의 골목길을 응시했다.

 

"하지만 서연 씨, 무모하게 혼자 싸우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냉정하게 파악해야 해요. 서연 씨가 가진 정보망이 필요합니다. 1세대 피실험체들의 동선과 추가 피해 상황을 계속 확인해 주세요. 저도 여기서 준비를 하고 있겠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한동안 정적이류 흘렀다.

 

서연의 가쁜 숨소리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특유의 단단하고 명민한 기자의 호흡으로 돌아왔다.

 

- …알겠어요.

 

우진 씨 고집, 제가 무슨 수로 꺾겠어요.

 

대신 약속해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절대로 혼자 감당하려 하지 말고 바로 연락하기로.

 

"약속합니다. 조심해서 움직여요, 서연 씨."

 

통화가 끊겼다.

 

우진은 전화기를 주머니에 넣고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두려움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번져나갔지만, 머릿속은 지극히 차갑고 명징했다.

 

5. 불확실성 속으로 내딛는 발걸음

 

작업실 안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우진은 벽에 걸린 겉옷을 집어 들었다.

 

도망칠 생각은 없었지만, 이곳 좁은 작업실 안에 가만히 앉아 습격을 기다리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이었다.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 건너편 슈퍼의 할머니나 골목을 오가는 무고한 사람들이 휘말릴 위험이 너무나 컸다.

 

그자들의 목표가 자신이라면, 자신이 움직여야 했다.

 

우진은 작업대 서랍에서 알루미늄 케이스를 꺼내 어깨에 메는 가죽 가방 속에 넣었다.

 

그리고 주머니 속에 손을 넣어 손바닥만 한 황동제 접이식 주머니칼 하나를 쥐었다.

 

화약 무기도, 특수 장비도 아니었다.

 

나무를 다듬을 때 쓰는 평범한 손도구였지만, 손아귀에 쥐어지는 차가운 금속의 무게감이 손끝을 단단하게 다잡아주었다.

 

작업실 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오자, 늦은 오후의 붉은 노을이 상도동 비탈길을 길게 물들이고 있었다.

 

골목길 끝자락,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의 긴 그림자가 아스팔트 위에 어른거렸다.

 

엄마 손을 잡고 깡총거리며 걸어가는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저 아이의 머리 위에도, 아이를 바라보며 다정하게 웃는 어머니의 머리 위에도 아무런 표식이 없었다.

 

그들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내일 시험을 망칠 수도 있고, 감기에 걸릴 수도 있으며, 넘어여 무릎을 다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불확실함이야말로 그들이 오늘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고, 서로의 손을 더욱 꼭 쥐게 만드는 생명의 원동력이었다.

 

우진은 언덕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머리 위의 흉터는 더 이상 욱신거리지 않았다.

 

어떤 편두통도, 안압의 상승도 없었다.

 

시야는 여전히 맑고 평범했다.

 

하지만 우진의 감각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깨어나 있었다.

 

바람이 스치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엔진 소리, 골목길 모퉁이의 미세한 공기의 흔들림.

 

기계적인 인터페이스가 사라진 자리에, 인간 본연의 직관과 날것의 감각이 온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어디선가 낯선 시선이 느껴졌다.

 

골목길 저편, 붉은 노을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 전신주 뒤편의 어둠 속에서 서늘한 기운이 번져나오고 있었다.

 

인과율의 충격파를 품은 자, 15년의 세월을 얼어붙은 채 증오로 채워온 자의 적의였다.

 

우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펴고, 담담하고 단단한 보폭으로 그 그림자를 향해 걸어 나갔다.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더 이상 그를 주저앉히는 족쇄가 아니었다.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자신의 발로 딛고 서서, 자신이 선택한 삶과 사람들을 지켜내기 위해 마땅히 짊어져야 할 온전한 인간의 무게였다.

 

바람이 불어와 우진의 옷자락을 흔들었다.

 

붉게 타오르는 서울의 노을 아래, 각본 없는 거대한 도화지 위로 우진의 첫 발자국이 선명하게 새겨지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