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지훈의 등장
1. 부서진 방화문과 3중 큐브의 침묵
쾅!
역삼역 변전실 비상 방화문이 찢겨 나가며 내지른 굉음이 지하 7층으로 곤두박질치는 수직 샤프트(Shaft)의 허공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화약 냄새와 고온에 그을린 절연 고무 타는 냄새가 매캐하게 번져 올랐다.
강우진(姜宇鎭)은 반사적으로 한서연의 어깨를 잡아끌며 철제 계단 난간 뒤편의 H빔 그늘 속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숙여!"
콰아앙!
날아든 강철 파편들이 통로 입구의 고압 케이블 트레이를 후려치며 번쩍이는 불꽃을 튀겼다.
자욱한 분진 너머로 쿵, 쿵, 울리는 무거운 군화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다가왔다.
연막을 뚫고 걸어 나온 형체는 셋이었다.
검은색 강화 방탄복을 목 끝까지 두르고, 안면 전체를 유광 블랙 바이저로 밀봉한 자들.
그들의 손에는 소음기가 장착된 단축 돌격소총이 쥐어져 있었고, 총구에는 붉은빛의 표적 지시기 레이저가 칼날처럼 번뜩이고 있었다.
중앙 집행관(Central Inspectors).
네모 프로젝트의 중추인 중앙 코어를 최측근에서 호위하는 직속 친위대였다.
하지만 우진의 시선을 얼어붙게 만든 것은 그들의 무장이 아니었다.
지끈거리며 찌르는 관자놀이 흉터의 고통 속에서, 우진의 시신경이 그들의 정수리 위를 집요하게 꿰뚫었다.
1단계 외형 인지(Surface Scan)만으로도 턱 끝이 굳어버릴 만큼 기괴한 형상.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것은 일반 감시관의 단순한 단일 검은 육면체(Black Cube)가 아니었다.
크기가 다른 세 개의 칠흑빛 정육면체가 양파 껍질처럼 서로를 감싼 채, 각기 다른 축으로 맞물려 회전하는 '3중 중첩 육면체'였다.
가장 안쪽의 큐브는 시계 방향으로, 중간의 큐브는 수직 축으로, 가장 바깥쪽 큐브는 반시계 방향으로 소름 끼치도록 정밀한 궤적을 그리며 공전하고 있었다.
징— 하는 기계적 공명음이 시신경을 타고 우진의 뇌간으로 직접 흘러들었다.
세 겹의 육면체 표면마다 수만 개의 암호화된 기계어 코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흔들림도, 불안정한 떨림도 없었다.
그것은 인간의 뇌파가 아니었다.
코어의 메인프레임과 신경망이 직접 광케이블로 직결되어, 오차율 0%의 살육 알고리즘만을 수행하는 절대적인 기계 장치 그 자체였다.
중앙 집행관 세 명의 총구가 미세한 각도 조절도 없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우진과 서연이 숨은 H빔의 모서리를 정확히 조준했다.
'궤도 예측이…… 겹쳐서 읽혀.'
우진은 이를 악물었다.
조금 전 터널에서 열두 명의 조직원을 상대로 각성했던 2단계 능력, 궤도 예측(Trajectory Prediction)을 발동하려 애썼지만, 시야에 맺히는 정보가 너무나 방대하고 압도적이었다.
세 겹으로 회전하는 큐브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궤적선들이 허공에서 쪼개지고 다시 합쳐지며, 우진이 취할 수 있는 모든 회피 경로를 미리 계산해 그물망처럼 틀어막고 있었다.
그들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 총알은 우진의 머리통뿐만 아니라 H빔을 관통해 서연의 심장까지 꿰뚫도록 탄도가 계산되어 있었다.
피할 틈이 없었다.
방화벽 백신 코어가 뇌 속에서 경고음을 울리며 뜨겁게 요동쳤지만, 육체의 반응 속도가 기계의 연산 속도를 앞지를 수 없는 절대적인 한계 상황이었다.
집행관들의 검은 장갑 낀 검지손가락이 방아쇠를 쥐어짜는 순간이었다.
2. 어둠 속에서 울리는 박수 소리
짝, 짝, 짝.
찢겨 나간 방화문 너머의 어둠 속에서 건조하고 느릿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박수 소리가 터널의 공기를 가르는 순간, 방아쇠를 당기려던 세 명의 중앙 집행관이 마치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완벽하게 정지했다.
3중 육면체의 회전 속도가 둔화되며 정적 속으로 가라앉았다.
"거기까지."
낮게 가라앉았으나 얼음처럼 차가운 목소리.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터벅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정한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입가에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채 담담하게 걸어 나오는 남자.
조금 전 선로 위에서 쓰러진 운영국장 윤절영의 배후이자, 넥스트 큐브의 수장이자 네모 프로젝트의 총괄 설계자, 서지훈이었다.
인간적인 감정 따위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의 표정에는 고통 대신 뒤틀린 희열과 비릿한 냉소가 걸려 있었다.
서지훈의 머리 위에 뜬 거대한 칠흑의 암흑 프레임은 변전실의 고압 전력을 직접 빨아들인 듯, 차가운 제어 코드를 번뜩이며 압도적인 위압감으로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중앙 집행관 세 명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좌우로 물러서 길을 열었다.
서지훈은 짓이겨진 입술을 혀로 핥으며, H빔 뒤에 몸을 숨긴 우진을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도망자를 쫓는 추적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15년 만에 가장 정교하게 완성된 걸작품을 눈앞에 마주한 광기 어린 학자의 눈빛이었다.
"훌륭하더구나, K-07."
서지훈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윤절영의 손목을 분지르고, 내가 그놈에게 쥐여준 검은 큐브 따위는 손쉽게 무력화시키더군. 선로 위에서 0.3초의 인과율 지연 시간을 파고들어 집행조를 무너뜨린 그 감각…… 그것이 바로 네 뇌간에 각인된 '방화벽 백신'의 2단계 진화 형태였나?"
우진은 숨을 죽인 채 서지훈을 노려보았다.
콧구멍과 입술 사이로 흘러내린 피가 턱 끝에서 굳어가고 있었지만, 우진의 시선은 단 1밀리미터도 흔들리지 않았다.
"또다시 꼭두각시들을 방패막이로 세우러 온 건가, 서지훈."
우진의 목소리가 지하 7층으로 이어지는 수직 통로의 벽면을 타고 낮게 메아리쳤다.
서지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피 묻은 하얀 손수건을 바닥의 젖은 콘크리트 위로 툭 떨어뜨렸다.
"방패막이라니, 섭섭한 소리를 하는군. 나는 그저 네 아비의 옛 동료로서, 그리고 15년 전 네 관자놀이에 직접 메스를 대고 칩을 심었던 집도의로서…… 너라는 기적을 조금 더 가까이서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서지훈이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서 차가운 광망이 일렁였다.
"반갑다, 강정호의 아들아."
3. 15년 전의 배신자
'집도의……?'
서지훈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가 쇠말뚝처럼 우진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유년기 이전의 기억이 포맷된 채 백지처럼 비어 있던 머릿속에서 날카로운 신경통이 폭발했다.
하얀 무영등(無影燈)의 눈부신 조명.
알코올 냄새와 차가운 수술대 금속판의 감촉.
그리고 마스크 너머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메스를 쥐고 있던 손.
그 기억의 파편 위로 서지훈의 얼굴이 겹쳐졌다.
한서연이 H빔 뒤에서 서지훈을 노려보며 쇠파이프를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서지훈…… 당신이었어. 15년 전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 화재 사건 당시, 강정호 박사님의 연구 데이터를 빼돌리고 화재 신고 17분 전에 이미 언론과 소방서에 사전 공작을 쳐둔 장본인이!"
서지훈은 힐끗 서연을 쳐다보며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한서연 기자라고 했나? 기레기들의 그 집요한 취재력은 인정하지. 네 아비 역시 15년 전 그 '3분의 오차'를 파헤치겠다고 신문사 윤전실을 뒤적거리다가 깔끔하게 지워졌지. 부전여전(父傳女傳)이로군. 시스템의 거대한 톱니바퀴에 모래알 하나를 던져 넣으면 시계가 멈출 거라 착각하는 그 오만함까지 똑같아."
서연의 눈가가 붉게 젖어 들며 호흡이 가빠졌다.
자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원수가 눈앞에서 담담하게 그 사실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우진은 떨리는 서연의 손을 굳게 쥐어 진정시키며 서지훈을 향해 서늘하게 물었다.
"아버지는 널 믿었다고 들었다. 국책 연구소에서 인간의 궤도를 계측하고, 비극과 사고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연구를 시작했을 때…… 너는 아버지와 함께 시스템을 연구하던 동료 과학자였다고."
"그래, 믿었지."
서지훈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강정호 선배는 천재였다. 인간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기하학적 도형의 파동을 최초로 수학적 공식으로 치환해 낸 위대한 선구자였지. 네모(□)는 일상의 질서, 세모(△)는 파멸의 굴절, 동그라미(○)는 예측 불가능한 이레귤러. 선배는 그 아름다운 기하학을 통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믿었다. 교통사고를 미리 막고, 파산을 예방하며, 자살하려는 자들의 세모를 펴서 네모로 되돌려놓는 유토피아를 꿈꿨지."
서지훈의 목소리가 점차 낮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터널 안을 맴도는 고주파 노이즈가 그의 음성을 기괴하게 증폭시켰다.
"하지만 선배는 치명적인 오류에 눈이 멀어 있었어. 한 사람의 파멸을 막아내면, 갈 곳을 잃은 엔트로피와 파멸의 에너지가 어디로 가겠느냐? 시스템 전체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해 가장 인접한 무고한 타인에게 전이된다! 선배가 한 사람을 살릴 때마다, 그 옆에 있던 세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크레인에 깔리고 뇌출혈로 쓰러져 죽어 나갔다! 그것이 선배가 발견하고 절망했던 '인과율 보존 법칙'의 잔혹한 실체였다!"
우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강남역 승강장에서 아이를 구했을 때 옆에 있던 청년의 부친이 크레인에 깔려 사경을 헤매던 기억.
편의점 김 씨의 사기 계약을 막았더니 시스템이 친동생의 사채 보증을 투입해 기어이 뇌출혈로 쓰러뜨렸던 기억.
서지훈이 지적하는 모순은 우진 자신이 지난 며칠 동안 뼈를 깎는 고통 속에서 직접 목격했던 현실이었다.
서지훈이 성큼, 우진을 향해 다가왔다.
"깨달았겠지, K-07? 인간이라는 미개한 생물에게 자유의지를 허용하고, 우발적인 개입으로 운명을 뒤흔들게 두면 세상은 끝없는 인과율의 피바람으로 치달을 뿐이다. 그래서 내가 선배의 그 불완전한 연구를 완성한 거다. 완벽한 중앙 통제, 오차 없는 사각의 격자망! 국가와 자본, 언론을 하나로 묶어 모든 인간의 궤도를 미리 계산하고 배분하는 '네모 프로젝트'를 출범시킨 거다!"
4. 가장 잔인한 사랑의 형태
서지훈의 눈동자에 섬뜩한 광기가 소용돌이쳤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왼손을 들어 우진의 가슴팍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우진의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알루미늄 하드디스크, [오메가-루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런데 선배는 끝까지 내 뜻을 거부했어. 통제된 평화 대신 혼돈의 자유를 택하겠다며 발악했지. 연구소를 불태우고, 중앙 코어의 프로토타입을 파괴하려 들었어.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서지훈이 나지막하게 조소를 흘렸다.
"우리가 연구소를 포위하고 테르밋 소각을 시작했을 때, 네 아비가 무엇을 했는지 아느냐?"
우진의 호흡이 멎었다.
관자놀이의 흉터가 쿵쾅거리며 터질 듯이 박동했다.
"선배는…… 자신의 열일곱 살 먹은 친아들을 수술대에 눕혔다."
서지훈의 목소리가 우진의 귓전을 날카로운 송곳처럼 후벼 팠다.
"마취제도 제대로 돌지 않는 그 불길 속에서, 메스로 네 오른쪽 관자놀이를 찢어 발겼지. 코어의 생체 칩을 억지로 뜯어내고, 그 자리에 시스템을 파괴할 수 있는 유일한 악성 코드—방화벽 백신 코어를 네 뇌신경 세포 하나하나에 강제로 때려 박았다."
"거짓말 마……!"
우진이 이를 바득 갈며 소리쳤다.
목구멍에서 피 맛이 솟구쳐 올랐다.
"아버지는 나를 지키기 위해 칩을 적출한 거다! 시스템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나를 탈출시킨 거란 말이다!"
"지키기 위해?"
서지훈이 미친 사람처럼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터널 천장의 비상등이 그의 웃음소리에 맞춰 깜빡거렸다.
"착각하지 마라, 강우진! 네 아비는 널 사랑했지만, 동시에 널 가장 잔인하게 이용한 거다!"
쿵.
우진의 귓가에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일시에 멀어지는 듯한 충격이 번졌다.
서지훈이 한 걸음 더 다가서며,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우진의 귓전에 속삭였다.
"생각해 봐라. 왜 하필 너였을까? 왜 다른 피실험자 50명은 전부 뇌사하거나 불타 죽게 내버려 두고, 오직 너 하나의 신경계에만 백신을 각인시켰을까? 네 뇌가 유일하게 코어의 인과율 파동을 견뎌낼 수 있는 '유전적 적합자'였기 때문이다. 네 아비는 자신의 이상을 완성하기 위해, 세상을 사각의 감옥에서 해방시키겠다는 그 숭고한 망집을 위해…… 자신의 친아들을 15년 뒤에 터질 시한폭탄으로 개조한 거다!"
"아니야……."
서연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우진아, 저자 말 듣지 마! 저건 우진일 흔들려는 수작이야!"
"수작이라고?"
서지훈이 차갑게 서연을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물어보지. 왜 네 아비는 네 17세 이전의 기억을 통째로 지웠을까? 코어의 스캔을 피하기 위해서? 그건 핑계일 뿐이다. 네가 그날 수술대 위에서 겪었던 끔찍한 고통, 아비가 제 아들의 두개골을 열고 뇌를 헤집었던 그 생지옥의 공포를 기억하고 있다면…… 네가 과연 온전한 정신으로 자라나 15년 뒤에 이 오메가-루프를 들고 코어로 찾아올 수 있었을까?"
서지훈의 시선이 다시 우진의 동공으로 내리꽂혔다.
"네 아비는 너를 인간으로 키운 게 아니다. 15년 동안 아무것도 모른 채 회사원 행세를 하며 일상의 네모 속에서 숨 쉬다가, 때가 되면 코어로 걸어 들어와 자폭할 '생체 유도 미사일'로 널 사육한 거다!"
콰아앙!
우진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해일이 일었다.
17세 이전의 기억이 지워졌던 이유.
어머니가 공포에 질려 '아버지는 널 팔아넘겼다'고 발작했던 통화의 조각들.
아버지의 연구 논문 첫 장에 유일하게 먹칠을 피해 선명하게 적혀 있던 이름, '대상자 001 강우진'.
그리고 영상 속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읊조렸던 마지막 말.
'우진아, 네가 이걸 본다면 내 실험은 실패한 거다.'
그것은 아들을 지켜내지 못했다는 자책이었는가, 아니면 결국 아들을 이 지옥의 링 위로 끌어올리고 말았다는 창조자의 비통함이었는가.
우진의 다리가 미세하게 휘청거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믿음의 뿌리가 흔들리며, 암흑 같은 혼돈이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5. 코어의 심장박동과 아버지의 잔영
우진의 머리 위에서 은은하게 빛나던 무형의 기운이 흔들렸다.
관자놀이의 흉터에서 다시금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서지훈은 우진의 동요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입가에 승리자의 잔인한 미소가 번졌다.
"괴롭겠지, K-07. 네가 믿어왔던 아버지의 사랑이, 사실은 가장 정교하게 계산된 도구화였다는 사실이. 하지만 늦지 않았다. 내게 오메가-루프를 넘겨라. 네 뇌 속의 백신 코드를 온전히 추출해 내고, 널 이 저주받은 궤도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게 해 주마.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평범한 사각의 안식을 주겠다."
서지훈이 왼손을 내밀었다.
그 순간, 지하 7층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수직 통로의 심연에서 기괴한 진동이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그것은 기계의 소음이 아니었다.
거대한 생명체의 맥박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푸른빛과 붉은빛의 전자기 펄스가 거대하게 솟구쳐 올랐다.
그 파동이 우진의 가슴을 때리는 순간, 품속에 든 [오메가-루프] 하드디스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찌르르—!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와 지하 7층의 코어가 보이지 않는 회선으로 연결된 듯, 거대한 데이터의 격류가 우진의 뇌신경망을 직격했다.
그리고 그 격류의 한가운데서, 우진은 무언가를 보았다.
서지훈의 왜곡된 독설 너머, 15년 전 수술대 위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그날의 진실을.
타오르는 연구소의 불길.
피범벅이 된 손으로 메스를 쥔 아버지의 떨리는 어깨.
아버지는 차가운 연구자의 눈을 하고 있지 않았다.
피눈물을 흘리며, 의식을 잃어가는 열일곱 살 아들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우진아,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너를 이 잔혹한 세상의 방패로 세우려는 것이 아니다.
놈들이 네 뇌에 심은 칩은 널 영원한 꼭두각시로 만들 터였다.
칩을 떼어내면 넌 죽는다.
그러니 살리기 위해…… 네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하여 네 삶의 주인이 되게 만들기 위해 내 모든 것을 네 신경망에 심는다.
기억을 잊어라.
15년이든, 20년이든…… 네가 평범한 인간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이 백신은 영원히 깨어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만약…… 세상이 기어이 널 다시 사각의 감옥으로 끌고 들어간다면…… 그땐 부디 용서해 다오.'
기억의 봉인이 풀리며 터져 나온 아버지의 진정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시한폭탄의 조립도가 아니었다.
자식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갈아 넣어 만든, 세상에서 가장 처절한 '해독제'였다.
우진의 떨리던 눈동자가 일순간 정지했다.
흔들리던 동공 속으로 서늘하고도 찬연한 은빛의 안광이 벼락처럼 들이찼다.
"……틀렸어, 서지훈."
우진의 입술 사이로 낮고 단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서지훈의 미소가 굳어졌다.
"뭐라고?"
우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오른쪽 관자놀이 흉터에서 뿜어져 나오던 붉은 핏물이 순식간에 증발하듯 말라붙었다.
그리고 그 흉터의 중심에서, 푸른 전자기 스파크를 넘어선 순백의 은빛 파동이 나선형을 그리며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널 부수기 위해 나를 이용한 게 아니야."
우진이 한 걸음, 서지훈을 향해 짓밟듯 다가섰다.
"너희 같은 괴물들에게서 내 삶을 지켜내라고, 내게 선택할 수 있는 힘을 남겨주신 거다."
6. 3차원의 사각지대
서지훈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 내렸다.
회유가 실패했음을 직감한 자의 잔혹한 살의가 번뜩였다.
"미련한 부자(父子)로군. 좋다, K-07. 죽어서 네 아비의 곁으로 가라. 뇌만 온전하다면 백신 코드를 추출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까."
서지훈이 뒤로 물러서며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중앙 집행관, 전원 사격 개시! 오염 노드와 함께 영구 소거하라!"
삐비빅—!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세 명의 중앙 집행관 머리 위 3중 큐브가 광란하듯 회전했다.
셋의 총구가 동시에 우진과 서연을 향해 불을 뿜으려 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우진의 2단계 '궤도 예측'으로도 세 방향에서 쏟아지는 교차 사격을 동시에 회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궤도 예측이 보여주는 미래 궤적선은 평면적인 동선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진의 뇌 속에서 아버지의 진정한 유산이 완전히 해방된 지금, 그의 시각은 또 한 번의 도약을 시작하고 있었다.
'단순히 선을 보는 게 아니야.'
우진은 눈을 감았다가 번쩍 떴다.
은빛 파동이 시신경을 타고 폭발했다.
쐐애액!
집행관들의 머리 위에 뜬 3중 큐브의 내부 구조가 낱낱이 해체되어 우진의 망막에 펼쳐졌다.
첫 번째 큐브는 탄도의 궤적을 연산한다.
두 번째 큐브는 상대의 회피 각도를 예측한다.
세 번째 큐브는 주변 환경의 도비탄(跳飛彈) 확률을 계산한다.
세 개의 큐브가 서로의 연산 값을 교환하며 사격 오차를 0으로 수렴시키는 완벽한 알고리즘.
하지만 그 완벽한 연산 구조 안에도 치명적인 맹점이 존재했다.
'세 큐브가 데이터를 동기화하는 순간 발생하는 0.05초의 위상차.'
그리고 그 위상차가 발생하는 찰나, 세 큐브의 꼭짓점이 일직선으로 정렬되며 외부 자극에 완전히 무방비해지는 '영점(Zero Point)'이 존재하고 있었다.
탕!
탕!
탕!
소음기를 거친 소총 사격음이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세 발의 탄환이 음속을 돌파하며 우진의 미간, 심장, 그리고 서연의 흉부를 향해 쇄도했다.
우진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손에 쥐고 있던 탄소 섬유 바톤을 집행관 1호의 머리 위 3중 큐브의 바로 그 '영점'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집어던졌다.
콰직!
물리적 무기인 바톤이 허공에 뜬 기하학적 도형의 결절점을 타격하는 순간, 상식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인과율의 스파크가 폭발했다.
지지직— 콰앙!
1호 집행관의 머리 위 3중 큐브가 심각한 연산 충돌을 일으키며 붉은 스파크를 튀겼다.
그 순간, 1호 집행관이 쏘아 올린 탄환의 궤적이 45도 꺾이며 옆에 있던 2호 집행관의 어깨를 꿰뚫었다.
콰득!
방탄복을 뚫고 들어간 총알에 2호 집행관이 비틀거리며 사격 대형이 무너졌다.
우진은 그 0.1초의 혼란을 틈타 서연을 낚아채며 선로 바닥을 미끄러지듯 굴렀다.
3호 집행관의 탄환 두 발이 우진의 코트 깃을 찢으며 바닥의 침목에 틀어박혔다.
"크윽……! 진형을 재정비해라! 락온을 다시 걸어!"
서지훈의 다급한 비명이 터널을 찢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우진은 바닥을 구르며 2호 집행관이 떨어뜨린 단축 돌격소총을 낚아챘다.
방아쇠를 당긴 것은 적의 육체가 아니었다.
터널 천장에 매달려 있던 거대한 154kV 고압 변전 케이블 트레이의 고정 앵커였다.
타타탕!
세 발의 점사가 정확하게 녹슨 강철 앵커를 끊어냈다.
쿠구구궁—!
수 톤 무게의 육중한 고압 케이블 트레이가 벼락처럼 무너지며, 중앙 집행관들과 서지훈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강철 장벽이 되어 선로 위로 처박혔다.
치지직, 콰아아앙!
수십만 볼트의 초고압 전류가 합선을 일으키며 거대한 불기둥과 섬광을 뿜어냈다.
집행관들의 바이저가 과전류 섬광에 눈이 멀어 마비되었고, 터널 전체가 푸른 전기 불꽃과 자욱한 검은 연기로 뒤덮였다.
7. 심연으로의 낙하
"지금이야, 서연아! 뛰어내려!"
우진은 연기와 불길을 등진 채, 지하 7층으로 뚫려 있는 거대한 수직 샤프트 난간으로 서연을 이끌었다.
뒤편에서는 무너진 케이블 더미를 걷어내며 서지훈이 내지르는 광기 어린 포효가 들려왔다.
"강우진! 거기서 뛰어내리면 죽는다! 지하 7층은 인간의 신경계가 버틸 수 있는 공간이 아니야! 코어의 엔트로피가 네 뇌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거다!"
"그 결과는 내가 선택해!"
우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소리쳤다.
수직 샤프트 벽면을 따라 비상용 강철 사다리와 점검용 와이어 케이블이 아득한 심연을 향해 뻗어 있었다.
하지만 사다리를 타고 내려갈 여유 따위는 없었다.
집행관들의 3중 큐브가 연산 오류를 복구하고 다시 총구를 겨누기까지 남은 시간은 기껏해야 3초.
우진은 벽면에 걸려 있던 정비용 하강 완강기 벨트를 낚아채 서연의 허리에 단단히 결속했다.
"서연아, 이 와이어를 쥐고 레버를 당겨! 50미터 아래 메인프레임 냉각수 탱크 상단 점검대로 직결돼!"
"우진아, 너는? 너는 어떻게 하고!"
서연이 질겁하며 우진의 옷깃을 붙잡았다.
완강기는 1인용이었다.
두 사람의 체중을 동시에 버틸 수 있는 굵기가 아니었다.
"먼저 내려가서 콘솔 전원을 확보해. 나는…… 이 선을 타고 따라갈 테니까."
우진은 굵직한 고압 접지 케이블을 손에 감아쥐었다.
미친 짓이었다.
장갑도 없는 맨손으로 고압 케이블을 타고 수십 미터 수직 낙하를 감행한다는 것은 손바닥의 살점이 전부 타들어 가거나 추락사할 위험이 도사린 도박이었다.
하지만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믿어, 서연아. 반드시 살아서 코어 앞에서 만나자."
우진은 완강기 강제 사출 레버를 힘껏 내리쳤다.
촤아아악!
강철 와이어가 풀려나가며 한서연의 몸이 심연의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우진아—!"
서연의 비명이 터널 아래로 아득하게 멀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등 뒤의 불길을 뚫고 서지훈과 두 명의 집행관이 연막을 찢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서지훈의 얼굴은 분노로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그의 머리 위 암흑 프레임은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놓치지 마라! 쏴라!"
우진은 서지훈을 향해 마지막으로 차가운 조소를 던졌다.
그리고 몸을 날렸다.
쐐애애액—!
지하 7층의 차가운 허공이 우진의 전신을 집어삼켰다.
양손으로 움켜쥔 접지 케이블에서 맹렬한 마찰열과 스파크가 튀며 손바닥 가죽을 태웠다.
지독한 통증이 척수를 찔렀지만, 우진은 이를 악물며 손을 놓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수십 발의 예광탄이 어둠을 가르며 허공을 헛되이 갈랐다.
바람을 가르며 곤두박질치는 시야 저 아래에서, 마침내 그 거대한 실체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8. 중앙 코어의 문턱
쿵— 쿵— 쿵—
하강 속도가 붙을수록 귓전을 때리는 심장박동 소리는 고막을 찢을 듯한 굉음으로 변해갔다.
지하 7층 암반을 통째로 파내어 만든 거대한 돔형 지하 공간.
그 중심에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한 검은 구조물.
높이만 수십 미터에 달하는 완벽한 정육면체의 슈퍼컴퓨터 프레임, '중앙 코어(Central Core)'였다.
코어의 거대한 외벽은 칠흑 같은 탄소 나노 패널로 덮여 있었고, 그 표면을 따라 수조 개의 붉고 푸른 광학 회로가 마치 인간의 모세혈관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서울 시민 천만 명의 인생 궤도를 24시간 감시하고, 강제로 사건과 사고를 집행하며, 언론과 금융을 쥐고 흔드는 괴물의 심장.
콰아앙!
우진은 메인프레임 냉각수 순환 파이프 상단의 완충 그물망 위로 거칠게 추락했다.
둔탁한 충격에 폐 속의 공기가 일시에 빠져나가며 비명이 터져 나왔다.
"쿨럭…… 헉……!"
우진은 피를 토해내며 그물망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손바닥은 마찰열로 까맣게 타들어가 진물이 흐르고 있었고, 온몸의 뼈마디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쓰러질 수는 없었다.
몇 미터 떨어진 점검용 덱에서 먼저 착륙한 한서연이 완강기 벨트를 풀며 비틀비틀 우진을 향해 달려왔다.
"우진아! 살았어…… 하느님 맙소사, 손이……!"
"괜찮아…… 아직 멀쩡해."
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품속을 더듬었다.
다행히 안주머니의 [오메가-루프] 하드디스크는 단 하나의 흠집도 없이 온전했다.
두 사람은 거대한 중앙 코어의 전면 콘솔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코어의 기단부에는 수백 개의 서버 랙과 함께, 오직 하나의 마스터 단말기 콘솔이 푸른빛을 발하며 대기하고 있었다.
[Node-0 Core Interface]
모니터 화면에 깜빡이는 녹색 커서.
그리고 그 콘솔 유리창 너머, 코어의 정중앙에 안치된 거대한 원통형 액체 챔버 속의 형체가 드러났다.
푸른 냉각수 속에 잠긴 채, 수천 가닥의 생체 전극을 뇌간과 척수에 꽂고 있는 메마른 육신.
15년 전 실종되었던 아버지, 강정호 박사였다.
그의 감긴 눈꺼풀 너머로, 쉼 없이 뇌파가 진동하며 도시의 엔트로피를 연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버지……."
우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려 피 묻은 턱 끝을 적셨다.
아버지는 15년 동안 이 차가운 기계의 연산 핵(Node-0)으로 갇힌 채, 아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도시의 파멸을 홀로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오메가-루프]를 콘솔의 마스터 슬롯에 밀어 넣으려 했다.
찰칵.
슬롯의 잠금장치가 열리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삐이이이익—!
돔 전체에 고막을 찢는 비상 경보음이 울려 퍼졌다.
[경고: 비인가 노드 K-07 접근 감지]
[시스템 침해 방어 프로토콜 Level 5 가동]
[최종 설계자 오버라이드 승인 대기 중]
콘솔 화면이 붉은색으로 반전되며 거대한 에러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수직 샤프트 상공에서, 거대한 화물 승강기가 굉음을 내며 지하 7층 바닥을 향해 맹렬한 속도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승강기 철망 너머로, 섬뜩한 살기를 번뜩이는 서지훈과 수십 명의 무장 병력이 붉은 안광을 번뜩이며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지막 궤도를 끊어내기 위한 최후의 1초가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