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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52화

해상 추격전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칠흑의 바다와 푸른 궤적

 

바닷바람이 살을 에는 듯 매서웠다.

 

아날로그 어선 해성호의 낡은 목재 갑판 위로 튀어 오른 밤바다의 포말이 차갑게 뺨을 때렸다.

 

그러나 강우진은 추위를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자리 잡은 4센티미터의 수술 흉터가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후벼 파는 것처럼 맹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지이잉, 지잉.

 

귓전을 파고드는 이명은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경기도 파주 거점 7번 아날로그 은신처 옥상에서, 윤채린이 대형 단파 안테나를 매개로 쏘아 보내는 은빛 동그라미(○)의 비간섭 척력 파동이었다.

 

그 순수한 파동이 우진의 뇌신경 바이패스 단말과 공명하며, 서해 상공을 짓누르고 있던 보이지 않는 사각 격자망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우진 씨! 조심해요!"

 

조타실 문을 열고 몸을 내민 한서연이 소리쳤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엷은 백색 네모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우진이 지닌 수학적 특이점의 한기 때문에 모서리에 차가운 서리 노이즈가 스며들고 있었지만, 서연은 물러서지 않고 카메라 가방과 무전기를 꽉 쥐고 있었다.

 

우진은 조타실 뒤편,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바다 후방을 노려보았다.

 

상용 레이더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기계식 엔진 소리마저 삼켜버릴 듯 웅장한 파도 소리만이 울려 퍼질 뿐이었다.

 

하지만 궤도 관찰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우진의 망막에는 선명하게 잡히고 있었다.

 

해성호의 뒤편 1.5해리 지점.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해수면을 미끄러지듯 질주해 오는 스텔스 고속정 두 척이 있었다.

 

선체 표면에 도포된 전자기 흡수 도료 덕에 형체는 그림자처럼 흐릿했으나, 그 선박들의 정수리 위에 떠 있는 기하학적 형태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완벽하게 고정된 검은 육면체(Black Cube).

 

그리고 그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세 겹의 회전 격자.

 

중앙 코어 직속 감사실 소속의 해상 기동대였다.

 

치이익.

 

갑판 선미에 설치된 구형 아날로그 무전기에서 송민규의 거친 숨소리가 섞인 음성이 터져 나왔다.

 

"우진아! 들려? 파주 무전실이다! 놈들 통신망 패킷 일부를 땄어! 소월도 반경 20해리 진입 선박에 대한 무조건 격침 명령이 떨어졌다! 놈들 고속정에 실린 건 단순 화약 어뢰가 아니야! 인과율 집속 어뢰다! 한 발이라도 스치면 선체 목재만 박살 나는 게 아니라, 배에 탄 사람들 머릿속 신경망까지 통째로 붕괴돼!"

 

"알고 있어, 민규야."

 

우진은 나직하게 답하며 숨을 들이켰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방화벽 백신 코어가 푸른 불꽃처럼 타올랐다.

 

시야를 좁히자, 2단계 심층 구조 분석을 넘어선 '변화 감지(Change Perception)'가 강제로 망막에 덧씌워졌다.

 

콰아아아악!

 

순간, 우진의 시야에 0.5초 뒤의 세계가 푸른 잔상으로 펼쳐졌다.

 

추격해 오는 첫 번째 고속정의 선수 하단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의 궤적선.

 

압축된 고밀도 격자 파동을 머금은 인과율 집속 어뢰가 수면 아래로 사출되는 미래의 경로였다.

 

"선장님! 키를 우현으로 완전히 꺾으세요! 지금 당장!"

 

우진이 조타실을 향해 포효했다.

 

2. 백령초의 격랑

 

조타실 안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던 늙은 선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선장의 정수리 위에 위태롭게 떠 있던 세모(△)는 이미 꼭두각시 줄이 끊어져 있었다.

 

파주 은신처의 동료들이 선장의 아픈 딸이 입원한 병원으로 사람을 보내 보호 중이라는 연락을 받은 직후, 넥스트 큐브가 쥐고 있던 검은 협박의 족쇄는 부서졌다.

 

선장의 가슴에 남은 것은 오직 혈육을 볼모로 자신을 살인 도구로 쓰려 했던 악마들을 향한 적개심뿐이었다.

 

"우현 전타!"

 

선장이 핏발 선 눈으로 고함을 지르며 묵직한 목재 키를 온몸의 체중을 실어 오른쪽으로 내리꽂았다.

 

쿠구구구궁!

 

해성호의 낡은 8기통 기계식 디젤 엔진이 굉음을 토해내며 검은 매연을 뿜었다.

 

배가 거친 파도를 비스듬히 타넘으며 선체를 오른쪽으로 급격히 기울였다.

 

동시에 갑판이 45도 가까이 꺾여 나갔다.

 

콰아아아앙!

 

해성호가 방금 전까지 지나고 있던 좌현 10미터 해상이 거대한 푸른 폭발과 함께 솟구쳤다.

 

솟구친 물기둥은 단순한 물보라가 아니었다.

 

허공으로 치솟은 바닷물이 푸른빛의 미세한 사각형 격자 입자로 분해되며 파열음을 냈다.

 

인과율 집속 어뢰가 스치고 지나간 공간의 현실 데이터가 일시적으로 뒤틀려 산산조각 난 것이다.

 

만약 0.3초만 늦었어도 해성호의 선체는 나무 파편조차 남기지 못하고 개념적으로 지워졌을 터였다.

 

"빌어먹을 놈들! 진짜 사람을 죽이려고 작정을 했구먼!"

 

선장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치며 이를 갈았다.

 

"선장님, 여긴 백령초 암초 지대입니다. 놈들은 우리보다 속도가 두 배는 빨라요. 평범한 물길로는 절대 따돌릴 수 없습니다."

 

우진이 조타실 안으로 들어서며 단호하게 말했다.

 

선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여긴 조금만 잘못 들어가도 배 밑바닥이 다 뜯겨 나가는 저승길이야! 썰물 때라 날카로운 여(암초)들이 칼날처럼 솟아 있다고!"

 

"제가 길을 봅니다."

 

우진이 선장의 어깨를 짚었다.

 

선장은 우진의 눈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 아무런 도형도 뜨지 않는 기괴한 청년.

 

세상의 모든 물리 법칙과 운명의 궤도에서 벗어난 채, 절대적인 공허를 품고 있는 그 차가운 눈동자에 형언할 수 없는 위압감이 서려 있었다.

 

선장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총각. 내 목숨도 딸내미 목숨도 다 자네 손에 걸었다! 불러! 어디로 꺾을까!"

 

"엔진 출력 최대. 직진 20노트로 유지하십시오. 전방 50미터 앞 수중 암초 사이로 파고듭니다."

 

"뭐, 뭐라고?! 거긴 암초 틈새가 좁아서 배 폭도 안 나와!"

 

"나옵니다. 파도가 들어올리는 순간을 타면 지나갈 수 있습니다. 저를 믿으세요."

 

우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분했다.

 

3. 궤적을 비틀다

 

지잉, 찌지직!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가 다시 맹렬하게 발열하기 시작했다.

 

피부가 벌겋게 부풀어 오르고 실핏줄이 터져 붉은 피 한 줄기가 관자놀이를 타고 흘러내렸다.

 

'변화 감지'의 심도를 3단계 직전까지 오버클럭한 대가였다.

 

우진의 망막에 펼쳐진 시야는 이미 현실의 바다가 아니었다.

 

거대한 암초들의 표면마다 푸른 격자 좌표가 찍혀 있었고, 몰아치는 파도의 주기와 높낮이가 수식처럼 궤적선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뒤를 맹렬하게 쫓아오는 두 척의 스텔스 고속정.

 

추격대장의 머리 위 검은 육면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상 궤적이 붉은 실선이 되어 해성호의 조타실을 정조준하고 있었다.

 

탕!

 

타다당!

 

스텔스 고속정의 함수에 장착된 20밀리미터 인과율 집속 기관포가 불을 뿜었다.

 

푸른 광탄들이 칠흑의 바다를 가르며 빗발쳤다.

 

광탄이 스친 해성호의 우현 난간이 순식간에 사각 입자로 분해되며 허공으로 증발했다.

 

서연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엎드렸다.

 

우진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조타실 밖으로 걸어 나가 흔들리는 갑판 난간을 붙잡았다.

 

바람에 코트 자락이 사납게 펄럭였다.

 

'보인다.'

 

적들의 공격 궤적.

 

탄환이 날아오는 0.4초 뒤의 탄도선들이 수십 가닥의 붉은 레이저처럼 망막에 어지럽게 교차했다.

 

우진은 오른손을 뻗었다.

 

손바닥 중앙에서 은빛과 푸른빛이 뒤섞인 무형의 특이점 척력이 소용돌이쳤다.

 

"선장님, 지금입니다! 키를 좌현 15도로! 파도가 정점에 달했을 때 치고 나가세요!"

 

선장이 거칠게 키를 꺾었다.

 

동시에 거대한 너울성 파도가 해성호의 선체를 번쩍 들어 올렸다.

 

우지직!

 

선체 밑바닥이 수중 암초의 칼날 같은 끝부분을 불과 10센티미터 차이로 스치며 허공에 떴다.

 

배가 암초 사이의 비좁은 협곡을 마치 미끄럼틀을 타듯 통과하는 기적 같은 기동이었다.

 

"따라붙어라! 놓치지 마라!"

 

후방의 스텔스 고속정 조타실에서 기계화된 추격대장의 음성이 무전망을 찢고 흘러나왔다.

 

적선들은 해성호가 암초 사이로 무모하게 파고드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최첨단 센서를 과신하며 전속력으로 뒤를 쫓았다.

 

그러나 그들의 기계식 연산 장치는 한 가지를 계산하지 못했다.

 

해성호가 지나간 자리에 강우진이 남겨놓은 인과율의 잔류 왜곡이었다.

 

우진은 배가 협곡을 빠져나가는 찰나, 자신의 체내에 각인된 방화벽 백신 에너지를 바다 밑 암초를 향해 강하게 내리꽂았다.

 

콰아아앙!

 

무형의 특이점 척력이 바닷속 해류와 부딪치며 거대한 역위상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암초 주변의 수위가 급격히 요동치며 바닷물이 일시적으로 푹 꺼져버렸다.

 

"연산 오류! 수심 데이터 급변! 전방 회피 불……!"

 

추격정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인공적인 경고음은 비명으로 바뀌지 못했다.

 

콰지지직, 쾅!

 

해성호를 맹렬하게 추격하던 첫 번째 고속정이 수위가 낮아진 암초 협곡에 그대로 처박혔다.

 

시속 40노트로 질주하던 티타늄 선체가 날카로운 화강암 암초에 부딪히며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내부에 적재되어 있던 인과율 집속 어뢰의 탄두가 유폭을 일으켰다.

 

쿠쾅, 콰아아앙!

 

거대한 푸른 화염과 함께 첫 번째 고속정의 선체가 두 동강 나며 바닷속으로 침몰했다.

 

머리 위에 검은 육면체를 띄우고 있던 대원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차가운 암초 바다로 빨려 들어갔다.

 

4. 백색 암전의 습격

 

"해냈다! 한 척 잡았어!"

 

조타실 창문 너머로 폭발을 지켜보던 서연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우진은 웃을 수 없었다.

 

쿵!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통증과 함께 우진의 무릎이 갑판 바닥으로 꺾였다.

 

"우진 씨!"

 

서연이 깜짝 놀라 조타실 문을 박차고 나와 우진을 부축했다.

 

"하아, 흑……!"

 

우진의 거친 숨소리가 입술 사이로 터져 나왔다.

 

시야가 이상했다.

 

단순한 피로감이 아니었다.

 

망막을 가득 채우고 있던 밤바다의 풍경과 푸른 궤적선들이 일순간 하얗게 탈색되더니, 완벽한 백색의 무(無)로 변해버렸다.

 

빛도 어둠도 형태도 존재하지 않는 순백의 공간.

 

마치 낡은 모니터의 신호가 끊어지며 하얀 백색 노이즈로 가득 찬 것처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시야가…… 사라졌다?'

 

우진은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오직 시리도록 하얀 암전뿐이었다.

 

유년기 기억이 삭제되었을 때 느꼈던 그 차갑고 텅 빈 공백.

 

그것이 이제는 시신경을 타고 현실의 감각마저 집어삼키고 있었다.

 

지이잉.

 

머릿속에서 채린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우진 아저씨! 안 돼요! 능력을 너무 연속으로 과부하 시켰어요! 아저씨 머릿속 백신 코어가 시스템 격자망을 밀어내면서, 현실 세계와 연결된 신경망 링크까지 일시적으로 끊어버리고 있어요! 더 이상 궤도를 틀면 시신경이 영구적으로 타버려요!'

 

채린의 경고였다.

 

머리 위에 도형이 지워진 아웃라이어.

 

세상의 인과율 법칙에서 벗어난 존재가 현실의 궤적을 억지로 비틀 때마다, 그 대가는 고스란히 육체의 감각을 지워나가는 저주로 돌아오고 있었다.

 

"우진 씨, 눈이…… 눈동자가 완전히 풀렸어요! 앞이 보여요? 제 말 들려요?!"

 

서연이 떨리는 손으로 우진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따스한 체온만이 백색 암전 속에 갇힌 우진을 현실에 붙들어 매는 유일한 닻이었다.

 

"괜찮습니다…… 서연 씨."

 

우진은 피가 맺힌 입술을 깨물며 신음처럼 답했다.

 

"아직…… 한 척이 더 남았습니다."

 

쿠구구구궁!

 

우진의 귀로 거대한 엔진 소리가 파도를 찢으며 다가오는 것이 들렸다.

 

동료 선박이 암초에 박살 나는 것을 목격한 두 번째 스텔스 고속정이 암초 지대를 크게 우회하여 해성호의 측면을 향해 쇄도해 오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더 이상 포획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동료를 수장시킨 불온한 아웃라이어를 향한 완전한 멸절.

 

고속정의 상부 해치가 열리며, 중무장한 집행관들이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을 일제히 해성호의 조타실을 향해 겨누는 소리가 차칵, 하고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5. 충돌의 궤도를 꺾다

 

백색 암전 속에서 우진은 감각을 곤두세웠다.

 

시각은 죽었다.

 

눈앞에는 여전히 하얀 노이즈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백색의 심연 속에서, 기이하게도 다른 감각들이 극도로 예민하게 깨어났다.

 

바람의 냄새, 배 밑바닥을 때리는 너울의 진동, 공기를 찢고 다가오는 적선의 고주파 모터 소음.

 

그리고 우진의 정수리에서 허공으로 뻗어 나가는 보이지 않는 특이점의 감각선.

 

'보려고 하지 마라.'

 

우진은 눈을 감아버렸다.

 

오히려 눈을 감자, 하얗게 바랜 암전 너머로 기하학적인 점과 선들이 심상(心象)으로 떠올랐다.

 

적선의 속도 38노트.

 

해성호의 측면 현측까지 남은 거리 80미터.

 

적들은 기관포 사격 대신 고속정의 뱃머리에 달린 강화 티타늄 충각으로 해성호의 허리를 들이받아 두 동강 낼 작정이었다.

 

충돌까지 남은 시간, 4초.

 

"우진아! 피해! 놈들이 들이받는다!"

 

조타실에서 선장이 비명을 질렀다.

 

서연이 우진의 앞을 가로막아서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서연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어내고, 비틀거리면서도 갑판 난간 가장자리로 한 걸음 나아갔다.

 

3초.

 

적선의 뱃머리가 일으키는 거대한 물보라가 우진의 얼굴을 적셨다.

 

적선의 조타수가 띄운 고정된 검은 네모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살의가 공기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2초.

 

우진은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관자놀이의 흉터에서 뿜어져 나온 피가 뺨을 타고 흘러 턱 끝에서 바다로 뚝뚝 떨어졌다.

 

'네놈들이 정해놓은 충돌의 궤도.'

 

우진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

 

'그딴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

 

1초.

 

우진이 모았던 양손을 좌우로 강하게 찢어발겼다.

 

콰아아아앙!

 

우진의 전신에서 투명한 충격파가 방사형으로 터져 나갔다.

 

파주에서 채린이 쏘아 보낸 은빛 동그라미의 척력과, 우진의 백신 코어가 융합된 절대 척력의 파동(⊙)이었다.

 

그것은 물리적인 바람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에 각인되어 있던 사각 격자망의 결속을 강제로 거부하고 밀어내는 형이상학적 반발력이었다.

 

쿠지지직!

 

시속 70킬로미터가 넘는 속도로 해성호의 옆구리를 향해 내리꽂히던 스텔스 고속정의 뱃머리가, 마치 거대한 보이지 않는 고무벽에 부딪힌 것처럼 허공에서 멈칫했다.

 

선체 전면부의 인과율 좌표가 강제로 굴절되며, 배의 진행 방향이 45도 바깥쪽으로 사납게 뒤틀렸다.

 

"뭐, 뭐라고?! 타가 먹히지 않는다! 궤도가…… 강제로 꺾인다!"

 

적선 조타수의 경악에 찬 고함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

 

고속정의 강력한 추진력은 그대로 유지된 채 방향만 꺾여버린 결과는 참혹했다.

 

해성호의 선미를 불과 수십 센티미터 차이로 비껴간 고속정은, 그 가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해성호 바로 옆에 솟아 있던 백령초의 거대한 주상절리 암벽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쿠콰콰콰쾅!

 

엄청난 굉음과 함께 넥스트 큐브의 최신예 스텔스 고속정이 암벽에 정면으로 들이받혔다.

 

선체는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뒤집히며 산산조각 났고, 푸른 인과율 연료가 폭발하며 밤하늘을 대낮처럼 밝혔던 불꽃은 바다의 거센 파도 속으로 삼켜져 갔다.

 

6. 안개의 장막 너머로

 

쏴아아아.

 

거대한 폭발이 지나간 서해 바다 위로, 오직 거친 파도 소리와 해성호의 규칙적인 디젤 엔진 소리만이 남았다.

 

추격대는 전멸했다.

 

바다 위에는 타다 남은 고속정의 잔해와 검은 기름띠만이 둥둥 떠다니며 불타고 있었다.

 

"살았다…… 우리가 살았어!"

 

선장이 조타실 문을 열고 나와 갑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친 바다를 평생 누벼온 노인이었지만, 난생처음 겪어보는 비현실적인 전투에 온몸의 진이 다 빠져나간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서연은 주저앉은 선장을 부축하며, 난간에 위태롭게 기대어 서 있는 우진에게 다가갔다.

 

"우진 씨……!"

 

서연의 떨리는 목소리에 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우진의 양 눈동자는 여전히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자, 망막을 뒤덮고 있던 지독한 백색 암전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마치 안개가 걷히듯, 희미한 흑백의 명암이 돌아오더니 마침내 서연의 걱정스러운 얼굴과 밤바다의 수평선이 다시 시야에 맺혔다.

 

우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난간을 짚은 손에 힘을 풀었다.

 

완전한 실명은 아니었다.

 

하지만 능력을 오버클럭할 때마다 찾아오는 이 백색 암전의 지속 시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명백했다.

 

다음에 또 이런 무리한 궤도 왜곡을 감행한다면, 그때는 영영 시력을 되찾지 못할 수도 있었다.

 

치이익.

 

갑판의 아날로그 무전기에서 민규의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우진아! 서연 누나! 무사한 거지? 신호가 끊겨서 죽는 줄 알았잖아!"

 

서연이 재빨리 무전기를 집어 들었다.

 

"민규 씨, 우리 무사해요. 추격해 오던 고속정 두 척은 우진 씨가 전부 따돌렸어요. 채린이는요?"

 

"채린이…… 방금 안테나 앞에서 기절했어. 척력 파동을 너무 쥐어짜 내서 탈진했나 봐. 지금 침상으로 옮겼는데, 숨소리는 안정적이야. 정호 박사님도 곁에서 돌보고 계셔."

 

무전기 너머의 소식을 들은 우진의 가슴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자신을 살리기 위해, 육지에 남은 동료들 역시 자신의 목숨을 깎아가며 싸우고 있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선장님."

 

우진이 바닥에서 일어나는 선장을 향해 손을 내밀어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아이고, 총각 덕에 살았는데 내가 괜찮고 말고 할 게 어딨어. 딸내미는…… 진짜 괜찮은 거지?"

 

"네. 파주의 제 동료들이 병원을 완벽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선장님 딸은 안전합니다."

 

선장의 눈에 굵은 눈물이 맺혔다.

 

그는 우진의 손을 거칠게 맞잡으며 조타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약속은 지켜야지. 소월도로 간다."

 

해성호는 암초 지대의 좁은 수로를 빠져나와 다시 북서쪽을 향해 뱃머리를 틀었다.

 

그때였다.

 

전방의 밤바다 위로, 기괴할 정도로 짙고 무거운 해무(海霧)가 깔리기 시작했다.

 

단순한 자연 안개가 아니었다.

 

달빛조차 투과하지 못하는 그 짙은 안개는,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수면 위를 기어 다니며 해성호의 선체를 집어삼켰다.

 

안개 속으로 들어서는 순간, 갑판 위의 모든 전자기기가 완전히 죽어버렸다.

 

선실의 작은 전등마저 뚝 꺼지고, 오직 기계식 엔진의 진동만이 발밑을 울렸다.

 

완벽한 전파의 진공.

 

"저 안개 너머다……."

 

선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키를 굳게 쥐었다.

 

우진은 서연과 함께 뱃머리로 걸어 나가 짙은 안개 속을 응시했다.

 

안개의 장막 저편, 어렴풋한 바위섬의 실루엣이 드러나고 있었다.

 

버려진 군사 기지이자, 넥스트 큐브의 마지막 수도권 인프라 장악 테러를 총괄하고 있는 해상 요새.

 

소월도(蘇月島).

 

그리고 그 섬의 가장 높은 절벽 끝에서, 빛을 잃고 흉물스럽게 서 있는 낡은 폐등대의 윤곽이 우진의 망막에 스며들었다.

 

수도권의 숨통을 쥐고 있는 마지막 심장부를 향한 침투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