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함락
1. 찢겨 나가는 하늘
바다 안개를 찢고 울려 퍼진 굉음은 단순한 폭발음이 아니었다.
서해의 차가운 해무를 단숨에 증발시키며 짓쳐 든 것은 군용 중형 헬기 석 대의 로터 블레이드가 허공을 짓이기며 토해내는 금속성 파열음이었다.
소월도 상공을 둘러싸고 있던 푸른빛과 붉은빛의 사각 격자 돔이 섬뜩한 자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해성호의 갑판에서 낡은 난간을 움켜쥐고 있던 강우진의 시선이 수직 절벽 위의 폐등대로 향했다.
검은색 특수 도료로 칠해진 공격 헬기들이 안개 사이로 흉포한 동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기체들의 측면에는 넥스트 큐브의 차가운 푸른 육면체 엠블럼 대신, 붉은 피처럼 번뜩이는 상임이사회의 직속 표식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쿠구구구궁!
선두 헬기의 하부 무장 포드에서 눈이 멀 것 같은 섬광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화약 냄새를 동반한 재래식 유도 로켓이 아니었다.
고밀도로 압축된 인과율 펄스를 머금은 집속 미사일 네 발이 허공에 짙은 백색 비행운을 남기며 절벽 정상으로 내리꽂혔다.
콰아아아앙!
귀를 찢는 폭음과 함께 15년 동안 비바람을 견뎌온 폐등대의 상부 관측 돔이 산산조각 났다.
수천 도의 테르밋 열기를 머금은 고온 파편들이 폭포수처럼 몽돌해변으로 쏟아져 내렸다.
파도가 부서지던 암초 지대가 일순간 붉은 화염에 뒤덮이며 수증기를 격렬하게 뿜어 올렸다.
"숙여요, 당장!"
한서연이 소리치며 갑판 바닥에 몸을 바짝 엎드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방수 팩 속 외장 하드가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소월도 지하 관제실에서 확보한 인프라 테러와 궤도 조작의 모든 물증이 담긴 기록 장치였다.
우진은 서연의 등 위로 외투를 덮어씌우며 휠체어에 앉은 아버지 강정호를 감싸 안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파편 비를 향해 우진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콰아아앙!
머리 위의 도형이 완전히 지워진 아웃라이어의 무형 척력이 투명한 막처럼 허공에 전개되었다.
쇄도하던 시멘트 덩어리와 불붙은 철골 파편들이 해성호의 뱃머리 직전에서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혀 바다로 튕겨 나갔다.
치이익 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바닷물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그 반작용으로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가 불에 덴 것처럼 달아올랐다.
눈앞이 잠시 새하얗게 지워지는 백색 암전의 잔상이 망막을 사납게 긁고 지나갔다.
"우진아, 억지로 힘을 쓰지 마라!"
휠체어의 강정호가 떨리는 손으로 아들의 팔을 거머쥐었다.
그의 얼굴은 이미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코드 엑스터미네이션이다. 상임이사회 놈들이 이 섬 전체를 흔적도 없이 증발시키려는 게야."
"그렇다면 놈들도 여기서 살아서 나갈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까?"
서연이 고개를 들며 물었다.
그녀의 뺨에는 튀어 오른 갯벌 흙과 재가 거뭇하게 묻어 있었다.
강정호의 메마른 입술이 비틀렸다.
"아니. 놈들의 방식은 늘 똑같다. 현장의 모든 증거와 오염된 단말들을 지워버린 뒤, 국방부나 해경에는 원인 불명의 가스 폭발이나 미확인 무장 세력의 자폭 테러로 보고서를 꾸며 올릴 게다. 15년 전 테헤란로 연구소를 태웠을 때처럼 말이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번째 편대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단순한 폭격이 아니었다.
헬기 세 대가 폐등대를 둘러싸고 호버링을 시작하더니, 기체 하부에서 와이어 패스트 로프가 일제히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2. 죽음을 집행하는 자들
두두두두두!
로프를 타고 절벽과 부서진 등대 주변으로 쏟아져 내리는 인영들은 평범한 군 병력이 아니었다.
전신을 티타늄 복합 장갑과 카본 헬멧으로 밀봉한 넥스트 큐브 통제감사실 직속의 최정예 청소 기동대였다.
하지만 우진의 눈을 서늘하게 찌른 것은 그들의 장비가 아니었다.
그들의 정수리 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렬로 늘어선 기하학적 형태였다.
'검은 육면체.'
단순한 평면 사각형이 아니었다.
정육면체의 표면에 푸른빛의 시스템 제어 코드가 폭포처럼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 허공으로는 굵은 전신주 굵기의 검은 통제선이 헬기 내부의 통신 단말로 직결되어 있었다.
자유의지와 감정이 완전히 거세되어 오직 궤도 집행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기계화 인간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서 절벽 암반에 발을 딛는 한 남자가 있었다.
헬기 문가에서 직접 하강한 그는 방탄 헬멧조차 쓰지 않은 채 완벽하게 다려진 칠흑빛 수트를 입고 있었다.
가슴에 달린 황금 육면체 배지가 타오르는 불길을 반사하며 번뜩였다.
서지훈.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가 살아있었다.
아니, 역삼역 지하 7층에서 자폭 시퀀스와 함께 소멸했던 것은 그의 뇌파 패턴을 복제한 독립 양자 인격체였을 뿐이었다.
육신을 가진 진짜 집행자 서지훈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인간적인 온기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의 정수리 위에는 과거의 황금빛 외피 대신, 3차원 면조차 형성되지 못한 채 삐걱거리며 공회전하는 기괴한 사각 테두리, '암흑의 프레임'이 자리 잡고 있었다.
허공에서 내려온 수백 가닥의 검은 와이어가 그의 정수리를 관통해 뇌간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는 지배자가 아니었다.
상임이사회의 거대한 중앙 통제 연산부가 지상으로 뻗어 나온 가장 참혹한 단말기이자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서지훈의 차가운 시선이 절벽 아래, 몽돌해변에 닿아 있는 해성호를 향했다.
그의 메마른 입술이 열렸다.
"목표를 확인했다. Node-1, 그리고…… Node-0."
그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고 바다 위로 낮게 깔렸다.
확성기를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공간의 인과율 격자를 타고 찌르는 듯한 음파가 우진의 귓전에 꽂혔다.
"전 대원에게 하달한다. 타깃 K-07 강우진은 사지를 절단하더라도 중추신경계만 보존하여 생포하라. 특이점의 신경 궤도 샘플이 필요하다. 그리고…… 저기 휠체어에 앉은 노인, Node-0 강정호 박사는 절대로 사살하지 마라."
서지훈이 손을 들어 올리자, 기계화 대원들의 총구가 일제히 아래를 겨눴다.
"오리진 코어의 마지막 봉인을 풀기 위해선 저 늙은이의 살아있는 망막과 뇌간 바이패스가 반드시 온전해야 한다. 강정호 박사를 산 채로 확보하라. 그 외의 모든 오염 노드는 현장에서 즉시 영구 소거한다."
그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우릴 살려둘 생각이 아니에요. 아버님을 다시 끌고 가려는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우진이 이를 악물었다.
주머니 속에서 부친이 건네준 단결정 사파이어 '마스터 암호 키'가 차갑게 손바닥을 짓눌렀다.
이 칩을 테헤란로 지하의 오리진 코어에 꽂아야만 이 지긋지긋한 지옥을 끝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적들은 아버지를 다시 그 끔찍한 생체 배터리로 되돌리려 하고 있었다.
"선장님! 키를 돌려요!"
우진이 조타실을 향해 고함쳤다.
늙은 선장이 거친 손으로 해성호의 목제 타륜을 꺾으며 8기통 디젤 엔진의 스로틀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부르르릉, 쾅쾅쾅!
낡은 엔진이 비명을 지르며 검은 매연을 뿜어냈다.
프로펠러가 거친 포말을 일으키며 해성호의 뱃머리가 몽돌해변을 벗어나 서해 외곽으로 회두하기 시작했다.
3. 빗발치는 인과율의 탄막
타타타타탕!
절벽 위에서 기계화 대원들이 장비한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이 불을 뿜었다.
푸른빛의 응축된 광탄들이 빗줄기처럼 해성호의 갑판으로 쏟아져 내렸다.
화약 총알이 아니었다.
나무 갑판에 틀어박히는 순간, 목재의 섬유질이 산산이 분쇄되는 동시에 공기 중의 물리 법칙 자체가 뒤틀리며 푸른 전기 스파크가 폭발했다.
퍼어엉!
해성호의 우현 선체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며 바닷물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크아악!"
선체 파편이 튀며 선장의 어깨를 스쳤다.
선장이 비틀거리면서도 타륜을 놓지 않았다.
"우진아! 뒤를 봐라!"
강정호가 휠체어 난간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상공을 선회하던 공격 헬기 한 대가 해성호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고도를 급격히 낮추고 있었다.
헬기의 측면에 장착된 30밀리 기관포가 붉은 레이저 조준선을 해성호의 조타실에 고정했다.
기계적인 조준 완료 신호음이 바다 위에 섬뜩하게 울렸다.
'0.3초.'
우진의 망막에 푸른빛의 궤적선이 번뜩였다.
2단계 변화 감지가 강제로 오버클럭되며 헬기의 기관포가 토해낼 탄도 궤적이 반투명한 잔상으로 시야에 겹쳐 보였다.
탕, 탕, 탕, 탕!
공기를 찢으며 날아오는 대구경 철갑탄.
그 탄환 하나하나가 해성호를 두 동강 내기에 충분한 파괴력을 지니고 있었다.
우진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갑판 가장자리로 뛰어나가며 두 팔을 앞으로 뻗었다.
"물러서!"
머리 위에서 아무런 도형도 띄우지 않은 아웃라이어의 존재 자체가 주변의 인과율 격자를 거칠게 찢어발겼다.
무형의 특이점 척력.
우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투명한 충격파가 날아오는 30밀리 탄환들과 허공에서 정면 충돌했다.
키이이잉!
고막이 터질 것 같은 파열음과 함께 탄환들이 공중에서 기괴하게 정지했다.
마치 시간의 늪에 빠진 것처럼 허공에 멈춰 선 대구경 탄환 수십 발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우진이 손목을 바깥으로 거칠게 꺾었다.
콰아아앙!
공간을 짓누르던 척력이 폭발하며 탄환들이 궤도를 180도 역전시켜 헬기의 로터 블레이드를 향해 역류했다.
퍼버버벅!
자신들이 쏜 탄환에 메인 로터가 박살 난 헬기가 중심을 잃고 공중에서 팽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조종사의 비명과 함께 헬기의 꼬리날개가 절벽 바위에 부딪히며 거대한 화염구를 만들어냈다.
쿠구구궁!
타오르는 헬기 잔해가 바다로 곤두박질치며 거대한 물기둥이 솟구쳤다.
그러나 그 대가는 참혹했다.
"커억……!"
우진의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의 양쪽 눈에서 핏물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흘렀다.
시야가 완벽하게 탈색되었다.
세상이 새하얀 백색 노이즈로 뒤덮이며 서연의 외침도, 파도 소리도 순식간에 진공 속에 갇힌 것처럼 먹먹해졌다.
백색 암전.
인과율의 물리 법칙을 강제로 뒤튼 대가로 시신경과 뇌간의 신경망 링크가 완전히 차단되어 버린 것이다.
"우진 씨! 우진 씨, 정신 차려요!"
서연이 달려와 쓰러지는 우진의 상체를 부축했다.
손에 닿은 우진의 이마는 펄펄 끓는 쇠붙이처럼 뜨거웠다.
관자놀이의 4cm 수술 흉터가 벌어지며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4. 무너진 등대, 좁혀오는 포위망
눈이 보이지 않았다.
오직 살을 에는 서해의 바닷바람과 비린 피 냄새, 그리고 타오르는 화약 연기만이 감각을 자극했다.
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서연의 팔을 붙잡았다.
"서연 씨…… 아버지는요?"
"무사해요. 제 바로 뒤에 계세요. 하지만 우진 씨, 눈이……!"
서연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녀는 우진의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떨리는 소맷자락으로 닦아냈다.
"괜찮습니다. 일시적인 차단이에요. 곧…… 곧 돌아옵니다."
우진이 이를 악물며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귓전을 때리는 소리는 절망적이었다.
남은 두 대의 공격 헬기가 더 이상 거리를 좁히지 않은 채, 소월도 해안가 전체에 차폐 지뢰와 인과율 그물을 투하하고 있었다.
절벽 위에서는 서지훈이 이끄는 수십 명의 기계화 특수부대가 로프를 타고 해안가로 강하를 완료했다.
철컥, 철컥.
티타늄 군화가 몽돌을 짓밟으며 다가오는 소리가 사방에서 좁혀져 왔다.
그들의 머리 위 검은 육면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전자음이 우진의 망가진 감각계를 바늘처럼 찔렀다.
"선장님, 배를 돌릴 수 있습니까?"
강정호가 조타실을 향해 낮게 물었다.
조타실 문을 열고 나온 선장이 피 묻은 이마를 훔치며 고개를 저었다.
"틀렸소. 우현 홀에 바닷물이 차오르고 있어. 이대로 외해로 나가면 10분도 못 가 침몰하오. 게다가 저놈들이 바다 쪽에 집속 기뢰를 뿌려놨어. 프로펠러가 걸리면 끝장이오."
독 안에 든 쥐였다.
바다는 기뢰로 막혔고, 등대는 불타고 있었으며, 육지 쪽 해변은 넥스트 큐브의 최정예 병력이 완벽한 반원형 포위망을 형성하며 좁혀오고 있었다.
뚜벅, 뚜벅.
기계화 대원들의 방패벽 사이로 서지훈이 걸어 나왔다.
그의 수트 자락이 바닷바람에 펄럭였다.
그의 등 뒤로는 검은 와이어들이 허공을 가득 메우며 기괴한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었다.
서지훈이 멈춰 선 곳은 해성호의 뱃머리에서 불과 이십 미터 떨어진 몽돌해변이었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피투성이가 된 우진을 지나쳐, 휠체어에 앉은 강정호의 눈에 가닿았다.
"15년 만이군요, 강정호 박사님."
서지훈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회한도, 분노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것은 시스템의 스피커가 출력하는 무미건조한 합성음과 같았다.
강정호가 휠체어 팔걸이를 짚으며 상체를 꼿꼿이 세웠다.
비록 두 다리는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불타는 등대보다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 15년 만이다, 서지훈. 여전히 네놈은 그 흉측한 목줄을 차고 있구나."
강정호의 일갈에 서지훈의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의 머리 위에 뜬 텅 빈 '암흑의 프레임'이 삐걱거리며 기괴한 파동을 뿜어냈다.
"목줄이라뇨. 이것은 질서입니다. 박사님이 15년 전 끝내지 못한 방정식을 완성하기 위한 유일한 봉합선이지요."
서지훈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이제 그만 고집을 꺾으십시오. 당신의 아들은 이미 한계입니다. 규격을 벗어난 아웃라이어의 신경계는 시스템 격자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저 아이를 살리고 싶다면 순순히 넘기십시오."
"내 아들은 네놈들의 부품이 아니다!"
강정호가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서지훈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박사님. 당신이 만든 시스템입니다. 당신이 코어의 심장에 앉아 15년 동안 지탱해 온 세상입니다. 이제 와서 그 모든 것을 부수고 혼돈으로 되돌리겠다는 겁니까? 테헤란로의 오리진 코어가 멈추면, 이 나라의 모든 통신망, 금융망, 생명 유지 장치가 일시에 정지합니다. 수천만 명의 인생 궤도가 충돌하여 전례 없는 참사가 벌어질 겁니다. 그것이 당신이 바라는 자유입니까?"
5. 아버지의 귓속말
서지훈의 논리는 여전히 견고했고 잔혹했다.
그는 시스템이 무너졌을 때 발생할 공포를 인질로 삼고 있었다.
하지만 우진은 보이지 않는 눈을 든 채 서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똑바로 응시했다.
시야는 여전히 하얗게 지워져 있었지만,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분노의 형상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거짓말하지 마라, 서지훈."
우진의 쉰 목소리가 파도 소리를 갈랐다.
"너는 질서를 지키려는 게 아니야. 너 자신이 겪었던 열 살 때의 비극…… 그 우연한 슬픔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서, 세상 전체를 거대한 시체 안치실로 만들려는 비겁자일 뿐이다."
서지훈의 얼굴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의 머리 위 암흑의 프레임 속으로 연결된 검은 와이어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시스템의 상위 연산부가 그의 감정 동요를 감지하고 억제 신호를 주입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서지훈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말이 길었군. 전 대원, 타깃 K-07을 무력화하고 강정호 박사를 포획하라."
기계화 대원들이 방패를 앞세우며 바닷물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들의 총구에서 다시 한번 푸른 인과율 에너지가 집속되기 시작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강정호가 손을 뻗어 우진의 젖은 외투 자락을 끌어당겼다.
우진의 귀가 아버지의 입술에 닿았다.
"우진아."
아버지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에 묻힐 만큼 가늘었지만, 지독하리만큼 단단했다.
"내 말을 똑똑히 들어라. 놈들의 진짜 목적은 나다. 내가 없으면 테헤란로의 오리진 코어는 최종 방어 모드를 해제하지 못해. 그래서 저놈은 날 절대로 죽이지 못한다."
"아버지,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겁니까……!"
우진이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보이지 않는 눈에서 눈물이 핏물과 섞여 흘러내렸다.
강정호가 아들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사파이어 칩, '마스터 암호 키' 위로 손을 얹었다.
그의 손끝에서 희미한 체온이 전해졌다.
"조타실 바닥을 뜯으면 비상 침수 밸브 옆에 해저 탈출용 산소 호흡기와 비밀 배수관이 있다. 이 섬의 암반 밑바닥은 15년 전 내가 파둔 해식동굴 수로와 연결되어 있어. 거기로 들어가면 섬 뒤편 외해로 빠져나갈 수 있다."
"안 됩니다. 아버지도 함께 가셔야 합니다!"
"난 갈 수 없다, 우진아."
강정호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것은 15년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자가 마침내 자신의 마지막 소명을 찾았을 때 짓는 해방의 미소였다.
"마비된 두 다리로 그 좁은 수로를 빠져나갈 수도 없을뿐더러, 내가 함께 도망치면 저놈들은 섬 전체를 융단폭격해서 너희까지 바다에 수장시킬 게다. 내가 여기서 미끼가 되어 저놈들의 발을 묶어야만 해."
"싫습니다! 15년 만에 겨우 만났는데…… 또다시 아버지를 두고 갈 수는 없어요!"
우진이 아버지의 마른 어깨를 부둥켜안았다.
어린 시절, 관자놀이가 찢겨 나가며 기억을 잃어가던 날의 공포가 가슴을 짓눌렀다.
그때도 아버지는 자신을 밀어내며 도망치라 소리쳤었다.
또다시 그 비극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강정호는 차가운 손으로 아들의 뺨을 감싸 쥐었다.
그의 손가락이 우진의 관자놀이에 새겨진 4cm의 흉터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우진아. 널 이렇게 만든 날 용서하지 말라고 했지. 하지만…… 아비로서 마지막으로 부탁 하나만 하자꾸나."
강정호의 목소리가 젖어 들어갔다.
"네 머릿속에 백신을 심었던 것은 널 영웅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그저…… 아무도 네 인생의 궤도를 강요하지 못하게, 네 발로 걸어가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니 살아라. 살아서 테헤란로로 가거라. 그리고 저들이 만든 그 저주받은 네모의 감옥을 네 손으로 부숴다오."
6. 붉게 타오르는 맹세
"한 기자."
강정호가 고개를 돌려 서연을 불렀다.
서연은 이미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우진이를 부탁하네. 이 아이의 눈이 되어주게."
"박사님……!"
"선장, 당장 아이들을 데리고 배수관으로 들어가시오! 이건 명령이오!"
강정호가 조타실을 향해 포효했다.
그 순간, 기계화 대원들의 첫 번째 일격이 해성호의 갑판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갑판 중앙이 박살 나며 목재 파편이 비산했다.
서지훈이 허공의 와이어를 휘두르며 해성호의 난간 위로 뛰어올랐다.
그의 암흑 프레임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실선들이 강정호의 휠체어를 포위하듯 휘감았다.
"잡아라!"
서지훈의 명령과 함께 대원 네 명이 갑판으로 난입했다.
"지금이다! 가라, 우진아!"
강정호가 휠체어 옆에 숨겨두었던 구형 수동 신호탄 권총을 서지훈의 얼굴을 향해 격발했다.
피슈우우웅!
시야를 가득 메우는 맹렬한 마그네슘 백색 섬광과 함께 자욱한 백색 연막이 갑판 전체를 뒤덮었다.
"크윽! 플래시 차폐 필터 작동!"
대원들의 당황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 찰나의 혼란 속에서 선장이 우진의 팔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가야 하오! 박사님의 목숨을 헛되게 만들 셈이요!"
"아버지! 아버지!"
우진이 비명을 질렀지만, 서연과 선장이 온 힘을 다해 우진을 조타실 바닥의 비상 해치로 밀어 넣었다.
백색 암전 속에서 우진의 손끝에 스친 것은 차가운 바닷물과 좁은 철제 배관의 감촉이었다.
쾅!
머리 위에서 무거운 철제 해치가 닫히고 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울렸다.
이어 갑판 위에서 강정호의 묵직한 고함과 서지훈의 냉혹한 목소리가 겹쳐 들려왔다.
"포박하라! 뇌간 링크를 확인하고 즉시 수송 헬기로 압송해라!"
"서지훈…… 네놈의 계산은 틀렸다. 내 아들은 결코 네놈들의 수식에 갇히지 않을 것이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부친의 신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해성호의 엔진실이 폭파되는 거대한 진동이 배관 전체를 뒤흔들었다.
쿠구구구궁!
바닷물이 순식간에 좁은 배수관 내부로 쏟아져 들어왔다.
"우진 씨, 숨 참아요!"
서연이 우진의 입에 비상 산소 호흡기 마우스피스를 물렸다.
차가운 바닷물이 우진의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암흑과 백색 노이즈가 뒤엉킨 시야 속에서, 우진은 관자놀이의 흉터를 짓눌렀다.
심장이 찢겨 나가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그의 뇌간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던 방화벽 백신이 차갑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아버지.'
눈물이 바닷물 속으로 흩어졌다.
아버지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또다시 스스로 괴물들의 소굴로 걸어 들어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15년 전의 어린아이는 더 이상 무력하게 울지 않았다.
우진은 주머니 속의 마스터 암호 키를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반드시 갑니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시신경의 링크가 회복되며, 백색 노이즈 너머로 차가운 바닷속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테헤란로 지하 백 미터, 당신들이 만든 그 지옥의 심장으로.'
우진은 서연의 손을 굳게 잡은 채, 칠흑 같은 해저 수로의 심연을 향해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섬의 함락과 함께, 마침내 마지막 지옥을 향한 문이 열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