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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26화

검은 집행관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옥상 테라스의 핏자국

 

비상계단 철문 너머로 테헤란로의 빌딩 숲이 아득하게 내려다보였다.

 

강우진은 난간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오른쪽 관자놀이를 따라 흐른 끈적한 피가 뺨을 타고 턱 끝으로 뚝뚝 떨어졌다.

 

옥상 메인 분전함을 인과율 파동으로 꿰뚫어 쇼트를 유도한 대가는 참혹했다.

 

방화벽 백신 코어가 역류하는 엔트로피 파편을 걸러내며 버텼지만, 시신경과 뇌간에 가해진 물리적 과부하는 폐부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한 통증을 남겼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제멋대로 경련하며 떨려왔다.

 

비상계단 벽면에 등을 기댄 우진은 가슴 안주머니에서 마른 손수건을 꺼내 턱을 훔쳐냈다.

 

손수건은 순식간에 검붉은 핏빛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새벽빛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귓가에 꽂힌 소형 무전 이어셋 너머로 다급한 숨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우진 씨! 들려요? 방재실 시스템 장악 완전히 끝냈어요. 금감원 전자공시망이랑 주요 통신사 뉴스 피드에 네오바이오젠 허위 풍문 긴급 정정보도 띄웠습니다! 숏 스퀴즈 터져서 주가 수직 반등 중이에요. 매도 잔량 전부 체결 취소됐어요!"

 

한서연의 격앙된 음성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명백한 승리의 흥분이 깃들어 있었다.

 

"……알아. 옥상에서 봤어."

 

우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답하며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웠다.

 

"여의도 쪽 검은 꼭두각시 줄들이 전부 끊겨 나갔어. 서연 씨, 정말 잘했어."

 

"지금 칭찬이 문제가 아니에요! 우진 씨 상태는요? 옥상에서 터진 그 빛…… 방재실 모니터 화면 전체가 순간 암전될 정도로 거대했어요. 당장 내려와요. 1층 화물 하역장 쪽에 채린이가 밴 시동 걸고 대기 중이에요. 보안 요원들이 방재실 쪽으로 몰려오고 있어서 저도 이제 빠져나가야 해요!"

 

"나도 지금 내려가는 중이야. 1층 비상 탈출구에서 합류하지."

 

우진은 짧게 말을 맺고 계단을 디뎠다.

 

발을 내딛을 때마다 무릎이 꺾일 듯 휘청였으나, 정신줄을 팽팽하게 당겨 쥐었다.

 

태성C&I 30층 옥상에서 1층까지 이어진 비상계단 통로는 기괴하리만치 고요했다.

 

대규모 인과율 역류와 쇼트의 여파로 비상 유도등조차 전압이 불안정한 듯 붉은빛과 녹색빛을 번갈아 깜빡이고 있었다.

 

탁, 탁, 탁.

 

오직 우진의 구두 굽 소리만이 적막한 콘크리트 계단실을 울렸다.

 

하지만 18층을 지나 12층으로 접어들었을 무렵, 우진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관자놀이에 깊게 박힌 4cm 수술 흉터가 얼음송곳에 찔린 것처럼 시리게 조여왔다.

 

단순한 피로 누적으로 인한 반작용이 아니었다.

 

이것은 생존 본능이 뇌수에 직접 꽂아 넣는 극도의 경고 신호였다.

 

공기가 얼어붙고 있었다.

 

숨을 들이쉬는 순간 폐포가 굳어버릴 것 같은 서늘한 한기.

 

계단실의 공기 밀도가 기압계를 부수듯 수직으로 치솟고 있었다.

 

2. 규격 외의 이레귤러

 

우진은 천천히 벽에 몸을 밀착시키며 아래쪽 계단참을 응시했다.

 

11층 비상 방화문 손잡이가 소리 없이, 그러나 완벽한 수평을 그리며 아래로 꺾였다.

 

끼이익.

 

묵직한 철문이 열리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감시관들의 획일적인 정장도, 넥스트 큐브 특수 집행 부대의 전술 장비도 아니었다.

 

몸에 딱 달라붙는 무광의 검은 방탄 복포를 걸친 체구는 크지 않았으나, 그 전신에서 풍기는 살기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짙었다.

 

사내의 양손은 아무런 무기도 쥐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우진의 숨통을 틀어막은 것은 사내의 정수리 위에 떠 있는 기하학적 형태였다.

 

'……저건?'

 

우진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요동쳤다.

 

시신경을 집중해 대상을 들여다보았다.

 

사내의 머리 위 10cm 상공에 떠 있는 것은 네모(□)도, 세모(△)도 아니었다.

 

그것은 완벽한 진원의 형태를 띤 동그라미(○)였다.

 

하지만 채린이 띄우던 은빛 동그라미나, 자유의지로 각성한 이들에게서 엿보이던 투명한 빛이 아니었다.

 

빛을 한 줌조차 반사하지 못하는, 우주의 암흑 물질을 농축해 빚어낸 것 같은 칠흑빛 원환.

 

검은 동그라미였다.

 

그 기괴한 형태의 중심에는 텅 빈 구멍 대신, 뇌간 깊숙한 곳으로 박혀 들어간 단 하나의 검은 핵이 고정되어 있었다.

 

진동도 없었다.

 

회전도 없었다.

 

채린의 은빛 원이 보여주던 자유로운 척력 파동 대신, 그것은 주변 공간의 빛과 소리, 심지어 공기 중의 미세한 인과율 흐름마저 게걸스럽게 집어삼키는 블랙홀 같았다.

 

"동그라미……?"

 

우진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신음이 흘러나왔다.

 

동그라미는 시스템의 통제를 벗어난 자유의지의 상징이자, 사각 격자망을 깨뜨리는 유일한 이레귤러의 징표였다.

 

그런데 어떻게 저토록 완벽히 검게 물든 채, 시스템의 살상 병기로 기능할 수 있단 말인가.

 

계단참에 멈춰 선 검은 옷의 사내—집행관 A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내의 눈동자에는 흰자위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동공 전체가 탁한 흑요석처럼 굳어 있었고, 초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으로서의 감정, 두려움, 살기, 호기심 같은 생명체의 반응이 완전히 소각된 인형의 얼굴.

 

사내의 목덜미를 따라 복잡한 은색 회로선이 관자놀이 쪽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우진의 관자놀이에 남겨진 것과 똑같은 형태의, 그러나 훨씬 더 잔인하고 정교하게 신경망을 장악한 생체 제어 단말이었다.

 

스스륵.

 

사내가 입술을 달싹였다.

 

성대를 인위적으로 진동시켜 만들어내는 듯한, 쇳소리 섞인 무기질의 음성이 계단실에 울려 퍼졌다.

 

"목표 식별 완료. Node-1 : K-07 강우진."

 

사내의 검은 동그라미 표면에서 미세한 데이터 노이즈가 스파크처럼 튀었다.

 

"상임이사회 긴급 결의 제4호 발효. 대상자의 위험 등급은 Class-AAA 시스템 위협체로 상향 조정됨. 생포 및 칩 회수 명령 철회. 물리적 영구 소거를 집행한다."

 

그것이 대화의 전부였다.

 

타협이나 협박, 경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내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지는 순간, 우진의 시야에서 그의 실루엣이 증발했다.

 

3. 0.3초의 균열이 통하지 않는 자

 

'빠르다!'

 

쿵!

 

공기가 터져 나가는 파열음과 함께 우진의 턱밑으로 검은 잔상이 솟구쳤다.

 

우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귓가를 스쳐 지나간 사내의 손끝이 콘크리트 벽면을 스치자, 단단한 시멘트 덩어리가 폭죽처럼 바스러져 내렸다.

 

우진은 즉시 2단계 심층 분석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관자놀이의 흉터가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후벼 파이는 듯한 맹렬한 두통이 엄습했다.

 

'변화 감지(Change Perception)!'

 

상대가 움직이기 0.3초 전의 미래 경로를 망막에 반투명한 푸른 궤적선으로 투영하는 능력.

 

지금껏 서지훈의 부하들이나 중앙 집행관들의 공격을 모조리 무력화했던 우진의 절대적인 무기였다.

 

사내의 오른쪽 어깨 근육이 수축하는 순간, 우진의 망막에 허공을 가르는 푸른 궤적선이 맺혔다.

 

우진은 궤적선이 가리키는 사각지대로 몸을 비틀며 카운터 블로우를 날리려 했다.

 

하지만 그 찰나.

 

우진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망막에 그려지던 푸른 궤적선이 갑자기 갈가리 찢어지며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 것이다.

 

"……큭?!"

 

푸른 선이 지시했던 궤도를 비웃기라도 하듯, 사내의 주먹은 물리 법칙을 거스르는 각도로 꺾여 들어왔다.

 

중앙 집행관들에게 존재하던 그 '0.3초의 인과율 지연 시간(데이터 병목)'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사내의 검은 동그라미는 중앙 코어나 상임이사회의 원격 연산 명령을 수신하여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살상과 전투에 관련된 모든 연산 알고리즘이 사내의 뇌간과 척수 신경망에 직접 각인되어, 자체적인 반사신경으로 궤도를 끊임없이 재구성하고 있었다.

 

쾅!

 

우진의 명치에 묵직한 충격이 내리꽂혔다.

 

갈비뼈가 삐걱거리는 비명과 함께 우진의 신형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계단 난간을 부수며 10층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우진은 입안 가득 고인 피를 바닥에 토해냈다.

 

내장이 뒤틀리고 폐포가 짓눌려 숨이 들이쉬어지지 않았다.

 

'명령을 기다리는 단말이 아니야.'

 

우진은 피를 닦아낼 틈도 없이 바닥을 굴렀다.

 

콰앙!

 

그가 방금 전까지 누워 있던 계단참 바닥에 사내의 뒤꿈치가 내리꽂히며 30센티미터 깊이의 분화구 같은 구멍이 파였다.

 

철근이 엿가락처럼 휘어 튀어나왔다.

 

인간의 근력 한계를 아득히 초월한 물리력.

 

저 검은 동그라미는 시스템의 사각 격자망을 찢어발기는 자유의지의 힘을 역으로 비틀어, 오직 살상만을 위해 응축시킨 뒤 신경계에 강제로 박아 넣은 악마의 결착물이었다.

 

"자유의지가 거세된 동그라미라니……."

 

우진이 계단 손잡이를 붙잡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너희들은 대체 인간을 어디까지 모독해야 만족하는 거냐."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칠흑빛 눈동자로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를 스캔하듯 훑어내릴 뿐이었다.

 

사내의 정수리 위 검은 동그라미에서 검붉은 전류 같은 파동이 흘러나와 양손으로 집속되었다.

 

지이잉.

 

고밀도로 압축된 인과율 척력이 사내의 손끝에서 날카로운 칼날의 형상을 이루며 허공을 갈랐다.

 

스치기만 해도 궤도 자체를 개념적으로 도려낼 살상 파동이었다.

 

4. 피로 물든 비상계단

 

치익, 치직.

 

우진의 귓가에서 끊어질 듯한 무전 소리가 다시 터져 나왔다.

 

"우진 씨! 어디예요? 10층 비상구 쪽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렸어요!"

 

한서연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그녀는 이미 1층 로비 근처까지 내려간 상태였으나, 건물을 뒤흔드는 진동을 느끼고 멈춰 선 것이 분명했다.

 

"오지 마! 내려가!"

 

우진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우진 씨?!"

 

"괴물이야……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들과는 차원이 달라. 서연 씨가 오면 일 초도 못 버티고 죽어! 당장 채린이 차로 가!"

 

사내의 신형이 다시 한번 허공으로 솟구쳤다.

 

우진은 계단 난간을 뜯어내어 방패처럼 앞을 가로막았다.

 

챙!

 

콰아앙!

 

강철 파이프가 종이장처럼 절단되어 튕겨 나갔다.

 

파이프 단면에서 뿜어져 나온 고압 인과율 파편이 우진의 왼쪽 어깨를 깊게 베어 갈랐다.

 

가죽 재킷이 찢겨 나가고 생살이 터지며 붉은 선혈이 벽면을 적셨다.

 

극심한 고통에 우진의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하지만 쓰러질 수 없었다.

 

여기서 자신이 무너지면, 1층에 있는 서연과 채린, 그리고 이제 막 시스템의 족쇄에서 벗어난 수천 명의 무고한 목숨들이 다시 한번 저 검은 심연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다.

 

'생각해라. 강우진.'

 

우진은 피를 흘리는 어깨를 벽에 짓이기며 사내의 움직임을 집요하게 관찰했다.

 

'변화 감지가 읽히지 않는다면, 왜 읽히지 않는지를 파악해야 해.'

 

사내의 공격은 완벽했다.

 

빈틈도, 감정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지만 완벽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철저한 알고리즘에 의해 통제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동그라미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본질은 인형이다.'

 

우진은 2단계 심층 분석의 초점을 사내의 신체가 아닌, 머리 위에 고정된 '검은 동그라미'의 내부 구조로 파고들었다.

 

치밀어 오르는 안압 때문에 눈가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렸다.

 

시신경이 터져 나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우진의 눈에 비로소 사내의 왜곡된 메커니즘이 포착되었다.

 

검은 동그라미의 중심에 박힌 핵.

 

그것은 시스템이 강제로 박아 넣은 생체 제어 칩과 신경망의 접점이었다.

 

사내는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뇌간에 이식된 수백만 가지의 근접 살상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초당 수천 번씩 반사적으로 꺼내 쓰고 있었다.

 

자유의지가 없기에 궤적이 읽히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많은 최적화 경로가 동시에 연산되고 있어 푸른 궤적선이 중첩되어 흩어지는 것이었다.

 

'경로가 너무 많아서 흩어지는 거라면…….'

 

우진의 입꼬리가 피투성이가 된 채 비틀려 올라갔다.

 

'경로를 단 하나로 좁혀버리면 그만이다.'

 

사내가 다시 한번 칠흑빛 인과율의 칼날을 치켜들며 우진의 심장을 향해 쇄도해 왔다.

 

피할 공간은 없었다.

 

뒤는 막다른 벽이었고, 좌우는 무너져 내린 계단 난간의 낭떠러지였다.

 

사내의 알고리즘은 우진의 회피 경로가 0%임을 확신하고 가장 확실하고 치명적인 직선 찌르기를 선택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우진의 망막에 사방으로 흩어져 있던 푸른 잔상들이 기적처럼 단 하나의 굵직한 선으로 수렴되었다.

 

심장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필살 궤도.

 

선택지가 사라진 순간, 미래는 확정된다.

 

"지금이다."

 

우진은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앞으로 한 걸음 내딛으며 자신의 왼쪽 가슴을 사내의 손끝으로 밀어 넣었다.

 

푸욱!

 

살점이 꿰뚫리고 늑골 사이로 사내의 차가운 손끝이 파고들었다.

 

심장을 스치기 직전, 우진은 온몸의 근육을 수축시켜 뼈와 근육으로 사내의 팔을 물어뜯듯 옭아맸다.

 

사내의 무표정한 얼굴에 아주 미세한 연산 지연의 기색이 스쳤다.

 

상대가 자신의 몸을 미끼로 삼아 뼈를 내주고 살을 취하려는 극단적인 자살성 행동을 감행할 것이라는 변수는, 사내의 최적화 살상 알고리즘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잡았다."

 

우진이 피를 왈칵 쏟아내며 사내의 목덜미를 오른손으로 움켜잡았다.

 

사내의 목덜미에 박힌 은색 회로선이 우진의 체온을 느끼고 파르르 떨렸다.

 

우진은 자신의 뇌간 깊숙한 곳에 각인된 방화벽 백신 코어를 최고 출력으로 개방했다.

 

관자놀이의 4cm 흉터가 눈이 멀 것 같은 은빛 광채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5. 백신 코드의 역침투

 

치지지직!

 

우진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의 인과율 파동이 사내의 목덜미를 타고 뇌간으로 직격했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타격이 아니었다.

 

15년 전 부친 강정호가 시스템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우진의 신경계에 심어둔 최후의 방화벽 프로그램.

 

거짓된 각본을 태워버리고 닫힌 사각의 감옥을 찢어발기는 자유의지의 원초적 코드였다.

 

"크, 으…… 아아악!"

 

인형처럼 침묵만을 지키던 사내의 입에서 마침내 인간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내의 정수리 위에 고정되어 있던 검은 동그라미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칠흑 같던 원환의 표면에 거미줄 같은 은빛 균열이 쩍쩍 갈라져 나갔다.

 

우진은 가슴을 관통당한 고통 속에서도 손을 떼지 않고 이를 악물었다.

 

"돌아와라……! 네 궤도를 남의 손에 넘겨주지 마!"

 

우진의 영혼을 쥐어짜는 듯한 일갈과 함께, 백신 코드가 사내의 뇌 속에 이식된 통제 칩의 방화벽을 강제로 무너뜨렸다.

 

콰아아앙!

 

두 사람의 머리 위에서 인과율의 에너지가 충돌하며 눈부신 백색 폭발이 일어났다.

 

사내의 머리 위에 박혀 있던 검은 핵이 산산조각 나며 튕겨 나갔다.

 

검은 동그라미의 내부로 우진의 은빛 파동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사내의 탁했던 눈동자에서 흑요석 같은 암흑이 걷히며, 아주 찰나 동안 핏발 선 인간의 동공이 드러났다.

 

사내는 자신의 손이 우진의 가슴을 꿰뚫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듯, 경악과 고통으로 뒤틀린 숨을 토해냈다.

 

"나, 는…… 나는…… 08번……?"

 

사내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것은 기계의 코드가 아닌, 잊혀졌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절망적인 의문이었다.

 

하지만 시스템의 반작용은 자비롭지 않았다.

 

통제 칩의 연결이 끊어지고 피실험자의 자아가 되살아나려는 순간, 사내의 목덜미에 박힌 비상 자폭 프로토콜이 가동되었다.

 

사내의 몸속에서 검붉은 과부하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위…… 험……."

 

사내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의지로 우진을 계단 벽 너머로 거칠게 밀쳐냈다.

 

쿠우웅!

 

우진이 복도 바닥으로 튕겨 나가 바닥을 구르는 순간, 10층 계단실 전체가 맹렬한 흑청색 불길과 함께 폭발했다.

 

콘크리트 파편과 철골 먼지가 폭풍처럼 우진의 전신을 덮쳤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사내의 검은 동그라미는 산산이 부서져 허공으로 흩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우진은 기침을 토하며 벽을 짚고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가슴팍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셔츠를 완전히 적시고 있었으나, 다행히 사내의 손끝이 갈비뼈에 걸려 심장의 외벽만을 스치고 지나간 상태였다.

 

방화벽 백신의 치유 파동이 찢겨 나간 혈관을 억지로 틀어막고 있었다.

 

'08번……?'

 

우진은 폭발로 무너져 내린 계단실의 잿더미를 멍하니 응시했다.

 

자신이 '대상자 001번, K-07'이었다.

 

그렇다면 방금 전 자신을 습격했던 저 자는, 15년 전 연구소에서 함께 실험을 당했던 또 다른 아이였단 말인가.

 

네모 프로젝트는 탈출하지 못한 아이들을 저런 인형 병기로 개조해 도구로 써먹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 밑바닥에서 차가운 분노가 마그마처럼 치밀어 올랐다.

 

6. 새벽의 탈출로

 

"우진 씨!!"

 

연기가 자욱한 복도 끝에서 익숙한 외침이 들려왔다.

 

비상구 문을 부수고 뛰어 들어온 것은 권총을 든 한서연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먼지와 땀으로 얼룩져 있었고, 우진의 처참한 꼴을 발견하자마자 사색이 되어 달려왔다.

 

"세상에…… 우진 씨! 피가……!"

 

서연이 떨리는 손으로 우진의 어깨를 부축했다.

 

"괜찮아…… 심장은 안 다쳤어."

 

우진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서연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말하지 마요! 당장 나가야 해요. 1층 로비는 이미 경찰과 태성 보안 요원들로 아수라장이에요. 채린이가 지하 주차장 배기 환기구를 통해 후문 쪽 골목으로 차를 댔어요!"

 

서연은 우진의 팔을 자신의 목에 두르고 전력을 다해 그를 부축했다.

 

두 사람은 무너진 비상구를 빠져나와 화물용 승강기 통로를 거쳐 지하 1층 보일러실로 연결된 비상 탈출구로 향했다.

 

달리는 내내 우진의 의식은 가물거렸다.

 

하지만 귓가에 울리는 서연의 거친 숨소리와, 그녀의 정수리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안정된 백색 네모(□)가 우진의 정신줄을 붙잡아 주었다.

 

덜컹.

 

마침내 열린 지하 쓰레기 수거장 철문 너머로 희미한 새벽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골목길 어둠 속에서 라이트를 끈 은색 카니발 밴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며 윤채린이 다급하게 손짓했다.

 

"빨리 타요! 인근 경찰 무전망에 태성C&I 테러 경보 떨어졌어요! 테헤란로 일대가 십 분 안에 전면 봉쇄된대요!"

 

서연이 우진을 밴 뒷좌석에 밀어 넣듯 태우고 자신도 몸을 던졌다.

 

슬라이딩 도어가 쾅 닫히는 것과 동시에, 채린이 가속 페달을 바닥까지 밟았다.

 

끼이익!

 

타이어가 비명을 지르며 젖은 아스팔트를 박차고 나갔다.

 

골목을 빠져나온 밴은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태성 사옥으로 질주하는 경찰차와 소방차들의 행렬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뒷좌석 시트에 몸을 파묻은 우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서연이 구급상자를 꺼내 우진의 셔츠를 찢고 지혈대를 단단히 묶었다.

 

알코올 솜이 상처에 닿을 때마다 살을 에는 통증이 덮쳤지만, 우진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백미러를 통해 우진의 상태를 살피던 채린이 침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방금 그 폭발, 감시관들의 펄스가 아니었어요. 그보다 훨씬 더 어둡고 지독한 파동이었는데…… 대체 옥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우진은 감기는 눈을 억지로 뜨며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집행관이었어. 하지만 보통 놈이 아니었어."

 

"네?"

 

"머리 위에…… 동그라미를 띄우고 있었어."

 

우진의 말에 운전대를 쥐고 있던 채린의 손이 눈에 띄게 덜컥 떨렸다.

 

채린이 백미러를 바라보는 눈빛에 형언할 수 없는 충격과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동그라미라고요? 그럴 리가 없어요. 동그라미는 시스템의 코드가 박힐 수 없는 유일한 형태인데……!"

 

"검은 동그라미였어. 회전도 진동도 없이, 뇌간에 칩을 박아 넣고 살상 알고리즘으로 자아를 완전히 뭉개버린…… 살아있는 인형."

 

우진은 고개를 돌려 서연을 바라보았다.

 

"그놈이 죽기 직전에 말했어. 자기가 '08번'이라고."

 

서연의 손이 우진의 상처를 누른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08번……? 그렇다면 설마 15년 전 연구소 명부에 있던……?"

 

"그래. 아버지가 남긴 논문 부록, 검은 먹칠로 지워져 있던 피실험자 아이들…… 그 아이들이 아직 살아있어. 아니, 죽지도 못한 채 시스템의 살상 병기로 사육당하고 있었던 거야."

 

차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새벽 여명이 차창을 통해 비쳐 들며 우진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었다.

 

여의도의 4,200명을 구하고 네오바이오젠의 조작을 막아냈지만,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넥스트 큐브의 진짜 심연이, 가장 잔혹한 형태로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한 것이다.

 

7. 심연 속의 포효

 

같은 시각, 서울 모처의 지하 수백 미터 암반층.

 

인공적인 백색 조명만이 번뜩이는 비상 대체 작전실의 공기는 살을 에는 듯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수십 대의 대형 모니터 화면에는 붉은색 경고 메시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CRITICAL WARNING : EXECUTOR-08 SIGNAL LOST]

 

[ENTROPY DEFICIT ACCUMULATED : +78,500 EP]

 

[SYSTEM INTEGRITY : 61.2%]

 

메인 콘솔 앞에 서 있던 서지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모니터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콰앙!

 

두꺼운 방탄 강화유리에 거미줄 같은 금이 갔다.

 

서지훈의 정수리 위에 떠 있는 텅 빈 사각 테두리, '암흑의 프레임'이 미친 듯이 삐걱거리며 기괴한 파열음을 냈다.

 

허공에서 내려온 수백 가닥의 검은 와이어가 그의 관자놀이와 척수를 사정없이 파고들며 쥐어짜고 있었다.

 

"크아악……! 커헉, 컥!"

 

서지훈이 목을 쥐어뜯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결손된 엔트로피가 한계치를 넘어서자, 중앙 시스템이 단말 소켓인 서지훈의 신경계를 직접 태우며 징벌적 페널티를 집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말도 안 돼…… 08번마저 당했다고? 감정이 거세된 완벽한 기계 병기였는데…… 백신 코드가 기어이 그 방화벽마저 뚫었단 말인가!"

 

서지훈의 입술 사이로 피거품이 흘러나왔다.

 

그때, 작전실 천장의 스피커에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기계 합성음이 울려 퍼졌다.

 

[상임이사회 긴급 통보.]

 

[관리관 서지훈의 위기 대응 능력 상실 확인.]

 

[태성C&I 분산 코어 손실 및 네오바이오젠 프로젝트 완전 파산.

 

누적 결손량 78,500 EP.

 

시스템 항상성 유지 불가 판정.]

 

"잠깐……! 잠깐 기다려! 아직 기회가 있어!"

 

서지훈이 핏발 선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며 절규했다.

 

"K-07은 중상을 입었다! 08번의 마지막 자폭으로 내장을 다쳤을 거다! 지금 남은 집행관들을 전부 투입하면……!"

 

[기각한다.]

 

서늘한 목소리가 서지훈의 말을 가차 없이 잘라냈다.

 

[귀하는 이미 소모되었다.

 

Class-AAA 시스템 위협체 강우진에 대한 처분 권한은 본사 직속 상위 감사실로 이관된다.]

 

[관리관 서지훈, 폐기 절차 개시.]

 

"안 돼……! 날 버리지 마! 내가 15년 동안 너희를 위해 무엇을 해왔는데!!"

 

서지훈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천장에서 내려온 검은 꼭두각시 와이어들이 맹렬한 고전압 인과율 전류를 뿜어냈다.

 

지지직!

 

콰아아앙!

 

서지훈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암흑의 프레임이 안쪽으로 찌그러지며 그의 두개골을 짓이기기 시작했다.

 

암전되는 시야 속에서 서지훈은 허공에 떠오른 거대한 3차원 입체 홀로그램을 보았다.

 

그것은 넥스트 큐브 본사가 위치한 미지의 좌표, 그리고 그곳에서 눈을 뜨기 시작한 또 다른 '검은 동그라미'들의 차가운 신호였다.

 

8. 남겨진 식별 코드

 

강변북로를 질주하는 카니발 밴 안.

 

서연의 응급 처치 덕분에 우진의 가슴팍 출혈은 멎어가고 있었다.

 

우진은 떨리는 손을 들어 자신의 재킷 안주머니를 더듬었다.

 

폭발의 순간, 사내의 목덜미에서 뜯겨져 나와 우진의 손아귀에 쥐어졌던 작은 금속 파편이 잡혔다.

 

우진이 피 묻은 손을 펴자, 50원짜리 동전 크기만 한 티타늄 칩 조각이 모습을 드러냈다.

 

불에 그을려 반쯤 녹아내렸지만, 칩 표면에 레이저로 각인된 글자만큼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PROJECT NEMO : PROTOTYPE]

 

[Node-1 / Subject-08 : 민도현]

 

[Synchronized : 99.8%]

 

그 이름을 본 순간, 우진의 뇌리 속에서 15년간 굳게 닫혀 있던 기억의 문이 아주 미세하게 덜컥거렸다.

 

포맷되어 백지처럼 하얗게 비어 있던 17세 이전의 유년기.

 

그 차갑고 어두웠던 연구소 복도에서, 자신과 함께 장기판의 말처럼 사각 방 안에 갇혀 숫자로 불리던 어린아이들의 희미한 울음소리가 귓전을 스쳐 지나갔다.

 

우진의 주먹이 바스러질 듯 쥐어졌다.

 

금속 파편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어 새로운 피를 흘려보냈다.

 

"민도현……."

 

우진이 나지막하게 그 이름을 읊조렸다.

 

그것은 죽어간 자를 향한 애도이자, 이 잔혹한 시스템의 심장을 반드시 도려내겠다는 맹세였다.

 

"우진 씨, 괜찮아요?"

 

서연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우진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한강 너머로 붉은 태양이 솟아오르며 서울 도심의 회색 빌딩들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도시를 짓누르던 거대한 사각형의 격자망 사이로, 이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거대한 균열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