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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84화

탈출의 사투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붕괴의 서곡

 

쿠구구구궁!

 

지반 전체가 뒤틀리며 토해내는 굉음은 단순한 진동이 아니었다.

 

15년 동안 거대한 거짓을 지탱해 온 콘크리트와 철골이 한꺼번에 으스러지는 비명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고압 배관들이 연쇄적으로 터져 나가며 영하 40도의 차가운 액체 질소와 맹렬한 수증기를 사방으로 뿜어냈다.

 

시야는 순식간에 하얗게 짓이겨졌다.

 

"우진아! 여기서 지체하면 10초도 못 버텨!"

 

한서연이 기침을 토하며 부서진 콘솔 모서리를 짚고 일어섰다.

 

그녀의 손등은 날카로운 파편에 찢겨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오직 한 사람, 바닥에 쓰러져 밭은 숨을 몰아쉬는 강정호 박사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쿨럭…… 우진, 아…… 나를 두고 가라……."

 

강정호 박사가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달싹였다.

 

서지훈이 쏜 9밀리 총탄에 관통당한 왼쪽 어깨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바닥의 차가운 냉각 슬러지와 뒤섞여 검붉게 번져 나갔다.

 

두 다리는 이미 15년 전의 잔혹한 고문으로 신경이 끊겨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호흡은 가쁘게 헐떡였고, 초점 잃은 눈동자는 천장에서 쏟아지는 자갈과 시멘트 가루 속에서 아들을 필사적으로 밀어내려 하고 있었다.

 

"이미 시스템의 전원은 차단했다…… 연산식은 소각되었어…… 내 역할은 끝났다…… 너희라도 어서……."

 

강우진은 대답 대신 무릎을 꿇었다.

 

도형 관찰 능력도, 탄도를 비틀던 절대 척력도 사라진 평범한 인간의 육체였다.

 

온몸의 근육은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관자놀이의 4센티미터 수술 흉터는 뇌신경 역류의 여파로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는 아버지의 마른 상체를 거칠게 끌어당겨 자신의 등 뒤로 둘러멨다.

 

"15년을 기다렸습니다."

 

우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지만, 쇠붙이처럼 단단했다.

 

"겨우 여기서 당신을 버리고 나가려고 그 지옥을 기어 올라온 줄 아십니까."

 

"우진아……!"

 

"입 다물고 꽉 잡으세요. 떨어지면 진짜 죽습니다."

 

우진은 찢어진 군용 슬링 벨트로 아버지의 몸통통을 자신의 가슴에 꽁꽁 동여맸다.

 

무게감이 묵직하게 어깨를 짓눌렀다.

 

폐가 짓눌려 숨이 턱 밑까지 차올랐지만, 두 발로 바닥을 딛는 감각만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이것은 시스템이 계산해 준 궤도가 아니었다.

 

자신의 근육과 뼈, 인간의 순수한 의지로 딛고 선 현실이었다.

 

"태호 씨! 앞장서요!"

 

우진의 외침에, 피투성이가 된 K2C1 소총을 꼬나쥔 박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이마에서도 굵은 핏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맹수처럼 번뜩였다.

 

"벽면 배관 라인을 따라 뜁니다! 3번 배수 갱도가 무너지기 전에 도달해야 합니다!"

 

쾅!

 

등 뒤에서 메인 양자 냉각탑의 1차 반응로가 기어이 폭발했다.

 

충격파가 등을 후려쳤다.

 

네 사람은 화염과 파편의 폭풍 속으로 몸을 던졌다.

 

2. 무너지는 심연 속으로

 

지하 6층에서 환기 터널로 이어지는 400미터 길이의 암반 통로는 생지옥 그 자체였다.

 

양옆의 텅스텐 차폐 격벽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머리 위에서는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빗발치듯 쏟아져 내렸다.

 

"오른쪽으로 피해!"

 

서연이 비명을 지르며 우진의 팔을 낚아챘다.

 

쿵!

 

그들이 찰나의 순간 몸을 비틀자마자, 거대한 공조 덕트가 그들이 방금 지나친 자리를 내리찍으며 산산조각 냈다.

 

파편이 우진의 뺨을 스치며 깊은 자상을 남겼다.

 

뜨거운 피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닦아낼 여유조차 없었다.

 

등 뒤에 업힌 강정호의 체온이 점차 떨어지고 있었다.

 

어깨의 총상 부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우진의 등덜미를 흥건하게 적셨다.

 

"정신 차리세요, 아버지!"

 

우진은 이를 악물며 소리쳤다.

 

"여기서 눈 감으면 다 헛수고야! 살아남아서, 내 눈으로 당신이 지은 죗값을 치르는 걸 보란 말입니다!"

 

등 뒤에서 쌕쌕거리는 거친 숨소리와 함께 메마른 손가락이 우진의 어깨를 필사적으로 쥐어짜듯 움켜쥐었다.

 

"……살 거다. 살아남을 테니…… 너도 죽지 마라, 우진아……."

 

그 목소리가 우진의 심장에 불을 질렀다.

 

우진은 비틀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입하며 보폭을 넓혔다.

 

시야에 네모나 세모 같은 도형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낙석이 떨어질지 알려주는 푸른빛의 궤적선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날카롭게 곤두선 인간의 청각, 피부에 와닿는 공기의 흐름, 그리고 옆에서 달리는 동료들의 거친 호흡 소리만이 길잡이였다.

 

"전방 20미터, 비상 수밀문입니다!"

 

선두에서 달리던 태호가 고함을 질렀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비상 수밀문은 이미 반쯤 찌그러진 채 암반 잔해에 가로막혀 있었다.

 

틈새의 폭은 간신히 성인 한 명이 기어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좁아져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수밀문 상부의 균열에서 시커먼 지하수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문이 끼였습니다! 수동 유압 레버가 먹통입니다!"

 

태호가 소총을 내던지고 달려들어 찌그러진 철제 문을 밀어붙였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지대 역할을 하던 H빔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메마른 쇠소리를 내며 휘어지고 있었다.

 

끼기기긱!

 

철골이 완전히 꺾이는 순간, 통로 전체가 매몰될 판이었다.

 

"비켜요!"

 

우진이 아버지를 바닥의 비교적 안전한 모퉁이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바닥에 굴러다니던 굵직한 탄소강 배관 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서연 씨, 아버지 부축해요! 태호 씨, 내가 지렛대로 틈을 벌릴 테니 문 밑에 파이프를 받쳐요!"

 

"알겠습니다!"

 

우진은 문틈 사이에 파이프를 깊숙이 찔러 넣고 온 체중을 실어 내리눌렀다.

 

근육이 찢겨 나갈 듯한 격통이 온몸을 엄습했다.

 

이능이 사라진 인간의 육체가 낼 수 있는 순수한 한계의 힘이었다.

 

뿌드득!

 

강철 문짝이 비명을 지르며 20센티미터가량 위로 들려 올려졌다.

 

"지금입니다!"

 

태호가 번개처럼 또 다른 강철관을 문틀 사이에 끼워 넣어 틈을 고정했다.

 

서연이 강정호 박사를 안아 올려 먼저 틈새 너머로 밀어 넣었다.

 

"박사님, 들어가세요! 어서!"

 

이어 서연이 진흙투성이가 된 몸으로 틈을 통과했다.

 

"우진 씨, 어서요!"

 

서연이 반대편에서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그들이 달려온 통로 저편에서 2차 연쇄 폭발이 터져 나왔다.

 

쿠콰콰콰쾅!

 

불길과 콘크리트 파편이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팀장님!"

 

태호가 우진을 거칠게 틈새 너머로 밀어 던졌다.

 

우진이 굴러떨어지듯 반대편 바닥에 처박힌 찰나, 태호 역시 몸을 던져 틈을 빠져나왔다.

 

쾅-!!

 

그들이 빠져나오자마자 문을 받치고 있던 탄소강 파이프가 우지끈 부러지며 거대한 수밀문이 완전히 닫혀버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전신이 짓이겨졌을 아찔한 순간이었다.

 

3. 144.820MHz의 온기

 

수밀문 너머는 역삼역 폐쇄 환기 터널 하부와 연결된 아날로그 냉각수 배출 갱도였다.

 

발목까지 차오른 차가운 지하수가 그들의 발을 적셨다.

 

하지만 이곳 역시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아래쪽 지하 6층에서부터 차오른 연쇄 폭발의 충격이 수직 암반을 타고 올라오며 갱도 벽면을 거세게 흔들고 있었다.

 

콘크리트 파편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고, 탁한 유독 연기가 배수관을 타고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우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다시 아버지를 들쳐업었다.

 

강정호의 머리가 힘없이 우진의 어깨에 늘어졌다.

 

"아버지! 정신 잃으면 안 됩니다! 조금만 더 가면 지상이에요!"

 

우진이 필사적으로 외쳤지만, 아버지의 대답은 가느다란 신음뿐이었다.

 

그때, 서연의 가슴 포켓에 꽂혀 있던 구형 아날로그 무전기에서 거친 지지직거림과 함께 신호음이 터져 나왔다.

 

치이익…… 치직…….

 

- 들…… 리…… 나요?

 

우진 씨!

 

서연 언니!

 

그 목소리는 찢어지는 잡음 속에서도 맑고 또렷했다.

 

윤채린이었다.

 

서연이 떨리는 손으로 무전기를 낚아채 버튼을 눌렀다.

 

"채린아! 너 괜찮아? 파주는 어떻게 된 거야! 계엄군은?!"

 

- 후우…… 무사해요.

 

언니…… 저 살아 있어요.

 

채린의 거친 숨소리가 무전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 너머로 아득하게 빗소리와 함께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외침이 섞여 들렸다.

 

- 오르비스가 꺼지자마자…… 벙커 외곽을 포위하고 있던 계엄군 녀석들이 무기를 내던졌어요.

 

놈들의 통제망이 완전히 마비된 것 같아요.

 

송 선배랑 부소장님이랑 합류해서 방폭문을 열고 나왔어요.

 

지금 지상이에요…… 하늘이 보여요.

 

"하늘이……."

 

서연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채린의 무전은 절망적인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유일한 횃불과 같았다.

 

- 언니, 시스템 족쇄가 풀렸어요.

 

거리의 사람들이…… 전광판을 보고 울고 있어요.

 

군인들도 명령을 거부하고 있어요.

 

하지만 테헤란로 쪽 지하 진동이 너무 심해요!

 

관측소 데이터에 지하 100미터부터 붕괴가 진행 중이라고 떠요!

 

제발 빨리 빠져나와요!

 

"채린아, 나 우진이다."

 

우진이 숨을 헐떡이며 무전기에 대고 외쳤다.

 

"아버지 모시고 가고 있다. 배수관을 통해 역삼역 8번 출구 수직 환기 샤프트로 올라간다. 지상에서 만나자."

 

- 네…… 꼭 살아서 올라와요.

 

기다릴게요, 우진 씨!

 

치익, 소리와 함께 무전이 끊겼다.

 

채린의 생존 확인은 지쳐 쓰러져 가던 일행의 심장에 마지막 아드레날린을 뿜어냈다.

 

"들었지, 태호 씨?"

 

우진이 핏발 선 눈으로 태호를 바라보았다.

 

"지상에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달립시다."

 

"갑시다, 팀장님!"

 

태호가 우진의 반대편 팔을 부축하며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거친 발소리가 차가운 물살을 가르며 어두운 배수로를 울렸다.

 

4. 수직의 사투

 

그들이 도달한 곳은 직경 4미터, 높이 4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수직 환기 샤프트였다.

 

상부 까마득한 곳에서 희미한 회색빛이 한 줄기 내려앉고 있었다.

 

지상의 여명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닿기 위해서는 벽면에 녹슬어 위태롭게 박혀 있는 수직 철제 사다리를 기어 올라가야만 했다.

 

게다가 하부 암반에서는 이미 시커먼 유독가스와 지하수가 소용돌이치며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2분도 채 되지 않았다.

 

"태호 씨가 먼저 올라가서 맨홀 뚜껑을 확보해요!"

 

우진이 고함을 질렀다.

 

"내가 아버지를 업고 뒤따라갈 테니, 위에서 슬링을 당겨줘요! 서연 씨는 내 바로 밑에서 올라오고!"

 

"알겠습니다! 먼저 치고 올라가겠습니다!"

 

태호는 군화로 젖은 발판을 딛으며 무서운 속도로 사다리를 타기 시작했다.

 

특수부대 출신다운 강인한 완력이었지만, 그 역시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우진은 아버지의 체중을 온몸으로 지탱하며 첫 번째 사다리 발판에 발을 얹었다.

 

끼이익.

 

녹슨 철봉이 비명을 지르며 흔들렸다.

 

벽면을 타고 흐르는 기름 찌꺼기와 이끼 때문에 손이 미끄러져 나갔다.

 

우진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부러질 듯 힘을 주며 한 단, 한 단 기어올랐다.

 

한 발을 올릴 때마다 어깨에 묶인 강정호의 몸이 묵직하게 흔들렸다.

 

"우진아……."

 

귓가에 아버지의 희미한 음성이 닿았다.

 

"미안하다…… 이 애비가, 너에게 짐만 되는구나……."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우진은 거칠게 숨을 토해냈다.

 

폐가 찢어질 것 같았고, 심장은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듯이 요동쳤다.

 

"15년 전 당신이 내 관자놀이를 짼 건 평생 용서 못 합니다. 하지만…… 그 덕에 내가 오늘 당신을 구하러 올 수 있었어. 그러니까 살아서 내 욕 다 들으세요. 도망칠 생각 마."

 

강정호의 가슴이 우진의 등에 밀착된 채 가늘게 떨렸다.

 

그것은 오열이었다.

 

15년간 차가운 액체 챔버 속에서 기계의 부품으로 썩어가던 노학자가, 마침내 되찾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서 흘리는 회한의 눈물이었다.

 

그 눈물이 우진의 목덜미를 타고 뜨겁게 흘러내렸다.

 

쿠구구궁!

 

샤프트 하부에서 맹렬한 폭발음과 함께 불기둥이 치솟았다.

 

유독가스가 뱀의 혓바닥처럼 발목을 핥으며 올라왔다.

 

"올라와요! 서연 씨, 발을 헛디디지 마!"

 

우진의 바로 아래에서 사다리를 오르던 서연이 기침을 토해내며 필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톱은 이미 깨져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걱정…… 마요! 나, 아직 안 죽어!"

 

서연이 악을 쓰며 발판을 딛었다.

 

높이 20미터, 30미터.

 

온몸의 감각이 마비되어 갔다.

 

손바닥의 살갗이 벗겨져 녹슨 쇠에 피가 묻어났다.

 

하지만 그 고통이야말로 살아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였다.

 

시스템이 부여한 차가운 네모의 안락함이 아닌, 피를 흘리고 뼈가 삐걱거리며 스스로의 운명을 쥐어짜 내는 인간의 생명력이었다.

 

5. 무너지는 바벨

 

"잡았습니다! 맨홀 뚜껑입니다!"

 

샤프트 꼭대기에 먼저 도달한 태호의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곧이어 절망적인 탄식이 뒤따랐다.

 

"제길! 위에서 잠겨 있습니다! 지상에 뭔가가 내려앉아서 뚜껑을 짓누르고 있어요!"

 

"뭐라고?!"

 

우진이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내뱉으며 마지막 사다리 발판에 매달렸다.

 

서연 역시 간신히 우진의 발밑 발판에 도달해 헐떡였다.

 

태호가 주철 맨홀 뚜껑을 어깨로 밀어붙이고 있었지만, 뚜껑은 겨우 1센티미터 들썩일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래쪽에서는 섭씨 수백 도의 과열 슬러지와 화염이 샤프트 내부를 집어삼키며 무서운 속도로 치고 올라오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10초.

 

여기서 막히면 통구이가 되거나 생매장당할 뿐이었다.

 

"태호 씨, 비켜요!"

 

우진이 한 손으로 사다리를 붙잡은 채, 반대쪽 어깨로 맨홀 하부 프레임을 받쳤다.

 

"서연 씨, 내 허리띠 잡아! 태호 씨,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밀어붙입니다!"

 

"하지만 팀장님 팔이……!"

 

"밀어!!"

 

우진의 포효가 좁은 원통형 샤프트를 뒤흔들었다.

 

쿵!

 

세 사람의 모든 근육과 뼈, 마지막 남은 생명의 불꽃이 하나의 점으로 집약되어 맨홀 뚜껑을 향해 폭발했다.

 

뿌드드득!

 

지상에서 맨홀을 짓누르고 있던 아스팔트 잔해와 뒤틀린 가드레일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다.

 

콰앙-!

 

마침내 주철 뚜껑이 허공으로 날아가며, 눈이 멀 것 같은 찬연한 아침 햇살이 샤프트 내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가요!"

 

태호가 먼저 몸을 솟구쳐 지상으로 빠져나가며 손을 뻗었다.

 

그는 먼저 우진의 등 뒤에 묶여 있던 강정호 박사를 끌어올렸다.

 

이어 서연이 태호의 손을 잡고 지상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진이 양손으로 콘크리트 턱을 짚고 몸을 끌어올렸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아아아앙-!!

 

그들이 빠져나온 맨홀 구멍 깊은 곳에서, 지하 6층 예비 코어 룸과 통신 중계국 지하 공동구 전체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최종 대함몰이 발생했다.

 

엄청난 폭압과 함께 시커먼 연무와 화염이 맨홀 밖으로 화산처럼 분출했다.

 

샤프트를 지탱하던 원통형 콘크리트 벽체가 도미노처럼 무너져 내리며, 100미터 깊이의 거대한 수직 구멍이 흔적도 없이 흙더미와 암반 속에 파묻혔다.

 

우진은 서연과 태호의 손에 이끌려 아스팔트 바닥을 굴렀다.

 

등 뒤에서 땅이 꺼지는 진동이 대지를 뒤흔들었다.

 

6. 여명의 대지 위에서

 

허억…… 허억…….

 

우진은 거친 아스팔트 바닥에 대자로 뻗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오르내렸다.

 

온몸은 땀과 피, 매연과 냉각 슬러지로 범벅이 되어 성한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뺨에 와닿는 공기는 더 이상 퀴퀴한 지하의 냉기가 아니었다.

 

선선하고, 비릿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치는 늦여름 새벽의 바람이었다.

 

"살았다……."

 

서연이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투명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안도와 슬픔, 벅찬 감격이 뒤섞인 오열이었다.

 

태호는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군화를 벗어 던지며 허탈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우리가…… 진짜로 해냈군요. 팀장님……."

 

우진은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곁에는 강정호 박사가 누워 있었다.

 

어깨의 상처는 서연이 찢어낸 옷자락으로 단단히 지혈되어 있었고, 가슴은 미약하지만 규칙적으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우진아……."

 

강정호가 떨리는 손을 들어 아들의 거친 뺨을 만졌다.

 

피와 흙탕물로 얼룩진 아들의 얼굴을 매만지는 아버지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하늘을…… 보아라……."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은 테헤란로 역삼역 8번 출구 앞 광장이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30층짜리 거대한 통유리 마천루를 자랑하던 태성C&I 사옥과 넥스트 큐브 본사 건물 앞 도로는, 지하 함몰의 여파로 거대한 싱크홀이 뚫려 연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우진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무너진 건물 잔해가 아니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직장인들, 방패와 진압봉을 내던진 채 멍하니 서 있는 계엄군 군인들, 부둥켜안고 울부짖는 시민들.

 

그리고 그들의 머리 위였다.

 

우진은 숨을 멈추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15년 동안 우진의 시야를 지옥처럼 쭝쭝 옥죄어 오던 백색의 네모(□)도.

 

죽음과 파멸을 선고하며 붉게 회전하던 검은 세모(△)도.

 

하늘 높은 곳, 보이지 않는 시스템의 코어로 뻗어 올라가 인간을 꼭두각시처럼 조종하던 그 수천만 가닥의 칠흑빛 실선 잔상도.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정수리 위는, 그저 높고 푸른 텅 빈 하늘만이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동시에 우진의 관자놀이를 바늘로 쑤시듯 괴롭히던 유년기의 편두통이, 거짓말처럼 씻은 듯이 사라져 있었다.

 

감각의 왜곡이 끝났다.

 

시스템이 강제했던 왜곡된 공감각 노이즈가 영원히 소멸한 것이었다.

 

치직, 치익.

 

바닥에 놓여 있던 아날로그 무전기에서 다시 맑은 신호음이 울렸다.

 

- 우진 씨…… 서연 언니…… 태호 씨…….

 

파주에서 보낸 채린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목소리는 울먹이고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저, 옥상으로 올라왔어요.

 

햇살이…… 너무 따뜻해요.

 

이제 아무도 우리를 조종하지 못해요.

 

우리가…… 이겼어요.

 

우진은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목이 메어 말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쥐고, 동쪽 지평선에서 붉게 솟아오르는 찬란한 아침 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 채린아. 끝났다."

 

운명의 각본은 불타 없어졌다.

 

이제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누구도 대신 써주지 않는, 오직 스스로 걸어가야 할 미지의 내일이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