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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91화

불확실한 세상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보도블록 위의 틈새

 

테헤란로의 빌딩 숲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은 유난히 투명했다.

 

발밑을 지탱하는 사각의 회색 보도블록들은 여전히 일정한 규격으로 맞물려 있었지만, 강우진의 시야는 이전과 전혀 달랐다.

 

눈을 가늘게 뜨거나 관자놀이에 지그시 힘을 주어도, 허공을 가로지르던 푸른 궤적선이나 칠흑빛 꼭두각시 줄선은 나타나지 않았다.

 

머리 위 10센티미터 상공에서 사람들의 일상을 감시하듯 맴돌던 백색 네모도, 파멸을 예고하던 날카로운 세모도 없었다.

 

오직 바람에 흩날리는 은행나무 잎들과, 빌딩 유리창에 반사되어 산산이 흩어지는 자연스러운 빛무리만이 시야를 채우고 있었다.

 

지긋지긋하게 뇌간을 짓누르던 유년기 수술 흉터 부근의 편두통은 거짓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강우진은 품에 안고 있던 누런 마분지 박스를 고쳐 안았다.

 

6년 동안 태성C&I 기획2팀 책상 서랍을 채우고 있던 잡동사니들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손때 묻은 만년필 몇 자루, 사원증 목걸이, 그리고 김 주임이 건네준 비타민 음료 한 병이 전부였다.

 

한때 자신의 인생 전체를 규정하던 사각형의 콘크리트 상자에서 걸어 나오는 데 필요한 짐 치고는 지극히 초라했다.

 

하지만 가슴속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르는 호흡은 이전의 어떤 날보다 깊고 서늘했다.

 

횡단보도 신호등이 붉은빛에서 초록빛으로 깜빡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일제히 발걸음을 옮겼다.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머리 위가 깨끗하게 비어 있는 군중이었다.

 

더 이상 그들의 행로를 초 단위로 쪼개어 인도하는 인공지능의 추천 경로는 없었다.

 

저마다의 불안과 서투른 망설임이 신발 끝에 실려 있었다.

 

바로 앞을 걷던 베이지색 트렌치코트 차림의 여성이 작은 손가방을 떨어뜨렸다.

 

지퍼가 열려 있던 가방에서 립스틱과 사탕 몇 개, 그리고 얇은 다이어리가 아스팔트 바닥으로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여성은 당황한 표정으로 멈춰 서며 쪼그려 앉았다.

 

뒤따라오던 검은 패딩 차림의 중년 남성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툭 쳤다.

 

"아이고, 조심 좀 하지!"

 

남자의 입에서 거친 짜증이 터져 나왔다.

 

"죄송합니다, 죄송해요……."

 

여성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흩어진 물건들을 허겁지겁 주워 담았다.

 

남자는 혀를 차며 성큼성큼 걸어갔고, 횡단보도의 초록불은 속절없이 깜빡이고 있었다.

 

강우진은 묵묵히 다가가 바닥에 굴러간 둥근 립스틱을 집어 들었다.

 

먼지를 가볍게 털어내고 여자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다치진 않으셨습니까."

 

여자가 젖은 눈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정신이 없어서……."

 

"신호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일어나시죠."

 

우진이 마분지 박스를 한 팔로 받쳐 든 채 다른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그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두 사람이 보도블록 끝자락에 안전하게 올라선 순간, 신호등은 다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

 

여자는 가방을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미러 큐브가 멈추고 나니까, 아침에 몇 시에 나와야 할지도 모르겠고…… 계속 실수만 하네요."

 

자조 섞인 목소리였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어떤 붉은 경고도, 추락의 세모도 뜨지 않았다.

 

단지 아침의 사소한 지각을 두려워하는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얼굴만이 있을 뿐이었다.

 

"누구나 실수합니다."

 

우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정해진 시간표대로 사는 게 더 이상한 거니까요."

 

여자는 우진의 말에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겠죠?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여자가 꾸벅 인사를 건네고 지하철역 입구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우진은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했다.

 

사소한 충돌, 사소한 짜증, 그리고 사소한 도움.

 

시스템이 구축해 둔 거대한 오르비스의 방정식 속에서는 '결손 엔트로피'라는 거창한 숫자로 분류되었을 그 사소한 마찰들이, 거리 위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또 자연스럽게 아물어가고 있었다.

 

누구도 파멸하지 않았고, 누구도 꼭두각시 줄에 매달려 자살 궤도로 곤두박질치지 않았다.

 

2. 깨어진 질서와 찻잔의 소음

 

우진은 지하철 대신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으로 향했다.

 

역삼역 8번 출구 앞은 여전히 지난번 지반 침하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경찰의 노란 통제선이 둘러쳐진 함몰 구역 주변으로 덤프트럭과 굴착기들이 분주히 흙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지하 100미터 아래에서 전 인류를 가축처럼 사육하려던 양자 슈퍼컴퓨터의 잔해는 이미 수천 톤의 토사와 콘크리트 밑에 영구히 파묻혔다.

 

거리 곳곳에 설치된 대형 옥외 전광판에서는 낯익은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는 오늘 오전, 넥스트 큐브 및 국가안전기획처 결탁 사건과 관련하여 민경택 전 차장을 비롯한 핵심 피의자 14명에 대해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 및 직권남용, 살인교사 혐의로 전원 구속영장을 청구했습니다.

 

- 또한 정부는 민간 플랫폼 '미러 큐브'를 통해 불법 수집된 5,100만 전 국민의 생체 및 성향 데이터베이스에 대해 법원의 검증을 거쳐 오늘 정오를 기해 전량 소자 및 영구 삭제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습니다.

 

지나치던 직장인들이 걸음을 멈추고 전광판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누군가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스마트폰 화면을 두드렸다.

 

"진짜 다 지운 거 맞아?"

 

"모르지. 근데 확실히 앱이 아예 안 켜지긴 하더라."

 

"야, 솔직히 난 그 앱 있을 때가 편했는데. 출퇴근길 지하철 몇 번 칸에 타야 제일 빠른지 딱딱 알려줬잖아."

 

"미친놈아, 그게 네 뇌파까지 다 털어가면서 조작하던 거라잖아. 뉴스를 보고도 그딴 소리가 나와?"

 

"아니, 그냥 편하긴 했다고……."

 

정류장 벤치에 앉은 두 청년의 투닥거림이 귓가에 닿았다.

 

자유를 되찾았다는 사실에 환호하면서도, 동시에 15년 넘게 길들어 온 통제의 편리함을 무의식중에 그리워하는 모순.

 

서지훈이 죽기 직전까지 조롱하듯 내뱉었던 '자유의 공포'가 바로 저런 모습일 것이다.

 

인간은 나약하다.

 

누군가 인생의 정답을 미리 정해주고, 어떤 길을 가야 넘어지지 않는지 레일을 깔아주면 비록 그것이 사육장의 울타리일지라도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울타리를 부수고 나온 순간부터 마주하는 자갈밭이야말로 진짜 삶의 무대였다.

 

우진이 탄 3412번 버스는 평소보다 덜컹거리며 도심을 빠져나갔다.

 

신호 연동 시스템이 정상화되는 과정에서 도로 곳곳에 병목 현상이 빚어지고 있었다.

 

운전기사는 연신 사이드미러를 확인하며 진땀을 흘렸다.

 

앞차와의 간격이 좁혀질 때마다 가벼운 급정거가 이어졌고, 손잡이를 잡고 서 있던 승객들이 휘청거렸다.

 

"아저씨, 운전 좀 살살 합시다!"

 

뒤쪽 좌석에서 어르신 한 분이 소리를 질렀다.

 

"아, 죄송합니다! 신호 주기가 바뀌어서 자꾸 끊기네요! 조금만 양해해 주십시오!"

 

기사의 메마른 외침에는 과거 시스템 단말들이 보이던 기계적인 침묵 대신, 당혹감과 인간적인 미안함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여의도 증권가의 풍경도 이전과는 달랐다.

 

넥스트 큐브가 인위적으로 주가를 폭락시키고 수천 명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던 참혹한 금융 파이프라인은 붕괴했다.

 

주가 지수는 등락을 반복하며 요동치고 있었지만, 그것은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의 조작이 아닌 수많은 투자자의 예측과 판단, 실패와 성공이 얽혀 만들어내는 혼돈의 춤이었다.

 

우진은 창틀에 턱을 괴고 그 어지러운 세상을 눈에 담았다.

 

아름답지는 않았다.

 

오히려 무질서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그 위태로움이야말로 살아 숨 쉬는 생명체만이 가질 수 있는 고유한 맥박이었다.

 

3. 704호 병실의 햇살

 

서울 아산병원 정문 앞은 면회객들과 의료진으로 북적였다.

 

우진은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본관 7층으로 올라갔다.

 

복도 끝자락에 위치한 704호 병실 문을 조심스럽게 밀고 들어서자, 은은한 과일 향과 소독약 냄새가 섞여 코끝을 간지럽혔다.

 

창가 쪽 침대에는 어깨 붕대를 한 겹 덜어낸 강정호 박사가 반쯤 상체를 일으켜 앉아 있었다.

 

그 곁에서는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깎아낸 사과를 작은 접시에 가지런히 담고 있었다.

 

"우진이 왔니?"

 

어머니가 먼저 고개를 돌리며 환하게 웃었다.

 

눈가에 깊게 파인 주름 사이로 번지는 미소는, 지난 15년 동안 짓눌려 있던 어둠을 완전히 털어낸 듯 맑았다.

 

"네, 어머니."

 

우진이 품에 안고 있던 마분지 박스를 병실 한쪽 협탁 아래에 내려놓았다.

 

침상에 앉아 있던 강정호가 그 박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물었다.

 

"완전히 정리하고 온 게냐."

 

"네. 사직서 정식으로 수리됐습니다."

 

우진이 침대 곁으로 다가가 플라스틱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강정호의 마른 입술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붕대가 감기지 않은 왼손을 뻗어 우진의 손등을 툭툭 쳤다.

 

"잘했다. 남들이 보기엔 미련한 짓이라 손가락질할지 몰라도, 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게 진짜 시작이다."

 

"정 본부장님이 끝까지 잡긴 했습니다. 연봉도 두 배로 올려주고, 독립된 부서까지 만들어주겠다고 하더군요."

 

"거절하길 잘했다."

 

강정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조직이든 규격이 생기면 인간을 그 틀에 맞추려 들기 마련이지. 내가 15년 전에 저질렀던 가장 큰 오만이 바로 그거였다. 인간의 고통을 줄여주겠다는 명분으로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사각 틀을 짰던 것. 결국 그 틀이 서지훈 같은 괴물을 낳고, 세상을 지옥으로 몰아넣었지."

 

"당신도 참, 이제 다 끝난 일인데 또 자책은……."

 

어머니가 사과 한 조각을 포크로 찍어 남편의 입에 넣어주며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의사 선생님이 스트레스받지 말고 푹 쉬어야 뼈가 빨리 붙는다고 했잖아요. 다음 주면 퇴원인데 벌써부터 골치 아픈 소리 하지 마세요."

 

"허허, 잔소리는 여전하구려."

 

강정호가 사과를 씹으며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15년 만에 되찾은 가족의 평범한 일상.

 

기적 같은 그 풍경을 바라보며 우진은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응어리가 완전히 풀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때 병실 문이 활짝 열리며 요란한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아저씨! 저 왔어요!"

 

노란색 후드티에 헐렁한 청바지를 입은 윤채린이 커다란 미술용 화구통을 등에 멘 채 뛰어들어왔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흑연 가루가 까맣게 묻어 있는 채로였다.

 

그 뒤를 이어 깁스를 푼 오른팔을 가볍게 흔들며 박태호가 조용히 걸어 들어왔다.

 

"채린아, 병원 복도에서 뛰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하냐."

 

태호의 차분한 지적에도 채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우진의 의자 옆으로 바짝 다가왔다.

 

"아저씨, 진짜로 회사 그만뒀어요? 그 높은 빌딩에서 나오는 거 저 아까 버스 안에서 봤는데!"

 

"어. 이제 진짜 백수다."

 

우진이 웃으며 대답하자, 채린이 엄지손가락을 척 치켜세웠다.

 

"멋있다! 역시 강우진이야! 나처럼 자유의 몸이 된 걸 축하해요!"

 

"학원은 어땠냐. 첫날부터 쫓겨난 건 아니고?"

 

"무슨 소리예요! 원장 선생님이 제 소묘 보더니 기본 선이 아주 힘차고 독창적이래요! 척력 같은 거 안 써도, 내 손으로 연필 꽉 쥐고 그리니까 훨씬 더 잘 그려지던데요?"

 

채린이 자랑스럽게 화구통을 툭툭 쳤다.

 

그녀의 정수리 위에는 한때 위태롭게 흔들리던 은빛 동그라미도, 붉은 균열도 없었다.

 

그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와 생기 넘치는 눈동자만이 반짝이고 있었다.

 

태호가 우진에게 다가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형님. 지혜랑 영훈이는 오늘 시청 복지과에 가서 주민등록 재발급 신청하고 거처 지원 서류 접수하고 왔습니다. 당분간 지낼 임시 거처는 마련될 것 같습니다."

 

"다행이네. 애들은 좀 어때?"

 

"아직 길거리에서 스마트폰 화면이 깜빡거리거나 경찰차가 지나가면 흠칫 놀라긴 합니다. 하지만…… 어제는 셋이서 분식집에 가 떡볶이를 먹으면서 웃더군요. 15년 만에 처음 보는 웃음이었습니다."

 

태호의 메마른 눈가에도 잔잔한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살상 알고리즘만을 주입받던 기계화 인간 병기들이, 매운 떡볶이를 나눠 먹으며 눈물을 찔끔거리는 평범한 아이들로 돌아왔다.

 

이것만으로도, 그 지하 100미터 지옥에서 뼈를 깎으며 싸워온 대가는 충분했다.

 

4. 골목길의 낡은 철문

 

오후 늦게 병원을 나선 우진은 지하철 7호선을 타고 상도동 외곽의 주택가로 향했다.

 

퇴직금을 정산받고 약간의 여유가 생긴 그가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은, 부모님과 함께 머물 보금자리와 자신이 일할 작은 공간을 찾는 것이었다.

 

가파른 언덕길을 따라 붉은 벽돌 주택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테헤란로의 차가운 통유리 빌딩과는 전혀 다른, 사람 냄새가 눅진하게 밴 골목이었다.

 

골목 어귀의 낡은 부동산 중개업소 문을 열자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 중개인이 돋보기안경을 코끝에 걸친 채 신문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어서 와요. 집 보러 오셨나?"

 

"네. 살림집 겸 해서, 1층이나 지하에 작은 목공 작업실로 쓸 수 있는 공간을 찾고 있습니다."

 

노인은 신문을 접어두고 벽에 걸린 낡은 동네 지도를 가리켰다.

 

"목공 작업실이라…… 소음 때문에 아파트나 빌라는 힘들 텐데. 마침 저기 언덕배기 끝에 오래된 단독주택 하나가 나와 있긴 해. 1층은 예전에 기름집 하던 자리라 바닥이 콘크리트 통짜고, 2층은 방 셋짜리 살림집이지. 주인이 지방으로 내려가서 싸게 내놨는데, 집이 워낙 낡아서 손을 좀 많이 봐야 할 거요."

 

우진은 노인을 따라 언덕길을 올라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무렵, 녹슨 초록색 철문이 달린 2층짜리 붉은 벽돌집이 나타났다.

 

마당 한구석에는 커다란 감나무 한 그루가 가지를 넓게 뻗고 있었고, 1층의 널찍한 공간은 커다란 통창 너머로 오후의 주황빛 노을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철문을 밀자 삐걱거리는 날카로운 쇠소리가 정적을 깼다.

 

"기름집 관둔 지가 1년이 넘어서 먼지가 좀 많아. 보일러도 손봐야 하고, 지붕에 기와 몇 장도 깨져 있을 텐데…… 그래도 마당이 넓어서 나무 다듬고 대패질하기엔 이만한 자리가 없지."

 

노인이 열쇠를 돌려 1층 유리문을 열었다.

 

먼지 냄새와 함께 오래된 톱밥과 기름 냄새가 희미하게 섞여 풍겨왔다.

 

바닥은 단단한 콘크리트였고, 벽면에는 이전 주인이 쓰던 공구 걸이대와 선반들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우진은 텅 빈 공간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창문 틈새로 들어온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관자놀이에 손을 얹어보았다.

 

아무런 자극도, 수식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나무 냄새와 흙냄새,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낡고 불완전한 공간만이 오롯이 만져졌다.

 

'여기다.'

 

우진은 직감했다.

 

완벽하게 계산된 시스템의 데이터 센터가 아니라, 못질을 잘못하면 나무가 쪼개지고 대패질을 삐끗하면 손가락을 베이는 불확실한 공간.

 

하지만 내 손으로 깎고, 다듬고, 조립하여 누군가가 편히 쉴 수 있는 의자 하나,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 식탁 하나를 만들어낼 수 있는 진짜 삶의 터전.

 

"어르신. 계약하겠습니다."

 

우진이 뒤를 돌아보며 망설임 없이 말했다.

 

노인 중개인이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벌써? 수리비가 제법 나올 텐데, 깎아달라는 흥정도 안 해보고?"

 

"수리는 제가 직접 할 겁니다. 천천히, 하나씩 고쳐가면서 살면 되니까요."

 

우진의 얼굴에 번진 미소는 더없이 담담하고 단단했다.

 

5. 주황빛 포장마차의 밤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저녁 8시, 대검찰청 인근의 한적한 골목길 포장마차에는 붉은 천막 사이로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플라스틱 간이 테이블 위에는 모락모락 김이 나는 홍합탕과 노릇하게 구워진 해물파전, 그리고 초록색 소주병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서류 가방을 발밑에 내려놓은 한서연이 잔을 들어 우진의 잔에 가볍게 부딪쳤다.

 

맑은 파열음이 포장마차 안을 채웠다.

 

"축하해요, 강우진 대리. 아니, 이제 강 목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나?"

 

서연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소주를 들이켜며 푸흐 웃었다.

 

그녀의 목에 걸려 있던 무거운 프레스 카드(기자증)는 재킷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며칠 밤을 새운 탓에 눈 밑에 옅은 다크서클이 드리워져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단단해 보였다.

 

"목수는 무슨. 아직 대패 잡는 법도 가물가물한데요."

 

우진도 잔을 비우며 쓴 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겼다.

 

알싸한 알코올의 열기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뱃속을 따뜻하게 덥혔다.

 

"오늘 특수본 브리핑 끝내고 기자실 정리하는데, 진짜 묘하더라고요."

 

서연이 홍합 껍데기를 까내며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15년 동안 그 거대한 괴물을 쫓으면서, 이걸 밝혀내면 세상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거대한 혁명이 일어날 줄 알았어요. 근데 막상 뚜껑을 열고 다 터뜨리고 나니까…… 사람들은 여전히 지하철 신호 고장 난 거에 짜증 내고, 내일 점심 뭐 먹을지 고민하고 있더라고요."

 

"그게 진짜 세상이니까요."

 

우진이 파전 한 조각을 간장에 찍으며 대꾸했다.

 

"서지훈은 그 일상의 사소함을 견디지 못했던 겁니다. 누군가 실수로 엎지른 커피 한 잔, 예기치 못한 차 차선 변경 하나가 만들어내는 파동을 끔찍한 결손으로 봤던 거죠. 그래서 모든 인간을 네모난 규격에 가두고, 언제 넘어질지까지 정해두려 했던 겁니다."

 

"맞아요. 근데 참 웃기죠?"

 

서연이 턱을 괴고 우진을 바라보았다.

 

"정작 그 틀이 부서지고 나니까,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한 게 뭔지 알아요?"

 

"싸우는 거요?"

 

"네. 오늘 아침 광화문 사거리에서 택시 기사랑 승객이 요금 시비로 멱살을 잡고 싸웠대요. 미러 큐브 경로 안내가 꺼져서 기사님이 길을 좀 돌아갔거든요."

 

서연이 픽 웃었다.

 

"근데 한 10분 소리 지르고 싸우더니, 기사님이 '아침부터 미안하게 됐수다' 하면서 담배 한 개비를 건네니까 승객이 그걸 받아 피우면서 '저도 소리 질러서 죄송합니다' 하고 헤어졌대요. 경찰도 안 부르고, 칼부림도 안 나고."

 

우진은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시스템은 그 10분간의 고성과 갈등을 두려워해 인간의 감정을 마비시키고 뇌간에 칩을 박으려 했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부딪치고, 상처 입고, 언성을 높이다가도, 다시 서로의 온기를 확인하며 손을 내밀 줄 아는 복원력을 가지고 있었다.

 

"참, 우진 씨."

 

서연이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낡은 가죽 표지 모서리가 닳아 있는 수첩이었다.

 

"그거…… 아버지 노트 아닙니까?"

 

"네. 15년 전에 아버지가 저한테 남겨주셨던 비상 단파 주파수랑 연구 기록들이 적힌 수첩이요. 오늘 특수본에 증거 자료로 사본 제출하고, 원본은 돌려받았어요. 이제 이거, 우진 씨가 가지고 있는 게 맞을 것 같아서요."

 

서연이 수첩을 우진의 손 쪽으로 조심스럽게 밀었다.

 

우진은 떨리는 손끝으로 거친 가죽 표지를 어루만졌다.

 

노트를 펼치자, 첫 장에 적힌 아버지의 친필 수식이 눈에 들어왔다.

 

[인간의 의지는 닫힌 계(Closed System)의 엔트로피를 역전시키는 유일한 특이점이다.]

 

15년 전, 코어의 차가운 챔버에 갇히기 전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문장이었다.

 

세상을 완벽한 기하학으로 통제하려 했던 연구자가, 마침내 도달했던 최후의 깨달음.

 

"고맙습니다, 한 기자님."

 

"고맙긴요. 덕분에 나도 기자 노릇 제대로 한번 해봤는데."

 

서연이 잔을 가득 채우며 씩 웃었다.

 

"아, 그리고 나 다음 주부터 사회부 사건팀으로 다시 돌아가요. 데스크에서 기획특집팀 맡아달라는 거 거절했거든요. 발로 뛰면서 사람 냄새 나는 기사 쓰고 싶어서요."

 

"서연 씨다운 선택이네요."

 

"그쪽이야말로요. 대기업 총괄 팀장 자리를 걷어차고 목공소라니. 진짜 대단한 부자(父子)예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주황빛 천막 안을 포근하게 채웠다.

 

바깥 골목길에서는 취객들의 왁자지껄한 고성과, 늦은 퇴근길을 서두르는 구두 굽 소리가 두런두런 섞여 들려왔다.

 

정해진 각본도, 약속된 내일도 없는 밤이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내일을 두려워하여 웅크리지 않았다.

 

6. 어둠 속의 발소리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우진은 서연과 작별 인사를 나누고 홀로 테헤란로 이면도로를 걸었다.

 

버스 정류장까지는 세 블록 정도의 거리였다.

 

빌딩 옥상의 화려했던 네온사인들은 상당수 꺼져 있었고, 가로등 불빛만이 일정한 간격으로 아스팔트 위에 노란 원을 그리고 있었다.

 

주머니 속에 넣은 아버지의 낡은 연구 노트가 묵직하게 손바닥에 닿았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서 상도동 집 마당의 감나무 가지부터 쳐내야겠군.'

 

우진은 혼자 속으로 일정을 정리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2층 살림집 벽지 도배는 채린이와 태호에게 도와달라고 하면 신나서 달려올 터였다.

 

아버지가 퇴원하는 다음 주 수요일 전까지는 휠체어가 오르내리기 편하도록 마당 입구에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어두어야 했다.

 

해야 할 일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그것은 이전의 회사 업무처럼 가슴을 옥죄는 압박이 아니라 기분 좋은 고단함이었다.

 

그때였다.

 

타악.

 

등 뒤 십여 미터 후방에서, 규칙적인 발걸음 소리가 귓바퀴를 때렸다.

 

단순한 행인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보폭이 일정하고, 뒤꿈치가 바닥에 닿는 순간의 충격을 극도로 억제한 훈련된 자의 발소리였다.

 

우진의 걸음이 미세하게 느려졌다.

 

머리 위의 감각 인터페이스는 사라졌지만, 수많은 사선을 넘나들며 벼려진 인간 본연의 육감은 여전히 날카롭게 살아 있었다.

 

골목길의 바람 방향이 바뀌며, 서늘한 살기(殺氣)가 목덜미를 스쳤다.

 

우진은 모퉁이를 돌며 걸음을 멈추고 몸을 벽면에 밀착시켰다.

 

숨을 죽인 채 코트 안쪽 주머니에 꽂혀 있던 묵직한 탄소강 만년필을 쥐었다.

 

모퉁이 너머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스윽.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인물은 짙은 감색 정장에 검은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한쪽 귀에는 구형 무전용 인이어를 꽂고 있었고, 앙다문 입술과 차가운 눈매는 넥스트 큐브의 통제감사실 요원들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하지만 그의 머리 위에는 당연하게도 칠흑빛 검은 육면체나 꼭두각시 줄은 존재하지 않았다.

 

완전한 보통 인간의 형상이었다.

 

"……누구냐."

 

우진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는 놀란 기색도 없이 걸음을 멈추고 우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시선이 우진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4센티미터 수술 흉터에 머물렀다.

 

"오랜만입니다, K-07."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메마른 음성에 우진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시스템이 영구히 소각되고, 데이터베이스가 전량 삭제된 세상에서 결코 다시 들려서는 안 될 식별 코드였다.

 

"시스템은 끝났다. 오르비스도, 네모 프로젝트도 전부 잿더미가 됐어. 아직도 그 망령을 붙들고 있는 건가?"

 

우진이 서늘한 기세를 뿜어내며 한 걸음 내딛자, 남자가 코트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우진의 손가락이 탄소강 만년필을 부러뜨릴 듯 꽉 쥐었다.

 

언제든 턱이나 경동맥을 향해 내지를 수 있도록 하체에 무게중심을 실었다.

 

하지만 남자의 손에서 나온 것은 총이나 인과율 병기가 아니었다.

 

손바닥만 한 낡은 무광 알루미늄 케이스였다.

 

남자는 그것을 우진을 향해 가볍게 던졌다.

 

탁.

 

우진이 반사적으로 날아온 케이스를 한 손으로 낚아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케이스 상단에 레이저로 각인된 문구가 가로등 불빛에 희미하게 드러났다.

 

[PROJECT NEMO : EXCLUSION LIST / 1996-2011]

 

'제외 명단?'

 

우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민경택 차장과 정관계 카르텔이 구속된 건 표면적인 청소에 불과합니다."

 

남자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르비스가 붕괴하기 전, 강정호 박사의 뇌파 동기화 과정에서 시스템이 영구 격리 처리했던 '초기 결손 데이터'가 있습니다. 15년 전 연구소 화재 당시, 시스템의 규격에 끝내 결합하지 못하고 외부로 폐기 처분되었던 1세대 피실험자들 중 일부가…… 아직 살아 있습니다."

 

"……뭐라고?"

 

우진의 숨이 멎었다.

 

자신과 민도현, 그리고 태호와 지혜 등 연구소의 아이들은 모두 시스템의 손아귀에 붙잡혀 병기로 개조되거나 감시 아래 놓여 있었다고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폐기 처분된 자들이 살아 있다니?

 

"그들은 오르비스의 통제 격자가 사라진 순간, 15년간 잠들어 있던 생체 방화벽이 해제되었습니다."

 

남자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어둠 속으로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사라진 불확실한 세상을…… 그들이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 생각하십니까? 그들에게 세상은 자신들을 버린 거대한 실험실일 뿐입니다."

 

"기다려! 정체가 뭐냐! 누구의 명령으로 이걸 나한테 넘기는 거지?!"

 

우진이 소리치며 달려 나갔지만, 남자는 골목길 모퉁이 너머로 신속하게 몸을 날렸다.

 

끼익, 하는 거친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번호판이 식별되지 않는 검은 세단 한 대가 어둠을 뚫고 쏜살같이 테헤란로 방면으로 사라졌다.

 

정막이 다시 골목길을 덮쳤다.

 

가로등 불빛 아래 홀로 남겨진 우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손바닥에 쥐어진 알루미늄 케이스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도형이 사라진 세상.

 

완벽한 통제에서 벗어나 마침내 인간다운 불확실성을 되찾았다고 믿었던 그 평화의 균열 사이로, 15년 전 묻혀 있던 또 다른 비극의 파편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우진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알루미늄 케이스의 걸쇠를 젖혔다.

 

딸깍, 하는 작은 금속성 소리가 차가운 밤공기 속으로 울려 퍼졌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