궤도 예측의 각성
1. 지하 터널의 적색 격자
한서연이 방수 코트 자락을 거칠게 움켜쥐며 숨을 헐떡였다.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턱을 타고 흘러내린 땀방울이 콘크리트 침목 위로 뚝뚝 떨어졌다.
우진은 품속을 가만히 더듬었다.
안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차갑고 묵직한 하드디스크가 손바닥에 닿았다.
15년 전 아버지가 목숨과 바꿔 남겨둔 시스템 붕괴 패치, [오메가-루프].
그리고 그 패치를 꽂아야 할 목적지는 이제 불과 수백 미터 전방, 서울 지하철 2호선 역삼역 지하 7층 암반층에 자리를 잡고 있는 네모 프로젝트의 심장부, '중앙 코어'였다.
하지만 그들을 향해 뻗어 있는 선로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죽음의 통로로 돌변해 있었다.
그들은 일체의 잡담도, 거친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마치 하나의 기계 부품처럼 정연하게 도열해 있었다.
사내들의 손에 들린 특수 스턴 건과 진압용 충격 바톤의 탄소 섬유 표면이 붉은 조명을 받아 번들거렸다.
윤절영의 입가에 메마른 조소가 걸렸다.
"흐 흐 흐. 우진이 나랑 참 친했는데. 이렇게 마주하니까 참 아쉽네!"
목소리는 지하 터널의 축축한 암벽을 타고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윤절영의 오만한 눈빛이 우진의 오른쪽 관자놀이 흉터를 집요하게 훑었다.
가슴 밑바닥에서 치밀어 오른 서늘한 분노가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번져 나갔다.
아버지가 15년 동안 겪었을 고통, 그리고 이 자들이 구축한 잔혹한 통제의 감옥이 머릿속을 짓밟았다.
윤절영은 턱을 치켜들며 장갑 낀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순순히 오메가-루프를 넘겨라. 그러면 네 그 불완전한 신경망에서 백신 코드를 온전히 적출해 연구소의 보존 표본으로 삼아주마. 곁에 있는 오염 노드 계집은 규정대로 즉시 영구 소거될 테지만 말이다."
한서연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우진의 등 뒤에서 낮게 읊조렸다.
"우진아, 협상할 생각 따위 애초에 없어. 저 자들은 우릴 살려서 보낼 생각이 없어."
"알고 있어."
우진은 주먹을 쥐었다.
도망칠 길은 없었다.
등 뒤는 이미 수색조가 쫓아오며 배수로와 환기 통로를 틀어막고 있었고, 전방은 윤절영과 무장 조직원들이 겹겹이 방벽을 세우고 있었다.
뚫고 지나가는 것 외에는 단 하나의 궤도도 남아 있지 않았다.
2. 기이한 침묵의 사각형
우진은 시선을 들어 윤절영의 등 뒤에 포진한 조직원들을 노려보았다.
관자놀이 부근의 신경을 곤두세우며 궤도 시각화 능력의 초점을 맞추었다.
1단계 외형 인지(Surface Scan).
평소라면 그들의 정수리 위로 각자의 삶을 지탱하는 희미한 도형들이 어른거려야 했다.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자들에게서 피어오르는 온화한 백색 네모(□), 혹은 급박한 위기에 처한 자들이 뿜어내는 붉은 세모(△)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나 우진의 망막에 비친 광경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인간 군상의 형태와도 완전히 달랐다.
'저게…… 대체 뭐지?'
윤절영을 호위하는 열두 명의 조직원들, 그들의 정수리 위 약 10cm 허공에는 예외 없이 완벽한 정사각 기하학체가 떠 있었다.
그것은 은은하게 빛나는 백색이 아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을 깎아 만든 듯한 검은 네모(□)였다.
더 기괴한 것은 그 도형들의 상태였다.
박민재 팀장이나 편의점 김 씨의 머리 위에 떴던 검은 세모들은 시스템의 외압을 받아 불규칙하게 요동치거나, 꼭짓점이 붉게 떨리며 불안정한 파멸의 파동을 뿜어냈었다.
하지만 이 조직원들의 머리 위에 뜬 검은 네모들은 단 1밀리미터의 미세한 떨림조차 없었다.
회전도, 진동도, 빛의 산란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치 차가운 강철판을 레이저로 오려낸 것처럼 완벽한 침묵 속에서 정지해 있었다.
정수리 중심에서 허공으로 곧게 뻗어 올라간 검은 통제선은 터널 벽면의 고압 전선망 너머, 선로 깊숙한 역삼역 지하 7층의 중앙 코어를 향해 한 치의 굴곡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흔들림 없는 완벽한 고정(Lock-in).
개인의 감정, 우발적인 망설임, 공포, 분노 같은 인간적인 변수가 단 0.1%도 개입할 수 없도록 사전에 완전히 프로그래밍된 궤도였다.
기계화된 인간들.
시스템의 파라미터에 종속되어 오직 정해진 명령어대로만 사지를 움직이는 살아있는 꼭두각시들이었다.
"궤도 수정의 여지가 없어……."
우진의 입술 사이로 서늘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세모라면 꼭짓점을 비틀어 물리적 개입으로 네모로 재구성할 여지라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시스템의 통제 명령으로 굳어버린 완벽한 검은 네모는 외부의 충격이나 설득으로 형태를 변형시킬 수 있는 틈이 전무했다.
그들은 살의조차 품지 않은 채, 오직 시스템이 하달한 '목표 노드 무력화 및 회수'라는 단일 연산식을 수행하기 위해 서 있는 벽이었다.
윤절영이 천천히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손가락을 튕겼다.
맑고 건조한 마찰음이 터널 안을 갈랐다.
"진압해라. K-07은 사지만 멀쩡하면 된다. 오염 노드는 현장에서 즉각 파기한다."
그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열두 명의 검은 정장들이 일제히 지면을 박찼다.
촤아악!
도상의 자갈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아무런 기합 소리도, 거친 호흡도 없었다.
오직 기계적인 발구름 소리만이 서늘하게 터널을 메웠다.
좌측 벽면을 타고 세 명이 선회했고, 우측 선로를 따라 넷이 산개했으며, 정면으로 다섯 명이 쐐기형 대형을 이루며 짓쳐 들어왔다.
완벽한 삼각 포위망.
전술 교본을 기계적으로 복제해 놓은 듯한 빈틈없는 쇄도였다.
"우진아!"
한서연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굴러다니던 굵직한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떨리는 손으로는 저 훈련된 집행관들의 돌진을 단 1초도 막아낼 수 없었다.
우진은 숨을 들이켰다.
보통의 시야로는 이들의 전방위 공격을 동시에 포착해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느 쪽을 막아도 다른 쪽에서 뻗어 나오는 고압 스턴 바톤이 등 뒤를 꿰뚫을 터였다.
쿵, 쿵, 심장이 늑골을 부술 듯이 요동쳤다.
'봐야 한다. 저들의 다음 움직임을…… 단순히 서 있는 자리가 아니라, 어디로 발을 딛고 어디로 무기를 휘두를 것인지를!'
우진은 시신경의 모든 빗장을 풀어헤치듯 동공을 극한까지 열었다.
3. 흉터의 박동과 한계 돌파
쐐애액!
오른쪽 관자놀이 흉터 안쪽에서 날카로운 전자기 스파크가 튀는 듯한 작열감이 폭발했다.
2단계 심층 구조 분석(Deep Analysis).
지금까지 우진이 감당해 왔던 분석의 심도는 개별 대상의 도형 구조와 색상의 탁도, 그리고 꼭두각시 줄의 연결 상태를 확인하는 수준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시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안압 상승과 맹렬한 편두통이 뒤따랐다.
하지만 지금은 한 사람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쇄도해 오는 열두 개의 검은 네모, 그 완벽하게 정형화된 시스템의 명령 체계가 물리 세계에 구현되는 '연산의 시간차'를 파헤쳐야만 했다.
"크윽……!"
우진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눈앞의 붉은 방전관 조명이 순식간에 탈색되며 흑백의 세상으로 침전하기 시작했다.
망막 위로 푸른빛의 노이즈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뇌간 깊숙한 곳, 15년 전 적출된 줄 알았던 통제 칩의 빈자리에 새겨져 있던 강정호 박사의 유산—방화벽 백신 코어가 우진의 절박한 의지에 감응하여 비명을 지르듯 깨어났다.
삐이이익—!
고막을 찌르는 이명 사이로, 관자놀이 흉터가 붉은빛으로 희미하게 발광하기 시작했다.
살갗 아래 잠들어 있던 신경망 회로가 푸른 전자기 전류를 뿜어내며 시각 피질 전체를 강제로 오버클럭(Overclock)했다.
'아버지가 내 머릿속에 남겨둔 것…… 단순히 시스템의 명령을 튕겨내는 방패가 아니었어.'
우진은 피가 맺힐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백신은 침입한 바이러스의 구조를 파악하고, 그 진행 경로를 앞서 차단하는 대항 소프트웨어다.
그렇다면 시스템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저 검은 네모들의 궤적 역시, 시스템이 명령을 송출하고 근육이 반응하기까지의 '인과율의 지연 시간'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쿵!
심장의 박동이 급격히 느려졌다.
아니, 심장이 느려진 것이 아니라 우진의 뇌가 시각 정보를 처리하는 속도가 현실의 물리적 시간 단위를 아득히 초월해 가속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돌진해 오던 조직원들의 발동작이 마치 끈적끈적한 물속을 걷는 것처럼 기괴할 정도로 느려졌다.
허공으로 흩날리는 지하철 도상의 자갈 파편 하나하나가 허공에 정지한 채 회전했다.
그리고 그 멈춰버린 세계 한가운데서, 우진의 시야에 새로운 시각적 정보가 폭발하듯 겹쳐 그려졌다.
'보인다……!'
그것은 단순한 도형이 아니었다.
쇄도해 오는 열두 명의 검은 정장들, 그들의 정수리에 박혀 있던 침묵의 검은 네모(□)의 각 꼭짓점으로부터 선명하고 불길한 붉은빛의 궤적선이 허공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선들은 허공을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 그들이 아직 도달하지 않은 0.5초 뒤, 1초 뒤의 미래 공간에 반투명한 잔상을 남겼다.
좌측에서 달려드는 사내의 검은 네모는 왼쪽 레일 위 2번 침목을 밟는 궤적을 그리며 45도 각도로 스턴 바톤을 내리꽂는 궤도를 예고하고 있었다.
우측의 사내는 낮게 슬라이딩하며 우진의 무릎 관절을 꺾기 위해 태클을 들어오는 궤선이 붉은 점선 형태로 지면에 미리 투영되었다.
정면의 세 명은 서연의 목덜미를 제압하기 위해 와이어를 펼치며 전진하는 손의 각도까지 붉은 잔상으로 허공에 박혀 있었다.
물리적 육체가 움직이기 전에, 시스템이 하달한 '명령 궤적'이 0.3초 먼저 허공에 시각화되어 펼쳐진 것이었다.
궤도 예측(Trajectory Prediction).
2단계 심층 구조 분석의 극의이자, 상대의 물리적 동선과 인과율의 실행 경로를 사전에 읽어내는 절대적인 시각화의 각성이었다.
4. 교차하는 궤적의 틈
시간이 다시 현실의 속도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콰아앙!
귓전을 때리는 자갈 밟는 소리와 함께 정면의 집행관이 탄소 섬유 바톤을 우진의 쇄골을 향해 사정없이 내리찍었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일반적인 인간의 동체시력으로는 바톤의 궤적을 파악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전광석화 같은 일격.
하지만 우진의 눈에는 이미 0.3초 전에 그 바톤이 지나갈 자리와 도달 각도가 붉은빛의 궤선으로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슉—!
우진은 고개를 단 반 뼘, 왼쪽으로 가볍게 기울였다.
바톤의 끝자락이 우진의 뺨을 스치듯 허공을 갈랐다.
휘둘러진 바톤의 파괴적인 풍압이 우진의 귓바퀴를 서늘하게 긁고 지나갔다.
'빗나갔다.'
공격을 가한 집행관의 검은 선글라스 너머로 미세한 균열이 스쳤다.
시스템의 계산대로라면 완벽하게 적중했어야 할 좌표였다.
상대가 피할 수 있는 물리적 반경을 모두 계산하여 휘두른 일격이 허공을 헛친 순간, 사내의 머리 위 완벽했던 검은 네모의 모서리에 찌르르하는 미세한 백색 잡음(Noise)이 발생했다.
'궤도가 어긋났다.'
우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허공을 가르고 균형을 잃은 사내의 품 안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우진의 시야에는 사내가 자세를 고쳐 잡기 위해 오른발을 뒤로 물리려는 '다음 궤적선'이 이미 붉은빛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쿵!
우진은 사내가 발을 디디려던 바로 그 좌표로 자신의 구두 뒤축을 강하게 내리찍었다.
사내의 발등이 으스러지듯 짓눌렸다.
균형이 완전히 붕괴한 틈을 놓치지 않고, 우진은 체중을 실어 어깨로 사내의 명치를 들이받았다.
콰득!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거구의 사내가 뒤로 나자빠지며 뒤따라오던 두 번째 조직원과 엉켜 선로 바닥을 굴렀다.
"서연아, 내 오른쪽 세 걸음 뒤로 붙어! 절대 떨어지지 마!"
우진은 쓰러진 사내의 손에서 튕겨 나간 탄소 섬유 바톤을 낚아채며 외쳤다.
"응, 응!"
서연은 우진의 등 뒤에 바짝 밀착했다.
좌측 벽면을 타고 쇄도하던 세 명의 사내가 동시에 방향을 전환했다.
그들의 손끝에서 고압 전류가 파직거리는 테이저 와이어 캡슐이 발사되었다.
탕!
탕!
공기총 소리와 함께 두 발의 전극 침이 어둠을 뚫고 날아들었다.
눈으로 보고 피하는 것은 불가능한 속도였다.
하지만 우진의 시각에는 전극 침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올 궤적이 두 가닥의 붉은 레이저처럼 허공에 미리 그어져 있었다.
침의 종착지는 우진의 왼쪽 허벅지와 서연의 어깨였다.
우진은 서연의 허리를 낚아채며 선로 우측의 배수 홈으로 몸을 비틀어 굴렀다.
치지직—!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전극 침이 우진이 조금 전 서 있던 침목에 꽂히며 맹렬한 불꽃을 튀겼다.
고압 전류가 젖은 자갈 위로 푸르게 번져 나갔지만, 우진은 이미 도상의 절연 고무 패킹이 깔린 지점으로 완벽하게 발을 딛고 서 있었다.
'피했다…… 전부 다 보여.'
우진의 전신에서 전율이 일었다.
흉터에서 뿜어져 나오는 극심한 편두통은 뇌를 깨부술 것처럼 날뛰었지만, 그 고통의 대가로 얻어낸 시각 정보는 완벽한 신의 섭리처럼 명료했다.
적들의 머리 위에 뜬 검은 네모는 그들의 자유의지가 거세된 결과물이었다.
그것은 곧 그들이 시스템이 지시하는 '가장 효율적인 최적의 동선'만을 맹목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의미했다.
기계는 가장 빠른 길을 선택하지만, 그 길은 우진의 눈앞에 투명한 궤적으로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었다.
빗나간 공격 뒤에는 반드시 반동이 따른다.
시스템이 다음 명령을 보정하여 하달하기까지 걸리는 0.3초의 연산 지연.
그 지연 시간이야말로 완벽한 기계 군단이 지닌 유일하고도 치명적인 '사각지대'였다.
5. 파열하는 통제선
우진은 바톤을 고쳐 쥐며 전방을 향해 쇄도했다.
수세에서 공세로의 완전한 전환이었다.
"저 자식을 막아! 대형을 유지해라!"
뒤편에서 윤절영의 날카로운 고함이 터져 나왔다.
윤절영의 검은 육면체가 보내는 신호를 수신한 조직원들의 검은 네모가 일제히 차갑게 공명하며, 남은 아홉 명이 부채꼴 형태로 선로 전체를 가로막는 밀집 차단벽을 형성했다.
정면 돌파는 자살행위처럼 보였다.
누구라도 저 촘촘한 전기 충격 바톤의 그물망으로 뛰어들면 순식간에 감전되어 사지가 마비될 터였다.
하지만 우진의 동공에 맺힌 세계는 달랐다.
아홉 개의 검은 네모에서 뻗어 나오는 붉은 궤적선들이 서로 얽히고설키며 복잡한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물망은 겉보기에 틈이 없어 보였지만, 선들이 교차하는 결절점마다 미세한 인과율의 공백이 발생하고 있었다.
4번 집행관의 바톤 휘두름 반경과 5번 집행관의 방패 전개 반경 사이에 존재하는 40센티미터의 사각.
7번 집행관이 전진 스텝을 밟을 때 8번 집행관의 시야를 가리는 0.4초의 시각적 차폐 구역.
그것은 인간이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틈이 아니었다.
개별 개체의 유기적 협조가 아니라, 중앙 코어가 송출하는 일방통행 명령을 기계적으로 수신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데이터 병목 현상'이었다.
"서연아, 내 발자국만 밟고 따라와!"
우진은 허리를 낮추며 4번과 5번 집행관 사이의 좁은 틈을 향해 몸을 날렸다.
쐐애액!
5번 집행관의 충격 바톤이 우진의 정수리를 노리고 호를 그리며 짓쳐 내려왔다.
우진은 피하지 않았다.
궤적선이 가리키는 낙하지점의 정중앙, 바톤의 회전력이 가장 약해지는 손잡이 부근의 궤도를 향해 들고 있던 탄소 섬유 바톤을 대각선으로 찔러 넣었다.
챙—!
날카로운 금속성 파열음이 터널을 울렸다.
지렛대의 원리처럼 바톤을 꺾어 올리며 사내의 손목 관절을 바깥으로 비틀어 튕겨냈다.
충격으로 사내의 상체가 앞으로 쏠리는 순간, 우진은 바닥의 젖은 레일을 딛고 미끄러지듯 회전하며 4번 집행관의 복부를 향해 묵직한 옆차기를 꽂아 넣었다.
퍽!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4번 집행관이 비틀거리며 뒤편의 고압 배전 박스 벽면으로 처박혔다.
치지직, 콰아앙!
배전 박스가 부서지며 터널 천장의 비상등 절반이 쇼트를 일으키며 폭발했다.
붉은빛이 꺼지고 암흑이 순간적으로 터널을 집어삼켰다.
"크윽! 불을 켜라! 나이트 비전을 가동해!"
조직원들의 침묵이 깨지며 다급한 무전 음성이 뒤섞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일반인이라면 완전히 시야를 잃고 헤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우진에게 어둠은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붉은 방전관의 잡광이 사라지자, 허공에 떠 있는 도형들과 그들이 내뿜는 궤적선이 더욱 찬연하고 선명하게 망막에 각인되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열 줄기의 검은 네모.
그리고 그 네모들이 혼란 속에서 갈팡질팡하며 뿜어내는 붉은색 오류 신호들.
우진은 어둠을 가르며 달렸다.
궤적선이 교차하지 않는 안전한 좌표만을 골라 침목을 딛고 도약했다.
좌측에서 다가오는 충격 바톤을 반 뼘 차이로 흘려보내고, 그 사내의 목덜미를 바톤으로 후려쳐 기절시켰다.
우측에서 덮쳐오는 두 명의 사내가 서로의 동선이 엉켜 부딪히도록 그들의 진로 중간에 서연의 쇠파이프를 던져 유도했다.
쿵!
콰당탕!
사내들이 엉켜 쓰러지며 내지르는 단말마가 어둠 속에서 메아리쳤다.
불과 10초도 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윤절영이 자랑하던 정예 집행조 절반이 선로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고 있었다.
기계적 완벽함은, 그 규칙을 읽어내는 자의 손안에서 가장 취약한 모래성이 되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6. 넥스트 큐브 운영국장 윤절영의 절망
팟, 파지직!
터널 천장의 비상 발전기가 뒤늦게 돌아가며 깜빡이는 형광등 불빛이 선로를 다시 비추었다.
피어오르는 전선 타는 연기 너머로, 윤절영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 오만하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동공에는 형언할 수 없는 경악과 분노가 이글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윤절영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 집행관들은 중앙 코어의 전술 알고리즘과 100% 동기화된 개체들이다. 한 치의 감정적 동요도, 오차도 없는 완벽한 사각의 통제망이란 말이다! 그런데 네놈 따위가…… 통제 칩까지 뜯어내고 달아난 결함 프로토타입 K-07 따위가 어떻게 이들의 궤적을 전부 읽고 피해 낸단 말이냐!"
우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윤절영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손에 쥔 바톤 끝에서 검은 절연 기름이 뚝뚝 떨어져 침목을 적셨다.
관자놀이 흉터는 마치 뼈를 깎아내는 듯한 통증을 뿜어내고 있었고, 콧구멍에서 흘러내린 가느다란 핏줄기가 인중을 타고 입술을 붉게 물들였다.
2단계 궤도 예측을 무리하게 가동한 대가로 뇌혈관이 터져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하지만 우진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완벽한 사각?"
우진이 낮게 읊조렸다.
목소리는 서늘한 얼음장 같았다.
"너희가 자랑하는 그 완벽함이야말로 가장 치명적인 결함이다. 자유의지를 빼앗고 오직 위에서 내려주는 명령어대로만 움직이게 만들어 놓았으니, 그 명령이 도달하는 찰나의 시간차와 사각지대를 너희는 영원히 스스로 메우지 못해."
우진은 윤절영의 정수리 위를 응시했다.
그곳에는 다른 조직원들의 평면 검은 네모와는 확연히 다른 형상이 떠 있었다.
일반 감시관들의 칠흑 같은 큐브와는 격이 다른 위압적인 형상.
윤절영의 총구가 우진의 미간을 겨누었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였다.
7. 0.3초의 궤적
찰칵.
공포에 질린 서연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우진은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윤절영의 손가락이 방아쇠를 당기기 전, 그의 머리 위 육면체의 꼭짓점에서 한 가닥의 섬뜩한 붉은 궤선이 뿜어져 나왔다.
궤도 예측의 시각화.
총구의 미세한 떨림, 윤절영의 시선이 머무는 각도, 화약이 폭발하며 총열을 빠져나올 탄환의 궤적이 0.3초 앞선 미래의 잔상으로 우진의 망막에 완벽하게 투영되었다.
'미간에서 왼쪽으로 2센티미터.'
탕—!
소음기를 거친 둔탁한 파열음이 터널을 찢었다.
우진은 총성이 울리기 정확히 0.1초 전, 상체를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꺾었다.
슈우욱—!
뜨거운 마찰열을 머금은 9mm 탄환이 우진의 뺨을 스치며 귀밑머리 몇 가닥을 태우고 등 뒤의 콘크리트 벽면에 처박혔다.
콰직!
콘크리트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윤절영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 거리에서, 완벽하게 조준된 영거리 사격을 맨몸으로 피한다는 것은 인간의 반사신경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괴물 같은 놈……!"
윤절영이 연달아 방아쇠를 당기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탕!
탕!
두 발의 총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우진은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탄환이 지날 자리를 미리 비워두며 지그재그로 침목을 박차고 쇄도한 우진은, 두 번째 탄환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이미 윤절영의 코앞까지 육박해 있었다.
"내 아버지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우진의 싸늘한 일갈과 함께, 손에 쥐고 있던 탄소 섬유 바톤이 대각선 아래에서 위로 매섭게 솟구쳤다.
콰아앙!
정확하게 윤절영의 오른손 손목을 강타했다.
바작, 뼈에 금이 가는 소리와 함께 권총이 허공으로 높게 솟구쳐 올랐다.
"크아아악!"
윤절영이 부러진 손목을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우진은 회전하는 원심력을 그대로 실어 반대편 팔꿈치로 윤절영의 턱주가리를 짓이겨 올렸다.
퍽!
윤절영의 고개가 꺾이며 피 섞인 침이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거구가 선로 바닥의 굵은 고압 케이블 위로 나자빠졌다.
윤절영의 머리 위에 위태롭게 떠 있던 검은 육면체가 심각한 연산 오류를 일으키며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빛을 잃고 암전되었다.
"허억…… 허억……."
우진은 바톤을 바닥에 내던졌다.
전신을 짓누르는 탈진감과 안구 뒤편에서 뇌를 바늘로 찌르는 듯한 반작용이 밀려왔다.
시야가 잠시 암전되었다가 돌아왔다.
코피가 턱 끝까지 흘러내려 옷깃을 적시고 있었다.
궤도 예측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대가는 가혹했다.
시신경과 뇌간에 가해진 압박으로 인해 몸의 중심을 잡기조차 힘들 정도였다.
"우진아!"
서연이 달려와 쓰러지려는 우진의 팔을 부축했다.
"괜찮아? 세상에, 피가……!"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우진은 거칠게 소매로 피를 훔쳐냈다.
그리고 선로 바닥에 쓰러져 신음하는 윤절영을 내려다보았다.
윤절영은 깨진 입술 사이로 피를 흘리며 우진을 올려다보았다.
공포에 질린 눈빛 속에서도 광기 어린 집착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하…… 하하…… K-07…… 네놈이 이겼다고 생각하나?"
윤절영이 피투성이가 된 손으로 선로 옆 배전 케이블을 짚으며 비틀비틀 상체를 일으켰다.
"네놈이 여기서 날 꺾었을지 몰라도…… 역삼역 지하 7층의 코어는 이미 최종 방어 프로토콜을 가동했다. 네가 그 오메가-루프를 꽂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고나 있는 거냐?"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주머니 속 하드디스크를 더욱 강하게 쥐었을 뿐이었다.
윤절영의 입술 사이로 피거품이 끓어올랐다.
"시스템 격자망이 통째로 찢겨 나가면…… 이 도시에 얽혀 있던 수천만 개의 궤도가 일시에 붕괴한다! 네 아비가 만든 그 불완전한 패치는 구원이 아니야! 인과율의 대폭발…… 대재앙이 시작될 거다!"
"그 혼란조차, 인간이 스스로 마주해야 할 자유다."
우진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조작된 평온 속에서 사각의 가축으로 살게 두진 않아."
8. 역삼역 심연의 문턱
우진은 윤절영을 뒤로한 채 서연과 함께 선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쓰러졌던 조직원 몇몇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지휘체계인 윤절영의 검은 육면체가 마비된 상태에서 그들의 검은 네모는 방향성을 잃고 멍하니 껌뻑이고 있을 뿐이었다.
2호선 본선 터널의 어둠을 가르고 나아가자, 마침내 선로 우측 벽면이 거대하게 트이며 역삼역 변전실과 연결되는 거대한 유지보수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꺼운 철골 기둥 사이로 수십 가닥의 특수 고압 전력선이 터널 바닥을 뚫고 지하 깊은 곳으로 수직 강하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지하철 노선도에는 존재하지 않는 구역.
승강장보다 훨씬 더 깊은 곳, 지하 7층의 암반층을 향해 뚫려 있는 거대한 수직 샤프트(Shaft)였다.
웅웅웅웅—!
통로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심장 밑바닥을 울리는 거대한 기계음이 온몸의 뼈마디를 뒤흔들었다.
도시 전체의 인생 궤도를 쉼 없이 연산하고 통제하는 거대한 괴물, '중앙 코어'의 박동 소리였다.
"여기가…… 역삼역 지하 7층으로 이어지는 통로구나."
서연이 거대한 수직 통로 난간을 짚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칠흑 같은 심연 저 아래에서, 기괴한 푸른빛과 붉은빛의 전자기 펄스가 마치 거대한 심장의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그 빛이 터져 나올 때마다, 허공에는 수만, 수십만 개의 미세한 사각형 격자망이 신기루처럼 피어올랐다가 스러졌다.
서울 시민 천만 명의 삶을 옭아매고 있는 보이지 않는 감옥의 실체였다.
우진은 관자놀이의 흉터를 짚었다.
흉터에서 뿜어져 나오던 통증이, 기이하게도 이 깊은 지하에 도달하자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니, 통증이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뇌 속에 각인되어 있던 방화벽 백신 코어가, 바로 눈앞에 도사린 시스템의 근원지와 완벽하게 주파수를 맞추며 공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쿵— 쿵— 쿵—
코어의 박동과 우진의 심장 박동이 정확하게 일치했다.
그리고 그 공명 속에서, 우진의 시야 저 아래 심연의 중심부에 홀로 떠 있는 하나의 거대한 존재가 느껴졌다.
수많은 검은 통제선의 뿌리이자, 시스템의 모든 연산을 떠받치고 있는 최초의 근원.
Node-0.
15년 전 사라졌던 아버지, 강정호 박사의 궤도였다.
'아버지.'
우진의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버지는 죽은 것이 아니었다.
저 차가운 기계 덩어리의 심장부에 갇힌 채, 15년 동안 홀로 도시의 비극을 막아내기 위해 연산의 무게를 견디며 아들이 도달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진은 품속의 [오메가-루프]를 꺼내 손에 꽉 쥐었다.
차가운 스토리지 케이스 너머로 아버지의 마지막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가자, 서연아."
우진이 수직 계단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이 사각의 감옥을, 오늘 완전히 끝내러 가자."
그러나 우진이 계단의 철제 난간을 잡고 몸을 숙이려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아앙—!
머리 위, 닫혀 있던 변전실 비상 방화문이 엄청난 폭압과 함께 뜯겨 나가며 터널 안쪽으로 날아와 처박혔다.
짙은 화약 연기와 함께 번쩍이는 스트로브 조명이 어둠을 갈랐다.
그리고 자욱한 연기 너머로, 지금까지 마주쳤던 감시관들과는 격이 다른 압도적인 살기를 머금은 실루엣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정수리 위에는 단순한 큐브가 아니었다.
검은 육면체의 표면이 세 겹으로 중첩되어 회전하는 기괴한 고위 집행체, 중앙 코어의 직속 친위대인 '중앙 집행관'들이었다.
그들의 총구가 일제히 수직 통로 입구에 선 우진과 서연을 향해 고정되었다.
피할 곳 없는 외나무다리 위의 마지막 관문이 열리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