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센터 탈출
1. 붕괴하는 격자망
지하 4층 통제 홀의 거대한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던 공기가 비명을 지르듯 찢겨 나갔다.
머리 위 30미터 상공에 떠 있던 거대한 구형 3D 홀로그램, 전 인류 인생 궤도 시뮬레이터 오르비스의 중심부가 검붉은 불꽃과 함께 비틀리기 시작했다.
메인 콘솔에 틀어박힌 은빛 크리스털, 프로메테우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색 척력 파동이 수만 가닥의 사각 격자 라인을 자비 없이 뜯어내고 있었다.
타다다당, 콰아앙!
강우진(姜宇鎭)의 망막 위로 투사되던 붉은 에러 로그 'Error: ?'가 수천 개의 잔상으로 흩뿌려지며 유리 파편처럼 콘솔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지하 암반 전체가 마치 대형 지진이라도 맞닥뜨린 것처럼 맹렬하게 요동쳤다.
천장에 매설된 초고압 냉각 라인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파열되며 희뿌연 액체 질소 안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시야가 순식간에 차가운 백색 암흑으로 뒤덮였다.
우진은 왼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리는 끈적한 핏물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플라스마 칼날을 맨손으로 받아낸 대가로 살점이 타들어가고 신경이 비명을 질렀지만, 지금은 고통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강민우를 향했다.
민우의 정수리 위에서 칠흑처럼 맴돌던 기괴한 검은 동그라미는 이미 산산조각 나 허공으로 흩어진 뒤였다.
그 자리에는 희미하지만 티 없이 맑은 백색의 사각형 윤곽이 떨리는 숨결에 맞춰 조심스럽게 떠올라 있었다.
15년 동안 뇌간을 짓누르던 체내 소각 자폭 프로토콜이 백신 코드와 은빛 척력의 공명에 의해 마침내 영구 차단된 것이었다.
"민우 형, 정신 차려요! 일어설 수 있겠어?"
우진이 다가가 민우의 앙상한 어깨를 부축했다.
민우의 초점 없던 동공이 천천히 흔들리며 우진의 얼굴을 담아냈다.
15년 전, 테헤란로의 연구소에서 제 손을 잡고 과자를 나눠 먹던 일곱 살 어린아이의 잔상이 겹쳐졌는지 민우의 메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우…… 진아…… 정말 너야……? 나,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형이 한 게 아니에요. 전부 저 빌어먹을 시스템이 한 짓이야. 자책할 시간 없어요. 여길 빠져나가야 해."
우진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으며 민우의 팔을 자신의 어깨 위로 둘렀다.
그 순간, 자욱한 질소 안개 너머에서 날카로운 금속음과 함께 윤채린(尹採麟)의 긴박한 외침이 터져 나왔다.
"우진 씨! 서둘러요! 중앙 엘리베이터 샤프트 쪽에서 반응이 감지돼요! 한두 명이 아니에요!"
채린이 권총을 겨눈 채 안개 속을 경계하며 빠르게 후퇴해 왔다.
그녀의 은빛 동그라미가 정수리 위에서 팽이처럼 빠르게 회전하며 주변의 전자기 스캔을 밀어내고 있었지만, 그 표면에는 미세한 핏빛 불꽃이 튀고 있었다.
중앙 코어가 파괴되며 방출된 막대한 잉여 인과율 파동이 공간 전체를 짓누르고 있는 탓이었다.
끼이이익―!
육중한 방폭 셔터가 찌그러지는 끔찍한 파열음과 함께, 지하 4층 중앙 홀로 진입하는 세 개의 통로에서 붉은 경광등이 일제히 점등되었다.
[경고: 침입자 격리 프로토콜 가동.]
[중앙 데이터 코어 멜트다운 위험 감지.
시스템 수석 감사실 직속 비상 방어 부대 진입.]
[명령 코드 갱신: 타깃 K-07에 대한 사살 명령을 일시 유예함.]
천장에 매달린 비상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기계음이 기괴하게 변조되며 홀 전체를 울렸다.
이어 스피커 너머로 차갑게 가라앉은 익숙한 목소리가 낮게 깔려 들어왔다.
도진우(都鎭宇)였다.
"어리석은 짓을 했군, 강우진. 오르비스를 부순다고 해서 이 거대한 섭리가 멈출 것 같았나?"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도진우의 음성에는 본사 코어가 박살 난 자의 당혹감 대신, 독기를 머금은 집착이 서려 있었다.
"Error: ?…… 감히 계산식의 해(解)를 거부해? 하지만 상관없다. 너라는 돌연변이의 신경망과 뇌파 패턴을 온전히 추출해 낼 수만 있다면, 오르비스의 결손 따위는 백 번이고 다시 메울 수 있으니까."
치지직거리는 잡음 사이로 도진우의 잔혹한 명령이 하달되었다.
"전 부대에 하달한다. 타깃 K-07 강우진의 사살을 금한다. 사지를 절단하더라도 뇌간과 중추신경계는 온전히 보존하라. 최우선 목표는 '생포'다. 지금 즉시 K-07을 포획해 생체 추출 챔버로 압송하라!"
2. 사각의 포위망
"생포……?"
우진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혀졌다.
방금 전까지 오염 노드라며 가차 없이 영구 소거를 명령하던 놈들이었다.
그러나 오르비스에서 자신의 존재가 'Error: ?'라는 절대적 특이점으로 증명되자마자, 시스템은 자신을 제거 대상에서 연구 및 복제 대상으로 재분류한 것이었다.
우진의 뇌파 패턴을 복제하여 시스템의 결함을 보완하고 새로운 통제 알고리즘의 거름으로 삼겠다는 노골적인 탐욕이었다.
"미친놈들…… 끝까지 사람을 부품 취급하는군."
우진이 피 묻은 입술을 비틀며 중얼거렸다.
그때 쾅 하는 굉음과 함께 통제 홀 정면의 특수 합금 방폭문이 뜯겨 나가듯 열렸다.
희뿌연 연무를 뚫고 쏟아져 들어온 것은 넥스트 큐브 본사 직속의 기계화 보안 타격대였다.
완전 무장한 검은 전술 방탄복을 입은 자들이 일사불란하게 산개하며 홀의 출구들을 차단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고정된 검은 네모(■)'가 불길한 칠흑빛을 발하고 있었다.
중앙 통제 시스템에 뇌간을 100% 동기화당해 오직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기계화 인간들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타격대의 뒤편, 짙은 어둠 속에서 세 개의 기괴한 인영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쿵, 쿵, 쿵.
발걸음 하나하나가 바닥의 균열을 더 깊게 찢어발겼다.
그들의 정수리 위에는 완벽한 원형의 암흑, 주변의 모든 빛과 공기를 빨아들이는 듯한 '검은 동그라미(●)'가 고요히 떠 있었다.
민도현, 그리고 방금 구출한 강민우와 같은 처지였던 자들.
15년 전 연구소에서 납치되어 살상 알고리즘만을 주입당한 피실험자 병기, '블랙 큐브 알파'의 잔여 개체들이었다.
[Subject-04: 이서진]
[Subject-06: 박태호]
[Subject-07: 최영훈]
그들의 초점 없는 눈동자는 우진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고, 손에 쥐어진 인과율 집속 화기에는 서늘한 푸른빛이 충전되고 있었다.
자체 내장된 전투 시뮬레이터로 움직이는 자들이기에, 상위 시스템의 명령 지연 시간인 0.3초의 병목조차 존재하지 않는 최악의 살상 기계들이었다.
"우진 씨, 저 사람들…… 민우 씨랑 똑같은……."
채린이 총구를 쥔 손을 바르르 떨었다.
차마 같은 처지의 동포들에게 방아쇠를 당길 수 없다는 고통이 그녀의 눈동자에 어렸다.
"알아. 저들도 피해자야. 하지만 지금은 그들을 전부 제압하고 풀어줄 여유가 없어."
우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민우 한 명의 세뇌를 풀고 자폭 코드를 해제하는 데만도 우진의 모든 신경계와 백신 코드가 과부하에 걸릴 지경이었다.
세 명의 피실험자 병기와 수십 명의 기계화 타격대를 동시에 상대하며 빠져나가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더군다나 민우는 지금 한 발자국을 떼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탈진 상태였다.
"어떻게 할까요? 출구가 전부 막혔어요. 지하 3층 하역장으로 통하는 비상 계단로는 이미 저들이 차단했어요!"
채린이 통제 홀 좌우를 살피며 다급하게 물었다.
우진은 관자놀이의 4cm 수술 흉터가 찢어질 듯 맥동하는 것을 느끼며 시선을 들었다.
지끈거리는 맹렬한 두통과 함께 시야가 푸르스름하게 번져 나갔다.
능력 2단계, '변화 감지'.
우진의 망막에 적들이 움직일 미래 경로가 반투명한 푸른 궤적선으로 어지럽게 얽혀 들기 시작했다.
블랙 큐브 알파 3명의 동선은 0.1초의 오차도 없이 우진의 퇴로를 에워싸고 있었고, 24명의 보안 요원들은 우진의 팔다리를 노려 비살상 인과율 올가미 탄을 장전하고 있었다.
정면 돌파는 전멸이었다.
하지만 우진의 눈은 적들의 총구가 아닌, 그들의 뒤편 벽체에 매설된 거대한 냉각 파이프와 지하 4층의 심장부로 향했다.
오르비스 홀로그램 생성기 바로 아래, 지름 5미터에 달하는 원통형 메인 양자 냉각 분배기가 위태롭게 붉은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 분배기 안쪽에는 본사 지하 전체의 서버 랙을 냉각하기 위한 수백 리터의 초저온 액체 헬륨과 고압 전력선이 한데 엉켜 있었다.
"퇴로를 뚫으려 하지 마."
우진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채린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나갈 길을 만드는 게 아니라, 저놈들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바닥을 통째로 꺼뜨려야 해."
"설마…… 냉각 분배기를……?"
채린의 눈이 커졌다.
저걸 건드렸다간 단순한 폭발로 끝나지 않는다.
초고압 전류와 영하 269도의 액체 헬륨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발생하는 연쇄 쇼트는 지하 4층 서버실 절반을 물리적으로 증발시킬 터였다.
"저건 단순한 기계가 아니야. 오르비스의 잔류 인과율 패킷이 여전히 저 분배기를 통해 역류하고 있어."
우진의 눈동자 속에 푸른빛과 은빛이 뒤섞이며 타올랐다.
"거기에 내 백신 코드와 채린 씨의 척력을 때려 박으면, 단순 폭발이 아니라 인과율 연쇄 과부하가 터져. 저들의 검은 네모와 제어 칩을 모조리 쇼트시킬 수 있어."
"하지만 그러려면 분배기 바로 앞까지 접근해야 해요! 저격선이 완전히 열려 있는데 어떻게……."
채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블랙 큐브 알파 3명이 일제히 지면을 박차고 쇄도해 왔다.
3. 0.3초의 균열을 넘어서
파아아앙!
공기를 찢는 둔탁한 파동과 함께 푸른빛의 인과율 광탄이 우진의 발치를 강타했다.
바닥의 강화 콘크리트가 모래알처럼 바스러지며 거대한 구멍이 뚫렸다.
"흩어져! 민우 형 데리고 콘솔 뒤로 숨어!"
우진이 민우를 거칠게 밀쳐 콘솔 잔해 뒤로 숨김과 동시에, 바닥을 구르며 몸을 날렸다.
슈아아악!
우진이 누워 있던 자리로 플라스마 칼날 두 개가 교차하며 허공을 갈랐다.
Subject-04 이서진과 Subject-06 박태호였다.
감정이 거세된 텅 빈 눈동자, 목덜미에서 붉게 점멸하는 생체 제어 칩.
그들의 머리 위 검은 동그라미는 우진의 궤적을 실시간으로 추적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살상 연계를 펼치고 있었다.
'빠르다.'
지연 시간이 없는 공격.
변화 감지로 미래 선을 읽어내더라도 신체 반응 속도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의 폭풍 같은 연격이었다.
우진은 턱 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칼날의 열기를 느끼며 상체를 뒤로 꺾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옷깃이 타들어 가며 살갗에 화상을 입었다.
그 뒤를 이어 보안 타격대원 4명이 인과율 구속 그물을 발사하며 우진의 양팔과 다리를 옥죄어 들어왔다.
생포를 위해 살상 반경을 줄인 것이 오히려 우진에게는 실낱같은 틈새였다.
우진은 왼손의 상처에서 터져 나오는 피를 허공에 뿌리듯 팔을 휘둘렀다.
팟!
우진의 정수리 위에서 은빛 동그라미의 중심점(⊙)이 맹렬하게 점멸했다.
단순한 시각화가 아니었다.
시스템의 연산식을 거부하는 특이점의 절대 척력 권능이 그의 손끝을 타고 방출되었다.
콰르릉!
공중으로 쏘아져 오던 네 갈래의 특수 탄소 섬유 그물이 공중에서 보이지 않는 유리벽에 부딪힌 것처럼 우그러지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뭐, 뭐야?! 탄도가 굴절됐어!"
보안 요원들의 경악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계적인 명령대로만 움직이던 그들의 고정된 검은 네모에 미세한 진동이 일어났다.
명령 하달과 육체 반응 사이의 필연적 병목, 0.3초의 인과율 지연 시간.
우진은 그 찰나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닥을 박차고 솟구쳐 오른 우진은 가장 가까이 있던 타격대원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퍽 소리와 함께 방탄복을 입은 사내가 뒤로 나뒹굴며 뒤편의 동료 두 명을 덮쳤다.
동시에 우진은 품속에서 노획했던 충격 바톤을 꺼내 들어 바닥에 내리꽂았다.
지지직, 콰아아앙!
고압 전류가 젖은 콘크리트 바닥을 타고 사방으로 번져 나가며 접근하던 요원들의 다리 신경을 마비시켰다.
하지만 블랙 큐브 알파는 멈추지 않았다.
발밑으로 흐르는 수만 볼트의 전류조차 신경계를 마비시키지 못했다.
Subject-07 최영훈이 허공을 도약해 우진의 정수리를 향해 무거운 인과율 해머를 내리찍었다.
피할 공간이 없었다.
그때, 귓전을 찢는 굉음과 함께 짙은 백색 연무가 홀 전체를 집어삼켰다.
치이이이익―!
채린이 던진 그리드 교란 연막탄이었다.
단순한 최루탄이나 시야 차단용 연막이 아니었다.
은빛 동그라미의 비간섭 척력 파동을 응축시켜 만든 농밀한 연무가 퍼져 나가자, 공간 전체를 덮고 있던 넥스트 큐브의 사각 통제 격자망이 거세게 뒤틀렸다.
"크아악……!"
"신호 단절! 코어 락온이 풀렸다!"
타격대원들의 헬멧 내부에서 경보음이 울리며 그들이 허둥대기 시작했다.
블랙 큐브 알파들 역시 머리 위의 검은 동그라미가 격자망의 기준점을 잃고 미세하게 떨리며 궤도를 벗어났다.
내려찍히던 해머가 우진의 어깨를 한 뼘 차이로 비껴가며 바닥을 박살 냈다.
"우진 씨! 지금이에요!"
연무 속에서 채린의 절박한 목소리가 울렸다.
우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연무를 뚫고 오르비스 기단부, 붉은 증기를 뿜어내고 있는 메인 양자 냉각 분배기를 향해 전력으로 질주했다.
4. 임계점 폭파
분배기 앞에 도달한 우진의 눈앞에 거대한 티타늄 원통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께 10센티미터의 특수 합금 외벽 안쪽에서 초저온 냉각재가 맹렬하게 순환하는 소리가 기계적인 맥박처럼 울리고 있었다.
원통 중앙에는 오르비스 슈퍼컴퓨터와 직결된 굵직한 광섬유 케이블 다발과 비상 압력 밸브가 물려 있었다.
[위험: 냉각 압력 180% 도달.]
[수동 배출 밸브 잠김.
본사 중앙 통제실 승인 필요.]
경고 패널이 붉은빛을 뿜어내며 요란하게 깜빡였다.
우진은 숨을 헐떡이며 피투성이가 된 오른손을 분배기 콘솔 위에 얹었다.
그의 뇌간과 관자놀이 흉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신 코드의 데이터 스트림이 콘솔의 전극을 타고 푸른 스파크를 튀기며 흘러 들어갔다.
지이이잉―!
우진의 뇌리 속으로 분배기 내부의 배관 구조와 전력 흐름이 기하학적 도형의 형태로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단순히 외벽을 부수는 걸로는 모자라.
저 안쪽에 있는 3중 펠티어 소자와 초전도 자석 코일을 한 번에 단락시켜야 해.'
우진의 시야에 분배기 심장부에 위치한 세 개의 밸브 접점이 붉은 세모의 형태로 떠올랐다.
파멸의 궤도.
그 접점들이 외부의 충격으로 뒤틀리는 순간, 억눌려 있던 수천 기압의 압력이 폭발할 터였다.
"채린 씨! 그리드 오버라이더 최대 출력으로 동기화해요!"
우진이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채린이 민우를 부축한 채 연무를 뚫고 달려와 우진의 등 뒤에 섰다.
그녀는 주저 없이 품에서 꺼낸 원통형 장치, 그리드 오버라이더의 접촉 단자를 우진의 어깨에 밀착시켰다.
위이이잉―!
채린의 은빛 동그라미에서 뿜어져 나온 순수한 척력 에너지가 우진의 체내 방화벽 백신과 직렬로 맞물렸다.
두 이레귤러의 파동이 하나로 융합되자,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거대한 과녁형 식별 코드(⊙)가 허공을 가득 채우며 찬란한 은빛 광륜을 형성했다.
그 빛은 지하 4층의 자욱한 질소 안개와 연무를 단숨에 밀어내며 신성할 정도의 압도적인 위압감을 뿜어냈다.
연무 너머에서 비틀거리며 다가오던 블랙 큐브 알파 3명이 그 은빛 광륜을 마주하는 순간, 그들의 검은 동그라미가 거센 공명을 일으키며 비명을 지르듯 뒤틀렸다.
세 사람의 뇌간에 박힌 제어 칩이 과열되며 그들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기…… 억…… 나……?"
Subject-04 이서진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은빛 파동이 그들의 봉인된 기억 표면을 거칠게 긁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완전한 해방을 유도할 시간은 없었다.
방폭문 너머에서 수십 명의 중무장 증원군이 추가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피커에서 도진우의 다급하고 분노에 찬 고함이 터져 나왔다.
"막아라! 저놈이 분배기를 자폭시키려 한다! 다리를 쏴서라도 당장 저지해!"
타타타탕!
사방에서 인과율 집속 탄환이 빗발쳤다.
그러나 우진과 채린의 주변을 둘러싼 거대한 은빛 척력의 장벽에 부딪힌 탄환들은 허공에서 궤적이 꺾이며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우진은 고통으로 시야가 하얗게 탈색되는 것을 느끼며, 오른손에 모인 모든 백신 에너지와 척력 펄스를 분배기 심장부의 세 접점에 때려 박았다.
"터져라!"
콰지지지직―!
눈이 멀 것 같은 백색 섬광이 분배기 내부에서 폭발했다.
초전도 자석 코일이 역위상 전류를 이기지 못하고 순식간에 쇼트되었고, 배관을 타고 흐르던 액체 헬륨이 기화하며 부피가 700배로 팽창했다.
티타늄 외벽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쩍쩍 갈라지며 틈새로 눈부신 푸른 플라스마 화염이 분출되었다.
쿠구구구궁!
지하 4층 바닥 전체가 비명을 지르며 내려앉기 시작했다.
5. 무너지는 심연
"뛰어요! 비상 화물 리프트로!"
우진이 민우의 한쪽 팔을 다시 부축해 메고, 채린의 손을 잡은 채 뒤편의 화물 반입 통로를 향해 몸을 던졌다.
그 직후였다.
쿠콰콰콰콰콰앙―!
등 뒤에서 고막을 완전히 마비시키는 묵직한 대폭발이 터져 나왔다.
분배기가 파열되면서 방출된 극저온의 충격파와 초고압 플라스마 화염이 거대한 버섯구름을 그리며 지하 4층 중앙 홀 전체를 집어삼켰다.
수십 대의 대형 서버 랙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지며 불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바닥을 지탱하던 철골 H빔들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천장의 콘크리트 슬래브가 거대한 암석 덩어리가 되어 쏟아져 내렸다.
추격해 오던 넥스트 큐브의 보안 타격대원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폭풍에 휘말려 벽면으로 처박혔다.
머리 위에 검은 동그라미를 띄우고 있던 블랙 큐브 알파들 역시 거센 인과율 폭풍 속에서 튕겨 나가며 무너져 내리는 잔해 더미 밑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으윽!"
우진 일행의 등 뒤로 거센 후폭풍과 파편들이 덮쳐왔다.
채린이 반사적으로 그리드 오버라이더의 잔여 척력을 뒤로 전개해 쏟아지는 낙석들을 간신히 튕겨냈다.
하지만 그 반동으로 채린의 입술 사이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채린 씨! 괜찮아요?!"
"전…… 신경 쓰지 말고…… 앞만 봐요! 리프트가 저기 있어요!"
채린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가리킨 통로 끝에는, 지하 3층 하역장으로 연결되는 대형 화물 전용 유압식 리프트가 위태롭게 덜컹거리고 있었다.
폭발의 충격으로 리프트의 외벽 케이지가 우그러져 있었지만, 케이블은 아직 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우진은 민우를 리프트 바닥으로 밀어 넣듯 태우고 채린을 밀어 올렸다.
그리고 자신도 뛰어오르며 리프트 제어반의 비상 상승 레버를 거칠게 꺾었다.
끼리기릭, 쾅!
리프트가 굉음을 내며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아래로 지하 4층 중앙 통제 홀 전체가 지옥의 아가리처럼 입을 벌리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수천만 명의 운명을 계산하던 거대한 오르비스의 잔해와 콘솔들이 붉은 불길과 함께 암반 심연 속으로 흔적도 없이 함몰되어 갔다.
치지지직―!
벽면에 부착된 비상 인터콤 모니터 하나가 꺼지지 않고 마지막 불꽃을 튀기며 켜졌다.
화면 속에는 먼지와 그을음을 뒤집어쓴 채 비상 대피 벙커로 피신한 도진우의 일그러진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4차원 역회전 붉은 큐브는 본사 코어 붕괴의 역류를 얻어맞아 흉측하게 깨져 있었고, 표면에서는 검은 피 같은 데이터 노이즈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강우진……! 네놈이…… 감히 오르비스를……!"
도진우의 목소리는 피를 토하듯 떨리고 있었다.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으냐? 넌 이제 끝났다! 오르비스의 연산망에서 벗어난 버그 새끼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 같으냐?!"
화면 너머의 도진우가 번뜩이는 살의를 드러내며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서지훈이 남긴 경고는 진짜다. 인과율의 항상성을 거부한 대가는 네놈의 살점을 뼈에서 발라낼 것이다. 세상 전체가 널 이물질로 뱉어낼 테니까! 그리고 기억해라…… 널 살려두는 건 우리다. 다음번에 마주할 땐, 네 두개골을 쪼개서라도 그 특이점의 뇌파를 긁어내고 말 테니!"
콰직!
우진은 대답 대신 군화 발로 인터콤 모니터를 짓밟아 박살 냈다.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도진우의 저주 어린 목소리가 비명처럼 끊겼다.
6. 새벽의 탈출로
덜컹, 쿵!
화물 리프트가 마침내 지하 3층 폐기물 하역장 바닥에 거칠게 충돌하며 멈춰 섰다.
하역장 역시 지하 4층의 연쇄 폭발 여파로 천장 배관이 터져 물이 장대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빗물 너머로 익숙한 차량의 헤드라이트 두 줄기가 어둠을 찢으며 우진 일행을 비추었다.
진회색 카니발이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슬라이딩 도어가 활짝 열리며 한서연(韓瑞淵) 기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우진 씨! 채린 씨! 어서 타요!"
서연의 목소리에는 사지에서 살아 돌아온 동료들을 향한 안도감과 경악이 뒤섞여 있었다.
차량 안쪽 뒷좌석에서는 우진의 어머니가 젖은 수건을 쥔 채 눈물을 글썽이며 손을 뻗고 있었다.
운전석의 화물차 기사는 백미러를 주시하며 가속 페달을 밟을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우진과 채린은 탈진한 민우를 들어 올려 카니발 뒷좌석 시트에 눕혔다.
"우진아……! 맙소사, 손이 이게 무슨 꼴이니……!"
어머니가 피투성이가 된 우진의 왼손을 부여잡고 오열했다.
"괜찮아요, 어머니. 살아 있잖아요. 다 끝났어요."
우진이 어머니의 거친 손을 토닥이며 차 안으로 뛰어올랐다.
채린 역시 차에 탑승하자마자 슬라이딩 도어가 거칠게 닫혔다.
"출발해요! 어서요!"
서연이 외치자 화물차 기사가 거칠게 핸들을 꺾으며 가속 페달을 바닥까지 밟았다.
부아아앙―!
카니발은 지하 3층 하역장의 완만한 화물 경사로를 타고 지상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하역장 진입 셔터가 내려앉으며 거대한 먼지구름이 차체를 뒤덮었지만, 카니발은 굉음을 내며 지상 1층 폐기물 출구를 뚫고 테헤란로의 차가운 새벽 공기 속으로 뛰쳐나왔다.
쿠구구궁…….
차량이 도로 위로 진입하는 순간, 차창 밖으로 초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졌다.
지상 45층 규모의 거대한 칠흑빛 정육면체 마천루, 넥스트 큐브 본사 사옥의 저층부에서 연쇄적인 내부 폭발이 일어나며 유리창들이 일제히 깨져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건물 외벽을 덮고 있던 빛을 흡수하던 검은 패널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며 앙상한 철골 구조가 드러났다.
더욱 기괴한 것은 서울의 새벽하늘이었다.
빌딩 옥상의 거대 안테나에서 뿜어져 나와 서울 상공을 촘촘한 그물망처럼 덮고 있던 보이지 않는 사각형 전산 격자망이, 마치 거미줄이 불에 타듯 푸르스름한 스파크를 튀기며 조각조각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새벽안개 사이로 흐릿하게 보이던 출근길 시민들의 머리 위 도형들이 일제히 깜빡거리며 격자망의 통제에서 풀려나는 모습이 우진의 눈에 선명하게 들어왔다.
오르비스의 침묵.
5,100만 명의 삶을 옥죄던 배후 시스템의 거대한 연산 중추가 마침내 파괴된 것이었다.
"해냈어…… 우리가 해낸 거예요……."
채린이 차창에 이마를 기댄 채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의 두 뺨 위로 참아왔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15년 전 부모를 앗아가고 자신을 실험체로 사육했던 괴물의 심장에 기어이 칼을 꽂아 넣었다는 벅찬 해방감이었다.
조수석의 서연 역시 태블릿 화면을 응시하며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언론망 레벨-4 보안 락이 완전히 해제됐어요. 최진석 기자가 해외 분산 서버를 통해 오르비스의 조작 알고리즘과 상류층 규격화 로드맵 문건 원본을 전국 방송망과 주요 포털에 실시간으로 터뜨리고 있어요. 지금 뉴스 피드가 전부 뒤집혔어요!"
서연의 말대로 태블릿 화면에는 긴급 속보를 알리는 붉은 자막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단독: 넥스트 큐브, 대국민 라이프 플랫폼 '미러 큐브'를 통한 사상 초유의 개인정보 조작 및 궤도 통제 의혹 폭로.]
[태성그룹 신입 공채 채용 비리 전모 확인…… 합격자 전원 특정 알고리즘 순응자로 사전 내정.]
[정재계 유력 인사 자제 대상 폐쇄형 매칭 앱 'H-스퀘어'의 불법 세뇌 공작 문건 입수.]
진실이 세상의 장막을 찢고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7. 고립된 특이점
하지만 우진의 가슴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오히려 넥스트 큐브 사옥이 시야에서 멀어질수록,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기괴한 압박감이 전신을 옥죄어 왔다.
우진은 떨리는 숨을 들이쉬며 조용히 자신의 머리 위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룸미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띄우고 있는 안정된 백색 네모도, 위기와 죽음에 처한 이들의 붉은 세모도, 시스템의 꼭두각시들이 띄우던 칠흑빛 검은 네모도 아니었다.
심지어 채린과 공명할 때 찬란하게 빛나던 은빛 동그라미의 윤곽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오직 텅 빈 공허.
아무런 기하학적 형태도 맺히지 않는 절대적인 무(無)의 공간만이 그의 정수리 위에 드리워져 있었다.
'Error: ?'
오르비스의 거대한 홀로그램 중심부에서 피를 토하듯 번쩍이던 그 붉은 에러 문구가 우진의 귓전에서 환청처럼 맴돌았다.
수학적 특이점.
인간의 삶을 방정식으로 규정하고 엔트로피를 조작하던 시스템이 끝내 풀어내지 못한 유일한 오류.
그리고 그 직후 깨진 모니터 너머로 서지훈의 잔류 데이터가 광기 어린 목소리로 내뱉었던 저주가 뼛속을 파고들었다.
'축하한다, 강우진.
너는 사각형의 감옥을 부수고 시스템의 궤도 밖으로 완벽히 벗어났다.
하지만 그게 자유일 것 같으냐?'
'세상은 거대한 항상성 네트워크다.
모든 노드가 서로 맞물려 균형을 유지하고 있지.
그런데 그 격자망에서 완전히 튕겨져 나간 너 같은 '아웃라이어'를, 세상이 언제까지 가만히 둘 것 같으냐?'
'기억해라.
시스템이 널 계산하지 못한다는 건, 세상의 모든 인과율 또한 널 지켜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네가 딛고 선 땅, 네가 만나는 인연, 네 곁에 머무는 사람들…….
인과율의 거대한 관성이 너라는 이물질을 밀어내기 위해 네 주변부터 서서히 파괴해 갈 것이다.
너는 홀로 고립되어 미쳐가거나, 네 곁의 모든 것을 파멸시키고 자멸하게 될 것이다.'
우진의 턱 끝이 단단하게 굳어졌다.
단순한 패배자의 악담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테헤란로의 풍경들이 묘하게 이질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신호등의 불빛, 교차로를 지나치는 차량들의 소음, 길가에 서 있는 가로수들마저 우진이라는 존재를 현실 세계의 '이물질'로 인식하고 튕겨내려는 듯한 미세한 척력이 피부에 따갑게 와닿았다.
그때, 뒷좌석에서 민우를 지혈하던 채린이 작게 신음을 흘렸다.
"아……!"
우진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채린 씨, 왜 그래요? 어디 다쳤어요?"
채린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으로 짚은 채 창백해진 얼굴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녀의 정수리 위에서 맑게 빛나던 은빛 동그라미의 가장자리에, 전에 없던 미세한 균열과 함께 차가운 서리 같은 노이즈가 끼어들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시려요. 마치…… 세상의 공기가 절 밀어내고 있는 것 같은……."
우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채린 역시 시스템의 규격을 벗어난 은빛 동그라미의 소유자였다.
오르비스가 붕괴하고 격자망이 찢겨 나간 순간, 시스템의 항상성을 지탱하려던 현실의 인과율 네트워크가 궤도를 이탈한 '아웃라이어'들을 배척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도진우의 집착, 상임이사회의 생포 명령, 그리고 서지훈이 경고한 아웃라이어의 저주.
괴물을 쓰러뜨렸다고 생각한 순간, 더 거대하고 보이지 않는 현실이라는 괴물이 그들의 목을 조여오고 있었다.
"우진아, 우리 이제 어디로 가야 하니……?"
피 묻은 붕대를 든 어머니가 불안에 젖은 눈으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도심 전체에는 이미 경찰과 비상 계엄 사이렌이 울려 퍼지고 있었고, 언론에 폭로가 터져 나왔음에도 지명수배된 그들이 숨을 곳은 서울 하늘 아래 어디에도 없었다.
우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타들어 간 왼손바닥의 상처에서 다시 핏물이 배어 나왔지만,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가슴 안주머니에 든 아버지 강정호의 낡은 연구 노트를 만지작거렸다.
노트의 맨 뒷장에 적혀 있던, 아버지가 15년 전 남겨두었던 도심 밖의 유일한 사각지대.
"서울을 벗어납니다."
우진이 앞을 향해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경기도 외곽, 시스템의 전파망과 인과율 격자가 닿지 않는 폐공장으로 갑니다. 거기서 전열을 가다듬고…… 저들이 숨겨둔 다음 코어를 찾아내 부숴야 합니다."
진회색 카니발은 불타는 테헤란로의 마천루를 등진 채,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는 올림픽대로를 타고 서늘한 안개 속으로 질주해 들어갔다.
끝나지 않은 전쟁, 그리고 세상 전체로부터 거부당하기 시작한 특이점들의 처절한 생존기가 이제 막 새벽의 장막을 걷어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