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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12화

확률적 인생경로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깨진 유리창과 검은 세모

 

와장창!

 

한밤의 정적을 찢어발기며 서초동 패스트푸드점 2층의 대형 강화유리창이 우박처럼 쏟아져 내렸다.

 

귓전을 때리는 파편 비산음과 함께 차가운 새벽 공기가 실내를 가득 채우던 온기를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유리 파편이 바닥의 리놀륨 타일을 긁으며 사방으로 튀었고, 그 충격파에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던 복사 서류들이 허공으로 어지럽게 날아올랐다.

 

"서연아, 엎드려!"

 

강우진은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한서연의 어깨를 감싸 쥐며 바닥으로 쓰러뜨렸다.

 

팔꿈치가 바닥에 닿으며 날카로운 유리 조각 하나가 코트 소매를 찢고 살갗을 파고들었지만, 쓰라림을 느낄 겨를 따위는 없었다.

 

우진의 시야 한구석, 바닥에 엎드린 서연의 정수리 위가 맹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투명하고 맑은 은빛을 띠던 백색 네모(□)의 윤곽이 산산이 바스러지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칠흑 같은 어둠을 머금은 기괴한 검은 세모(△)가 솟구쳐 오르고 있었다.

 

위태롭게 거꾸로 선 세모의 세 꼭짓점에서는 끈적끈적한 타르 같은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 안개는 실선이 되어 깨진 창문 너머 허공, 보이지 않는 도시 상공의 어딘가를 향해 팽팽하게 뻗어 나가고 있었다.

 

꼭두각시 줄이었다.

 

시스템이 기어이 이 아이에게까지 외압의 올가미를 씌운 것이다.

 

"우, 우진아…… 저게 뭐야? 저 사람, 대체 뭐야……?"

 

서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우진의 옷자락을 쥐어뜯듯 움켜쥐었다.

 

서연의 눈동자가 향한 곳에는 창틀을 딛고 서 있는 그림자가 있었다.

 

검은 방수 코트를 발목까지 늘어뜨린 남자.

 

얼굴에는 표정이라고 부를 만한 근육의 움직임이 전무했다.

 

마치 정교하게 깎아 만든 실리콘 인형처럼 창백하고 매끄러운 얼굴 위로,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는 무기질의 동공만이 섬뜩하게 박혀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머리 위 약 10cm 상공.

 

평면의 도형이 아니었다.

 

정육면체의 모든 모서리가 기하학적인 완벽함을 뽐내며 천천히 자전하는 3차원의 검은 육면체(Black Cube).

 

그 육면체의 표면에는 녹색과 백색의 이진법 제어 코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고, 천장을 뚫고 하늘 높이 솟구친 굵은 전선 형태의 통제 회선이 그 정육면체를 허공에 붙들어 매고 있었다.

 

감시관이었다.

 

역삼역 골목길에서 우진을 향해 살기를 뿜어내던 바로 그 부류의 집행자였다.

 

감시관의 입술이 미세하게 벌어지며 금속을 마찰시키는 듯한 기계적인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탈 개체 Node-1, 프로토타입 K-07 포착. 접촉 대상자 한서연, 오염도 87% 도달. 규정에 따라 외부 접촉 노드에 대한 즉각 소거 시퀀스를 집행한다."

 

"개소리하지 마!"

 

우진은 이를 악물며 바닥을 굴러 서연을 자신의 등 뒤로 밀어 넣었다.

 

관자놀이의 4cm 수술 흉터가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후벼 파는 듯 욱신거렸다.

 

감시관의 검은 육면체와 서연의 정수리에 솟구친 검은 세모가 동시에 시야에 들어차자, 시신경을 타고 올라오는 2단계 심층 분석의 반작용이 뇌간을 쥐어짰다.

 

덮어쓰기다.

 

시스템은 서연이 15년 전의 진실에 도달하자마자 그녀의 일상 궤도를 강제로 박탈하고, '우발적 살인' 혹은 '추락사'라는 파멸의 궤도로 덮어쓰려 하고 있었다.

 

이대로 감시관의 손길이 서연에게 닿는 순간, 그녀의 세모는 붉은 피를 머금고 완전히 파열될 터였다.

 

2. 인과율의 사각지대

 

감시관의 오른손이 코트 안쪽에서 불길한 금속성 물체를 꺼내 들었다.

 

탄소 섬유로 압축된 특수 테이저 리트랙터였다.

 

고전압의 펄스를 방출해 심장을 일시적으로 정지시키고 뇌 신경망을 영구 마비시키는 암살용 장비였다.

 

찌르르륵, 푸른 방전 불꽃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튀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우진의 뇌리가 차갑게 회전했다.

 

무모하게 정면으로 달려들어서는 승산이 없었다.

 

감시관은 인간의 신체 능력을 아득히 상회하는 골격 강화 처리를 거친 존재들이었다.

 

게다가 인과율 보존 법칙이 머릿속을 스쳤다.

 

여기서 감시관을 물리적으로 저지한다 한들, 시스템이 또 다른 변수를 밀어 넣어 기어이 서연을 죽음으로 몰아갈 것이 분명했다.

 

편의점 김 씨에게 닥쳤던 잔혹한 '궤도 강제 덮어쓰기'의 악몽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니야, 방법이 있어.'

 

골목길에서 윤채린이 보여주었던 은빛 동그라미의 파동.

 

시스템의 사각 격자를 비틀고 바깥으로 밀어내던 그 기적 같은 반발력.

 

동그라미의 잔류 파동이 머무는 곳에서는 감시관의 락온 신호가 일시적으로 교란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진의 품 안에는 채린이 떨어뜨리고 간 N.P 메모와 함께, 서연이 건네준 15년 전 연구소의 타다 남은 문건들이 들어 있었다.

 

"서연아, 내가 신호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비상계단으로 뛰어."

 

우진이 낮게 속삭였다.

 

"하지만 우진아, 너는…… 저 사람 손에 든 게……!"

 

"나 안 죽어. 저놈들의 목표는 날 살려서 회수하는 거고, 널 지워버리는 거야. 내가 미끼가 될 테니까 먼저 나가."

 

감시관이 한 발자국 성큼 안으로 내디뎠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군화 밑창에 짓밟히며 바스락거렸다.

 

"집행 개시."

 

감시관의 팔이 번개처럼 뻗어 나왔다.

 

푸른 방전 줄기가 서연의 가슴팍을 향해 쏘아져 들어오는 찰나였다.

 

우진은 바닥에 뒹굴던 두꺼운 원목 쟁반을 번쩍 들어 올려 궤적을 비틀었다.

 

콰지지직!

 

쟁반 표면이 새까맣게 타들어가며 고압 전류의 불꽃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그 반동으로 우진의 양팔에 찌릿한 마비감이 번졌지만, 우진은 물러서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뜨거운 커피포트를 통째로 감시관의 안면을 향해 끼얹었다.

 

촤아악!

 

펄펄 끓는 커피 액체가 감시관의 창백한 얼굴과 눈가를 강타했다.

 

일반인이라면 비명을 지르며 얼굴을 감싸 쥐었을 공격이었지만, 감시관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러나 액체가 눈앞을 가린 0.5초의 틈, 정수리 위 3차원 검은 육면체의 회전 주기에 미세한 지연이 발생했다.

 

표면을 흐르던 이진법 제어 코드에 노이즈가 인 것이다.

 

"지금이야! 뛰어!"

 

우진이 포효하듯 외치며 서연의 등을 밀쳤다.

 

서연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흩뿌린 채 2층 구석의 비상구 철문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쾅!

 

비상구 문이 거칠게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계단실을 울렸다.

 

감시관의 고개가 서연이 사라진 방향으로 꺾였다.

 

무기질의 동공이 붉은빛으로 전환되며 타깃 재설정 알고리즘을 가동하려 했다.

 

"노드 제거 우선순위 변경……"

 

"네 상대는 나잖아, 이 인형 자식아!"

 

우진은 바닥에 놓인 의자를 걷어차 감시관의 무릎 관절을 가격했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감시관의 상체가 휘청거렸다.

 

우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닥에 흩어진 서연의 가방을 낚아채며 반대편 창문, 깨져나간 테라스 난간을 향해 몸을 날렸다.

 

"타깃 K-07 확보 절차 이행."

 

뒤편에서 감시관의 서늘한 기계음이 쫓아붙었다.

 

우진은 2층 난간을 박차고 1층 주차장의 플라스틱 분리수거함 위로 뛰어내렸다.

 

쿵!

 

우지끈!

 

플라스틱 뚜껑이 박살 나며 거대한 충격이 온몸의 뼈마디를 울렸다.

 

우진은 이를 악물고 낙법을 치며 아스팔트 바닥을 굴렀다.

 

오른쪽 어깨와 갈비뼈 부근에 숨이 턱 막히는 통증이 몰려왔지만 멈출 수 없었다.

 

저 위 2층 창틀에서 감시관이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은 듯 가볍게 지상으로 낙하하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2단계 심층 분석을 무리하게 유지한 탓에 관자놀이 흉터에서는 피가 배어 나오는 듯 열감이 들끓었다.

 

우진은 가방을 가슴에 품은 채, 새벽 안개가 자욱하게 깔린 서초동 법조타운 뒷골목의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3. 빗속의 도주

 

새벽 5시 10분.

 

가을을 재촉하는 차가운 밤비가 서초동의 낡은 골목길을 적시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아스팔트 바닥을 때리며 튀어 올랐고, 축축한 흙냄새와 매연 냄새가 뒤섞여 폐부 깊숙이 찔러 들어왔다.

 

헉, 헉, 헉.

 

우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미로처럼 얽힌 다세대 주택가 골목을 질주했다.

 

젖은 구두 밑창이 빗물 고인 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흙탕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뒤편 백여 미터 거리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울리는 규칙적인 발소리.

 

빗소리조차 지우지 못하는 그 기계적인 발걸음은 조금의 지침도 없이 우진의 뒤를 바짝 죄어오고 있었다.

 

감시관의 머리 위에 뜬 검은 육면체가 뿜어내는 검은 파동이 골목의 공기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서연이는…… 무사히 빠져나갔을까.'

 

다행히 비상계단 쪽으로는 감시관의 주의가 쏠리지 않았다.

 

감시관의 락온 신호가 오염된 접촉 노드인 서연보다, 시스템의 최우선 회수 대상인 프로토타입 K-07에게 강하게 반응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서연의 머리 위에 드리워졌던 그 끔찍한 검은 세모가 뇌리에 문신처럼 박혀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멀리 도망친다 한들, 시스템의 인과율 네트워크가 작동하는 한 그녀의 목숨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이 빌어먹을 시스템을 끊어내지 못하면,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김 씨 아저씨처럼 파멸해.'

 

우진은 막다른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몸을 틀었다.

 

낡은 빌라 단지 사이에 자리한 재개발 예정 구역이었다.

 

붉은색 라커로 '철거'라는 글자가 적힌 흉물스러운 슬레이트 지붕 건물들이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사람의 인기척이 완전히 끊긴 곳.

 

전봇대의 가로등마저 깨져 있어 칠흑 같은 암흑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우진은 숨을 죽인 채 반쯤 부서진 담벼락 틈새, 낡은 시멘트 구조물 뒤편으로 몸을 숨겼다.

 

축축한 시멘트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가쁜 숨을 삼켰다.

 

빗물이 턱선을 타고 흘러내려 찢어진 셔츠 깃을 적셨다.

 

저벅, 저벅.

 

골목 어귀에서 감시관의 군화 소리가 멈췄다.

 

우진은 조심스럽게 벽 모서리로 시선을 돌렸다.

 

1단계 외형 인지만으로도 감시관의 위치가 뚜렷하게 잡혔다.

 

공중에 떠 있는 칠흑빛의 검은 육면체(Cube).

 

그 육면체는 빗방울조차 흡수해 버리듯 주변의 공간을 왜곡시키며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감시관이 고개를 천천히 좌우로 돌렸다.

 

신호 동기화를 통해 K-07의 생체 신호를 스캔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삐이이익.

 

우진의 관자놀이 흉터 부근에서 모기 소리 같은 미세한 이명이 울렸다.

 

15년 전 적출된 통제 칩의 신경 접합부가 감시관의 제어 주파수에 공명하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통증에 우진은 이를 악물며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다.

 

'들키는 건 시간문제야.'

 

스캔 반경이 좁혀져 오고 있었다.

 

이 거대한 감시망을 교란할 수단이 필요했다.

 

그때, 품에 안고 있던 서연의 가방 안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가방 지퍼를 열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황급히 챙겨 나온 한서연의 취재 파일철이었다.

 

젖지 않도록 두꺼운 비닐 팩에 이중으로 밀봉되어 있던 두툼한 서류 뭉치.

 

그 비닐 팩의 틈새로, 은은하고 희미한 백색 광채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건?'

 

우진의 눈이 커졌다.

 

그것은 단순한 종이의 빛이 아니었다.

 

인간의 머리 위에 떠오르는 기하학적 도형들이 발하는 파동과 완벽히 일치하는, 인과율의 고유 진동수였다.

 

4. 가방 속의 미공개 연구

 

서류 뭉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약한 파동은 감시관의 칠흑빛 검은 육면체가 내뿜는 살기와 기묘하게 상쇄를 일으키고 있었다.

 

마치 얇은 비누막처럼 우진의 신체를 감싸 안으며 감시관의 스캔 주파수를 튕겨내고 있었던 것이다.

 

저 멀리 서 있던 감시관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신호가 끊긴 반대편 골목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군화 소리가 빗소리 너머로 차츰 멀어져 갔다.

 

우진은 벽에 기댄 채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하얀 입김이 차가운 빗속으로 흩어졌다.

 

위기는 넘겼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감시관이 탐색 실패를 인지하고 지원 병력을 호출하거나 시스템에 재스캔을 요청하면 이 일대는 완전히 봉쇄될 터였다.

 

우진은 철거 대상 건물의 깨진 창틀을 넘어 눅눅한 먼지 냄새가 풍기는 빈집 안쪽으로 들어갔다.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바닥돌 위에 주저앉은 우진은 젖은 코트를 벗어 던지고 떨리는 손으로 서연의 비닐 팩을 뜯어냈다.

 

패스트푸드점에서 서연이 우진에게 보여주려다 감시관의 습격으로 미처 펼치지 못했던 그 최종 자료였다.

 

비닐을 벗겨내자 묵직한 하드커버 바인더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모서리가 누렇게 바래고 15년 전 화재의 열기 탓인지 가장자리가 까맣게 그을려 있었지만, 내지의 보존 상태는 경이로울 정도로 온전했다.

 

바인더 표지 한가운데에는 굵고 단단한 만년필 필체로 논문의 제목이 적혀 있었다.

 

[인간 궤도 모델링과 사전 예측 알고리즘 (Human Orbit Modeling and Pre-determination Algorithm)]

 

그 아래 적힌 연구 책임자의 이름 석 자를 확인한 순간, 우진의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수석연구원 강정호 (Kang Jeong-ho)]

 

아버지였다.

 

15년 전, 가족을 버리고 도망쳤다며 어머니가 그토록 저주와 공포를 쏟아내던 사람.

 

세상의 진실을 혼자 짊어진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던 아버지의 친필 서명이 그곳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연구 표지의 질감은 거칠고 메말라 있었으나, 글자 하나하나에 담긴 먹물의 농담은 마치 어제 쓴 것처럼 생생했다.

 

아버지는 이 논문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갈아 넣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논문 제목 바로 아래, 우진의 시선을 완벽히 얼어붙게 만든 표식이 존재했다.

 

활자 인쇄가 아니었다.

 

연구가 완료된 후 아버지가 직접 붉은색과 검은색 잉크를 펜에 듬뿍 묻혀 굵게 덧그려 넣은 세 개의 기하학적 문양이었다.

 

□, △, ○.

 

네모, 세모, 동그라미.

 

우진이 지난 나흘 동안 테헤란로의 수많은 군중과 직장 상사, 어린아이, 그리고 윤채린의 머리 위에서 목격했던 바로 그 세 가지 도형이 완벽한 비율로 표지 상단에 나란히 배열되어 있었다.

 

5. 세 도형의 비밀

 

우진의 숨이 멎었다.

 

차가운 콘크리트 바닥의 냉기가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우연이 아니었어…… 환각도, 내 뇌의 착란도 아니었어.'

 

그 세 개의 도형은 아버지가 15년 전 이미 완벽하게 수학적, 물리학적으로 정립해 둔 실재하는 법칙의 상징이었다.

 

우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논문의 표지를 넘겼다.

 

첫 장에는 누렇게 변색된 모눈종이 위에 아버지가 직접 제도한 기괴하고도 정교한 상태 전이 다이어그램(State Transition Diagram)이 그려져 있었다.

 

그 그림의 중심에는 [□ (Default: 일상 궤도)]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우진의 시선이 그 아래 적힌 아버지의 친필 메모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1.사각형(□)의 정의]

 

[인간의 의식과 생체 리듬이 시스템의 기준 격자(Grid) 내에서 안정적으로 진동할 때 발현되는 기본 기하 구조.]

 

[외부의 강제 간섭이 없는 한, 개체는 사각형의 네 꼭짓점이 형성하는 닫힌 루프 안에서 안온한 일상을 무한히 반복한다.]

 

[그러나 이 상태는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시스템이 허용한 허용 오차 범위 내에서의 순응일 뿐이다.]

 

[도시 인구의 99.4%가 이 사각형의 격자망 안에서 태어나고, 노동하며, 소모된다.]

 

소름이 돋았다.

 

매일 아침 2호선 지하철을 가득 메우던 그 무기력한 직장인들의 정수리에 떠 있던 백색 네모.

 

그것은 평화로운 삶의 증표인 동시에, 시스템이 짜놓은 거대한 사육장 안에서 안전하게 길들여진 가축의 표식이었던 것이다.

 

우진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다음 다이어그램을 짚었다.

 

사각형의 오른쪽으로 뻗은 붉은색 화살표 끝에 [△ (Disruption: 파멸 및 위기 궤도)]가 그려져 있었다.

 

[2.삼각형(△)의 정의 및 전이]

 

[사각형의 닫힌 루프가 외부 충격이나 시스템의 강제 퇴출 알고리즘에 의해 한쪽 변이 붕괴할 때 발생하는 비틀림.]

 

[불안정한 3개의 꼭짓점은 고속 회전을 시작하며 개체의 엔트로피를 극단으로 끌어올린다.]

 

[회전 주기가 한계치에 도달하면 꼭짓점이 중심을 향해 붕괴하며, 물리적 사망, 사회적 파멸, 질병 등 시스템 상의 영구 퇴출을 집행한다.]

 

[주의: 외압(Black)에 의해 강제 생성된 삼각형은 미시적 구원 시도로 소멸하지 않는다.

 

항상성 보존 알고리즘에 의해 주변 노드로 전이되거나(Ripple Effect), 강제 덮어쓰기(Overwrite)를 통해 기어이 파멸 값을 달성한다.]

 

강남역 승강장에서 아이를 구했을 때 옆 청년의 네모가 깨져나가며 부친의 참사로 번졌던 그 끔찍한 인과율 보존 법칙.

 

그리고 편의점 김 씨의 사기 계약을 막아주자마자 사채 보증이라는 대체 변수가 투입되어 끝내 뇌출혈로 쓰러지게 만들었던 강제 덮어쓰기.

 

우진이 겪었던 모든 비극의 메커니즘이, 이미 15년 전 아버지의 손에 의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식으로 증명되어 있었다.

 

"아버지…… 당신은 대체 어디까지 보고 계셨던 겁니까."

 

우진의 목구멍에서 메마른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버지는 이 끔찍한 진실을 혼자서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다이어그램의 가장자리, 사각형과 삼각형의 격자망을 완전히 벗어난 빈 공간에 홀로 유영하듯 그려진 하나의 원.

 

[○ (Singularity: 이레귤러 궤도)]

 

그 원형 주변에는 무수한 느낌표와 함께 붉은 잉크가 번진 다급한 필적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6. 이레귤러와 K-07

 

우진은 숨을 헐떡이며 세 번째 도형의 해설을 읽어 내려갔다.

 

[3.

 

원(○)의 정의 및 시스템 척력]

 

[꼭짓점이 존재하지 않는 무한한 대칭체.]

 

[시스템의 격자 좌표계(X-Y-Z Grid)로 위치를 특정할 수 없는 초월적 변수.]

 

[원형 궤도를 획득한 개체는 시스템의 꼭두각시 줄(Control Line)을 스스로 끊어낸 존재이며, 인과율 보존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원의 반경 내에서는 사각형 격자망이 물리적으로 밀려나는 국소 사각지대(Dead Zone)가 형성된다.]

 

[이것이 바로 시스템이 가장 두려워하는 유일한 결함이자, 인류가 진정한 의지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열쇠다.]

 

[추신: 상호 인식(Resonance)이 일어날 때 원의 중심에 점이 찍힌다(⊙).

 

그것은 관찰자와 이레귤러가 연결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다.]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 우진의 전신을 관통했다.

 

테헤란로 횡단보도에서 마주쳤던 소녀, 윤채린.

 

그녀의 머리 위에 떠 있던 은빛 동그라미.

 

우진이 시선을 집중했을 때 그 원 한가운데에 선명하게 새겨졌던 검은 점(⊙).

 

그것은 단순한 시각적 잔상이 아니라, 시스템의 감시망을 찢어버릴 수 있는 거대한 공명의 신호였던 것이다.

 

우진은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더 넘겼다.

 

논문의 중반부는 고등 통계학과 양자역학, 뇌 신경망 알고리즘이 뒤섞인 난해한 수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우진의 시선은 논문 38페이지, 접혀 있던 별지의 표에서 굳어버렸다.

 

그 표의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타이틀이 인쇄되어 있었다.

 

[임상 프로토타입 생체 궤도 동기화 실험 대상자 명부 (1996 2011)]

 

표 안의 내용들은 처참했다.

 

수십 명에 달하는 피실험자들의 이름과 생년월일, 칩 이식 일자 칸이 새까만 먹물로 철저하게 지워져 있었다.

 

배후 조직이 연구소를 불태우기 전, 혹은 아버지가 탈출하기 전 누군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파기한 흔적이었다.

 

002번, 003번, 004번…… 모든 이름이 먹칠 뒤에 숨어 있었다.

 

그러나 단 하나.

 

표의 맨 첫 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번호.

 

[대상자 코드: K-07 (Node-1)]

 

그 옆의 이름 칸만은 먹칠을 피해 날카로운 칼로 긁어낸 듯한 자국 위에 온전히 남아 있었다.

 

[성명: 강우진 (Kang Woo-jin) / 당시 만 17세]

 

[상태: 통제 칩 이식 완료.

 

신경망 동조율 98.7%.

 

관찰자 시신경 개화 확인.]

 

[특이사항: 연구 책임자 강정호의 친자.

 

시스템 코어와의 직결성 보유.

 

영구 모니터링 요망.]

 

쿵!

 

쿵!

 

쿵!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날뛰었다.

 

활자로 박힌 자신의 이름.

 

15년 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유년기, 기억이 하얗게 표백되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던 17세 이전의 공백이 이 한 장의 종이 위에서 피비린내를 풍기며 실체를 드러냈다.

 

우진은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더듬었다.

 

머리카락 속에 숨겨진 4cm의 흉터.

 

그 흉터는 단순한 사고의 상흔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혹은 누군가가 자신의 머릿속에 박혀 있던 그 끔찍한 생체 궤도 제어 칩을 강제로 뜯어내면서 남긴 탈출의 낙인이었다.

 

"내가…… 시스템의 첫 번째 프로토타입이었어."

 

우진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피 맛이 번졌다.

 

아버지는 세상을 통제하는 거대한 괴물을 만들고 있었고, 그 가장 잔혹한 실험의 중심에 자신의 피붙이를 올려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왜?

 

왜 아버지는 연구소를 불태우고 우진의 칩을 뽑아 도망치게 만들었는가?

 

왜 자신은 코어의 'Node-0'으로 빨려 들어가 시스템의 부품이 되었는가?

 

질문들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7. 한서연의 행방과 전화벨

 

논문의 마지막 장 뒷면에는 아버지가 서류를 급히 묶으며 남긴 것으로 보이는 짤막한 메모가 적혀 있었다.

 

[우진아.]

 

[만약 네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내 예측대로 너의 눈이 마침내 열렸다는 뜻이겠지.]

 

[용서하지 마라.

 

네 머릿속에 칩을 박아 넣은 것도, 그 지옥 같은 궤도를 보게 만든 것도 나다.]

 

[하지만 기억해라.

 

시스템이 부여한 네모의 틀에 갇히지 마라.

 

세모의 파멸에 굴복하지 마라.]

 

[진정한 원을 찾아라.

 

그리고…… 2011년 불타버린 그 자리, 지하 3층의 메인 프레임을 열어라.]

 

[거기에 내가 남겨둔 마지막 궤도가 있다.]

 

빗물이 깨진 천장 틈새로 떨어져 아버지의 마지막 메모 위로 번졌다.

 

우진은 바인더를 가슴에 으스러지도록 끌어안았다.

 

비통함과 분노, 그리고 차가운 이성이 뒤엉켜 머릿속을 하얗게 태웠다.

 

아버지는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시스템의 장기말로 만들려 했던 거대한 배후에 맞서, 아들을 탈출시키고 스스로 코어의 심장부에 갇히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

 

어머니의 발작적인 공포,

 

"아버지는 널 버린 거다"

 

라며 울부짖던 그 거짓말의 이면에는 감시관들의 협박과 시스템의 감시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그 순간, 젖은 바닥에 팽개쳐져 있던 서연의 가방 깊은 곳에서 날카로운 전자음이 울렸다.

 

적막을 깨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우진의 온 신경이 곤두섰다.

 

우진은 숨을 멈추고 가방 안쪽을 뒤졌다.

 

서연의 업무용 스마트폰이 아니었다.

 

구형 폴더폰 형태의 일회용 대포폰(Burner Phone) 하나가 푸른빛을 깜빡이며 진동하고 있었다.

 

액정 화면에는 발신 번호 표시 제한이라는 네 글자가 떠 있었다.

 

'감시관인가? 아니면…….'

 

우진은 마른침을 삼키며 폴더를 열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자 거친 숨소리와 함께 익숙한, 그러나 울음에 젖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우, 우진아……! 강우진! 너 살아 있어?"

 

서연이었다.

 

"서연아! 너 어디야? 다친 데는 없어?"

 

우진이 다급하게 물었다.

 

"난…… 난 괜찮아. 법원 뒤쪽 공중전화 부스 근처 골목에 숨었어. 하지만 우진아, 뭔가 이상해……."

 

서연의 목소리가 극도의 공포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뭐가 이상한데? 말해봐, 서연아."

 

"내 머리가…… 머리가 너무 아파. 아까 그 괴물 같은 남자가 들이닥친 뒤로, 관자놀이가 쪼개질 것처럼 아프고…… 눈앞이 자꾸 깜빡거려."

 

쿵.

 

우진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그리고…… 골목길 쇼윈도 유리에 내 모습이 비쳤는데…… 우진아, 내 머리 위에……."

 

서연이 숨을 헐떡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내 머리 위에 새까만 세모가 떠 있어. 그 세모가 미친 듯이 돌고 있어…… 하늘로 까만 줄이 연결돼서 날 잡아당기는 것 같아…… 나, 나 어떻게 되는 거야? 우진아, 나 죽는 거야?"

 

서연의 눈물 섞인 비명이 수화기를 타고 우진의 고막을 찔렀다.

 

검은 세모의 자각.

 

외부 세력의 조작에 의해 파멸 궤도에 진입한 대상이 자신의 이상 궤도를 스스로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시스템의 덮어쓰기 집행이 초읽기에 들어갔음을 의미했다.

 

시간이 없었다.

 

이대로 두면 서연은 뇌출혈로 쓰러지거나, 지나가는 화물차에 치이거나, 빌딩에서 투신하는 등 시스템이 설계한 '대체 사고'에 의해 소거될 것이다.

 

"서연아, 내 말 잘 들어."

 

우진은 목소리에 힘을 주며 차갑게 가라앉혔다.

 

"절대 큰길로 나가지 마.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도 말고, 차도 근처에도 가지 마.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어. 내가 지금 당장 갈 테니까."

 

"우진아…… 무서워…… 너무 무서워……."

 

"내가 구해줄게. 네 궤도, 내가 반드시 되돌려 놓을 테니까 조금만 버텨!"

 

통화를 끊은 우진은 바인더를 비닐에 단단히 싸서 품속 깊은 곳에 찔러 넣었다.

 

비는 여전히 거칠게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진의 눈빛에는 더 이상 망설임이나 두려움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15년 전 아버지가 풀지 못한 인과의 사슬.

 

그리고 자신에게 남겨진 프로토타입 K-07의 숙명.

 

우진은 부서진 창틀을 박차고 나와, 서연의 파멸 궤도를 부수기 위해 새벽의 폭우 속으로 몸을 던졌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