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의 오만
1. 무너진 제단의 잔해
쿵, 쾅!
지하 6층의 천벽을 이루던 두께 80센티미터의 방폭 콘크리트 슬래브가 거대한 굉음과 함께 쪼개져 내렸다.
낙하하는 돌덩이들이 양자 서버의 원기둥 랙들을 무자비하게 짓이기며 시퍼런 고전압 불꽃을 뿜어냈다.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가 콘솔 깊숙한 곳에서 푸른빛을 태워 올리며 뿜어낸 소각 펄스는, 이미 양자 슈퍼컴퓨터의 메인 커널을 회복 불가능한 잿더미로 바꾸어 놓은 뒤였다.
녹아내린 초전도 냉각수관에서 뿜어져 나온 영하 40도의 액체 질소 안개가 매캐한 테르밋 연기와 뒤섞여 숨통을 틀어막았다.
"콜록! 쿨럭……!"
박태호가 피를 섞어 토해내며 어깨에 멘 강정호 박사의 상체를 단단히 고쳐 쥐었다.
태호의 오른쪽 팔꿈치 관절은 이미 복합 골절로 인해 덜렁거리고 있었고, 방탄복 틈새로 스며 나온 선혈이 바닥의 하얀 무균 타일에 붉은 점을 찍고 있었다.
"우진 형님……! 이쪽 통로도 주저앉기 시작했습니다! 3분도 못 버팁니다!"
우진은 비틀거리며 콘솔 모서리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관자놀이에 새겨진 4센티미터의 신경 궤도 절제술 흉터에서 굵은 피가 흘러내려 뺨을 적시고 있었다.
방금 전, 시스템과의 신경 융합률이 83퍼센트에 달했던 아버지의 뇌간을 살려내기 위해 자신의 바이패스 단말을 직결했던 대가였다.
살인적인 연산 부하가 뇌신경을 갈가리 찢어발기던 감각이 아직도 뇌수를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시야는 뿌옇게 번져 있었고, 이명은 귀청을 찢을 듯 날카롭게 울렸다.
그러나 우진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기괴하게 일렁이던 네모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존재하지 않았다.
공감각의 착란이 걷힌 자리에는 오직 핏발 선 순수한 인간의 푸른 눈동자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배수로 해치 쪽으로 가, 태호야. 아버지 모시고 먼저 들어가."
우진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갈라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하지만 형님은……!"
"서지훈이 아직 숨을 쉬고 있어."
우진의 시선이 콘솔 너머, 붕괴하는 원형 돔 한가운데의 잔해를 향했다.
지름 10미터의 구형 유리 냉각 챔버가 깨져 나가며 바닥에 쏟아낸 수천 리터의 특수 냉각액 한가운데, 칠흑빛 양복을 피로 물들인 사내가 엎드려 있었다.
서지훈이었다.
갈비뼈가 서너 개는 부러진 듯 한쪽 어깨를 기괴하게 늘어뜨린 채, 그는 부서진 바닥 타일을 손톱으로 긁으며 기어가고 있었다.
그의 정수리 위에는 더 이상 완벽한 형태의 황금 육면체나 암흑의 프레임이 떠 있지 않았다.
모든 기하학체가 분쇄된 그의 머리 위 허공은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진 흑색 노이즈 파편만을 토해내고 있었다.
"우진아……."
태호의 등 뒤에서 간신히 의식을 유지하고 있던 강정호 박사가 힘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15년간 양자 컴퓨터에 결속되어 영양액과 신경 케이블로만 연명해 온 그의 육신은 마른 나뭇가지처럼 메말라 있었다.
"그자는…… 이미 끝났다. 코어가 소각되었어. 더 이상…… 그 어떤 연산도 작동할 수 없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해. 천장이 완전히 내려앉으면 생매장이다……."
"아뇨, 아버지."
우진이 허리춤에서 피로 물든 K2C1 돌격소총을 움켜쥐었다.
탄창은 이미 비어 있었으나 총구에 장착된 탄소강 대검의 날은 여전히 서늘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저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있어요. 저 눈빛을 보세요."
우진이 천천히 서지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2. 꺼지지 않는 망집
쩌저적!
양자 서버 랙의 텅스텐 기둥들이 고온을 견디지 못하고 비틀리며 붉은 낙하물을 쏟아냈다.
서지훈은 바닥에 웅덩이를 이룬 냉각수와 피를 손바닥으로 짚으며 비틀비틀 상체를 일으켰다.
입술이 찢겨 턱 밑으로 검붉은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그의 입꼬리는 기괴할 정도로 높게 찢어져 있었다.
"하, 하하…… 크하하하!"
메마른 웃음소리가 무너져 내리는 돔 내벽을 타고 섬뜩하게 울렸다.
서지훈이 피투성이가 된 고개를 쳐들고 우진을 노려보았다.
초점 잃은 그의 두 눈동자에는 지독한 망집과 광기만이 번득이고 있었다.
"소각했다고…… 생각하나, K-07?"
서지훈이 부러진 오른팔을 늘어뜨린 채, 온전한 왼손으로 가슴 안주머니를 더듬었다.
"네깟 버그 덩어리가…… 감히 15년간 구축해 온 이 거대한 질서의 신전을 허물었다고 믿는 거냐고!"
우진은 대답 없이 3미터 앞까지 다가서며 총검을 겨눴다.
"입 닥쳐라, 서지훈. 양자 코어의 메인 커널은 완전히 탔다. 네가 자랑하던 통제 수식도, 5,100만 명을 옭아매려던 국가 라이프 플래너도 전부 재가 됐어. 지상에서는 이미 네 흉계가 전국에 생중계됐다. 네게 남은 건 이 무너지는 지하 감옥뿐이다."
"재가 됐다고?"
서지훈의 웃음소리가 더욱 끔찍하게 꺾였다.
그는 가슴 안주머니에서 검은색 티타늄 케이스를 꺼내 들었다.
손바닥 절반만 한 크기의 직육면체 케이스 겉면에는 붉은색 고밀도 다이아몬드 코팅으로 [GRAND CUBE : MASTER ROOT]라는 글자가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태호의 등에 업혀 있던 강정호 박사의 호흡이 거칠게 멎었다.
"저, 저것은……!"
강정호의 마른 목구멍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안 돼……! 지훈아! 설마 네 놈, 기어이 그걸 완성했던 거냐?!"
우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부친을 돌아보았다.
"아버지, 저게 뭡니까?"
"그랜드 큐브……! 15년 전, 내가 연구소를 폭파하기 직전 폐기 처분했던 최악의 극단적 프로토콜이다!"
강정호 박사가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중앙 코어와 분산 서버, 지상의 모든 단말이 물리적으로 파괴되었을 때를 상정해…… 위성과 양자 통신망, 그리고 전 인류의 뇌파를 강제로 단일 격자로 묶어버리는 자율 신경 동기화 프로그램이야! 저걸 가동하면…… 시스템이 복구되는 게 아니라, 지상의 모든 인간이 자아를 잃고 거대한 연산 부품으로 전락한다!"
서지훈이 비틀거리며 돔 중앙의 부서진 단상 위로 기어올랐다.
단상 한가운데에는 챔버의 전원과 별개로 독립 구동되는 비상 양자 펄스 단말이 붉은 표시등을 깜빡이고 있었다.
국가안전기획처가 지하 6층을 매몰시키기 위해 '코드 테라 인코그니타'를 발동했음에도, 이 단말만은 군용 초고압 배터리와 위성 통신 모듈로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스승님, 당신은 언제나 나약했어."
서지훈이 피 묻은 손가락으로 단말기의 잠금 레버를 젖혔다.
치이익!
가압 밸브가 열리며 짙은 백색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당신은 엔트로피가 역류할까 두려워했고, 인간들의 궤도가 부딪쳐 파멸할까 겁을 먹었지. 그래서 불완전한 타협안이나 내놓으며 도망친 거야. 하지만 나는 달라!"
서지훈이 고함을 질렀다.
그의 목소리는 무너져 내리는 지하의 암반 파열음을 뚫고 앙칼지게 솟구쳤다.
"충돌이 두렵다면 모든 변수를 지워버리면 돼! 불확실성이 공포를 낳는다면,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를 뇌수에서 도려내면 그만이다!"
"서지훈! 멈춰!"
우진이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이능이 사라진 순수한 육체의 근육을 쥐어짜 낸 필사적인 돌진이었다.
그러나 서지훈의 손가락이 더 빨랐다.
서지훈은 망설임 없이 검은 티타늄 케이스를 비상 단말의 슬롯에 처박아 넣었다.
찰칵!
무거운 금속 접속음과 함께, 단말기 상단의 3중 텅스텐 레버가 아래로 꺾였다.
3. 그랜드 큐브의 태동
위이이잉——!
지하 6층 전체를 뒤흔들던 붕괴의 굉음이 일순간 씻은 듯이 멎었다.
소리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공간을 채우고 있던 공기와 소리의 파동조차 짓눌러버릴 만큼 압도적인 초고주파의 묵직한 진동이 바닥에서부터 치솟아 오른 탓이었다.
쿠구구구구!
부서진 바닥 틈새에서 순백의 냉각수 대신 칠흑 같은 암흑의 빛무리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단상 위에 선 서지훈의 등 뒤로, 직경 수십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입체 홀로그램이 허공을 가르며 전개되었다.
그것은 평면의 네모도, 기존의 회전하던 3차원 큐브도 아니었다.
빛을 모조리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새까맣게 응축된 완벽한 정육면체.
표면에는 수십억 개의 기하학적 격자 선이 실핏줄처럼 얽혀 있었고, 그 선들을 따라 푸른색과 붉은색의 이진 데이터 코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SYSTEM INITIALIZE : GRAND CUBE]
[ORBIT OVERRIDE : LEVEL ABSOLUTE]
[GLOBAL NODE SYNCHRONIZATION : STANDBY]
서지훈의 머리 위에서 꺼져가던 흑색 노이즈가 단말기와 공명하며 거대한 검은 육면체의 형상을 다시 구축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이제 서지훈 개인의 도형이 아니었다.
등 뒤에 펼쳐진 거대한 검은 정육면체 홀로그램과 완벽하게 겹쳐지며, 서지훈의 전신을 칠흑의 갑주처럼 감싸 안고 있었다.
"크흐…… 크하하하! 보아라! 이것이 내가 도달한 종착지다!"
서지훈이 피투성이가 된 두 팔을 벌렸다.
그의 눈동자는 완전히 검게 물들어 흰자위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네놈이 양자 코어를 부수고 지상에 진실을 떠벌렸을 때, 인간들이 무어라 하더냐? 환호하더냐? 자유를 노래하더냐?! 아니! 그들은 울부짖었다! 자신의 안전한 네모를 돌려내라고, 내일의 정답을 다시 달라고 빌며 스스로 감옥 문을 두드렸다!"
서지훈의 일갈이 우진의 고막을 때렸다.
"인간은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야! 그들은 태생부터 가축으로 설계되었다! 나 서지훈이…… 이 그랜드 큐브를 통해 전 인류의 뇌간에 단일한 명령을 주입하겠다. 모든 궤도를 하나로 묶어 완벽한 정적(靜寂)을 완성할 것이다!"
치지지직!
단말기 안테나에서 뿜어져 나온 고출력 마이크로웨이브가 상공의 균열부를 뚫고 수직으로 쏘아 올려졌다.
테헤란로 30층 사옥 옥상에 매설되어 있던 비상 군용 위성 송출 안테나가 지하의 신호를 수신해 저궤도 군사 통신 위성으로 쏘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진아……!"
강정호 박사가 입술을 깨물며 신음했다.
"지상의 위성 링크가 완성되면 끝이다……! 지상의 모든 스마트폰, 전자기기, 심지어 대기 중에 방출된 미세 전자기 펄스가 인간의 시신경을 타고 뇌간을 강제 동기화할 게야……! 3분…… 3분도 남지 않았다!"
"3분이면 충분합니다."
우진이 피를 뱉어내며 총검을 비껴들었다.
관자놀이의 흉터가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쑤시는 듯 타올랐지만, 우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도형도, 미래를 보는 변화 감지도, 척력도 사라졌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오직 두 다리의 근육과, 심장의 박동, 그리고 15년간 빼앗겼던 삶을 되찾겠다는 인간 본연의 의지뿐이었다.
4. 살상 명령의 폭풍
타앙!
서지훈의 왼손이 단상 옆에 떨어져 있던 경비 요원의 9밀리 권총을 낚아채 우진을 향해 격발했다.
화약 연기가 뿜어지며 납탄이 공기를 찢었다.
과거의 우진이었다면 변화 감지의 푸른 궤적선을 보고 0.3초 전에 탄도를 피해 몸을 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런 선도 보이지 않았다.
서지훈의 어깨 각도, 총구의 미세한 떨림, 그리고 방아쇠를 당기는 검지손가락의 근육 긴장.
우진은 오직 시각과 전술적 직감에 의지해 바닥을 굴렀다.
콰앙!
총알이 우진의 뺨을 스치며 귀밑바죽을 찢고 지나갔다.
타는 듯한 통증과 함께 피가 튀었지만, 우진의 돌진은 멈추지 않았다.
"죽어라! 버그 자식! 시스템을 어지럽히는 쓰레기 노드 같으니!"
탕!
탕!
탕!
서지훈이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다.
총탄이 무균 타일을 깨부수며 파편을 비산시켰다.
우진은 지그재그로 쇄도하며 부서진 양자 서버의 텅스텐 잔해를 방패 삼아 전진했다.
깡!
깡!
서버 외벽에 총탄이 도비되며 불꽃이 튀었다.
마지막 총탄이 서버 모서리를 뚫고 우진의 왼쪽 어깨를 스쳤다.
살점이 찢겨 나가는 격통이 신경계를 강타했다.
"크윽……!"
우진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지만, 그의 발은 이미 단상 앞 계단을 딛고 있었다.
철컥.
서지훈의 권총에서 공이 치는 메마른 소리가 났다.
슬라이드가 후퇴 고정되며 약실이 비어 있음을 알렸다.
"이런……!"
서지훈이 권총을 내던지고 단말기 옆에 놓여 있던 인과율 집속 단검을 뽑아 들었다.
단검의 칼날에서 시퍼런 플라스마 격자 전류가 지지직거리며 타올랐다.
"기어이 여기까지 기어 올라왔구나, K-07! 하지만 넌 이미 보통 인간에 불과해! 네놈의 뇌간은 불타버렸고, 특이점의 힘도 사라졌다!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서지훈이 단검을 쥐고 내리찍었다.
그랜드 큐브의 데이터와 동기화된 서지훈의 신체는 신경 한계치가 해제되어 비정상적인 속도로 쇄도해 왔다.
단검의 푸른 궤적이 우진의 쇄골을 노리고 낙하했다.
피할 공간은 없었다.
우진은 소총을 버리지 않았다.
대신 소총의 몸통을 비스듬히 세워 단검의 칼날을 받아냈다.
콰지지직!
플라스마 격자 전류가 K2C1의 총열을 녹이며 우진의 손바닥으로 고압 전류를 쏟아부었다.
손바닥의 피부가 타들어가며 단백질 익는 냄새가 진동했다.
"으아아아악!"
우진이 핏대를 세우며 포효했다.
그는 타들어 가는 손의 통증을 억누르며, 총열을 비틀어 서지훈의 칼날을 바깥으로 쳐냈다.
챙!
금속과 플라스마가 맞부딪치며 허공으로 튕겨 나갔다.
균형을 잃은 서지훈의 품이 0.1초간 활짝 열렸다.
우진은 그 찰나의 공백을 놓치지 않았다.
오른발로 서지훈의 부러진 오른쪽 무릎을 가차 없이 짓밟았다.
빠각!
"커허억!"
관절이 완전히 반대로 꺾이며 서지훈이 비명을 질렀다.
그의 상체가 무너지며 앞으로 고꾸라지는 순간, 우진의 왼손 주먹이 서지훈의 턱주가리를 정면으로 강타했다.
퍼억!
이빨 대여섯 개가 피와 함께 허공으로 솟구쳤다.
서지훈의 고개가 뒤로 꺾이며 단상 바닥으로 처박혔다.
5. 붕괴하는 제국의 언어
"쿨럭…… 컥!"
서지훈이 바닥에 나뒹굴며 핏덩이를 게워냈다.
꺾여버린 다리에서는 뼈가 살갗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고, 턱뼈가 박살 나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는 몰골이었다.
그럼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단말기 콘솔을 향하고 있었다.
단말기 모니터의 진행률 표시 막대가 89퍼센트를 넘어서고 있었다.
[위성 송출 링크 : 91%]
[전국 뇌파 동기화 프로토콜 활성화까지 : 47초]
"하…… 하…… 아직이다……."
서지훈이 피투성이가 된 손가락으로 기어가며 단말기의 수동 강제 전송 버튼을 누르려 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버튼만…… 누르면……!"
철컥.
차가운 총검의 날끝이 서지훈의 목덜미 피부를 깊게 찔렀다.
우진이 서지훈의 척추를 군화로 짓누르며 총검을 겨누고 있었다.
칼끝이 살을 파고들며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서지훈의 손가락이 버튼을 불과 5센티미터 앞두고 허공에서 굳어졌다.
"움직이지 마라."
우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 어떤 분노도, 흥분도 섞여 있지 않은, 오직 사형 집행관의 그것과 같은 서늘한 침묵이었다.
서지훈이 턱뼈를 덜덜 떨며 힘겹게 고개를 비틀었다.
"쏠 테면…… 찔러라……! 내가 죽어도…… 40초 뒤면 그랜드 큐브는 자동으로 전송된다……! 위성이 한 번 신호를 쏘면…… 지상의 인간들은 전부…… 영원한 평화를 얻게 돼! 실패도, 배신도, 살인도 없는…… 완벽한 세계가 온단 말이다!"
서지훈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1998년 크리스마스이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난도질당했던 가족들의 시신을 목격했던 그날의 지옥이 그의 일그러진 눈동자 속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내가 틀렸단 말이냐?! 인간에게 자유를 주면…… 결국 탐욕과 증오로 서로를 찢어발길 뿐이야! 우발적 사고라는 이름의 살육이 매일같이 벌어진다고! 그걸 막는 게…… 모든 것을 사각 틀 속에 가두어 숨 쉬게 만드는 게…… 어째서 악이란 말이냐!"
서지훈의 절규가 붕괴하는 지하 암반을 울렸다.
단상 아래에서, 부상당한 몸을 지탱하며 다가온 강정호 박사가 그 모습을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강정호의 눈에도 깊은 슬픔과 회한이 서려 있었다.
"지훈아."
강정호의 메마른 음성이 갈라져 나왔다.
"너는 고통을 없애려 한 것이 아니다. 고통이 두려워…… 살아있다는 감각 자체를 도살하려 한 게지."
"위선 떨지 마!"
서지훈이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당신도 봤잖아! 그 엔트로피의 결손을! 한 놈을 살리면 다른 놈이 죽는 그 저주받은 법칙을! 통제하지 않고 방치하면 문명 자체가 파멸한다고 당신 입으로 말했었잖아!"
"그래, 내가 말했다."
강정호가 고개를 떨구었다.
"내가 오만했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수식 몇 줄로 재단하고, 인간의 삶을 기하학적 도형으로 통제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내 지독한 오만이 널 괴물로 만들었고, 내 아들의 유년기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강정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지훈을 직시했다.
"하지만 지훈아.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상처 입으면서도…… 제 발로 딛고 일어서는 것. 그것이 인간이다. 넘어질까 무서워 평생을 요람 속에 묶어두는 것은 구원이 아니라 박제일 뿐이야."
"닥쳐…… 닥쳐라!"
서지훈이 울부짖으며 바닥을 내리쳤다.
[위성 송출 링크 : 98%]
[카운트다운 : 12초]
단말기 화면이 붉게 점멸하며 최종 승인 경보음을 울려댔다.
삐- 삐- 삐-!
서지훈이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단말기 버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내가 옳아……! 증명해 보이겠다! 그랜드 큐브는 기동한다!"
6. 인간의 시간
서지훈의 손끝이 붉은 전송 버튼에 닿기 직전이었다.
서걱!
우진의 손에 쥐여 있던 K2C1의 총검이 번개처럼 허공을 갈랐다.
단말기와 서지훈의 목덜미 사이를 잇고 있던 비상 양자 데이터 케이블 다발이 단칼에 절단되었다.
파지지직!
푸른 불꽃이 튀며 고전압 전류가 사방으로 튀었다.
서지훈의 머리 위에 덧씌워져 있던 거대한 검은 육면체의 형상이 허망하게 일그러지며 먼지처럼 바스러져 내렸다.
"아…… 아아……!"
서지훈이 텅 빈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동시에 우진은 총을 내던지고,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단말기 중앙에 박혀 있던 티타늄 케이스 슬롯을 향해 내리찍었다.
콰직!
단검의 칼날이 정밀하게 설계된 [GRAND CUBE]의 메인 프로세서 칩 한가운데를 정확히 관통했다.
찌르르르릉!
단결정 다이아몬드 코어가 박살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단말기 모니터가 99퍼센트에서 멈추더니, 흉측한 노이즈와 함께 새하얗게 탈색되었다.
[FATAL ERROR : CORE PROCESSOR DESTROYED]
[TRANSMISSION ABORTED]
[ALL ORBIT SYSTEMS : PERMANENT SHUTDOWN]
서지훈의 등 뒤에 펼쳐져 있던 직경 수십 미터의 거대한 검은 정육면체 홀로그램이 신기루처럼 흔들렸다.
표면을 흐르던 수십억 개의 제어 코드들이 산산조각 나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것은 마치 15년간 도시를 지배해 온 거대한 사각 감옥이 마침내 그 껍데기를 벗고 허무하게 증발하는 광경과도 같았다.
"안 돼…… 안 돼……!"
서지훈이 부서진 단말기 파편을 끌어안으며 오열했다.
그의 머리 위에서는 더 이상 그 어떤 기하학적 도형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직 피와 눈물로 얼룩진, 한없이 나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한 마리 인간의 형상만이 바닥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쿠구구구궁!
그 순간, 천장 중앙을 받치고 있던 최후의 텅스텐 대들보가 굉음을 내며 꺾였다.
수십 톤에 달하는 콘크리트 암반 덩어리가 단상 바로 위를 향해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했다.
"우진아! 피해라!"
강정호 박사가 소리쳤다.
박태호가 필사적으로 우진의 옷자락을 낚아채며 뒤로 몸을 던졌다.
우진이 바닥을 굴러 단상 아래로 떨어져 내린 바로 그 찰나.
쾅——!
거대한 암반이 단상 전체를 무자비하게 짓뭉갰다.
부서진 단말기와 함께, 울부짖던 서지훈의 신체가 수십 톤의 잔해 밑으로 흔적도 없이 매몰되었다.
자욱한 석회 먼지가 폭풍처럼 뿜어져 나오며 돔 내부를 새하얗게 뒤덮었다.
"콜록! 쿨럭……!"
태호가 우진을 부축해 일으켰다.
"형님! 괜찮으십니까?!"
우진은 피를 닦아내며 무너져 내린 단상을 돌아보았다.
거대한 바위 더미 아래, 붉은 피가 한 줄기 배어 나오고 있었으나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도시 전체의 운명을 통제하려 했던 설계자의 최후는, 그가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던 우발적인 콘크리트 낙하 사고 앞에서의 비참한 압사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넥스트 큐브의 마지막 망령이었던 그랜드 큐브는 영원히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 속에 파묻혔다.
"우진아…… 서둘러야 한다."
강정호 박사가 붕괴하는 천벽을 가리켰다.
"기폭 타이머가…… 1분도 남지 않았다. 배수구로 가야 해!"
7. 지상으로 향하는 길
콰르릉!
지하 6층의 외곽 격벽들이 도미노처럼 무너지며 거대한 먼지 폭풍을 토해냈다.
우진과 태호는 강정호 박사를 번갈아 부축하며, 돔 구석에 위치한 특수 고압 냉각수 배출 갱도의 비상 해치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녹아내린 서버 랙들이 발목을 잡았고, 위에서 떨어지는 콘크리트 파편들이 어깨와 등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열렸습니다!"
태호가 비상 해치의 수동 밸브를 온몸의 무게로 내리눌렀다.
끼이익!
녹슨 강철 해치가 열리며, 지하 배수 갱도의 시커먼 아가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관로 내부에서는 한강 하류 암반 수계로 이어지는 거센 지하수 물살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박사님부터!"
태호가 강정호를 조심스럽게 안아 관로 안쪽의 비상 슬라이드 완충망으로 밀어 넣었다.
"우진아, 태호야! 어서!"
강정호가 어둠 속에서 손을 뻗었다.
태호가 몸을 던져 관로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순간, 우진이 해치 손잡이를 쥐고 뒤를 돌아보았다.
지하 6층 양자 슈퍼컴퓨터 코어룸 전체가 완전히 함몰되고 있었다.
군용 테르밋의 고온 플라스마 불꽃이 수천 도의 열기를 뿜어내며 모든 서버와 증거들을 유리화시키고 있었다.
그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우진은 15년간 자신을 얽매어 왔던 유년기의 악몽과 차가운 기하학의 족쇄가 완전히 불타 사라지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우진은 망설임 없이 관로 속으로 몸을 던지며 해치를 안쪽에서 걸어 잠갔다.
쾅!
등 뒤에서 핵폭발에 맞먹는 둔중한 진동과 함께 지하 6층 전체가 영구히 무너져 내리는 충격파가 배수관 외벽을 강타했다.
쏴아아아아——!
거센 암반 지하수의 물살이 세 사람의 신체를 집어삼키며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맹렬하게 휩쓸고 내려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차가운 물이 폐부를 찌르는 고통 속에서도 우진은 눈을 부릅떴다.
어둠 너머, 아득한 저편에서 희미한 빛 한 점이 일렁이고 있었다.
역삼역 폐쇄 환기 터널 하부 집수정으로 이어지는 출구였다.
얼마나 물살에 휩쓸려 내려갔을까.
푸하앗!
세 사람은 마침내 거센 물살을 뚫고 콘크리트 집수정 바닥으로 튕겨져 나왔다.
녹슨 철제 그레이팅 위로 엎어진 우진은 바닥을 짚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하악…… 하아……!"
머리 위에서는 지하철 2호선 본선 터널의 퀴퀴한 쇳내와 함께, 지상에서 전해져 오는 아득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살았다…… 우리가…… 해냈습니다……."
태호가 바닥에 대자로 드러누우며 피 섞인 웃음을 터뜨렸다.
강정호 박사 역시 젖은 얼굴을 쓸어올리며 벽에 기대앉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우진은 비틀거리며 철제 사다리를 딛고 일어섰다.
환기 터널 상부의 철망 틈새로, 서울 테헤란로의 새벽하늘이 희뿌옇게 밝아오는 것이 보였다.
지상에서는 여전히 계엄군의 장갑차 소리와, 확성기로 울려 퍼지는 통제 방송, 그리고 광기에 휩싸였던 시위대의 웅성거림이 뒤섞여 혼란스럽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시스템의 완벽한 계산에 의해 통제되는 각본이 아니었다.
살아 숨 쉬는 인간들이 부딪치고, 아파하고, 혼란스러워하며 스스로 길을 찾아가는 진짜 세상의 소음이었다.
우진이 품 안에서 진동하는 구형 단파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속에서, 다급하고도 울먹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치익…… 우진 씨!
들려요?!
우진 씨…… 제발 대답해요……!
한서연이었다.
그녀의 목소리 뒤편으로 거친 군화 소리와 유리창이 깨지는 굉음이 함께 섞여 들어오고 있었다.
- 통신 중계국이…… 계엄군에게 포위됐어요……!
민경택 차장이 지휘하는 특수임무대가…… 문을 부수고 있어요……!
채린 씨의 신호도…… 파주에서 완전히 끊겼…… 치이익!
우진의 눈빛이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시스템의 심장은 부서졌으나, 지상에 똬리를 튼 권력 카르텔의 망령은 여전히 동료들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우진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무전기의 송신 버튼을 눌렀다.
"서연 씨, 버텨요."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어떤 강철보다 단단했다.
"지금 올라갑니다."
이능을 잃어버린 평범한 인간 강우진의,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온전한 자유의지를 품은 진짜 싸움이 이제 지상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