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린의 사연
1. 자유로의 어둠 속에서
자유로를 질주하는 카니발 밴의 차체 밑바닥에서 거친 마찰음이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타이어가 아스팔트의 미세한 균열을 짓이기며 내는 진동이 차체 골조를 타고 올라와 뒷좌석 시트에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강우진은 피비린내가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억누르며 이를 악물었다.
갈비뼈가 삐걱거리며 폐부를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늑간을 타고 찢어발기듯 번져 나갔다.
"우진 씨, 제발 숨 참지 말고 천천히 내쉬어요. 상처가 더 벌어져요."
한서연이 피에 젖은 거즈를 꾹 누르며 파리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손바닥 사이로 배어 나온 검붉은 혈액이 우진의 셔츠를 타고 번져 나가 허벅지 위로 뚝뚝 떨어졌다.
우진은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핏발 선 눈을 감았다가 떴다.
망막 위에는 여전히 잔상처럼 자수정빛 궤적선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과거 추적(Past Tracing).
시간의 축을 역행하여 민도현의 경추에 박혀 있던 티타늄 칩의 결합부를 꿰뚫어 보던 바로 그 감각.
그리고 15년 전의 수술대 위에서 척추를 짓밟히면서도 어린아이의 생명을 지키려 몸부림치던 아버지의 부서진 어깨선이 생생한 환통처럼 심장에 박혀 있었다.
우진은 바지 주머니 속에서 차갑게 굳어 있는 작은 쇳조각을 쥐어 잡았다.
50원 동전 크기의 티타늄 칩 파편.
그 표면에 레이저로 각인되어 있던 차가운 글귀가 손바닥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PROJECT NEMO : PROTOTYPE / Node-1 / Subject-08 : 민도현].
세뇌에서 풀려나 마지막 순간 제 몸을 던져 자폭했던 사내.
그가 죽어가며 우진의 귓가에 남겼던 처절한 유언이 귓전을 때렸다.
'02번부터 06번까지…… 본사 심층 냉각 격벽에 얼려져 있어. 우리를…… 제발…….'
가슴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가 관자놀이의 4센티미터 흉터를 다시금 펄펄 끓는 인두처럼 달궜다.
"우진 씨, 정신 잃으면 안 돼요."
서연이 다시 압박 붕대를 덧대며 우진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괜찮습니다. 아직…… 정신 멀쩡합니다."
우진이 쉰 목소리로 답하며 앞좌석을 바라보았다.
운전대를 쥐고 있는 윤채린의 가느다란 어깨가 돌처럼 굳어 있었다.
룸미러 속으로 마주친 채린의 눈동자는 서늘한 긴장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은빛 동그라미(○)가 차 안의 공기를 조용히 밀어내며 희미한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자유로 양옆으로 늘어선 가로등 불빛이 빠른 속도로 차창을 스쳐 지나갔다.
빛줄기가 실내를 가를 때마다 서연의 창백한 얼굴과 우진의 핏빛 셔츠가 번갈아 드러났다.
"방금 테헤란로 일대 전면 통제 풀렸어요."
채린이 대시보드에 거치된 구형 무전 단말기를 힐끗 보며 말했다.
"경찰 무전망에서는 단순 가스 폭발 및 변전실 합선 사고로 종결짓고 있어요. 넥스트 큐브 놈들이 이미 언론과 경찰 상부를 덮어버린 거예요."
"그렇다면 추적망은……?"
서연이 창밖을 경계하며 물었다.
"지상 교통망 스캐너는 내 동그라미 척력으로 차량 번호판 인식을 전부 튕겨냈어요. 놈들이 우리 차의 물리적 동선을 실시간으로 락온하지는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안심하긴 일러요. 서지훈 그자가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냄새를 맡고 따라붙을 테니까요."
우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서지훈은…… 이미 끝났을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서연이 놀란 눈으로 우진을 바라보았다.
"민도현이 자폭하기 직전, 그리고 옥상에서 안테나를 끊었을 때 시스템 관제 콘솔에 치명적인 역류가 발생했습니다. 시스템은 실패한 부품을 살려두지 않아요. 최원석 부회장도 그 자리에서 폐기당했습니다. 서지훈 역시…… 엔트로피 결손을 메우지 못한 대가를 치렀을 겁니다."
우진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것은 추측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논리를 직접 몸으로 겪어온 자만이 알 수 있는 절대적인 확신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남은 거죠?"
서연의 물음에 우진의 뇌리에 옥상에서 마주쳤던 사내의 형상이 떠올랐다.
머리 위에 4차원 다포체 형태로 역회전하던 붉은 큐브.
넥스트 큐브 본사 통제감사실 수석 감사관, 도진우.
"본사 놈들이 직접 나설 겁니다. 껍데기뿐인 지부 관리자가 아니라, 도시의 궤도를 직접 난도질하는 진짜 집행자들 말입니다."
우진이 피 섞인 마른침을 삼켰다.
차량은 어느새 일산 외곽의 인적이 드문 자유로 나들목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주변의 네온사인과 화려한 도심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메마른 갈대밭과 어두컴컴한 농수로가 펼쳐졌다.
문명과 전산망의 숨통이 닿지 않는 어둠의 경계선이었다.
2. 버려진 온실과 아날로그 은신처
카니발은 비포장 흙길을 한참 동안 덜컹거리며 들어갔다.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길 끝에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래전에 폐업하여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대형 화훼 농원의 비닐하우스 단지였다.
찢겨 나간 비닐 차막 사이로 녹슨 철골들이 흉물스럽게 드러나 있었고, 잡초가 무릎 높이까지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채린은 능숙하게 차를 몰아 덤불 사이에 가려져 있던 녹슨 함석 창고 안으로 밀어 넣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셔터가 닫히자, 완벽한 암흑이 차 안을 덮쳤다.
"도착했어요. 여기라면 도시 격자망의 신호가 전혀 닿지 않아요."
채린이 시동을 끄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조수석 글러브 박스에서 묵직한 구형 맥라이트 손전등을 꺼내 켰다.
노란빛의 아날로그 필라멘트 불빛이 창고 안의 먼지 구덩이를 비추었다.
창고 한쪽 구석에는 낡은 합판으로 위장된 지하 계단 통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서연이 우진의 오른팔을 자신의 어깨에 두르고 부축했다.
우진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갈비뼈 부근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입술을 깨물며 묵묵히 버텨냈다.
이 정도의 육체적 고통은, 15년 동안 어둠 속에서 척수를 뽑힌 채 연산 핵으로 갈려 나갔던 아버지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은 서늘하고 퀴퀴한 흙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두꺼운 방화문이 열리자 드러난 내부는 겉모습과 전혀 달랐다.
콘크리트 벽면 전체가 3중 구리 동판과 탄소 섬유 메시로 빽빽하게 차폐되어 있었다.
외부의 전자기파와 전파 신호를 물리적으로 100% 흡수하여 차단하는 패러데이 케이지(Faraday Cage) 구조였다.
방 한가운데에는 낡은 야전 침대 두 개와 구형 디젤 발전기, 그리고 인터넷 선조차 연결되지 않은 수동 타자기와 구형 브라운관 모니터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모든 장비가 디지털 통신망과 완벽히 격리된 순수한 폐쇄형 아날로그 시스템이었다.
"우진 씨, 일단 여기 누워요. 서연 언니, 선반 세 번째 칸에 있는 구급 상자 좀 꺼내줘요."
채린이 능숙하게 손전등을 천장 걸이에 걸며 지시했다.
우진이 침대에 몸을 뉘이자 서연이 신속하게 구급 상자를 가져왔다.
채린은 가위로 우진의 피 묻은 셔츠를 망설임 없이 잘라냈다.
드러난 우진의 가슴과 옆구리에는 시퍼런 멍과 함께 깊게 찢긴 자상이 선명했다.
민도현의 주먹에 실려 있던 인과율의 충격파가 피부 진피층까지 검게 태워놓은 흔적이었다.
채린은 알코올 소독솜을 핀셋으로 집어 우진의 상처 부위에 가져다 댔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강렬한 작열감이 덮쳐왔다.
우진의 턱 근육이 경련하듯 굳어졌다.
"조금만 참아요. 봉합은 안 해도 되지만 소독하지 않으면 패혈증 와요."
채린의 손길은 거칠었지만 망설임이 없었다.
그것은 단순한 여고생의 손놀림이 아니었다.
총상이나 자상, 골절 같은 중상을 수없이 다뤄본 사람 특유의 숙련된 감각이었다.
서연이 지혈제를 붓고 압박 붕대를 우진의 몸에 단단히 감아 올렸다.
숨이 턱 끝까지 막히는 압박감이 지나간 뒤에야 우진의 호흡이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고맙습니다, 두 분 다."
우진이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서연이 이마의 식은땀을 닦아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살아 돌아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 계단에서 도현이라는 사람이 자폭할 때…… 정말 끝난 줄 알았어요."
서연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끝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4,200명의 목숨을 구했다는 안도감보다, 눈앞의 우진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사투에 대한 연민과 공포로 짓눌려 있었다.
채린은 피 묻은 거즈를 비닐봉지에 쓸어 담고 알코올로 손을 닦아냈다.
그리고는 구석의 작은 석유버너에 성냥을 그어 불을 붙였다.
치이익 소리를 내며 푸른 불꽃이 올라오고, 낡은 주전자에 물이 끓기 시작했다.
채린은 말없이 머그잔 세 개에 믹스커피를 털어 넣었다.
싸구려 커피 향이 지하 은신처의 차가운 흙냄새를 조금씩 밀어냈다.
우진은 벽에 기대어 앉아 채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교복 블라우스 소매를 걷어 올린 채린의 가녀린 팔뚝 안쪽에, 가로로 길게 그어진 오래된 흉터들이 눈에 들어왔다.
단순한 상처가 아니었다.
수술용 메스가 정교하게 지나간 자리.
그리고 무언가를 강제로 주입하거나 추출하기 위해 수없이 바늘을 찔러 넣었던 섬유화된 바늘 자국들이었다.
우진의 시선이 채린의 머리 위로 향했다.
그곳에는 여전히 은은한 백색과 푸른빛이 감도는 완벽한 원환, 은빛 동그라미(○)가 고요히 떠 있었다.
도시의 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시스템의 꼭두각시 줄이 연결되지 않은 독립된 궤도.
하지만 그 아름다운 원환의 둘레에는 미세하고 날카로운 균열들이 흉터처럼 얽혀 있었다.
마치 거대한 외압에 의해 강제로 비틀렸다가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3. 흉터와 식별 코드
채린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서연과 우진에게 건넸다.
우진은 따뜻한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온기가 굳어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로 스며들었다.
"채린 양."
우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채린은 자신의 몫인 커피잔을 든 채 낡은 드럼통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두 다리가 허공에서 불안하게 흔들렸다.
"이곳은…… 평범한 안전가옥이 아니군요."
우진의 말에 채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눈치챘네요. 15년 전에 아버지가 직접 만든 곳이에요. 넥스트 큐브의 차폐벽 기술을 그대로 빼돌려서, 지상에 어떤 통제 신호가 떨어져도 이곳 지하만큼은 완벽한 진공 상태로 유지되도록 설계하셨죠."
"채린 양의 아버님…… 윤 연구원님 말씀입니까?"
서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채린의 손가락이 머그잔 표면을 강하게 문질렀다.
"윤상혁. 15년 전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의 선임 연구원. 그리고…… 강정호 박사님의 가장 가까운 조수였던 사람."
채린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우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버지의 연구 노트 구석마다 적혀 있던 영문 이니셜 'S.H. YOON'.
도시 전체의 궤도 수식을 함께 검증하고, 항상성 네트워크의 모순을 밝혀내려 했던 바로 그 연구원의 이름이었다.
"그럼 채린 양도…… 아버님을 통해 네모 프로젝트를 알게 된 건가요?"
서연의 물음에 채린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자조적으로 비틀려 올라갔다.
"아뇨. 머리로 배운 게 아니에요. 몸으로 박혀 들어온 거지."
채린이 천천히 왼손을 들어 자신의 목덜미 뒤쪽을 덮고 있던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서연이 숨을 들이켰다.
목덜미와 귓바퀴 바로 뒤편, 두개골 기저부에 선명한 직사각형 형태의 함몰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가로 3센티미터, 세로 2센티미터 크기의 정교한 절개선.
그 중심에는 미세한 금속성 단말 핀의 흔적이 검푸른 문신처럼 피부 속에 박혀 있었다.
우진의 관자놀이에 새겨진 4센티미터의 흉터와는 형태가 달랐지만, 그 흉터가 지닌 악의와 기계적 냉혹함은 완벽히 동일했다.
"이게 뭔지 알겠어요, 아저씨?"
채린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우진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생체 제어 단말 소켓……."
"맞아요. 아저씨는 1세대 프로토타입이었죠? K-07. 관자놀이 뇌간에 직접 칩을 때려 박아 궤도를 수신하게 만들었던 미완성 실험체."
채린이 머리카락을 다시 내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짙은 어둠이 깔렸다.
"하지만 15년 전 연구소가 불타고 강정호 박사님이 코어로 끌려간 뒤, 놈들은 방식을 바꿨어요. 뇌간을 직접 쑤시면 뇌세포가 타버려 폐기율이 너무 높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신경계에 나노 유전자 전극을 심어두고, 2차 성징이 오기 전에 목덜미 소켓으로 궤도를 동기화시키는 방식을 개발했죠. 그게 바로…… '2세대 프로젝트'예요."
은신처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석유버너의 불꽃이 쉭쉭거리며 타들어 가는 소리만이 적막을 깼다.
우진은 주머니에서 꺼낸 민도현의 티타늄 칩 파편을 바라보았다.
민도현은 1세대였다.
그는 기계화 인간 병기로 개조되어 자아를 완전히 소각당한 채 15년을 살아왔다.
그런데 눈앞의 이 열여덟 살 소녀 역시, 그 잔혹한 실험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채린 양도…… 그 실험의 대상자였습니까?"
우진이 묻자 채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 등록 코드는 'Next-Generation Subject-03'. 놈들은 나를…… 차세대 코어의 보조 연산 프로세서로 쓰려고 했어요."
4. 지워진 부모와 은빛 각성
채린은 식어가는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녀의 메마른 목구멍을 넘어가는 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버지는 원래 네모 프로젝트의 핵심 수식 개발자였어요. 인간의 뇌파와 신경망을 도시 전산망과 동기화시켜, 범죄나 자살 같은 비극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는 완벽한 사회 안전망을 만들 수 있다고 믿었죠. 순진했던 거예요. 강정호 박사님도 처음엔 그 이상에 동조하셨으니까."
채린의 시선이 허공을 응시했다.
마치 10여 년 전의 기억을 되살려내려는 것처럼.
"하지만 시스템이 완성되어 가면서 본색이 드러났어요. 상임이사회와 넥스트 큐브 놈들은 범죄를 예방하려는 게 아니었어요. 자기들의 기득권과 부를 영구히 유지하기 위해, 소시민들의 삶에 파멸의 세모(△)를 강제로 배정하고 그들의 피와 자산을 빨아먹는 흡혈 시스템을 원했던 거죠. 뒤늦게 그걸 깨달은 아버지는 강 박사님과 함께 시스템 자폭을 시도했어요."
"그게 바로 2011년 테헤란로 특수 시설 화재였군요."
서연이 메모 수첩을 꼭 쥔 채 말했다.
"네. 하지만 아버지는 실패했어요. 강 박사님은 아저씨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코어에 잡혀 들어갔고, 아버지는 불타는 연구소에서 나를 안고 간신히 도망쳤죠. 어머니와 함께 이 일산 은신처로 숨어들었어요."
채린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손가락이 머그잔을 으스러뜨릴 듯 쥐어 잡았다.
"놈들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았어요. 내가 일곱 살 되던 해 겨울이었어요. 아버지가 연구소에서 빼돌린 핵심 백업 데이터를 해독하던 날 밤, 지상에서 거대한 트럭 한 대가 우리 집을 그대로 밀고 들어왔어요."
우진의 눈썹이 꿈틀했다.
"사고로 위장된…… 강제 덮어쓰기였군요."
"맞아요. 단순 음주운전 트럭의 돌진 사고. 경찰 기록에는 그렇게 남아 있어요."
채린의 눈가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나 그녀는 울지 않으려는 듯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
"피투성이가 된 채 거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아버지의 머리 위로, 칠흑처럼 검은 세모가 회전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검은 세모의 꼭짓점에서 뻗어 나온 꼭두각시 줄이…… 하늘 높이 솟구쳐 있었죠. 놈들이 보낸 감시관들이 부서진 문을 열고 들어왔어요. 어머니는 나를 바닥의 은폐 통로로 밀어 넣고 뚜껑을 닫았어요. 틈새로 보였어요.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며 매달리자,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어머니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그 자리에서 궤도 통제 칩을 강제로 과부하 폭주시켰어요."
서연이 경악에 질려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잔혹함의 극치였다.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시스템의 코드로 신경계를 태워 죽이는 인과율 소거.
"어머니의 심장이 멎는 순간, 놈들은 피를 흘리며 신음하던 아버지를 끌고 나갔어요. 그리고 바닥에 숨어 있던 나를 찾아냈죠. 감시관 중 우두머리가 내 멱살을 잡고 들어 올리며 중얼거리더군요. '연구원의 혈통이다. 유전자 수용성이 완벽해. 폐기하지 말고 본사 2세대 배양실로 이송하라.'"
채린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은신처의 차가운 공기 속으로 그녀의 처절했던 유년기가 핏빛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 뒤로 5년 동안…… 나는 넥스트 큐브 본사의 지하 격리 병동에 갇혀 있었어요. 빛 한 점 들지 않는 하얀 방. 매일 아침마다 알 수 없는 약물이 정맥을 타고 들어왔고, 목덜미 소켓에 두꺼운 케이블이 꽂혔어요. 놈들은 내 뇌파를 도시 격자망의 사각형(□)에 동기화시키려고 수만 번의 전기 충격을 가했어요. 말을 듣지 않으면 밥을 굶겼고, 자아를 드러내면 진정제를 뇌에 직접 주사했죠."
우진은 주먹을 세게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은 아버지가 목숨을 걸고 칩을 뽑아내 준 덕분에, 비록 기억을 잃었을지언정 15년 동안 평범한 인간의 삶을 흉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채린은 아니었다.
그녀는 부모가 도륙당하는 장면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놈들의 실험실에서 짐승처럼 사육당했던 것이다.
"어떻게…… 그곳에서 빠져나온 겁니까?"
우진이 묻자, 채린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은빛 동그라미가 잔잔하게 요동쳤다.
"열세 살이 되던 해였어요. 놈들이 나를 최종 프로세서로 승격시키기 위해, 마지막 '인격 소각 세뇌'를 집행하던 날이었죠. 뇌간의 모든 감정 회로를 태워버리고 완벽한 사각형 인간으로 개조하려는 수술대 위였어요. 마취제가 들어오는데…… 문득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내 귓가에 남겼던 마지막 속삭임이 떠올랐어요."
채린의 눈빛이 형형하게 타올랐다.
"'채린아, 세상이 널 네모난 상자에 가두려 할 때, 절대 선에 닿지 마라. 밖으로 굴러 나가라. 너는 닫힌 상자가 아니라, 어디로든 굴러갈 수 있는 원이다.'"
그것은 강정호 박사가 남겼던 연구 노트의 문구와 완벽히 일치했다.
[세상이 부여한 사각형의 틀을 부숴라].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뭔가가 깨져 나갔어요. 놈들이 주입하던 사각형의 제어 코드가 목덜미 소켓에서 스파크를 튀기며 역류하기 시작했죠. 심전도 모니터가 터져 나가고, 실험실의 전자기 격자망이 내 몸을 중심으로 바깥으로 밀려 나갔어요. 내 머리 위에 떠 있던 도형이…… 사각형의 모서리를 스스로 깨부수고 둥글게 이어지더군요."
채린이 자신의 머리 위를 가리켰다.
"은빛 동그라미(○). 비간섭의 척력. 시스템의 격자망이 내 몸에 락온을 걸지 못하고 미끄러져 나갔어요. 마취 상태에서 풀려난 나는 방화 셔터를 맨손으로 부수고 탈출했어요. 아버지가 남겨둔 이 아날로그 은신처로 숨어들어와, 지난 5년 동안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렸던 거예요."
5. 2세대의 비극과 과녁의 공명
채린의 고백이 끝나자, 은신처 안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돌았다.
서연은 벅차오르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채린의 여윈 어깨를 끌어안았다.
"채린아…… 그 어린 나이에…… 혼자서 어떻게 버텼니."
채린은 서연의 품에 안겨 잠시 몸을 굳혔다.
타인의 온기를 받아들이는 것이 낯선 듯 머뭇거리던 그녀는, 이내 서연의 어깨에 이마를 묻고 가늘게 떨었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이미 너무 많은 눈물을 흘려 마음의 샘이 바짝 말라버린 아이처럼, 채린은 마른 숨만을 몰아쉬었다.
우진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옆구리의 붕대가 당겨오며 날카로운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지만, 그는 흔들림 없이 발을 내디뎠다.
우진이 채린의 앞에 다가가 섰다.
채린이 고개를 들어 우진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완벽하게 마주쳤다.
위이잉.
낮은 공명음이 두 사람의 귓전을 울렸다.
우진의 망막에 맺힌 채린의 머리 위 은빛 동그라미(○)의 중심부에, 푸른빛의 스파크가 튀기 시작했다.
텅 비어 있던 원환의 정중앙.
그 무결한 허공에 칠흑 같은 어둠을 찢고 나온 선명한 점 하나가 묵직하게 찍혔다.
과녁형 식별 코드(⊙).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난 두 명의 이레귤러가 서로의 영혼과 상처를 완전히 인지하고 공명했을 때 나타나는 절대적인 신뢰의 기호.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와 채린의 목덜미 소켓 흔적이 동시에 미세한 열감을 뿜어냈다.
"채린 양."
우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어떤 맹세보다 단단했다.
"당신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닙니다."
채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항상 어른인 척, 차갑고 냉소적인 반항아인 척 무장하고 있던 소녀의 가면 뒤로, 15년간 응어려져 있던 외로움이 허물어지는 순간이었다.
"도현 씨가 죽어가며 말했습니다. 본사 심층 격벽에 02번부터 06번까지의 아이들이 갇혀 있다고."
우진이 민도현의 티타늄 칩 파편을 채린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차가운 금속 조각이 채린의 온기에 닿자, 그녀의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그들은 채린 양과 같은 2세대 아이들일 겁니다. 놈들은 인간을 규격품으로 만들고, 영혼을 소각해 살상 무기로 써먹고 있어요. 내 아버지도, 채린 양의 부모님도…… 그 지옥을 끝내기 위해 목숨을 던졌습니다."
우진이 주먹을 쥐었다.
"이제 우리가 끝내야 합니다. 사각형의 감옥을 부수고, 그곳에 갇힌 아이들을 꺼내올 겁니다."
채린은 손바닥 위의 칩 파편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손가락을 오므려 쥐었다.
그녀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손등 위로 떨어졌다.
"고마워요, 아저씨. 그 말을…… 10년 동안 기다려왔어요."
채린이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방황하던 소녀의 나약함이 사라지고, 결연한 전사의 투지가 되살아났다.
"본사로 들어가려면, 단순한 물리적 침투로는 불가능해요. 넥스트 큐브 본사 타워는 건물 전체가 4차원 격자망으로 둘러싸여 있거든요. 감시관 수준이 아니라, 감사실 직속의 '블랙 큐브' 부대가 지키고 있어요."
"그렇다면 방법이 없는 겁니까?"
서연이 묻자 채린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방법이 있어요. 아버지가 남겨둔 마지막 유품이 하나 더 있거든요."
채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은신처 구석의 낡은 철제 캐비닛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캐비닛 바닥을 들어내고, 그 아래 숨겨져 있던 두꺼운 납 상자를 꺼내왔다.
상자 뚜껑을 열자, 정교한 회로 기판과 진공관이 결합된 원통형 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뭐죠?"
서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들여다보았다.
"'그리드 오버라이더(Grid Overrider)'. 아버지가 완성했던 특수 펄스 발생기예요. 내 은빛 동그라미의 척력 파동을 이 장치에 증폭시켜 방출하면, 반경 500미터 이내의 모든 사각형 격자망을 10분 동안 강제로 정지시킬 수 있어요. 놈들의 센서와 통제선을 완전히 먹통으로 만드는 절대적인 사각지대를 여는 열쇠죠."
우진의 눈이 빛났다.
10분의 시간.
그것만 있다면 놈들의 기계적 예측과 인과율 지연 제로의 방어망을 뚫고 본사 심층부에 도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어요."
채린의 목소리가 다시 무거워졌다.
"이 장치를 작동시키려면 막대한 양의 순수한 생체 인과율 에너지가 필요해요. 내 동그라미 파동만으로는 기동 전력이 부족해요. 아저씨의 '방화벽 백신 코어'와 내 동그라미가 완벽하게 직렬로 연결되어야만 해요. 그 과정에서…… 아저씨의 뇌와 신경계에 상상도 못 할 과부하가 걸릴 수도 있어요."
"상관없습니다."
우진은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내 신경계 따위가 타버리는 건 두렵지 않습니다. 놈들이 짜놓은 각본대로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는 게…… 내겐 더 끔찍한 지옥입니다."
우진의 결연한 태도에 채린은 가슴 깊은 곳에서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비로소 확신했다.
눈앞의 이 사내야말로, 아버지가 유언으로 남겼던 '닫힌 세상을 열어젖힐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6. 전면전의 서막
그때였다.
지하 은신처 벽면에 설치되어 있던 구형 아날로그 라디오 스피커에서 치직거리는 잡음이 터져 나왔다.
서연이 황급히 다가가 다이얼을 돌렸다.
지지직거리는 노이즈를 뚫고, 서울 시내의 긴급 뉴스 속보가 흘러나왔다.
- ……긴급 속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오전 발생한 코스닥 상장사 네오바이오젠의 주가 급등락 사태와 관련하여, 금융감독원과 서울남부지검 합수단이 전격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검찰은 이번 사태를 특정 세력의 대규모 시세 조종 및 시장 교란 행위로 규정하고…….
서연의 얼굴에 희미한 안도의 빛이 스쳤다.
"금융위원회가 움직였어요. 네오바이오젠 거래 정지가 유지되면서, 놈들의 공매도 결손이 공식적으로 수면 위에 드러난 거예요."
그러나 이어지는 앵커의 목소리에 세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 한편,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오늘 오후 테헤란로 태성C&I 본사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및 특수 방화 사건의 주동자로 추정되는 핵심 용의자 3명을 전국에 공개 수배했습니다.
용의자들은 전직 태성C&I 직원 강 모 씨와 모 방송사 한 모 기자, 그리고 신원 미상의 10대 여성으로 확인되었으며…….
치이익.
라디오가 강렬한 고주파 비명과 함께 먹통이 되었다.
동시에 은신처 천장에 매달려 있던 백열전구가 미세하게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전압이 요동치고 있었다.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가 바늘로 콕콕 찌르듯 욱신거렸다.
2단계 심층 분석(Deep Analysis)이 우진의 의지와 무관하게 반사적으로 발동했다.
시야가 흑백으로 반전되며, 지하 흙벽 너머 지상의 공간이 투명하게 비쳐 보였다.
지상 수백 미터 상공.
칠흑 같은 먹구름이 뒤덮인 일산 외곽의 하늘 위로, 거대한 붉은색 격자망이 거미줄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격자망의 중심에서 뿜어져 나오는 서늘하고 기괴한 파동.
단순한 감시관의 신호가 아니었다.
차원이 다른 밀도와 질량을 지닌 붉은 다포체.
'도진우…….'
우진이 이를 갈았다.
도진우가 이끄는 넥스트 큐브 본사 감사실의 추적망이, 네오바이오젠 사태로 인한 결손을 메우기 위해 도시 전체의 시스템을 전면 비상 체제로 전환한 것이었다.
우진의 망막에 지상 도로를 타고 쇄도해 오는 검은 세단들의 궤적이 반투명한 푸른 잔상으로 맺혔다.
속도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일반 차량의 속도가 아니었다.
차량의 지붕 위마다, 미세한 진동조차 없는 완벽한 '검은 동그라미(●)'들이 떠올라 있었다.
인과율 지연 제로의 기계화 인간 병기들.
민도현과 같은, 혹은 그 이상의 살상 알고리즘을 탑재한 '블랙 큐브 알파' 부대가 마침내 동면에서 깨어나 지상으로 투입된 것이었다.
"놈들이 오고 있어요."
우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연이 사색이 되어 권총을 움켜쥐었다.
"벌써요? 이곳은 아날로그 차폐 구역이라고……."
"차폐벽을 뚫고 신호를 잡은 게 아니에요. 놈들은 도시 전역의 엔트로피 결손 지점을 역추적해 포위망을 좁혀온 겁니다."
채린이 신속하게 납 상자에서 그리드 오버라이더를 꺼내 가슴에 안았다.
그녀의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돋아났다.
"놈들의 선발대예요. 본대의 포위망이 완전히 완성되기 전에, 여기서 치고 나가야 해요."
우진은 품속에서 노획했던 인과율 집속 권총을 꺼내 들었다.
탄창을 확인하고 노리쇠를 후퇴시키자, 차가운 금속음이 은신처 안을 날카롭게 울렸다.
가슴의 상처가 찢어지는 듯 아파왔지만, 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명징했다.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고, 수많은 소시민의 삶을 파멸의 궤도로 조작했으며, 어린아이들의 영혼을 기계로 갈아 넣은 거대한 괴물.
그 괴물의 심장부가 이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채린 양, 서연 씨."
우진이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눈빛 속에 두려움은 없었다.
오직 살아남아 진실을 세상에 밝히겠다는 결연한 의지만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우리가 먼저 놈들의 목덜미를 물어뜯으러 갑니다. 본사로 갑시다."
우진이 앞장서서 지하 계단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디뎠다.
어둠에 잠긴 온실 밖에서, 사냥개들의 엔진 굉음이 지축을 흔들며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시스템의 붕괴를 향한, 마지막 항전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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