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고발자의 메시지
1. 지하의 심연
서대문 사거리의 지하 30미터, 콘크리트 암거 사이로 흘러드는 차가운 지하수가 발목을 적셨다.
두꺼운 철제 환기 그릴 너머로 지상의 소음이 아득한 비명처럼 흩어졌다.
타오르는 냄새와 테르밋 방전 특유의 비릿한 오존향이 지하 통로의 습한 공기에 뒤섞여 목구멍을 찔렀다.
강우진은 벽면에 한 손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오른쪽 관자놀이의 4센티미터 수술 흉터가 마치 불에 달군 송곳으로 후벼 파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18분.'
자신의 정수리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오르비스가 붕괴한 이후, 세상을 구속하던 사각 격자망에서 완전히 튕겨져 나간 자리에는 오직 서늘한 공허만이 맴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공허는 무력함이 아니었다.
세상이 규정한 어떤 궤도에도 얽매이지 않는 절대적인 척력, 거대한 시스템의 연산 자체를 거부하는 수학적 특이점의 무게였다.
철퍽, 철퍽.
군용 방수화가 흙탕물을 짓이기며 어둠 속으로 나아갔다.
이곳은 서대문에서 시청, 을지로를 거쳐 테헤란로의 역삼역 지하 깊숙한 암반층으로 직결되는 구형 배수 암거이자 비상 환기 터널이었다.
지상의 도로는 도진우가 쳐놓은 사각 통제 격자망과 청소 기동대의 포위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15년 전,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의 지하 차폐 구역을 설계할 당시 부친 강정호 박사가 유독 물질 배출용으로 파놓았던 이 지하 수로는 시스템의 디지털 지도 어디에도 온전한 데이터로 등재되어 있지 않았다.
시스템의 눈이 닿지 않는 완벽한 암흑.
그 암흑 속에서 오직 우진의 시신경만이 푸른빛 잔상을 뿜어내며 벽면의 미세한 균열과 배관의 흐름을 읽어내고 있었다.
치지직.
우진의 젖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희미한 정전기 파동이 일었다.
품속에 넣어둔 소형 단파 수신기였다.
파주 벙커에서 챙겨 나왔던 아날로그 통신 장비에서 바늘이 미세하게 떨리며 144.820MHz 주파수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 신호가 잡힐 리가 없는데.'
이곳은 지하 수십 미터의 콘크리트 차폐 구역이었다.
지상의 전파는커녕 어떤 상용 이동통신 신호도 도달할 수 없는 진공 상태였다.
그런데 수신기의 아날로그 표시창에 붉은색 다이오드가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치직, 치지직.
노이즈 사이로 둔탁한 저주파음이 흘러나왔다.
단순한 잡음이 아니었다.
모스 부호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반복되는 펄스 신호였다.
우진은 걸음을 멈추고 귀에 이어폰을 깊숙이 꽂았다.
[……Node-1.
K-07.
응답하라.
들리는가.]
변조된 음성이었다.
기계적인 필터를 거쳐 성별조차 구분하기 힘든 메마르고 서늘한 목소리.
하지만 그 음성에 실려 있는 펄스의 형태는 너무나도 익숙했다.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가 그 주파수에 공명하듯 서늘하게 찌릿거렸다.
"누구냐."
우진이 어둠을 향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어폰 너머에서 찰나의 숨소리가 번졌다.
[넥스트 큐브 본사 통제감사실, 제3연구동.
시스템 번호 409.]
내부자였다.
그것도 도진우의 지휘 아래 도시 전체의 인생 궤도를 조작하고 집행하는 심장부에 남아 있는 자였다.
2. 유령의 전파
"도진우의 함정인가?"
우진이 벽면에 등을 기댄 채 차갑게 되물었다.
지금 이 순간 도진우는 지상에서 서연과 채린을 압박하며 우진의 동선을 좁혀오고 있었다.
언제든 우진의 발을 묶기 위해 기만 신호를 보낼 수 있는 상대였다.
이어폰 너머의 목소리가 짧게 메마른 숨을 토해냈다.
[도진우 수석 감사관은 지금 지상 화재 현장에서 격자망을 락온하느라 정신이 없다.
그자는 네가 배수 터널로 진입했다는 사실조차 아직 연산해 내지 못했어.
그의 머리 위에 뜬 4차원 큐브는 오르비스의 붕괴로 인해 연산 부하가 130%를 넘어섰으니까.]
우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상대는 도진우의 머리 위에 뜬 기하학체와 그 상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단순한 외부 해커나 잡역부가 아니었다.
[시간이 없다, 강우진.
당신 부친 강정호 박사의 생체 유지 챔버 전력 차단선이 이미 14분 뒤로 세팅되었다.]
"14분……? 아까는 18분이었을 텐데."
[도진우가 지상에서 당신을 놓친 직후, 역삼역 코어 통제실에 긴급 가속 명령을 하달했다.
당신이 코어 챔버에 도달하기 전에 Node-0의 신경망을 완전히 소각하고, 예비 복제 프로세서(Node-2)로 주도권을 전환하려는 거다.]
우진의 턱관절이 굳게 다물렸다.
핏줄이 곤두선 주먹이 젖은 콘크리트 벽을 부술 듯 짓눌렀다.
그들은 끝까지 아버지를 부품으로 쓰다 버릴 생각이었다.
"원하는 게 뭐지? 내부 연구원이라면 왜 내게 이 정보를 넘기는 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다.
이 끔찍한 사각 감옥의 종말.]
목소리에 처음으로 인간적인 떨림과 균열이 묻어났다.
[나 역시 15년 전 테헤란로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의 주니어 연구원이었다.
화재 당시 서지훈과 넥스트 큐브 세력의 협박에 굴복해 그들의 데이터 엔지니어로 전향했지.
살기 위해 머리 위에 검은 네모를 받아들였고, 15년 동안 수백만 명의 인생을 사각 궤도에 꿰어 맞추는 알고리즘을 짰다.]
연구원의 음성은 짓이겨진 유리 조각처럼 서걱거렸다.
[매일 밤 모니터 속에서 파멸의 검은 세모를 배정받고 죽어가는 사람들의 통곡을 들었다.
하지만 저항할 수 없었지.
내 목덜미에도 그들이 심어놓은 제어 칩이 박혀 있었으니까.
도진우가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내 뇌간도 5초 안에 타버릴 테니까.]
"그런데 왜 지금이지?"
[당신이 오르비스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단파 수신기 너머로 거대한 냉각 팬이 돌아가는 저주파 소음이 섞여 들었다.
[오르비스가 폭파되던 순간, 본사 데이터 센터의 모든 통제 격자가 순간적으로 멈췄다.
그리고 내 단말기 화면에 당신의 데이터가 떴지.
5,100만 명 중 유일하게 사각형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아닌 붉은 물음표.
'Error: ?'.]
연구원의 숨결이 가빠졌다.
[그 순간 깨달았다.
강정호 박사님이 15년 전 옳았다는 것을.
인간은 시스템이 계산해 낸 규격품이 아니라는 것을.
당신이라는 절대적인 오류가 존재하는 한, 이 거대한 기계 장치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우진은 묵묵히 어둠 속을 응시했다.
머리 위의 도형이 지워진 뒤 찾아온 차가운 고립감, 세상 전체가 자신을 밀어내는 아웃라이어의 저주 속에서도, 누군가는 그 균열 속에서 희망을 보고 있었다.
"역삼역 지하 7층의 방어선은 어떻게 되어 있지?"
우진이 본론을 파고들었다.
지금 가장 절실한 것은 감상적인 참회가 아닌, 14분 안에 암반층을 돌파할 수 있는 냉혹한 전술 정보였다.
[지하 5층부터 7층까지는 완전 봉쇄되었다.
도진우의 친위대인 중앙 집행관들과, 동면에서 깨어난 피실험자 병기들이 코어 진입로의 3중 방폭문을 지키고 있어.
물리적인 화력이나 해킹으로는 1분도 버티지 못하고 인과율 집속탄에 증발할 거다.]
"그렇다면 뚫을 방법이 없다는 뜻인가?"
[정면으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백도어가 있다.]
백도어.
그 단어가 떨어지는 순간, 우진의 심장이 서늘하게 요동쳤다.
3. 15년 전의 쐐기
[15년 전, 화재가 발생하기 사흘 전이었다.]
내부 연구원의 목소리가 과거의 기억을 더듬듯 낮게 깔렸다.
[강정호 박사님은 이미 서지훈과 넥스트 큐브 수뇌부가 자신을 제거하고 연구소를 집어삼키려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다.
박사님은 메인 프레임의 모든 설계도를 넘겨주는 척하면서, 시스템의 가장 깊은 커널 아키텍처 속에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미세한 논리 회로를 하나 심어두셨다.]
"아버지의 백도어……."
[그렇다.
넥스트 큐브의 엔지니어들은 지난 15년 동안 중앙 코어를 수없이 개량하고 확장했지만, 그 커널 회로만큼은 손대지 못했다.
그 회로를 건드리는 순간 코어 전체의 엔트로피 평형 방정식이 와해되어 도시 전체가 암전되기 때문이지.
그들은 그것이 단순한 항상성 유지용 시스템 앵커(Anchor)인 줄 알고 보존해 왔다.]
우진은 부친이 남겼던 하드커버 연구 노트의 복잡한 수식들을 떠올렸다.
시스템 전체의 궤도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존재해야만 하는 중심축.
어느 한곳에 가해진 변형이 전체로 번져나가는 인과율의 그물망.
아버지는 그 거대한 감옥을 설계하면서, 언젠가 그것을 무너뜨릴 유일한 비상구를 자신의 손으로 파두었던 것이다.
"그 백도어의 진입 경로가 어디지?"
[역삼역 지하 7층, 코어 챔버의 정밀 냉각 라인 4번 밸브 뒤편이다.
하지만 그곳은 키보드나 단말기 콘솔로는 접속할 수 없다.
디지털 신호가 닿는 순간 시스템 보안 방화벽이 작동해 즉각 자폭 프로토콜을 가동하니까.]
연구원이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오직 단 하나의 방법뿐이다.
인간의 신경망을 직접 접속 매개체로 사용하는 생체 바이패스.]
우진의 왼손이 무의식적으로 관자놀이의 흉터를 짚었다.
살갗 아래에서 맥박 치듯 요동치는 미세한 신경 결합부.
파주 벙커에서 한민우 부소장이 했던 말이 벼락처럼 뇌리를 스쳤다.
'우진아, 네 관자놀이의 4센티미터 흉터는 단순한 상처가 아니다. 네 아버지가 집도했던 신경 궤도 절제술…… 그것은 역삼역 코어의 내벽 방어벽을 통과해 부친의 신경망과 직결할 수 있도록 설계된 유일한 생체 접속 단말이다.'
모든 조각이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아버지는 15년 전, 어린 아들의 머리에서 통제 칩을 뜯어내면서 그 상처 자리에 훗날 시스템의 심장을 찌를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쇠를 심어두었던 것이다.
"내 관자놀이의 흉터가 그 백도어의 물리적 플러그라는 뜻이군."
[알고 있었나?]
연구원의 목소리에 경악이 번졌다.
[그렇다.
박사님의 고유 생체 뇌파 패턴과 99.9% 일치하는 직계 혈족이자, 신경 절제술을 견뎌낸 유일한 개체.
K-07.
당신의 신경망이 4번 냉각 라인의 생체 리셉터에 직접 닿아야만 백도어가 열린다.]
"그 백도어가 열리면 어떻게 되지?"
[중앙 코어의 모든 사각 격자망 제어권이 순간적으로 박탈된다.
코어 챔버를 감싸고 있는 3중 알루미늄 차폐벽이 강제로 개방되고, 박사님을 구속하고 있는 생체 결합 소켓이 해제될 거다.
하지만…….]
연구원이 말을 멈추었다.
수신기 너머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 뒤에 숨겨진 치명적인 대가가 무엇인지 우진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대가가 뭐지?"
[……엔트로피의 역류다.]
연구원의 음성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코어의 통제선이 끊어지는 그 찰나의 순간, 15년 동안 코어가 억눌러왔던 도시 전체의 왜곡된 인과율 찌꺼기와 결손 에너지가 백도어를 타고 역류할 거다.
접속한 자의 신경망을 통해서.]
4. 거부할 수 없는 대가
지하 환기 터널의 천장에서 물방울이 뚝, 떨어져 우진의 뺨을 타고 흘렀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감촉이었다.
도시 전체의 인과율 역류.
수백만 명의 궤도를 억지로 꺾어놓으며 발생했던 거대한 파멸적 에너지의 총량.
그것이 자신의 뇌간과 신경망을 타고 쏟아져 들어온다면, 인간의 육체가 버텨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뇌세포가 팝콘처럼 튀겨져 나가거나, 영구적인 뇌사에 빠질 것이 분명했다.
15년 전 아버지가 아들을 지키기 위해 홀로 코어에 걸어 들어가 뒤집어썼던 그 지옥의 불길을, 이제는 아들이 고스란히 넘겨받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우진의 입가에 메마른 미소가 번졌다.
두려움은 없었다.
애초에 성산대교 난간에서 친구를 낚아챘을 때부터, 서대문의 불타는 화염 속에서 서연의 머리 위 검은 세모를 보았을 때부터 각오했던 길이었다.
남의 불행을 대가로 유지되는 평화 따위는 질서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목숨을 부품으로 갈아 넣어야만 굴러가는 세계라면, 그 세계 자체가 거대한 오작동이었다.
"그 역류를 버텨내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나?"
우진의 담담한 질문에 연구원은 말을 잇지 못했다.
죽음의 문턱을 눈앞에 두고도 맥박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청년의 목소리에 압도당한 탓이었다.
[……박사님의 심장이 멈추기 전이라면 가능하다.
하지만 당신 자신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어.
인간의 뇌는 그런 고밀도 패킷을 처리하도록 설계되어 있지 않다.]
"내 신경망에는 아버지가 남겨둔 방화벽 백신이 각인되어 있다. 그리고 지금 내 머리 위에는 시스템의 어떤 계산식도 잡히지 않는 공허가 있지."
우진이 젖은 바닥을 박차며 다시 뛰기 시작했다.
철벅이는 물소리가 지하 암거를 가득 메웠다.
"그들이 나를 아웃라이어라고 부르더군. 시스템의 격자망이 거부하는 버그라고 말이야. 그렇다면 그 버그의 방식대로 끝장을 내주겠다."
[강우진…….]
"하나 더 묻겠다. 역삼역 코어 챔버에 연결되어 있다는 예비 복제 프로세서, Node-2. 그게 누구지?"
단파 수신기 너머에서 연구원의 숨이 턱 막히는 소리가 들렸다.
가장 깊은 치부를 찔린 자의 전율이었다.
[그것까지 알고 있었나?]
"15년 전 화재 당시 납치되었던 아이들 중 하나겠지. 강민우는 구출했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동포들 중 누구를 코어의 대체 배터리로 박아 넣은 거냐?"
연구원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넥스트 큐브 내부에서도 극소수의 최상위 연구원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극비 문서의 내용이었다.
[……Subject-04.
이서진이다.]
쿵.
우진의 발걸음이 순간적으로 허공을 밟을 뻔했다.
이서진.
15년 전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 피실험자 명단, 우진의 이름(K-07) 바로 아래쪽에 적혀 있던 열 살배기 여자아이의 이름이었다.
늘 우진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제발 집에 보내달라고 울먹이던, 커다란 눈망울을 가졌던 아이.
그 아이가 지금 차가운 냉각액 속에 잠긴 채, 강정호 박사가 죽고 나면 도시의 파멸을 대신 짊어질 두 번째 제물로 매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도진우 이 개자식이……."
우진의 눈에 푸른빛 살기가 번뜩였다.
그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시스템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연산 소자, 갈아 끼우면 그만인 부품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도진우는 서진이의 뇌간에 2세대 나노 전극을 심어 동면 상태로 코어 보조 회로에 직결해 두었다.
강정호 박사의 뇌파가 정지하는 순간, 서진이의 신경망이 강제로 오버클럭되며 도시 전체의 궤도를 넘겨받게 된다.
서진이의 어린 뇌는 그 부하를 사흘도 버티지 못하고 타버릴 거다.
그 뒤엔 06번, 07번이 차례로 소모되겠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진이 이를 갈며 단언했다.
"둘 다 구해낼 거다. 내 아버지도, 서진이도."
[시간이 없다, 우진.
이제 11분 남았다.
도진우가 코어의 강제 소각 시퀀스를 시작했어.
놈이 지하로 내려오기 전에 4번 냉각 라인으로 도달해야 한다.]
"접근 루트를 말해라."
[지금 당신이 달리고 있는 서대문 배수로 끝에서 2호선 시청역 환기 터널로 진입해라.
선로 유지보수용 비상 통로를 타고 강남 방향으로 질주하면, 역삼역 전방 300미터 지점에 붉은색 고압 케이블이 매설된 암반 균열부가 보일 거다.
거기가 15년 전 매몰되었던 연구소 지하 3층 배수로와 역삼역 지하 7층 수직 샤프트가 만나는 접점이다.]
연구원의 음성이 급박해졌다.
[그 균열벽 뒤에 4번 냉각 밸브의 수동 바이패스 포트가 은폐되어 있다.
콘크리트를 부수고 손을 찔러 넣어라.]
치직.
그때, 수신기 너머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문이 부서지는 굉음과 함께 거친 군화 소리가 이어폰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5. 닫히는 문
[누구냐!
콘솔에서 손 떼!]
[도진우 감사관님의 직권이다!
단말기 강제 차단해!]
수신기 너머에서 연구원의 다급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발각되었다……!
우진, 기억해라!
4번 밸브다!
절대로 시스템의 질의어에 대답하지 마라!
당신의 흉터는 명령을 받는 곳이 아니라, 명령을 거부하는 방화벽…… 큭!]
탕!
탕!
둔탁한 인과율 집속탄의 파열음이 이어폰을 때렸다.
연구원의 단말기가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비릿한 단말마가 스쳐 지나갔다.
치지직—— 삐이이이——.
통신이 완전히 끊어졌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오직 차가운 고주파 노이즈뿐이었다.
우진은 이어폰을 거칠게 뽑아 던졌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분노가 용암처럼 치밀어 올랐다.
또 한 사람이 시스템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던졌다.
15년 전의 아버지 강정호, 윤채린의 아버지 윤상혁, 이름을 되찾고 산화했던 민도현, 그리고 방금 전 통신 너머에서 스러져간 이름 모를 409번 연구원까지.
이 도시의 화려한 네온사인과 안정된 일상 아래에는, 사각 격자망의 항상성을 지탱하기 위해 갈려 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고여 있었다.
'더 이상은 안 된다.'
우진은 전속력으로 어둠을 갈랐다.
배수관의 수위가 점점 낮아지며 거대한 철제 격벽이 눈앞에 나타났다.
시청역과 을지로를 거쳐 테헤란로로 이어지는 2호선 지하철 본선 환기 터널의 거대한 통풍구였다.
거대한 환풍기 날개가 맹렬한 소리를 내며 회전하고 있었다.
우진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환풍기 모터의 회전축 사이, 0.3초의 틈새가 우진의 시야에 슬로비디오처럼 펼쳐졌다.
머리 위의 도형이 사라졌음에도, 몸에 각인된 '변화 감지'와 절대 척력의 감각은 극한으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슈우우욱!
우진의 신형이 거대한 철제 블레이드의 칼날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치며 환기구 내부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콰앙!
거친 자갈이 깔린 지하철 선로 옆 비상 통로로 착지한 우진은 지체 없이 남쪽을 향해 달렸다.
어두컴컴한 터널 벽면을 따라 수십 가닥의 특수 고압 케이블이 검은 뱀처럼 똬리를 틀고 역삼역 방향으로 뻗어 있었다.
그 케이블들의 표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붉은 인과율 파동이 공기를 진동시키고 있었다.
'8분.'
시간이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빠르게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관자놀이의 흉터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며 시신경을 압박했다.
눈앞의 공간이 일그러지며 푸른빛의 환각이 쏟아져 내렸다.
그 환각 너머로, 역삼역 지하 7층 암반층 깊숙한 곳에서 유리 챔버 속에 갇힌 채 메말라가는 부친의 야윈 얼굴이 어른거렸다.
산소마스크 너머로 희미하게 헐떡이는 숨결.
그리고 그 옆에 또 다른 작은 챔버 안에서 차가운 관을 주렁주렁 매단 채 잠들어 있는 어린 소녀, 서진이의 창백한 얼굴.
"조금만 기다리세요, 아버지."
우진이 피를 토하듯 낮게 읊조렸다.
터널 저편에서 붉은색 비상 방전관의 경보등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침입을 감지한 시스템의 적색 격자 경보(Red Grid Alert)였다.
삐이이익—— 삐이이익——!
고막을 찢는 사이렌 소리와 함께, 터널 전방의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푸른 안광이 번뜩였다.
중앙 코어의 외곽 방어선을 지키는 기계화 경비 병력들이었다.
대원들의 정수리 위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고정된 칠흑빛 검은 네모가 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총구가 일제히 우진을 향해 정렬되었다.
하지만 우진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오히려 발을 구르며 더욱 거세게 가속했다.
우진의 전신에서 투명한 공기의 왜곡이 일어났다.
세상의 모든 궤도를 거부하는 절대 척력의 파동이, 질주하는 우진의 전방에 거대한 쐐기 형태의 방호벽을 형성하고 있었다.
6. 균열의 접점
콰아아앙!
선두에 서 있던 경비 병력들이 일제히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을 난사했다.
푸른빛의 광탄들이 어둠을 가르며 폭풍처럼 쇄도했다.
공간을 찢고 날아오는 살상의 탄도들.
그러나 그 탄환들이 우진의 전방 1미터 영역에 도달하는 순간, 기괴한 현상이 벌어졌다.
찌지지직!
공기 중에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유리벽이 존재하는 것처럼, 푸른 광탄들이 허공에 우뚝 멈춰 섰다.
우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형의 특이점 척력이 쏟아지는 탄도들의 운동 에너지를 개념째로 짓눌러버린 것이다.
"뭐, 뭣……?!"
기계화 대원의 카본 마스크 너머로 경악에 찬 신음이 터져 나왔다.
중앙 코어와 동기화된 그들의 전술 알고리즘에는 존재하지 않는 현상이었다.
시스템의 탄환을 물리적 방패도 없이 허공에서 정지시키는 인간 따위는 연산 모델에 없었다.
"비켜라."
우진의 차가운 일갈과 함께, 허공에 멈춰 섰던 수십 발의 인과율 탄환들이 일제히 역방향으로 튕겨 나갔다.
콰콰콰쾅!
탄환들이 경비 대원들의 발밑과 장갑판을 강타하며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비명과 함께 대원들의 진형이 산산조각 났다.
우진은 폭염과 파편을 뚫고 그림자처럼 쇄도했다.
0.3초의 데이터 병목.
중앙의 명령이 떨어지고 근육이 반응하기 전의 그 찰나의 사각지대를 파고든 우진의 주먹이 선두 대원의 목덜미 제어 소켓을 정확히 강타했다.
콰직!
티타늄 소켓이 으스러지며 기계화 대원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어지는 우진의 회축이 두 번째 대원의 흉부를 함몰시키며 벽면으로 처박았다.
단 5초.
한 소대의 경비 병력이 선로 바닥에 쓰러져 경련했다.
우진은 숨을 고를 틈도 없이 벽면을 살폈다.
연구원이 말했던 지점이었다.
역삼역 전방 300미터, 지하철 터널의 두꺼운 콘크리트 외벽 한구석에 붉은색 고압 전력선들이 어지럽게 얽혀 들어가는 거대한 균열부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15년 전 화재 당시의 고온 방전으로 인해 콘크리트가 녹아내렸다가 굳어버린 흑갈색의 유리화 흔적.
그 거친 틈새 너머로 서늘하고 축축한 지하 7층의 냉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5분.'
이제 정말 한계였다.
우진은 균열부 안으로 몸을 비틀어 밀어 넣었다.
날카로운 암반 파편이 어깨와 허벅지를 긁어댔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좁은 암반 틈을 빠져나오자, 축구장만 한 거대한 수직 원통형 공간이 우진의 발아래로 펼쳐졌다.
역삼역 지하 7층, 중앙 코어의 심장부로 직결되는 거대한 수직 샤프트였다.
수십 톤의 액체 헬륨이 흐르는 티타늄 냉각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심연을 향해 뻗어 있었다.
그리고 우진의 손이 닿는 바로 앞, 두꺼운 차폐 패널에 굵은 페인트로 적힌 글자가 보였다.
[COOLING LINE 04]
4번 냉각 라인이었다.
밸브 하단에는 굳게 닫힌 강철 덮개와 함께, 손바닥만 한 생체 단말 리셉터가 붉은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단말기 표면에는 낡은 각인이 새겨져 있었다.
[PROJECT NEMO : NODE-0 REVERSE BYPASS]
아버지의 필체였다.
우진은 떨리는 숨을 들이쉬었다.
이곳에 손을 대는 순간, 백도어가 열림과 동시에 도시 전체의 결손 엔트로피가 자신의 뇌간으로 쏟아져 들어올 것이다.
되돌아갈 길은 없었다.
우진은 재킷 소매를 걷어붙이고, 오른쪽 관자놀이에 흐르는 피를 오른손 손가락에 묻혔다.
자신의 피와 신경 세포가 묻은 손바닥을, 붉게 점멸하는 생체 리셉터 위에 망설임 없이 내리찍었다.
철컥!
단말기 내부에서 날카로운 금속 바늘 네 개가 튀어나와 우진의 손바닥을 깊숙이 꿰뚫었다.
"크아아아악!"
우진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
손바닥의 신경을 타고, 15년 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던 거대한 연산 회로의 지옥이 뇌리로 직접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7. 백도어 개방
치지지지지직!
우진의 망막에 세상의 모든 기하학적 형상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백색 네모, 검은 세모, 붉은 큐브, 찌그러진 원환들.
수백만 명의 인생 궤도가 뒤엉키며 질러대는 고통과 탐욕, 절망의 파편들이 우진의 시신경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
뇌혈관이 터져 나갈 듯 팽창하고, 오른쪽 관자놀이의 흉터가 붉게 달아오르며 피를 뿜어냈다.
[경고.
비인가 생체 단말 접속 감지.]
[식별 코드 확인 중…….]
[Node-1 : K-07 강우진.
생체 뇌파 일치율 99.8%.]
[마스터 아키텍트 강정호의 백도어 프로토콜이 활성화됩니다.]
기계적인 안내 음성이 뇌 속에서 직접 울려 퍼졌다.
우진은 이를 악물었다.
입안 가득 비릿한 피 맛이 맴돌았다.
두개골이 쪼개지는 고통 속에서도 우진은 손바닥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뼛속 깊이 박힌 바늘을 향해 자신의 방화벽 백신 코드를 온 힘을 다해 밀어 넣었다.
'열려라……! 열려라, 아버지의 길! 아버지의 선택! 부숴버려라!'
우진의 영혼을 쥐어짜는 포효와 함께, 손바닥에서 은빛의 섬광이 폭발했다.
특이점의 절대 척력과 방화벽 백신이 결합된 거대한 은빛 파동이 4번 냉각 라인을 타고 수직 샤프트 전체로 번져나갔다.
콰아아아앙!
샤프트를 감싸고 있던 수십 톤의 티타늄 차폐 패널들이 일제히 굉음을 내며 비틀리기 시작했다.
시스템을 지탱하던 사각 격자망의 결합부가 차례로 터져 나가며 백색의 스파크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차폐벽 강제 개방.]
[중앙 코어 챔버 레벨-0 락 해제.]
[Node-0 전력 차단 시퀀스 일시 정지.]
수직 샤프트의 맨 밑바닥, 지하 7층의 암흑 속에서 거대한 원형 격벽이 좌우로 갈라졌다.
그 거대한 문 너머로 푸른빛의 액체 냉각액이 차 있는 지름 10미터의 원통형 챔버가 모습을 드러냈다.
수천 가닥의 검은 와이어가 연결된 채, 허공에 매달려 있는 한 남자의 야윈 육신.
15년 동안 어둠 속에서 도시의 무게를 홀로 지탱해 온 아버지, 강정호 박사였다.
그리고 그 바로 옆, 보조 챔버 안에서 산소마스크를 쓴 채 웅크리고 있는 어린 소녀, 서진이의 모습도 함께 보였다.
"하아…… 하아……."
우진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리셉터에서 뜯어냈다.
온몸의 근육이 파열되고 시야는 피로 물들어 붉게 번져 있었지만, 우진의 눈동자만은 번뜩이고 있었다.
길이 열렸다.
아버지가 남겨둔 15년 전의 백도어가, 마침내 감옥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것이다.
하지만 그 승리의 환희도 잠시였다.
쿠구구구구궁!
수직 샤프트 상층부의 비상 승강기가 엄청난 속도로 강하해 내려오는 소리가 공간을 뒤흔들었다.
승강기의 상판 위, 칠흑빛 방탄복을 입은 사내의 실루엣이 번개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도진우 수석 감사관이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파열의 실금이 가득 찬 4차원 역회전 붉은 큐브가 핏빛 안개를 뿜어내며 기괴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도진우의 손에는 고밀도 인과율 집속 화물 발사기가 들려 있었다.
"기어이 여기까지 기어 내려왔구나, K-07."
도진우의 싸늘한 목소리가 수직 샤프트의 금속벽을 타고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그의 눈동자는 붉은 핏발로 가득 차 있었고, 입가에는 조소와 살기가 뒤섞인 기괴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늦었다. 네 아비의 뇌파는 이미 임계점을 넘었어. 네가 저 문을 연 것은 구원이 아니라, 이 도시 전체를 집어삼킬 인과율 대폭발의 뇌관을 당긴 것뿐이다."
도진우가 총구를 정확히 우진의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그 뒤로, 승강기에서 강하한 4명의 중앙 집행관들이 3중 중첩 육면체를 회전시키며 착지했다.
마지막 관문이었다.
15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부자간의 재회, 그리고 세상을 구속해 온 거대한 기계 장치의 숨통을 끊기 위한 최후의 유혈극이, 역삼역 지하 7층의 차가운 심연에서 마침내 막을 올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