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웃라이어의 저주
1. 사라진 도형과 스며드는 한기
지하 2층 벙커의 공기는 쇳가루와 낡은 기름 냄새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강우진은 벽면에 덧대어진 5밀리미터 두께의 구리 동판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관자놀이에 새겨진 4센티미터의 흉터가 불에 달군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지끈거렸다.
두통은 익숙했다.
언제나 시신경을 쥐어짜며 도형의 궤적을 억지로 분석할 때마다 찾아오던 반작용이었다.
하지만 지금 찾아온 감각은 이전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머리 위가 서늘했다.
마치 정수리 한가운데에 얼음장 같은 구멍이 뚫려, 그 틈으로 뼛속까지 시린 진공의 바람이 들이치는 기분이었다.
우진은 천천히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 위 허공을 매만졌다.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단순히 손에 잡히지 않는 문제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인간이 태어나 숨을 쉬는 순간부터 부여받는 기하학적 굴레, 그 억압적이면서도 안정적인 평면 네모가 사라져 있었다.
위기의 파동을 예고하던 붉은 세모도, 시스템의 규격을 거부하던 은빛 동그라미도 아니었다.
오르비스의 메인 콘솔이 과부하로 터져 나가며 뿜어냈던 마지막 붉은 에러 로그.
그 직후부터 그의 정수리 위에는 오직 텅 빈 공허만이 남았다.
존재의 좌표 자체가 지워져 버린 절대적인 무(無).
"우진아, 손 좀 대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함께 다가온 어머니가 우진의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콘솔 화재와 유리 파편으로 찢겨 피가 엉겨 붙은 손등이었다.
어머니는 떨리는 손길로 거즈를 덧대며 소독약을 부었다.
화끈거리는 고통이 신경을 타고 올라왔지만, 우진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고통보다 더 생생하게 그의 시야를 찌르는 것이 있었다.
우진이 어머니의 얼굴을 응시하자, 어머니의 정수리 위 약 10센티미터 상공에 은은하게 떠 있던 백색 네모가 보였다.
평생토록 거친 세월을 견디며 한 번도 반항하지 않고 일상을 버텨온 사람의 정직한 사각형.
그런데 그 사각형의 표면에 이상한 변화가 일고 있었다.
지직.
마치 영하 수십 도의 냉기가 닿은 유리창처럼, 백색 네모의 네 모서리에서부터 푸르스름한 성에가 끼어들고 있었다.
미세한 서리 노이즈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진의 손이 어머니의 살갗에 닿아 있는 동안, 어머니의 백색 네모 중심부에 거미줄 같은 실금이 아주 미세하게 번져 나갔다.
"……으응?"
어머니가 갑자기 숨을 들이켜며 어깨를 잘게 떨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춥지? 벙커 안인데 한기가 뼈까지 파고드는 것 같네."
어머니는 손등을 어루만지며 몸을 움츠렸다.
우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이 가까이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어머니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오르비스의 잔해 속에서 서지훈의 백업 영상이 지껄였던 그 서늘한 저주가 귓전을 때렸다.
'시스템의 궤도에서 완전히 튕겨 나간 아웃라이어는, 그 자체로 현실의 이물질이다.'
'세상 전체가 널 배척할 것이고, 네 곁에 머무는 모든 사람의 일상이 파멸로 끌려 들어갈 것이다.'
우진은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의 손을 조심스럽게 밀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어머니, 제가 혼자 붕대 감을게요."
"우진아?"
영문을 모르는 어머니가 붉어진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 메마른 눈동자 속에 담긴 걱정과 애정이, 지금의 우진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독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2. 거점 7번의 그림자
"우진 씨, 이리 와서 이것 좀 봐요."
벙커 한구석, 녹색 브라운관 모니터가 어지럽게 명멸하는 통신 콘솔 앞에서 한서연이 손짓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해직 언론인들이 지탱하는 P2P 독립 방송망을 통해 넥스트 큐브의 채용 비리와 H-스퀘어의 실체를 라이브로 폭로한 지 벌써 세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우진은 서연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가서는 순간, 우진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서연의 머리 위로 향했다.
서연의 정수리 위에도 백색 네모가 떠 있었다.
언론인으로서의 집념과 진실을 향한 의지로 단단하게 각진 형태를 유지하던 그 네모.
하지만 그녀의 네모 역시 안전하지 않았다.
우진이 보폭을 좁힐 때마다 서연의 백색 네모 테두리가 미세하게 떨리며, 모서리 끝이 검붉게 물들 듯 바스러지고 있었다.
시스템의 격자망이 지워진 우진이라는 '오차'를 밀어내기 위해, 그와 인접한 모든 정상 궤도에 인과율의 마찰열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었다.
우진은 서연과 1미터가량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다.
"방송 반응이 이상해요."
서연이 모니터 화면을 가리키며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화면에는 전국 주요 포털과 언론사의 실시간 검색어, 그리고 금융 감독망의 공시 피드가 어지럽게 갱신되고 있었다.
분명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독립 방송 '미디어 고발'의 동시 접속자가 80만 명을 돌파하며 여론이 들끓었었다.
테헤란로 한복판에 위치한 넥스트 큐브 본사가 폭발로 무너져 내리고, 공채 면접이 조작되었다는 증언이 터져 나왔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지금, 화면 속 흐름은 기괴할 정도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에서 넥스트 큐브와 관련된 모든 단어가 5분 만에 완전히 사라졌어요."
서연이 자판을 두드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단순한 검색어 삭제가 아니에요. SNS와 커뮤니티에 올라왔던 수십만 건의 시청 후기와 영상 클립들이 순식간에 '존재하지 않는 페이지'로 바뀌고 있어요. 포털 서버 전체에 특정 해시태그를 지워버리는 알고리즘 필터가 걸렸어요."
"분산 백업 코어의 짓인가요?"
우진이 낮게 물었다.
서연의 옆에서 진공관 무전기의 다이얼을 미세하게 조정하던 한민우 부소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백발이 희끗희끗한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단순한 전산 조작 수준이 아니야. 이건 시스템이 가동하는 '면역 반응'이다."
한민우가 낡은 스피커를 툭툭 치며 말했다.
"오르비스라는 메인 심장이 멈췄지만, 이 거대한 도시는 15년 동안 넥스트 큐브가 깔아놓은 사각 격자망에 완벽하게 길들여져 있어. 시스템의 통제 밖으로 튕겨 나간 자를 목격하면, 도시는 그 진실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자를 '바이러스'로 규정하고 사회적으로 매장해 버린다. 대중의 뇌리에 닿지 못하도록 감각 자체를 차단하는 거지."
그때 모니터 한구석에서 붉은색 경고창이 깜빡였다.
[미디어 고발 : 해외 백업 서버 03 강제 세션 종료]
[미디어 고발 : 국내 프록시 노드 전체 트래픽 차단 - 사유 : 불법 테러 선동물 유포]
"이럴 수가……."
서연이 허탈하게 탄식했다.
"방송을 송출하던 최진석 선배의 해외 서버 IP가 통째로 차단당했어요. 방통위와 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공조해서 테러 방지법을 적용했대요. 우리를 진실을 밝힌 내부고발자가 아니라, 국가 기간망을 마비시킨 사이버 테러리스트로 규정했어요."
모니터에 뜬 긴급 속보 창에는 서연과 우진, 그리고 채린의 사진이 나란히 올라와 있었다.
[속보: 테헤란로 벤처 타워 연쇄 폭발 및 화재 사건 주의보]
[경찰, 대기업 전산망 해킹 및 사옥 방화 용의자 3명 공개 수배…… 시민 제보 당부]
언론망 락이 풀려 진실이 세상 밖으로 터져 나왔다고 믿었던 순간, 세상은 오히려 거대한 벽을 세워 그들을 가두어버렸다.
진실을 말하는 입을 틀어막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입을 괴물의 입으로 둔갑시키는 것이었다.
우진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지나가는 듯했다.
자신이 시스템의 수식을 벗어난 'Error: ?'라는 특이점이 된 대가.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세상이라는 거대한 기계 장치로부터 완벽하게 잘려 나가는 파문 선고였다.
3. 조여오는 고립의 그물
탁, 타닥.
벙커 한편에 놓인 간이침대에서 밭은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윤채린이었다.
채린은 땀에 젖은 이마를 짚은 채 벽을 짚고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의 낯빛은 백지장처럼 창백했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채린 씨, 누워 있어요. 아직 움직이면 안 됩니다."
우진이 다급히 다가가려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자신이 다가갈 때마다 주변 사람들의 궤도가 일그러지던 그 끔찍한 잔상이 발을 묶었다.
하지만 채린은 흔들리는 눈으로 우진을 바라보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아저씨. 내 몸뚱이는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채린의 머리 위, 가녀린 숨결에 맞춰 떠오른 은빛 동그라미가 보였다.
본래 주변의 사각 격자를 부드럽게 밀어내며 은은하고 영롱한 빛을 뿜어내던 그 원환.
그러나 지금 채린의 동그라미는 위태로웠다.
원환의 둘레를 따라 차가운 얼음 송곳 같은 검은 노이즈가 다닥다닥 달라붙어 회전을 방해하고 있었다.
원환이 한 바퀴 돌 때마다 삐걱거리는 마찰음이 우진의 귓전에 환청처럼 울렸다.
채린이 목덜미의 생체 제어 소켓을 문지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세상이…… 날 밀어내고 있어요. 아저씨도 느껴지죠?"
"채린 씨."
"오르비스가 깨졌을 때, 잠깐이지만 속이 후련했어요. 이제 끝났구나, 15년 동안 날 옥죄던 그 징그러운 네모 상자가 부서졌구나 싶었죠. 그런데 아니에요. 상자가 깨지니까…… 바깥바람이 너무 차가워요.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에 유리 조각이 들어오는 것 같아요."
채린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고통을 참아냈다.
그녀가 겪고 있는 고통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었다.
세상의 인과율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거대한 관성.
수천만 명의 운명이 질서정연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이 사회라는 톱니바퀴 속에서, 궤도를 완전히 이탈해 버린 이물질들을 짓이기려는 현실의 거부 반응이었다.
"그리드 오버라이더를 확인해 봤어요."
채린이 바닥에 놓인 검은색 가방을 가리켰다.
그 안에는 윤상혁 연구원이 남겼던 인과율 펄스 발생기가 들어 있었다.
"내부 소자가 반쯤 타버렸어요. 테헤란로에서 양자 분배기를 터뜨릴 때 아저씨의 백신하고 너무 강하게 공명했나 봐요. 이제…… 남은 출력으로는 기껏해야 한 번, 반경 100미터도 채 못 버틸 거예요."
무기조차 마모되어 가고 있었다.
더욱 절망적인 것은 시간이었다.
콘솔 테이블 위에 놓인 구형 브라운관 모니터 상단, 붉은색 디지털 숫자가 1초 단위로 줄어들고 있었다.
[142 : 18]
[142 : 17]
도진우가 파주 벙커의 아날로그 회선을 역추적해 강제로 띄워놓은 카운트다운.
부친 강정호의 심장이 멎기까지 남은 시간.
역삼역 지하 7층 코어 챔버에 매몰된 채, 넥스트 큐브 본사가 폭파되며 발생한 천문학적인 결손 엔트로피를 온몸의 신경망으로 받아내고 있는 아버지의 생체 프로세서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
우진이 낮게 중얼거렸다.
그때, 벙커 바깥으로 연결된 배기 닥트 너머에서 둔탁한 소음이 들려왔다.
철컥, 철커덕.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무거운 군화가 자갈밭을 짓밟는 규칙적인 발소리.
그리고 무전기에서 새어 나오는 차가운 잡음.
"……왔군."
콘솔을 조작하던 한민우 부소장의 손이 굳어졌다.
그는 황급히 모니터의 화면을 외부 감시 카메라로 전환했다.
문산천 제방도로를 따라 늘어선 낡은 섬유 염색 공장 주변.
비가 그친 새벽안개 속에서, 번호판이 없는 검은색 승합차 네 대가 공장 정문을 소리 없이 포위하고 있었다.
차량 문이 열리며 쏟아져 나온 자들은 경찰이나 소방관이 아니었다.
검은색 방탄복을 입고, 얼굴을 기괴한 카본 마스크로 가린 자들.
그들의 정수리 위에는 한 치의 오차도, 미세한 진동도 없이 굳어 있는 '고정된 검은 네모'가 떠 있었다.
넥스트 큐브 통제감사실 직속의 청소 기동대였다.
그리고 그들의 선두에 선 남자.
도진우 수석 감사관이었다.
도진우는 한쪽 눈에 기계식 인과율 계측기를 착용한 채, 공장 건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는 네모난 큐브가 4차원 다포체 형태로 기괴하게 뒤틀리며, 핏빛 같은 붉은 잔상을 토해내고 있었다.
4. 거부당한 세계의 폭력
"어떻게 벌써 여길 찾아낸 거지?"
서연이 사색이 되어 외쳤다.
"이곳은 15년 전부터 완벽한 패러데이 케이지로 차폐된 아날로그 은신처라고 하셨잖아요! 외부 전파도, 위성 스캔도 닿지 않는 곳인데!"
"전파를 추적한 게 아니다."
우진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엉겨 붙은 핏자국 사이로 푸르스름한 인과율의 잔류 파동이 일렁이고 있었다.
"내가 원인이야."
"네?"
"내 머리 위에서 도형이 사라진 순간부터, 난 이 공간의 균형을 깨뜨리는 거대한 구멍이 됐어. 5밀리미터 구리판으로 전파를 막을 수는 있어도, 공간 자체가 비틀리며 발생하는 엔트로피의 공백은 숨길 수 없어. 그들은 신호를 쫓아온 게 아니라, 지도에서 갑자기 먹칠을 한 것처럼 지워져 버린 '결손의 좌표'를 따라온 거야."
아웃라이어의 저주.
규격을 벗어난 자는 숨을 쉴 수도, 몸을 숨길 수도 없었다.
존재하는 것 자체가 세계의 질서에 구멍을 뚫는 행위였기에, 시스템은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모든 추적 자원을 빨아들이듯 집중시키는 것이었다.
쿠웅!
지하 2층 벙커로 이어지는 지상 출입구 철문이 거대한 충격과 함께 안쪽으로 우그러졌다.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의 광탄이 문틈을 찢고 들어오며 푸른 불꽃을 튀겼다.
치이익!
두꺼운 철판이 고열과 공간 왜곡을 견디지 못하고 엿가락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민우야, 서연이와 채린이를 데리고 환기 수로로 빠져나가라!"
한민우 부소장이 허리춤에서 낡은 리볼버 권총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그의 눈빛에 비장한 결의가 번뜩였다.
"수로 끝이 문산천 제방 수문과 연결되어 있다. 거긴 아직 저놈들의 포위망이 닿지 않았어!"
"안 돼요, 아저씨 혼자선 저 괴물들을 막을 수 없어요!"
채린이 비틀거리며 부소장의 팔을 붙잡았다.
하지만 한민우는 거칠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15년 전에 죽었어야 할 목숨이다. 정호가 혼자 코어로 걸어 들어갈 때, 난 비겁하게 살아남아 이 쥐구멍 같은 곳에 숨어 있었어. 이제 빚을 갚을 때다."
"아닙니다."
우진이 한민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우진의 눈동자는 서늘할 정도로 맑게 가라앉아 있었다.
두통은 여전했고, 정수리를 파고드는 한기는 뼛속까지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지만, 그의 신경계는 비정상적일 만큼 명징하게 깨어나고 있었다.
"도진우의 목표는 부소장님도, 서연 씨도 아닙니다. 접니다."
우진이 콘솔 위에 놓여 있던 묵직한 충격 바톤을 쥐었다.
"그들은 날 죽이려는 게 아니에요. 오르비스의 방정식을 거부한 내 뇌파와 신경망을 산 채로 뜯어내 복제하려는 겁니다. 내가 미끼가 되어 지상으로 나가겠습니다."
"우진아, 안 된다!"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우진의 옷자락을 낚아챘다.
"절대로 못 보낸다! 15년 전에도 네 아버지가 그렇게 문을 닫고 나갔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단 말이다! 너까지 잃으면 난…… 난 어떻게 살라고!"
어머니의 절규가 좁은 벙커 안을 가득 메웠다.
우진의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우진은 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머니가 자신을 붙잡고 있는 그 짧은 순간에도, 어머니의 머리 위 백색 네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리 노이즈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이대로 함께 있으면 모두가 죽는다.
도진우의 총에 맞아 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존재가 내뿜는 아웃라이어의 척력에 휘말려 일상이 갈가리 찢겨 나갈 터였다.
우진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어머니의 손을 떼어냈다.
"어머니, 아버지는 절 버린 게 아니었어요. 15년 동안 그 차가운 기계 속에서 절 지키고 계셨습니다."
우진이 어머니의 젖은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에 어머니가 잘게 떨었지만, 우진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제 제가 아버지를 데려올게요. 그러니까…… 제발 살아 계세요."
우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벙커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우진 씨!"
서연이 그를 불렀다.
그녀의 눈동자에 고인 눈물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우진은 멈춰 서서 서연을 돌아보았다.
"서연 씨, 방송을 멈추지 마세요. 시스템이 차단하면 다른 길을 찾으세요. 진실을 아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늘어나야, 세상의 사각 격자에 금이 갑니다."
"……반드시 살아남아요. 역삼역에서, 당신을 기다릴 테니까."
서연의 떨리는 목소리를 뒤로하고, 우진은 녹아내린 방폭 셔터의 틈새로 몸을 던졌다.
5. 파주의 혈투
지상으로 올라서는 순간, 빗물을 머금은 새벽안개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버려진 섬유 염색 공장의 넓은 마당.
바닥에 고인 웅덩이 위로 잿빛 하늘이 비치고 있었다.
철컥.
공장 마당을 가득 메운 수십 정의 소총이 일제히 우진을 겨누었다.
인과율 집속 돌격소총의 총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의 스파크가 허공을 지직거리며 갈랐다.
"반갑군, 대상자 001. 아니, 이제는 'K-07'이라고 불러야 하나?"
안개 너머에서 도진우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입가에는 비틀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도진우의 머리 위, 4차원 형태로 역회전하는 붉은 큐브가 우진을 향해 무수한 제어 코드를 방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붉은 빛줄기들은 우진의 몸에 닿는 순간, 마치 보이지 않는 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맥없이 흩어져 버렸다.
도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역시…… 소문대로군. 머리 위의 기하학체가 완전히 지워졌어. 네모도, 세모도, 심지어 그 건방진 동그라미조차 아니야. 완전한 수식의 부재. 오르비스가 널 해석하지 못하고 붕괴한 이유를 이제야 알겠어."
도진우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강우진. 네가 시스템을 이긴 게 아니다. 넌 그저 궤도에서 탈선해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있는 고철 덩어리에 불과해."
"말이 많군, 도진우."
우진이 충격 바톤의 스위치를 올렸다.
바톤 끝에서 파열음과 함께 고전압 스파크가 튀었다.
"네 머리 위의 그 흉측한 상자나 걱정해라. 꼭짓점이 부스러지고 있더군. 서지훈처럼 용도 폐기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지?"
도진우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정곡을 찔린 자 특유의 살의가 그의 눈동자에 번뜩였다.
"사지를 부러뜨려라. 숨만 붙어 있으면 뇌파를 추출하는 데 아무 지장 없다. 사격 개시!"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십여 명의 기동대원들이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콰아아앙!
공간을 찢는 굉음과 함께 푸른빛의 인과율 광탄들이 빗발처럼 쏟아져 내렸다.
일반적인 인간이라면 그 광탄의 파동에 닿는 것만으로도 머리 위 궤도망이 붕괴하며 뇌사 상태에 빠졌을 터였다.
하지만 우진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2단계, 변화 감지.
시신경이 타오르는 듯한 열기와 함께, 우진의 망막 위로 푸른빛의 궤적선들이 어지럽게 펼쳐졌다.
적들이 방아쇠를 당기기 0.3초 전의 탄도.
기계화된 단말 개체들이 지닌 숙명적인 한계, 중앙 통제 시스템의 명령이 신경계를 거쳐 근육으로 전달되기까지 발생하는 '0.3초의 인과율 지연 시간'.
그 틈새가 우진의 눈에는 대낮처럼 훤히 들여다보였다.
우진은 몸을 비틀며 첫 번째 탄환의 궤적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다.
발밑의 웅덩이가 폭발하며 흙탕물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타앙!
우진은 튀어 오른 흙탕물을 방패 삼아 앞으로 쇄도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기동대원이 당황하며 소총의 총구를 돌리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우진의 충격 바톤이 대원의 오른쪽 어깨 관절부를 정확하게 타격했다.
빠각!
단순한 물리적 타격이 아니었다.
우진의 신경계에 각인된 방화벽 백신의 역위상 패킷이 바톤을 타고 대원의 체내 제어 칩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크아악!"
대원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고정된 검은 네모'가 격렬하게 진동하더니, 이내 퍽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산산조각 났다.
동기화 회로가 쇼트된 대원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거리 벌려! 놈의 접근을 허용하지 마라!"
도진우가 고함을 질렀다.
나머지 대원들이 산개하며 일제히 우진을 포위하려 했다.
하지만 우진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이미 대원들의 몸 너머, 그들의 관절과 뼈마디에 맺힌 희미한 자수정빛 궤적을 쫓고 있었다.
4단계, 과거 추적.
시간 축을 역행하는 우진의 시선이 적들의 신체적 이력을 꿰뚫었다.
왼쪽 대원은 3년 전 작전 중 입은 쇄골 골절의 피로도가 누적되어 있었고, 오른쪽 대원은 목덜미의 생체 소켓 접속부가 헐거워져 있었다.
시스템이 아무리 기계처럼 개조했어도, 인간의 육체에 새겨진 과거의 상흔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우진은 낮게 몸을 웅크리며 왼쪽 대원의 하체를 걷어찼다.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는 대원의 쇄골 부위를 팔꿈치로 찍어 누르자, 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무력화되었다.
이어 반동을 이용해 몸을 회전시키며 오른쪽 대원의 목덜미 소켓에 충격 바톤의 끝을 쑤셔 넣었다.
지지직!
푸른 불꽃이 튀며 또 하나의 검은 네모가 파열되었다.
단 5초 만에 세 명의 기동대원이 바닥에 쓰러졌다.
"괴물 같은 새끼가……!"
도진우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허리춤에서 권총 형태의 인과율 집속 병기를 뽑아 들었다.
단순한 광탄이 아니었다.
총구 끝에 응축된 에너지는 공간 자체를 비틀며 검붉은 블랙홀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네놈이 수식을 벗어났다고 해서, 물리적인 파괴까지 거부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도진우가 방아쇠를 당겼다.
콰르릉!
지금까지의 광탄과는 궤를 달리하는 거대한 인과율의 격자 파동이 우진을 향해 쇄도했다.
피할 수 있는 각도가 아니었다.
탄환이 날아오는 궤적 전체가 공간을 짓누르며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우진은 피하는 대신 오른손을 앞으로 뻗었다.
프로메테우스의 마스터 코드가 각인된 손바닥.
그리고 그의 가슴속에서, 15년 동안 자신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아버지의 기억이 용솟음쳤다.
'우진아, 사각형의 틀에 갇히지 마라.'
'세상이 널 규정하려 할 때, 너만의 궤적을 그려라.'
우진의 정수리 위, 텅 비어 있던 허공에서 은빛의 스파크가 튀었다.
도형은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 시스템의 격자망 자체를 거부하는 절대적인 척력의 파동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쿠구구구궁!
도진우가 쏜 검붉은 인과율 탄환이 우진의 코앞 30센티미터 허공에서 맹렬한 굉음을 내며 우뚝 멈춰 섰다.
공간이 유리창처럼 찌그러지며 은빛과 붉은빛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뭐라고?!"
도진우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아무런 기하학체도 띄우지 않은 인간이, 시스템의 최상위 집속 에너지를 순수한 척력만으로 공중에서 정지시킨 것이었다.
우진이 피투성이가 된 입술을 비틀며 낮게 읊조렸다.
"이게…… 네놈들이 말하는 '버그'의 힘이다."
쩌저적!
우진이 손을 움켜쥐자, 허공에 멈춰 서 있던 검붉은 탄환이 인과율의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산산조각 나며 역류했다.
콰앙!
폭발의 충격파가 도진우를 덮쳤다.
도진우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고,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4차원 붉은 큐브에 깊은 균열이 가며 검은 피 같은 데이터가 흘러내렸다.
"크아악! 잡아라! 쏴라! 사지를 찢어서라도 저놈을 잡아!"
진흙탕에 처박힌 도진우가 발악하듯 소리쳤다.
남은 기동대원들이 사격을 재개하려 했지만, 이미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마당 한구석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부르르릉!
공장 측면의 담벼락을 부수며 1톤 탑차가 튀어나왔다.
화물차 기사였다.
조수석 문이 활짝 열리며 기사가 소리쳤다.
"우진 씨! 타요! 어서!"
우진은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려 탑차의 적재함에 올라탔다.
탕!
타다당!
차체 뒤편으로 수십 발의 탄환이 튕겨 나갔지만, 화물차는 가속페달을 밟으며 문산천 제방도로를 향해 쏜살같이 질주했다.
6. 고립의 덫
탑차는 빗길을 가르며 서울을 향해 내달렸다.
차량 안에는 묵직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운전대를 쥔 화물차 기사는 백미러로 우진의 상태를 살피며 마른침을 삼켰다.
"우진 씨, 괜찮아요? 피를 너무 많이 흘리는데……."
"괜찮습니다."
우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찢어진 옷소매로 팔의 상처를 동여맸다.
적재함 구석에는 한민우 부소장이 챙겨준 구형 무전기와 비상용 의료 키트가 실려 있었다.
지하 환기 수로로 탈출했던 어머니와 서연, 채린은 부소장의 안내를 받아 다른 아날로그 루트로 이동 중일 터였다.
그들이 무사히 빠져나갔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우진의 마음은 납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치익, 치지직.
조수석 대시보드에 올려둔 스마트폰에서 기괴한 노이즈가 새어 나왔다.
화면이 멋대로 켜지더니, 메신저와 통화 앱에 붉은색 알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알림: 강우진 님의 은행 계좌가 금융사기 및 테러 자금 동결법에 의해 전면 지급 정지되었습니다.]
[알림: 태성C&I 인사팀 - 사원 강우진에 대한 직권면직 및 징계파면 처분 통보]
[알림: 서울중앙지검 -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및 국가보안법 위반 피의자 출석 요구서 발송]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우진의 연락처에 등록된 오랜 지인들의 이름이 화면에 떠올랐다.
대학 동창, 이전 직장 동료, 가깝게 지내던 거래처 대리.
그들의 프로필 사진이 하나둘씩 먹칠을 한 것처럼 검은색으로 변하더니, 이내 '탈퇴한 사용자' 혹은 '차단된 번호'로 전환되었다.
시스템이 우진이라는 인간의 사회적 혈관을 하나하나 잘라내고 있었다.
그가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 그가 세상과 맺어왔던 모든 관계와 흔적들이 알고리즘의 칼날 아래 지워져 나갔다.
띠리링.
그때, 화면에 낯익은 이름 하나가 떴다.
[이진혁]
태성C&I 최종 면접장에서 우진의 도움으로 궤도를 뒤틀고 백색 세모를 띄웠던 청년.
우진은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진혁 씨?"
- 대리님……!
대리님 맞으시죠?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진혁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떨리고 있었다.
주변에서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섞여 들려왔다.
- 대리님, 지금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회사에 경찰들이 들이닥쳤어요!
감사팀이랑 형사들이 절 취조실로 끌고 가더니, 제가 대리님과 공모해서 사내망을 해킹했다고……!
"진혁 씨, 진정해요. 그 사람들 말 듣지 말고 당장 회사에서 나와요."
- 못 나가요!
제 계좌도 전부 묶였고, 방금 채용 취소 통보가 날아왔어요!
저뿐만이 아니에요.
대리님과 같은 팀이었던 김 주임님도 방금 횡령 혐의로 긴급 체포됐다고요!
쿠웅.
우진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 대리님…… 왜 저한테 이러셨어요?
제가 뭘 잘못했길래…… 제 인생이 왜 이렇게 된 겁니까?
예?!
저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라고요!
통화는 거친 비명과 함께 뚝 끊겼다.
치이익 하는 공허한 기계음만이 귓가를 맴돌았다.
우진은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자신이 구원했다고 믿었던 사람들.
자신이 개입해 궤도를 바꾸어주었다고 안도했던 그 평범한 이웃들의 삶이, 시스템의 무자비한 '연좌제'에 걸려 차례대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아웃라이어의 저주는 단순히 당사자를 고립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 아웃라이어와 단 한 번이라도 인과를 맺었던 모든 주변인의 일상을 철저하게 짓밟아, 결국 그 아웃라이어 스스로가 죄책감에 짓눌려 자멸하도록 만드는 가장 잔인한 심리적 교수대였다.
"우진 씨……."
백미러로 우진의 굳어진 얼굴을 보던 화물차 기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무 자책하지 마요. 저놈들이 미친 거지, 당신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아닙니다, 기사님."
우진이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지만, 그 밑바닥에는 용암처럼 뜨거운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시스템이 원하는 게 바로 이겁니다."
우진은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탑차는 어느새 올림픽대로를 지나 여의도를 거쳐, 저 멀리 테헤란로의 빌딩 숲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비구름이 걷히며 드러난 서울 상공.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우진의 눈에는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사각형의 격자망이 선명하게 보였다.
수백만 명의 머리 위로 연결된 보이지 않는 꼭두각시 줄.
언론을 통제하고, 일상을 조작하며, 자신들의 규칙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을 가차 없이 쓰레기통에 처넣는 거대한 감옥.
그 감옥의 심장부가 바로 저곳에 있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역삼역.
그 지하 7층 암반 속에 갇힌 채 15년 동안 아들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있던 아버지.
[087 : 45]
구형 단말기의 카운트다운은 이제 한 시간 반 남짓을 가리키고 있었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세상이 자신을 이물질로 규정하고 배척한다면, 그 세상을 옥죄고 있는 사각 격자망의 심장을 뜯어내는 수밖에 없었다.
"기사님, 속도를 올려주세요."
우진이 충격 바톤을 단단히 고쳐 쥐며 말했다.
"역삼역으로 갑니다."
탑차의 바퀴가 거친 굉음을 내며 테헤란로의 콘크리트 정글 속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