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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6화

지워지지 않는 검은색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꼭두각시의 서약

 

편의점의 형광등 불빛은 언제나처럼 지나치게 하얗고 시렸다.

 

굳게 닫힌 자동문 유리창 너머로, 카운터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종이 뭉치를 넘겨보는 편의점 점주 김 씨(金氏)의 굽은 등덜미가 눈에 들어왔다.

 

강우진은 문손잡이 앞에서 걸음을 멈춘 채, 숨을 들이켜며 시선을 치켜올렸다.

 

김 씨의 정수리 위 약 10cm 상공.

 

그곳에는 세상의 빛을 죄다 집어삼킨 것 같은 칠흑의 세모(△)가 공기를 짓이기며 불길하게 회전하고 있었다.

 

지독하게 짙은 검은색이었다.

 

지하철 선로로 떨어질 뻔했던 어린아이 민우의 머리 위에 떠 있던 붉은 세모와는 결이 완전히 달랐다.

 

그것이 자연적인 실수나 순간적인 부주의로 인한 '파멸의 경고'였다면, 지금 김 씨의 머리 위에 뜬 검은 세모는 누군가 정교하게 조립하고 강제한 '조작된 덫'이었다.

 

세모의 세 꼭짓점에서는 가느다란 검은 실선들이 연기처럼 피어올라 천장 환풍구 너머, 어두운 도시의 상공 어딘가로 까마득히 뻗어 나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인형사의 손가락 끝에 매달려 조종당하는 꼭두각시 인형의 줄처럼 말이다.

 

우진은 관자놀이를 강하게 짓누르는 유년기 흉터의 욱신거림을 참아내며 자동문 센서를 밟았다.

 

맑은 전자 벨 소리가 정적을 깼다.

 

"어서 오세…… 어, 강 대리?"

 

카운터에 놓인 서류를 황급히 가슴팍으로 숨기려던 김 씨가 상대가 우진임을 확인하고는 허탈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름에 찌든 편의점 조끼를 걸친 그의 얼굴은 며칠 사이에 반쪽이 되어 있었다.

 

퀭하게 파인 눈두덩 아래로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고, 손톱 밑은 때와 담배 진으로 거뭇했다.

 

"이 야밤에 어쩐 일이야? 얼굴이 왜 그렇게 굳었어?"

 

"문자 보고 왔습니다, 사장님."

 

우진은 카운터 앞으로 바짝 다가섰다.

 

테이블 위에 비뚤게 놓인 종이 뭉치 상단에 인쇄된 푸른색 정육면체 로고가 선명했다.

 

[큐브 네트웍스 자산운용 - 특별 확정수익형 사모 투자 계약서]

 

우진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15년 전 실종된 아버지가 남긴 낡은 하드커버 일지 속에서 보았던, 시스템의 하부 집행 조직이라 적혀 있던 바로 그 표식이었다.

 

소시민들의 목을 조르고 강제로 궤도를 이탈시키는 배후의 하수인들.

 

"이거, 어디서 난 겁니까?"

 

"아, 이거?"

 

김 씨는 멋쩍은 듯 마른 침을 삼키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벼랑 끝에 몰린 도박꾼 특유의 열띤 광기가 서려 있었다.

 

"지난주부터 본사 슈퍼바이저 소개로 어떤 자산관리사 양반이 찾아왔거든. 요즘 편의점 매출도 바닥이고, 본사 위약금 독촉 때문에 잠도 못 자던 차였는데……. 이 회사가 아주 기가 막힌 물건을 들고 왔어. 원금을 100% 보장해 주는데, 매달 8%씩 확정 배당을 꽂아준다는 거야."

 

"월 8%요?"

 

"그래! 연이자도 아니고 무려 매달 8%! 내가 편의점 보증금 담보 잡히고 마이너스 통장 탈탈 털어서 1억만 넣으면, 매달 800만 원이 들어온다는 소리잖아. 본사 위약금도 갚고 편의점 접고 쉴 수도 있어. 내일 아침 아홉 시에 그쪽 지점장이 직접 도장 찍으러 오기로 했네."

 

김 씨의 손이 떨리며 계약서 마지막 장의 서명란을 가리켰다.

 

이미 그의 서명과 지장이 반쯤 찍혀 있었다.

 

그 순간, 김 씨의 머리 위에서 회전하던 검은 세모의 모서리가 맹렬하게 팽창하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우진의 망막에만 보이는 검은 스파크가 허공을 튀었다.

 

'이 도장을 찍는 순간, 이 사람의 인생은 완전히 끝난다.'

 

회생 불가능한 신용불량, 보증금 압류, 그리고 길거리로 나앉는 파멸의 궤도.

 

우진은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손을 뻗었다.

 

"계약서, 제가 잠깐 봐도 되겠습니까?"

 

"강 대리가 대기업 기획실에서 일하니까 이런 법률 문서는 나보다 훨씬 잘 보겠지. 안 그래도 한 번 보여주고 싶었어."

 

김 씨가 건넨 서류를 받아 든 우진은 빠르게 활자들을 훑어 내렸다.

 

겉포장은 현란했다.

 

금융감독원 인가라는 허울 좋은 수식어와 블록체인 기반의 안전 결제 보증이라는 단어들이 화려하게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제4조와 제7조의 깨알 같은 단서 조항을 읽어 내리는 순간, 우진의 눈매가 서늘하게 굳었다.

 

"사장님."

 

"응? 왜 그래, 문제 있어?"

 

"여기 4조 2항 보세요. '본 투자금은 비상장 전환사채 매입에 전액 운용되며, 시장 상황 변동에 따른 환매 중단 시 투자자는 일체의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그리고 여기 7조 3항. '담보물권(편의점 임대차 보증금 및 거주 부동산)의 채권 최고액 설정 권한을 운용사에 위임하며, 손실 발생 시 즉각 임의경매를 실행한다.'"

 

우진이 종이를 카운터 위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원금 보장이 아닙니다. 전형적인 폰지 사기예요. 돈을 입금하는 순간 담보로 잡힌 보증금과 집까지 고스란히 저놈들 손에 넘어가는 구조입니다. 첫 달이나 둘째 달에 배당금 몇 푼 쥐여주다가 법인 청산하고 잠적하면 그만인 껍데기 회사라고요."

 

김 씨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 그럴 리가 없어! 그 본사 담당자 놈이 공증까지 서준다고 했는데……!"

 

"공증을 서는 주체가 이 페이퍼 컴퍼니의 명의상 대표인 노숙자일 겁니다. 사장님, 내일 아침에 계약서 들고 온다는 놈 절대 만나지 마세요. 당장 이 종이 찢어버리시고, 본사 위약금 문제는 정식으로 상생협력위원회에 분쟁 조정 신청부터 넣으셔야 합니다."

 

김 씨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심하게 흔들렸다.

 

눈앞의 헛된 희망이 무너져 내리는 것에 대한 공포와, 우진의 냉철한 분석이 주는 설득력 사이에서 김 씨는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사기란 말이지? 내가 속은 거야?"

 

"제가 책임지고 말씀드립니다. 여기에 도장 찍히는 순간, 사장님 며칠 안으로 길바닥에 나앉습니다."

 

우진의 단호한 목소리에 김 씨가 허탈하게 주저앉았다.

 

떨리는 그의 손이 계약서를 쥐어뜯듯 움켜쥐었다.

 

찌이익-.

 

거친 파열음과 함께 큐브 네트웍스의 화려한 서류 뭉치가 두 동강으로 찢겨 나갔다.

 

김 씨가 서류 파편을 휴지통에 처박으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하마터면…… 하마터면 내 손으로 목을 매달 뻔했군. 고마워, 강 대리. 정말 고마워……."

 

2. 기만적인 백색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찢겨진 계약서가 쓰레기통 바닥에 닿자마자, 김 씨의 머리 위에 머물러 있던 공기가 기괴하게 뒤틀렸다.

 

쐐애애액-!

 

고막을 긁는 듯한 날카로운 이명이 우진의 귓전을 때렸다.

 

김 씨의 정수리 위에서 칠흑 같은 빛을 뿜어내던 검은 세모(△)가 멈칫하더니, 그 표면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가 불에 덴 것처럼 타올랐다.

 

윽.

 

우진은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검은 세모의 세 꼭짓점이 마치 풍선처럼 바깥으로 부풀어 올랐다.

 

천장으로 이어져 있던 꼭두각시 줄 같은 검은 실선들이 힘없이 툭, 툭 끊어져 나가며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윽고 검은 외피가 부서져 내린 자리에서, 익숙하고 온화한 백색의 빛이 피어올랐다.

 

네 개의 반듯한 변.

 

평화롭고 안정된 질서를 상징하는 '백색 네모(□)'가 김 씨의 머리 위에 완벽한 균형을 이루며 안착했다.

 

'바뀌었다.'

 

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카운터를 짚었다.

 

검은 세모가 백색 네모로 돌아왔다.

 

타의에 의해 조작된 파멸의 궤도를, 자신의 직접적인 조언과 개입으로 지워내고 원래의 일상으로 되돌려놓은 것이었다.

 

지난번 지하철 승강장에서 아이를 구했을 때처럼, 인과율의 궤도를 수정하는 데 성공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동시에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오한이 흘러내렸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인과율의 에너지가 다른 곳으로 튄 건가?'

 

우진은 급히 고개를 돌려 편의점 내부를 살폈다.

 

과자 진열대 코너, 음료 쇼케이스 앞, 바깥 인도.

 

다행히 심야 시간이라 편의점 안팎에는 김 씨와 우진 단둘뿐이었다.

 

시공간적으로 인접한 다른 관측 대상이 없었다.

 

우진 자신의 머리 위에는 도형이 뜨지 않으니, 주변에 궤도가 깨질 다른 인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셈이었다.

 

편의점 안에는 오직 형광등의 백색 소음만이 감돌았다.

 

김 씨는 쓰레기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연신 가슴을 쓸어내렸다.

 

"내가 눈이 멀었었어. 당장 내일부터 본사랑 계약 해지 절차를 밟든지, 다른 알바를 뛰든지 해서 어떻게든 버텨봐야지. 강 대리 아니었으면 내 인생 정말 끝장날 뻔했네."

 

"조금만 더 버텨보세요, 사장님. 분명 다른 길이 있을 겁니다."

 

우진은 편의점을 나서기 전, 김 씨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백색 네모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흠집 하나 없는 온전한 정사각형.

 

그것은 분명 위기를 넘긴 소시민의 평온한 궤도였다.

 

편의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늦은 밤의 차가운 공기가 달아오른 뺨을 식혀주었다.

 

우진은 주머니에 든 아버지의 연구 노트를 만지작거렸다.

 

'검은 세모도 결국 물리적 개입으로 무너뜨릴 수 있어.

 

거대 배후 세력이 아무리 궤도를 설계해도, 인간의 선택과 진실이 개입하면 깨어질 수 있는 조작에 불과해.'

 

가슴 한구석을 짓누르던 지하철 사고의 죄책감이 아주 조금은 덜어지는 듯했다.

 

우진은 빠른 걸음으로 어두운 골목길을 지나 자취방으로 향했다.

 

내일 아침 출근길에 다시 편의점에 들러 김 씨의 상태를 확인하리라 마음먹으면서 말이다.

 

그것이 거대한 시스템이 파놓은 완벽한 함정의 겉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우진은 그 시점까지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3. 덮어쓰기 알고리즘

 

이튿날 아침 7시 30분.

 

늦가을의 흐릿한 아침 햇살이 테헤란로 빌딩 숲 사이로 내려앉고 있었다.

 

셔츠 깃을 여미며 골목길을 빠져나오던 강우진의 발걸음이 돌연 우뚝 멈춰 섰다.

 

편의점 앞 공기가 심상치 않았다.

 

늘 경쾌한 벨 소리와 함께 24시간 환하게 켜져 있어야 할 편의점의 유리 통창에 붉은색 글씨가 박힌 커다란 경고장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부동산 점유이전금지 가처분 및 유체동산 압류]

 

서울중앙지방법원 집행관의 직인이 찍힌 차가운 봉인 테이프가 자동문 틈새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편의점 내부는 불이 꺼진 채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카운터 위에는 서류와 잡동사니들이 어지럽게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우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어젯밤 분명 사기 계약서를 찢어버렸고, 김 씨의 머리 위에는 분명 백색 네모가 떠 있었다.

 

그런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법원 압류라니?

 

"어휴, 쯧쯧쯧…… 결국 사달이 났구먼."

 

옆 건물 1층에서 셔터를 올리며 나오던 세탁소 주인이 혀를 차며 다가왔다.

 

우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세탁소 주인을 향해 돌아섰다.

 

"사장님! 여기 김 사장님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왜 법원에서 압류 딱지가 붙어 있는 거죠?"

 

세탁소 주인은 담배를 입에 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강 대리도 몰랐구먼? 오늘 새벽 다섯 시쯤이었나, 웬 검은 양복 입은 깍두기 같은 사채업자 놈들이 우르르 몰려왔어. 알고 보니 김 사장 그 양반 친동생 놈 있잖아. 지방에서 사업한답시고 허구한 날 사고 치던 놈."

 

"……친동생이요?"

 

"그 망할 놈이 김 사장 명의의 인감도장이랑 편의점 전세 계약서를 몰래 빼돌려서 제3금융권 사채에 보증을 서고 야반도주를 했다더군. 채무 액로 온갖 사채가 얽혀 전 재산이 날아가게 생겼어. 채권자들이 법원 집행관 대동하고 들이닥쳐서 점포고 집이고 싹 압류 딱지 붙여버렸지 뭐야."

 

쿵, 하고 머릿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바위가 떨어져 내리는 듯한 충격이 일었다.

 

"그럼 김 사장님은요? 사장님은 지금 어디 계십니까?"

 

"구급차 실려 가는데 숨도 제대로 못 쉬더라고. 방금 응급실 거쳐서 중환자실로 올라간 사모님한테 연락받았는데, 급성 뇌출혈이라더군. 수술 들어가도 가망이 거의 없다면서…… 어휴, 평생 남한테 해코지 한번 안 하고 법 없이 살던 양반이 왜 이런 날벼락을 맞는지 몰라."

 

세탁소 주인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우진의 귓가에 웅- 하는 거대한 이명과 함께 관자놀이의 흉터가 찢어질 듯한 통증을 뿜어냈다.

 

압류 딱지가 붙은 유리창 너머, 카운터 바닥에 떨어진 김 씨의 벗겨진 슬리퍼 한 짝이 보였다.

 

'사기 계약을 막았더니…… 친동생의 사채 보증?'

 

우진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우연이 아니었다.

 

이것은 단순한 비극의 연쇄가 아니었다.

 

어젯밤, 자신이 개입하여 큐브 네트웍스의 투자 사기라는 파멸 경로를 차단하자마자, 시스템은 기다렸다는 듯이 '친동생의 배임과 사채 보증'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변수를 강제로 투입한 것이었다.

 

사건의 수단과 경로는 바뀌었지만, '김 씨의 전 재산 파탄과 육체적 파멸'이라는 최종 결말은 단 1밀리미터의 오차도 없이 집행되었다.

 

'궤도 강제 덮어쓰기(System Overwrite)……!'

 

검은 세모의 진정한 공포가 우진의 척수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붉은 세모가 우연히 마주친 궤도의 파선(破線)이라면, 검은 세모는 시스템이 반드시 집행하기로 낙점한 '확정된 사형 선고'였다.

 

하나의 길을 막으면 시스템은 즉각 보정 알고리즘을 가동하여 또 다른 파멸의 길을 뚫어버린다.

 

개인이 현장에서 벌이는 미시적인 저항 따위는, 거대한 통제 시스템의 덮어쓰기 알고리즘 앞에서 한낱 무력한 몸부림에 불과했던 것이다.

 

4. 수첩 속의 진실

 

우진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만원 지하철 2호선에 몸을 실었지만, 눈앞에 보이는 승객들의 얼굴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의 머리 위에 반듯하게 떠 있는 수많은 백색 네모(□)들.

 

그것이 과연 진짜 평화였을까?

 

시스템이 정해준 가축의 우리 안에서,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정해진 시간에 밥을 먹으며 도살의 차례를 기다리는 무지한 자들의 평온이 아니었던가.

 

박민재 팀장도 그랬다.

 

그 역시 배후 세력의 꼭두각시로서 우진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자마자, 시스템에 의해 즉각 감사팀에 넘겨져 가차 없이 폐기 처분되었다.

 

김 씨 역시 큐브 네트웍스의 덫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사채업자라는 대리 집행자를 통해 완벽하게 지워졌다.

 

검은색(Black).

 

그것은 외부의 조작이자,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었다.

 

회사에 도착해 기획 2팀의 책상에 앉았지만 모니터의 활자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우진은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아버지 강정호의 가죽 수첩을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겨, 어젯밤 미처 해독하지 못했던 후반부의 거친 필적을 더듬었다.

 

15년 전, 아버지는 이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시스템의 항상성 알고리즘 앞에서 통계적 노이즈에 불과하다.

 

개별 노드(개인)의 궤도를 수정하려는 시도는 언제나 두 가지 벽에 부딪힌다.

 

첫째, 인과율의 보존 법칙.

 

방출된 붕괴 에너지는 반드시 인접 노드로 전이되어 대리 참사를 유발한다.

 

둘째, 시스템의 강제 덮어쓰기(System Overwrite).

 

검은 궤도(Black Orbit)에 포섭된 개체는 국소적 개입으로 구원할 수 없다.

 

중앙 연산 장치는 목표 노드의 파멸 값이 달성될 때까지 무한히 새로운 파멸 변수를 생성하여 덮어쓴다.]

 

우진의 눈동자가 글귀 위에서 얼어붙었다.

 

아버지의 기록은 소름 끼칠 정도로 정확했다.

 

아버지는 이미 15년 전에 이 잔혹한 메커니즘을 증명해 두고 실종된 것이었다.

 

우진의 떨리는 손가락이 노트의 마지막 줄을 짚었다.

 

[그러므로 검은 궤도를 끊어내는 유일한 방법은 가지를 치는 것이 아니다.

 

궤도를 송출하고 통제하는 근원.

 

도시의 보이지 않는 심장, '중앙 코어(Core)'를 찾아내 완전히 파괴해야만 한다.]

 

중앙 코어.

 

시스템의 중추.

 

우진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말단에서 발버둥 치는 것만으로는 아무도 구할 수 없다.

 

아이를 구하면 옆의 청년이 쓰러지고, 편의점 주인을 구하면 다른 방식으로 기어이 목숨을 앗아간다.

 

큐브 네트웍스, 네모 프로젝트, 그리고 테헤란로 지하 깊은 곳 혹은 도시 상공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을 궤도 통제 시스템.

 

'내가 끝내야 한다.'

 

우진의 눈빛 속에 깃들어 있던 혼란과 죄책감이 서서히 차가운 분노와 결의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그저 지켜보고 도망치는 관찰자로 남을 수는 없었다.

 

아버지의 실종, 자신에게 발현된 기괴한 시야, 그리고 무고한 사람들을 장기말처럼 부숴버리는 이 거대한 감옥.

 

이 시스템의 목을 꺾어버리지 않는 한, 언젠가는 우진 자신 역시 머리 위에 검은 세모를 띄운 채 차가운 아스팔트 위로 내던져질 터였다.

 

우진은 수첩을 덮어 가슴 안주머니 깊은 곳에 갈무리했다.

 

시계 초침이 정각 9시를 가리키며 무겁게 흔들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