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형 관찰 일지
1. 덮어쓰기의 잔해
싸늘한 아침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편의점 전면 통유리창에 어지럽게 나붙은 붉은색 압류 딱지들은 유난히 선명했다.
'유체동산 압류 목록'과 '점유이전금지 가처분'이라는 활자가 유리창의 성에 사이로 번득이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손님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건네며 따뜻한 캔커피를 건네던 김 씨의 온기는 그곳에 없었다.
우진은 주머니 속에 찔러 넣은 주먹을 단단히 쥐었다.
큐브 네트웍스의 덫을 파헤쳐 계약서를 찢어버렸을 때, 분명 김 씨의 정수리 위를 짓누르던 검은 세모(△)는 산산이 부서졌다.
꼭두각시 줄처럼 허공으로 뻗어 있던 검은 실선 잔상도 맥없이 끊어졌었다.
그리고 안정된 일상을 상징하는 백색 네모(□)가 내려앉았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폰지 사기 계약이라는 경로가 물리적으로 차단당하자마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길은 비웃듯 다른 경로를 틀어쥐었다.
친동생의 인감 도용과 사채 보증이라는 잔혹한 대체 변수가 새벽 사이 강제로 투입되었다.
그 결과 점포는 풍비박산 났고, 김 씨는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의식을 잃은 채 생사의 갈림길을 헤매고 있었다.
"개별적인 가지치기는 아무 소용이 없어."
우진의 입술 틈새로 서늘한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
궤도 강제 덮어쓰기(System Overwrite).
국소적 현장에 개입해 예정된 파멸을 틀어막아도, 중앙 시스템은 목표로 설정된 파멸 값을 기어이 달성하기 위해 또 다른 비극을 강제로 덮어씌운다.
지하철역에서 선로로 떨어지려던 어린아이 민우를 구했을 때 방출된 파멸 에너지가 무고한 청년 민수에게 전이되었던 인과율 보존 법칙.
그리고 조작된 검은 세모를 강제로 걷어내도 기어이 대체 사고를 집어던지는 시스템 덮어쓰기의 공포.
두 가지 사건이 증명하는 진실은 오직 하나였다.
눈앞에 보이는 궤도를 일일이 건드리는 미시적인 구조 활동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짓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주변의 누군가에게 예측 불가능한 참사를 전가할 뿐이었다.
우진은 뒤를 돌아 테헤란로의 빌딩 숲을 응시했다.
우뚝 솟은 마천루들 위로 잿빛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수만, 수십만의 사람들이 거대한 격자망에 갇힌 채 자신들이 정해진 레일 위를 달리는 줄도 모르고 바삐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무수한 백색 네모들.
그 평온한 사각형의 질서 뒤편에서, 누군가는 거대한 연산 회로를 굴리며 인간의 파멸과 죽음을 계산하고 통제하고 있었다.
'중앙 코어(Central Core).'
품 안 깊숙한 곳, 15년 전 실종된 아버지 강정호가 남긴 하드커버 연구 노트의 감촉이 가슴팍을 묵직하게 찔렀다.
아버지는 이미 15년 전에 이 끔찍한 진실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노트의 마지막 장에 또렷한 필적으로 적어 두었다.
「도시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중앙 코어를 파괴하지 않는 한, 뒤틀린 궤도의 연쇄는 멈추지 않는다.」
코어를 부수려면 먼저 알아야 했다.
놈들이 세상을 어떤 공식으로 내려다보고 있는지, 내 눈앞에 비치는 이 기하학적 도형들이 정확히 어떤 논리와 법칙으로 작동하는지를.
우진은 옷깃을 여미며 회사 사옥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2. 격자망의 빌딩
테헤란로 한복판에 자리한 태성C&I 30층 사옥은 거대한 유리 감옥처럼 차갑게 반짝였다.
회전문 앞을 지나는 출근길 인파의 머리 위로 수백 개의 도형들이 파도처럼 일렁였다.
대다수는 백색 네모(□)였다.
지루하지만 안전하고, 예측 가능하지만 시스템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평범한 일상의 궤도.
로비 게이트를 통과해 엘리베이터 홀로 들어서자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기획2팀 박 팀장, 결국 구속 영장 실질심사 들어갔다면서?"
"말도 마. 해외 페이퍼 컴퍼니로 사내 물류 소스코드를 빼돌리려다 본사 감사1팀에 현행범으로 걸렸잖아. 대리 하나한테 누명 씌우려다가 완벽하게 역풍 맞았다던데."
"그 깐깐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그런 미친 짓을 벌였을까 몰라. 뒤에서 누가 시킨 것처럼 눈이 완전히 돌아가 있었다는데."
우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들의 대화를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모르는 진실.
박민재 팀장 역시 거대한 꼭두각시 실에 묶여 있던 희생양에 불과했다는 것.
그리고 실패하자마자 시스템으로부터 가차 없이 버려져 궤도 붕괴와 자멸의 파편을 고스란히 뒤집어썼다는 사실을.
14층 기획2팀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팽팽한 적막이 감돌았다.
팀장실의 블라인드는 굳게 내려져 있었고, 박민재의 책상 위에는 파란색 감사팀 압류 박스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팀원들은 우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강 대리님, 좋은 아침입니다."
김 주임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커피 한 잔을 건넸다.
김 주임의 머리 위에도 여전히 희미한 백색 네모가 얌전하게 떠 있었다.
며칠 전 박 팀장이 체포되던 순간 공포에 질려 미세하게 흔들렸던 그 네모는, 이제 다시 안정된 직사각형의 궤도로 복귀해 있었다.
"고마워요, 김 주임."
우진은 커피를 받아 들고 자리에 앉았다.
모니터 전원을 켜자 사내 인트라넷 공지사항이 깜빡였다.
[기획2팀장 직위해제 및 직무대행 지정 안내].
화면을 응시하던 우진은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가죽 표지의 얇은 메모 수첩을 꺼냈다.
겉면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는 검은색 양장 수첩.
바로 어젯밤부터 우진이 자신의 시각에 포착되는 모든 비정상적인 현상을 분류하고 기록하기 시작한 '도형 관찰 일지'였다.
우진은 만년필을 쥐었다.
펜촉이 사각거리며 종이 위를 가르기 시작했다.
3. 관찰 일지의 기록
수첩의 첫 장에는 우진이 지금까지 직접 겪고 관찰한 도형들의 기본 형태가 세밀한 펜화처럼 스케치 되어 있었다.
우진은 숨을 가다듬으며 머릿속의 데이터를 활자로 전환했다.
「1.
형태적 분류(Shape Definition)」
「- 네모(□): 시스템의 정상 궤도.
정해진 일상과 질서, 예측 가능한 안전성을 의미함.
대부분의 일반 시민들이 유지하고 있는 기본 상태.
변수가 없는 한 영구히 유지됨.」
「- 세모(△): 궤도의 급격한 왜곡과 파멸.
방향의 꺾임, 치명적 사건·사고, 사회적 파멸 혹은 육체적 사망 직전에 출현함.
밑변을 축으로 삼아 시계 혹은 반시계 방향으로 고속 회전하며 진동을 수반함.」
「- 동그라미(○): 규격 외 이레귤러(Irregular).
기존 시스템의 격자망과 정해진 궤도를 완전히 이탈한 미지의 가능성.
옥상에서 군중을 내려다보았을 때 단 한 번 순간적으로 관측됨.
아직 그 본질과 세부 메커니즘은 미확인 상태.」
우진은 잠시 펜을 멈추고 관자놀이를 가볍게 눌렀다.
그날 옥상에서 스쳐 지나가듯 보았던 단 하나의 둥근 고리.
그 형상을 떠올리기만 해도 유년기 수술 흉터가 있는 오른쪽 관자놀이 안쪽이 은근하게 욱신거렸다.
우진은 고개를 털어내고 다음 페이지로 펜촉을 옮겼다.
가장 중요하고 위험한 부분, 바로 색상과 역학에 관한 기록이었다.
「2.
색상 및 외력의 법칙(Color & External Force)」
「- 백색(White): 자연적 인과율.
개인의 자유의지와 자연스러운 환경 상호작용에 의해 형성된 궤도.
백색 세모(붉은 세모)의 경우 본인의 과실이나 우발적 사고로 인한 위기를 나타냄.」
「- 검은색(Black): 인위적 조작 및 외압.
배후 조직(네모 프로젝트)의 시스템적 개입에 의해 강제 집행되는 파멸 궤도.
도형 주변에 반드시 허공(도시 상공의 격자망)으로 이어지는 검은 실선 잔상이 존재함.
이는 대상이 시스템의 인형으로 조종당하고 있음을 의미함.」
잉크가 종이에 스며들며 굳어갔다.
우진은 박민재 팀장과 편의점 김 씨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던 그 끔찍한 암흑을 떠올렸다.
주변의 빛마저 삼켜버릴 듯 탁하고 끈적거리던 검은 세모.
그것은 단순한 불운이 아니었다.
거대한 도살자가 가축의 목에 매어 둔 올가미와 같은 표식이었다.
우진은 페이지 하단에 붉은색 잉크로 굵은 경고 문구를 덧붙였다.
「3.
간섭의 반작용과 한계(Interference & Limit)」
「- 인과율 보존 법칙: 세모(위기)를 인위적으로 제거하여 네모로 되돌릴 경우, 해소되지 못한 충격 에너지는 시공간적으로 가장 인접한 타인의 네모로 전이되어 새로운 세모를 촉발함(민우 구출 → 민수 부친의 크레인 참사).」
「- 시스템 덮어쓰기(System Overwrite): 검은 궤도(조작된 파멸)에 놓인 대상은 특정 변수를 물리적으로 차단하더라도, 중앙 시스템이 즉각 대체 변수(사채, 보증, 급성 질환 등)를 투입하여 동일한 파멸 값을 기어이 달성함(김 씨의 사기 계약 파기 → 동생의 사채 보증 사기 및 뇌출혈 집행).」
만년필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종이 위에 적힌 공식들은 너무나 정교했고, 그렇기에 더욱 소름 끼치도록 잔인했다.
시스템은 오차를 허용하지 않는다.
국소적으로 궤도를 건드리는 것은 다른 무고한 목숨을 제물로 바치거나, 지연된 파멸을 더 참혹한 형태로 마주하게 만들 뿐이다.
"결국 답은 하나뿐이야."
우진은 수첩 여백에 굵고 명확한 글씨로 세 글자를 새겨 넣었다.
「중앙 코어.」
4. 시신의 지평선
정오가 가까워지자 사무실 안의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우진은 자리를 정리하고 사옥 옥상으로 향했다.
철문을 밀고 나가자 테헤란로의 칼바람이 사정없이 뺨을 때렸다.
옥상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상 30층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강남역과 역삼역 사이의 도로는 마치 거대한 메인보드의 기판 회로처럼 보였다.
아스팔트 도로는 버스 전용 차로와 일반 차로라는 규격화된 도선(導線)이었고, 신호등의 점멸에 따라 움직이는 차량들은 일정한 전압을 받아 흐르는 전자 펄스 같았다.
그리고 보도블록 위를 메운 수천, 수만의 사람들.
우진은 난간을 짚은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관자놀이 부근의 신경을 서서히 곤두세우며, 평소에는 무의식적으로 흩뜨려 놓던 시선의 초점을 의도적으로 모았다.
찌릿.
오른쪽 관자놀이 흉터 부근에서 익숙한 통증이 꿈틀거렸다.
망막 너머로 얇은 막이 한 겹 벗겨지듯 시야의 차원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지상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정수리 위 10센티미터 상공마다 떠오른 빛의 형상들.
거대한 모자이크처럼 펼쳐진 수천 개의 백색 네모(□)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각자의 궤도를 유지하며 질서정연하게 이동하고 있었다.
신호등이 붉은불로 바뀌면 네모들의 행렬이 일제히 멈추어 섰고, 초록불이 켜지면 다시 일정한 속도로 흘러갔다.
완벽한 통제.
거대한 항상성의 감옥.
우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네모들의 군집 속에서 비정상적인 파동을 찾아내기 위해 시선을 더욱 깊숙이 내리꽂았다.
그 순간이었다.
쿡, 하고 뇌간을 송곳으로 후벼 파는 듯한 격통이 들이닥쳤다.
"큭……!"
우진은 저도 모르게 난간을 부여잡으며 이를 악물었다.
눈알이 안쪽에서부터 터져 나갈 것 같은 안압이 발생했다.
단순히 도형의 외형을 관조하는 수준을 넘어, 도형의 모서리 두께와 회전 주기, 내부의 기하학적 결을 꿰뚫어 보려 시도할 때마다 찾아오는 맹렬한 신체적 반작용이었다.
시신경을 타고 번지는 타는 듯한 작열감 속에서, 우진의 시선 끝에 무언가가 걸려들었다.
횡단보도 중간, 수많은 백색 네모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미세하게 진동하는 붉은 빛줄기 하나.
우진은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그 빛을 추적했다.
서류 가방을 든 30대 후반의 직장인 남성이었다.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것은 네모가 아니었다.
모서리가 날카롭게 벼려진 붉은 세모(△)였다.
세모는 1초에 서너 바퀴씩 불안정하게 자전하며 붉은 불꽃 같은 파편을 허공으로 흩뿌리고 있었다.
우진은 숨을 멈추고 남자의 동선을 좇았다.
남자는 스마트폰 통화에 정신이 팔린 채 보행자 신호가 점멸하기 시작한 횡단보도로 급하게 발을 내딛고 있었다.
그리고 교차로 우회전 차선에서 시야를 가린 대형 탑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돌진해 들어오고 있었다.
'사고다.'
우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 남자는 5초 뒤 저 탑차의 사각지대에 휘말려 궤도를 이탈하게 될 터였다.
당장 소리를 지르거나 달려 내려갈 수도 없는 30층 옥상.
하지만 우진은 이번에는 주머니 속의 휴대폰을 움켜쥐지 않았다.
개입할 수 없을뿐더러, 섣부른 물리적 개입이 어떤 인과율의 참사를 부르는지 이미 뼈저리게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탑차 바로 앞까지 발을 들이밀던 그 찰나.
남자의 발이 보도블록 턱에 걸려 헛디뎌지며 뒤로 털썩 나자빠졌다.
콰아아앙-!
탑차가 남자의 코앞을 10센티미터 차이로 스쳐 지나가며 거친 경적을 울려댔다.
찰나의 우발적 낙상이 남자를 죽음의 충돌 지점에서 벗어나게 만든 것이었다.
바닥에 주저앉은 남자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탑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우진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남자의 정수리 위에서 붉게 미쳐 날뛰던 세모의 세 꼭짓점이 기괴하게 부풀어 올랐다.
찌그러지던 변들이 수평과 수직으로 재배열되더니, 찰나의 진동과 함께 완벽한 균형을 이룬 백색 네모(□)로 즉각 재구성된 것이었다.
우진은 그 경이로운 광경을 억누르며 수첩을 펴 들었다.
시신경의 통증을 억누르며 떨리는 손으로 펜을 놀렸다.
「사례 관측: 외압이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우발적 위기 상황(자연적 백색 세모).」
「외부의 인위적 간섭 없이 대상 본인의 우연이나 자연 법칙에 의해 위기가 모면될 경우, 시스템의 강제 덮어쓰기나 인접 노드로의 인과율 전이가 발생하지 않음.」
「세모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형태적 복원력을 발휘하여 일상의 백색 네모로 수렴함.」
중요한 단서였다.
조작된 파멸이 아닌 자연적인 위기는 스스로 극복될 때 시스템의 항상성 붕괴를 일으키지 않는다.
문제는 '검은색', 즉 배후 세력의 인위적 조작이 개입된 궤도였다.
놈들이 조작한 궤도만이 강제 덮어쓰기를 가동하고, 억지로 비틀 때마다 파멸적 에너지를 주변으로 튀겨낸다.
우진은 관자놀이의 흉터를 문지르며 차가운 옥상 바닥에 주저앉았다.
5. 지워진 유년의 공백
두통이 서서히 가라앉자, 흉터 부근에 깃든 기괴한 감각만이 남아 맥박 치듯 뛰었다.
오른쪽 관자놀이 바로 위, 머리칼 속에 숨겨진 약 4센티미터 길이의 수술 자국.
우진은 어릴 적부터 이 흉터가 단순히 열병을 앓았거나 넘어져서 생긴 상처라고만 여겨왔다.
그러나 이 능력이 눈을 뜬 이후, 흉터는 단순한 과거의 흔적이 아니었다.
도형을 볼 때마다 흉터는 마치 살아 있는 센서처럼 반응했고, 깊이 파고들수록 뇌수를 불로 지지는 듯한 경고 신호를 보내왔다.
우진은 난간 벽에 등을 기대고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기억의 심연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대학 시절, 군 복무 시절, 그리고 고등학교 시절.
열일곱 살.
바로 그 무렵이었다.
아버지가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증발하듯 사라져 버린 해.
그 이전의 기억은 어떠했는가.
우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했다.
아무리 필사적으로 기억을 끄집어내려 해도, 열일곱 살 이전의 유년기 시절은 마치 하얗게 탈색된 인화지처럼 텅 비어 있었다.
초등학교 입학식의 풍경, 중학교 시절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 가족들과 함께 떠났던 여행의 기억 같은 구체적인 장면들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아 있는 것이라곤 '어머니는 일찍 병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리던 학자였다'라는 식의, 마치 누군가가 정갈하게 요약해 머릿속에 강제로 주입해 둔 듯한 메마른 텍스트 정보뿐이었다.
"삭제된 건가……?"
우진의 등골을 타고 서늘한 전율이 흘러내렸다.
단순한 기억 상실이 아니었다.
마치 정교한 컴퓨터 프로그램에서 특정 디렉터리를 통째로 포맷하고, 시스템 구동에 필요한 최소한의 시스템 설정 파일만을 남겨둔 것 같은 완벽한 공백.
그리고 그 공백의 한가운데에 새겨진 이 관자놀이의 수술 흉터.
아버지는 대체 자신에게 무슨 짓을 했던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가 아니라 배후의 그 시스템이 자신의 뇌를 열고 기억을 도려낸 것인가.
만약 아버지가 시스템의 거대한 격자망을 연구하던 중 자신의 뇌에 무언가 장치를 심어 두었거나, 반대로 시스템의 표적이 되어 우진의 궤도를 지우려 했던 것이라면.
15년 전 실종된 아버지의 얼굴조차 사진 속의 정지된 모습 외에는 생생하게 움직이는 기억으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이 뼛속까지 시린 공포로 다가왔다.
'내가 보고 있는 이 눈은, 과연 온전히 나의 것인가.'
남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궤도를 볼 수 있는 이 능력 자체가, 어쩌면 17세 이전 지워진 공백 속에 심겨진 인위적인 장치의 발현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이 뱀처럼 똬리를 틀었다.
우진은 주머니에서 아버지의 하드커버 연구 노트를 꺼냈다.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해진 표지를 넘기자, 아버지가 남겨둔 빽빽한 수식들과 네트워크 그래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Homeostasis Grid / Node Allocation Formula].
인간 하나하나를 네트워크의 '노드(Node)'로 규정하고, 그 노드들이 뿜어내는 엔트로피의 합이 언제나 일정한 상수를 유지하도록 강제하는 방정식.
그리고 그 방정식의 구석에, 아버지의 필체로 적힌 지극히 사적인 낙서 하나가 적혀 있었다.
「우진아, 궤도의 노예가 되지 마라.
세상이 네게 부여한 사각형의 틀을 부숴라.」
우진의 눈동자가 그 문장에 고정되었다.
사각형의 틀을 부숴라.
그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태어날 때부터 머리 위에 씌워진 채 평생을 시스템이 정해준 궤도대로 살아가게 만드는 백색 네모(□).
그 궤도를 이탈하는 순간 배후의 시스템은 인간을 불량품으로 규정하고 파멸의 세모(△)를 씌워 사회적으로, 육체적으로 매장해 버린다.
박민재가 그랬고, 편의점 김 씨가 그랬으며, 지하철에서 죽어간 최 모 씨가 그랬다.
그렇다면 그 사각형의 틀을 부순 존재는 무엇이 되는가.
옥상에서 군중 속을 내려다보았을 때 스쳐 지나갔던 단 하나의 존재.
세모도, 네모도 아닌 완벽한 곡선의 궤적.
'동그라미(○).'
6. 이레귤러의 표식
오후 업무 시간 내내 우진은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며 수첩의 내용을 정리했다.
박민재 팀장의 공석으로 인해 기획2팀의 업무는 사실상 마비 상태였고, 누구도 우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오히려 우진에게는 관찰 일지를 체계화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우진은 수첩의 새로운 장을 펴고 연필을 굴렸다.
「4.
관찰 능력의 단계적 분석(Observation Level)」
「- 1단계: 외형 인지(Surface Scan).」
「별도의 의식 집중 없이 시야에 들어오는 인물들의 기본 형태(네모/세모)와 발광 여부를 확인하는 상태.
신체적 반작용 및 편두통 없음.
일상적인 식별 가능.」
「- 2단계: 심층 구조 분석(Deep Analysis).」
「도형의 회전 속도, 꼭짓점의 미세 진동, 외부로 뻗은 실선(꼭두각시 줄)의 궤적 및 색상의 탁도를 분석하기 위해 시선을 집중하는 상태.
반작용으로 관자놀이 흉터의 극심한 통증과 안구 압박, 편두통이 수반됨.
장시간 유지 시 뇌간에 과부하 발생 위험.」
우진은 스스로의 능력을 냉정하게 한계 지었다.
무턱대고 모든 사람을 뜯어보려 했다간 놈들과 싸우기도 전에 자신의 뇌혈관이 먼저 터져버릴 터였다.
철저히 필요한 순간에만 2단계 심층 분석을 가동해야 했다.
그리고 그 분석의 끝에서 찾아내야 할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시스템의 신호를 송출하고 궤도를 덮어쓰는 배후의 거점, 즉 '중앙 코어'의 물리적 위치.
둘째, 시스템의 지배를 받지 않는 규격 외 존재, '동그라미(○)'의 정체.
띵.
퇴근 시간을 알리는 사내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팀원들이 서둘러 짐을 싸기 시작했다.
"강 대리님, 퇴근 안 하세요?"
가방을 챙겨 든 김 주임이 물었다.
"먼저 가세요, 김 주임. 정리할 게 좀 남아서요."
우진은 수첩을 덮어 정장 안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회사를 나서는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눈빛만큼은 출근할 때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막연한 공포와 죄책감에 짓눌려 휘둘리던 피해자의 시선이 아니었다.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감옥의 구조를 파악하고, 그 취약점을 찾아내어 시스템 자체를 무너뜨리려는 사냥꾼의 집요함이 깃들어 있었다.
사옥 로비를 빠져나와 테헤란로의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퇴근길을 서두르는 수많은 인파가 지하철역 입구를 향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어둠이 깔린 도시 위로 네온사인과 가로등 불빛이 번쩍였고, 그 빛 아래서 무수한 백색 네모들이 허공을 수놓으며 떠다녔다.
마치 거대한 규격화된 부품들이 공장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흘러가는 듯한 기괴하고도 소름 돋는 장관.
우진은 지하철역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 섰다.
눈을 가늘게 뜨고, 관자놀이의 통증을 살짝 자극하며 시야를 넓혔다.
백색, 백색, 백색.
끝없이 이어지는 백색 네모의 바다.
저 평온함 속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파멸의 궤도로 밀려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인가.
바로 그때였다.
횡단보도 건너편, 빽빽하게 모여 신호를 기다리던 군중의 한구석에서 기이한 빛의 굴절이 일어났다.
주변의 백색 네모들이 뿜어내는 각진 빛을 완만하게 밀어내며, 홀로 부드러운 곡선의 궤적을 그리며 회전하는 청아한 은빛의 고리.
각진 모서리가 단 하나도 없는 완벽한 원형.
'동그라미(○)……!'
우진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옥상에서 보았던 그 잔상이 환각이 아니었다.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는 순간, 그 은빛 동그라미를 머리 위에 띄운 인물이 인파를 가로지르며 걸어오기 시작했다.
교복 치마에 두툼한 패딩을 걸쳐 입고,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음악을 듣고 있는 여학생이었다.
시스템의 거대한 사각형 격자망 한가운데를 유유히 헤엄치듯 가로지르는 규격 외의 존재.
우진의 시선이 그 소녀의 정수리를 향해 벼락처럼 꽂혀 들어갔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