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의 균열
1. 백색의 통로와 유령의 초대
지하 7층의 공기는 얼어붙은 쇳물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강우진의 발밑에는 산산이 깨져 나간 강화유리 파편과 함께 파열된 중앙 집행관들의 검은 육면체 잔해가 흩어져 있었다.
손목이 꺾인 채 차가운 바닥에 짓눌린 도진우의 머리 위에서는, 4차원 다포체 형태의 붉은 큐브가 둔탁한 파열음을 내며 검붉은 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큭…… 으윽……."
도진우의 입술 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거친 신음은 이미 패배자의 단말마에 불과했다.
지상에서 한서연과 윤채린이 은빛 동그라미의 절대 파동과 프로메테우스의 코드를 공명시켜 서울 상공의 사각 격자망 백본을 끊어버린 순간, 이 공간을 지탱하던 억압적인 인과율 링크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우진은 바닥에 뒹구는 집행관들의 총기를 발로 걷어차 벽면으로 밀어냈다.
그의 시선은 정면, 푸른빛의 인공 냉각액으로 가득 찬 거대한 원통형 챔버로 향해 있었다.
그곳에는 15년이라는 시간 동안 도시 전체의 엔트로피와 궤도 연산을 온몸으로 떠받치고 있던 아버지, 강정호 박사가 있었다.
관자놀이에 깊게 박힌 생체 케이블과 척수를 관통하는 수십 가닥의 와이어.
마침내 굳게 닫혀 있던 그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며 서서히 열렸던 바로 그 찰나였다.
치지직, 팟!
중앙 코어 챔버를 에워싸고 있던 수십 대의 계측 모니터와 홀로그램 프로젝터가 일제히 거친 노이즈를 뿜어냈다.
지상 통제망이 차단되어 암전되었던 단말기들이 기괴한 백색 섬광을 내뿜으며 강제로 재부팅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천장에 매설된 지향성 음향 스피커에서 날카로운 하울링이 터져 나왔다.
"오랜만이군, K-07."
서늘하면서도 감정이 완벽하게 거세된 목소리.
기계음이 뒤섞여 긁히는 듯하면서도, 소름 끼치도록 또렷한 발음.
그것은 넥스트 큐브 본사 데이터 센터 붕괴와 함께 완전히 소멸한 줄 알았던 최고 설계자, 서지훈의 목소리였다.
우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서지훈."
"네가 역삼역 코어의 내벽을 뚫고 챔버 앞까지 도달할 확률은 0.0004%에 불과했지."
중앙 메인 콘솔의 대형 홀로그램 렌즈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 광선이 공중에서 굴절되더니, 이내 한 남자의 전신 형상을 빚어냈다.
완벽하게 다려진 회색 수트, 칼로 잰 듯 반듯한 가르마, 그리고 감정의 파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메마른 눈동자.
실물 육신이 아닌, 코어의 잔류 양자 메모리와 독립 백업 아카이브에 백업되어 있던 서지훈의 인공지능 인격 복제체였다.
하지만 그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기괴한 형상이 떠 있었다.
면(面)이 존재하지 않는 텅 빈 칠흑의 사각 테두리.
수백 가닥의 투명한 데이터 와이어가 뇌간으로 연결되어 허공으로 뻗어 나가는 '암흑의 프레임'이 불안정하게 역회전하고 있었다.
도진우가 떨리는 눈으로 홀로그램을 올려다보며 핏물을 토해냈다.
"서, 서지훈…… 넌 본사 폭발 때 소거되었을 텐데……."
"상임이사회의 즉각 폐기 명령은 이미 알고 있다, 도 감사관."
홀로그램 서지훈은 바닥에 엎드린 도진우를 내려다보지도 않은 채 담담하게 읊조렸다.
"하지만 이 시스템의 기초 알고리즘을 짠 것은 나다. 코어가 강제 퍼지 위기에 직면할 경우, 독립 양자 격벽에 보존된 내 사유(思惟) 루틴이 비상 활성화되도록 설계해 두었지. 네놈들의 조잡한 권력 투쟁 따위에 시스템의 영속성을 맡길 수는 없으니까."
서지훈의 고개가 우진을 향해 천천히 돌아갔다.
"강우진. 네게 단독 접견을 요청한다."
"접견?"
우진이 피 묻은 오른손을 쥐었다 펴며 서늘하게 반문했다.
"시스템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던 유령의 헛소리를 들을 여유는 없다. 챔버의 록을 풀고 코어를 해체할 뿐이다."
"급하게 굴지 마라. 네가 강제 퍼지 코드를 주입하는 순간, 이 챔버의 보조 회로에 직결된 자폭 테르밋이 즉각 점화된다."
서지훈이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강정호 박사의 챔버 바로 우측에 놓인 또 다른 보조 챔버에 붉은 경고등이 점멸했다.
그 유리벽 너머로, 15년 전 납치되었던 열 살배기 피실험자 아이, 이서진(Subject-04)의 창백한 얼굴이 드러났다.
"Node-0과 Node-2. 두 사람의 뇌파가 외부 전력과 단절되는 그 짧은 0.1초의 공백 동안, 내가 걸어둔 논리 폭탄이 먼저 폭발할지, 네 해방 코드가 먼저 도달할지 시험해 보겠나?"
우진의 턱관절이 굳어졌다.
서지훈의 눈빛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그는 우진을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의 말을 끝까지 전하기 위해 인질의 숨통을 쥐고 있었다.
우진은 낮게 가라앉은 숨을 내쉬며 바닥의 파편을 짓밟고 홀로그램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섰다.
"말해. 무엇을 지껄이고 싶어서 나타난 건지."
2. 1998년 겨울, 우연이라는 이름의 지옥
홀로그램 주변의 백색 공간이 일렁였다.
서지훈의 암흑 프레임에서 뿜어져 나온 데이터 패킷들이 역삼역 지하 7층의 차가운 콘크리트 벽면을 지우고, 가상 현실의 잔상을 투사하기 시작했다.
습하고 낡은 복도, 칠이 벗겨진 철문, 그리고 퀴퀴한 연탄가스 냄새.
그것은 1998년 서울 외곽의 어느 달동네 연립주택의 풍경이었다.
공기 중에 흩날리는 붉은빛 홀로그램 파편들은 피비린내를 머금은 듯 섬뜩한 온도를 띠고 있었다.
"우진아, 너는 우연을 믿나?"
서지훈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사람들은 흔히 인생의 비극을 마주했을 때 '어쩌다 보니', '재수가 없어서', '운이 나빴다'는 말로 얼버무리지. 하지만 그 '우연'이라는 단어 이면에 얼마나 잔혹한 무질서와 엔트로피의 광기가 도사리고 있는지 아는 자는 드물다."
벽면에 투사된 영상 속에서, 낡은 단칸방의 문이 거칠게 부서져 나갔다.
사채 독촉과 알코올 중독으로 이미 이성이 완전히 붕괴된 한 사내가 피 묻은 식칼을 든 채 방 안으로 난입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어 탁하게 풀려 있었고, 머리 위에는 도형조차 형성되지 못한 흉측한 핏빛 노이즈가 요동치고 있었다.
"1998년 12월 24일."
서지훈이 스스로의 과거를 서술하는 목소리에는 분노도, 슬픔도 없었다.
오직 방대한 데이터 로그를 낭독하는 기계의 냉혹함만이 묻어났다.
"그 사내는 자신에게 빚을 독촉하던 사채업자의 집을 찾아가려다 길을 잃었다. 번지수를 착각했고, 계단을 잘못 올랐지. 그리고 마침 문을 잠그는 것을 깜빡했던 우리 집 현관을 밀고 들어왔다."
방 안에는 소박한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앞에 두고 웃고 있던 열 살의 소년과 그의 부모, 그리고 일곱 살 난 여동생이 있었다.
영상 속의 소년은 벽장 틈새로 밀려 들어가 숨을 죽인 채 떨고 있었다.
이어진 광경은 도륙이었다.
아무런 이유도, 원한도, 이해관계도 없는 순수한 무작위의 폭력.
식칼이 어머니의 가슴을 꿰뚫고, 아버지를 난도질하고, 살려달라며 구석으로 기어가던 일곱 살 여동생의 목덜미를 짓밟는 장면이 붉은 홀로그램 광선으로 여과 없이 재현되었다.
살점이 찢기는 소리와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지하 7층의 콘크리트 벽을 타고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
우진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서대문 화재 현장에서 한서연이 무전으로 전해주었던 서지훈의 과거.
그것이 활자가 아닌, 피해자의 망막에 각인된 생생한 기억의 홀로그램으로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내 어머니는 교사였고, 아버지는 성실한 공무원이었다. 여동생은 그날 처음으로 피아노 콩쿠르에서 상을 받아왔지. 그 누구에게도 원한을 산 적이 없고, 법을 어긴 적도 없으며, 누구보다 선량하게 살아가던 가족이었다."
서지훈의 홀로그램이 벽장 속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굳어 있던 열 살 소년의 잔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왜 죽어야 했을까? 살인범의 대답은 명쾌했다. '그냥 문이 열려 있어서 들어갔다.' 그게 전부였다."
서지훈의 메마른 눈동자가 우진을 꿰뚫어 보았다.
"단지 문이 열려 있었다는 사소한 우연. 그 빌어먹을 무작위의 확률 하나 때문에 내 가족의 삶은 통째로 도륙당했다. 3년간 폐쇄 병동에 갇혀 피눈물을 흘리며 내가 내린 결론이 무엇인지 아나?"
홀로그램이 일순간 흩어지며 다시 지하 7층의 차가운 기계실로 환원되었다.
서지훈의 목소리에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저주라는 거다."
3. 궤도 통제론의 유토피아
서지훈의 암흑 프레임이 격렬하게 삐걱거리며 주변의 허공을 짓눌렀다.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면 어떻게 되는지 보아라. 탐욕과 이기심, 우발적인 충돌, 예측할 수 없는 광기가 매 순간 충돌하며 인과율의 쓰나미를 만들어낸다. 그 쓰나미에 휩쓸려 무고한 자들이 매일같이 길거리에서 칼에 찔리고, 음주 운전 차량에 치여 죽으며, 사기꾼에게 속아 한강 다리로 뛰어내린다."
서지훈이 양팔을 벌렸다.
그의 등 뒤로, 서울 시내 전역의 지도가 홀로그램으로 투사되었다.
그 지도 위에는 수백만 개의 네모(□)들이 질서정연한 바둑판처럼 촘촘히 배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시스템의 통제 아래에서는 다르다. 모든 인간에게 사각의 궤도를 부여하고, 언제 실패하고 언제 성공할지,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까지 완벽한 알고리즘으로 배정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그건 삶이 아니라 규격화된 가축의 사육장일 뿐이다."
우진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서지훈은 냉소 어린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가축? 아니,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평화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죽음에 공포를 느끼지 않고, 누구도 타인의 우발적인 광기에 목숨을 빼앗기지 않는 세상. 약간의 자유를 반납하는 대가로 절대적인 안전과 예측 가능한 질서를 얻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유토피아가 아닌가?"
서지훈의 홀로그램이 우진의 턱밑까지 다가왔다.
그의 투명한 손가락이 우진의 관자놀이, 4cm의 수술 흉터를 가리켰다.
"너는 나를 악마라 부르고 싶겠지. 하지만 강우진, 네가 지키려는 현실을 똑똑히 봐라. 네가 조금 전 구해냈다는 그 광역버스 승객들, 성산대교에서 건져 올린 네 친구 송민규. 그들을 살려낸 대가가 무엇이었지?"
서지훈의 목소리가 비수처럼 우진의 가슴을 후벼 팠다.
"인과율 보존 법칙. 네가 한 사람의 파멸을 억지로 비틀어 구할 때마다, 갈 곳을 잃은 엔트로피는 시스템의 인접 노드로 튀어 나갔다. 네가 아이를 구했을 때 무고한 청년의 아버지가 크레인에 깔렸고, 네가 친구를 구했을 때 한서연의 사무실이 불타올랐다. 심지어 네가 이 역삼역으로 오기 위해 질주하는 동안, 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계좌가 동결되고 직장에서 쫓겨나며 사회적으로 난도질당했다."
우진의 주먹이 하얗게 질리도록 쥐어졌다.
피가 배어 나오는 손바닥의 통증보다, 서지훈이 읊어대는 잔혹한 진실의 무게가 더 날카롭게 폐부를 찔렀다.
서지훈이 잔인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영웅 놀이를 하며 자유의지를 부르짖을 때마다, 세상은 더 끔찍한 피를 흘린다. 네가 만든 결손을 메우기 위해 무고한 타인들이 대신 희생양으로 도살당하고 있단 말이다. 그런데도 네가 정의인가? 네 선택이 순수한 구원이라고 자신할 수 있나?"
4. 너의 아버지가 만든 지옥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침묵을 깬 것은 서지훈의 낮고 독기 어린 속삭임이었다.
"그리고 강우진. 너는 네 아버지를 구하겠다고 여기까지 왔지."
서지훈의 시선이 챔버 속의 강정호 박사를 향했다.
"참으로 눈물겨운 효심이로군. 하지만 묻겠다. 너를 이 지옥 같은 운명으로 밀어 넣은 장본인이 대체 누구지?"
우진의 호흡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서지훈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맹렬하게 파고들었다.
"15년 전, 네 관자놀이에 칩을 박은 것은 우리였지만, 그 칩을 억지로 뜯어내고 네 뇌를 난도질한 것은 바로 네 아버지 강정호였다!"
콰앙!
서지훈이 메인 콘솔을 내리치는 시늉을 하자, 홀로그램 화면에 15년 전의 수술 기록 데이터가 거대하게 떠올랐다.
[Node-1 : K-07 임상 외과 시술 로그]
[집도의 : 수석연구원 강정호]
[시술 내용 : 뇌신경 궤도 4cm 절제 및 방화벽 백신 강제 주입]
[결과 : 7세 이전 유년기 기억 중추 100% 비가역적 소각, 영구적 편두통 및 시신경 오버클럭 반작용 발생]
"네 아버지는 자신의 연구가 배후 세력에 의해 왜곡되자, 그 시스템을 파괴할 '살아있는 백신'이 필요했다. 그래서 가장 가까이에 있던 친아들의 뇌를 가르고 신경을 잘라냈다! 네 유년기의 따뜻했던 기억, 어머니와의 추억, 평범한 아이로서 누려야 했던 모든 삶을 네 아버지가 제 손으로 태워버린 거다!"
서지훈의 목소리가 광기에 젖어 지하 7층을 뒤흔들었다.
"너도 네 아버지 때문에 평생을 고통 속에 살지 않았느냐!"
그 말은 단순한 도발이 아니었다.
우진의 영혼 가장 깊은 곳, 평생을 원인 모를 결핍과 두통 속에서 헤매게 만들었던 흉터의 기원을 정면으로 타격하는 저주였다.
"도형을 볼 때마다 뇌가 쪼개질 듯한 고통에 시달리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사랑하고 일하며 살아가지도 못하고, 언제나 세상의 이방인처럼 겉돌아야 했던 이유. 그게 전부 네 아버지가 네 머릿속에 심어둔 그 빌어먹을 백신 때문이었다!"
서지훈의 눈에 조소가 번졌다.
"그런데도 그 아비를 구하겠다고? 자신을 시스템 파괴의 도구로 개조하고 버린 아비를 위해 온몸의 뼈가 바스러지도록 싸우겠다고? 웃기지 마라, 강우진. 너는 구원자가 아니다. 너는 단지 네 아비가 15년 전에 프로그래밍해 둔 대로 움직이는 가장 가련한 생체 폭탄에 불과해!"
지하 7층의 차가운 정적이 우진의 귓가를 짓눌렀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도진우마저 섬뜩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가 마치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쑤시듯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기억이 지워진 자리, 텅 빈 백지 같았던 유년의 공백에서 서늘한 한기가 피어올랐다.
서지훈의 말은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그의 인생은 아버지가 남긴 수술 흔적으로 인해 송두리째 뒤틀렸고, 15년간 단 하루도 온전한 평온을 누리지 못했다.
그 고통의 원흉이, 바로 눈앞의 챔버 속에 잠들어 있는 아버지였다.
5. 흔들리는 눈동자, 그리고 아비의 손길
"……."
강우진의 시선이 천천히 흔들렸다.
그의 머리 위, 기하학적 도형이 완전히 지워져 공허만이 맴돌던 정수리 부근에서 미세한 균열음이 울렸다.
시스템의 수식을 벗어난 '수학적 특이점'의 공간에, 서지훈의 집요한 심리 공격이 만들어낸 의문의 파편들이 서리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만약 시스템이 말하는 통제가 옳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모든 저항이, 단지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만을 늘려가는 오만한 발버둥에 불과하다면?
아버지의 행동이 사랑이 아니라, 광기 어린 과학자의 뒤틀린 집착이었다면?
균열은 생각보다 깊었다.
우진의 발걸음이 무겁게 굳어졌다.
그 망설임의 순간을 포착한 서지훈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마치 영혼을 유혹하는 악마처럼, 낮고 감미로운 어조였다.
"이제 그만 멈춰라, 우진아. 코어의 퍼지를 중단하고 시스템과 동기화해라. 네가 지닌 그 특이점의 연산 능력을 코어의 중앙 프로세서로 통합한다면, 우리는 불완전했던 인과율의 균열을 완벽하게 메울 수 있다. 더 이상의 희생도, 더 이상의 파멸도 없는 진정한 무결점의 사각 격자망을 완성할 수 있단 말이다. 네 고통도, 거기서 끝난다."
서지훈의 홀로그램 손이 우진의 어깨를 향해 뻗어왔다.
비록 만져지지 않는 빛의 허상이었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차가운 유혹의 무게는 천근만근처럼 우진의 영혼을 짓눌렀다.
그때였다.
푸슈우우우—!
냉각 챔버의 배기 밸브가 거칠게 열리며 희뿌연 액체 질소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챔버 내부를 채우고 있던 청록색 냉각액의 수위가 급격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우, 진아."
스피커를 통한 기계음이 아니었다.
챔버 내부의 두꺼운 특수 아크릴 벽을 뚫고, 성대가 찢어질 듯 갈라진 생생한 육성이 흘러나왔다.
우진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15년 동안 챔버의 차폐벽 너머에서 생체 프로세서로 묶여 있던 사내.
백발이 성성하고 온몸이 앙상하게 마른 노인이, 척수와 관자놀이에 연결된 전극 와이어를 떨리는 손으로 쥐어뜯고 있었다.
치지직!
파바박!
신경에 직결된 와이어가 강제로 뽑혀 나가며 붉은 피가 아크릴 내벽을 적셨다.
살인적인 인과율 역류의 쇼트가 뇌간을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도, 노인의 시선은 오직 한곳만을 향하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챔버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청년, 자신의 아들이었다.
"정호 박사……!"
서지훈의 홀로그램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의식을 차단했을 텐데…… 어떻게 자율 신경계의 록을 푼 거지?!"
강정호 박사는 서지훈의 외침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는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뻗어, 차가운 아크릴 유리벽을 짚었다.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선혈이 유리창에 거친 손자국을 남겼다.
그의 입술이 다시 한번 힘겹게 달싹였다.
"미안…… 하다……."
그 한마디였다.
변명도, 과학적 당위성도, 거창한 철학도 아니었다.
자신의 손으로 아들의 머리를 가르고, 유년의 기억을 빼앗고, 15년 동안 지옥 같은 두통과 고독 속에서 살아가게 만든 아비의 처절한 참회.
아크릴 너머로 마주친 강정호의 눈동자에는 시스템의 계산식 따위는 단 한 조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피눈물로 얼룩진, 아들을 향한 끝없는 죄책감과 맹목적인 사랑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6. 백색의 분노와 선택
그 눈빛을 마주한 순간.
강우진의 가슴속에서 서지훈이 심어두었던 차가운 의문의 서리가 일순간에 증발해 버렸다.
두통?
고통?
평생을 따라다녔던 고독?
그래, 아버지가 남긴 상처는 아팠다.
단 한 번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흉터는 아들을 시스템의 부품으로 팔아넘기기 위해 새긴 낙인이 아니었다.
온 세상이 거대한 사각의 감옥에 갇혀 꼭두각시처럼 춤출 때, 적어도 내 아들만큼은 자신의 발로 걷고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를 바랐던 아비의 처절한 발버둥이었다.
자신은 평생 챔버 속에 갇혀 도시 전체의 오물을 뒤집어쓰는 괴물이 될지언정, 아들에게만은 자유라는 이름의 저주이자 축복을 남겨주려 했던 희생의 흔적이었다.
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지훈의 홀로그램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의 흔들림도,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서릿발보다 차갑고 태양보다 뜨거운 백색의 분노만이 타오르고 있었다.
"서지훈."
우진의 목소리가 지하 7층의 공동을 무겁게 울렸다.
"너는 네 가족을 죽인 살인범에게서 아무런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절망했다고 했지."
서지훈이 미간을 좁혔다.
"그렇다. 우연은 악이고, 통제되지 않는 자유는 재앙이다."
"아니, 넌 틀렸어."
우진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의 발걸음마다 바닥의 콘크리트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은빛 파동이 번져 나갔다.
"너는 우연을 두려워한 게 아니야. 너는 단지 그 슬픔을 견뎌낼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뭐라고?"
서지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찾아오는 찢어질 듯한 고통, 그 부조리한 슬픔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너는 세상 전체를 거대한 무덤으로 만들고 그 안에 스스로를 파묻어버린 거다. 산 송장처럼 네모난 상자 안에 갇혀 있으면, 적어도 다시는 상처받지 않을 테니까!"
"닥쳐라! 네놈이 통제의 숭고함을 어찌 안다고 지껄이느냐!"
서지훈이 격노하며 소리쳤다.
그의 머리 위에서 암흑의 프레임이 미친 듯이 회전하며 지하 7층의 모든 모니터를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고통과 슬픔이 없는 세상이 왜 무덤이란 말이냐!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구원이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선택으로 눈물 흘리지 못하는 삶은 이미 살아있는 게 아니야."
우진이 품 안에서 한서연과 윤채린의 손을 거쳐 자신의 손으로 돌아온 마스터 해방 키, 프로메테우스의 푸른 크리스털을 꺼내 들었다.
그의 정수리 위에서, 공허로 가라앉아 있던 아웃라이어의 공간이 거대한 은빛 소용돌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네가 만든 그 역겨운 사각 상자 속에서 평화롭게 썩어가느니…… 차라리 피를 흘리며 넘어지더라도 내 의지로 살아가겠다."
7. 벼랑 끝의 카운트다운
"미련한 놈……!"
서지훈의 홀로그램이 흉측하게 일그러지며 허공을 향해 명령 코드를 내리꽂았다.
"그렇다면 네 아비와 그 계집아이의 뇌세포와 함께 이 역삼역 바닥에 영원히 파묻혀라! 강제 소거 시퀀스, 오버드라이브 기동!"
위이이잉—!
지하 7층 천장에 매설된 특수 고압 축전기들이 일제히 굉음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보조 챔버 속에 갇혀 있던 이서진의 목덜미 나노 전극에서 파란 스파크가 튀었고, 강정호 박사의 심전도 그래프가 위험 수위인 220을 돌파하며 가파르게 치솟았다.
[SYSTEM ALERT : DUAL PURGE OVERHEAT]
[임계치 도달까지 남은 시간 : 15초]
서지훈은 코어를 우진에게 넘겨주느니, 두 사람의 뇌간을 고온 플라스마로 소각하여 시스템 전체를 자폭시키려 하고 있었다.
"우진아…… 피해라……!"
유리벽을 두드리는 강정호 박사의 절규가 귓전을 때렸다.
15초.
그 짧은 시간 안에 콘솔의 방화벽을 뚫고 두 개의 챔버를 동시에 물리적으로 개방하는 것은 현대 과학의 어떤 컴퓨터로도 불가능한 연산이었다.
하지만 강우진의 시야는 이미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초과해 있었다.
지잉—!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가 붉게 달아오르며, 망막 전체에 자수정빛과 은빛이 뒤섞인 초월적인 궤적선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4단계 '과거 추적'과 극한으로 각성한 '변화 감지'의 동시 발동.
서지훈이 구축해 둔 자폭 회로의 15년 전 설계 데이터와, 0.1초 뒤 전기가 흐를 물리적 구리선의 궤적이 우진의 뇌 속으로 낱낱이 분해되어 들어왔다.
'보인다.'
우진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탕!
그의 발끝이 바닥의 집행관 돌격소총을 걷어차 공중으로 띄웠다.
회전하는 소총을 낚아챈 우진은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대신 총열에 프로메테우스의 크리스털을 직결하고, 자신의 몸속에 흐르는 방화벽 백신 코드를 총신 전체로 강제 방출했다.
키이이이잉—!
푸른빛과 은빛이 뒤섞인 절대 척력의 광탄이 총구를 떠나, 천장의 메인 전력 분배기 핵심 노드를 향해 일직선으로 쏘아 올려졌다.
0.05초의 오차도 없는, 시스템의 숨통을 정확히 꿰뚫는 궤적이었다.
콰아아앙!
메인 분배기가 화려한 불꽃을 튀기며 박살 나는 순간, 서지훈의 얼굴에 완벽한 경악이 번졌다.
"이…… 말도 안 되는……!"
자폭 회로의 전력이 차단되며 카운트다운이 3초를 남겨두고 거짓말처럼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튕겨 나간 강우진의 몸은, 이미 메인 콘솔의 마스터 리셉터 바로 앞에 도달해 있었다.
우진은 오른손에 쥔 프로메테우스의 단자를 콘솔 정중앙에 거칠게 틀어박았다.
"끝이다, 서지훈."
쿠구구구궁—!
역삼역 지하 7층 암반 전체가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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