넥스트 큐브 본사 침투
1. 칠흑의 마천루 앞
폭우가 쏟아지던 도심의 아스팔트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자유로를 거칠게 내달려 테헤란로 한복판에 진입한 카니발의 차창 밖으로, 밤하늘을 찌를 듯 솟아오른 넥스트 큐브 본사 빌딩이 거대한 사각의 관짝처럼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지상 45층, 지하 6층에 이르는 육중한 외벽은 외부의 빛을 한 점도 반사하지 않는 칠흑빛 특수 흡수 패널로 마감되어 있었다.
그것은 건물이라기보다는 지상 위에 거대하게 벼려진 하나의 거대한 정육면체 덩어리 자체였다.
차량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운전대를 쥐고 있던 화물차 기사는 룸미러를 통해 뒷좌석의 우진을 흘끔거리며 연신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 전 고양시 외곽 폐사당에서 목격했던, 허공에 정지하던 푸른 탄환들과 공간을 찢어발기던 기괴한 충격파의 잔상이 아직도 그의 온몸을 덜덜 떨리게 만들고 있었다.
"우진아."
뒷좌석 구석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우진의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15년간 눈물과 향 연기 속에 갇혀 살았던 어머니의 손이었다.
거칠고 메마른 손끝이 우진의 굳은 손등을 감싸 쥐었다.
"정말로…… 거길 들어가야 하는 거냐?"
우진은 어머니의 젖은 눈망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 눈 속에는 15년 전 남편을 코어의 심연 속으로 떠나보내야 했던 그날의 참혹한 비명이 고스란히 박혀 있었다.
이제는 머리에서 칩이 적출된 아들마저 그 사각의 지옥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어미의 살을 에는 단장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우진은 어머니의 손을 마주 쥐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어요, 어머니."
낮고 고요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단단한 결의가 실려 있었다.
"아버지가 15년 동안 그 차가운 기계 속에서 절 대신해 짊어지고 계셨어요. 이제는 제가 끝내야 해요. 이 도시의 모든 사람을 목줄 채운 저 사각형을 부수지 않으면, 우리에게 내일은 없어요."
우진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새겨진 4센티미터의 수술 흉터가 파랗게 박동하고 있었다.
더 이상 뇌간을 쪼개는 듯한 살인적인 편두통은 없었다.
과거의 기억이 온전히 맞춰지고, 아버지가 집도했던 신경 궤도 절제술의 진실을 깨달은 순간부터 그것은 저주가 아닌 하나의 단단한 방화벽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고 있었다.
우진의 망막 위로 비치는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빌딩 로비를 오가는 경비원들과 테헤란로 횡단보도를 바쁘게 건너는 행인들의 정수리 위.
수천, 수만 개의 사각형들이 허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사각형들은 온전한 백색이 아니었다.
넥스트 큐브가 가동한 '코드 블랙' 방어 프로토콜의 영향으로, 도시 전체의 도형들은 검붉은 빛을 띤 채 불안정하게 떨리고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동공마다 넥스트 큐브의 '미러 큐브' 앱이 뿜어내는 푸른빛 코드가 얽혀 들어가며, 사람들의 머리 위 도형을 거대한 사각 격자망으로 끌어당기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요."
조수석에 앉아 있던 윤채린이 태블릿 화면을 두드리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채린의 이마에도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화면에는 넥스트 큐브 본사의 다중 네트워크 트래픽이 실시간으로 붉은색 그래프를 그리며 치솟고 있었다.
"코드 블랙의 동기화율이 벌써 78퍼센트를 넘겼어요. 이대로 100퍼센트에 도달하면, 서울 시내 미러 큐브 사용자 700만 명의 생체 궤도가 본사 중앙 통제실과 완전히 결속돼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본사 메인 프레임에 손을 대는 순간, 시스템이 그 반작용 에너지를 700만 명의 뇌간으로 일시에 역류시킬 거예요. 대규모 뇌출혈과 급성 심장마비로 도시 전체가 거대한 시체 안치소가 될 수도 있어요."
서연이 카메라 가방을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언론 쪽 전산망도 완전히 잠겼어요. 오태식 국장이 경찰청에 직접 연락해서 우진 씨와 채린 씨를 특수 총기 난사 및 국가 기반 시설 테러 용의자로 전국에 지명수배를 때렸어요. 사옥 1층 로비와 정문 주변에 대테러 특공대 장갑차 두 대가 배치되어 있어요. 정문 돌파는 자살행위예요."
서연의 스마트폰 화면에는 방금 긴급 편성된 방송 뉴스 속보가 번쩍이고 있었다.
[속보: 테헤란로 연쇄 폭발 용의자 3명 강남 일대 잠입 중, 대테러 특공대 실탄 발포 승인]
조작된 각본이 거침없이 지상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러나 우진의 표정은 호수처럼 잔잔했다.
우진은 품 안쪽 주머니에서 묵직한 크리스털 장치를 만져보았다.
고양시 외곽 사당의 지하 납 상자에서 어머니가 건네준 아버지의 마지막 유품, '프로메테우스'였다.
차가운 크리스털 표면에서 미세한 온기가 우진의 손바닥을 타고 흘러들었다.
시스템의 사각 격자망을 내부에서부터 영구 소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마스터 해방 키.
우진이 채린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문이 아니라면, 침투로는 어디지?"
채린이 태블릿의 화면을 전환하며 넥스트 큐브 본사의 3차원 투시 입체 설계도를 띄웠다.
설계도의 지하 3층과 지하 4층 구역이 붉은 빗금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2. 사각지대의 문
"넥스트 큐브 본사는 지상과 지하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세계로 분리되어 있어요."
채린이 설계도면의 특정 지점을 확대하며 설명을 이어갔다.
"지상 1층부터 45층까지는 일반인들의 눈을 가리기 위한 껍데기예요. 투자 컨설팅, AI 빅데이터 연구소, 클라우드 서버 관리실 같은 그럴싸한 간판을 달고 있죠. 하지만 시스템의 진짜 심장인 '데이터 센터'와 중앙 통제 홀은 지하 3층부터 6층까지의 암반 심도 구역에 묻혀 있어요."
채린의 손가락이 건물 북서쪽, 화물 하역장 구석에 위치한 지하 폐기물 반출로를 가리켰다.
"이곳이에요. 사옥 지하로 들어가는 3중 차폐 셔터가 있는 비상 유지보수 반입구. 이곳은 중앙 전산망의 광대역 센서 대신 구형 생체 인식 단말기를 써요. 넥스트 큐브가 15년 전 연구소를 전소시키고 이 건물을 올릴 때, 만약의 메인 프레임 쇼트에 대비해 남겨둔 아날로그 백도어죠."
채린은 목에 걸고 있던 티타늄 목걸이에서 가느다란 칩 카드를 꺼내 들었다.
거기에는 15년 전 그녀의 부친인 윤상혁 선임 연구원의 영문 이니셜과 함께, 특수 홀로그램으로 각인된 'CLASS-S SUPERVISOR'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제 목걸이 속에 숨겨두셨던 마스터 엔지니어 키예요. 넥스트 큐브의 상위 코드는 15년 전 연구소의 커널 아키텍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요. 이 키를 물리 단말에 접속시키면 30초 동안 보안 시스템을 관리자 점검 모드로 속일 수 있어요."
"하지만 그 단말을 통과해도 안쪽에는 경비 인력이 있을 텐데."
서연이 우려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도진우가 폐사당에서 우진 씨에게 당해 4차원 큐브가 깨졌다고 해도, 본사 통제실에는 기계화된 경비 병력들이 깔려 있을 거예요."
"그건 제가 맡겠습니다."
우진이 조용히 카니발의 문손잡이를 잡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푸른빛의 미세한 파동이 일렁였다.
완전 각성한 은빛 동그라미 중심점(⊙)의 시야.
이제 우진에게는 단순한 미래의 탄도나 이동 경로뿐만 아니라, 시스템이 공간에 드리워 놓은 미세한 인과율의 균열까지 한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우진이 서연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서연 씨는 어머니를 모시고 여기서 대기해 주세요. 사옥 반경 300미터 이내는 시스템의 통제 격자가 너무 빽빽해서, 일반인이 접근하면 뇌신경이 코드 블랙 신호에 강제로 동기화될 위험이 커요."
"우진 씨……."
"차량 안의 아날로그 단파 수신기를 144.820MHz에 계속 맞춰두세요. 우리가 안쪽 중앙 통제실에 도달해 프로메테우스를 서버에 꽂는 순간, 서울 상공을 덮고 있는 레벨-4 언론망 보안 락이 강제로 해제될 겁니다. 그때 최진석 기자와 연결해서, 넥스트 큐브가 벌여온 모든 궤도 조작 데이터와 시민 인질극의 진실을 전국에 실시간으로 터뜨려야 합니다. 서연 씨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서연의 눈동자에 비장한 결의가 번졌다.
그녀는 우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깊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드시 해낼게요. 반드시 살아 돌아와야 해요, 두 사람 다."
우진은 뒤를 돌아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말없이 우진의 가슴팍을 꾹 눌러주었다.
그 손길에 담긴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며, 우진은 차 문을 열고 쏟아지는 폭우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채린이 방수 후드를 뒤집어쓰고 품에 그리드 오버라이더를 단단히 고정한 채 우진의 뒤를 따랐다.
철컥.
카니발의 문이 닫히고, 두 사람은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넥스트 큐브 본사 사옥의 북서쪽 화물 반입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3. 3중 차폐 셔터의 해킹
테헤란로의 소음은 화물 하역장의 깊숙한 콘크리트 경사로를 내려갈수록 기괴할 정도로 뚝 끊겼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코를 찌르는 강한 오존 냄새와 냉각수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주변 벽면은 두께 50센티미터가 넘는 군용 방폭 콘크리트로 둘러싸여 있었고, 5미터 간격으로 설치된 감시 센서들이 붉은 레이저 격자를 바닥에 투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붉은 레이저 선들은 우진의 시야에서는 전혀 다른 형태로 관측되었다.
허공을 촘촘하게 엮어놓은 사각형의 검은 실선들.
그것은 단순한 광학 센서가 아니라, 침입자의 머리 위에 뜬 도형을 실시간으로 스캔하여 백색 네모인지, 혹은 규격 외 이레귤러인지를 판별하는 '생체 궤도 스캐너'였다.
"우진 씨, 왼쪽 위에 스캐너 세 대가 교차하고 있어요."
채린이 벽에 밀착한 채 낮게 속삭였다.
우진은 이미 망막 위에 자수정빛으로 떠오르는 궤적선을 읽고 있었다.
4단계 '과거 추적'과 완전 각성한 '변화 감지'가 중첩되며, 스캐너의 회전 모터가 0.4초 뒤에 도달할 사각지대의 좌표를 망막 위에 투명한 잔상으로 그려내고 있었다.
"지금입니다."
우진이 채린의 손목을 잡고 전방으로 몸을 날렸다.
스캐너의 붉은 레이저가 바닥을 훑고 지나가는 찰나의 틈새,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센서의 사각지대인 콘크리트 기둥 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단 1인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침투였다.
기둥 뒤편에 도달하자, 높이 4미터, 폭 6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은회색 3중 차폐 방폭문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강철 문 중앙에는 넥스트 큐브의 상징인 푸른색 정육면체 로고가 음각으로 깊게 새겨져 있었고, 그 우측 벽면에 구형 키패드와 함께 마그네틱 칩 인식 슬롯이 장착된 아날로그 단말기가 녹색 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이 문 너머가 바로 본사 데이터 센터 1차 환적 구역이에요."
채린이 숨을 죽이며 다가가 목걸이에 걸려 있던 마스터 키 카드를 슬롯에 밀어 넣었다.
치익-.
단말기 화면에 오래된 녹색 도스(DOS) 폰트가 깜빡거리며 텍스트를 출력하기 시작했다.
[SYSTEM CHECK : LEGACY PROTOCOL DETECTED]
[AUTHENTICATION: NODE-SUPERVISOR / YUN SANG-HYUK]
[SECURITY LEVEL : CLASS-S BYPASS CONFIRMED]
[ACCESS GRANTED - 30 SECONDS REMAINING]
쿠구구궁-!
육중한 유압 밸브가 풀리는 둔탁한 굉음과 함께, 3중 차폐 셔터의 첫 번째 강철판이 위로 서서히 들려 올라갔다.
두꺼운 철문 틈새로 영하에 가까운 차디찬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문 너머의 깊은 어둠 속에서 규칙적이고 기계적인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타악, 타악, 타악.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정확히 0.8초 간격으로 바닥을 디디는 군홧발 소리였다.
우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셔터가 완전히 열리기도 전, 어둠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자들의 머리 위.
진동도, 회전도, 감정의 흔들림도 일체 존재하지 않는 완벽하게 고정된 '칠흑빛 정육면체(■)' 세 개가 허공에 떠 있었다.
넥스트 큐브 본사의 내부 경비를 전담하는 최정예 기계화 가드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기존의 화약 총기가 아닌, 총열 전체가 푸른색 발광 튜브로 감싸인 '인과율 집속 카빈 소총'이 들려 있었다.
가드들의 무전망에서 노이즈 섞인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경보.
화물 반입로 3번 셔터 비인가 개방 감지.]
[타깃 확인: 규격 외 결손체 K-07 강우진, 2세대 도주체 Subject-03 윤채린.]
[상임이사회 명령 하달: 생포 불필요.
즉각적인 영구 물리 소거 집행.]
찰칵-!
세 자루의 집속 소총이 동시에 우진의 심장과 미간을 향해 겨눠졌다.
4. 침묵의 격파
공기가 찢어지는 날카로운 고주파음과 함께 푸른빛 인과율 광탄이 어둠을 가르고 쏘아져 나왔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총구가 번쩍이는 순간 이미 신체가 꿰뚫렸을 속도였다.
그러나 우진에게 그 탄환들은 멈춰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우진의 정수리 위, 텅 비어 있던 은빛 동그라미의 중심에 붉은 과녁형 점(⊙)이 선명하게 박히며 초월적인 척력 장을 허공에 전개했다.
키이이잉-!
우진의 전방 1미터 허공에서 공간이 파문처럼 일그러졌다.
날아들던 세 발의 푸른 광탄이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허공에서 속도를 잃고 우뚝 멈춰 섰다.
광탄의 끝부분에서 튀는 인과율 불꽃이 우진의 차가운 눈동자에 푸르게 비쳐 들었다.
"어떻게……!"
감정이 거세되었던 가드들의 기계적인 음성에 미세한 연산 충돌 에러가 발생하며 총구가 흔들렸다.
상위 코어의 연산 명령이 하달되고 근육이 반응하기까지 발생하는 필연적인 병목, '0.3초의 인과율 지연 시간'이었다.
우진은 그 0.3초를 결코 놓치지 않았다.
파아앙-!
우진의 손짓 한 번에, 허공에 멈춰 있던 세 발의 광탄이 역방향으로 굴절되며 가드들의 발밑 콘크리트 바닥을 강타했다.
콰아아앙!
인과율 폭발의 충격파가 하역장 복도를 뒤흔들며 세 명의 가드를 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우진의 신형이 잔상처럼 쏘아져 나갔다.
가장 우측에 있던 가드가 자세를 고쳐 잡고 보조 권총을 뽑으려던 찰나, 우진의 손바닥이 그의 흉골 정중앙을 정확히 내리찍었다.
단순한 물리적 타격이 아니었다.
우진의 체내에 각인된 '방화벽 백신 코어'의 고밀도 역위상 펄스가 가드의 신경망을 타고 뇌간으로 곧장 역류해 들어갔다.
파지지직!
가드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고정된 검은 육면체 표면으로 무수한 균열이 쩍쩍 갈라졌다.
"크아악……!"
가드가 거품을 물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좌측에서 쇄도하던 두 번째 가드가 전술 나이프를 우진의 목덜미로 찔러 넣었다.
우진은 고개를 0.5센티미터 비틀어 칼날을 흘려보낸 뒤, 가드의 팔꿈치 관절을 역방향으로 꺾어 올렸다.
우두둑!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가드의 중심이 무너졌다.
우진은 반대편 손으로 가드의 목덜미에 박혀 있던 티타늄 생체 제어 단말 소켓을 강하게 쥐어뜯었다.
스파크가 허공으로 튀며 두 번째 가드 역시 전원이 꺼진 인형처럼 바닥에 고꾸라졌다.
마지막 남은 가드가 소총을 들어 우진의 등 뒤를 겨누려던 순간, 뒤쪽에서 달려온 채린이 품에서 꺼낸 원통형 캔을 던졌다.
"엎드려요!"
채린의 외침과 함께 허공에서 터진 '그리드 교란 연막'이 농밀한 은빛 연무를 뿜어내며 복도를 가득 채웠다.
치이익-!
은빛 동그라미의 비간섭 척력 파동을 응축시킨 특수 연무가 퍼지자마자, 가드의 소총 센서와 머리 위 검은 육면체의 락온 기능이 완벽하게 먹통이 되었다.
가드가 시야를 잃고 당황하며 난사하려는 찰나, 연무를 뚫고 나타난 우진의 군홧발이 가드의 턱을 정확하게 걷어찼다.
퍽!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마지막 가드가 벽면에 머리를 부딪치며 축 늘어졌다.
전투가 시작된 지 채 10초도 지나지 않은 순간이었다.
바닥돌 위에 세 명의 기계화 가드가 기절해 쓰러져 있었고,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검은 큐브들은 빛을 잃고 잿빛 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우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떨어진 인과율 집속 카빈 소총 한 자루를 집어 들었다.
탄창 잔량을 확인하자 푸른색 인과율 게이지가 완충 상태인 100퍼센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채린이 연무 속을 빠져나와 쓰러진 가드의 허리춤에서 마스터 보안 키 카드를 낚아챘다.
"이 카드면 지하 4층 메인 데이터 센터 게이트까지 단숨에 내려갈 수 있어요. 서두르죠, 우진 씨. 방금 전투로 발생한 인과율 파동 때문에 관제실에서 침입을 눈치챘을 거예요."
우진은 끄덕이며 전방으로 뻗은 차가운 금속 복도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두 번째 방폭 셔터가 마스터 키의 신호를 받아 좌우로 갈라지며,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넥스트 큐브 본사의 진정한 심연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5. 전 인류 인생 궤도 시뮬레이터
두 번째 셔터를 통과해 나선형 경사로를 타고 내려간 지하 4층.
그곳에 도달한 우진과 채린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빌딩의 지하라는 물리적 공간 개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곳이었다.
축구장 세 개를 합쳐놓은 것보다 더 넓은 거대한 원형 공동(Cavity)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의 벽면은 수만 대의 슈퍼컴퓨터 블레이드 서버 랙들이 빽빽하게 메우고 있었고, 서버들이 뿜어내는 수억 개의 녹색과 붉은색 LED 인디케이터가 은하수의 별처럼 끝없이 반짝이고 있었다.
바닥 전체를 타고 흐르는 특수 불소계 냉각액 파이프에서는 푸르스름한 수증기가 솟구치며 바닥에 짙은 냉기 안개를 깔아놓고 있었다.
그러나 우진과 채린의 시선을 완전히 얼어붙게 만든 것은 그 거대한 전산실의 정중앙,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지름 3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구형(球形) 3D 홀로그램.
그 거대한 빛의 구체 안에는, 서울과 대한민국 전역의 지형도가 실시간으로 정밀하게 축소되어 맥동하고 있었다.
도로망, 철도망, 고층 빌딩 숲, 그리고 한강 줄기까지 완벽하게 재현된 홀로그램 위로, 셀 수 없이 많은 빛의 입자들이 개미 떼처럼 꿈틀거리며 이동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지도가 아니었다.
빛의 입자 하나하나를 확대해 들여다보자, 경악스러운 광경이 망막에 박혀 들었다.
[ID: KR-SEOUL-880412-109 / 상태: 출근 중 / 현재 궤도: □ (순응도 94%) / 예정 사건: 14:15 가벼운 접촉사고 / 결과: 벌점 15점, 스트레스 수치 +12%]
[ID: KR-SEOUL-950203-214 / 상태: 면접 대기 / 현재 궤도: △ (탈락 확정) / 엔트로피 환원: +450 EP]
[ID: KR-SEOUL-711105-102 / 상태: 자영업 / 현재 궤도: ■ (폐업 및 압류) / 예정 파멸: D-3 / 대체 파이프라인 연동 중]
수천만 개의 빛줄기들이 거대한 사각 격자망의 그물에 갇힌 채, 이미 정해진 시간표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누가 언제 누구를 만나 사랑에 빠질지, 언제 사기를 당해 전 재산을 날릴지, 언제 암 진단을 받고 어느 병원 응급실에서 숨을 거둘지까지.
모든 인간의 탄생과 죽음, 비극과 파멸의 순번이 수학적 방정식으로 박제되어 실시간으로 연산되고 있었다.
홀로그램 최상단에는 피처럼 붉은 고딕체로 거대한 타이틀이 박혀 있었다.
[전 인류 인생 궤도 시뮬레이터 : 오르비스(ORBIS) Ver 9.4]
[총 관리 노드: 51,429,881명]
[시스템 항상성 지수: 99.98%]
[코드 블랙 진행률: 84.2% - 서울 전역 동기화 임박]
"이게……."
채린의 목소리가 처절하게 떨려 나왔다.
그녀의 두 눈에 비치는 것은 단순한 컴퓨터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자신의 부모가 왜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교통사고로 위장 살해당해야 했는지, 자신이 왜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뇌를 헤집혀야 했는지에 대한 냉혹한 해답이었다.
"우리 모두가…… 이 빌어먹을 유리구슬 속의 장난감이었던 거야. 언제 부서질지, 언제 버려질지 저놈들이 멋대로 숫자를 매겨놓은……."
채린의 작은 주먹이 하얗게 질리도록 쥐어졌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은빛 동그라미가 분노로 요동치며 날카로운 파동을 허공으로 뿜어냈다.
우진 역시 그 거대한 빛의 구체를 묵묵히 응시했다.
15년 전, 아버지 강정호가 자신의 뇌 속에서 칩을 뜯어내며 흘렸던 피눈물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아버지는 이 거대한 거짓의 우리를 목격했던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하고, 실패하고, 다시 일어서는 모든 자유의지를 '엔트로피의 불안정'으로 규정하고, 기계의 부품처럼 규격화해 버린 이 거대한 사각의 감옥을.
우진은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시뮬레이터 하단, 중앙 콘솔 데스크로 이어지는 투명 아크릴 다리 위를 밟았다.
그곳에는 시스템의 모든 연산을 총괄하는 메인 프레임의 중앙 접속 단말이 은빛 기둥 형태로 솟아 있었다.
우진이 품 안에서 마스터 해방 키 '프로메테우스'를 꺼내 들었다.
크리스털 장치가 거대한 시뮬레이터의 빛을 받아 영롱한 자수정빛으로 공명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였다.
지하 4층 거대한 공동 전체의 조명이 일제히 피처럼 붉은 적색으로 반전되었다.
위이이잉-!
귀를 찢는 고출력 비상 사이렌이 울려 퍼지며, 차가운 여성 인공지능의 음성이 공간을 뒤흔들었다.
[경고.
중앙 통제 홀 구역에 미등록 오염체 침입 확인.]
[프로토콜 제9호 가동.]
[최후 방어선: 블랙 큐브 알파(Black Cube Alpha) 전원 기동.]
쿵-!
쿵-!
쿵-!
중앙 콘솔 데스크를 둘러싸고 있던 바닥의 원형 해치 다섯 개가 동시에 열리며, 짙은 액체 질소 수증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그 자욱한 냉기 안개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다섯 개의 인영.
그들의 머리 위에는 회전도 진동도 없이 주변의 모든 빛을 집어삼키는 칠흑빛 원환, '검은 동그라미(●)'가 소름 끼치도록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6. 봉인된 아이들
"아……!"
채린의 입에서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시선이 수증기를 헤치고 모습을 드러낸 다섯 명의 얼굴에 닿는 순간, 채린의 다리가 맥없이 풀리며 바닥으로 주저앉을 뻔했다.
우진이 다급히 채린의 어깨를 단단히 부축했다.
채린의 떨리는 손가락이 허공을 가리키고 있었다.
"민우…… 서진이…… 지혜……?"
차갑게 얼어붙은 방탄 복포를 입고, 양손에 인과율 집속 화기를 장착한 채 걸어 나오는 다섯 명의 청년들.
그들의 얼굴은 창백하게 탈색되어 있었고, 동공은 초점을 잃은 채 텅 빈 유리구슬처럼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의 목덜미와 관자놀이에는 우진의 것과 똑같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흉측하게 꿰매진 티타늄 생체 제어 소켓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소켓 표면에는 레이저로 지워지지 않는 식별 코드가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Subject-02 : 강민우]
[Subject-04 : 이서진]
[Subject-05 : 한지혜]
[Subject-06 : 박태호]
[Subject-07 : 최영훈]
15년 전, 테헤란로 특수 시설 화재 사건 당시 연구소에서 사라졌던 아이들.
태성C&I 비상계단에서 우진을 살리고 자폭했던 08번 민도현과 함께, 넥스트 큐브 본사 지하 냉동 동면실에 갇혀 15년 동안 인간 병기로 사육당했던 피실험자 동료들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채린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살아 있었어…… 다들 살아 있었는데…… 저놈들이…… 저 악마 같은 놈들이 애들을 기계로 만들어 놓은 거야……!"
다섯 명의 피실험자 병기들은 채린의 비통한 울부짖음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들의 뇌간에 직접 연결된 중앙 코어의 살상 알고리즘이 그들의 신경계를 100퍼센트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의 머리 위에 뜬 검은 동그라미(●)의 중심에서 칠흑 같은 암흑의 펄스가 요동쳤다.
이들은 앞서 쓰러뜨렸던 일반 가드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자체 내장된 살상 시뮬레이션 데이터로 인해 상위 명령 수신 지연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인과율 지연 제로'의 절대 병기들.
스르륵.
가장 앞에 선 02번 강민우가 양손의 인과율 블레이드를 뽑아 들었다.
푸른 플라스마 전류가 칼날을 타고 사납게 포효했다.
그와 동시에, 공동 상공의 거대한 스피커를 통해 지독하게 일그러진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치직, 치지직.
[결국 여기까지 기어들어 왔구나, K-07.]
중앙 관제실의 고출력 모니터가 켜지며, 붕대를 칭칭 감은 사내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도진우 수석 감사관이었다.
폐사당에서 우진의 은빛 동그라미 척력에 직격당해 그의 머리 위에 떠 있던 4차원 붉은 큐브는 반쯤 깨져나간 채 흉측한 불꽃을 튀기고 있었다.
도진우의 한쪽 눈은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그의 입꼬리는 광기에 젖어 찢어지듯 올라가 있었다.
[네놈이 네 아비 강정호의 흔적을 쫓아 여기까지 올 줄 알았다.
하지만 넌 늦었어.
코드 블랙의 서울 전역 동기화율은 이미 89퍼센트다.
그리고 네 눈앞에 있는 저 아이들이 누군지 알아보겠나?]
도진우의 목소리에 비열한 조소가 뚝뚝 묻어났다.
[15년 전 네 아비가 끝내 지키지 못하고 버려두고 도망쳤던 네 껍데기 동포들이다!
저들의 뇌간에는 본사의 자폭 코드가 직결되어 있어.
네가 저들을 죽이지 않으면 네놈의 심장이 꿰뚫릴 것이고, 네가 저들을 공격하면 저들의 뇌간이 과부하로 폭발해 잿더미가 될 것이다!
어디 한번 부숴봐라, K-07!
네 아비처럼 또다시 동포들을 버리고 홀로 살아남아 보란 말이다!]
도진우의 비열한 포효와 함께, 다섯 명의 검은 동그라미 병기들이 바닥을 박차고 쏘아져 나왔다.
콰아아앙!
다섯 개의 칠흑빛 궤적이 허공을 가르며 우진과 채린을 향해 덮쳐들었다.
지연 시간이 없는 살상 궤도.
사방에서 쇄도하는 푸른 플라스마 칼날과 집속 탄환들이 우진의 전신을 빈틈없이 포위했다.
"우진 씨!"
채린이 비명을 지르며 그리드 오버라이더를 가동하려 했지만, 다섯 개의 검은 동그라미가 뿜어내는 암흑의 흡수력은 오버라이더의 교란 펄스마저 블랙홀처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 절체절명의 파멸의 찰나.
우진은 무기를 들어 올리지 않았다.
그는 카빈 소총을 바닥돌 위로 툭 던져버렸다.
우진의 두 눈이 서늘하게 가라앉으며, 그의 정수리 위 은빛 동그라미(⊙)가 찬란한 백색의 광륜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4단계 '과거 추적'이 한계를 넘어 오버클럭되며 다섯 명의 피실험자들의 정수리와 목덜미를 깊게 관통했다.
우진의 망막 위로 자수정빛의 시간 축이 거꾸로 거칠게 감겨 돌아갔다.
15년 전.
불타는 연구소의 차가운 바닥에서 공포에 질려 울부짖던 일곱 살 아이들의 여린 숨소리.
"우진아…… 살려줘…… 무서워……."
"정호 아저씨…… 불이 났어요……."
그들의 뇌간에 억압되고 봉인되어 있던 15년 전의 순수한 영혼의 기억들이 우진의 신경망을 타고 뜨거운 눈물처럼 흘러들어왔다.
우진의 오른쪽 관자놀이 흉터가 붉게 터져 나가며 핏방울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우진의 입술에서는 단호한 선언이 흘러나왔다.
"아니, 난 아무도 버리지 않아."
우진이 양팔을 벌리며,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다섯 개의 플라스마 칼날을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 얘들아."
우진의 심장 속에 각인되어 있던 방화벽 백신 코드가, 품 안의 프로메테우스와 맞물리며 눈이 멀 것 같은 거대한 은빛 해방의 파동으로 폭발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