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하는 도형들
1. 지상의 공기
쿵, 하는 둔탁한 진동과 함께 등 뒤에서 지하의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지하 100미터 심연에서부터 솟구쳐 오른 검은 분진과 유황 냄새 섞인 백색 증기가 찌그러진 맨홀 틈새로 미친 듯이 뿜어져 나왔다.
강우진은 아스팔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폐포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차가운 새벽 공기가 목구멍을 긁어내렸다.
지하 벙커의 인공적인 무균 질소 냄새가 아니었다.
매캐한 자동차 배기가스와 축축한 아침 안개, 그리고 덜 마른 테헤란로의 아스팔트 냄새가 뒤섞인, 지극히 불완전하고 날것 그대로인 지상의 공기였다.
우진의 등 뒤에 매달려 있던 강정호의 고개가 힘없이 우진의 어깨 위로 꺾여 있었다.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지상이에요. 다 빠져나왔습니다."
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슬링 벨트를 풀었다.
어깨를 관통당한 강정호의 낡은 방한 점퍼는 이미 검붉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거친 콘크리트 바닥에 조심스럽게 아버지를 눕히는 우진의 양팔이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덜덜 떨렸다.
이능이 사라진 육체는 그저 한계까지 혹사당한 평범한 서른두 살 남자의 살덩이에 불과했다.
뼈마디마다 불로 지지는 듯한 근육통이 비명을 질렀고, 손톱 밑은 깨지고 터져 피고름이 엉겨 붙어 있었다.
"박사님! 박사님, 제 목소리 들리십니까?"
옆에 쓰러져 있던 박태호가 기어가듯 다가와 강정호의 목덜미 맥박을 짚었다.
태호의 얼굴 역시 그을음과 피투성이였지만, 그의 두 눈에는 지하의 암흑 속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생생한 생기가 깃들어 있었다.
"맥박이…… 지나치게 약합니다. 과다 출혈에 저체온증까지 겹쳤어요. 지혈대를 더 강하게 조여야 합니다."
한서연이 숨을 헐떡이며 자신의 겉옷을 벗어 찢어발겼다.
손가락이 피범벅이 된 채로 강정호의 어깨 총상 부위를 짓누르는 서연의 눈가에 눈물이 범벅되어 흘러내렸다.
"조금만 버티세요, 교수님. 우리가 이겼어요. 코어도, 그 망할 시스템도 전부 박살 냈다고요……!"
서연의 떨리는 목소리가 테헤란로의 차가운 정적 속으로 흩어졌다.
우진은 거칠게 숨을 고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역삼역 8번 출구 앞.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정해진 궤도를 따라 백색 네모를 띄운 수만 명의 직장인들이 기계처럼 오가던 바로 그 광장이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기괴할 정도의 정적과 혼란이 뒤엉킨 비현실적인 화폭이었다.
2. 신기루의 붕괴
광장 한복판에는 시동이 꺼진 경찰 버스와 군용 장갑차 서너 대가 길을 막아선 채 방치되어 있었다.
진압 방패와 소총을 든 채 대오를 갖추고 있던 계엄군 병사들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헬멧을 벗어 쥐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도로변에 늘어선 수십 대의 대형 옥외 전광판을 향해 굳어 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붉은 에러 메시지와 함께 넥스트 큐브의 추악한 궤도 조작 실태를 송출하던 전광판들은, 이제 새하얀 정전기 노이즈만을 뿜어내며 치지직거리는 잡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백 명의 시민들이 아스팔트 도로 위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새벽 출근길을 서두르다 발이 묶인 회사원들, 계엄군의 바리케이드를 피해 웅크리고 있던 상인들, 그리고 스마트폰을 쥔 채 얼어붙은 청년들.
그 수많은 군중의 머리 위를 본 순간, 우진의 호흡이 멎었다.
그것은 서서히 일어난 변화가 아니었다.
오르비스 코어가 완전히 멈추고 지상의 지하 벙커가 무너져 내린 그 찰나의 순간, 거대한 법칙의 기둥이 부러지듯 일어난 급격한 단절이었다.
한 시민의 머리 위 10센티미터 상공에 불안하게 떠돌던 백색 네모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직사각형의 네 꼭짓점을 이루던 단단한 빛의 선들이 마치 유리창에 성에가 끼듯 부옇게 흐려졌다.
그 뒤를 이어 그들을 하늘 저편 보이지 않는 허공과 연결하고 있던 검은 실선 잔상, 그 지긋지긋하던 꼭두각시 줄들이 맥없이 뚝, 뚝 끊어져 나갔다.
파스스.
소리조차 없는 붕괴였다.
공중에 떠 있던 기하학적 도형들이 가장자리부터 미세한 빛의 분말로 부서져 내렸다.
어떤 것은 타원형으로 일그러지며 허공 속으로 녹아들었고, 어떤 것은 꼭짓점부터 바스러지며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한 청년의 머리 위에 위태롭게 회전하던 세모꼴의 위기 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음과 사회적 파멸을 예고하며 붉게 물들어가던 그 흉측한 각도들이, 마치 신기루가 바람에 흩날리듯 일순간에 흩어져 허공의 먼지로 화했다.
"어……?"
군중 속 누군가가 멍하니 자신의 머리 위 허공을 손으로 더듬었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그들의 뇌간을 짓누르고, 선택을 강요하며, 언제 닥칠지 모르는 파멸의 공포로 삶을 통제하던 보이지 않는 사각의 틀이 완전히 지워지고 있었다.
우진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야를 채우고 있던 무수한 기하학체들이 지워져 나갔다.
수백 개, 수천 개, 아니 수만 개의 네모와 세모들이 동시에 빛을 잃고 사그라지는 광경은 마치 칠흑 같은 밤하늘에 떠 있던 인공위성들이 일제히 추락해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
태호의 머리 위도 깨끗했다.
서연의 머리 위도 맑았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채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강정호의 정수리 위에도, 그 어떤 기하학적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세상이 완전히 비워졌다.
3. 프레임 너머의 세계
우진은 자신의 손바닥을 들어 올려 얼굴 앞에 가져다 대었다.
어릴 적부터 그의 시야를 끈질기게 가로막고 있던 반투명한 인터페이스의 잔상.
타인의 행동을 0.3초 전에 예측하려 들 때마다 망막 가장자리를 옥죄어 오던 푸른색 궤적선들.
그 모든 감각의 노이즈가 단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관자놀이에 깊게 파인 4센티미터의 수술 흉터를 손가락 끝으로 짚었다.
늘 차가운 송곳으로 뇌수를 후벼 파는 것 같던 편두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안압을 터뜨릴 듯 치솟던 맹렬한 발열도, 시신경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던 기괴한 압박감도 없었다.
그저 차가운 새벽바람이 흉터의 메마른 살갗을 스치며 남기는 생생한 감촉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우진 씨…… 저것 봐요."
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우진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광장 맞은편, 거대한 유리 통창으로 마감된 은행 빌딩의 1층 로비였다.
항상 스마트폰의 '미러 큐브' 화면을 들여다보며 추천 동선대로 발걸음을 옮기던 사람들이 멍하니 멈춰 서 있었다.
한 중년 남성이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액정 속에는 푸른색 육면체 로고 대신, [서비스에 접속할 수 없습니다.
네트워크 연결이 영구 차단되었습니다]라는 단조로운 텍스트만이 깜빡이고 있었다.
남자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쥐어뜯었다.
"어제…… 어제 분명 오늘 오전 9시에 계약을 체결하라고 알림이 떴는데…… 내 하루 일정이…… 왜 아무것도 안 뜨는 거야?"
그의 목소리는 혼란과 공포로 가득 차 있었다.
수년간 인공지능이 지정해 준 최적의 경로와 시간표에 맞춰 살아온 그들에게, 정해진 선택지가 사라진 첫 번째 아침은 축복이 아니라 거대한 미지의 심연처럼 다가온 것이었다.
군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무전기에서는 아무런 지휘 명령도 내려오지 않고 있었다.
중앙 통제 서버와의 링크가 끊긴 통신병은 헤드셋을 벗어 던진 채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군가는 공포에 질려 울먹였고, 누군가는 망연자실하게 거리를 서성였다.
하지만 그 혼란의 이면에서, 기이한 침묵이 도시를 감싸 안기 시작했다.
더 이상 도로 위에서 신호가 조작되어 사람을 덮치는 덤프트럭은 없었다.
정치적 희생양을 만들기 위해 사전에 예약된 파멸의 속보도 뜨지 않았다.
누군가의 성공을 위해 무고한 소시민에게 검은 세모를 강제로 할당하던 잔혹한 엔트로피의 착취가 마침내 멈춘 것이다.
"이게…… 우리가 되찾은 세상이군요."
박태호가 피 묻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와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이 묻어나고 있었다.
"정해진 미래가 없는 세상…… 정말로 아무것도 없네요. 아무것도."
"그래.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아."
우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시선이 테헤란로의 빌딩 숲 너머, 동쪽 하늘로 향했다.
잿빛 구름이 걷히며 짙푸른 새벽의 어둠을 가르고 붉고 찬란한 여명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4. 부자의 호흡
치지직, 칙.
서연의 허리춤에 걸려 있던 아날로그 단파 무전기에서 거친 잡음이 터져 나왔다.
144.820MHz.
모든 디지털 전산망이 마비된 도시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날로그 주파수였다.
"……서연 언니? 우진 오빠……! 들려요? 제 목소리 들려요?"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윤채린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왈칵 울음을 터뜨리는 채린의 목소리가 테헤란로의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생생하게 울려 퍼졌다.
서연이 떨리는 손으로 무전기 송신 버튼을 눌렀다.
"채린아! 채린아, 너 무사한 거니? 파주는…… 거기는 어떻게 됐어?"
"살았어요…… 계엄군들이…… 벙커 문을 부수려던 군인들이 갑자기 전부 멈췄어요. 소총을 내려놓고…… 다들 그냥 멍하니 하늘만 쳐다보고 있어요. 서울에서…… 진짜 해낸 거죠? 오빠들이 해낸 거죠?"
채린의 울음 섞인 목소리에 서연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그래. 해냈어. 코어가 완전히 무너졌어. 서지훈도…… 그 끔찍한 시스템도 전부 끝났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우진 오빠는요? 오빠 다친 데는 없어요?"
우진이 서연의 손에서 무전기를 건네받았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며, 우진은 차분하게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갔다.
"채린아, 나 여기 있어."
"오빠……!"
"너 덕분이야. 네가 시간을 벌어주지 않았으면 우리 전부 지하에 묻혔을 거야."
"아니에요, 오빠가 살린 거예요. 우리 모두를……"
채린의 목소리 뒤편으로 파주의 아침 바람 소리와 새소리가 아스라이 섞여 들려왔다.
도시를 옥죄던 인위적인 사각 격자 돔이 걷히고, 자연의 소리가 다시 대지를 채우기 시작한 증거였다.
그때, 우진의 무릎 곁에서 거친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커럭…… 쿨럭!"
강정호의 가슴이 가쁘게 오르내리며 검붉은 피거품이 입술 사이로 번졌다.
우진은 황급히 무전기를 내려놓고 아버지를 품에 안아 올렸다.
"아버지! 정신이 드세요?"
강정호의 초점 잃은 눈동자가 천천히 흔들렸다.
15년간 차가운 액체 챔버 속에서 기계의 부품으로 착취당하던 노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하지만 그 흐릿한 시선이 마침내 우진의 얼굴을 온전히 포착했다.
"우…… 진아……"
말라붙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바람결처럼 가늘었다.
강정호의 피투성이가 된 메마른 손이 허공을 더듬었다.
우진은 망설임 없이 아버지의 손을 꽉 쥐었다.
거칠고 상처투성이인 노인의 손등에서 희미한 온기가 전해져 왔다.
"보이느냐……?"
강정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네 머리 위에…… 사람들의 머리 위에…… 아직도 그 흉측한 것들이…… 보이느냐……?"
그것은 아버지가 지난 15년 동안 챔버의 심연 속에서 매일같이 자신을 질책하며 던졌을 고통스러운 참회의 질문이었다.
자신의 손으로 아들의 관자놀이를 째고, 평생을 편두통과 왜곡된 시각의 지옥 속에 가두어 두었다는 죄책감.
그 죄책감이 노인의 야윈 턱을 타고 흐르는 눈물 속에 녹아내리고 있었다.
우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확고했다.
"아니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아버지."
우진은 아버지의 손을 자신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었다.
상처 입은 살갗 너머로 뛰는 맥박은 이제 평범한 한 인간의 맥박에 불과했다.
"네모도, 세모도…… 꼭두각시 줄도 전부 사라졌어요. 아버지가 만드셨던 그 모든 굴레가…… 전부 부서졌다고요."
강정호의 눈동자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15년간 응어려져 있던 피눈물이자, 마침내 죄업의 사슬을 끊어낸 자의 벅찬 해방감이었다.
"다행이구나…… 참으로 다행이야…… 내 아들이…… 이제야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었으니……"
"말씀하지 마세요. 숨 가빠집니다. 서연 씨, 119는 아직 불통인가요?"
우진이 고개를 돌려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은 전파가 끊긴 스마트폰을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기간망이 완전히 쇼트돼서 긴급 전화도 먹통이에요. 하지만 저기…… 저기 소방서 구급차가 보여요!"
서연이 가리킨 곳은 테헤란로 사거리 건너편이었다.
사이렌 소리는 울리지 않았지만, 경광등을 깜빡이며 멈춰 서 있던 119 구급차 한 대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중앙 관제망의 지령이 끊기자, 현장의 구급대원들이 직접 눈으로 부상자들을 확인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태호야, 나 좀 도와줘!"
우진이 외쳤다.
"네, 형님!"
태호가 달려와 강정호의 다리를 받쳐 들었고, 우진은 아버지의 상체를 단단히 안아 들었다.
초인적인 근력은 사라졌기에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 무게는 결코 감당하지 못할 짐이 아니었다.
살아 숨 쉬는 아버지의 육신, 인간다운 삶의 무게였다.
5. 첫 번째 아침
광장을 가로질러 아스팔트를 내딛는 우진의 발걸음마다 서걱거리는 유리 파편과 콘크리트 가루가 밟혔다.
주변에 웅크리고 있던 시민들이 우진 일행을 바라보았다.
피투성이가 된 노인을 업고 필사적으로 달리는 청년들.
그들을 향해 누구도 손가락질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길을 막고 있던 한 청년이 다가와 깨진 바리케이드 잔해를 옆으로 치워주었다.
"이쪽으로 가세요! 저 앞길은 뚫려 있습니다!"
시스템의 지시도, 알고리즘의 보상도 없는 순수한 인간의 호의였다.
우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 청년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의 머리 위에는 어떤 표식도 없었다.
그가 착한 사람인지, 악한 사람인지, 내일 성공할지 실패할지 알 수 있는 기하학적 코드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부상자를 돕기 위해 손을 내민 불완전하고도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만이 있을 뿐이었다.
"구급대원님! 여기 총상 환자입니다! 과다 출혈이에요!"
서연이 먼저 달려가 구급차의 뒷문을 두드렸다.
당황한 표정으로 차에서 내린 구급대원이 피투성이가 된 강정호를 발견하고는 사색이 되어 들것을 끌어내렸다.
"총상이라고요? 대체 테헤란로에서 무슨 일이…… 아, 아닙니다. 일단 눕히세요! 어깨 관통상에 혈압이 60까지 떨어졌습니다!"
익숙하고 신속한 손길로 구급대원들이 강정호에게 산소마스크를 씌우고 수액 라인을 잡기 시작했다.
들것에 실려 구급차 안으로 들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며, 우진은 마침내 무릎의 힘이 풀려 구급차 범퍼에 주저앉았다.
온몸을 짓누르던 극도의 긴장감이 일시에 풀리며 참을 수 없는 탈력감이 밀려왔다.
서연이 우진의 곁에 다가와 조용히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서연의 눈가에 맺힌 눈물 속으로 아침 햇살이 투명하게 부서져 내렸다.
"끝났네요, 우진 씨."
"네. 끝났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전산망도 마비됐고, 뉴스도 안 나오고…… 세상이 온통 뒤죽박죽인데."
서연의 말대로였다.
거리는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국가 권력 카르텔이 저지른 참상의 잔해는 테헤란로 곳곳에 흉물스럽게 널려 있었다.
내일 당장 어떤 사회적 후폭풍이 몰아칠지, 무너진 인프라를 복구하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우진의 입가에는 15년 만에 처음으로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높은 빌딩 숲 사이로 드러난 서울의 가을 하늘은 그 어떤 결점도 없이 맑고 푸르렀다.
보이지 않는 사각 격자망도, 붉은 경보도, 영혼을 옭아매던 꼭두각시 줄선도 없었다.
오직 바람에 실려 흘러가는 하얀 뭉게구름만이 자유롭게 유영하고 있었다.
"어떻게 될지는…… 이제부터 우리가 직접 만들어가야죠."
우진이 말했다.
"정해진 정답도 없고,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진짜 삶이니까요."
서연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급차의 문이 닫히고, 사이렌 대신 거친 엔진음을 울리며 차가 가장 가까운 대학병원을 향해 서서히 출발했다.
우진과 서연, 태호는 차창 너머로 멀어져 가는 구급차를 지켜보며 나란히 섰다.
광장의 시계탑은 8시 정각을 가리킨 채 멈춰 있었지만, 시간은 결코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인간의 의지와 선택으로 직조될, 완전한 자유의 첫 번째 날이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6. 낯선 시선
구급차가 멀어지고 광장의 혼란이 잦아들 무렵, 우진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주변을 다시 둘러보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느껴지던 이질감이 완벽하게 소멸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실감 났다.
지난 15년 동안 우진에게 세상은 온통 '해석해야 할 기하학적 암호'였다.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사람들의 머리 위로 솟구치던 백색 네모의 군단.
사망 사고를 앞두고 회전하던 핏빛 세모.
그리고 배후에서 그들을 조종하던 검은 실선의 궤적들.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걷혀 나간 세상은, 지독할 정도로 고요하고 낯설었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태호가 우진의 곁으로 다가와 생수 한 병을 건넸다.
인근 편의점 주인이 거리로 나와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던 물이었다.
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페트병 뚜껑을 따고 차가운 물을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물의 감촉이 너무나 선명해서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태호야, 넌…… 머리가 아프진 않니?"
태호가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목덜미가 뻐근하긴 합니다. 나노 전극이 완전히 타버렸으니까요. 하지만…… 머릿속을 갉아먹던 그 차가운 기계음 같은 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내 생각이 내 생각 같지 않던 그 끔찍한 기분이…… 이제 안 들어요."
태호는 자신의 가슴을 툭툭 쳤다.
"이제 제 심장은 그냥 제 의지로 뜁니다. 시스템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요."
"그래. 그거면 된 거다."
우진이 태호의 어깨를 툭 쳤다.
피실험자로 끌려가 평생을 병기로 살아왔던 청년의 얼굴에, 마침내 나이에 걸맞은 풋풋한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때, 광장 한구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장을 입은 한 무리의 직장인들이 스마트폰을 허공으로 치켜들고 있었다.
"신호 잡힌다! 기지국 복구됐나 봐!"
"인터넷 돼요? 뉴스 떠요?"
"잠깐만요, 로딩이…… 어, 뜬다!"
사람들이 일제히 한 사람의 스마트폰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서연과 우진, 태호 역시 본능적으로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작은 스마트폰 화면 속에는 주요 포털 사이트의 메인 화면이 떠오르고 있었다.
검열과 통제로 가로막혀 있던 언론의 빗장이 마침내 풀린 것이었다.
화면 가득 붉은색 특종 속보가 줄을 잇고 있었다.
[속보] '국가 라이프 플래너' 배후 거대 사학 카르텔 실체 폭로…… 전국 충격
[단독] 넥스트 큐브-국가안전기획처 결탁 문건 전면 유출…… 검찰 특별수사본부 구성
[현장] 계엄사령부, 계엄령 해제 및 부대 복귀 공식 선언
[사회] '미러 큐브' 전국 동시 다운…… 알고리즘 궤도 조작 피해자 모임 결성 조짐
화면을 들여다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경악과 분노, 그리고 탄식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왔다.
"이게…… 이게 다 진짜였어?"
"우리가 앱에서 추천받아서 샀던 펀드도, 취업 떨어진 것도…… 전부 저놈들이 조작한 거였다고?"
"미친놈들…… 사람 목숨을 가지고 장난을 쳤다는 거잖아!"
진실을 마주한 대중의 반응은 폭풍처럼 거세게 번져 나가고 있었다.
서지훈이 경고했던 '불확실성의 공포'는 분명 존재했지만, 인간은 결코 그 공포 앞에 영원히 굴복하는 가축이 아니었다.
진실을 깨달은 인간은 분노했고, 그 분노는 스스로의 삶을 되찾겠다는 강력한 의지로 전환되고 있었다.
서연이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이제 시작이네요. 감추어졌던 모든 비리와 조작들이 법의 심판대 위에 오를 거예요."
"서연 씨가 써 내려간 기사가 그 시작이었습니다."
우진이 서연을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서연은 붉어진 눈시울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우진 씨가 그 궤도를 끊어내지 않았다면 전 아무것도 알리지 못했을 거예요.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든 결과예요."
바람이 불어와 세 사람의 흐트러진 옷자락을 흔들었다.
테헤란로 아스팔트 바닥에 남아 있던 짙은 화약 냄새도 아침 바람에 서서히 씻겨 나가고 있었다.
7. 새로운 궤적
우진은 문득 자신의 가슴 안주머니를 만져보았다.
단단한 플라스틱 케이스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15년 전 아버지가 연구소에서 가지고 나왔던 그 낡은 하드커버 연구 노트.
세상을 지배하던 사각 격자망의 수학적 모식도가 빼곡하게 적혀 있던 그 노트는, 이제 지나간 과거의 유물이 되어 있었다.
우진은 주머니에서 노트를 꺼냈다.
가장자리가 불에 그을리고 피가 묻은 가죽 표지.
노트를 펼치자, 아버지가 떨리는 필체로 적어두었던 첫 장의 글귀가 우진의 눈에 들어왔다.
[인간의 삶은 닫힌 사각형이 아니며, 강요된 삼각형도 아니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유일한 궤도는, 끝없이 바깥으로 팽창하며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의 원환이다.]
우진은 조용히 노트를 덮었다.
아버지는 15년 동안 죄책감의 감옥 속에서 이 글귀를 곱씹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 그 글귀는 책장 속의 문장이 아니라 테헤란로의 거리 위에 살아 숨 쉬는 현실이 되었다.
"형님, 앞으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태호가 우진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우진은 잠시 발밑의 아스팔트를 내려다보았다.
6년 동안 넥스트 큐브의 계열사인 태성C&I에서 성실한 회사원으로 일해 왔던 시간들.
매일 아침 2호선 지하철에 몸을 싣고, 머리 위에 뜬 네모를 보며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평범한 대리 강우진의 삶.
그 모든 일상이 거짓된 각본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느꼈던 배신감과 허탈감.
하지만 이제 그 각본은 완전히 찢겨 나갔다.
회사로 돌아갈 일은 없을 것이다.
태성C&I 역시 넥스트 큐브의 위장 계열사로서 전면적인 압수수색과 해체 수순을 밟게 될 테니까.
"글쎄다."
우진이 가볍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선은 아버지 병간호부터 해야겠지. 수술이 잘 끝나야 할 텐데."
"박사님은 강하신 분입니다. 15년의 지옥도 버텨내셨잖아요. 반드시 회복하실 겁니다."
서연이 따뜻한 눈빛으로 거들었다.
"그리고…… 파주로 가봐야지. 채린이도 만나고, 민규 씨랑 부소장님도 봐야 하고."
"좋네요. 파주의 옥상에서 다 같이 모여서, 따뜻한 밥 한 끼 먹어요. 이번엔 차가운 전투식량 말고, 진짜 갓 지은 밥으로요."
서연의 소박한 제안에 우진과 태호의 얼굴에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그것은 너무나 사소해서 이전에는 한 번도 특별하다고 느껴본 적 없던, 평범한 일상의 행복이었다.
그 일상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던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시스템의 차가운 톱니바퀴에 갈려 나가며 희생되었던가.
민도현, 민성훈, 그리고 15년 전 연구소에서 사라져 간 수많은 아이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도, 살아남은 이들은 이 불완전하고 자유로운 세상을 온 힘을 다해 살아가야 했다.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다시 한번 광장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웅성거리며 대책을 논의하는 이들.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무사함을 알리며 눈물짓는 이들.
깨진 유리창을 치우기 위해 빗자루를 들고나온 상인들.
그 어떤 수식으로도 정의할 수 없고, 그 어떤 슈퍼컴퓨터로도 예측할 수 없는 무수한 감정과 의지들이 거리 위에서 역동적으로 부딪치고 있었다.
더 이상 머리 위에 떠 있는 도형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인간은 누군가 그려준 틀 안에 갇혀 있을 때 안전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헤매고 부딪치며 나아갈 때 비로소 살아있는 존재였다.
"가자."
우진이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병원으로 가자. 아버지가 눈을 떴을 때, 곁에 있어 드려야지."
서연과 태호가 그 뒤를 따랐다.
테헤란로의 아침 햇살이 세 사람의 등 뒤로 길고 따스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 그림자는 사각형도, 삼각형도 아닌, 오직 살아있는 인간 본연의 자유로운 형상을 하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족쇄가 부서져 내린 그 자리에, 완전히 새로운 하루가 찬란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