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의 정적
1. 멈춰 선 테헤란로의 여명
지하 100미터 아래에서 치솟던 유황과 플라스마의 역한 냄새가 차가운 새벽 공기에 서서히 흩어지고 있었다.
역삼역 8번 출구 앞, 산산이 부서진 아스팔트 잔해 위로 주저앉은 강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먼동이 트고 있었다.
빌딩 숲 너머 동쪽 하늘에서 번져오는 빛은 핏빛도, 서늘한 푸른빛도 아닌 그저 담담하고 흐릿한 잿빛 여명이었다.
거리의 소음이 뚝 끊겨 있었다.
그것은 침묵이라기보다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과율의 톱니바퀴가 일시에 맞물림을 멈춘 뒤 찾아온 거대한 공백에 가까웠다.
우진은 무릎 위에 얹어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톱 밑에는 검붉은 핏물과 굳어버린 냉각 슬러지가 잔뜩 엉겨 붙어 있었고, 마디마디가 비명을 지르듯 욱신거렸다.
초인적인 반사 신경도, 시공간을 가르며 날아오는 총탄을 정지시키던 절대적인 척력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찢어지고 멍든 살갗, 거칠게 요동치는 맥박, 그리고 폐부 깊숙이 밀려드는 시린 공기만이 그가 살아 숨 쉬는 한 명의 나약한 인간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끝난 건가.’
우진은 천천히 오른쪽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지난 15년 동안 단 하루도 빠짐없이 뇌간을 쪼개듯 쑤셔대던 맹렬한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도형을 관찰하고, 그 궤적을 억지로 분석하려 들 때마다 뇌혈관을 태우던 타는 듯한 열기 또한 흔적도 없었다.
그저 차갑게 식어버린 4센티미터의 메마른 수술 흉터만이 손끝에 밋밋하게 만져질 뿐이었다.
그 감각이 너무나 생경해서, 우진은 한동안 손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우진 씨.”
옆에서 들려온 가쁜 숨소리에 우진은 시선을 돌렸다.
얼굴 가득 검댕을 묻힌 한서연이 무릎을 꿇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방금 전까지 전국의 독립 방송망을 쥐고 흔들던 구형 노트북과 피 묻은 외장 하드가 소중하게 안겨 있었다.
외투는 군데군데 찢겨 나가 있었고,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턱 끝에서 툭툭 떨어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만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또렷하게 우진을 마주하고 있었다.
서연의 시선이 우진의 얼굴을 더듬듯 훑어내리다 이내 조심스럽게 머리 위 허공으로 향했다.
“정말로…….”
서연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이제 진짜로 아무것도 안 보여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나 조용해서, 흩날리는 재 먼지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우진은 그녀의 질문에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서연의 머리 위, 그리고 그 너머로 뻗어 있는 테헤란로의 광활한 공간을 바라보았다.
2. 사라진 기하학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지옥의 기하학이 지배하던 공간이었다.
출근길을 재촉하는 수만 명의 직장인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던 차가운 백색 네모들.
시스템의 조작과 외압에 짓눌려 파멸을 향해 회전하던 시커먼 세모들.
그리고 하늘 높은 곳, 보이지 않는 중앙 코어로 뻗어 올라가 인간의 모든 선택과 운명을 옭아매던 수억 가닥의 칠흑빛 꼭두각시 줄선들.
그 모든 것이 시야를 어지럽히던 거대한 감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것도 없었다.
서연의 헝클어진 단발머리 위에도, 인도 바닥에 주저앉아 넋을 잃고 있는 정장 차림의 남성 위에도, 심지어 소총을 바닥에 내던진 채 헬멧을 벗어 쥐고 멍하니 서 있는 계엄군 진압대원의 정수리 위에도.
네모는 없었다.
세모도, 동그라미도, 기괴하게 맥동하던 큐브의 잔상도 없었다.
오직 맑고 차가운 새벽 공기만이 그들의 머리칼을 가만히 흩날리고 있을 뿐이었다.
“……네.”
우진의 갈라진 목소리가 메마른 입술 틈으로 흘러나왔다.
“아무것도 안 보여요.”
“정말…… 아무것도요?”
“네. 네모도, 세모도, 줄도 없습니다. 서연 씨 머리 위에도, 저 사람들의 머리 위에도…… 그저 텅 빈 하늘뿐이에요.”
우진은 말끝을 흐리며 씁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온전한 해방감인 동시에, 형언할 수 없는 기묘한 허탈감이었다.
인간을 얽매던 족쇄가 사라진 것은 축복이었으나, 15년 동안 자신의 감각을 지배하고 생존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던 세계의 규칙이 일순간에 증발해 버린 것이다.
이제는 누가 1초 뒤에 칼을 맞을지, 누가 파산하여 한강으로 향할지, 누가 내일 아침 무사히 눈을 뜰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완벽한 불확실성.
그것이 바로 인간이 되찾은 본래의 세계였다.
“다행이에요…….”
서연이 안도와 탈력이 뒤섞인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검댕을 씻어내며 하얀 길을 냈다.
“정말로 다행이에요, 우진 씨. 당신이…… 평범해져서.”
그 말에 우진의 가슴 한구석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괴물이기를 요구받았던 15년의 세월이었다.
시스템을 부수기 위해 스스로의 뇌세포를 태우고, 시신경을 갈아 넣으며 괴물이 되어야 했던 시간들.
그 끝에서 마침내 ‘평범하다’는 말을 듣게 된 순간, 억눌려 있던 뜨거운 덩어리가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올랐다.
우진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돌렸다.
그때, 찢어지는 듯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붉고 푸른 경광등을 번쩍이는 119 구급차가 함몰된 아스팔트 잔해를 아슬아슬하게 우회하며 광장 안쪽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환자 어디 있습니까! 환자분!”
형광 주황색 조끼를 입은 구급대원 서너 명이 들것과 응급처치 가방을 들고 다급하게 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의 머리 위에도 아무런 도형이 떠 있지 않았다.
그들은 시스템의 각본이나 인과율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오직 눈앞의 생명을 살려야 한다는 인간 본연의 직업의식과 연민으로, 깨진 보도블록에 발을 헛디디면서도 필사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3. 흉터 없는 시선
“여기입니다! 관통상 환자예요! 출혈이 심합니다!”
광장 한편에서 강정호 박사의 상체를 끌어안고 지혈대를 누르고 있던 박태호가 목청을 높여 외쳤다.
태호의 검은 방탄복은 이미 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우진은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아버지에게로 다가갔다.
들것이 바닥에 펼쳐지고, 구급대원들의 능숙한 손길이 강정호의 찢어진 옷가지를 가위로 잘라냈다.
어깨를 관통한 총상 부위에서 뿜어져 나오던 피는 거즈와 압박 붕대에 눌려 점차 멎어가고 있었지만, 15년 동안 냉각 챔버에 갇혀 있던 노인의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했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혈압 80에 50, 맥박이 너무 약합니다! 저체온증이 심각해요! 즉시 산소 투여하고 링거 연결해!”
구급대원이 마스크를 씌우고 수액 바늘을 혈관에 꽂아 넣는 동안, 미동도 없던 강정호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우, 진아.”
산소마스크 너머로 새어 나오는 음성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미약했다.
우진은 무릎을 꿇고 차가운 아버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뼈마디만 앙상하게 남은 손이었다.
한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통신 기술을 설계하고, 아들의 머릿속에 지옥 같은 칩을 박아 넣었으며, 끝내는 자신의 뇌와 척수를 바쳐 시스템의 폭주를 지탱해야 했던 비극의 장본인.
그 손이 지금은 어린아이처럼 떨리고 있었다.
“저 여기 있어요, 아버지.”
“……보이느냐.”
강정호의 흐릿한 눈동자가 허공을 헤매다, 마침내 우진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우진의 정수리 부근을 더듬었다.
“네 머리 위에…… 아직도 그 흉측한…… 네모가 떠 있느냐…….”
우진은 목이 메어와 잠시 숨을 삼켰다.
그리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무것도 없습니다. 완전히 사라졌어요.”
“……세모도? 허공으로 뻗은…… 검은 줄도……?”
“네. 아무것도 없어요. 아버지 머리 위에도, 제 머리 위에도……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말을 들은 강정호의 메마른 뺨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흘러내렸다.
마스크 안쪽에 뿌옇게 김이 서렸다.
“다행이구나…….”
노인의 가슴이 들썩였다.
“내가…… 너한테 지옥을 주었는데…… 내 손으로 만든 괴물이…… 내 아이의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는데…….”
“말씀하지 마세요. 수술부터 받으셔야 합니다.”
“아니다, 우진아…… 들어라. 15년 동안…… 차가운 유리벽 속에 갇혀서 매일 밤 기도했다…… 네가 그 궤도에서 벗어나기를…… 정해진 시간표대로 죽지 않고…… 네 발로, 네 의지로…… 오늘을 살아가기를…….”
강정호는 우진의 손을 부서져라 쥐려 애썼다.
비록 힘이 들어가지 않아 스러지는 낙엽 같았지만, 그 체온 속에는 15년간 응축된 속죄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환자분,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산소포화도 떨어집니다! 이동해야 합니다!”
구급대원들이 다급하게 들것을 들어 올렸다.
태호가 옆에서 들것의 한쪽 다리를 받치며 구급차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우진 형, 서연 기자님. 제가 먼저 병원으로 따라가겠습니다. 박사님 곁은 제가 지킬 테니까, 두 분은 몸부터 추스르고 오세요.”
태호의 눈빛은 단단했다.
목덜미의 생체 제어 칩이 불타버린 후, 그 역시 한 명의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자신의 길을 선택하고 있었다.
“고맙다, 태호야.”
우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호는 구급차 뒷좌석으로 뛰어올라 문을 닫았다.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구급차가 부서진 테헤란로를 가로질러 아산병원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4. 거리에 번지는 파문
구급차가 멀어지자, 광장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그것은 아까의 죽은 정적이 아니었다.
거리 곳곳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서서히 파도처럼 번져나가고 있었다.
“어? 스마트폰 켜진다!”
누군가의 날카로운 외침이 정적을 깼다.
“인터넷 연결됐어! 야, 포털 사이트 봐봐! 이게 다 뭐야?”
부서진 지하철 출구 근처에 웅크리고 있던 직장인들이 저마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화면 가득 떠오른 것은 빨간색 긴급 속보 창들이었다.
[속보] 검찰 특별수사본부 전격 설치…… ‘넥스트 큐브’ 본사 및 국가안전기획처 전산망 압수수색 돌입.
[단독] 대국민 라이프 스타일 앱 ‘미러 큐브’, 불법 알고리즘 궤도 통제 정황 포착…… 전 국민 데이터 불법 사찰.
[사회] 국무총리 긴급 담화
“데이터 특별 계엄령 즉각 해제…… 수도권 군 병력 원대 복귀 명령”
.
[특종] 15년 전 테헤란로 연구소 화재의 진실…… 은폐된 국가 권력 카르텔과 피해자 명단 공개.
스마트폰 화면의 푸르스름한 빛이 사람들의 얼굴을 어지럽게 비추었다.
사람들은 경악과 공포, 그리고 형언할 수 없는 혼란에 휩싸인 채 화면을 스크롤했다.
“우리가…… 조종당하고 있었다고?”
“내가 합격하고, 불합격하고, 승진에서 떨어진 게…… 저 프로그램 때문이었다는 거야?”
“거짓말이지? 말도 안 돼…….”
탄식과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떤 이는 머리를 감싸 쥐고 길바닥에 주저앉았고, 어떤 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스스로의 삶이라 믿었던 궤적이 타인의 손에 의해 정밀하게 재단된 거대한 가축 사육장이었다는 진실.
그 잔혹한 현실 앞에서 사람들은 자유의 환희 대신 극심한 인지 부조화와 현기증을 겪고 있었다.
그때, 찢어진 방탄복을 입은 젊은 계엄군 병사 하나가 멍하니 소총을 떨어뜨린 채 우진의 앞을 지나쳐 갔다.
그의 얼굴은 갓 스무 살을 넘긴 앳된 소년의 것이었다.
“명령이…… 취소됐대…….”
병사는 허공을 올려다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복귀하래. 근데…… 어디로 가야 하지? 내일부터 난 뭘 해야 하는 거지?”
그의 눈동자에는 텅 빈 공포가 서려 있었다.
누군가 가리켜주는 방향대로 걷고, 국가가 내려주는 명령에 따라 방아쇠를 당기던 삶의 규격이 사라지자,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선택의 바다 앞에서 길을 잃은 것이다.
서지훈이 죽어가며 내뱉었던 저주가 귓전을 스쳤다.
‘인간은 자유를 감당하지 못한다. 정해진 네모가 사라지면, 스스로의 무력함에 질식해 괴물이 될 뿐이야.’
우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서지훈의 말은 절반은 맞았고, 절반은 틀렸다.
인간은 나약하다.
정해진 궤도가 사라진 순간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고, 때로는 차라리 족쇄를 채워달라며 울부짖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과정일 뿐이다.
두 발로 서서 걷는 법을 배우기 위해 수천 번을 넘어지고 무릎을 깨뜨려야 하듯,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불확실성의 고통을 온몸으로 견뎌내야만 하는 것이다.
“서연 씨.”
우진이 나직하게 불렀다.
노트북을 든 채 묵묵히 거리를 바라보던 한서연이 고개를 돌렸다.
“후회하지 않습니까?”
우진의 물음에 서연은 잠시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흩날리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엷게 웃었다.
“저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거요?”
“네. 어쩌면…… 서지훈의 말대로 세상은 더 시끄럽고, 더 불행해질지도 모릅니다. 실패할 자유라는 건, 그만큼 상처받을 위험을 떠안는 거니까요.”
“우진 씨.”
서연이 그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그녀의 손이 우진의 거칠어진 손등 위에 조용히 얹혔다.
온기가 전해져 왔다.
“넘어질 수 있어야 일어설 수도 있는 거예요. 저 사람들이 지금 두려워하는 건, 난생처음으로 진짜 자신의 삶을 마주했기 때문이에요. 대본이 사라진 무대 위에 선 배우처럼요.”
서연의 시선이 테헤란로의 빌딩 숲을 향했다.
“혼란스럽겠죠. 싸우고, 원망하고, 때로는 과거의 네모를 그리워할지도 몰라요.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누군가 다른 사람의 불행을 담보로 가짜 평화를 누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우린 싸울 가치가 있었어요.”
기자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그녀가 품어온 신념이 그 목소리에 묵직하게 실려 있었다.
우진은 그녀의 손을 가만히 맞잡았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서로의 체온만이 유일한 진실처럼 느껴졌다.
치지지직―.
그때, 서연의 외투 주머니에서 거친 노이즈와 함께 아날로그 단파 무전기가 울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주머니로 쏠렸다.
5. 파주의 바람, 서울의 아침
서연이 황급히 무전기를 꺼내 안테나를 뽑아 올렸다.
주파수 다이얼은 144.820MHz에 고정되어 있었다.
“……서연 언니? 우진 오빠……? 들려요? 제발 대답 좀 해봐요!”
스피커를 찢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울음에 젖어 헐떡이고 있었다.
윤채린이었다.
우진이 서연의 손에서 무전기를 낚아채듯 받아들고 송신 버튼을 눌렀다.
“채린아! 나다, 우진이다! 무사한 거냐?”
“……오빠!”
스피커 너머에서 흑, 하는 거친 오열이 터져 나왔다.
한동안 말도 잇지 못하고 흐느끼던 채린이 간신히 숨을 골랐다.
“오빠…… 살아 있었구나…… 진짜 살아 있었어…….”
“상황은 어떻게 됐어? 파주 벙커는?”
“끝났어요…… 다 끝났어요.”
채린의 떨리는 목소리 뒤편으로 거센 바람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방폭문을 부수려던 특임대 놈들이…… 갑자기 무전을 받더니 장비를 챙겨서 도망치듯 철수했어요. 탱크도, 장갑차도 전부 남쪽으로 빠져나갔어요. 송민규 씨랑 부소장님이 밸브를 열고 날 꺼내줬어요.”
채린이 옥상 난간을 붙잡고 있는지 쇠붙이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지금…… 공장 옥상에 올라와 있어요. 언니, 오빠…… 여기 하늘이…….”
채린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하늘이 너무 맑아요. 내 머리 위에서도…… 은빛 동그라미가 완전히 사라졌어요. 아무것도 안 맴돌아요. 가슴이…… 하나도 안 아파요.”
우진은 안도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채린의 머리 위에서 빛나던 그 아름답고도 시린 은빛 동그라미.
시스템의 억압에 맞서기 위해 홀로 고립된 채 뿜어내던 그 절대 척력의 흔적이, 마침내 그녀의 가련한 어깨에서 짐을 내려놓은 것이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위험을 감지하는 레이더도, 인과율의 사각지대를 여는 열쇠도 아니었다.
그저 교복을 입고 거리를 거닐며, 친구들과 떡볶이를 먹고 내일의 시험을 걱정해야 할 평범한 열여덟 살 소녀로 돌아간 것이다.
“다행이다, 채린아. 정말 다행이야.”
우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오빠…… 아저씨는요? 강정호 박사님은…… 구했어요?”
“그래. 총상을 입으셨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지금 태호랑 같이 아산병원으로 이송 중이다. 우리도 곧 그리로 갈 거야.”
“나도…… 나도 갈래요. 민규 씨 차 타고 지금 바로 서울로 출발할게요. 병원에서 만나요, 꼭이요!”
“그래. 조심해서 와라.”
통신이 끊어지고 무전기에서는 다시 백색 잡음만이 지직거렸다.
우진은 무전기를 가만히 가슴에 품었다.
파주의 낡은 염색 공장 옥상에서 차가운 북풍을 맞으며 서 있을 채린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졌다.
모두가 살아남았다.
수없이 피를 흘리고, 뼈가 부러지고, 영혼이 찢겨 나가는 사투를 벌였지만, 끝내 아무도 잃지 않고 이 아침을 맞이한 것이다.
“우진 씨, 이것 좀 보세요.”
서연이 노트북 화면을 우진의 눈앞으로 돌려세웠다.
화면 속에는 YTN과 지상파 뉴스 특보가 실시간 라이브로 중계되고 있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앵커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지만, 단호한 어조로 성명서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방금 들어온 소식입니다. 검찰 특수수사본부는 오늘 새벽 발생한 테헤란로 지하 통신망 붕괴 및 전산 조작 사태의 배후로 지목된 넥스트 큐브의 잔존 임원진 14명에 대해 전원 출국금지 조치를 내리고 긴급 체포영장을 청구했습니다.”
화면이 전환되며 서초동 검찰청 앞의 분주한 모습이 비쳤다.
“또한 이번 사태에 깊숙이 결탁한 것으로 드러난 국가안전기획처 민경택 차장을 비롯한 고위 간부 6명에 대해서도 내란 및 직권남용 혐의로 강제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정부는 이번 사태를 ‘알고리즘을 이용한 반헌법적 국민 기본권 침해 범죄’로 규정하고…….”
서연이 키보드를 두드리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제 시작이네요.”
그녀의 눈빛은 이미 기자의 것으로 돌아와 있었다.
“시스템은 부서졌지만, 그 시스템에 기생해서 권력을 누렸던 인간들은 여전히 남아 있어요. 그들이 법의 심판을 받고, 세상에 모든 진실이 한 글자의 누락도 없이 기록될 때까지…… 제 싸움도 끝나지 않겠죠.”
“도울 수 있는 건 돕겠습니다.”
우진이 담담하게 말했다.
“저 역시 그 사기극의 한가운데 서 있던 증인이니까요.”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북을 접었다.
그녀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아침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였다.
6. 백색의 정적
완전히 떠오른 태양이 테헤란로의 빌딩 숲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유리벽마다 쏟아지는 눈부신 반사광 속에서, 부서진 역삼역 광장은 새로운 하루를 맞이하고 있었다.
웅성거리던 군중들은 점차 무리를 지어 흩어지기 시작했다.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울먹이며 안부를 묻는 사람.
계엄군 장갑차 바퀴 옆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를 나눠 피우는 시민과 군인.
신호등이 꺼져 뒤엉킨 교차로에서 스스로 호루라기를 불며 교통정리를 시작하는 모범운전자.
혼란은 여전했고, 질서는 깨져 있었다.
하지만 그 무질서 속에서 꿈틀거리는 것은 기계의 법칙이 아닌, 살아있는 인간들의 온기였다.
누군가 강요하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꼭두각시 줄이 잡아당기지 않아도, 인간은 스스로 상처를 보듬고 길을 찾아 나아가고 있었다.
우진은 코트를 여미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잘게 부서진 유리 파편과 콘크리트 가루가 사각거리며 밟혔다.
그는 역삼역 8번 출구 앞, 15일 전 자신이 처음으로 대기업 임원의 머리 위에 뜬 붉은 세모와 3분 일찍 송고된 사망 기사를 목격했던 바로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던 장소.
그날 밤의 우진은 평범한 대기업 대리였고, 정해진 네모의 궤도 속에서 쳇바퀴를 돌리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무기력한 부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비록 능력은 사라졌고, 몸은 상처투성이였지만, 그의 두 발은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대지를 딛고 서 있었다.
우진은 고개를 들어 테헤란로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리처럼 맑고 시리도록 투명한 푸른 하늘.
그 어떤 기하학적 도형도, 붉은 에러 코드도, 검은 통제의 그물망도 없는 완벽한 백색의 공간.
문득 서연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이제 진짜로 아무것도 안 보여요?’
우진은 가슴 깊은 곳에서 차오르는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하얀 입김이 허공으로 피어올라 아침 햇살 속으로 부드럽게 흩어졌다.
‘그래, 서연 씨.’
우진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답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더 이상 1초 뒤에 닥쳐올 비극을 경고하는 붉은 세모는 없다.
안온하지만 숨 막히는 일상을 강요하는 백색 네모도 없다.
앞으로 펼쳐질 내일이 축복일지, 재앙일지, 혹은 견딜 수 없이 평범한 하루일지 그 누구도 미리 알려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기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세계는 아름다운 것이다.
정해지지 않았기에 꿈꿀 수 있고, 쓰러질 수 있기에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백색의 정적.
그것은 침묵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써 내려가야 할 무한한 백지(白紙)였다.
“가요, 우진 씨.”
서연이 옆에 서서 그를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세요.”
우진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거친 아스팔트를 딛고 걷는 두 사람의 발걸음 뒤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아침 햇살을 받아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었다.
완벽한 자유의 첫날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