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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57화

백신의 사명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붉은 경보의 사이렌

 

지하 5층 원자로 차폐실의 철문 틈새로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이 파고들었다.

 

붉은 비상등이 천장의 철골 구조물을 선혈빛으로 물들이며 격렬하게 회전했다.

 

콘크리트 벽면을 타고 전해지는 진동은 단순한 경보음의 울림이 아니었다.

 

수면 위, 아득히 높은 하늘을 가르며 날아드는 무거운 회전익 소리가 거대한 암반 지층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다.

 

"긴급 결의 제001호 발령. 코드 엑스터미네이션(Code Extermination) 집행."

 

벽면에 매설된 비상 통신 스피커에서 감정이 완전히 거세된 여성의 합성 음성이 차갑게 흘러나왔다.

 

"소월도 전역에 대한 군용 전술 공습을 개시합니다. 목표물 완전 소각 및 증거 인멸 프로토콜에 따라 해당 구역의 생명 반응은 예외 없이 영구 폐기 처리됩니다. 잔여 시간 4분."

 

스피커에서 튀는 지직거리는 잡음 속으로 멀리서 들려오는 로터의 굉음이 선명해졌다.

 

공습 헬기 편대였다.

 

넥스트 큐브의 상임이사회가 마침내 자신들의 과오와 비밀이 묻힌 이 고립된 섬 자체를 지도 위에서 증발시키기로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이 미친놈들이……! 기어이 섬을 통째로 갈아엎겠다는 거야?"

 

방폭문 바깥 복도에서 경계를 서던 한서연이 권총을 쥔 채 다급하게 차폐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흑연 가루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고,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어깨가 잘게 떨렸다.

 

"우진 씨! 수도권 인프라 제어망은 차단된 게 확실해요? 밖에서 헬기 소리가 들려요. 보통 규모가 아니에요! 적어도 세 대 이상의 중형 공격 헬기예요!"

 

서연의 다급한 외침에 강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관자놀이의 4cm 수술 흉터에서 뿜어져 나오던 지독한 열기는 차게 식어 있었지만, 뇌간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은 여전히 잔류 전류처럼 시신경을 긁어내리고 있었다.

 

조금 전 아버지 강정호의 목덜미 소켓에 자신의 관자놀이 흉터를 직결해 백신 코드를 주입했던 순간의 감각이 온몸에 생생히 각인되어 있었다.

 

그 짧은 접속 속에서 마주했던 참혹한 진실.

 

자신이 지난 수개월 동안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보아왔던 네모와 세모, 동그라미라는 기하학적 도형들.

 

그것은 세상을 꿰뚫어 보는 초월적인 이능 따위가 아니었다.

 

15년 전, 자신을 시스템의 가축화로부터 떼어내기 위해 아버지가 떨리는 손으로 뇌신경을 잘라냈던 수술의 끔찍한 후유증.

 

망가진 신경망이 시스템의 억압적 압력과 엔트로피의 파동을 정상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토해내던 영구적인 감각의 왜곡이자 시각적 노이즈였을 뿐이었다.

 

그 처절한 신체 훼손의 대가로 얻은 결함이, 역설적이게도 오늘 대한민국 수천만 명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던 플랜 B 위성 백도어를 불태우는 유일한 열쇠가 되었다는 사실이 목구멍 안쪽을 쓰라리게 옥죄어 왔다.

 

"……위성 백도어는 완전히 탔습니다."

 

우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하며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바닥을 짚은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콘솔 모니터에는 새까맣게 타버린 넥스트 큐브 본사의 위성 신호 링크와 함께 'OVERRIDE COMPLETED'라는 백색 글자만이 깜빡이고 있었다.

 

팔당댐 수문 개방도, 원자력 발전소의 냉각 차단도 모두 멈췄다.

 

지상의 파멸은 막아냈다.

 

그러나 승리의 여운을 음미할 여유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 공습의 전조는, 이 지하 요새가 곧 그들의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이 될 것임을 알리고 있었다.

 

2. 무형(無形)의 거인

 

"정호야, 일어설 수 있겠니?"

 

휠체어에 앉아 있던 강정호가 떨리는 손으로 바퀴를 부여잡으며 힘겹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얼굴은 15년간 햇빛 한 줌 보지 못한 채 차가운 냉각 챔버 속에서 시스템의 생체 연산 부품으로 혹사당한 자의 잿빛을 띠고 있었다.

 

서지훈의 잔혹한 고문으로 인해 신경 다발이 끊겨나간 두 다리는 힘없이 늘어져 있었고, 목덜미의 생체 소켓에서는 우진과의 직렬 접속으로 인해 뿜어져 나온 푸르스름한 연기가 가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을 바라보는 강정호의 메마른 눈동자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형형하게 살아 있었다.

 

우진은 아버지의 머리 위를 다시 한번 응시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한 시민들의 백색 네모도,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 기계들의 검은 네모도, 파멸을 앞둔 자들의 붉은 세모도 존재하지 않았다.

 

완벽한 무형(無形).

 

세상의 궤도를 통제하는 거대한 방정식을 스스로 창시했으나, 그 잔혹한 모순을 깨닫고 자신의 신경망조차 방정식 바깥으로 던져버린 최초 설계자의 공백이었다.

 

우진 자신의 머리 위와 똑같은, 시스템이 연산할 수 없는 절대적인 공허였다.

 

"서둘러야 합니다, 아버지. 부축해 드릴게요."

 

우진이 강정호의 마른 어깨 아래로 팔을 집어넣었다.

 

뼈마디가 손바닥에 고스란히 만져질 정도로 가벼웠다.

 

이 남자가 지난 15년 동안 홀로 감내해 온 고통의 무게가 우진의 팔을 타고 무겁게 짓눌러왔다.

 

강정호는 아들의 체온을 느끼자 눈시울을 붉히며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우진아…… 내 말을 똑똑히 들어야 한다. 시간이 많지 않아."

 

강정호의 거친 손이 우진의 멱살을 쥐듯 단단하게 붙잡았다.

 

그 손아귀에 실린 필사적인 힘에 우진의 움직임이 멎었다.

 

"지금 상임이사회 놈들이 날리는 미사일은 단순한 암살이 아니다. 이 소월도 요새에는 15년 전 연구소에서 빼돌린 프로토타입 분산 서버의 모든 물리적 기록이 잠들어 있어. 놈들은 수도권 인프라 장악이 실패하자마자, 자신들의 추악한 실체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해 통째로 소각하려는 게다."

 

쿵―!

 

암반 상층부가 거대한 충격을 받고 울부짖었다.

 

1차 로켓 탄두가 지상의 폐등대 인근에 작렬한 것이 분명했다.

 

천장에서 미세한 석회 가루와 콘크리트 파편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형광등 커버가 깨지며 불꽃을 튀겼고, 비상 배전반에서 붉은 스파크가 타닥거리며 튀어 올랐다.

 

서연이 비틀거리며 벽을 짚었다.

 

"상층 환기구가 무너지고 있어요! 이러다 엘리베이터 샤프트와 비상계단까지 전부 함몰돼요! 당장 해변으로 내려가지 않으면 우린 여기서 생매장당해요!"

 

"알고 있다, 한 기자."

 

강정호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도망치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아. 우진아, 네가 방금 위성 백도어를 태우면서 내 뇌간 깊숙한 곳에 새겨진 좌표를 보았을 게다."

 

우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조금 전, 백신 코드가 역위상으로 흘러들어가며 강정호의 기억 회로를 스쳐 지나갈 때 망막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던 그 칠흑빛 암호 덩어리.

 

'ORIGIN CORE : SECTOR-OMEGA.'

 

역삼역 지하 7층의 중앙 코어가 시스템의 전부가 아니었다.

 

서울의 심장부, 테헤란로 지하 깊숙한 암반 심연에 도사리고 있는 또 다른 거대한 괴물의 심장.

 

"그곳이…… 네모 프로젝트의 진짜 본거지입니까?"

 

우진이 묻자 강정호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3. 살아있는 백신 키

 

"역삼역 지하의 코어는 도시의 말단 생체 신호를 수신하고 자잘한 일상을 통제하던 지국에 불과했다."

 

강정호의 목소리에 15년간 억눌려온 회한과 분노가 실렸다.

 

"진짜는 테헤란로 한복판, 지반 아래 100미터 암반층에 건설된 오리진 코어다. 상임이사회의 늙은 망령들이 모여 앉아, 국가의 흥망과 수천만 인간의 죽음과 삶의 파멸 순번을 거시적으로 집행하는 궁극의 중추 연산 시설이지. 넥스트 큐브라는 거대한 독버섯의 뿌리가 바로 그곳에 박혀 있다."

 

강정호는 떨리는 오른손을 들어 우진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난 4cm의 흉터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거칠고 메마른 손가락이 상처 위를 스칠 때마다 우진의 가슴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이 번져 나갔다.

 

"우진아. 내가 15년 전 내 손으로 네 머리를 째고, 네 뇌신경 궤도를 잘라냈을 때…… 나는 단순히 내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만 그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이 아니었다."

 

강정호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려 뺨의 깊은 주름을 적셨다.

 

"그날 밤, 서지훈과 놈들이 내 다리를 으스러뜨리고 연구소에 불을 질렀을 때 나는 깨달았다. 이 흉물스러운 통제 격자망은 외부에서의 물리적인 파괴나 단순한 해킹 프로그램 따위로는 영원히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코어는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스스로를 복제하고 분산하며, 외부의 공격을 인과율의 결손으로 치환해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으로 메워버린다."

 

우진은 숨을 죽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겪어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쳤다.

 

강남역에서 아이를 구했을 때 다른 승객에게 튀었던 파멸의 불꽃.

 

송민규를 구했을 때 서연의 취재 사무실로 번졌던 방화 테러.

 

시스템은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결손된 엔트로피를 주변의 가장 취약한 노드로 역류시켜 희생양을 만들어냈다.

 

그것이 바로 인과율 보존 법칙의 끔찍한 저주였다.

 

"그렇다면…… 오리진 코어를 파괴할 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 아닙니까? 그 거대한 중추가 부서지면, 서울 전체에 수백만 명 규모의 인과율 역류가 터져 나올 텐데요."

 

서연이 사색이 되어 끼어들었다.

 

기자로서 현장을 목격해 온 그녀였기에 그 참상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강정호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메테우스나 오메가-루프 같은 소프트웨어 패치만으로는 부족했던 게다. 시스템의 근본 알고리즘 자체를 영구히 소각하고, 터져 나오는 엔트로피의 쓰나미를 단 한 점으로 모아 무해하게 증발시키려면…… 외부의 코드가 아니라, 시스템 내부에서 스스로 자라난 돌연변이 항체가 필요했어."

 

강정호의 시선이 우진의 눈동자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눈빛 속에 담긴 진실의 무게에 우진의 숨이 턱 막혔다.

 

"우진아. 네 몸, 네 신경망, 네가 가진 결함 자체가 바로 그 무기다."

 

"제 신경망이…… 무기라고요?"

 

"그렇다. 15년 전 내가 네 뇌 속에 이식했던 백신은 단순한 데이터 칩이 아니었다. 그것은 네 뇌세포와 결합해 자라나는 생체 유기체 알고리즘이었어. 그리고 내가 네 궤도 신경을 절제함으로써, 너는 시스템의 격자망 안에서 숨 쉬면서도 시스템의 수식에 절대 종속되지 않는 유일무이한 존재…… '살아있는 백신 키(Living Vaccine Key)'로 완성된 거다."

 

두 번째 굉음이 지하를 강타했다.

 

이번에는 훨씬 가까웠다.

 

지하 4층 관제실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환기 덕트에서 시커먼 매연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화약 냄새와 타버린 전선 냄새가 차폐실 안을 가득 메웠다.

 

하지만 강정호는 흔들리지 않고 우진의 손을 으스러져라 쥐었다.

 

"잘 들어라, 우진아. 테헤란로 지하의 오리진 코어 메인 서버는 그 어떤 외부 신호도, 디스크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직 네 뇌파를 직접 동기화해야만 해. 네 관자놀이의 바이패스 단말을 오리진 코어의 마스터 리셉터에 직접 꽂아 넣고, 네 생체 뇌파를 시스템 전체의 기저 주파수와 강제로 공명시켜야 한다."

 

"제 뇌파를…… 코어에 동기화한다고요?"

 

우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도시 전체, 아니 국가 전체의 궤도를 쥐고 흔드는 초거대 양자 연산 코어에 인간의 생체 뇌를 직접 연결한다는 것.

 

그것은 수천만 가닥의 고압 전류가 흐르는 전선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는 자살 행위였다.

 

"그렇다. 네 뇌파가 코어와 100% 동기화되는 그 찰나의 순간, 네 뇌 속에 자라난 백신 코드가 오리진 코어의 모든 제어 회로를 내부에서부터 집어삼키며 태워버릴 게다. 시스템은 너를 새로운 생체 프로세서로 인식해 문을 열겠지만, 네가 품은 특이점의 척력이 코어의 심장을 영구히 쇼트시키는 거지. 그것만이…… 인과율의 무고한 역류 없이 네모 프로젝트를 영원히 끝장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강정호의 목소리에 피를 토하는 듯한 비장함이 배어 있었다.

 

"이것이…… 내가 15년 전 너에게 지운 잔혹한 운명이자, 오직 너만이 완수할 수 있는 백신의 사명이다."

 

4. 고립된 활로

 

강정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하 5층 복도 끝에서 묵직한 폭음이 연달아 터졌다.

 

콰쾅―!

 

방폭 셔터가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튕겨 나가는 소리가 복도를 가득 채웠다.

 

지상의 헬기에서 발사된 지중 관통 탄두가 상층부를 뚫고 지하 3층과 4층을 차례로 유린하고 있었다.

 

"우진 씨! 더 이상 지체하면 퇴로 자체가 사라져요!"

 

서연이 콘솔 모니터를 확인하며 비명을 질렀다.

 

모니터에 표시된 소월도 지상 감시 카메라들은 이미 절반 이상이 노이즈를 뿜으며 꺼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잡힌 해안가 화면 속에는, 짙은 해무를 찢으며 선회하는 세 대의 검은색 군용 공격 헬기의 실루엣이 선명했다.

 

기총 소사의 궤적이 몽돌해변을 따라 길게 흙먼지를 뿜어내고 있었다.

 

다행히 해성호는 해안 절벽의 해식동굴 그늘 아래 바짝 붙어 있어 아직 직접적인 폭격을 피한 듯 보였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기화폭탄 한 발만 동굴 입구에 떨어져도 목선인 해성호는 뼈대도 추리지 못하고 박살 날 판이었다.

 

"나가야 합니다."

 

우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휠체어 옆에 무릎을 꿇고 강정호를 등 뒤로 업어 올렸다.

 

가벼운 체구였지만, 그 속에 담긴 15년의 진실과 사명의 무게는 우진의 척추를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꽉 잡으세요, 아버지."

 

"우진아…… 난 짐만 될 뿐이다. 나를 두고 가라. 콘솔의 자폭 스위치를 올리고 날 남겨두면, 저 위에서 내려오는 놈들을 조금이라도 더……."

 

"절대 안 됩니다."

 

우진이 이를 악물며 강정호의 말을 잘라냈다.

 

등 뒤로 느껴지는 아버지의 앙상한 가슴팍에서 뛰는 미약한 심장 박동.

 

그 고동을 느끼는 순간, 우진의 가슴속에서 차가운 분노와 함께 꺼지지 않는 불꽃이 치밀어 올랐다.

 

"15년 만에 만났습니다. 어머니가…… 파주에서 아버지를 기다리고 계세요. 반드시 살아서 함께 갑니다. 그 망할 오리진 코어를 부수러 가는 길도, 아버지와 함께 갈 겁니다."

 

강정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아내의 이름이 나오자, 평생을 차가운 이성과 수식으로 무장했던 늙은 과학자의 눈에서 참아왔던 오열이 터져 나왔다.

 

그는 더 이상 거부하지 못한 채, 아들의 목을 뼈마디가 하얘지도록 감싸 안았다.

 

"서연 씨, 앞장서요! 배수 펌프실 쪽 비상 수로로 갑니다!"

 

우진이 외쳤다.

 

등대와 연결된 중앙 계단이나 엘리베이터 샤프트는 이미 폭격으로 매몰되었을 터였다.

 

남은 탈출로는 오직 하나, 15년 전 강정호가 해상 요새를 설계하며 유사시를 대비해 극비리에 파두었던 지하 5층 해수 배수 터널뿐이었다.

 

서연이 권총을 고쳐 쥐고 앞장서서 차폐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복도는 이미 생지옥이었다.

 

부서진 배관에서 고압 증기가 맹렬한 소리를 내며 뿜어져 나왔고, 천장에서 떨어진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바닥을 가로막고 있었다.

 

벽면을 타고 흐르는 냉각수와 찢겨 나간 전선이 엉켜 바닥에는 푸른 전기가 사납게 튀었다.

 

우진은 아버지를 단단히 고정하고 잔해 사이를 전력으로 질주했다.

 

쿵―!

 

콰르릉!

 

바로 위층, 지하 4층 중앙 관제실 쪽이 통째로 주저앉는 굉음이 등 뒤를 덮쳤다.

 

거대한 폭풍과 함께 시커먼 연기와 열풍이 복도를 집어삼키며 밀려왔다.

 

우진은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어 오른쪽 격벽 뒤로 몸을 날렸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파편들을 등 뒤의 외투로 막아서며, 우진은 자신의 내면에 집중했다.

 

머리 위에 도형은 없다.

 

자신은 시스템의 연산식에서 완전히 지워진 아웃라이어.

 

그러나 도형이 사라졌다고 해서 능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이 '망가진 신경망이 일으킨 감각 왜곡'이라는 진실을 자각한 순간, 불필요한 시각적 노이즈가 걷히고 공간의 왜곡과 물리적 압력이 순수한 감각 그 자체로 뇌리에 박혀 들어왔다.

 

어디서 천장이 무너질지, 공기의 압력이 어느 쪽으로 쏠리는지, 파편의 궤적이 어떻게 튀는지.

 

0.3초 뒤의 세계가 투명한 잔상처럼 우진의 망막에 스쳐 지나갔다.

 

"왼쪽으로 꺾어요, 서연 씨! 천장이 무너집니다!"

 

우진의 외침과 동시에, 서연이 몸을 날려 왼쪽 배관실로 굴러 들어갔다.

 

찰나의 순간, 그녀가 서 있던 자리에 지름 2미터짜리 거대한 환기 팬 모터가 굉음을 내며 처박혔다.

 

간발의 차였다.

 

먼지구덩이 속에서 일어난 서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복도 끝의 육중한 잠금 밸브를 가리켰다.

 

"저기예요! 해수 배출구 비상 해치!"

 

5. 사명을 향한 결의

 

녹슨 황동 밸브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서연이 매달려 온몸으로 밸브를 당겼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는 연쇄 폭발의 진동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공습 편대가 섬의 지반 자체를 무너뜨리기 위해 벙커 버스터급 중폭탄을 투하하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암반 균열을 타고 바닷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수위가 순식간에 발목을 넘어 종아리까지 차올랐다.

 

"안 돌아가요……! 수압 때문에 걸렸어요!"

 

서연이 피가 배어 나오는 손바닥으로 밸브를 내리치며 절규했다.

 

우진이 다가섰다.

 

그는 아버지를 벽에 기대어 앉힌 뒤, 양손으로 황동 밸브를 움켜쥐었다.

 

관자놀이의 흉터가 욱신거리며 맥동했다.

 

더 이상 두통에 휘둘리지 않았다.

 

이것은 결함이지만, 동시에 시스템을 거부하는 자신만의 무기였다.

 

우진은 뇌간에 잠든 방화벽 백신의 척력 파동을 양팔의 근육으로 끌어올렸다.

 

공간을 비틀고 시스템의 격자를 밀어내던 그 보이지 않는 반발력이, 우진의 근막과 관절을 타고 고밀도로 집속되었다.

 

"크아아아악―!"

 

우진의 입에서 짐승 같은 포효가 터져 나왔다.

 

우지직―!

 

금속이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굳어 있던 황동 밸브가 강제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나사산이 뭉개지며 불꽃이 튀었고, 마침내 육중한 원형 해치가 덜컹거리며 안쪽으로 열렸다.

 

콰아아아―!

 

해치 너머 어두운 수로에서 차가운 바닷바람과 함께 거센 물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해안가 해식동굴로 직결되는 자연 배수 통로였다.

 

"서연 씨, 먼저 들어가요!"

 

우진이 강정호를 다시 등에 업으며 외쳤다.

 

서연이 망설임 없이 좁은 배수관 안으로 몸을 던졌다.

 

우진이 그 뒤를 이어 해치 안으로 몸을 밀어 넣는 순간, 그들이 빠져나온 지하 5층 차폐실 전체가 거대한 폭음과 함께 완전히 붕괴했다.

 

화염과 콘크리트 잔해가 닫히지 않은 해치 입구를 덮쳤지만, 물살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세 사람의 신체는 이미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간 뒤였다.

 

차가운 바닷물이 전신을 후려쳤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사방이 어둠에 잠겼지만, 우진은 등 뒤의 아버지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얼마나 미끄러져 내려갔을까.

 

전방에서 희미한 자연광과 함께 거친 파도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푸하악―!

 

세 사람은 세찬 물살과 함께 해식동굴 내부의 얕은 자갈밭으로 튕겨져 나왔다.

 

동굴 밖은 여전히 포연과 해무로 자욱했다.

 

상공을 가르는 헬기의 로터 소리가 섬 전체를 뒤흔들고 있었고, 저 멀리 폐등대가 있던 절벽 정상부는 거대한 불기둥과 함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우진 씨! 저기요!"

 

기침을 토해내던 서연이 동굴 입구 바위틈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기적처럼 무사히 버티고 있는 낡은 목선, 해성호가 닻을 내린 채 시동을 걸고 있었다.

 

갑판 위에서 초조하게 절벽을 올려다보던 선장이 물속에서 솟아오른 세 사람을 발견하고 밧줄을 던졌다.

 

"살아있었구먼! 빨리 타요! 헬기 놈들이 해변 쪽으로 기총을 돌리고 있어!"

 

우진은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아버지를 갑판 위로 밀어 올린 뒤, 서연과 함께 밧줄을 타고 배 위로 기어올랐다.

 

"출항해요! 전속력으로!"

 

우진의 외침에 선장이 기계식 디젤 엔진의 스로틀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쿠구구구궁―!

 

순수 아날로그 8기통 엔진이 흑연을 토해내며 포효했고, 해성호의 뱃머리가 거친 백파를 가르며 동굴을 빠져나갔다.

 

그 순간, 소월도 정상부의 암반 전체가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흙먼지와 화염이 하늘을 뒤덮었다.

 

소월도 해상 요새의 완전한 침몰이었다.

 

공습 헬기 세 대가 불타는 섬 상공을 선회하며 잔해를 확인하느라, 짙은 해무 속으로 몸을 숨기며 전속력으로 빠져나가는 낡은 목선의 존재를 미처 포착하지 못했다.

 

전파가 통하지 않는 아날로그 목선이었기에 가능했던 천운의 탈출이었다.

 

갑판 바닥에 쓰러진 서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불타는 섬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안도와 비장함이 교차했다.

 

우진은 갑판에 기대어 앉은 아버지 강정호의 곁으로 다가갔다.

 

강정호는 바닷물에 젖은 얼굴을 닦아내며, 아득한 동쪽 수평선 너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짙은 어둠 속에서도 번쩍이는 거대한 도시의 불빛, 서울이 있었다.

 

그리고 그 심장부 테헤란로 지하 100미터 아래, 전 인류를 사각형의 감옥에 가두고 조롱하는 시스템의 궁극적 심장, 오리진 코어가 숨 쉬고 있었다.

 

우진은 자신의 주먹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지만,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의 뇌간에 새겨진 결함.

 

그것은 저주가 아니라, 이 뒤틀린 세상을 끝장내기 위해 준비된 단 하나의 살아있는 열쇠였다.

 

'살아있는 백신 키.'

 

아버지가 남긴 사명의 무게가 우진의 가슴속에서 차가운 결의로 굳어졌다.

 

시스템이 준비한 마지막 무덤으로 걸어 들어갈 시간이었다.

 

자신의 모든 뇌신경을 불태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잔혹한 거인의 목을 베어 넘기리라.

 

해성호의 뱃머리가 검푸른 서해의 파도를 가르며, 최후의 전장이 기다리는 육지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