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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53화

안개 섬의 등대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침묵의 장막

 

바닷물 냄새가 아니었다.

 

코끝을 찌르고 들어오는 공기는 소금기 대신 눅눅한 쇳가루와 차갑게 식은 플라스틱 탄내를 머금고 있었다.

 

해성호의 낡은 8기통 디젤 엔진이 둔중한 진동을 토해내며 잦아들었다.

 

스크루가 물을 밀어내는 소리조차 점차 끈적거리는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강우진은 뱃머리의 축축한 난간을 짚은 채 거친 숨을 골랐다.

 

시야를 하얗게 지워버렸던 백색 암전의 잔상이 완전히 걷히지 않아,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망막 위로 지직거리는 은빛 노이즈가 스쳤다.

 

관자놀이의 4센티미터 수술 흉터는 마치 살 속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철사가 꿈틀거리듯 맥박에 맞춰 욱신거렸다.

 

"우진 씨, 괜찮아요?"

 

뒤편에서 조심스러운 발소리와 함께 한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젖은 방한 외투 깃을 바짝 여민 채 우진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턱 끝으로 흘러내린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앞은 보입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거짓말하지 마요. 방금 전까지 동공에 초점도 안 잡혔잖아요. 눈가에 핏줄 다 터진 거 안 보여요?"

 

서연의 목소리에는 날 선 책망과 함께 숨길 수 없는 떨림이 배어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를 올려다보려 했지만, 시신경 깊숙한 곳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치솟아 우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내렸다.

 

자신의 정수리 위에는 이제 아무것도 떠 있지 않았다.

 

네모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없는 완벽한 진공.

 

시스템의 수식에서 영구히 탈선해 버린 대가로 찾아온 아웃라이어의 저주는, 그가 능력을 쥐어짤 때마다 감각의 회선을 하나씩 끊어놓으려 들고 있었다.

 

"그래도 버텨야 합니다. 여기가 마지막이니까요."

 

우진이 시선을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눈앞을 가로막은 해무는 자연스러운 기상 현상이 아니었다.

 

수면 위를 기어 다니는 백색 안개 입자 하나하나가 미세한 전자기장을 머금고 있는 양, 불길하게 엉겨 붙어 있었다.

 

배를 둘러싼 공기 전체가 마치 젤라틴처럼 뻑뻑했다.

 

소월도(蘇月島).

 

1990년대 말에 공식 지도에서 지워진 외딴 섬.

 

그 섬의 진입로를 틀어막고 있는 것은 단순한 안개가 아니라, 외부와의 전파 교환을 원천 봉쇄하는 군용 규격의 차폐 스모그였다.

 

조타실 문이 삐걱거리며 열리고, 늙은 선장이 굳은 표정으로 갑판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거친 손에는 낡은 황동 나침반이 들려 있었다.

 

"이거 참…… 기계식 나침반 침이 미친 듯이 돕니다. 섬 쪽으로 다가갈수록 자철석이라도 묻혀 있는 것처럼 바늘이 덜덜 떨려요."

 

선장의 말대로 놋쇠 케이스 안의 붉은 지침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팽이처럼 맴돌고 있었다.

 

우진은 선장의 정수리를 언뜻 바라보았다.

 

고속정의 습격을 겪기 전 위태롭게 회전하던 불안정한 세모는 희미해져 있었지만, 여전히 엷은 잿빛을 띤 채 안개 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엔진을 끄고 타력으로만 접안해야 할 것 같습니다. 소리가 울리면 섬 안쪽 경비초소에 바로 걸릴 테니까요."

 

선장이 헛기침을 삼키며 낮게 속삭였다.

 

"어차피 섬 둘레 전체가 주상절리 암벽입니다. 접안할 수 있는 몽돌해변은 저 폐등대 밑자락 딱 한 군데뿐이에요."

 

선장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안개 너머를 우진과 서연이 동시에 바라보았다.

 

자욱한 해무를 찢고 솟아오른 거대한 암벽.

 

그 칼날 같은 절벽 정상에, 마치 부러진 뼈마디처럼 기괴한 형상으로 서 있는 콘크리트 건축물이 보였다.

 

풍화에 깎여나가 표면이 얼룩덜룩해진 백색 등대였다.

 

불빛을 잃어버린 지 수십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흉물.

 

하지만 그 낡은 외피와 달리, 등대 상부의 철제 돔 환기구 부근에서는 미세한 청백색 정전기 스파크가 간헐적으로 안갯속으로 튀고 있었다.

 

넥스트 큐브가 감춰둔 해상 요새의 유일한 지상 돌출구였다.

 

2. 끊어진 신호와 잿빛 해변

 

서연이 점퍼 안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단파 무전기를 꺼내 안테나를 길게 뽑아 올렸다.

 

주파수 다이얼은 강정호 박사가 지정했던 144.820MHz에 정확히 고정되어 있었다.

 

치이익, 치익.

 

스피커에서는 아무런 음성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기계적인 화이트 노이즈조차 안개의 농도에 짓눌린 듯 먹먹하게 끊어졌다.

 

"신호가 완전히 죽었어요. 파주 본부 쪽이랑 통신이 아예 닿질 않아요."

 

서연이 이를 악물며 무전기 볼륨 다이얼을 돌렸지만, 돌아오는 것은 젖은 벽돌을 긁는 듯한 메마른 잡음뿐이었다.

 

"채린 씨의 척력 신호도…… 이제 느껴지지 않아요. 우진 씨, 괜찮은 거 맞죠?"

 

우진은 자신의 귓바퀴를 매만졌다.

 

바다를 건너오는 내내 관자놀이 뒤편을 은은하게 울려주던 은빛 동그라미의 청량한 공명음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파주 은신처에서 옥상 안테나를 부여잡고 피를 쏟아내듯 척력을 송출하던 채린이 한계에 부딪혀 실신했다는 뜻이었다.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그녀가 쥐어짜 낸 마지막 힘 덕분에 고속정 두 척을 수장시키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이제부터는 외부의 그 어떤 지원도, 기적 같은 척력 방어벽도 기대할 수 없었다.

 

오직 자신들의 발과 손으로 저 안갯속의 괴물을 찢어발겨야 했다.

 

털털거리던 디젤 엔진이 멎자, 해성호는 거친 너울을 타고 천천히 미끄러져 들어갔다.

 

차가운 파도가 뱃머리를 때리며 잘게 부서졌다.

 

바위에 낀 검은 해조류와 젖은 몽돌들이 짙은 안개 사이로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다.

 

콰르릉.

 

배 밑바닥이 자갈밭에 긁히며 둔탁한 마찰음을 냈다.

 

"접안했습니다. 더 들어가면 스크루가 깨집니다!"

 

선장이 조타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밧줄을 챙겨 들었다.

 

우진은 서연의 배낭을 받아 어깨에 메고는 먼저 난간을 넘어 차가운 바닷물 속으로 뛰어내렸다.

 

무릎까지 차오르는 서해의 겨울 바닷물이 뼈마디를 시리게 찔러왔다.

 

우진은 뒤이어 내려오는 서연의 팔을 단단히 붙잡아 자갈밭 위로 끌어올렸다.

 

서연은 몽돌을 밟고 서서 숨을 들이켜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방이 깎아지른 해안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파도가 칠 때마다 몽돌들이 서로 부딪치며 잘그락거리는 기괴한 소리를 냈고, 안개는 사람 키 높이까지 내려앉아 시야를 불과 십여 미터 안팎으로 제한하고 있었다.

 

선장이 해변가 바위에 밧줄을 단단히 묶어 매듭을 지은 뒤, 조타실에서 챙겨온 낡은 장총 형태의 작살총을 우진에게 건넸다.

 

"총탄이 오가는 판국에 이런 쇠꼬챙이가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 맨손보단 나을 겁니다."

 

우진은 작살총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장님이 가지고 계십시오. 저희가 들어간 뒤에 섬 주변을 감시선이 순찰할 수도 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바로 배를 띄워 공해상으로 빠져나가세요."

 

"하지만 두 사람만 저기 올라갔다가……."

 

"여기서 기다리다 다 같이 죽는 것보단 낫습니다. 파주의 제 동료들이 선장님 따님을 지키고 있습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셔야 합니다."

 

우진의 낮고 단호한 눈빛에 선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선장은 투박한 손으로 우진의 어깨를 꽉 쥐었다.

 

"꼭…… 살아 나오쇼. 젊은 양반들 죽는 꼴 보려고 여기까지 배를 몬 게 아니니까."

 

우진은 가볍게 묵례를 건넨 뒤, 서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몽돌을 밟으며 절벽 아래로 난 희미한 군용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발을 디딜 때마다 자갈 밑에서 빠져나간 바닷물이 스며 나오며 발목을 적셨다.

 

소월도의 공기는 지상과는 전혀 다른 질서로 돌아가고 있었다.

 

도시 전체를 옭아매던 테헤란로의 사각 격자망이 거미줄처럼 팽팽하게 뻗어 있던 것과 달리, 이곳의 공간은 마치 납덩어리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하 5층에 묻혀 있다는 독립 원자로와 슈퍼컴퓨터가 뿜어내는 기괴한 인과율의 압력이, 섬 전체를 현실 세계로부터 강제로 떼어내 허공에 매달아 놓은 듯한 이물감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3. 해안 절벽의 아날로그 흔적

 

절벽을 타고 오르는 콘크리트 계단은 반쯤 부서져 있었다.

 

계단 난간을 이루던 쇠파이프는 붉은 녹이 슬어 손을 대는 족족 부스러져 내렸다.

 

우진은 앞서 걸으며 한 손으로 서연의 균형을 잡아주었다.

 

디딤돌마다 바다 이끼가 끼어 있어 자칫 발을 헛디디면 수십 미터 아래 암초 지대로 굴러떨어질 판이었다.

 

절벽 중턱에 다다랐을 때, 우진의 발끝에 얇고 팽팽한 무언가가 걸렸다.

 

탁.

 

귓가에 아주 미세한 금속성의 탄성이 스쳤다.

 

우진은 반사적으로 서연의 어깨를 낚아채며 자신의 몸 안쪽으로 끌어당겼다.

 

"움직이지 마요."

 

서연이 숨을 멈추며 굳어졌다.

 

우진은 허리를 낮추고 부서진 계단 참 바닥을 천천히 훑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가느다란 피아노선 한 가닥이 계단 양쪽 바위틈 사이에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조금 전 그의 구둣발 코끝이 그 선을 1밀리미터가량 건드린 상태였다.

 

선을 따라 시선을 조심스럽게 옮기자, 절벽 암벽에 파인 주먹만 한 홈 속에 장치된 낡은 기폭 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디지털 센서도, 적외선 감지기도 아니었다.

 

구형 수류탄의 안전핀에 낚싯줄용 도르래를 연결해 둔 순수 기계식 인계철선 트랩이었다.

 

"이건…… 넥스트 큐브의 장비가 아니에요."

 

서연이 우진의 등 뒤에서 숨죽여 속삭였다.

 

"그자들은 이런 구식 덫을 쓰지 않아요. 인과율 집속 센서나 생체 스캔 지뢰를 깔아두면 그만인데……."

 

우진의 시선이 인계철선 고정부의 놋쇠 볼트에 멈췄다.

 

볼트 머리 부분에 십자 홈 대신, 특이하게도 가느다란 홈 세 개가 방사형으로 파여 있었다.

 

강정호의 연구 노트.

 

어린 시절, 아버지가 서재에서 시계나 정밀 계측기를 수리할 때 사용하던 특수 규격의 수제 나사였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전류가 척추를 타고 내달렸다.

 

"아버지예요."

 

우진의 메마른 입술에서 억눌린 음성이 흘러나왔다.

 

서연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강 박사님이요? 15년 전에 끌려가서 코어에 갇혀 계셨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15년 전, 연구소가 불타기 전입니다. 아버지는 이곳을 알고 계셨어요. 넥스트 큐브가 훗날 이 무인도를 해상 기지로 삼을 거라는 사실을 미리 내다보고 손을 써둔 겁니다."

 

우진은 주머니에서 다용도 접이식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도르래의 스프링 장력을 섬세하게 누르며 안전핀 쪽으로 향하는 선을 단번에 끊어냈다.

 

철선이 맥없이 풀리며 바닥으로 늘어졌다.

 

우진은 트랩 뒤편 바위 표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두껍게 낀 해풍의 소금기를 긁어내자, 바위 표면에 뾰족한 정으로 거칠게 새겨 넣은 작은 기호가 나타났다.

 

원형 안에 새겨진 세 개의 눈금.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비상 대피로를 표시할 때 쓰는 군용 아날로그 암호였다.

 

"아버지는 이 섬이 적들의 최후 요새가 될 것을 알고 계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비상 탈출로나 침투로를 파두셨던 겁니다."

 

서연이 그 기호를 가만히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적들도 이 트랩의 존재를 모를 수 있겠네요? 넥스트 큐브 놈들은 디지털 전산망과 인과율 격자 센서에만 의존하니까, 이런 흙먼지 묻은 기계식 부비트랩은 레이더에 아예 잡히지도 않을 테니까요."

 

"맞습니다. 하지만 방심할 순 없어요. 아버지가 깔아둔 방어선이라는 건, 반대로 말하면 이 길목을 모르는 자는 누구든 죽는다는 뜻이니까요."

 

우진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제 그의 시선은 단순한 바닥이 아니라, 바위의 틈새, 바람이 들이치는 각도, 계단 난간의 미세한 용접 자국까지 샅샅이 훑고 있었다.

 

과거 추적 능력을 과도하게 쓰면 또다시 백색 암전이 찾아올 위험이 있었기에, 우진은 철저히 육안과 직관에 의존해 길을 개척했다.

 

절벽을 거의 다 올랐을 무렵, 두 번째 트랩이 나타났다.

 

계단 디딤판 아래에 설치된 압력식 신관.

 

지뢰 표면에는 얇은 구리판이 덧대어져 있어, 전자기 펄스(EMP)가 터져도 기폭 장치가 고장 나지 않도록 차폐되어 있었다.

 

강정호 특유의 편집증에 가까운 아날로그 방어 설계였다.

 

우진은 아버지의 버릇을 떠올렸다.

 

'모든 전자 회로는 전기가 끊기면 고철이 된다. 하지만 용수철과 화약, 중력은 세상이 멸망해도 절대 배신하지 않는 법이란다.'

 

유년 시절의 지워진 기억 속에서, 아버지의 낮고 따뜻했던 음성이 귓가에 환청처럼 맴돌았다.

 

우진은 말없이 나이프 끝으로 압력판의 지지 핀을 고정시킨 뒤, 서연의 손을 잡고 계단의 마지막 턱을 뛰어넘었다.

 

절벽 끝에 서자, 소월도 정상의 황량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4. 거인의 무덤, 소월도 폐등대

 

절벽 위는 잡초조차 자라지 못하는 삭막한 자갈 공터였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이 안개를 이리저리 휘몰아치며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공터 한가운데, 거대한 콘크리트 원통형 구조물이 안개를 뚫고 솟아 있었다.

 

높이 30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소월도 폐등대였다.

 

가까이서 본 등대의 모습은 해상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기형적이었다.

 

외벽 콘크리트 곳곳이 심하게 깨져 있었는데, 깨진 틈새 안쪽으로 드러난 것은 붉은 벽돌이나 철근이 아니었다.

 

은빛으로 번뜩이는 두꺼운 납 차폐 패널과, 고압 전력선이 빼곡하게 들어찬 광케이블 다발이었다.

 

외벽만 폐등대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을 뿐, 내부 전체가 첨단 군용 설비로 개조되어 있는 거대한 위장 건축물이었다.

 

"저길 봐요."

 

서연이 등대 상부를 가리켰다.

 

등대 꼭대기의 회전식 등명기(燈明機)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유리 렌즈 대신 거대한 8각 파라볼라 안테나 세 대가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안테나의 혼 피드(Feed) 끝에서 푸르스름한 전자기 아크가 튀며, 상공을 향해 보이지 않는 펄스를 끊임없이 방출하고 있었다.

 

그 안테나들이 바로 서울과 수도권 전역의 전력망, 상수도망, 교통 신호망을 틀어쥐고 있는 플랜 B의 지휘 송출기였다.

 

우진은 본능적으로 관자놀이를 짚었다.

 

등대 주변 50미터 반경의 공기가 징그러울 정도로 팽팽했다.

 

자신의 머리 위에는 아무것도 뜨지 않았지만, 등대 꼭대기의 파라볼라 안테나 상공에는 3차원 입체 사각 격자(Grid)가 붉은빛을 번뜩이며 돔 형태로 굽이치고 있었다.

 

넥스트 큐브가 이 섬 전체를 요새화하며 펼쳐둔 인과율 결계였다.

 

"저 돔 안으로 들어가면 경보가 울릴 겁니다."

 

서연이 카메라 렌즈를 조절하며 낮게 경고했다.

 

"지상 정문으로는 절대 못 들어가요. 적외선 센서랑 압력 감지 패드가 입구 바닥 전체에 깔려 있을 게 뻔해요."

 

"정문으로 갈 생각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우진이 등대 뒤편, 깎아지른 북쪽 절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풍이 가장 거세게 몰아치는 음지였다.

 

소금기에 절어 검게 변한 등대 북쪽 벽면 하단에, 녹슨 철제 맨홀 뚜껑 하나가 칡넝쿨과 마른 잡초에 뒤덮인 채 묻혀 있었다.

 

과거 등대 간수들이 빗물을 모아두던 저수조 점검구 형태였다.

 

우진이 나이프를 틈새에 찔러 넣어 엉킨 잡초들을 긁어냈다.

 

맨홀 뚜껑 중앙에는 아무런 표식도 없었지만, 테두리의 볼트 여섯 개 중 하나만 유독 반짝이는 스테인리스 재질로 박혀 있었다.

 

우진이 그 볼트를 손가락으로 강하게 눌렀다.

 

철컥.

 

묵직한 스프링 풀리는 소리와 함께, 맨홀 뚜껑 안쪽에서 걸쇠가 풀리는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열렸어요……!"

 

서연이 숨을 삼켰다.

 

우진이 뚜껑의 손잡이를 잡고 힘을 주어 들어 올리자, 지하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싸늘하고 비릿한 기계실 냄새가 훅 끼쳐왔다.

 

축축한 냉기와 함께, 저 아래 심연에서 웅웅거리는 거대한 터빈 회전음이 미세하게 진동판을 울렸다.

 

"아버지가 남겨둔 독립 환기구입니다."

 

우진이 맨홀 아래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지하 5층에 있다는 요새의 메인 공조 시스템과 직결되는 라인이에요. 전산실의 열기를 밖으로 빼내기 위해 자연 대류 방식으로 설계된 구역이라 센서가 없습니다. 센서를 달면 고온의 배기열 때문에 오작동을 일으키니까요."

 

우진이 먼저 수직 사다리에 발을 얹었다.

 

녹슨 사다리는 삐걱거렸지만 성인 남성의 무게를 지탱하기에 충분했다.

 

"조심해서 내려오세요. 발을 헛디디면 끝입니다."

 

서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배낭을 고쳐 메고 사다리를 잡았다.

 

두 사람이 맨홀 속으로 몸을 밀어 넣은 뒤, 우진은 위쪽의 철제 뚜껑을 조심스럽게 당겨 원래대로 닫았다.

 

쿵.

 

무거운 철문이 닫히며 외부의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가 단번에 차단되었다.

 

완벽한 암흑.

 

그리고 폐쇄된 지하 시설 특유의 건조한 정적이 두 사람을 집어삼켰다.

 

5. 심연의 아날로그 방어선

 

치익.

 

서연이 배낭에서 소형 화학 라이트 스틱을 꺼내 꺾었다.

 

녹색 형광 물질이 섞이며 뿜어내는 은은한 불빛이 좁은 수직 샤프트 내부를 비췄다.

 

지름 2미터 남짓한 원통형 통로.

 

벽면은 거친 콘크리트 대신 열을 반사하는 세라믹 차열 타일로 마감되어 있었다.

 

타일 표면에는 15년의 세월 동안 그을린 검은 유증기 찌꺼기가 두껍게 들러붙어 있었다.

 

우진과 서연은 한 계단씩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내려갈수록 공기는 점점 더 뜨거워졌고, 귓전을 때리는 중저음의 기계 구동음은 점점 더 육중해졌다.

 

지하 1층…… 지하 2층…….

 

사다리 옆 벽면에 페인트로 거칠게 적혀 있던 층수 표시가 지나갔다.

 

지하 3층 지점에 도달했을 때, 우진은 갑자기 손을 들어 서연의 하강을 멈췄다.

 

"잠깐요."

 

서연이 사다리를 꽉 붙잡은 채 우진의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녹색 라이트 불빛 아래, 사다리가 끝나는 지하 3층 비상 통로 바닥에 기괴한 물체가 놓여 있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백색 가루.

 

단순한 석회 가루가 아니었다.

 

가루 한가운데에 가느다란 구리선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고, 그 선들의 중심에는 손바닥만 한 황동 실린더 세 개가 역삼각형 구도로 배치되어 있었다.

 

"……인과율 교란 트랩이에요."

 

우진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저 백색 가루, 은빛 동그라미의 잔류 파동을 화학적으로 응축시킨 척력 분말입니다. 아버지가 연구소에서 탈출할 때 챙겼던 바로 그 물질이에요."

 

"그럼 저 트랩을 밟으면 어떻게 되는데요?"

 

"폭발하는 게 아닙니다. 저 구리선을 건드리는 순간, 고밀도의 척력 펄스가 방출되면서 침입자의 머리 위 도형 신경망을 강제로 쇼트시켜요. 시스템의 꼭두각시들이나 감시관들이 저걸 밟으면 뇌간에 박힌 칩이 타버리면서 즉사합니다."

 

서연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지만 우진 씨는…… 칩이 없잖아요?"

 

"칩은 없지만, 제 뇌신경 자체가 백신 코어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저 척력 펄스에 무방비로 노출되면 제 시신경과 뇌세포도 무사하지 못해요. 영구적인 암전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우진은 침착하게 숨을 내쉬며 허리춤의 나이프를 꺼냈다.

 

트랩의 구조는 정교했지만, 역시나 컴퓨터 칩 하나 들어가지 않은 완벽한 기계식 아날로그 격발 구조였다.

 

구리선의 장력을 유지하고 있는 중심부의 황동 밸브.

 

그 밸브 옆면에 아주 작은 글씨로 무언가 각인되어 있었다.

 

[Node-1에게 : 2번 밸브를 시계 방향으로 반 바퀴.]

 

우진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Node-1.

 

15년 전 연구소에서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피실험자 코드명.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언젠가 아들이 모든 기억을 되찾고, 시스템의 사각 격자망을 뚫고 이 최후의 요새까지 찾아올 것임을.

 

자신이 남겨둔 트랩에 아들이 다치지 않도록, 오직 아들만이 알아볼 수 있는 해제 암호를 황동 밸브에 새겨놓은 것이었다.

 

우진은 떨리는 손끝바닥으로 황동 밸브의 차가운 금속 감촉을 느꼈다.

 

나이프 끝을 홈에 끼우고, 조심스럽게 시계 방향으로 힘을 주었다.

 

끼리릭.

 

태엽이 풀리는 듯한 정밀한 마찰음과 함께 밸브가 정확히 180도 회전했다.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구리선들이 일제히 느슨해지며 바닥의 척력 분말 속으로 스르르 가라앉았다.

 

격발 장치의 안전핀이 딸깍 소리를 내며 제자리에 걸렸다.

 

해제된 것이었다.

 

우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뒤이어 서연이 가볍게 착지하며 우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박사님은…… 우진 씨가 올 거라는 걸 정말로 확신하고 계셨던 거군요."

 

서연의 눈가에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다.

 

"자신이 괴물이 되어 코어에 갇히는 순간에도, 아들이 자신을 구하러 올 길을 미리 닦아두셨던 거예요."

 

우진은 말없이 굳은 턱을 문질렀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트랩이 해제된 통로 끝, 두꺼운 방폭 셔터가 가로막고 있었다.

 

지하 4층과 5층으로 이어지는 중앙 통제 구역의 차폐 격벽이었다.

 

6. 어둠 속의 적외선 망각

 

방폭 셔터 중앙의 조작 패널은 완전히 파괴되어 있었다.

 

누군가 내부에서 고의로 배선을 뜯어내고 콘크리트를 채워 넣어 용접해 버린 흔적이었다.

 

지하 5층의 요새 수뇌부가 외부의 침투를 막기 위해 지상으로 연결되는 모든 비상 통로를 물리적으로 영구 밀봉한 것이었다.

 

"벽이 막혔어요."

 

서연이 방폭문의 차가운 표면을 두드리며 초조하게 말했다.

 

"두께가 최소 30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복합 강판이에요. 나이프나 맨손으로는 절대 못 뚫어요."

 

우진은 방폭문 대신, 문 옆을 따라 바닥으로 파고드는 굵은 배관 라인들을 살폈다.

 

직경 50센티미터짜리 초저온 액체 질소 냉각 파이프 세 가닥이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지하 5층을 향해 수직으로 매설되어 있었다.

 

파이프 표면에는 성에가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고, 만지는 순간 손가락 피부가 달라붙을 정도로 극심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하 5층에 있는 서버를 식히기 위한 주 냉각 라인입니다. 이 파이프가 내려가는 수직 피트(Shaft)가 반드시 있을 겁니다."

 

우진은 파이프가 바닥을 관통하는 콘크리트 슬래브 틈새를 조사했다.

 

예상대로 배관 유지보수를 위해 뚫어둔 점검용 철제 그레이팅(철망 발판)이 바닥 한구석에 볼트로 고정되어 있었다.

 

"서연 씨, 렌치 꺼내세요."

 

서연이 배낭에서 소형 몽키렌치를 꺼내 우진에게 넘겼다.

 

우진은 얼어붙은 볼트 머리에 렌치를 물리고 온몸의 체중을 실어 내리눌렀다.

 

끼이익, 뚝!

 

녹과 얼음에 찌들어 있던 볼트가 비명을 지르며 부러져 나갔다.

 

네 개의 볼트를 모두 부러뜨리고 철망을 들어 올리자, 아래쪽에서 희미한 백색 불빛과 함께 기계음이 쏟아져 들어왔다.

 

두 사람이 엎드려 내려다본 지하 4층의 광경은 가히 경악스러웠다.

 

축구장 절반 크기의 거대한 지하 공간.

 

수백 대의 서버 랙이 끝없이 늘어서 있었고, 그 사이를 오가는 것은 인간 경비병이 아니었다.

 

머리 위에 완벽하게 고정된 '검은 네모(■)'를 띄운 기계화 집행관 여덟 명.

 

그리고 그들의 지휘자 위치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넥스트 큐브 본사 통제감사실의 마크가 새겨진 검은 카본 코트를 입은 사내.

 

그의 정수리 위에는 4차원 다포체 형태로 기괴하게 팽창하며 역회전하는 붉은 큐브가 번뜩이고 있었다.

 

도진우 수석 감사관이었다.

 

테헤란로 본사 지하에서 우진의 척력에 부상을 입고 도주했던 그자가, 수도권 인프라를 인질로 잡은 플랜 B의 총괄 지휘관으로서 이미 이 해상 요새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수도권 전력망 복구율을 강제로 0%로 고정해라."

 

도진우의 서늘하고 기계적인 음성이 배관 피트를 타고 올라와 우진의 귓전에 똑똑히 꽂혔다.

 

"상임이사회의 명령이다. 정오까지 정부가 무조건 항복하지 않으면, 팔당댐 수문을 원격 개방하고 원전 3호기 냉각 밸브를 차단한다. 사각 격자의 질서를 거부한 대가가 무엇인지 저 가축들에게 뼈저리게 가르쳐줘라."

 

도진우의 차가운 명령과 함께, 서버 모니터 수십 대에 붉은색 카운트다운 타이머가 일제히 떠올랐다.

 

[D-Day Plan B Execution : 00:38:12]

 

수도권 전체가 괴멸적인 인프라 참사에 직면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고작 38분이었다.

 

7. 벼랑 끝의 각오

 

서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의 녹화 버튼을 눌러, 배관 틈새로 보이는 도진우와 서버실의 광경을 렌즈에 담기 시작했다.

 

국가를 상대로 자행되는 전대미문의 인프라 테러 현장.

 

이것이야말로 넥스트 큐브의 가면을 완전히 찢어발길 최후의 물증이었다.

 

하지만 우진의 눈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도진우의 등 뒤, 지하 5층으로 이어지는 중앙 원형 승강기 너머로 거대한 격벽 하나가 보였다.

 

[LEVEL-5 CORE ACCESS : RESTRICTED]

 

납 차폐벽으로 굳게 닫힌 그 문 안쪽에서, 심장 박동과도 같은 둔중한 맥동이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를 직격하고 있었다.

 

쿵…… 쿵…….

 

그것은 기계의 진동이 아니었다.

 

15년 동안 어둠 속에 갇혀 도시의 엔트로피를 홀로 짊어져 온 자의 생체 신호.

 

역삼역에서 챔버가 뜯겨 나간 뒤, 넥스트 큐브 세력이 이곳 소월도로 강제 이송해 예비 원자로와 직결시켜 둔 부친 강정호의 마지막 맥박이었다.

 

'아버지가…… 저 아래에 계신다.'

 

우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도진우는 강정호 박사의 뇌간을 마지막 연산 프로세서로 쥐어짜 내며 플랜 B의 격자망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를 구하지 못하면 수도권 수천만 시민이 파멸하고, 서버를 부수지 못하면 아버지는 원자로의 과부하와 함께 산화한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둘 다 해내야 했다.

 

우진은 서연을 돌아보았다.

 

서연 역시 카메라를 쥔 채 결연한 눈빛으로 우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서연 씨, 여기서 영상을 확보한 뒤 제가 신호를 주면 곧바로 이 배관을 타고 지상으로 올라가세요."

 

"우진 씨!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같이 가야죠!"

 

서연이 소리를 낮추며 다급하게 우진의 소매를 붙잡았다.

 

"저 아래 집행관이 여덟 명이에요. 도진우 머리 위의 저 큐브는 지난번보다 훨씬 더 안정적으로 돌고 있다고요! 혼자서 저길 뚫겠다고요? 시신경도 다 망가져 가면서?"

 

"혼자가 아닙니다."

 

우진이 자신의 가슴팍 안주머니를 짚었다.

 

그곳에는 파주 은신처에서 부친의 연구 노트와 함께 챙겨온, 강정호 박사의 마지막 역위상 패치 칩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관자놀이에 새겨진 4센티미터의 흉터.

 

"아버지가 제게 남겨주신 마지막 회선이 여기 있습니다. 저들이 짠 각본의 결말을 바꾸러 온 겁니다."

 

우진이 천천히 배관 구멍 가장자리에 발을 걸쳤다.

 

그의 시야 가장자리가 다시금 은백색 노이즈로 잘게 떨려왔다.

 

하지만 더 이상 두려움은 없었다.

 

머리 위의 도형이 지워진 아웃라이어.

 

시스템의 어떤 수식으로도 예측할 수 없는 유일한 수학적 특이점.

 

우진은 서연의 손을 한 번 강하게 쥐었다 놓은 뒤, 30미터 아래 어둠 속으로 거침없이 몸을 던졌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