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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27화

과거 추적의 개안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흩어지는 미래선

 

비상계단 11층의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흩뿌려진 핏방울이 형광등 불빛을 받아 검붉게 번들거렸다.

 

왼쪽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충격으로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비릿한 쇠 맛이 치밀어 올랐다.

 

강우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뒤로 반 보 물러섰다.

 

벽면에 부딪힌 견갑골을 타고 둔중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내려앉았다.

 

정면을 가로막고 선 검은 집행관 민도현의 형상은 이전까지 마주했던 적들과는 완전히 다른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 정지해 있는 것은 단순한 다각형이 아니었다.

 

빛조차 빨아들이며 침묵하는 암흑의 원환, 검은 동그라미(●)였다.

 

회전도, 떨림도, 일체의 미세한 흔들림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명령 지연이 없어.'

 

우진은 바늘로 찌르는 듯한 관자놀이의 통증을 억누르며 2단계 '변화 감지'를 극도로 끌어올렸다.

 

시신경이 불타는 듯 뜨거워지고 망막 위로 푸른빛의 미래 궤적선들이 어지럽게 투영되었다.

 

하지만 그 푸른 선들은 적의 신체에 닿는 순간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중앙 코어의 원격 명령을 수신하며 발생하던 0.3초의 데이터 병목 현상이 이 사내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살상 알고리즘이 뇌간과 척수 신경망 자체에 물리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탓이었다.

 

생각보다 앞서 근육이 반응하고, 결심보다 먼저 주먹과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0.3초의 틈을 파고들어 반격을 가하던 우진의 궤도 예측은 무의미한 잔상으로 전락해 버렸다.

 

집행관의 검은 전투화가 바닥을 박찼다.

 

소음조차 없었다.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검은 섬광이 우진의 턱밑으로 쇄도했다.

 

치명적인 영거리 타격이었다.

 

우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젖혔으나, 스치고 지나간 티타늄 합금 너클의 충격파만으로도 뺨의 피부가 터져 나갔다.

 

동시에 적의 반대쪽 손날이 우진의 늑골을 향해 무자비하게 꽂혀 들었다.

 

쿵!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우진의 몸이 비상계단 철제 난간으로 나가떨어졌다.

 

갈비뼈 두 개가 어긋나는 끔찍한 감각이 뇌리를 강타했다.

 

"커헉!"

 

우진은 입안에 고인 피를 바닥에 뱉어냈다.

 

계단 아래쪽에서 다급한 구둣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서연과 윤채린이 올라오고 있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끝이다.'

 

이 괴물을 계단실 아래로 내려보내는 순간, 방재실에서 탈출한 서연과 차를 대기시킨 채린은 일말의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살해당할 터였다.

 

집행관의 감정 없는 흑색 렌즈가 우진의 심장을 정확히 겨누었다.

 

그의 척수 단말에서 고주파 전기음이 새어 나왔다.

 

[목표 K-07.

 

생체 신호 급감.]

 

[소거 프로토콜 2단계 진입.

 

경동맥 절단 및 흉부 관통 집행.]

 

기계적인 합성음이 계단실의 정적을 찢었다.

 

사내의 머리 위 검은 동그라미가 주변의 희미한 인과율 잔여물마저 탐욕스럽게 집어삼키며 더욱 짙은 칠흑으로 물들었다.

 

미래를 읽을 수 없다면 살아남을 방법은 없었다.

 

우진의 시야가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2. 시간의 축을 거스르다

 

시신경 오버클럭의 부작용으로 눈앞이 점멸했다.

 

관자놀이의 4cm 수술 흉터가 마치 달군 인두로 지져지는 것처럼 타올랐다.

 

두개골 안쪽에서 핏줄이 터져 나가는 것 같은 극심한 내압이 솟구쳤다.

 

우진은 비틀거리며 난간을 짚고 일어섰다.

 

'0.3초 뒤의 미래를 볼 수 없다면…….'

 

우진의 뇌리 속에서 아버지 강정호가 남긴 연구 노트의 수식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세상은 선형적인 시간으로만 흐르지 않는다.'

 

'도형은 대상의 미래만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아니다.'

 

'그것은 그 인간이 살아온 모든 궤적의 적분값이자, 최초의 좌표로부터 축적된 거대한 인과의 총합이다.'

 

번쩍, 하는 섬광과 함께 뇌간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방화벽 백신 코어가 전에 없는 진폭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방어가 아니었다.

 

외부의 인과율을 거부하고 튕겨내던 백신의 본질이, 시스템의 폐쇄 회로를 역방향으로 찢어발기며 확장되는 파동이었다.

 

"크아아악!"

 

우진은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눈물샘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려 뺨을 타고 흘렀다.

 

시야를 가득 메우고 있던 푸른 미래 예측선들이 일순간 정지했다.

 

그리고 기괴한 변이가 일어났다.

 

푸른빛의 궤적선들이 거꾸로 감기며, 사내의 몸에서부터 과거의 시간 축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허공으로 흩어지던 파편들이 시간을 역행하듯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망막에 비치는 색상이 푸른색에서 핏빛에 가까운 짙은 자수정색으로 반전되었다.

 

'이건…… 미래가 아니야.'

 

그것은 사내의 지난 행동과 흔적, 그가 통과해 온 공간의 좌표들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낸 '과거의 잔상 궤적'이었다.

 

4단계, 과거 추적(Past Tracing).

 

도형의 현재 형태를 역연산하여 그 개체가 겪어온 물리적 충격과 마모의 역사, 그리고 지워진 기억의 뿌리를 망막에 강제로 현현시키는 시각화의 심연이었다.

 

우진의 시야에 비친 집행관의 신체는 더 이상 완전무결한 살상 병기가 아니었다.

 

수천 번, 수만 번의 격투와 살상 훈련을 거치며 누적된 미세 골절의 흔적들이 붉은 실선으로 온몸에 뼈대처럼 드러났다.

 

특히 그의 오른쪽 쇄골과 목덜미 경추 3번 부근에 선명하게 찍혀 있는 기하학적 균열.

 

그것은 과거 언젠가 정밀한 수술용 메스로 절개되었다가 불완전하게 봉합된 생체 제어 칩의 결합부였다.

 

'저기다.'

 

절대 뚫을 수 없을 것 같았던 기계화 병기의 몸에, 지울 수 없는 시간의 흉터가 핏빛 좌표로 박혀 있었다.

 

집행관이 다시 한번 쇄도했다.

 

이번에는 반응 속도를 논할 필요조차 없었다.

 

우진은 그가 내딛는 발걸음의 무게중심이 과거의 습관적 부상으로 인해 미세하게 왼쪽으로 0.02초 기울어지는 그 찰나의 궤적을 꿰뚫어 보았다.

 

3. 15년 전의 잔영

 

파고드는 적의 주먹을 우진은 피하지 않았다.

 

피하는 대신, 과거의 궤적이 가리키는 사각지대로 자신의 어깨를 비스듬히 밀어 넣었다.

 

콰직!

 

티타늄 너클이 우진의 오른쪽 어깨 근육을 짓이기며 파고들었다.

 

뼈가 삐걱거리는 비명이 귓전을 때렸지만, 우진은 이를 악물고 비명을 삼켰다.

 

오히려 자신의 쇄골로 적의 팔을 옭아매듯 결착시켰다.

 

"잡았다."

 

집행관의 무감각한 눈동자에 처음으로 미세한 연산 오류의 파문이 일었다.

 

타격을 허용하면서 거리를 좁혀오는 자폭에 가까운 육탄전은 그의 내장 알고리즘에 존재하지 않는 변수였다.

 

우진은 피투성이가 된 왼손을 뻗어, 과거 추적선이 가장 붉게 타오르던 적의 목덜미 경추 3번 결합부를 움켜쥐었다.

 

손끝에 차가운 금속 단말의 감촉이 닿았다.

 

그 순간, 우진의 신경계에 각인된 방화벽 백신 코어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가며 적의 생체 제어 칩 내부로 역침투했다.

 

지지직!

 

단말기 틈새로 푸른색 스파크가 튀며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동시에 우진의 망막에 펼쳐진 자수정빛 과거 궤적이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단순한 물리적 결함을 넘어, 칩 속에 억압되어 있던 사내의 '과거 기억 데이터'가 우진의 의식 속으로 쓰나미처럼 밀려들었다.

 

어두운 수술실의 형광등 불빛.

 

살균제 냄새와 피비린내.

 

수술대 위에 결박된 어린 소년의 창백한 얼굴이 보였다.

 

소년의 목덜미에는 굵은 케이블이 연결되어 있었고, 연구원들의 차가운 음성이 메아리쳤다.

 

[피실험자 Subject-08.

 

통제 순응도 80% 도달.]

 

[생체 칩 강제 삽입 개시.

 

자아 삭제 프로토콜 승인.]

 

어린 소년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 절망적인 비명 속에서, 방진 마스크를 쓴 중년 남자가 거칠게 수술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우진의 숨이 멎었다.

 

아버지였다.

 

15년 전의 강정호 박사였다.

 

영상이 아니었다.

 

기억의 단편 속에서 아버지는 피를 흘리며 보안 요원들을 밀쳐내고 수술대로 달려들고 있었다.

 

[도현아!

 

정신 차려라, 도현아!]

 

아버지는 떨리는 손으로 소년의 머리를 감싸 쥐며 메스를 집어 들었다.

 

그의 손등에는 테르밋 화염에 덴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내가 칩을 떼어내마.

 

조금만 참아라.

 

궤도를 빼앗기지 마라……!]

 

아버지는 시스템이 강제로 박아 넣은 칩을 떼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술용 집게를 찔러 넣고 있었다.

 

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져 소년의 이마를 적셨다.

 

[도현아, K-07과 함께 살아남아야 한다.

 

너희는 기계가 아니야……!]

 

하지만 문이 부서지며 들이닥친 검은 옷의 괴한들이 강정호 박사의 등 뒤로 개머리판을 내리쳤다.

 

아버지는 피를 토하며 바닥으로 쓰러졌고, 불완전하게 적출되려던 칩은 다시금 기계 팔에 의해 소년의 경추 깊숙한 곳으로 박혀 들어갔다.

 

[강정호 박사 제압 완료.

 

Node-0 편입 구역으로 이송하라.]

 

[Subject-08 재봉합.

 

감정 제거 코드 최대 출력 가동.]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고, 칠흑 같은 암흑이 그의 영혼을 뒤덮는 장면을 끝으로 기억의 파편이 산산이 부서졌다.

 

4. 부서진 족쇄

 

"아…… 아아……."

 

우진의 목구멍에서 찢어지는 듯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눈앞의 사내, 자신을 죽이려 드는 이 검은 집행관은 단순한 적이 아니었다.

 

15년 전, 아버지 강정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켜내려 했던 또 다른 아이였다.

 

자신과 함께 연구소의 차가운 지하에 갇혀 숫자로 불렸던 동포였다.

 

분노와 슬픔, 그리고 형용할 수 없는 비통함이 심장을 갈가리 찢어발겼다.

 

"민도현……!"

 

우진은 피 묻은 입술을 깨물며 사내의 이름을 포효하듯 불렀다.

 

"도현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냐!"

 

우진의 손가락 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신 코어의 은빛 파동이 자수정빛 과거 궤적을 타고 집행관의 신경망 전체로 침투했다.

 

파지직!

 

목덜미의 생체 제어 칩이 과부하로 붉게 타오르며 연기를 뿜어냈다.

 

사내의 온몸이 격렬하게 경련하기 시작했다.

 

초점을 잃은 채 칠흑처럼 굳어 있던 사내의 눈동자에, 미세한 균열이 발생했다.

 

머리 위에 떠 있던 검은 동그라미의 중심부가 흔들렸다.

 

주변의 빛을 집어삼키던 암흑의 장막이 걷히며, 그 속에서 15년 동안 갇혀 있던 희미한 은빛 파편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크, 윽…… 끄아아악!"

 

사내의 입에서 기계음이 아닌, 찢어질 듯한 인간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지며 우진의 어깨를 짓누르던 티타늄 너클이 툭 떨어졌다.

 

사내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며 계단 바닥을 뒹굴었다.

 

[경고.

 

단말 신경계 제어권 상실.]

 

[인과율 결손 발생.

 

비인가 프로토콜 침투.]

 

사내의 목덜미 단말에서 붉은 비상등이 깜빡이며 기계적 경고음이 울렸다.

 

우진은 피를 흘리며 주저앉은 채,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내를 응시했다.

 

사내의 머리 위를 짓누르던 검은 동그라미에 거미줄 같은 은빛 실금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완전무결했던 살상 알고리즘의 지배가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우진이 과거 추적으로 읽어낸 그 흉터, 아버지가 마지막 순간까지 메스를 대며 떼어내려 했던 그 불완전한 결합부가 시스템의 목줄을 끊어내는 열쇠가 된 것이었다.

 

사내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쥐어뜯었다.

 

피투성이가 된 살점이 뜯겨 나가며, 50원 동전 크기의 티타늄 칩 조각이 바닥으로 튕겨져 떨어졌다.

 

챙그랑!

 

맑은 금속음과 함께 바닥을 구른 칩 표면에는 레이저로 각인된 글자가 선명했다.

 

[PROJECT NEMO : PROTOTYPE / Node-1 / Subject-08 : 민도현 / Synchronized : 99.8%]

 

사내의 호흡이 거칠게 잦아들었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검은 렌즈 너머로 드러난 눈동자는 더 이상 살인 병기의 것이 아니었다.

 

깊은 혼란과 고통, 그리고 15년 만에 되찾은 인간의 슬픔이 가득 차 있었다.

 

5. 08번의 유언

 

"……강, 우진?"

 

갈라지고 쉰 목소리가 사내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그는 자신의 피 묻은 손을 내려다보더니, 이어 우진의 관자놀이에 남은 4cm 수술 흉터를 떨리는 눈으로 응시했다.

 

"너…… K-07…… 맞구나."

 

우진은 무너져 내리는 몸을 난간에 기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핏물과 섞여 턱 끝으로 뚝뚝 떨어졌다.

 

"기억났어? 도현아, 날 알아보겠어?"

 

민도현의 입가에 메마른, 처절한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 안도의 순간은 찰나에 불과했다.

 

치이익!

 

민도현의 목덜미에 남아 있던 잔여 단말 소켓에서 섬뜩한 전자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의 심장 부근 피부 밑에서 붉은색 발광 다이오드가 빠른 주기로 점멸했다.

 

[비인가 자아 각성 감지.]

 

[Class-AAA 보안 위협 규정.

 

체내 소각 자폭 시퀀스 가동.]

 

[카운트다운.

 

5, 4…….]

 

시스템의 잔혹한 폐기 프로토콜이었다.

 

통제에서 벗어난 단말은 정보를 누설하기 전에 스스로 산화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안 돼!"

 

우진이 다급히 손을 뻗었다.

 

백신 코어를 다시 기동해 자폭 회로를 억제하려 했으나, 민도현이 거친 손으로 우진의 손목을 쳐냈다.

 

"손대지 마…… 우진아."

 

민도현이 피를 토하며 우진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밀어붙였다.

 

그의 머리 위에 위태롭게 떠 있던 검은 동그라미가 완전히 부서지며, 눈부신 은빛 파편으로 산산이 흩어지고 있었다.

 

마지막 순간, 그는 온전한 자유의지를 되찾은 인간이었다.

 

"도망쳐. 여긴 곧 날아간다."

 

"도현아! 멈출 수 있어! 내가 어떻게든……!"

 

"못 멈춰. 이 폭탄은…… 내 심장 판막에 직결되어 있어."

 

민도현은 계단 아래쪽을 힐끗 바라보았다.

 

서연과 채린이 10층 계단 참에 도착해 경악한 표정으로 멈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민도현의 시선이 채린의 머리 위에 뜬 은빛 동그라미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눈에 희미한 안도가 깃들었다.

 

"네 아버지는…… 끝까지 우릴 포기하지 않으셨어. 날 수술대에서 빼내려다…… 척추를 다치셨지."

 

민도현이 피 묻은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마지막 힘을 쥐어짜 우진을 계단 아래쪽으로 힘껏 밀쳐냈다.

 

우진의 몸이 허공을 갈라 10층 계단 참으로 굴러떨어졌다.

 

"우진 씨!"

 

한서연이 비명을 지르며 굴러떨어진 우진을 부축했다.

 

윤채린 역시 사색이 되어 우진의 팔을 붙잡았다.

 

계단 위쪽, 11층 방화문 앞에 선 민도현이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우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이 계단실 전체를 핏빛으로 물들였다.

 

"우진아. 본사로 가라."

 

민도현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거기에…… 아직 얼어붙어 있는 아이들이 있어. 02번부터 06번까지…… 아직 시스템의 심장에 갇혀 있어."

 

[카운트다운.

 

1, 0.]

 

"그 아이들을…… 구해줘."

 

쾅!

 

민도현이 온 힘을 다해 11층 방폭문을 안쪽에서 걸어 잠갔다.

 

그리고 1초 뒤.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11층 계단실 내부에서 거대한 백색 섬광과 충격파가 폭발했다.

 

두꺼운 철제 방폭문이 엿가락처럼 휘어지며 화염이 문틈으로 뿜어져 나왔다.

 

건물 전체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요동쳤다.

 

"도현아아아아!"

 

우진은 서연의 품 안에서 피를 토하며 절규했다.

 

하지만 화염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오직 허공으로 흩어지는 무수한 은빛 잔상들만이, 한 영혼이 마침내 시스템의 족쇄를 부수고 자유를 되찾았음을 증명할 뿐이었다.

 

6. 빗속의 탈출

 

"우진 씨, 일어나야 해요! 경비 병력이 올라오고 있어요!"

 

한서연이 눈물을 흘리며 우진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워 넣었다.

 

그녀의 온몸이 화약 냄새와 피비린내로 진동했다.

 

윤채린 역시 이를 악물고 우진의 반대편 팔을 지탱했다.

 

"오빠, 제발 정신 차려요! 여기서 잡히면 그 사람의 희생도 다 헛수고가 돼요!"

 

채린의 외침에 우진은 흐려져 가던 초점을 간신히 다잡았다.

 

가슴과 어깨의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셔츠를 완전히 적시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의 손끝에, 폭풍 속에서도 기적처럼 굴러떨어져 온 티타늄 칩 파편이 닿았다.

 

[Subject-08 : 민도현].

 

우진은 그 파편을 부러질 듯 손안에 꽉 쥐었다.

 

금속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며 날카로운 통증을 안겨주었지만, 그 통증만이 우진의 끊어질 듯한 이성을 붙들어 매어 주었다.

 

'잊지 않는다.'

 

'절대로 잊지 않아.'

 

세 사람은 비틀거리며 비상계단을 내려갔다.

 

10층, 9층, 8층…….

 

건물 전체에 요란한 화재경보기와 침입 경보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스프링클러가 터져 차가운 물줄기가 계단실을 가득 메웠다.

 

피와 물이 뒤섞여 계단을 타고 폭포처럼 흘러내렸다.

 

지하 1층 화물 하역장으로 빠져나오자, 억수같이 쏟아지는 밤비가 일행을 맞이했다.

 

테헤란로 일대는 이미 붉은 경광등을 번쩍이는 경찰차와 넥스트 큐브의 검은 세단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이렌 소리가 도심의 빌딩 숲을 날카롭게 울렸다.

 

"이쪽이에요!"

 

채린이 하역장 구석에 시동을 켜둔 채 대기시켜 놓았던 카니발 밴의 슬라이딩 도어를 거칠게 열었다.

 

서연이 우진을 뒷좌석에 눕히듯 밀어 넣고 자신도 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채린이 운전석으로 뛰어올라 가속 페달을 바닥까지 밟았다.

 

끼이익!

 

타이어가 젖은 아스팔트를 할퀴며 비명을 질렀다.

 

차량은 차단기를 부수고 태성C&I 사옥 주차장을 빠져나와 빗물로 흥건한 테헤란로로 미끄러져 나갔다.

 

백미러 너머로 사옥 입구를 봉쇄하며 쏟아져 나오는 검은 양복의 사내들이 보였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예외 없이 차가운 검은 육면체들이 떠 있었다.

 

하지만 채린의 능숙한 운전으로 밴은 빗길을 가르며 골목길로 파고들었고, 이내 추격자들의 시야에서 벗어나 강변북로 진입로를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7. 은신처를 향하여

 

와이퍼가 유리창을 세차게 닦아냈지만, 쏟아지는 폭우는 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거셌다.

 

차창 밖으로 한강의 검은 수면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차량 내부는 무거운 침묵과 거친 숨소리만이 감돌았다.

 

한서연은 구급상자를 열어 떨리는 손으로 우진의 어깨와 가슴에 지혈대를 감고 압박 붕대를 맸다.

 

"우진 씨, 숨 깊게 쉬어요. 조금만 참아요. 폐가 찔린 건 아니에요. 출혈만 잡으면 돼요."

 

서연의 목소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등 위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기자로서 수많은 참사와 사건 사고를 취재해 왔지만, 눈앞에서 사람이 기계 부품처럼 다루어지고 자폭하는 광경은 그녀의 영혼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서연 씨……."

 

우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네, 우진 씨. 말씀하세요.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요."

 

"증권가…… 사람들은……?"

 

우진의 물음에 서연은 피 묻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았어요. 우진 씨가 옥상에서 분전함을 부수고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제가 국가 재난망 우회 포트로 금감원 조사 공시랑 정정보도를 터뜨렸어요. 네오바이오젠 주가가 하한가에서 상한가로 치솟으면서 공매도 세력 계좌가 완전히 박살 났어요. 여의도 옥상에서 뛰어내리려던 투자자들도 전부 경찰과 가족들에게 구조됐어요. 우진 씨가…… 그 사람들 다 살린 거예요."

 

서연의 말에 우진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차창 밖 어두운 밤하늘 위로, 도시를 짓누르던 거대한 사각 격자망이 희미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4,200명의 목숨을 앗아가려던 시스템의 거대한 음모는 분쇄되었다.

 

하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가혹했다.

 

민도현.

 

15년 전 자신과 같은 처지였던 소년의 죽음.

 

그리고 그가 남긴 끔찍한 진실.

 

우진은 주머니 속에 든 티타늄 칩 파편을 꽉 쥐었다.

 

'02번부터 06번까지.'

 

넥스트 큐브 본사의 차가운 챔버 속에, 아직도 자아를 거세당한 채 병기로 사육되고 있는 아이들이 더 존재한다.

 

자신이 구해내야 할 동포들이었다.

 

운전대를 쥐고 있던 윤채린이 룸미러로 우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가 역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경찰 무전망을 도청하고 있는데, 태성 사옥 폭발 사고는 가스 누출로 인한 우발적 사고로 언론 통제가 시작됐어요. 본사 놈들이 사건을 덮으려고 경찰과 소방 데스크를 장악했어요. 하지만 우리 차량에 대한 수배령은 아직 떨어지지 않았어요. 제 은빛 동그라미 잔류 파동으로 차량 번호판 스캐너를 교란해 뒀거든요."

 

"채린아……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거지?"

 

우진이 힘겹게 묻자 채린이 가속 페달을 밟으며 대답했다.

 

"일산 쪽에 아버지가 남겨두신 비밀 연구실이 있어요. 15년 전 연구소 화재 직후 아버지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외곽에 마련해 둔 안전가옥이에요. 거기라면 통신망이 완벽히 차단된 아날로그 구역이라 시스템의 스캔이 닿지 않아요. 거기서 일단 상처를 치료해야 해요."

 

우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관자놀이의 통증은 가라앉지 않고 둔중한 맥박처럼 고동치고 있었다.

 

방화벽 백신 코어가 4단계 '과거 추적'을 개안하면서 신경계의 구조 자체가 한 단계 더 비틀려 있었다.

 

고통스러웠지만, 동시에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가 완전히 달라졌음을 느꼈다.

 

이제 그는 단순히 눈앞의 위기를 피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시스템이 은폐해 온 추악한 과거의 궤적을 강제로 끄집어내어 대면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이었다.

 

8. 폐기된 자와 새로운 심연

 

같은 시각.

 

서울 도심 지하 수백 미터 암반층에 위치한 비상 대체 작전실.

 

서지훈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

 

메인 콘솔의 수십 개 모니터가 온통 핏빛 같은 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FATAL SYSTEM CRASH]

 

[네오바이오젠 숏 스퀴즈 발생 : 차명 기관 계좌 잔고 전액 청산]

 

[누적 결손 엔트로피 : +78,500 EP]

 

[Subject-08 생체 신호 영구 소실]

 

[관리관 서지훈 : 신뢰도 0.0% 도달]

 

"아,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서지훈은 피를 토하며 바닥을 기었다.

 

그의 정수리 위에 위태롭게 떠 있던 '암흑의 프레임'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뒤틀리고 있었다.

 

허공에서 내려와 그의 뇌간을 꿰뚫고 있던 수백 가닥의 검은 와이어들이 하나둘씩 툭, 툭 끊어져 나갔다.

 

와이어가 끊어질 때마다 서지훈의 눈, 코, 입에서 검은 피가 뿜어져 나왔다.

 

"상임이사회……! 이사회 분들!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지방 분산 코어를 가동하면 결손된 엔트로피를 메울 수 있습니다! 제게 한 번만 더 기회를……!"

 

치이익.

 

허공의 스피커에서 차가운 변조음이 흘러나왔다.

 

인간의 감정이 일체 배제된, 시스템 자체의 음성이었다.

 

[관리관 서지훈.

 

귀하는 허용 오차를 초과했습니다.]

 

[태성 노드 조작 실패, 금융 파이프라인 붕괴, 그리고 자산 Subject-08의 소실.]

 

[귀하의 궤도는 더 이상 시스템에 유효한 가치를 지니지 않습니다.]

 

"제발! 내가 15년 동안 당신들을 위해 개처럼 일했어! 강정호를 코어에 집어넣은 것도 나였단 말이다!"

 

서지훈이 절규하며 콘솔을 붙잡으려 발버둥 쳤다.

 

하지만 스피커의 음성은 냉혹했다.

 

[시스템에 영원한 설계자는 없습니다.

 

오직 기능하는 부품과 폐기되는 찌꺼기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관리관 폐기 프로토콜 집행.]

 

지이잉!

 

천장에서 차가운 푸른빛의 레이저 격자가 쏟아져 내렸다.

 

서지훈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암흑의 프레임이 일순간 산산조각 났다.

 

동시에 그의 몸을 관통하고 있던 신경선들이 역전류를 뿜어내며 그의 뇌수를 태워버렸다.

 

"끄아아아악!"

 

서지훈의 비명은 단 2초 만에 멎었다.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서지훈의 몸이 바닥으로 풀썩 쓰러졌다.

 

그의 정수리에는 더 이상 어떠한 도형도 뜨지 않았다.

 

시스템에 의해 존재 자체가 완전히 포맷된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어둠 속에서, 콘솔 뒤편의 공간 전송 포털이 푸른빛을 내뿜으며 열렸다.

 

탁, 탁, 탁.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말끔한 감색 정장에 푸른 넥타이를 맨 사내.

 

머리 위에는 파열 균열을 푸른빛 격자 테이프로 억누른 채 기괴하게 역회전하는 4차원 다포체, 붉은 입체 큐브가 떠 있었다.

 

넥스트 큐브 본사 통제감사실 수석 감사관, 도진우였다.

 

도진우는 바닥에 쓰러진 서지훈의 시체를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구두 끝으로 툭 찼다.

 

"결국 이 정도 그릇이었군. 하찮은 사각 틀에 갇혀 자기가 신이라도 된 줄 알았던 멍청이."

 

도진우는 콘솔 앞에 서서 자신의 태블릿 단말기를 연결했다.

 

화면에 붉은 글씨로 경보가 갱신되었다.

 

[비상 상임이사회 결의 완료]

 

[대상 K-07 강우진 : 최고 등급 시스템 위협체(Class-AAA) 확정]

 

[본사 직속 특수 집행 부대 '블랙 큐브 알파' 전원 동면 해제 승인]

 

[봉인 자산 Subject-02 Subject-06 기동 개시]

 

도진우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과거를 보게 되었단 말이지, K-07."

 

그의 시선이 모니터에 떠 있는 강우진의 흐릿한 CCTV 캡처 사진에 멎었다.

 

"하지만 네가 과거를 본다고 해서, 이미 짜인 파멸의 방정식을 바꿀 수 있을까?"

 

도진우가 단말기의 엔터 키를 눌렀다.

 

도시 전체의 전산망을 향해, 보이지 않는 거대한 칠흑의 그물이 조용히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9. 멈추지 않는 궤도

 

폭우가 쏟아지는 자유로를 질주하는 카니발 밴.

 

차창에 기대어 있던 우진은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손안에 박혀 있는 민도현의 칩 파편이 살을 찢고 피를 흘리게 만들었지만, 그 고통이 오히려 살아있음을 실감케 했다.

 

'과거 추적.'

 

아버지가 남긴 기억의 조각.

 

그리고 민도현이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

 

우진의 뇌리 속에 15년 전 수술실의 차가운 공기와, 자신들을 지키려다 쓰러지던 아버지의 피 묻은 얼굴이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그것은 저주가 아니었다.

 

시스템이 만든 감옥 속에서, 기계가 아닌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아버지가 심어둔 마지막 유산이었다.

 

우진의 눈동자 속에서 자수정빛 안광이 번뜩였다.

 

그 안광은 더 이상 과거의 흔적을 쫓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차가운 밤의 장막을 뚫고, 밴은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