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자 001
1. 빗속의 조우
아스팔트를 때리는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빗물이 귓바퀴를 타고 흘러내려 목덜미를 적셨지만, 차가움을 느낄 겨를조차 없었다.
강우진의 시선은 오직 정면, 어둠에 잠긴 서초동 법원 뒤편의 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향해 있었다.
오른쪽 관자놀이의 4cm 수술 흉터가 마치 불에 달군 굵은 쇠바늘로 쑤셔 파내는 것처럼 요동쳤다.
찌릿, 찌릿거리며 뇌간을 파고드는 반작용의 박동은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 진폭을 흉포하게 넓혀 갔다.
2단계 심층 분석을 켜지 않았는데도 시야 가장자리가 검붉은 노이즈로 일렁였다.
인과율의 파열음.
무언가 강제로 왜곡되고, 짓눌려 터지기 직전에 시스템 격자망이 내지르는 비명 같은 진동이었다.
헐떡이는 숨을 토해내며 언덕길을 꺾어 돌았을 때, 희미하게 명멸하는 낡은 가로등 불빛 아래 비에 젖은 공중전화 부스가 보였다.
그리고 그 부스 모퉁이 벽에 등을 붙인 채 주저앉아 있는 여자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한서연이었다.
"서연아!"
우진이 빗물을 차차 튀기며 단숨에 짓쳐 들어갔다.
그의 부름에 웅크리고 있던 서연이 파르르 떨며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빗물과 눈물,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은 시체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핏기가 완전히 가신 입술이 딱딱 부딪치며 통제되지 않는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우, 우진아…… 우진아……!"
서연이 가늘게 떨리는 손을 뻗어 우진의 젖은 외투 자락을 찢어질 듯 움켜쥐었다.
그녀의 초점 없는 눈동자는 정면의 우진을 온전히 보지 못하고, 연신 허공과 자신의 젖은 손바닥, 그리고 건너편 닫힌 상점의 쇼윈도 유리를 번갈아 헤매고 있었다.
"보여…… 진짜 보여…… 내 머리 위에……!"
서연이 턱을 덜덜 떨며 자신의 정수리 위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우진은 그녀의 손끝을 굳이 올려다보지 않아도 이미 그 흉측한 형상을 직시하고 있었다.
서연의 정수리 위 10cm 상공.
본래 질서정연하고 잔잔한 일상을 가리키며 떠 있어야 할 백색 네모는 흔적도 없이 깨져 있었다.
그 자리에는 빛을 집어삼키는 칠흑 같은 어둠으로 벼려진 '검은 세모(△)'가 서슬 퍼런 붉은 윤곽을 두른 채 팽이처럼 미친 듯이 자전하고 있었다.
웅웅거리는 저주파 진동이 우진의 고막과 시신경을 직접 타격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모의 꼭짓점 세 개로부터 가느다란 검은 실선들이 거미줄처럼 뿜어져 나와, 칠흑 같은 빗줄기를 뚫고 밤하늘 높은 곳을 향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가락이 인형의 실을 조작하듯, 도시 전체를 덮고 있는 배후 시스템과 서연의 생명 궤도가 강제로 직결되어 있었다.
'검은 세모의 자각 현상.'
편의점 김 씨에게 닥쳤던 바로 그 징후였다.
시스템의 오염 노드로 낙인찍혀 강제 개입의 덫에 걸린 인간이 시신경 압박 속에서 스스로의 파멸 도형을 자각하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은 곧 시스템의 '궤도 강제 덮어쓰기' 집행이 초읽기에 돌입했음을 알리는 사형선고였다.
"나…… 나 죽는 거지? 저거…… 저 새까만 게 날 짓누르고 있어. 숨이 안 쉬어져, 우진아. 머릿속이 타버릴 것 같아……!"
서연이 가슴을 부여잡고 구역질을 삼키듯 헐떡였다.
핏발이 선 그녀의 안구에서 실핏줄이 터져 나와 흰자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정신 차려, 한서연. 내 눈 봐."
우진이 무릎을 꿇고 앉아 차갑게 얼어붙은 서연의 양 볼을 거칠게 감싸 쥐었다.
빗물이 두 사람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우진의 단호하고 서늘한 눈빛이 공포로 산산이 부서진 서연의 망막 한가운데를 파고들었다.
"안 죽어. 내가 절대로 그렇게 안 둬."
"하지만…… 저게……! 저 줄이 내 목을 조르고 있단 말이야……!"
"내가 끊어낼 거야. 그러니까 헛소리하지 말고 똑바로 서."
우진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서연을 일으켜 세웠다.
서연의 무릎이 꺾이며 허물어지려 하자 우진은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받쳐 제 몸에 밀착시켰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콰르릉!
벼락이 치듯 하늘이 하얗게 번쩍인 것이 아니었다.
골목길 어귀, 젖은 도로 위를 비추던 수은 가로등 불빛이 일제히 파직거리며 기괴한 청백색으로 점멸하기 시작했다.
웅- 하는 거대한 전자기 유도음이 아스팔트 바닥을 타고 발바닥으로 전해졌다.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가 터질 듯 부풀어 오르며 날카로운 경고음을 뇌 속에 울려 댔다.
놈이 왔다.
2. 시스템 덮어쓰기의 전조
골목길 초입의 어둠 속에서 규칙적이고 무거운 구두 굽 소리가 빗소리를 짓이기며 다가왔다.
뚜벅, 뚜벅.
완벽한 보폭, 오차 없는 박자.
빗물이 쏟아지는 허공을 가르고 나타난 인영은 칠흑 같은 검은 방수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가로등의 역광에 가려져 희미한 윤곽만 보였으나, 정수리 위는 너무도 선명하고 뚜렷했다.
정수리 위 약 10cm 상공.
일반인들의 평면적인 백색 네모(□)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
모서리마다 푸른빛의 시스템 제어 코드가 매트릭스처럼 쉼 없이 흘러내리는 완벽한 3차원의 정육면체, '검은 육면체(Black Cube)'가 허공에 군림하고 있었다.
육면체의 상단면에서는 통나무처럼 굵은 통제 회선이 뻗어 올라가 하늘 너머의 보이지 않는 '중앙 코어'와 직결되어 있었다.
감시관이었다.
감시관의 차가운 시선이 우진을 지나쳐, 공포에 떨고 있는 한서연에게 가닿았다.
"대상 노드 식별 완료. 코드 한서연. 시스템 오염도 91.4% 돌파."
감시관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스피커의 필터를 여러 겹 거쳐 출력되는 기계 합성음처럼 낮고 건조했다.
"항상성 네트워크 보정 프로토콜 가동. 접촉 오염 노드의 영구 소거를 집행한다."
감시관이 코트 품 안에서 묵직한 티타늄 합금 재질의 테이저 건을 꺼내 들었다.
그 총구는 단순한 전기 충격기가 아니었다.
표면을 타고 푸른색 고전압 아크가 지직거리며 일렁였고, 우진의 시야에는 그 총구 주변으로 인과율을 강제로 찢어발기는 미세한 사각형 격자망이 전개되는 것이 보였다.
물리적 상해를 입혀 대상의 심장을 마비시키는 동시에, 검은 세모의 자멸 궤도를 강제로 촉발하는 시스템 집행 도구였다.
"우진아……!"
서연이 우진의 등 뒤로 숨으며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회전하던 검은 세모가 회전 속도를 폭발적으로 끌어올리며 피처럼 붉은 광채를 뿜어냈다.
꼭두각시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서연의 경동맥 부근 피부가 푸르스름하게 질려 갔다.
'시간이 없다.'
우진의 머릿속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서연이 한테서 확보했던 아버지의 친필 연구 바인더, 그리고 행단보도에서 윤채린의 은빛 동그라미(○)가 남겼던 현상이 머릿속에서 전광석화처럼 교차했다.
동그라미는 시스템의 사각 격자망을 바깥으로 밀어낸다.
척력(Repulsion).
그리고 아버지의 연구 노트에 기록되어 있던 단 하나의 문장.
'인과율의 충격파는 소멸하지 않는다. 다만 유도되고 편향될 뿐이다.'
편의점 김 씨를 구하려 했을 때 우진은 단순히 사기 계약서를 찢는 국소적 개입에 그쳤다.
그 결과 시스템은 김 씨의 친동생을 이용해 '사채 보증'이라는 대체 변수를 강제로 덮어씌워 끝내 김 씨를 뇌출혈로 쓰러뜨렸다.
검은 세모를 단지 막아서는 것만으로는 덮어쓰기 알고리즘을 이길 수 없다.
덮어쓰기가 들어오기 전에, 인과의 경로 자체를 시스템이 예측할 수 없는 사각지대로 튕겨내야만 했다.
감시관의 검지손가락이 테이저의 방아쇠를 당기려는 찰나였다.
우진의 눈동자가 골목길 우측의 가파른 콘크리트 옹벽 위를 포착했다.
낡은 빌라의 도시가스 배관과 오래된 고압 전선관이 빗물받이 홈통을 따라 엉켜 내려오고 있었다.
전선관의 피복 하나가 빗물에 젖어 미세한 누전 스파크를 튀기고 있는 지점.
그리고 그 바로 아래에는 공사장에서 버려둔 철제 비계 파이프 여러 개가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었다.
우진의 시야에 순간적으로 기하학적 궤적선이 그어졌다.
저 파이프의 각도, 누전관의 접지점, 그리고 감시관의 발밑에 고여 있는 넓은 빗물 웅덩이.
"움직이지 마, 서연아!"
우진이 서연의 어깨를 밀쳐 공중전
부스 안쪽의 깊은 사각으로 처박는 것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파지직- 탕!
감시관의 총구에서 발사된 두 개의 고전압 전극 침이 허공을 갈랐다.
우진의 뺨을 스쳐 지나간 푸른 전류가 귓바퀴를 태울 듯한 열기를 뿜어냈다.
침은 서연이 서 있던 공중전화 부스의 강화유리에 틀어박혔고, 콰앙 하는 파열음과 함께 유리창 전체가 거미줄처럼 박살 났다.
우진은 착지와 동시에 빗물 웅덩이를 미끄러지듯 굴러 옹벽 아래의 철제 비계 파이프로 쇄도했다.
감시관의 목덜미가 기계적으로 꺾이며 우진을 향했다.
"돌발 행동 감지. 개체 K-07, 위험도 상향 조정. 즉각 무력화 프로토콜 병행."
감시관이 테이저의 카트리지를 재장전하려 손목을 꺾었다.
그 0.5초의 빈틈.
우진은 비계 파이프의 하단을 군홧발로 걷어찼다.
쾅!
빗물에 젖어 미끄럽던 파이프의 균형이 무너지며 육중한 쇠기둥 세 개가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파이프의 끝부분이 옹벽 위의 누전 전선관을 정통으로 내리찍었다.
콰지지직-!
거대한 청자색 불꽃이 폭발하듯 밤하늘을 수놓았다.
220V 고압 전류가 절단된 전선관을 타고 철제 파이프 전체로 쏟아져 내렸고, 그 전도체는 감시관이 딛고 선 거대한 빗물 웅덩이로 사정없이 내리꽂혔다.
빗물이 끓어오르며 파란 전류의 그물이 골목길 바닥 전체를 덮쳤다.
치지직- 치지지직!
"……치…… 치익…… 연산 오류…… 전압 불안정……!"
감시관의 전신이 파르르 떨리며 뻣뻣하게 굳었다.
바닥을 타고 올라온 강력한 전류가 감시관의 신체와 그가 쥐고 있던 테이저 장비로 역류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정수리 위에 떠 있던 검은 육면체(Cube)였다.
쏟아져 들어온 물리적 과전류와 인과율의 충돌로 인해, 완벽하던 육면체의 표면 코드가 미친 듯이 깨져나가며 회색 노이즈를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중앙 코어로 이어져 있던 굵은 통제 회선이 맹렬하게 요동치며 가늘어졌다.
"지금이야!"
우진이 고무 밑창 운동화로 전류가 닿지 않는 연석을 딛고 뛰쳐나가 서연의 팔을 낚아챘다.
"가자! 뛰어!"
넋이 나가 있던 서연을 끌어당겨 골목길 반대편, 불 꺼진 재개발 구역의 미로 같은 계단참으로 내달렸다.
3. 버려진 성역
뒤편에서 감시관의 시스템 복구 신호음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으나, 얽히고설킨 좁은 골목길의 미로는 기계적인 직선 추적을 허용하지 않았다.
우진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는 것을 무시한 채 서연을 이끌고 재개발 철거 예정 구역의 가장 깊숙한 막다른 곳으로 파고들었다.
붉은 페인트로 커다랗게 '철거'라는 글자가 쓰인 낡은 2층 양옥집.
마당의 녹슨 철문을 젖히고 들어가 안쪽에서 빗장을 걸어 잠근 뒤, 집 뒤편에 딸린 어둡고 축축한 보일러실 겸 지하실로 서연을 밀어 넣었다.
쾅.
낡은 합판 문을 닫고 빗장을 걸자 외부의 거센 빗소리가 먹먹하게 잦아들었다.
곰팡내와 젖은 흙냄새가 코를 찔렀다.
서연은 문에 등을 기댄 채 주르륵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지하실의 적막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우진은 주머니에서 방수 팩에 넣어둔 스마트폰을 꺼냈다.
전원은 이미 꺼져 있었지만, 만일을 대비해 배터리 팩을 아예 분리해 구석에 던져 두었다.
그리고 재킷 안쪽 품에서 서연의 가방 속에 들어 있던 두껍고 묵직한 하드커버 바인더를 꺼냈다.
15년 전, 테헤란로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 화재 현장에서 빠져나왔던 아버지 강정호의 친필 연구 논문.
[인간 궤도 모델링과 사전 예측 알고리즘].
손전등 대신 챙겨 온 소형 LED 펜라이트의 스위치를 켜자, 좁고 차가운 백색 광선이 어둠을 가르고 낡은 종이 표면을 비추었다.
"우진아……."
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우진을 불렀다.
그녀의 머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다행히 아까처럼 폭주하듯 자전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칠흑 같은 검은 세모(△)는 그녀의 정수리 위에서 불길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꼭두각시 줄 역시 끊어지지 않은 채 얇은 실선으로 허공을 향해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고압 전류를 이용해 감시관의 동기화 신호를 강제로 흔들어놓은 덕분인지, 세모의 회전 속도는 현저히 떨어져 있었고 서연의 호흡도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
"괜찮아. 당장은 위치를 특정하지 못해."
우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그놈의 검은 큐브에 과부하가 걸렸어. 시스템이 신호를 다시 동기화하려면 시간이 걸려."
"그놈…… 사람이 아니었어. 그렇지?"
서연이 무릎을 끌어안으며 이를 악물었다.
"목소리도, 눈빛도…… 마치 기계 부품 같았어. 그리고 내 머리 위에 뜬 저거…… 나 진짜 미친 줄 알았어, 우진아. 쇼윈도에 비친 내 머리 위에 새까만 세모가 칼날처럼 돌고 있는데…… 숨이 턱 막히면서 당장이라도 차도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고."
서연의 눈가에서 다시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회부 기자로서 온갖 험한 사건과 비리를 파헤치며 누구보다 단단하다고 자부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를 비웃듯 머리 위에 강제로 덧씌워진 초월적인 파멸의 궤도 앞에서는 한낱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게 놈들이 쓰는 방식이야."
우진이 바인더의 첫 장을 넘기며 말했다.
"편의점 사장님도 그랬어. 큐브 네트웍스의 사기 계약을 내가 막아주자마자, 다음 날 아침에 동생 사채 빚이라는 변수가 덮어씌워졌지. 뇌출혈로 쓰러져 의식을 잃을 때까지 시스템은 쉬지 않고 파멸을 밀어붙였어. 네가 지금 느끼는 그 충동도 너 자신의 감정이 아니야. 시스템이 네 궤도를 강제로 덮어쓰기 위해 신경망에 밀어 넣고 있는 인위적인 노이즈야."
"인위적인…… 노이즈……."
서연이 자신의 젖은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그럼 난 어떻게 되는 건데? 저게 머리 위에 떠 있는 한, 내가 어딜 도망치든 차에 치이든 심장이 멎든 결국 죽는다는 뜻이잖아."
"그래서 여길 찾아야 해."
우진이 바인더의 한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12화에서 확인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친필 메모.
[2011년 9월 17일 전소된 연구소 지하 3층 메인 프레임을 열어라.
그곳에 내가 남겨둔 마지막 궤도가 있다.]
서연의 시선이 그 메모로 향했다.
"연구소 지하 3층……? 15년 전에 완전히 불타서 철거된 곳이잖아. 지금은 지상에 다른 빌딩이 올라가 있는데……."
"아니, 지상은 불탔지만 지하는 그대로 매몰됐어."
우진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남긴 수첩과 이 논문의 기록을 대조해 보면, 당시 배후 세력은 화재를 일으켜 연구소를 서둘러 폐쇄하면서 지하 3층 서버룸을 물리적으로 파괴하지 못했어. 고온 전자기 방전으로 전산 데이터를 태웠다고 발표했지만, 아버지는 그 방전이 닿지 않는 독립 폐쇄망에 무언가를 숨겨뒀어. 놈들이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논문과 나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이유가 바로 그거야."
서연이 마른침을 삼켰다.
공포 속에서도 기자의 집요한 이성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듯, 그녀의 눈동자에 날카로운 빛이 스쳤다.
"그 지하 3층에…… 저 검은 세모를 지울 방법이 있다는 거야?"
"지우는 게 아니야."
우진이 펜라이트의 불빛을 논문 표지의 다이어그램으로 옮겼다.
□(네모, 일상), △(세모, 파멸), ○(동그라미, 이레귤러).
"궤도는 지워지지 않아. 오직 다른 형태로 전이되거나 깨질 뿐이지. 백색 네모로 되돌리면 인과율의 보존 법칙 때문에 너 대신 다른 누군가가 죽어. 편의점 사장님처럼 강제 덮어쓰기가 들어와 결국 너도 죽게 되고. 그러니까 유일한 길은 하나뿐이야."
우진의 손가락이 완벽한 원환, '동그라미(○)'의 기호 위에 멈추었다.
"시스템의 격자망 자체를 벗어나는 것. 시스템이 너를 노드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궤도를 이레귤러로 튕겨내는 거야."
4. 먹칠된 명부의 비밀
서연이 멍하니 우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진의 오른쪽 관자놀이에 선명하게 새겨진 4cm의 수술 흉터.
그 흉터가 희미한 펜라이트 불빛 아래에서 붉게 도드라져 보였다.
"우진아. 아까 그 연구 논문 뒤쪽에…… 네 이름이 있었다고 했지?"
서연의 떨리는 목소리에 우진은 말없이 바인더의 뒷부분으로 손을 옮겼다.
누렇게 변색된 두꺼운 모조지들이 바스락거리며 넘어갔다.
논문의 본문에는 수많은 미분방정식과 위상수학 기호, 그리고 인간의 생체 신호와 뇌파를 디지털 궤도로 치환하는 복잡한 시스템 아키텍처 다이어그램이 빼곡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15년 전의 기술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초월적이고 정교한 공학의 집대성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바인더의 맨 마지막 부록 섹션에 도달했다.
[부록 C : 생체 동기화 프로토타입 임상 대상자 명부]
종이를 비추는 우진의 펜라이트 불빛이 미세하게 떨렸다.
명부 페이지가 펼쳐지자, 서연의 입에서 억눌린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게…… 다 뭐야……?"
페이지 전체가 검은색 유성 잉크로 무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가로로 길게 그어진 표에는 번호와 식별 코드, 성명, 생년월일, 칩 이식 일자, 동기화 수치 등의 항목이 칸칸이 나뉘어 있었으나, 2번부터 50번까지의 모든 칸은 굵은 검은색 매직으로 긁어내듯 칠해져 단 한 글자도 식별할 수 없었다.
종이가 찢어질 정도로 집요하게 덧칠해진 검은 먹칠 자국들.
15년 전, 누군가가 이 명부의 정체를 철저히 은폐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지워버린 흔적이었다.
하지만 오직 단 한 줄.
가장 첫 번째 줄, 표의 맨 윗줄만은 그 먹칠의 손길을 기적처럼 피해 온전히 살아남아 있었다.
우진과 서연의 시선이 그 첫 번째 칸에 꽂혔다.
[대상자 번호: 001]
[식별 코드: Node-1 : K-07]
[성명: 강우진 (姜宇鎭)]
[생년월일: 1994년 08월 12일]
[이식 부위: 우측 측두엽-시신경 교차부 (4.0mm 전극 어레이)]
[코어 동기화율: 98.7% (기준치 초과)]
[상태: 방화벽 백신 코어 탑재 완료 / 통제 불능 격리 프로토콜]
서연의 눈동자가 하얗게 질려 갔다.
"대상자…… 001번…… 강우진……."
서연이 우진의 얼굴과 명부의 활자를 번갈아 보며 숨을 삼켰다.
"너였어…… 15년 전 그 연구소에서…… 가장 먼저 칩을 머리에 심었던 아이가…… 너였단 말이야?"
우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활자를 바라보는 그의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것 같았다.
17세 이전의 기억이 포맷된 것처럼 하얗게 지워져 있던 유년 시절.
부모에 대한 따뜻한 추억 대신 오직 차가운 실험실 냄새와 푸른 모니터 불빛, 그리고 관자놀이를 쪼개는 듯한 극심한 두통의 잔상만이 파편처럼 떠돌던 이유.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친아들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시스템의 통제 칩을 때려 박았던 것이다.
'어머니의 말이 사실이었던 건가?'
사흘 전, 어머니가 수화기 너머로 비명처럼 내뱉었던 절규가 우진의 귓전을 찢어발겼다.
'아버지는 널 버린 거다! 널 팔아넘긴 거야!'
주먹을 쥔 우진의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다.
배신감과 비통함,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분노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마그마처럼 치밀어 올랐다.
세상의 궤도를 통제하겠다는 그 끔찍한 괴물 같은 시스템의 첫 번째 실험체로, 아버지는 피붙이인 자신을 제물로 바쳤던 것인가.
"우진아……."
서연이 조심스럽게 우진의 떨리는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잠깐만. 이것 좀 봐. 이상해."
"뭐가."
우진의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거칠게 갈라져 나왔다.
서연은 손가락으로 명부의 마지막 칸을 가리켰다.
"여기 적힌 비고란…… 상태 표시를 봐. 다른 피실험자들과 달라."
우진의 시선이 서연의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상태: 방화벽 백신 코어 탑재 완료 / 통제 불능 격리 프로토콜]
"백신……?"
우진의 미간이 좁혀졌다.
서연이 논문 앞장의 연구 개요를 미친 듯이 넘기며 손가락으로 특정 문단을 짚어 내려갔다.
"내가 아까 너 만나기 전에 이 논문 서론을 대충 훑어봤거든? 연구 책임자인 강정호 박사는…… 처음부터 시스템을 찬동한 게 아니었어."
서연의 목소리에 다급함과 확신이 실리기 시작했다.
"봐, 여기 적혀 있잖아. 배후 세력인 '네모 프로젝트' 이사진은 도시 전체의 인간들을 완전히 통제하기 위해 모든 개체를 '사각형(□)' 격자망에 가두고,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세모(△)'로 즉각 숙청하는 절대적 중앙 코어 시스템을 원했어."
서연이 우진을 똑바로 응시했다.
"하지만 강정호 박사는 그 위험성을 알고 있었어. 시스템이 완성되는 순간 인류의 자유의지는 영원히 박탈당하고 거대한 가축 사육장이 될 거라는 걸. 그래서…… 박사는 시스템의 설계도를 그리면서 동시에 그 시스템을 내부에서 완전히 붕괴시킬 수 있는 유일한 '오류'를 심어둔 거야."
"그게……."
"그래. 백신(Vaccine)."
서연의 떨리는 목소리가 축축한 지하실 공기를 울렸다.
"시스템의 모든 제어 코드를 몸속에 수신하면서도, 결코 그 명령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시스템의 격자망을 내부에서 깨뜨릴 수 있는 유일한 대항 개체. 통제받는 노예(Node)가 아니라, 시스템을 무너뜨리기 위해 심어둔 '방화벽 파괴자'…… 그게 바로 대상자 001번, K-07이었던 거야."
5. 15년 전의 진실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았다.
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바인더의 종이를 한 장 더 넘겼다.
명부 뒷면의 백지 여백에, 파란색 만년필로 휘갈겨 쓴 아버지의 친필 필적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잉크가 빗물이나 눈물에 번진 듯 얼룩진 그 글씨는, 아버지가 실종되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 남긴 처절한 고백록이었다.
[우진아.
네가 만약 이 기록을 읽고 있다면, 나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거나 코어의 심연 속으로 끌려들어 갔을 것이다.
용서하지 마라.
네 아비라는 작자가 제 자식의 머릿속에 괴물의 파편을 심어 넣었다는 사실을, 그 어떤 말로도 용서받을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그들이 연구소를 장악하고 아이들을 끌고 오기 시작했을 때, 내게 남은 선택지는 없었다.
놈들은 도시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중앙 코어로 묶어 완벽한 사각의 감옥을 만들려 하고 있다.
그 궤도 격자망이 완성되면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정해진 좌표만을 맴돌다 소멸하는 꼭두각시가 된다.
나는 시스템을 막아야 했다.
외부에서의 물리적 공격으로는 코어를 부술 수 없다.
코어는 도시의 모든 인프라와 생체 신호를 인질로 잡고 있으니까.
놈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하나, 시스템의 코드를 그대로 읽어내면서도 그 통제에 면역된 '단 하나의 이레귤러'를 시스템 내부에 잠입시키는 것뿐이었다.
나는 너에게 칩을 이식한 것이 아니다.
놈들이 개발한 제어 칩의 회로를 뜯어고쳐, 코어의 명령을 역으로 해독하고 무력화할 수 있는 '백신 알고리즘'을 네 시신경과 뇌간에 각인시킨 것이다.
그리고 연구소가 불타던 날 밤, 나는 너를 살리기 위해 그 칩을 강제로 적출했다.
칩은 뽑혀 나갔지만, 칩이 네 신경계에 남겨둔 백신 코드와 도형의 시각화 능력은 네 뇌 속에 영원히 각인되었다.
네 관자놀이에 남은 흉터는 굴종의 낙인이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 도래할 거대한 감옥의 문을 부수기 위해 내가 네게 남겨둔 유일한 열쇠다.
기억을 지운 것을 원망하거라.
놈들의 감시망이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네가 진실을 기억하고 있다면 코어의 스캐너는 너를 단 1초 만에 찾아내 소거했을 테니까.
평범한 인간으로 살아남아라.
그리고 언젠가 네 눈에 세상의 비틀린 궤도가 보이기 시작하거든…… 그때 비로소 지하 3층으로 오너라.
그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글씨는 거기서 끊겨 있었다.
종이 위로 뚝, 뚝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우진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15년 동안 그를 짓눌러왔던 어둡고 메마른 공백.
아버지는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팔아넘긴 것도 아니었다.
거대한 괴물에 맞서 인류의 궤도를 지켜내기 위해, 가장 끔찍한 고통을 짊어지면서까지 아들을 '유일한 희망'으로 벼려내었던 것이다.
오른쪽 관자놀이의 4cm 흉터가 뜨겁게 맥동했다.
이전까지는 뇌를 찌르는 듯한 끔찍한 두통으로만 느껴졌던 그 통증이, 지금 이 순간에는 마치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처럼 뜨겁고 생생한 고동으로 바뀌어 있었다.
"우진아……."
서연이 떨리는 손으로 우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우진은 거칠게 눈물을 훔쳐내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흔들리던 나약함과 혼란이 완전히 증발해 있었다.
그 자리에는 오직 서슬 퍼런 칼날 같은 결의만이 번뜩이고 있었다.
"서연아."
"응."
"너를 살릴 수 있어."
우진이 서연의 정수리 위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붉은빛을 뿜으며 자전하고 있는 검은 세모(△).
그리고 밤하늘 너머로 이어진 꼭두각시 줄.
이제는 보였다.
단순한 기하학적 도형이 아니었다.
저 검은 세모의 꼭짓점과 꼭두각시 줄이 연결된 접점마다, 시스템이 서연의 생명 유지 신호를 인질로 잡고 있는 미세한 '제어 코드'의 격자점들이 우진의 시신경에 실시간으로 분해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백신.
우진의 뇌 속에 각인되어 있던 K-07의 본래 기능이, 15년 만에 진실을 마주하면서 완전한 각성을 일으키고 있었다.
"내가 2단계 심층 분석으로 저 줄을 직접 타격하면…… 인과율의 튕김 현상이 발생할 거야."
우진이 낮게 읊조렸다.
"하지만 이전처럼 무고한 타인에게 전이되게 두지 않아. 내가…… 내 몸으로 그 충격파를 받아낸다."
"뭐……? 안 돼! 그럼 네가 죽잖아!"
서연이 기겁하며 우진의 팔을 붙잡았다.
"내 몸엔 백신이 있어. 시스템의 충격파를 흡수하고 분해할 수 있는 방화벽 코드가."
우진의 눈빛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연구소 지하 3층으로 가려면 너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해. 기자로서 네가 확보한 당시의 관공서 도면과 내부 인프라망 데이터 없이는 매몰된 지하로 침투할 수 없어. 그러니까 넌 여기서 죽으면 안 돼."
우진은 서연의 반대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서연의 정수리 위 10cm 허공을 향해 뻗었다.
관자놀이의 흉터가 폭발하듯 붉은 안광을 뿜어냈다.
2단계 심층 분석(Deep Analysis)의 한계를 넘어선 미지의 영역.
우진의 손끝에서, 푸른빛도 검은빛도 아닌 순수한 백색의 파동이 나선형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6. 궤도의 강제 단절
쐐애애액-!
지하실 내부의 공기가 소용돌이치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우진의 시야 전체가 초고해상도의 매트릭스 화면처럼 전환되었다.
서연의 머리 위에 매달린 검은 세모의 회전 주기가 극도로 느려졌다.
초당 수백 회를 회전하던 파멸의 칼날이, 우진의 시신경 안에서는 마치 멈춰 선 것처럼 낱낱이 분해되었다.
세모의 내부를 채우고 있던 검은 잉크 같은 질감.
그것은 외부 세력이 서연의 의지를 꺾고 자살 충동과 사고 유발을 강제하기 위해 주입한 '악성 인과율 패킷'이었다.
그리고 그 패킷을 지속적으로 공급하고 있는 세 가닥의 꼭두각시 줄.
'보인다.'
우진의 관자놀이에서 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극심한 안압 상승과 뇌간을 쥐어짜는 고통이 전신을 마비시킬 듯 덮쳐왔지만, 우진은 이를 악물고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오른손 끝에 맺힌 백색 파동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벼려졌다.
그것은 시스템의 법칙을 따르는 네모(□)도, 파멸의 세모(△)도 아니었다.
시스템의 격자망을 거부하고 밀어내는 강력한 척력의 에너지, 바로 윤채린에게서 보았던 '은빛 동그라미(○)'의 본질과 정확히 일치하는 파동이었다.
"끊어져라."
우진이 허공을 향해 손을 내리갈랐다.
콰아아앙-!
좁은 보일러실 안에서 보이지 않는 인과율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백색의 칼날이 서연의 검은 세모를 붙들고 있던 세 가닥의 꼭두각시 줄을 일도양단했다.
팅-!
하는 거대한 강철 와이어가 끊어지는 듯한 금속성의 파열음이 지하실을 뒤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갈 곳을 잃은 검은 세모의 파멸적 에너지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가장 가까운 생명체, 즉 우진을 향해 맹렬하게 쏟아져 내렸다.
인과율 보존 법칙의 역류.
서연에게 닥쳐야 할 죽음의 총량이 우진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컥!
우진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왈칵 뿜어져 나왔다.
전신 신경망이 불타는 듯한 고통과 함께 심장이 멎을 듯한 압박이 흉곽을 짓눌렀다.
하지만 그 파멸의 에너지가 우진의 가슴을 뚫고 들어가려는 바로 그 찰나.
우진의 온몸에 퍼져 있던 백신 알고리즘이 푸른 섬광을 일으키며 기적처럼 가동했다.
치지지직-!
우진의 피부 표면을 따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방화벽 회로들이 상형문자처럼 떠올랐다.
쏟아져 들어온 검은 파멸의 에너지는 우진의 몸을 파괴하지 못하고, 백신 코드와 격렬하게 중화 반응을 일으키며 하얀 연기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엔트로피의 상쇄.
시스템이 강제한 파멸의 총량이, K-07이라는 방화벽 코어에 흡수되어 완전히 무력화된 것이다.
"아…… 아아……!"
서연이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녀의 정수리 위를 짓누르던 칠흑 같은 검은 세모가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그 파편들이 사라진 자리.
서연의 머리 위에는 더 이상 검은 세모도, 꼭두각시 줄도 존재하지 않았다.
지극히 평온하고 은은한, 그러나 이전보다 훨씬 더 단단하고 투명해진 순백의 '백색 네모(□)'가 서연의 정수리 위 10cm 상공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숨을 헐떡이던 서연의 안색에 핏기가 돌아왔다.
그녀의 귓가를 찢던 이명과 구역질, 그리고 차도로 뛰어들고 싶다던 광기 어린 충동이 거짓말처럼 깨끗이 씻겨 내려갔다.
"우진아……!"
서연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피를 토하고 무릎을 꿇은 우진을 부축했다.
우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턱 끝으로 흘러내리는 피를 소매로 닦아냈다.
온몸의 뼈마디가 부서지는 것 같았지만, 의식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맑았다.
성공했다.
타인에게 비극을 전가하지 않고, 시스템의 강제 덮어쓰기 알고리즘을 내부에서 끊어낸 최초의 완벽한 궤도 수정.
"해냈어…… 서연아. 네 궤도가 돌아왔어."
우진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서연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자신의 몸을 짓누르던 거대한 쇠사슬이 끊겨 나갔음을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안도는 길지 않았다.
위잉- 위잉- 위잉-!
닫힌 지하실 문 너머, 저 멀리 서초동 도심 상공 전체에서 기괴한 공습경보 같은 전자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오직 궤도의 파동을 감지하는 자들에게만 들리는 주파수.
도시 전체의 통제 시스템이 비정상적인 '코드 소실'을 감지하고 전면적인 경계 태세에 돌입한 신호였다.
"놈들이 눈치챘어."
우진이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아버지의 연구 논문 바인더가 단단히 쥐여 있었다.
"오염 노드가 소거되지 않고 강제로 정상화됐으니, 중앙 코어는 이걸 시스템에 대한 직접적인 해킹으로 간주할 거야. 감시관들이 도시 전체를 봉쇄하기 시작할 거다."
서연이 젖은 옷을 추스르며 품 안에서 낡은 가죽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쪽 비밀 포켓에서 접혀 있던 특수 플라스틱 보안 카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15년 전 화재 당시 서연이 연구소 잔해에서 수습했던, 이제는 용도 폐기된 줄만 알았던 출입증이었다.
[한국첨단통신기술연구원 - 지하 시설 마스터 키]
"가자, 우진아."
서연의 눈빛은 더 이상 공포에 질린 피해자의 것이 아니었다.
우진을 살리고, 진실을 밝혀내겠다는 결연한 동지의 눈빛이었다.
"테헤란로 그 빌딩…… 겉으로는 대기업 사옥이지만, 지하 주차장 최하층 비상 발전기실 뒤편에 15년 전 매몰된 옛 연구소 구역으로 통하는 밀폐 차폐벽이 있어. 내가 그 설계 도면을 외우고 있어."
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남겨둔 마지막 궤도가 잠들어 있는 곳.
2011년 전소된 연구소의 봉인된 심장부, 지하 3층 메인 프레임을 향한 출진의 시간이었다.
우진은 지하실 문빗장을 풀고, 칠흑 같은 폭우가 쏟아지는 도시의 어둠 속으로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