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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62화

서지훈의 최후 통첩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옹벽의 격돌과 상륙

 

거칠게 요동치는 서해의 탁한 파도가 찢어질 듯 팽팽한 비상 고무보트의 선수(船首)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축축하고 비릿한 바닷바람이 뺨을 얼얼하게 때렸지만, 강우진(姜宇鎭)의 시선은 단 1밀리미터도 흔들리지 않았다.

 

불과 이백 미터 전방, 칠흑 같은 바다 위에 거대한 콘크리트 절벽처럼 솟아 있는 인천 옛 석탄 부두 4부두의 수직 옹벽이 그 위압적인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정규 항로와 여객 터미널 주변은 이미 상임이사회가 장악한 경찰과 해경의 경비정들이 촘촘한 경계망을 펼쳐둔 상태였다.

 

접근할 수 있는 합법적인 수로는 전무했다.

 

오직 날카로운 암초 밭과 거대한 옹벽으로 막혀 있어 선박의 접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저 버려진 폐쇄 구역만이 유일한 빈틈이었다.

 

"충돌 십 초 전이다! 모두 꽉 잡아라!"

 

조타석에 선 늙은 선장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엔진 스로틀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8기통 기계식 엔진이 비명을 지르며 고무보트 밑바닥으로 육중한 진동을 뿜어냈다.

 

선체의 양옆으로 하얗게 부서진 포말이 솟구치며 맹렬한 속도로 옹벽을 향해 돌진했다.

 

우진은 젖은 코트 자락 속에서 차가운 감촉의 물건을 조용히 그러쥐었다.

 

아버지가 15년간 코어 챔버의 액체 속에 갇혀 목숨과 맞바꿔 깎아낸 단결정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였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단단하고 각진 모서리의 감촉이 뼛속까지 시린 현실을 일깨웠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는 더 이상 어떠한 기하학적 도형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난 수년간 지독한 편두통과 함께 세상 사람들의 머리 위를 맴돌던 백색 네모, 위태롭게 회전하던 붉은 세모, 비정상적으로 왜곡된 꼭두각시 줄의 잔상 따위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그것은 초월적인 이능이 아니었다.

 

일곱 살 어린 시절, 시스템의 가축화로부터 아들을 뜯어내기 위해 아버지가 떨리는 손으로 집도했던 신경 궤도 절제술의 상흔.

 

끊겨 나간 뇌신경과 시신경이 세상의 사각 격자망을 억지로 해석하려 발버둥 치며 토해내던 영구적인 공감각적 왜곡 노이즈였다.

 

그 거짓된 껍질이 완전히 벗겨진 지금, 우진의 망막 깊은 곳에는 오직 투명하고 서늘한 순수한 푸른빛만이 깃들어 있었다.

 

도형의 굴레에 기대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두 눈과 의지로 직시하는 진짜 세상이었다.

 

"우진 씨!"

 

옆자리의 한서연(韓瑞淵)이 거친 엔진 소음을 뚫고 외치며 가슴팍의 방수 팩을 단단히 붙들었다.

 

소월도 지하 요새에서 목숨을 걸고 빼돌린 넥스트 큐브의 수도권 인프라 테러 기밀 증거, 외장 하드가 그녀의 품 안에서 안전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소금기에 젖어 파리했지만, 눈빛만큼은 흔들림 없는 단단함을 머금고 있었다.

 

"충돌한다! 뛰어내려!"

 

선장의 포효와 동시에, 고무보트의 둥근 고무 범퍼가 옹벽 하단의 돌출된 콘크리트 슬래브와 정면으로 격돌했다.

 

쿠우우웅!

 

고막을 찢는 파열음과 함께 보트의 선수가 우그러지며 맹렬한 반발력으로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찢겨 나간 고무 튜브 사이로 고압의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우진은 충돌 직전, 체내 방화벽 백신 코어와 연결된 특이점의 신경망을 단번에 끌어올렸다.

 

우우웅.

 

그의 몸을 감싸 안듯 투명한 공간 척력이 폭발적으로 전개되며, 서연과 선장을 덮쳐오던 살인적인 충격파를 바깥으로 밀어냈다.

 

동시에 세 사람의 신체가 허공으로 튕겨져 올라 옹벽 상단의 녹슨 철제 난간을 넘어 아스팔트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콰과과광!

 

뒤이어 버려진 고무보트가 암초와 옹벽 사이에 끼어 산산조각이 나며 차가운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팔꿈치와 무릎이 긁혀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 따위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그는 즉시 서연과 선장의 상태를 살폈다.

 

"기자님, 선장님, 괜찮으십니까?"

 

서연이 거칠게 기침을 뱉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외장 하드는 멀쩡했다.

 

선장 역시 멍든 어깨를 매만지며 침을 퉤 뱉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쇄된 석탄 부두의 광활한 공터에는 녹슨 크레인과 낡은 컨테이너 더미만이 음산한 침묵 속에 방치되어 있었다.

 

바다 너머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만이 스산하게 울려 퍼지는, 완벽한 사각지대였다.

 

2. 어둠 속의 탈취와 질주

 

부두 관리사무소로 쓰였던 낡은 가설 건물 뒤편으로 다가가자, 선장이 능숙하게 주머니에서 접이식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그곳에는 번호판에 흙탕물이 잔뜩 튄 낡은 1톤 화물 트럭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된 듯 타이어에 바람이 조금 빠져 있었지만, 시동을 걸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내가 예전에 이 부두에서 일할 때 쓰던 놈이다. 기름도 반쯤 차 있을 게야."

 

선장이 운전석 문을 따고 들어가 스티어링 휠 하단의 커버를 뜯어낸 뒤, 두 가닥의 구리 배선을 맞부딪쳤다.

 

치지직, 타닥!

 

푸르스름한 스파크가 튀더니, 낡은 디젤 엔진이 덜컹거리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부르르릉!

 

우진과 서연은 곧바로 조수석에 올라탔다.

 

선장은 거침없이 클러치를 밟고 기어를 넣으며 가속 페달을 밟았다.

 

트럭은 녹슨 부두 정문의 쇠사슬을 들이받아 끊어내고, 인천 외곽의 한적한 해안 도로를 향해 쏜살같이 뛰쳐나갔다.

 

차창 밖으로 인천 도심의 낯선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새벽을 지나 아침으로 접어드는 시간이었지만, 거리는 기괴할 정도로 활기를 잃어버린 채 얼어붙어 있었다.

 

주요 교차로마다 방탄복을 입은 경찰 기동대와 검은 정장을 입은 넥스트 큐브의 사설 보안 요원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삼엄한 검문을 벌이고 있었다.

 

곳곳에 설치된 대형 전광판에는 붉은색 글씨로 국가 기간망 비상경계령이 번뜩이고 있었다.

 

'상임이사회가 계엄 수준의 통제를 걸었다더니, 사실이었군.'

 

우진은 서늘한 눈빛으로 바깥을 응시했다.

 

머리 위의 도형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기 중에 무겁게 가라앉아 있는 인과율의 압력과 긴장감은 살갗을 바늘처럼 찔러왔다.

 

광주 물류센터의 큐브 핏 에어 350만 대 폐기와 소월도 요새 함락으로 인해 시스템에 발생한 천문학적인 결손 엔트로피, 84만 EP.

 

그 거대한 균열을 메우기 위해 적들은 도시 전체를 거대한 사각 감옥으로 틀어막고 있었다.

 

지직, 치지지직.

 

그때 대시보드 위에 올려둔 군용 휴대용 무전기에서 거친 잡음이 터져 나왔다.

 

우진이 즉시 볼륨을 높이고 채널을 144.820MHz에 맞췄다.

 

"우진 형! 들려? 내 목소리 들려?!"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파주 거점 7번 은신처의 송민규였다.

 

그의 목소리는 극심한 피로와 긴장감으로 잔뜩 갈라져 있었다.

 

"민규야, 나다. 인천 4부두 옹벽 돌파해서 상륙했다. 차량 확보해서 서울로 이동 중이다."

 

"하아……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민규가 깊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곧이어 무전기 너머에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채린의 떨리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우진 씨……! 무사하신 거죠? 다치신 데는 없어요?"

 

"괜찮습니다, 채린 씨. 채린 씨야말로 몸은 좀 어떻습니까? 소월도에서 척력을 너무 무리하게 끌어다 썼잖습니까."

 

"전…… 전 괜찮아요. 조금 어지러운 것 빼고는 버틸 만해요. 그것보다…… 지혜랑 태호가……."

 

채린의 목소리가 끝내 물기를 머금으며 잘려 나갔다.

 

15년 전 연구소 참사 당시 함께 갇혀 고통받았던 어린 피실험자 동생들.

 

그 아이들의 뇌간에 자폭 테르밋이 심긴 채, 테헤란로 본사 지하 100미터 오리진 코어로 내려가는 수직 중성자 차폐 터널에 살아있는 방패막이로 배치되었다는 사실은 그녀에게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우진은 이를 악물었다.

 

"반드시 구합니다. 내 손으로 놈들의 통제 회로를 끊어내고, 지혜와 태호, 그리고 내 아버지까지 전부 데리고 나올 겁니다."

 

그의 단호한 맹세에 무전기 너머의 흐느낌이 멎고, 민규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형, 지금 서울 상황이 미쳤어. 넥스트 큐브 본사가 있는 테헤란로 일대는 민간인 출입이 완전히 통제됐어. 반경 1킬로미터에 전파 차단망이 깔려서 일반 휴대전화는 전부 먹통이야. 게다가 방금 본사 내부 인트라넷을 우회 스캔했는데…… 놈들이 강정호 박사님을 데리고 지하 100미터 오리진 코어 챔버로 진입했어."

 

우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박사님의 상태는?"

 

"뇌간 강제 연동 시퀀스가 이미 시작됐어. 박사님의 뇌세포에 고전압 인과율 펄스를 쏴서 억지로 오리진 코어의 2차 커널 봉인을 풀려고 하고 있어. 데이터 전송 속도를 보면……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두 시간 반이야. 그 시간 안에 동기화가 끝나면 박사님의 중추신경계는 완전히 타버려서 영구 뇌사에 빠져."

 

시간이 없었다.

 

두 시간 반.

 

그 짧은 시간 안에 인천에서 서울 테헤란로 한복판까지 돌파하여, 철통같은 경계망을 뚫고 지하 100미터의 암반 심연까지 닿아야만 했다.

 

3. 전파를 찢는 목소리

 

치지직…… 삐이이익!

 

갑자기 무전기에서 찢어지는 듯한 고주파 비명음이 터져 나왔다.

 

민규의 목소리가 단번에 묻히고, 무전기 내부의 아날로그 진공관이 과부하로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민규야? 채린 씨?!"

 

우진이 다급히 주파수 다이얼을 돌렸지만, 스피커에서는 소름 끼칠 정도로 규칙적인 디지털 펄스음만이 반복될 뿐이었다.

 

뚜- 뚜- 뚜-.

 

인위적인 주파수 강제 재밍이었다.

 

단순한 전파 방해가 아니었다.

 

국가 비상망과 아날로그 단파 대역 전체를 상위 권한으로 틀어막는, 넥스트 큐브 상임이사회의 전산 장악 프로토콜이었다.

 

치지지직…….

 

그리고 정적을 깨고, 스피커 너머에서 차갑고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너무나도 익숙하고, 동시에 피가 거꾸로 솟구치게 만드는 그 목소리.

 

"오랜만이구나, 강우진."

 

서지훈(徐智勳)이었다.

 

소월도 해상 요새에서 수송 헬기를 타고 강정호 박사를 납치해 유유히 사라졌던 넥스트 큐브의 총괄 설계자.

 

그의 목소리는 마치 바로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섬뜩할 정도로 선명했다.

 

서연이 숨을 들이켜며 트럭의 손잡이를 으스러져라 쥐었다.

 

우진은 서늘하게 가라앉은 푸른 눈으로 무전기를 응시하며 낮게 읊조렸다.

 

"……서지훈."

 

"인천 4부두 옹벽에 배를 들이받고 상륙했다고 들었다. 쥐새끼처럼 살아남는 재주 하나는 네 아비를 쏙 빼닮았더군. 하지만 무의미한 발버둥이다. 네가 소월도에서 수도권 인프라를 지켜냈다고 생각하나? 광주에서 3세대 칩을 불태웠다고 해서 인간들이 자유를 되찾았다고 믿는 건가?"

 

스피커 너머로 얇은 실소와 함께 서류가 넘어가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지훈의 어조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오만함과 광기가 배어 있었다.

 

"지금 서울을 봐라. 전력망이 잠시 흔들리고 결손 엔트로피가 치솟자마자, 거리의 인간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사재기를 하며 폭도로 변해가고 있다. 네가 부르짖는 그 잘난 '자유의지'의 결과물이 바로 이 혼돈이다. 인간은 규격화된 네모의 틀 속에 갇혀 있을 때만 안전하다. 그 틀을 부순 대가가 어떤 것인지, 넌 네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거다."

 

"헛소리 집어치워."

 

우진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내려앉았다.

 

"자유를 혼돈으로 만든 건 너희들의 조작이다. 네 텅 빈 사각 테두리나 신경 써라. 상임이사회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는 주제에, 언제까지 설계자 행세를 할 셈이지?"

 

서지훈의 숨소리가 미세하게 거칠어졌다.

 

우진이 정곡을 찔렀음을 간파한 것이다.

 

역삼역 코어에서 목격했던 서지훈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암흑의 프레임'.

 

그는 지배자가 아니었다.

 

그저 시스템의 연산부에 뇌를 파먹히며 꼭두각시 줄에 매달려 있는 가련한 소모품 단말에 불과했다.

 

하지만 서지훈은 곧바로 기괴한 조소를 터뜨렸다.

 

"말은 잘하는구나. 하지만 현실은 네 입술처럼 가볍지 않다."

 

치직.

 

무전기 너머에서 거친 쇠사슬 소리와 함께, 고통을 참아내며 헐떡이는 노인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크흐윽…… 으드득.

 

우진의 심장이 얼어붙었다.

 

아버지의 목소리였다.

 

"아버지!"

 

"우…… 진아…… 들으면 안 된다……! 놈의 말을…… 믿지 마라……!"

 

강정호 박사의 절규는 채 이어지지 못했다.

 

치지지직!

 

살을 지지는 고전압 전류의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강 박사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억눌린 단말마가 스피커를 찢어발겼다.

 

콰득, 콰드득!

 

"아버지!!"

 

우진이 무전기를 움켜쥐며 포효했다.

 

관자놀이의 4cm 수술 흉터가 맹렬한 분노와 공명하며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서연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서지훈의 냉혹한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강정호 박사의 뇌간 바이패스 전송률, 현재 38퍼센트. 고결한 척 버티고 있지만 인간의 뇌세포는 물리적 한계가 명확하지. 네 아비의 뇌파가 코어와 100퍼센트 동기화되는 순간, 오리진 코어의 마지막 문이 열리고 시스템은 완전한 영구 통제 궤도에 진입한다."

 

서지훈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사형선고를 내리듯 무거운 어조로 쐐기를 박았다.

 

"기회를 주마, K-07. 지금 이 순간부터 정확히 72시간을 주겠다."

 

우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72시간?'

 

민규는 분명 뇌간 강제 연동까지 남은 시간이 두 시간 반 남짓이라고 했다.

 

그런데 놈은 왜 72시간이라는 유예를 입에 올리는 것인가.

 

서지훈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72시간 내로 네 발로 직접 테헤란로 넥스트 큐브 본사로 걸어 들어와 투항해라. 네 머릿속의 방화벽 백신 코드를 온전히 바치고 시스템의 부품으로 복귀해라. 그렇지 않으면…… 72시간 뒤, 광화문 네거리 한복판에서 네 아비의 목을 베고 그 뇌를 광장에 박제해 효수하겠다. 네 잘난 자유의지가 낳은 결과를, 전 국민이 생중계로 지켜보게 만들어 주마."

 

4. 숨겨진 덫, 뇌파의 진실

 

"우진아…… 오지 마라……!"

 

스피커 너머에서 강정호 박사가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전류의 고통 속에서도 노학자의 목소리에는 서슬 퍼런 결의가 서려 있었다.

 

"놈의 목적은…… 시간 끌기가 아니다……! 내 뇌파를 쥐어짜서…… 오리진 코어를…… 최종 업그레이드하려는 거다……! 놈들의 통제식에 결손이 생겨서…… 내 생체 뇌파 패턴이…… 없으면…… 크아아악!"

 

투콰앙!

 

거친 둔탁음과 함께 강 박사의 통신이 강제로 단절되었다.

 

서지훈의 서늘한 비웃음만이 마지막으로 남겨졌다.

 

"시계는 돌아가기 시작했다, 강우진. 네 선택이 네 아비의 명줄을 쥐고 있다."

 

뚝.

 

치지지지직…….

 

무전기는 완전히 침묵에 빠져들었다.

 

차 안에는 오직 낡은 디젤 엔진의 덜컹거리는 소리와, 거칠게 몰아쉬는 세 사람의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서연이 떨리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어떻게…… 어떻게 저런 짓을……."

 

선장은 핏발 선 눈으로 전방을 주시하며 스티어링 휠을 부서져라 쥐고 있었다.

 

하지만 우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지는 대신, 섬뜩할 정도로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푸른 눈동자 속에서 수천, 수만 가지의 계산과 가설이 맹렬한 속도로 교차하고 있었다.

 

'72시간.'

 

우진은 서지훈의 최후통첩에 담긴 기만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놈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

 

민규가 포착한 시스템의 뇌간 강제 연동 잔여 시간은 두 시간 반이었다.

 

그런데 서지훈은 72시간이라는 터무니없이 긴 시간을 제시하며 공개 처형을 협박했다.

 

이유는 명백했다.

 

"함정이야."

 

우진이 낮게 입을 열었다.

 

서연이 눈물을 훔치며 우진을 바라보았다.

 

"함정이라니요?"

 

"서지훈은 지금 코너에 몰려 있어. 광주 물류센터에서 큐브 핏 에어가 전량 폐기됐고, 소월도 요새가 날아가면서 시스템의 엔트로피 결손이 84만 EP까지 치솟았어. 그 엄청난 연산 부하 때문에 오리진 코어조차 붕괴 위기에 처한 거다. 아버지가 말씀하셨어. 놈들은 지금 내 아버지를 단순한 인질로 삼으려는 게 아니야."

 

우진의 손가락이 대시보드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놈들은 아버지의 뇌간을 쥐어짜서, 15년 전 아버지가 설계했던 순수한 오리진 궤도 방정식을 강제로 추출하려는 거야. 결손 엔트로피를 메우고, 시스템을 완전히 무결한 상태로 '최종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

 

서연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렇다면…… 72시간이라는 건?"

 

"우리를 방심하게 만들려는 교란책이다. 우리가 72시간이라는 여유가 있다고 착각하고 준비하는 사이에, 놈들은 단 세 시간 만에 아버지의 뇌파를 전부 빨아먹고 오리진 코어를 업그레이드할 셈이야. 동기화가 끝나면 아버지는 쓸모가 없어져서 진짜로 폐기처분되겠지. 72시간 뒤의 공개 처형? 그건 이미 뇌사 상태가 된 아버지의 빈 껍데기를 내걸고 쇼를 하겠다는 뜻이다."

 

치밀하고 잔혹한 시스템의 기만술이었다.

 

상대의 희망을 미끼로 삼아 시간을 벌고, 그사이 가장 치명적인 목적을 달성하는 악랄한 수법.

 

만약 민규의 내부 전산망 스캔과 아버지의 마지막 외침이 없었더라면, 우진 일행 역시 72시간이라는 거짓 프레임에 갇혀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 이상 지체할 시간이 없어."

 

우진이 품 안에서 단결정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를 꺼내 들었다.

 

영롱한 사파이어 내부에서 미세한 푸른빛이 맥동하고 있었다.

 

"놈들의 연동 작업이 끝나기 전, 두 시간 안에 테헤란로 본사 지하 100미터 오리진 코어에 도달해야 해."

 

5. 수도권을 향한 진격

 

"선장님, 서울로 가는 가장 빠른 길로 가야 합니다. 고속도로는 분명 검문소가 깔려 있을 겁니다."

 

우진의 말에 선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칠게 기어를 변속했다.

 

"안 그래도 국도로 우회할 생각이었다. 부평을 거쳐 경인로 외곽 샛길로 빠지면 검문소를 최소한으로 피할 수 있어. 하지만 서울 진입로인 신월IC 부근부터는 장담 못 한다."

 

"뚫어야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우진의 푸른 눈동자에 서릿발 같은 살기가 번뜩였다.

 

그는 조수석 글러브 박스에서 인천 시내 및 수도권 정밀 도로 지도를 꺼내 펼쳤다.

 

머리 위의 도형은 사라졌지만, 수년간 단련된 궤도 분석의 감각과 공간 지각력은 뇌리에 온전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적들이 도시의 인프라를 통제하고 있다면, 그 통제의 결이 만들어내는 사각지대 역시 반드시 존재한다.

 

서연이 방수 팩에서 외장 하드를 꺼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우진 씨, 테헤란로에 도착하면…… 전 어떻게 해야 하죠?"

 

우진은 서연의 떨리는 손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더 이상 백색 네모도, 불안정한 실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직 진실을 밝히겠다는 순수한 인간의 결의만이 그녀의 얼굴에 서려 있었다.

 

우진이 조용히 말했다.

 

"기자님은 살아남아서, 이 진실을 세상에 터뜨려야 합니다."

 

"네? 하지만 저도 코어까지 함께……."

 

"아닙니다. 오리진 코어는 제가 들어갑니다. 그곳은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와 내 생체 신경망을 직결해 시스템 전체를 불태워야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코어가 무너지는 순간, 시스템에 묶여 있던 모든 전파망과 언론망의 통제 락이 일제히 풀릴 겁니다."

 

우진이 서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 찰나의 순간에, 기자님이 가진 이 외장 하드의 모든 데이터…… 소월도 요새의 인프라 테러 각본, 3세대 칩의 인체 실험 기록, 상류층 규격화 로드맵까지 전부 전 세계에 생중계해야 합니다. 민규와 채린 씨, 그리고 살아남은 독립 언론인들이 그 길을 열어줄 겁니다."

 

서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우진이 자신을 배려해서 떼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승리를 위한 마지막 퍼즐 조각임을 깨달았다.

 

코어를 물리적으로 파괴하더라도, 사람들의 머릿속에 박힌 보이지 않는 족쇄를 부수지 못하면 시스템은 또 다른 얼굴을 하고 부활할 것이다.

 

진실의 폭로.

 

그것이 바로 한서연이라는 언론인에게 주어진 가장 무거운 칼날이었다.

 

"……알겠어요."

 

서연이 눈물을 닦아내고 외장 하드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반드시 해낼게요. 우진 씨가 목숨 걸고 연 틈새를, 절대로 헛되게 만들지 않을 테니까…… 우진 씨도 꼭 살아서 돌아와요. 박사님과 함께."

 

"약속합니다."

 

우진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덜컹거리는 트럭은 부평의 노후 공단 지대를 지나 경인로의 좁은 샛길로 접어들었다.

 

차창 밖으로 저 멀리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먹구름 낀 하늘 아래 거대한 잿빛 장벽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중심, 테헤란로 한복판에 솟아 있는 칠흑빛 마천루 넥스트 큐브 본사.

 

그 지하 100미터 심연에서, 아버지는 지금도 살점이 타 들어가는 고통을 견디며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진은 가슴 안주머니의 사파이어 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두 시간.

 

세상이 사각의 감옥으로 영원히 박제되느냐, 아니면 마침내 인간다운 불확실성의 바다로 해방되느냐를 가를 최후의 카운트다운이 턱밑까지 다가와 있었다.

 

트럭의 가속 페달이 바닥까지 밟히며, 낡은 차체는 굉음과 함께 서울의 심장부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