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된 연애와 결혼
1. 돌파와 전환
축축하고 서늘한 흙냄새 사이로 매캐한 화약 냄새와 냉각재의 비릿한 전자기 증기가 뒤섞여 밀려들었다.
경기도 일산 외곽, 버려진 대형 화훼 농원의 폐온실 지하는 침묵에 젖어 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콘크리트 계단을 짓밟으며 들이닥치는 수십 발의 군화 소리는 이미 은신처의 아날로그 진공을 무자비하게 찢어발기고 있었다.
"우진 씨, 연결 끝났어요! 어서!"
윤채린이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소리쳤다.
그녀의 손에 들린 직사각형의 금속 단말, 윤상혁 연구원이 남긴 최후의 유산인 그리드 오버라이더에서 푸르스름한 스파크가 맹렬히 튀어 올랐다.
우진은 지체하지 않고 단말의 반대편 전극 패널에 손바닥을 얹었다.
쩌저적, 뇌간을 전동 드릴로 뚫어버리는 듯한 살인적인 통증이 오른쪽 관자놀이의 4cm 수술 흉터를 타고 폭발했다.
"큭……!"
우진의 신경망 깊은 곳에 각인되어 있던 방화벽 백신 코어가 강제로 깨어나며 채린의 은빛 동그라미(○)가 뿜어내는 비간섭 척력 파동과 직렬로 맞물렸다.
지하 벙커의 두꺼운 차폐 철문을 부수고 진입하려던 검은 방탄복의 병기들, 머리 위에 섬뜩한 '검은 동그라미(●)'를 띄운 블랙 큐브 알파 선발대 세 명의 신형이 일제히 허공에서 굳어졌다.
그들의 정수리를 지배하던 살상 알고리즘의 통제선이 일순간 백색의 전자기 폭풍에 휘말려 갈가리 찢겨 나갔다.
콰아아앙!
반경 500미터 이내의 모든 통제 격자망을 10분간 강제 셧다운시키는 인과율 펄스가 은신처 상공으로 솟구쳤다.
천장의 형광등과 집행관들의 무선 락온 통신망, 그리고 폐온실 일대를 샅샅이 훑던 감시 위성의 주파수가 단숨에 진공 상태로 빠져들었다.
"지금이에요! 뒤쪽 배수로로 나가요!"
한서연이 어깨에 걸친 방수 가방을 고쳐 메며 녹슨 비상 탈출구의 빗장을 걷어찼다.
우진은 피를 토하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단말과의 직렬 연결로 시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했지만, 눈앞의 세 적탄 인형들이 0.3초의 지연조차 없이 정지해 있는 이 짧은 틈새는 수백만 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기적이었다.
"채린 씨, 괜찮습니까?"
"저, 저는…… 버틸 수 있어요. 오버라이더의 잔여 냉각 시간이 8분 남았어요. 그 안에 이 반경을 벗어나야 해요!"
세 사람은 젖은 흙벽을 타고 이어진 폐배수로를 기어 나와 온실 뒤편의 울창한 잡목림으로 빠져나왔다.
미리 세워두었던 번호판 없는 진회색 SUV에 몸을 싣자마자 서연이 거칠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차량은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칠흑 같은 농로를 미끄러져 나갔다.
룸미러 너머로 뒤를 응시하던 서연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이미 테헤란로 태성C&I 본사 화재 및 금융 전산망 해킹 테러의 주동자로 강우진과 한서연, 그리고 신원 미상의 20대 여성에 대한 전국 공개 수배 긴급 속보가 앵무새처럼 반복 송출되고 있었다.
"도진우 그자가…… 상임이사회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게 빈말이 아니었군요. 언론사 데스크를 아예 손아귀에 쥐고 흔들고 있어요. 내 선배들, 동기들까지 전부 통제선에 묶여 기사를 쏟아내고 있어요."
서연의 떨리는 목소리에 우진은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새벽안개가 걷혀가는 자유로 위로 드문드문 지나가는 출근 차량들, 그 운전자들의 머리 위에는 여전히 무기력하고 안정된 백색 네모(□)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세상이 붕괴하고 거대한 거미줄이 목을 조여오고 있다는 사실을, 저들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사각형의 궤도 안에서 성실히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도진우의 목적은 본사 최심부로 우리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도심 전체를 바둑판처럼 쪼개서 포위하는 겁니다."
우진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본사로 무작정 쳐들어가는 건 자살행위예요. 태성C&I 옥상 안테나는 잘라냈지만, 넥스트 큐브의 분산 백업 코어는 서울 도심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어요. 역삼역 코어 하나 부쉈다고 끝날 조직이 아니에요."
채린이 조수석에서 태블릿을 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 씨 말이 맞아요. 아버지가 남기신 마이크로 칩의 2차 암호를 조금 전 오버라이더 가동 충격으로 일부 풀어냈는데…… 믿기 힘든 데이터가 나왔어요."
"데이터라니?"
서연이 백미러로 채린을 흘끗 보았다.
"넥스트 큐브가 엔트로피를 조작하고 도시를 통제하는 방식은 공채 비리나 주가 조작 같은 일회성 충격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어요. 그들은 더 깊고 은밀하게, 사회의 최상층 혈통 자체를 사각형 격자망 속에 영구히 박제하려는 프로젝트를 십수 년 전부터 진행해 왔어요."
채린이 화면을 우진 쪽으로 돌렸다.
화면에는 푸른 육면체 로고 아래, 대한민국 정재계 유력 인사 2세들의 상세 프로필과 함께 기괴한 이름의 애플리케이션 분석 보고서가 띄워져 있었다.
[코드명 : H-Square (상류층 전용 프라이빗 매칭 알고리즘)]
[집행 목적 : 차세대 정책 결정권자 노드의 사각 규격화 및 무결점 혈통 동기화]
"H-스퀘어……?"
서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 그거 최근 여의도 정가와 재벌가 자제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유행한다는 극소수 폐쇄형 매칭 서비스잖아요? 초대장이 없으면 가입조차 불가능하고, 유전자 적합도와 성향 분석을 AI로 완벽하게 맞춰준다는……."
"네. 겉으로는 최상류층의 프라이빗한 사교와 연애를 주선하는 플랫폼이지만, 실체는 미러 큐브의 초고도화 버전이에요. 인위적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의 도파민 분비를 유도하고, 사전에 세팅된 배우자와 정략결합을 맺게 만들어 그들의 궤도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검은 네모(■)로 동기화시키는 겁니다."
채린의 손가락이 특정 파일 하나를 탭 했다.
[타깃 노드 : 강지훈(姜智勳, 29세)]
[소속 : 차기 대권 유력 주자 강태욱 의원의 장남 / 미래전략포럼 상임이사]
[동기화 현황 : 94.2% (임계치 근접)]
[최종 집행 각본 : 넥스트 큐브 전략투자본부장 서혜진과의 약혼 발표 및 궤도 완전 고정]
우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강태욱 의원이라면…… 플랫폼 독점 규제법과 빅데이터 보안법안을 단독 발의해서 넥스트 큐브의 숨통을 조이고 있던 유일한 대선 주자 아닙니까?"
"맞아요."
서연이 이를 악물었다.
"만약 그의 하나뿐인 아들이 넥스트 큐브 핵심 임원의 딸과 결혼으로 묶인다면? 그 법안은 즉시 폐기되거나 누더기가 될 테고, 강 의원의 정치 생명과 인생 궤도 역시 통제 시스템의 볼모로 전락하겠죠. 이건 단순한 정략결혼이 아니라 권력의 무혈입성이에요!"
우진은 관자놀이를 짚었다.
서지훈이 죽기 전 지하 7층에서 지껄였던 그 섬뜩한 통제 사회론이 귓가를 맴돌았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맡겨두면 파멸할 뿐이다. 누구와 만나고, 누구와 사랑하며, 언제 죽을지조차 가장 완벽한 사각형의 규격 안에서 배정받아야 한다.'
넥스트 큐브는 무력으로만 세상을 지배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인간의 가장 원초적이고 주체적인 감정인 '사랑'과 '선택'마저 알고리즘의 거미줄로 포식하고 있었다.
"강지훈이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진의 낮고 묵직한 물음에 채린이 지도를 확대했다.
"오늘 오전 11시, 청담동의 한 프라이빗 멤버십 클럽에서 서혜진과의 공식 약혼 서약식이 예정되어 있어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궤도가 시스템에 영구 결속되면, 강지훈의 머리 위 도형은 영원히 검은 네모로 굳어버릴 거예요."
"11시면 앞으로 두 시간 남짓 남았군요."
서연이 핸들을 꺾으며 올림픽대로 진입로로 차를 몰았다.
"공개 수배자가 대낮에 청담동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건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짓이에요. 하지만…… 저 결혼이 성사되면 우리가 설 자리는 완전히 사라져요."
우진이 피 묻은 소매를 걷어 올리며 시선을 정면으로 던졌다.
"불구덩이라면 이미 발을 들였습니다. 가보죠. 기계의 각본에 영혼을 파는 연애가 어떤 비극을 낳는지, 그 눈으로 직접 보게 만들어줘야겠습니다."
2. 박제된 연인들
청담동 명품 거리 이면, 잿빛 화강암으로 둘러싸인 5층 규모의 복합 문화 공간 '아틀리에 루멘'.
철저한 회원제로 운영되는 이곳은 발렛 파킹 요원부터 입구의 보안 요원까지 삼엄한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숨어든 회색 SUV 안에서 우진은 숨을 가다듬었다.
채린이 건넨 특수 렌즈와 위장용 안경을 착용하자, 수배 전단의 얼굴 윤곽이 미세하게 굴절되어 평범한 인상으로 바뀌었다.
서연은 미리 준비해 둔 모 방송사 프리랜서 촬영 스태프 비표를 목에 걸었다.
"행사장 3층 테라스 가든에 기자 몇 명이 취재 명목으로 들어가 있어요. 공식적인 연예부 기자가 아니라 상류층 전문 독립 웹진 소속들이라 통제가 덜해요. 우진 씨는 내 촬영 보조로 들어가는 겁니다."
"채린 씨는요?"
"저는 지하 주차장에서 차량에 설치된 분산형 아날로그 안테나로 H-스퀘어의 로컬 서버 패킷을 감시할게요. 약혼식이 진행되는 동안 서버에서 강지훈의 뇌파와 신경망으로 강제 동기화 신호를 쏠 거예요. 그 주파수를 포착하면 바로 두 분 인이어로 알려드릴게요."
우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서연과 함께 비상 계단을 밟았다.
3층 테라스 가든은 은은한 클래식 선율과 최고급 샴페인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순백의 꽃장식과 호화로운 샹들리에 아래, 정재계 유력 인사들과 화려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하객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우진의 눈에 비친 풍경은 전혀 달랐다.
눈앞에 가득 찬 것은 로맨틱한 축제가 아니라, 거대한 무덤이었다.
하객들의 정수리 위에는 예외 없이 무겁게 가라앉은 사각형들이 떠 있었다.
어떤 이는 일상의 권태를 나타내는 흐릿한 백색 네모(□)를, 또 어떤 이는 시스템의 이익에 영합하여 짙은 회색으로 오염된 네모를 매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사각형의 꼭짓점에서는 허공으로 가느다란 검은 실선들이 이어져 있었다.
그들의 미소, 우아한 손짓, 절제된 웃음소리까지도 보이지 않는 꼭두각시 줄에 의해 정교하게 조율된 기계 인형들의 연극에 불과했다.
"저기 있어요. 저 남자가 강지훈이에요."
서연이 카메라 렌즈를 조작하는 척하며 턱 끝으로 테라스 중앙을 가리켰다.
단정한 네이비 수트를 입은 젊은 남자가 유리 난간 곁에 홀로 서 있었다.
차기 대선 주자의 장남이자 촉망받는 싱크탱크의 이사.
그러나 우진이 시야의 초점을 좁히자마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강지훈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것은 평범한 네모가 아니었다.
그것은 이미 테두리가 칠흑 같은 흑색으로 물들어 내부로 파고들고 있는, 반쯤 썩어 들어간 '검은 네모(■)'였다.
네모의 중심은 마치 심장의 박동처럼 기괴하게 수축과 팽창을 반복하고 있었고, 정수리 한가운데에는 관자놀이 흉터를 향해 깊게 파고드는 굵은 통제선이 박혀 있었다.
그 통제선은 스마트폰을 쥐고 있는 그의 오른손으로 이어져 있었다.
화면에는 H-스퀘어 앱의 분홍빛 하트 아이콘이 끊임없이 깜빡이고 있었다.
강지훈의 눈동자는 멍하니 풀려 있었다.
그는 눈앞에 다가온 약혼녀, 넥스트 큐브 전략투자본부장 서혜진을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영혼이 없었다.
마치 고도로 프로그래밍된 NPC가 정해진 대사를 출력하기 위해 입꼬리를 끌어올리는 것과 같았다.
"혜진 씨, 오늘 정말 아름답군요. 우리가 이렇게 만난 건…… 정말 운명 같습니다."
강지훈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매끄러웠으나 기괴할 정도로 감정의 굴곡이 메말라 있었다.
우진은 숨을 죽인 채 1단계 외형 인지에서 2단계 심층 구조 분석으로 시선을 끌어올렸다.
지끈, 관자놀이의 수술 흉터가 날카롭게 박동하며 안압이 차올랐다.
강지훈의 머리 위 검은 네모의 내부 구조가 투명하게 벗겨져 망막에 맺혔다.
그것은 자유의지에 의한 사랑이 아니었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가시광선 주파수와 H-스퀘어 앱의 알고리즘이 그의 뇌간 변연계를 인위적으로 자극하고 있었다.
서혜진의 향수 냄새, 그녀의 제스처, 특정 단어의 억양이 입력될 때마다 강지훈의 뇌 속에서는 조작된 옥시토신과 도파민이 강제로 분비되고 있었다.
그는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화학적·신경학적으로 '사랑하도록 강제 세뇌'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맞은편의 서혜진.
순백의 실크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정수리 위에는, 우진이 과거 태성C&I 옥상과 면접장에서 목격했던 것과 똑같은 '완벽하게 고정된 검은 네모'가 떠 있었다.
진동도, 떨림도 없는 절대 영도의 기계화 단말.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강지훈을 영구적으로 사각 격자망에 결속시키기 위해 파견한, 살아있는 통제용 자물쇠였다.
"지훈 씨, 우리의 결합은 단순한 가문의 결합이 아니에요. 세상을 더 완벽하고 질서 있게 만드는 가장 이상적인 궤도의 시작이죠."
서혜진이 차가운 눈빛으로 미소 지으며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다.
치익, 우진의 귀에 꽂힌 인이어에서 채린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렸다.
"우진 씨! H-스퀘어 서버에서 대규모 패킷 송출이 시작됐어요! 약혼 서약 반지를 교환하는 순간, 반지에 내장된 NFC 칩과 스마트폰 앱이 연동되어 강지훈의 뇌파 동기화율을 100%로 끌어올릴 거예요. 그렇게 되면 비가역적 신경 손상이 일어나서 영원히 자아를 되찾지 못해요!"
시간이 없었다.
사회자가 단상으로 올라서며 마이크를 잡았다.
"내외 귀빈 여러분, 지금부터 대한민국을 이끌어갈 두 젊은 지성의 영원한 동행을 약속하는 약혼 서약식을 거행하겠습니다. 신랑, 신부께서는 서약의 반지를 교환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혜진이 벨벳 상자에서 검은 티타늄 재질의 반지를 꺼내 들었다.
강지훈의 손이 마치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천천히 허공으로 올라갔다.
그의 머리 위 검은 네모가 붉은빛을 띠며 급격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동기화율 97%, 98%…….
그의 눈동자에서 마지막 남아 있던 인간적인 생기의 빛이 소멸해 가고 있었다.
그대로 반지가 손가락에 끼워지는 순간, 또 하나의 영혼이 시스템의 부품으로 박제될 터였다.
3. 알고리즘의 민낯
"취재 협조 요청합니다."
낮고 단호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테라스 가장자리에 서 있던 강우진이 성큼성큼 단상을 향해 걸어 나갔다.
서연 역시 망설임 없이 대형 카메라의 외장 플래시를 최대 출력으로 터뜨렸다.
번쩍!
강렬한 백색 섬광이 테라스 가든을 집어삼켰다.
샴페인을 마시던 하객들이 눈을 찌푸리며 웅성거렸고, 단상 곁에 서 있던 검은 정장의 보안 요원들이 즉각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뭐야? 저 자들 누구야! 경호팀, 당장 끌어내!"
주최 측 관계자가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우진의 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달려드는 두 명의 보안 요원이 우진의 팔을 꺾으려 든 순간, 우진의 시야에 푸른 궤적선이 번뜩였다.
2단계 심층 분석 능력, '변화 감지'.
상대가 근육을 긴장시키고 체중을 싣기 0.3초 전, 그들의 타격 궤도가 반투명한 잔상으로 우진의 망막에 미리 펼쳐졌다.
우진은 반 보 뒤로 물러서며 첫 번째 요원의 뻗은 손목을 낚아채 체중을 이용해 바닥으로 메쳤다.
쿵!
이어 품 안으로 파고드는 두 번째 요원의 명치를 팔꿈치로 정확하게 가격했다.
순식간에 두 명의 거구들이 바닥을 뒹굴며 신음했다.
테라스 전체가 비명과 충격에 휩싸였다.
서혜진의 눈빛이 일순간 서늘하게 굳어졌다.
그녀의 머리 위 검은 네모 표면으로 붉은색 제어 코드가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K-07……? 네놈이 어떻게 여기까지……."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재벌가 영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계음이 섞인 차가운 시스템의 질의어였다.
우진은 서혜진을 지나쳐 멍하니 멈춰 서 있는 강지훈의 멱살을 잡았다.
"정신 차려, 강지훈!"
"누, 누구…… 혜진 씨와 나는…… 운명……."
강지훈의 초점 없는 눈동자가 허공을 맴돌았다.
그의 손가락은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고, 스마트폰에서는 신경을 마비시키는 고주파음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우진은 망설이지 않고 강지훈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낚아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군화 뒷굽으로 액정을 짓밟았다.
콰직!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며 내부 기판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순간, 강지훈의 머리 위로 이어져 있던 검은 통제선 한 가닥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강지훈이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무릎을 꿇었다.
스마트폰을 통해 뇌간으로 직접 쏟아져 들어가던 도파민과 세로토닌 강제 주입이 끊어지자, 극심한 신경 금단 현상이 그의 전신을 강타한 것이다.
"지훈 씨!"
서혜진이 달려들며 드레스 품 속에서 초소형 인과율 집속 단말을 꺼내 들었다.
푸른 스파크가 그녀의 손끝에서 응축되었다.
하지만 서연이 먼저 움직였다.
서연은 들고 있던 방송용 조명 배터리 팩을 서혜진의 손목을 향해 전력으로 집어던졌다.
투깡!
무거운 배터리가 서혜진의 단말을 강타해 튕겨 날려 보냈다.
서혜진의 고정된 검은 네모가 미세하게 떨리며 연산 지연을 일으켰다.
우진은 무릎을 꿇고 고통스러워하는 강지훈의 턱을 억세게 잡아 올렸다.
"네가 느낀 사랑이 진짜 네 감정 같았나? 네가 그녀의 눈을 보고 가슴이 뛰었던 게 정말 너 자신의 선택이었을 것 같아?"
"쿨럭…… 무, 무슨 소릴…… 우리는 앱을 통해…… 영혼의 파트너로……."
"그 앱이 널 사육한 거야!"
우진이 소리쳤다.
"네가 좋아하는 음악, 네가 반응하는 향기, 네가 심리적으로 결핍을 느끼는 약점을 데이터로 분석해서 저 여자의 외모와 말투에 덮어씌운 거다. 넌 저 여자를 사랑한 게 아니라, 네 뇌가 도파민을 분비하도록 설계된 완벽한 미끼를 문 개에 불과해!"
"아, 아니야…… 그럴 리가……!"
강지훈이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그의 머리 위에 위태롭게 떠 있던 검은 네모의 모서리에 쩍, 하고 깊은 균열이 생겼다.
자신의 감정이 조작되었다는 의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자아가 기계의 각본을 거부하기 시작한 순간, 시스템의 결속선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틈을 타 우진은 자신의 왼손을 강지훈의 정수리를 향해 뻗었다.
그의 오른쪽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터져 나오며 선혈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4단계 능력, '과거 추적(Past Tracing)'.
우진의 시야가 시간을 거슬러 역류하기 시작했다.
강지훈의 도형에 축적된 지난 6개월간의 인과율 좌표가 자수정빛 궤적선이 되어 우진의 뇌간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4. 박탈당한 선택권
시간이 거꾸로 회전했다.
우진의 망막에 펼쳐진 것은 강지훈이 H-스퀘어라는 덫에 걸려든 최초의 순간이었다.
6개월 전, 아버지 강태욱 의원의 서재.
강지훈은 플랫폼 규제법안 초안을 검토하며 고뇌하고 있었다.
그때 날아든 의문의 VIP 초대장.
'당신의 영혼에 가장 완벽하게 부합하는 유일한 반쪽을 찾아드립니다.'
호기심에 앱을 설치한 강지훈이 자신의 생체 데이터와 설문을 입력한 순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넥스트 큐브의 중앙 알고리즘이 가동되었다.
우진의 눈앞에 시스템의 잔인한 연산 로그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타깃 분석 : 피험자 강지훈]
[결핍 요소 : 엄격한 부친에 대한 인정 욕구, 독립성에 대한 갈망, 모성적 온기 추구]
[대응 개체 설정 : 서혜진]
[행동 지침 : 피험자의 심박수가 상승하는 특정 주파수의 향수 투여, 발언 빈도 6:4 비율 유지, 피험자의 논리에 대한 92% 무조건적 지지 및 가스라이팅]
우진은 보았다.
첫 만남 장소였던 한남동의 레스토랑.
서혜진의 귓속에 꽂혀 있던 인이어로 넥스트 큐브 관제실의 명령이 실시간으로 하달되고 있었다.
'지금 미소를 지어라. 와인 잔을 오른손으로 만지작거려라. 그가 부친과의 갈등을 털어놓을 때 가볍게 손등을 덮어라.'
그 모든 것은 사랑의 교감이 아니었다.
도살장에 가축을 몰아넣기 위해 뿌려둔 먹이의 궤적이었다.
강지훈이 그녀에게 반했다고 착각했던 그 수많은 로맨틱한 순간들은, 오직 그의 뇌간에 박힌 생체 칩 수신 코드를 자극하기 위해 넥스트 큐브 본사 슈퍼컴퓨터가 1초에 수천 번씩 시뮬레이션한 결과값에 불과했다.
더욱 끔찍한 것은 그 뒤에 이어진 파멸의 각본이었다.
[최종 목표 : 약혼 성립 후 3개월 이내 강태욱 의원의 비자금 장부 탈취]
[대체 집행 : 강지훈의 명의로 된 페이퍼 컴퍼니 설립 및 300억 대 배임 혐의 조작]
[결과 : 강태욱 의원 정계 은퇴 및 의문의 심근경색(검은 세모 집행), 강지훈 구속 및 옥중 자살(엔트로피 상쇄 노드 소모)]
결혼은 축복이 아니었다.
아버지를 사회적으로 매장하고, 아들 본인은 모든 죄를 뒤집어쓴 채 감옥에서 목을 매달도록 정해진 사형 집행 통지서였다.
"크아아악!"
우진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과거 추적을 통해 읽어낸 끔찍한 진실의 파편을, 우진은 자신의 방화벽 백신 코어에 실어 강지훈의 신경망으로 여과 없이 역송출했다.
"봐라! 이게 네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운명의 실체다!"
우진의 일갈과 함께, 강지훈의 뇌리에 시스템의 연산 로그와 서혜진의 차가운 지령문들이 환등기처럼 강제로 투영되었다.
강지훈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가 가장 순수하게 믿었던 첫사랑의 기억, 그녀가 자신을 위로하며 속삭였던 밀어들이 사실은 자신과 아버지를 도륙하기 위해 작성된 살상 알고리즘의 대사였다는 사실이 그의 영혼을 난도질했다.
"거짓말…… 거짓말이야……! 혜진 씨, 당신이…… 당신들이 어떻게 나한테……!"
강지훈이 바닥을 긁으며 절규했다.
그의 정수리를 짓누르고 있던 검은 네모의 중심이 쩍 갈라지며, 칠흑 같던 외벽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다.
맹목적인 순응이 깨어지고,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차오른 인간으로서의 배신감과 분노가 시스템의 인과율을 거부하는 거대한 파동이 되어 솟구쳤다.
"경호팀! 쏴라! 영구 소거해!"
비틀거리며 일어선 서혜진이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그녀의 손에 들린 인과율 집속 권총이 우진의 심장을 겨누었다.
탕!
화약 소리가 아닌, 공간을 찢는 날카로운 고주파음과 함께 푸른빛의 압축된 격자 탄환이 우진을 향해 날아들었다.
우진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필요가 없었다.
"안 돼!"
바닥에 쓰러져 있던 강지훈이 몸을 날려 우진의 앞을 가로막았다.
푸슈슉!
푸른 탄환이 강지훈의 오른쪽 어깨를 관통했다.
살점이 타들어 가는 지독한 냄새와 함께 피가 튀었다.
하지만 강지훈의 눈빛은 더 이상 흐리멍덩한 인형의 그것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타인을 구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기계의 명령을 가로막은 자의 형형한 불꽃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파아아앙!
강지훈의 머리 위에서 부서져 내리던 검은 네모의 파편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잔해를 뚫고, 아래에서부터 날카로운 꼭짓점을 세운 눈부신 기하학체가 솟구쳐 올랐다.
백색 세모(△).
일상의 정체와 통제를 거부하고,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려는 자만이 띄울 수 있는 주체적 각성의 궤도였다.
"내 인생은…… 너희 따위 기계 찌꺼기들이 정하는 게 아니야!"
강지훈이 피를 흘리며 포효했다.
그의 백색 세모에서 뿜어져 나온 순수한 자유의지의 충격파가 테라스 가든 전체를 뒤흔들었다.
서혜진의 머리 위에 떠 있던 고정된 검은 네모가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퍽, 하는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서혜진은 경추 제어 소켓에서 스파크를 튀기며 바닥으로 쓰러져 경련했다.
그녀의 입에서 검붉은 피와 함께 기계적 오류 코드가 쏟아져 나왔다.
[FATAL ERROR : Target Node Decoupled]
[궤도 이탈 감지 : 강지훈 백색 세모 전환 / 인과율 결손 발생 +42,000 EP]
5. 장기 플랜의 그림자
"우진 씨, 서연 씨! 경찰과 본사 특수팀이 건물 1층 로비를 봉쇄했어요! 3분 뒤면 옥상과 테라스로 들이닥쳐요!"
인이어 너머로 채린의 긴박한 외침이 들려왔다.
하객들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비명을 지르며 비상구로 도망치고 있었다.
우진은 쓰러진 강지훈을 부축해 일으켰다.
"걸을 수 있겠습니까?"
"쿨럭…… 당신, 대체 누구요? 내게…… 뭘 보여준 겁니까?"
강지훈이 피 묻은 손으로 우진의 팔을 움켜쥐었다.
그의 눈에는 배신에 대한 고통과 함께, 진실을 알게 된 자의 서늘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당신을 가축으로 만들려던 자들의 실체입니다."
우진이 차갑게 답했다.
"당신 아버지를 찾아가십시오. 그리고 오늘 당신이 본 것, 그 앱의 알고리즘과 저들이 꾸민 비자금 각본을 전부 털어놓으세요. 아버지의 법안이 통과되지 않으면, 당신뿐만 아니라 이 나라 전체가 저 사각형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서연이 자신의 외투를 벗어 강지훈의 피 흘리는 어깨를 감싸주었다.
"강지훈 씨, 우릴 믿어요. 당신 차는 지하 1층에 있죠? 비상용 서비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로 내려가서 즉시 빠져나가요. 저들은 지금 3층 테라스로 모든 병력을 집중하고 있어요."
강지훈은 부서진 서혜진의 티타늄 반지와 바닥에 널브러진 스마트폰 잔해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내 모든 감정이…… 가짜였다니……."
"가짜를 알아챘으니, 이제부터 당신이 선택하는 게 진짜입니다."
우진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가십시오!"
강지훈은 비틀거리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방 쪽 비상용 통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 위에 뜬 백색 세모는 상방을 향해 꺾여 올라가며 눈부신 궤적을 남기고 있었다.
우진은 서혜진이 떨어뜨린 초소형 인과율 단말과 그녀의 개인 태블릿을 낚아챘다.
단말 화면에는 본사 감사실의 붉은 경보가 어지럽게 번쩍이고 있었다.
[발신 : 넥스트 큐브 본사 통제감사실 도진우 수석 감사관]
[메시지 : H-스퀘어 노드 결속 실패 확인.
K-07 및 오염 노드 전원 현장 즉각 소거 승인.
본사 지하 동면 시설 Subject-02 기동 완료.]
화면을 넘기던 서연의 숨이 턱 막혔다.
그녀가 가리킨 태블릿의 최상위 폴더에는, 과거 지하 7층에서 사망한 서지훈의 결재 서명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극비 프로젝트 문서가 들어 있었다.
[프로젝트 네모 장기 집행 계획서 : 사회 상류층 3대 규격화 로드맵]
문서의 내용은 경악스러웠다.
정치인, 법조인, 언론사 사주, 재벌가 후계자 등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200여 개 핵심 가문의 자제들을 H-스퀘어를 통해 강제로 짝짓고, 그 사이에서 태어날 3세대 아이들의 뇌간에 태어나자마자 유전자 나노 전극을 심어 '선천적 검은 네모'로 태어나게 만들겠다는 계획.
사회의 지배 계급 자체를 시스템의 완벽한 꼭두각시 혈통으로 대체하여, 50년 이내에 국가 전체의 입법, 사법, 행정을 한 치의 저항도 없는 거대한 기계의 사각 틀 속에 영구히 박제하겠다는 서지훈과 넥스트 큐브의 장기 플랜이었다.
"미쳤어……."
서연의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이건 사회를 통제하는 수준이 아니에요. 인간이라는 종(種) 자체를 개조해서 가축화하겠다는 뜻이에요……!"
우진의 눈빛이 칼날처럼 번뜩였다.
서지훈은 죽었지만, 그가 설계해 둔 뒤틀린 거미줄은 여전히 도시의 척추를 파먹으며 살아서 숨 쉬고 있었다.
콰아아앙!
테라스의 방탄 유리문이 폭파되며 검은 방탄 헬멧을 쓴 중무장 진압 부대가 들이닥쳤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일체의 떨림도 없는 완벽한 '검은 네모(■)'들이 도열해 있었다.
"목표 확인! K-07 및 한서연, 사살하라!"
적들의 총구가 일제히 불을 뿜으려는 찰나, 우진은 서연의 허리를 감싸 안고 테라스 난간 너머로 몸을 던졌다.
타타타탕!
머리 위로 쏟아지는 탄환들이 대리석 난간을 산산조각 냈다.
허공으로 낙하하는 우진의 등 뒤로, 채린이 운전하는 진회색 SUV가 아틀리에 루멘의 1층 어닝 천막 아래로 정확하게 미끄러져 들어왔다.
쿠웅!
어닝을 찢으며 보닛 위로 떨어진 두 사람은 능숙하게 굴러 차창 안으로 몸을 던졌다.
"꽉 잡아요!"
채린이 운전대를 꺾으며 후진 기어를 넣자, 차량은 요란한 타이어 마찰음을 내며 청담동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뒤편 옥상에서 푸른빛의 인과율 탄환들이 도로를 꿰뚫으며 아스팔트를 녹여버렸지만, 차량은 이미 대로변으로 빠져나간 뒤였다.
차 안으로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 찼다.
우진은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서혜진의 태블릿을 응시했다.
화면 하단에 떠오른 새로운 시스템 경보.
[경고 : 결손 엔트로피 임계치 초과 (+120,500 EP)]
[통제감사실 긴급 조치 : 본사 지하 4층 동면 격리구역 전체 개방]
[Subject-02부터 Subject-06 전원 각성 및 출격 대기]
민도현에 이어, 15년 전 연구소에서 납치되었던 우진의 동포들이 차례로 살상 병기가 되어 깨어나고 있었다.
도진우는 남은 아이들의 목숨을 인질로 삼아 도시 전체를 피로 물들일 작정이었다.
우진은 피 묻은 주먹을 쥐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이제 남은 길은 오직 하나, 괴물들의 심장부인 넥스트 큐브 본사 최심부로 쳐들어가 그 잔혹한 거미줄을 뿌리째 뽑아버리는 것뿐이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