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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60화

아버지의 미끼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칠흑의 바다와 붉은 불꽃

 

차가운 해수가 귓전을 때리며 고막 속으로 사정없이 밀려들었다.

 

소월도 해안 암반 지하로 이어지는 비밀 해저 배수관 수로는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비린 짠내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우진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거친 물살을 헤치며 필사적으로 숨을 참았다.

 

시신경을 짓누르던 백색 암전의 후유증은 여전히 망막 가장자리에 서릿발 같은 은빛 잔상을 흩뿌리고 있었다.

 

앞이 온전히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망막 너머로 번뜩이는 붉은 예광탄의 잔상과, 머리 위 수면을 뒤흔드는 폭음만은 뼛속까지 고스란히 울려 퍼졌다.

 

쾅!

 

콰아아앙!

 

지축을 흔드는 진동과 함께 소월도 절벽 위에 우뚝 솟아 있던 폐등대가 기괴한 파열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등대 상부에 매설되어 있던 8각 파라볼라 안테나가 인과율 미사일의 폭압에 찢겨 나가며 내뿜는 불꽃이 해수면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우진의 곁에서 그의 팔을 단단히 붙들고 있던 한서연이 물속에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서연은 방수팩에 밀봉된 외장 하드를 한 손으로 가슴에 품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우진의 허리춤을 단단히 움켜쥐고 있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 속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비통함과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우진의 귓가에, 배수관 해치가 닫히기 직전 쾅 하고 울리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맴돌았다.

 

'우진아,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고 네 선택을 믿어라!'

 

그것은 절규였다.

 

15년 전, 어린 아들의 관자놀이에 메스를 대고 울부짖으며 궤도 신경을 잘라내던 그날의 절규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비명이었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해성호의 갑판 위에 남아 서지훈의 시선을 붙잡아두지 않는다면, 수로를 빠져나가는 이 작은 틈새조차 헬기 편대의 기관포 탄막에 갈가리 찢기리라는 것을.

 

우진은 이를 악물었다.

 

입안에서 쇠비린내가 터져 나왔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앞서 헤엄치며 낡은 수중 유도 로프를 당기는 늙은 선장의 거친 손짓이 수류를 타고 전해졌다.

 

선장은 자신의 목숨과도 같았던 낡은 목선 해성호가 화염에 휩싸여 침몰하는 순간을 두 눈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노인은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직 강정호 박사가 마지막으로 남긴 좌표, 외해로 이어지는 천연 해식동굴을 향해 필사적으로 물살을 가르고 있을 뿐이었다.

 

2. 무너진 해성호의 잔해

 

불타는 소월도 몽돌해변은 생지옥이었다.

 

공중을 선회하는 AH-64 계열의 전술 공격 헬기 세 대가 토해내는 30밀리 기관포탄이 해안가 자갈밭을 밭 갈듯 파헤쳤다.

 

콰콰콰쾅!

 

박살 난 해성호의 선체 잔해가 불기둥을 뿜어내며 모래사장으로 밀려왔다.

 

선미가 완전히 꺾인 목선에서는 시커먼 그을음과 함께 타버린 디젤 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헬기에서 로프를 타고 강하한 넥스트 큐브 통제감사실 직속 기계화 청소 기동대원들이 일사불란하게 산개했다.

 

그들의 검은 카본 방탄복과 방탄 헬멧 위로는 한 치의 떨림도 없는 정방형의 도형, 칠흑빛으로 고정된 '검은 네모'가 떠 있었다.

 

대원들은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의 총구를 일제히 해성호 조타실 잔해로 겨눈 채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전방 12시 방향, 생체 신호 하나 포착."

 

기동대장의 무전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기계처럼 건조했다.

 

"타깃 K-07 및 오염 노드 식별 불가. 조타실 내부 잔류자 1명. 뇌파 패턴 일치율 99.8%. Node-0다."

 

그때였다.

 

수송 헬기 한 대가 해변 공터에 육중한 착륙 다리를 내리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로터가 만들어내는 거센 돌풍 속에서 말끔한 흑색 맞춤 정장을 입은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서지훈이었다.

 

그의 정수리 위에는 여전히 기괴한 기하학체가 떠 있었다.

 

면(面)조차 형성되지 않은 채 텅 빈 사각 테두리만을 유지하며 삐걱거리는 '암흑의 프레임'.

 

그 빈 공간을 관통해 허공으로 뻗어 나가는 수백 가닥의 반투명한 통제선들이 해안가의 핏빛 화염 속에서 섬뜩하게 번뜩였다.

 

서지훈은 바지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은 채, 천천히 불타는 조타실 잔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구둣발 아래서 부서진 유리 조각과 불붙은 목재가 버석거리며 으스러졌다.

 

"결국 여기까지 오셨군요, 강정호 박사님."

 

서지훈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와 헬기 소음 속에서도 기이할 정도로 또렷하게 울렸다.

 

조타실 문짝이 덜컹거리며 밀려났다.

 

화염 속에서 휠체어에 앉은 강정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옷자락은 검은 그을음과 바닷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양손에는 마지막으로 터뜨렸던 마그네슘 조명탄의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강정호의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네모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없는 완전한 공백.

 

시스템의 어떤 궤도 방정식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형(無形)'의 침묵만이 노학자의 정수리를 감싸고 있었다.

 

강정호는 숨을 헐떡이며 서지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두 다리는 15년 전 서지훈의 고문으로 으스러져 미동조차 하지 않았지만, 핏발 선 두 눈만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랜만이군, 서지훈 실장."

 

강정호가 거칠게 기침을 토해내며 메마른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니지. 이제는 상임이사회의 하수인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으니, 대표님이라고 불러줘야 하나?"

 

3. 텅 빈 사각 테두리

 

서지훈의 입꼬리가 비틀리며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그는 손짓 하나로 다가가려던 청소 기동대원들을 제지시켰다.

 

"하수인이라. 박사님께서는 아직도 이 거대한 질서를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자유라는 이름의 무질서가 어떤 참극을 낳는지, 박사님은 15년 전 당신의 손으로 직접 보지 않으셨습니까?"

 

서지훈이 천천히 강정호의 휠체어 앞 2미터 지점에 멈추어 섰다.

 

그의 시선이 불타는 선체 바닥, 거칠게 뜯겨 나간 배수관 해치를 스쳐 지나갔다.

 

해치 주변에는 젖은 발자국 세 쌍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고, 바닷물이 역류하며 부글거리는 기포를 뿜어내고 있었다.

 

서지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쥐새끼처럼 도망치게 두셨군요. K-07과 그 언론사 계집, 그리고 늙은 선장까지."

 

서지훈이 해저 수로의 입구를 턱짓하며 낮게 읊조렸다.

 

"저 차가운 바닷속으로 아들을 던져 넣으면서 안도하셨습니까? 기특한 부성애로군요. 하지만 박사님도 아실 텐데요. 소월도 외해 반경 5해리에는 이미 잠수형 차폐 기뢰망이 전개되어 있습니다. 아웃라이어의 신경망이 아무리 망가졌다 한들, 살아서 뭍을 밟을 확률은 0.02% 미만입니다."

 

강정호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입술 틈새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지만, 노학자의 얼굴에는 조소마저 서려 있었다.

 

"연산 결과 타령은 여전하군."

 

강정호가 가슴팍을 움켜쥐며 숨을 골랐다.

 

"확률 0.02%? 자네들이 만든 그 빌어먹을 오르비스 시뮬레이터는 내 아들을 'Error: ?'라고 규정했다. 계산식조차 세우지 못하는 존재에게 네놈들의 알량한 백분율이 통할 것 같으냐?"

 

서지훈의 얼굴에서 미소가 서서히 지워졌다.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암흑의 프레임'이 미세한 파열음을 내며 역회전하기 시작했다.

 

프레임을 관통하는 수백 가닥의 통제 와이어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서지훈의 목덜미 핏줄을 기괴하게 부풀어 오르게 만들었다.

 

그것은 시스템의 연산부가 그의 자아를 갉아먹으며 쏟아내는 인과율의 압박이었다.

 

"그 버그 때문에 도시 전체의 엔트로피가 붕괴 직전입니다. 박사님."

 

서지훈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오르비스가 터져 나가고, 큐브 핏 에어의 초도 물량이 전소되면서 발생한 결손 수치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자그마치 84만 EP입니다. 이 결손을 메우지 못하면 서울 전체의 격자망이 과부하로 터져 나갑니다. 무고한 수백만 명이 집단 뇌사에 빠질 거라고요!"

 

"그래서 팔당댐을 열고 원전을 멈추려 했나?"

 

강정호의 목소리가 벼락처럼 터져 나왔다.

 

"그 결손을 메우겠다고, 수만 명의 소시민을 수장시키고 방사능을 흩뿌려 공포로 국가 전체를 검은 네모에 가두려 했어? 그게 네놈이 말하는 질서냐! 1998년 네 가족이 몰살당했던 그 무차별적인 살인마의 짓거리와 네가 하는 짓이 대체 뭐가 다르단 말이냐!"

 

서지훈의 눈동자가 맹렬하게 흔들렸다.

 

1998년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그의 얼굴 근육이 경련하듯 일그러졌다.

 

크리스마스이브의 피비린내.

 

문이 열려 있었다는 우연 하나로 난도질당했던 부모와 일곱 살 여동생의 시신.

 

그 트라우마가 서지훈의 뇌간을 할퀴고 지나갔다.

 

채칵!

 

서지훈의 손에 들린 인과율 집속 권총의 총구가 강정호의 이마 정중앙을 겨누었다.

 

총구 끝에서 푸른빛의 응축된 시스템 격자 파동이 날카로운 고주파음을 내며 소용돌이쳤다.

 

"입 닥치십시오."

 

서지훈의 목소리가 살얼음처럼 가라앉았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우연이라는 악마를 박멸하지 않는 한, 이 세상의 모든 비극은 반복될 뿐입니다. 그 오차를 영구히 0으로 수렴시키는 것만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낙원이야."

 

강정호는 총구 앞에서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휠체어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싸늘한 시선으로 서지훈을 올려다보았다.

 

"쏴라."

 

강정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방아쇠를 당겨봐라, 서지훈."

 

4. 살아있는 열쇠의 가치

 

서지훈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팽팽하게 당겼다.

 

권총 내부의 인과율 축전기가 임계 출력에 도달하며 푸른 스파크를 허공에 튀겼다.

 

주변에 도열해 있던 기계화 대원들조차 본능적으로 반 걸음 물러설 만큼 흉포한 살기였다.

 

하지만 서지훈의 손가락은 끝내 격발 핀을 때리지 못했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가 강정호의 이마를 지나, 그의 온전한 망막과 목덜미의 생체 리셉터를 응시하고 있었다.

 

강정호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못 쏘겠지?"

 

노학자의 목소리에는 서지훈의 목줄을 틀어쥔 자만이 낼 수 있는 서늘한 확신이 배어 있었다.

 

"네놈이 테헤란로 지하 100미터 암반에 은폐해 둔 '오리진 코어'. 그 절대적인 성역을 열기 위해선 뭐가 필요한지 내가 모를 줄 알았나?"

 

강정호가 자신의 오른쪽 눈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오리진 코어의 1차 방어벽은 시스템 최고 설계자인 나의 망막 생체 정보. 그리고 2차 커널 봉인은 바로 내 뇌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체 바이패스 신호다. 내가 심정지에 이르는 순간, 오리진 코어는 영구 자폭 격벽을 내리고 도시의 모든 통제망을 자물쇠째 잠가버리도록 설계되어 있지."

 

서지훈의 턱관절이 굳어졌다.

 

총구를 쥔 그의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굵게 돋아났다.

 

강정호의 말은 단 한 글자도 틀리지 않았다.

 

상임이사회가 소월도 요새에 '코드 엑스터미네이션'을 발령하여 섬 전체를 융단폭격하면서도, 서지훈에게 단 하나의 절대 명령을 하달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Node-0 강정호 박사를 반드시 산 채로 확보할 것.

 

망막과 중추신경계의 훼손율이 3%를 초과해서는 안 됨.]

 

강정호가 숨을 거두는 순간, 넥스트 큐브가 15년간 구축해 온 전 인류 궤도 통제의 최종 중추인 오리진 코어는 영원히 열리지 않는 강철 무덤이 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붕괴하는 84만 EP의 결손 엔트로피를 흡수할 방도가 사라져, 시스템 전체가 자멸하게 되는 것이다.

 

"박사님은 참으로 영악하십니다."

 

서지훈이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그의 얼굴에 번졌던 분노가 다시금 감정 없는 차가운 유리 가면 뒤로 숨어들었다.

 

"자신의 목숨을 인질로 잡고 아들을 도망치게 만들다니. 하지만 착각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살아있는 한, 그 아비의 고통을 K-07이 모른 척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서지훈이 손짓하자, 뒤편에 도열해 있던 기계화 대원 두 명이 다가와 강정호의 양팔을 거칠게 꺾어 결박했다.

 

차가운 티타늄 수갑이 노학자의 뼈마디를 파고들었다.

 

"큭……!"

 

강정호가 짧은 신음을 흘렸지만, 비명은 삼켜냈다.

 

서지훈이 휠체어 손잡이를 직접 움켜쥐며 헬기 착륙장을 향해 밀기 시작했다.

 

"오리진 코어로 갑니다, 박사님. 그곳에서 당신의 망막을 스캔하고, 당신의 뇌간을 콘솔에 직결할 겁니다. 당신이 거부한다면, 신경 자극제를 투여해서라도 강제로 뇌파를 동기화시킬 겁니다. 그리고……."

 

서지훈이 몸을 숙여 강정호의 귓가에 차갑게 속삭였다.

 

"당신의 아들이 제 발로 테헤란로 지하 100미터 심연으로 기어들어 오게 만들 겁니다. 그 아이의 눈앞에서 당신의 신경망을 산 채로 불태워 코어의 제물로 바칠 때, 과연 그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참으로 기대되는군요."

 

강정호는 끌려가면서도 뒤틀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불타는 해성호 조타실 바닥의 어두운 배수관 입구였다.

 

'우진아.'

 

노학자는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절대로 흔들리지 마라. 네 손에 쥐여준 사파이어 마스터 키는, 이 아비의 목숨 따위와 바꿀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쿠구구구궁!

 

수송 헬기의 로터가 굉음을 토해내며 회전 속도를 높였다.

 

강정호를 태운 헬기가 검은 연기와 화염에 휩싸인 소월도의 하늘을 가르며 날아올랐다.

 

뒤이어 상공을 선회하던 공격 헬기들이 해안가를 향해 최후의 소이탄을 일제히 투하했다.

 

콰아아아앙!

 

백색의 인(燐) 불꽃이 해성호의 잔해와 폐등대 터를 집어삼키며, 지상에 남아 있던 모든 흔적을 잿더미로 지워버리기 시작했다.

 

5. 해저 수로의 사투

 

한편, 해수면 아래 수십 미터 심도에서는 처절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우진과 서연, 그리고 선장은 15년 전 강정호 박사가 암반을 뚫어 조성해 둔 좁은 콘크리트 배수관을 따라 필사적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산소통도 없는 맨몸 잠수였다.

 

폐 속의 공기는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고, 가슴이 터져 나갈 듯한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머리 위 암반을 뚫고 전해지는 둔중한 폭음.

 

소이탄이 해안가를 집어삼키며 일으킨 열기 때문에 배수관 내부의 해수 온도마저 미지근하게 변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끌려갔다.'

 

우진은 수류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박힌 손톱 사이로 피가 배어 나왔지만, 차가운 바닷물에 이내 씻겨 나갔다.

 

망막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백색 암전의 안개가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극심한 안압 상승과 관자놀이 흉터의 맹렬한 발열 속에서, 우진의 시야에 희미한 윤곽들이 다시 맺히기 시작했다.

 

앞서 헤엄치는 선장의 등허리.

 

그리고 자신의 손을 결코 놓지 않고 있는 서연의 창백한 얼굴.

 

서연의 정수리 위를 바라보았을 때, 우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은은하고 안정된 일상의 상징, '백색 네모(□)'의 표면에 흉측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모서리마다 날카로운 서리 노이즈가 서려 있었고, 가느다란 실금이 거미줄처럼 번져 나가고 있었다.

 

'아웃라이어의 저주…….'

 

시스템의 궤도 방정식에서 완전히 이탈하여 도형 자체가 소멸한 우진.

 

그 규격 외 이물질과 물리적으로 접촉하고 인과를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현실 세계의 항상성 네트워크는 서연의 일상을 차갑게 갉아먹고 있었다.

 

그녀의 백색 네모는 언제 파멸의 검은 세모로 뒤틀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롭게 진동하고 있었다.

 

서연이 우진의 시선을 느꼈는지, 물속에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호흡 곤란으로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지만, 서연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

 

그녀는 우진의 손을 더욱 강하게 쥐어짜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 난 괜찮아.'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그 무언의 외침이 손끝의 온기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때, 앞서가던 선장이 수중 신호용 방수 플래시를 깜빡였다.

 

전방 20미터 지점, 완만한 곡선을 그리던 배수관의 끝자락에서 푸르스름한 자연광이 스며들고 있었다.

 

수로의 출구였다.

 

하지만 안도감도 잠시, 우진의 망막에 기이한 궤적선이 번뜩였다.

 

2단계 '변화 감지'의 감각이 시신경을 타고 강제로 오버클럭되었다.

 

푸른빛 잔상.

 

출구 너머, 외해로 이어지는 천연 해식동굴 입구 수중에 거대한 부유물들이 그물망처럼 얽혀 있는 모습이 망막에 반투명하게 투사되었다.

 

'잠수형 차폐 기뢰망!'

 

서지훈이 호언장담했던 그 덫이었다.

 

지름 1미터에 달하는 원형 기뢰 수십 개가 강철 와이어에 묶인 채, 수류의 흐름에 따라 불규칙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기뢰 표면에는 넥스트 큐브의 푸른 육면체 로고와 함께 미세한 인과율 센서가 부착되어 있었다.

 

생명체의 미세한 생체 전류나 뇌파를 감지하는 즉시 반경 50미터를 고온 플라스마로 날려버리는 살상 트랩이었다.

 

선장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출구를 향해 전속력으로 발장구를 치고 있었다.

 

이대로 나간다면 선장이 가장 먼저 기뢰 센서에 걸려 폭사할 판이었다.

 

우진은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서연의 손을 잠시 놓고, 물살을 가르며 선장을 향해 맹렬히 쇄도했다.

 

6. 특이점의 절대 척력

 

선장의 발목을 낚아채 뒤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노인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며 허우적거렸다.

 

우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선장의 어깨를 짚고 앞으로 나섰다.

 

폐 속의 잔여 산소는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통증과 함께 눈앞이 다시 하얗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진은 이를 악물고 오른손을 뻗었다.

 

외투 안쪽 주머니에 든 단결정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가 심장 박동과 공명하듯 차가운 파동을 뿜어내고 있었다.

 

우진은 정수리 위의 허공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없는 절대적 공백.

 

네모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거부하는 특이점의 상태.

 

'밀어내라.'

 

우진은 15년 전 아버지가 자신의 뇌간에 심어준 방화벽 백신의 회로를 온몸으로 개방했다.

 

관자놀이의 4cm 수술 흉터가 맹렬하게 박동하며 타오르는 듯한 열기를 뿜어냈다.

 

지이이잉!

 

우진의 손바닥에서 무형의 인과율 파동이 해수를 가르며 방출되었다.

 

그것은 형태를 지니지 않은 순수한 거부의 힘, 시스템의 모든 격자망과 센서를 강제로 밀어내는 절대 척력(Repulsion)이었다.

 

콰아아아앙!

 

수중에서 발생한 거대한 충격파가 배수관 출구를 빠져나가며 기뢰밭의 중심부를 강타했다.

 

인과율 센서들이 일제히 쇼트를 일으키며 붉은 경보등을 뿜어냈지만, 우진이 방출한 척력의 막에 가로막혀 폭발 신호를 격발하지 못했다.

 

대신 기뢰를 묶고 있던 수십 가닥의 강철 와이어가 척력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두두둑 끊겨 나갔다.

 

우진은 손목을 비틀며 척력의 방향을 외해 쪽으로 굴절시켰다.

 

풀려난 기뢰들이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동굴 바깥, 먼바다의 암초 지대로 밀려 나갔다.

 

출구가 열렸다.

 

"읍……!"

 

한계에 도달한 서연이 입술 틈새로 기포를 토해내며 의식을 잃어가고 있었다.

 

우진은 번개처럼 몸을 돌려 서연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선장 역시 필사적으로 우진의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기뢰가 치워진 틈새를 뚫고, 푸른빛이 쏟아져 내리는 해식동굴의 수면을 향해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다.

 

푸하아악!

 

수면을 깨뜨리며 세 사람이 동시에 솟구쳐 올랐다.

 

소월도 뒤편, 깎아지른 절벽 아래 은폐된 거대한 천연 해식동굴 내부였다.

 

동굴 안은 썰물 때를 맞아 바닷물이 빠져나가며 자갈밭이 드러나 있었고, 축축한 바위벽 사이로 서늘한 해풍이 불어 들고 있었다.

 

서연이 자갈밭으로 기어 올라가 바닷물을 토해내며 거칠게 기침했다.

 

"쿨럭! 쿨럭……! 하아, 하아……!"

 

선장 역시 바닥에 대자로 뻗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우진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망막의 시력이 마침내 90% 이상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시야를 가리던 백색 노이즈가 사라진 눈으로, 우진은 해식동굴 입구 너머를 바라보았다.

 

7. 맹세와 출정

 

동굴 입구 너머로 보이는 소월도의 상공은 칠흑 같은 연기로 뒤덮여 있었다.

 

섬 정상의 폐등대는 완전히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해안가에서는 여전히 붉은 화염이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잿빛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한 대의 대형 수송 헬기.

 

서지훈이 아버지를 태우고 테헤란로를 향해 날아가는 그 비행 궤적이, 우진의 망막에 선명한 흉터처럼 박혀 들었다.

 

"박사님……."

 

바닥을 짚고 일어난 선장이 피눈물을 흘리며 멀어져 가는 헬기를 응시했다.

 

"박사님이 우릴 살리고…… 혼자 잡혀가셨어. 그 양반, 두 다리도 못 쓰는 몸으로……."

 

서연이 비틀거리며 다가와 우진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추위로 차갑게 식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우진 씨."

 

서연의 목소리가 젖은 동굴 안에 나직하게 울렸다.

 

"포기하면 안 돼요. 박사님이 왜 스스로 미끼가 되셨는지, 우진 씨가 제일 잘 알잖아요."

 

우진은 천천히 가슴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닿는 단단하고 서늘한 감촉.

 

15년 동안 역삼역 지하 7층 액체 챔버 속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신경망과 뇌세포를 갉아먹히며 몰래 깎아 만든 단결정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

 

그 칩의 표면에 각인된 레이저 글귀가 손끝을 타고 전율처럼 전해졌다.

 

[PROJECT NEMO : ROOT DELETION / MASTER CIPHER]

 

이것은 단순한 데이터 칩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15년 동안 짊어져 온 죄책감의 무게였고, 아들의 빼앗긴 유년기를 되찾아주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갈아 넣은 참회의 결정체였다.

 

우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우진아,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고 네 선택을 믿어라.'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절규는 체념이 아니었다.

 

뒤를 돌아보며 눈물 흘리지 말고, 앞을 막아서는 그 거대한 시스템의 심장을 향해 주저 없이 칼을 꽂으라는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우진이 고개를 돌려 해식동굴 안쪽을 살펴보았다.

 

놀랍게도, 동굴 깊숙한 바위 틈새에 검은 방수포로 덮인 물체가 놓여 있었다.

 

선장이 그것을 발견하고 황급히 다가가 방수포를 걷어냈다.

 

"이, 이건……!"

 

방수포 아래 드러난 것은 구형 군용 고무보트 한 척과, 기계식 수동 시동 장치가 달린 야마하 선외기 엔진, 그리고 휘발유 말통 세 개였다.

 

선외기 연료탱크 위에는 녹슨 철판에 페인트로 거칠게 적힌 글씨가 남아 있었다.

 

[Node-0 비상 퇴로.

 

인천 연안까지 40해리.]

 

15년 전, 강정호 박사가 소월도를 요새화하던 넥스트 큐브의 배후를 의심하고 극비리에 이곳에 숨겨두었던 최후의 비상 탈출 장비였다.

 

아버지는 이 섬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자신이 살아 나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은 죽더라도, 아들만은 반드시 살려 보내겠다는 그 처절한 안배가 15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우진의 눈가에서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려 턱 끝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슬픔은 차가운 분노로, 분노는 강철 같은 결의로 벼려졌다.

 

우진이 성큼 다가가 고무보트의 밸브를 확인하고 선외기 엔진의 연료 밸브를 열었다.

 

"선장님."

 

우진의 목소리가 동굴 벽을 때리며 단호하게 울렸다.

 

"이 보트로 인천까지 갈 수 있습니까?"

 

선장이 소매로 거칠게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주름진 얼굴에 비장한 투지가 번져 올랐다.

 

"갈 수 있어. 전자 장비 하나 없는 순수 2행정 엔진이야. 해무를 타고 조류를 타면, 해경 경비정이든 놈들의 레이더든 다 피해 가며 연안부두 옹벽까지 두 시간이면 닿는다."

 

"좋습니다."

 

우진이 서연을 돌아보며 손을 내밀었다.

 

서연은 품에 안고 있던 외장 하드를 단단히 여미며 우진의 손을 잡았다.

 

"서연 씨. 서울로 갑니다."

 

우진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파주 은신처의 동료들을 구하고, 테헤란로 지하 100미터 오리진 코어로 갑니다. 아버지를 그 지옥에서 꺼내고, 이 빌어먹을 네모 세상을 우리 손으로 끝장냅니다."

 

서연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끝까지 함께 갈게요."

 

선장이 선외기의 시동 로프를 힘껏 당겼다.

 

부르르릉!

 

타타타탕!

 

2행정 디젤 엔진이 경쾌하고 거친 금속음을 토해내며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고무보트에 몸을 싣고, 썰물을 따라 천연 해식동굴의 어둠을 찢으며 외해로 미끄러져 나갔다.

 

동굴을 빠져나오자, 눈앞에 먹구름이 짙게 깔린 서해의 거친 파도가 펼쳐졌다.

 

저 멀리 동쪽 하늘, 수도권 상공에는 여전히 푸르스름한 인과율 격자망의 잔광이 희미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그곳, 테헤란로 지하 심연에서 아버지가 피를 흘리며 기다리고 있었다.

 

우진은 주머니 속 마스터 암호 키를 으스러져라 움켜쥐며, 거친 비바람 속으로 뱃머리를 겨누었다.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