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노벨
← 목록
3x
1.0
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43화

인과율의 함정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찢겨 나간 도로

 

타이어 타는 매캐한 냄새가 젖은 아스팔트를 타고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올림픽대교 남단 교각 아래, 빗물과 기름이 뒤엉킨 웅덩이 위로 붉고 푸른 경광등 불빛이 어지럽게 번뜩였다.

 

반파된 세단의 보닛에서 피어오르는 회색 수증기 너머로 도진우가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냉혹함과 기괴한 희열이 교차하고 있었다.

 

도진우의 머리 위에서 공전하는 4차원 입체 큐브는 핏빛 광채를 내뿜으며 비틀리고 있었다.

 

그 주변을 둘러싼 열두 명의 청소 기동대원들은 카본 마스크 아래로 기계적인 호흡만을 뱉어냈다.

 

그들의 정수리에 못 박힌 고정된 검은 네모들은 칠흑 같은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강우진은 찌그러진 운전석 문을 박차고 비틀거리며 아스팔트 위로 발을 디뎠다.

 

오른쪽 관자놀이의 4cm 수술 흉터가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쑤시듯 맥동했다.

 

머리 위의 도형이 완전히 지워진 아웃라이어의 상태.

 

망막에 맺히는 세상은 날카로운 얼음 파편처럼 차가웠고, 공기마저 우진의 피부를 거칠게 밀어내고 있었다.

 

"친구를 살려낸 기분이 어떤가, 강우진?"

 

도진우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며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인과율 집속 병기의 파동처럼 귓전을 찢고 울렸다.

 

"송민규의 그 하찮은 목숨 하나를 건지느라, 네 아비의 신경망에 걸린 과부하가 몇 퍼센트나 치솟았는지 알고는 있나?"

 

우진은 숨을 가다듬으며 부러진 갈비뼈의 통증을 억눌렀다.

 

품속에서 진동하는 노획 무전기 액정에는 붉은 숫자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Node-0 Vital Alert: Remaining Time 39 Min]

 

39분.

 

성산대교에서 민규를 낚아채고 큐브 네트웍스의 강제 덮어쓰기를 부수는 사이, 시간은 가차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 주둥이는 여전하군, 도진우."

 

우진이 턱 끝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방울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냈다.

 

"송민규를 이용해 세탁한 40억으로 역삼역 지하 차폐벽을 보강하고, 내 동포를 예비 프로세서로 집어넣으려 한 게 네놈들의 완벽한 계획이었나?"

 

도진우의 눈매가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한쪽 눈에 착용한 기계식 인과율 계측기의 렌즈가 빠르게 초점을 조절하며 붉은 텍스트를 띄웠다.

 

"벌써 거기까지 파악했나. 과연 계산식을 거부하는 버그답군. 하지만 늦었다."

 

도진우가 손을 들어 올리자, 열두 명의 기동대원이 일제히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의 총구를 겨눴다.

 

푸른빛의 격자 에너지 파동이 총구 끝에서 고밀도로 응축되며 대기를 진동시켰다.

 

"네가 한 사람을 살릴 때마다, 우주가 요구하는 엔트로피의 청구서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다. 그 빚은 네 아비가 갚고 있고, 이제는 네 주변의 모든 것들이 치르게 될 것이다."

 

"개소리 집어치워."

 

우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네놈들이 만든 그 역겨운 사각 감옥의 빚 따위, 내가 전부 부숴서 없던 일로 만들어줄 테니까."

 

2. 0.3초의 균열

 

"사지 절단. 뇌간만 온전히 회수한다. 발포."

 

도진우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열두 개의 총구에서 푸른 인과율 광탄이 빗발쳤다.

 

찰나의 순간, 우진의 시신경이 한계까지 팽창했다.

 

머리 위에 도형은 없었지만, 15년 전 아버지가 신경 궤도를 절제하며 새겨둔 방화벽 백신의 본능이 전신을 지배했다.

 

'0.3초.'

 

도진우의 명령 신호가 공작원들의 뇌간에 박힌 칩으로 전달되고, 그 근육이 기계적으로 반응하기까지의 병목 지연.

 

그 0.3초의 틈새 속에서 우진은 몸을 비틀었다.

 

쇄도하는 푸른 광탄 세례가 허공을 가르며 아스팔트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돌부스러기와 불꽃이 폭우처럼 튀는 가운데, 우진은 정면을 향해 짓쳐 들어갔다.

 

가장 우측에 선 기동대원의 총구가 다음 궤적을 수정하려는 찰나였다.

 

우진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뻗어 나가 기동대원의 총열을 쳐올렸다.

 

동시에 아웃라이어의 무형 척력이 우진의 손바닥에서 응축되어 터져 나갔다.

 

콰아앙!

 

"크악!"

 

기동대원의 어깨 관절이 으스러지며 총기가 허공으로 튕겨 올라갔다.

 

우진은 회전하는 돌격소총을 낚아채 개머리판으로 인접한 대원의 안면을 강타했다.

 

카본 마스크가 깨져 나가며 대원의 머리 위에 박혀 있던 검은 네모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그어졌다.

 

"산개하라! 영거리 사격!"

 

도진우의 고함과 함께 나머지 대원들이 부채꼴로 펼쳐지며 우진의 사각을 포위했다.

 

하지만 우진의 눈은 이미 그들의 과거 상흔과 물리적 중심축을 꿰뚫고 있었다.

 

4단계 과거 추적의 잔상이 망막에 자수정빛 궤적선으로 번뜩였다.

 

빗길에 미끄러진 차량의 범퍼를 딛고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우진은, 공중에서 노획한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타타타탕!

 

세 발의 광탄이 정확히 세 명의 기동대원 무릎 관절 뒤편, 과거 인대 파열 수술로 약해져 있던 부위를 직격했다.

 

"커헉!"

 

비명과 함께 방어선이 무너져 내렸다.

 

도진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머리 위의 4차원 입체 큐브가 맹렬하게 역회전하며 푸른 격자 파동을 우진에게 집속시키려 했다.

 

"죽어라, K-07!"

 

도진우의 품에서 뽑혀 나온 인과율 집속 권총이 우진의 심장을 겨눴다.

 

공간 자체가 압축되는 듯한 맹렬한 파동이 응축되었다.

 

피할 수 없는 거리였다.

 

하지만 우진은 피할 생각이 없었다.

 

우진은 왼손을 앞으로 뻗으며 전신의 백신 에너지를 한 점으로 집속했다.

 

도형이 사라진 정수리 위, 텅 빈 공간에서 형언할 수 없는 차가운 공허의 척력이 소용돌이쳤다.

 

콰르릉!

 

도진우의 총구에서 뿜어져 나온 칠흑빛 인과율 탄환이 우진의 손바닥 10센티미터 앞에서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공기가 일그러지며 푸른 섬광과 흑색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말도 안 돼……!"

 

도진우가 경악으로 물든 탄식을 뱉었다.

 

"도형도 없는 결손 노드 주제에, 어떻게 시스템의 최고위 집속탄을 상쇄하는 거지?"

 

"너희가 만든 수식 따위는 애초에 틀려먹었으니까."

 

우진이 이를 악물며 손바닥을 앞으로 밀어붙였다.

 

정지해 있던 인과율의 압력이 거꾸로 역류하며 도진우의 총열을 타고 들어갔다.

 

파자자작!

 

도진우의 권총이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했다.

 

파편이 도진우의 뺨을 찢고 지나갔고, 충격파에 밀려난 도진우가 빗물 웅덩이 위로 볼품없이 나뒹굴었다.

 

머리 위의 4차원 큐브 모서리 하나가 산산조각 나며 붉은 노이즈를 뿜어냈다.

 

"쿨럭……!"

 

피를 토하며 몸을 일으킨 도진우는 비틀거리며 품속에서 무전기를 꺼내 들었다.

 

남은 기동대원 네 명이 도진우를 결사적으로 엄호하며 물러섰다.

 

우진은 그들을 완전히 섬멸할 시간조차 아까웠다.

 

무전기 시계는 이미 3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진은 길가에 비상 깜빡이를 켠 채 시동이 걸려 있던 기동대의 검은 SUV 운전석으로 몸을 던졌다.

 

유리창을 깨고 문을 연 우진은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았다.

 

엔진이 굉음을 내지르며 올림픽대교 남단 도로를 박차고 나갔다.

 

백미러 너머로 쓰러져 있던 도진우가 핏빛 서린 미소를 지으며 무전기에 대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비쳤다.

 

그 비열한 입모양이 우진의 등골을 서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이미…… 늦었다.'

 

3. 붉은 화염의 신호

 

SUV의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였지만, 눈앞을 가리는 빗줄기는 점점 거세졌다.

 

강남대로를 향해 질주하는 차 안에서 우진은 송민규의 휴대폰으로 서연의 번호를 눌렀다.

 

통화 연결음이 세 번 울린 끝에 다급한 숨소리와 함께 서연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진 씨! 무사해요? 민규 씨는요?"

 

"민규는 무사해. 화물차 기사님이 파주 벙커로 안전하게 데려가고 있어. 그보다 서연 씨, 지금 어디야?"

 

"여의도 사무실에서 장부랑 서버 하드디스크 전부 챙겨서 나왔어요. 채린이가 오버라이더로 신호를 교란해 줘서 빠져나왔는데…… 잠깐만요, 우진 씨. 이상해요."

 

수화기 너머로 거친 엔진 소리와 함께 불안정한 잡음이 섞여 들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사기단 놈들이 우리를 쫓아오지 않아요. 그 중요한 40억 세탁 장부를 빼앗겼는데도, 추적하는 낌새가 전혀 없어요. 마치…… 우리가 여길 빠져나가는 걸 기다렸다는 듯이."

 

우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기다렸다?'

 

시스템은 결코 손해를 보지 않는다.

 

하나의 궤도를 비틀어 결손이 발생하면, 반드시 인접한 다른 노드를 쥐어짜 그 결손을 메운다.

 

민규를 살려내며 발생한 엔트로피 결손.

 

그리고 여의도 골든 큐브 에셋의 40억 세탁 장부 유출.

 

시스템이 이를 순순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서연 씨, 지금 어디로 가고 있어? 당장 멈춰!"

 

"네? 지금 마포대교 건너서 제 취재 사무실 쪽으로…… 서대문 골목이에요. 거기에 15년 전 화재 사건 원본 스크랩이랑 미공개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어서, 이번 장부랑 대조해서 바로 언론망에 뿌리려고……."

 

"안 돼! 그 사무실로 가지 마! 당장 차 돌려!"

 

우진이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날카로운 급브레이크 파열음과 함께 서연의 경악에 찬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 안 돼……! 저기, 불이……!"

 

콰아아앙!

 

귀를 찢는 폭발음이 스피커를 뚫고 터져 나왔다.

 

이어지는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건물 잔해가 무너져 내리는 굉음.

 

서연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소리가 들렸다.

 

"사무실이…… 내 사무실이 불타고 있어요! 우진 씨, 건물이 통째로……!"

 

4. 인과의 함정

 

우진은 핸들을 꺾어 서대문 방향 강변북로로 차를 몰았다.

 

속도계 바늘이 시속 140km를 가리키며 차체가 비명처럼 떨렸다.

 

"서연 씨! 내 말 들려? 다친 데는 없어?"

 

"전…… 전 괜찮아요. 막 골목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2층에서 폭발이 일어났어요. 조금만 일찍 들어갔어도……."

 

서연의 떨리는 음성 뒤로 소방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섞여 들었다.

 

우진의 뇌리에 15년 전 연구소 화재 사건의 타임스탬프가 번개처럼 스쳤다.

 

'화재 신고 17분 전의 소방 출동 지령.'

 

그리고 뱅뱅사거리에서 탱크로리를 동원했던 궤도 청소 구역.

 

모든 조각이 끔찍한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고 있었다.

 

우진이 15분 만에 서대문 노후 상가 골목에 도착했을 때, 3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은 이미 거대한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시뻘건 불길이 빗줄기를 비웃듯 밤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소방관들이 연신 물줄기를 쏘아대고 있었지만 불길은 쉬이 잡히지 않았다.

 

골목 어귀, 비에 젖은 채 털썩 주저앉아 있는 서연의 모습이 보였다.

 

채린이 서연의 어깨를 감싸 안은 채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우진이 차에서 뛰어내려 그들에게 달려갔다.

 

"서연 씨! 채린아!"

 

"우진 오빠……!"

 

채린이 돌아보며 우진을 맞았다.

 

서연은 넋이 나간 눈으로 타오르는 건물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 들려 있던 가방만이 유일하게 건져낸 골든 큐브 에셋의 하드디스크였다.

 

"다 타버렸어요……."

 

서연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15년 동안 모았던 아버지의 마지막 취재 기록들…… 연구소 희생자 유가족들의 진술서…… 전부 저 안에 있었는데……."

 

우진은 타오르는 화염을 올려다보았다.

 

불길 속에서 콘크리트 벽면이 녹아내리며 유리질 고드름처럼 굳어가는 유리화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단순 누전이나 방화가 아니었다.

 

군용 테르밋과 고온 전자기 방전.

 

15년 전 연구소를 불태웠던 바로 그 수법이었다.

 

그 순간, 우진의 시야에 기괴한 광경이 잡혔다.

 

화재 현장 주변에 모여든 구경꾼들과 소방관들의 머리 위.

 

수십 개의 백색 네모(□)들이 일제히 불규칙하게 진동하며, 그 표면에 차가운 서리 노이즈와 미세한 실금이 그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서연의 머리 위.

 

잠시 안정을 되찾았던 그녀의 정수리 위에서, 백색 네모의 모서리가 맹렬한 붉은빛으로 달아오르며 날카로운 세모(△)의 형태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검은 실선 잔상이 허공 높이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이건……."

 

우진의 숨이 멎었다.

 

서연의 머리 위 도형이 다시 파멸의 세모로 뒤틀리고 있었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성산대교에서 민규의 검은 세모를 부수고 목숨을 구한 대가.

 

시스템의 항상성 네트워크는 소멸하지 않은 파멸의 에너지를 가장 인접한 유기적 연결고리, 바로 한서연에게로 고스란히 전이시킨 것이다.

 

'연쇄 법칙.'

 

한 사람을 구원하면, 그 반작용으로 다른 누군가가 희생된다.

 

우진이 민규를 살려낸 바로 그 순간, 시스템은 서연의 사무실을 표적으로 지정하고 그녀의 삶을 잿더미로 만들며 다시금 파멸의 궤도로 몰아넣은 것이다.

 

"우진 씨…… 머리가, 머리가 너무 아파요……."

 

서연이 관자놀이를 감싸 쥐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검은 세모의 자각 현상.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머리 위에서 타오르는 붉고 검은 기하학체를, 서연 스스로가 인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서연 씨! 정신 차려!"

 

우진이 무릎을 꿇고 서연의 어깨를 붙잡았다.

 

5. 설계된 딜레마

 

"우진 오빠, 저것 좀 봐!"

 

채린이 다급하게 골목 반대편을 가리켰다.

 

비에 젖은 골목 입구로 세 대의 검은 세단이 미끄러지듯 진입하고 있었다.

 

차 문이 열리며 검은 정장을 입은 사내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가슴에는 푸른색 정육면체 배지가 달려 있었고, 머리 위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검은 네모가 떠 있었다.

 

넥스트 큐브 본사 통제감사실의 현장 수습반이었다.

 

그들 뒤로, 한쪽 팔에 붕대를 감은 도진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에는 조소와 승리감이 가득 차 있었다.

 

"참으로 아름다운 인과의 조화 아닌가, 강우진?"

 

도진우의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울렸다.

 

"네가 성산대교에서 친구놈의 멱살을 잡고 끌어올린 그 순간, 방출된 42,000 엔트로피는 갈 곳을 잃었다. 시스템은 완벽한 평형을 원하지. 그래서 이 여자의 과거와 일상을 땔감으로 삼아 태워버린 거다."

 

우진은 서연을 등 뒤로 감추며 천천히 일어섰다.

 

손에 쥔 인과율 돌격소총의 총열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놈들이…… 처음부터 이걸 노리고 민규를 미끼로 던진 거였군."

 

"눈치가 빠르구나. 하지만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법이지."

 

도진우가 손목시계를 들어 보였다.

 

"현재 시각 자정 12시 38분. 역삼역 지하 7층 코어 챔버에서 네 아비의 뇌파가 정지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정확히 22분이다."

 

22분.

 

역삼역까지 차로 질주해도 최소 15분이 걸리는 거리였다.

 

"어디 선택해 봐라, K-07."

 

도진우가 비열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쓰러진 서연을 가리켰다.

 

"지금 당장 역삼역으로 달려가면, 어쩌면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네 아비 얼굴은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이에 여기 남겨진 한서연은 우리 손에 소거된다. 머리 위에 검은 세모가 떴으니, 5분 안에 심장마비든 실화든 깔끔하게 처분되겠지."

 

도진우의 말이 비수처럼 우진의 가슴에 꽂혔다.

 

"반대로, 이 여자를 지키기 위해 우리와 여기서 피를 흘린다면? 네 아비는 코어의 거대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뇌가 타버려 사망할 것이다. 그리고 그 빈자리는 우리가 준비해 둔 예비 프로세서가 차지하게 되겠지."

 

도진우가 한 걸음 다가서며 속삭였다.

 

"아비를 구할 텐가, 아니면 눈앞의 여자를 구할 텐가? 네가 자랑하는 그 빌어먹을 자유의지로 한번 골라봐라."

 

우진의 턱관절이 부서질 듯 맞물렸다.

 

잔인하도록 완벽한 시스템의 알고리즘.

 

우진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시스템은 결손을 메우고 승리를 거두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아버지를 구하면 서연 씨가 죽는다.'

 

'서연 씨를 구하면 아버지가 죽고, 또 다른 동포가 생체 부품으로 희생된다.'

 

서연이 바닥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우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우진 씨…… 날…… 날 두고 가요……."

 

서연이 피를 머금은 입술로 힘겹게 말을 쥐어짰다.

 

"난…… 난 괜찮으니까…… 아버님한테…… 가요…… 제발……."

 

그녀의 머리 위에서 검은 세모가 더욱 짙은 암흑을 뿜어내며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시스템 강제 덮어쓰기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것이다.

 

채린이 은빛 동그라미를 뿜어내며 그리드 오버라이더를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오빠, 내가 여길 막을게! 오빠는 역삼역으로 가!"

 

"안 돼, 채린아."

 

우진이 나직하게 가로막았다.

 

"너 혼자서는 도진우와 저 병력을 막아낼 수 없어. 오버라이더의 출력도 이미 한계야. 네가 남으면 둘 다 죽어."

 

도진우가 그 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시간이 없다, 강우진! 20분 남았다! 무릎을 꿇고 뇌간을 넘겨라. 그렇다면 최소한 네 아비의 뇌를 완전히 태우지는 않고 편안한 안식에 들게 해주마!"

 

6. 제3의 궤도

 

골목길을 채우는 빗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우진은 눈을 감았다.

 

관자놀이의 4cm 흉터에서 차가운 박동이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머릿속에서 아버지 강정호의 마지막 연구 노트 구절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네모는 질서이고, 세모는 파멸이며, 동그라미는 가능성이다.'

 

'하지만 우진아, 세상의 규칙은 그들이 정한 닫힌 루프(Loop)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그들이 양자택일을 강요할 때, 시스템이 제시한 선택지 자체를 부정해라.'

 

'아웃라이어는 궤도 위에 서는 자가 아니라, 궤도 자체를 지우는 자다.'

 

번쩍.

 

우진이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 속에 흔들리던 망설임이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서늘한 결의만이 푸른 불꽃처럼 타올랐다.

 

"도진우."

 

우진의 나지막한 부름에 도진우의 비웃음이 멈칫했다.

 

"네놈들은 언제나 똑같아. 모든 인간이 너희가 던져준 사각형의 바둑판 위에서만 움직일 거라 착각하지."

 

우진은 손에 들고 있던 인과율 돌격소총을 바닥에 내던졌다.

 

철커덩, 소리와 함께 총기가 빗물 웅덩이에 처박혔다.

 

도진우의 눈매가 찌푸려졌다.

 

"포기하겠다는 뜻인가?"

 

"아니."

 

우진이 품속에서 낡은 하드케이스 하나를 꺼내 들었다.

 

고양시 외곽 사당에서 어머니에게 건네받았던 아버지의 유품.

 

그리고 지하 4층에서 오르비스를 타격했던 마스터 해방 키, '프로메테우스'의 코어 크리스털이었다.

 

수정체 표면에서 은은한 백색과 자수정빛의 인과율 스파크가 튀고 있었다.

 

우진은 크리스털을 서연의 품에 쥐여주었다.

 

"우진 씨……?"

 

서연이 떨리는 눈으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우진은 서연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방화벽 백신의 푸른 회로가 뻗어 나와 서연의 이마를 타고 신경계로 흘러 들어갔다.

 

"서연 씨, 내 말 잘 들어요."

 

우진의 목소리는 파도 속의 바위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당신은 희생양도 아니고, 시스템의 결손을 메울 땔감도 아니야. 당신은 15년 전 진실을 세상에 밝히기로 맹세한 기자 한서연입니다."

 

찌르르릉!

 

우진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무형의 특이점 척력이 서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회전하던 검은 세모의 꼭짓점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크아악!"

 

도진우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우진이 방출한 인과율의 역류가 도진우의 머리 위 큐브를 직접 타격한 것이다.

 

"막아라! 사격해! 저놈을 당장 쏴 죽여!"

 

도진우의 광기 어린 비명과 함께 통제감사실 요원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우진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채린아! 그리드 오버라이더 최대 출력으로 전개해!"

 

"응!"

 

채린이 은빛 동그라미를 한계까지 회전시키며 오버라이더의 스위치를 올렸다.

 

반경 50미터 이내의 모든 공간에 짙은 백색 전파 교란 연무가 폭발하듯 번져나갔다.

 

기동대원들의 인과율 조준 센서가 붉은 에러를 뿜으며 먹통이 되었다.

 

그 혼란의 중심에서, 우진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골목길 끝, 빗길에 대기하고 있던 기동대의 SUV를 향해서가 아니었다.

 

서대문 사거리 방향, 지하로 이어지는 거대한 지하철 환기 통로 철창을 향해 몸을 던졌다.

 

"K-07이 도주한다! 쫓아!"

 

연무 너머로 고함이 터져 나왔지만, 우진의 몸은 이미 뜯겨 나간 환기구 철창 틈새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있었다.

 

지하 30미터, 서울 지하철 5호선과 2호선이 교차하는 지하 배수로 및 환기 터널.

 

지상의 도로가 막혔다면, 도시의 가장 깊은 동맥을 타고 달린다.

 

어둠 속으로 추락하며, 우진은 품속의 무전기를 움켜쥐었다.

 

[Node-0 Vital Alert: Remaining Time 18 Min]

 

18분.

 

아버지가 기다리는 역삼역 지하 7층 중앙 코어의 심장부를 향해, 강우진의 마지막 질주가 시작되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