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네가 그릴 차례다
1. 숲으로 돌아온 자리
가을바람이 마천루 사이를 가로질러 불어왔다.
회색 아스팔트와 차가운 통유리 빌딩으로 빽빽하던 서울 테헤란로의 한복판, 과거 넥스트 큐브 사옥이 위압적인 검은 정육면체로 솟아 있던 그 자리에 녹빛의 푸른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테헤란로 시민 기억 생태 공원.
지하 100미터 암반층에서 거대한 인공 격자망과 오르비스 코어가 폭발해 주저앉았던 그 거대한 싱크홀은, 수많은 흙과 돌, 그리고 스스로 피어난 야생화로 채워져 완만한 둔덕의 도심 숲으로 탈바꿈해 있었다.
그 공원의 가장 중심, 사방으로 완만하게 뻗어 나간 오솔길들이 교차하는 잔디 광장 한가운데에 거대한 목조 쉼터가 우뚝 서 있었다.
강우진은 쉼터의 중심 기둥에 손을 얹었다.
포천의 야적장에서 건져 올렸던, 벼락을 맞아 한쪽이 새까맣게 타버렸던 백 년 묵은 참나무 거목이었다.
수개월 동안 상도동 작업실에서 대패질과 끌질을 거치며 다듬어진 참나무는, 상처를 부끄럽게 숨기지 않고 가장 단단한 골조로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벼락이 관통했던 시커먼 균열부는 투명한 천연 수지로 메워져 햇살을 받을 때마다 호박보석처럼 맑은 빛을 뿜어냈다.
그 거친 옹이와 비대칭의 곡선을 따라 올라간 지붕은, 마치 한여름 소나기를 막아주는 나뭇잎처럼 유려한 유선형의 처마를 드리우고 있었다.
사방이 완전히 트여 있어 벽체 하나 없는 구조였다.
어디에서 걸어오든 들어설 수 있고, 어느 방향으로든 다시 걸어 나갈 수 있는 무형의 안식처였다.
"우진아, 이쪽 수평은 딱 들어맞았다."
기둥 아래에서 유압 렌치를 내려놓으며 땀을 훔치는 사내가 있었다.
목덜미에 선명한 5센티미터의 흉터를 지닌 사내, 송태석이었다.
그의 곁에는 다른 1세대 피실험자 동료 두 명이 목재 대패를 들고 난간의 모서리를 곱게 둥글리고 있었다.
과거 연구소 지하 7층 차폐벽 안에서 분노와 증오로 얼어붙어 있던 이들의 얼굴에는 더 이상 핏기 없는 서늘함이 남아 있지 않았다.
뙤약볕 아래서 땀을 흘리고, 톱밥을 뒤집어쓰며 나무를 만지는 동안 그들의 손마디는 파괴자가 아닌 장인의 굳은살로 단단해져 있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태석이 형. 이제 바닥 볼트만 체결하면 목공 작업은 완전히 끝납니다."
우진이 건넨 시원한 보리차 병을 받아 든 태석이 쉼터 천장을 올려다보며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우리가 부수려고 했던 이 땅에, 우리 손으로 사람들이 쉴 지붕을 올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부수는 것보다 짓는 게 훨씬 힘든 법이지만, 그만큼 오래 남으니까요."
우진이 기둥의 단단한 옹이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그 순간, 쉼터 입구 쪽에서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이 바람을 타고 번져왔다.
"우진이 형! 서연 누나랑 다 같이 왔어요!"
팔을 번쩍 들며 잔디밭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청년은 박태호였다.
그 뒤로 한지혜와 최영훈이 큼직한 화구와 보랭 가방을 나누어 든 채 밝게 웃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하얀 캔버스를 가슴에 품은 윤채린이 눈부신 가을 햇살을 받으며 걸어왔다.
채린의 손가락 끝에는 여전히 다채로운 물감 자국이 훈장처럼 배어 있었다.
제도권 대학의 특전 입학을 사양하고 자신의 발로 걸어 화단에 선 채린의 눈동자는 티 없이 맑았다.
"아저씨! 쉼터 완공 축하해요! 약속했던 현판 그림, 다 그려왔어요!"
채린이 품에 안고 있던 50호 크기의 원목 캔버스를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쉼터 중앙 벽면 대신 기둥 상단에 걸리도록 맞춤 제작된 원목 패널 위에는, 규격화된 원근법도 기하학적 도형도 없는 거대한 생명의 숲이 약동하고 있었다.
연둣빛, 코발트블루, 붉은 노을빛, 짙은 흙빛이 물결치듯 뒤섞이며 바람의 결을 형상화한 추상화였다.
어떤 사각의 틀에도 갇히지 않은, 오직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자유의지만이 빚어낼 수 있는 빛의 향연이었다.
"정말 근사하네요, 채린아."
우진이 진심 어린 감탄을 터뜨리자, 채린이 쑥스러운 듯 코끝을 긁적이며 웃었다.
"그림 제목은 '무형의 쉼'이에요. 여기 앉아서 바람을 맞는 사람들은, 누구도 정해진 길 따위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서요."
태석과 동료들이 다가와 그림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벼락 맞은 참나무 기둥 상단, 가장 햇살이 잘 드는 처마 밑에 채린의 그림이 단단히 걸렸다.
그것으로 테헤란로의 차가운 지하에 묻혀 있던 15년의 비극은, 마침내 온전한 화해와 치유의 옷을 입고 지상으로 피어났다.
2. 바람이 머무는 벤치
정오를 넘기자 공원 개장식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요란한 테이프 커팅식이나 고위 관료들의 의전 연설 따위는 없었다.
검찰 특수본의 최현석 검사가 약속했던 대로, 이 공원은 철저히 시민들의 공간으로 남겨졌다.
공원의 차단 펜스가 걷히자마자, 테헤란로의 빌딩 숲에서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과 인근 주민들이 호기심 어린 발걸음으로 숲길을 따라 들어서기 시작했다.
정장 바지를 입은 젊은 직장인들이 샌드위치를 들고 잔디밭 벤치에 걸터앉았고, 유모차를 끈 엄마들과 손을 잡은 노부부가 흙길을 거닐었다.
참나무 쉼터 아래로 시원한 가을바람이 통과할 때마다 사람들의 입가에 편안한 탄성이 번졌다.
"와, 여기 나무 냄새 진짜 좋다."
"기둥 한가운데 벼락 맞은 자국 좀 봐. 저걸 억지로 안 메우고 그대로 살려놨네."
"사방이 뻥 뚫려 있어서 바람이 그대로 지나가. 답답한 사무실에 있다가 여기 오니까 살 것 같네."
사람들은 쉼터 바닥에 놓인 비대칭 참나무 평상에 둘러앉아 저마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누구의 머리 위에도 10cm 상공에 떠 있던 반듯한 백색 네모는 존재하지 않았다.
죽음이나 파멸을 경고하던 붉은 세모도, 허공으로 뻗어 올라가 인간의 사지를 조종하던 검은 꼭두각시 줄도 영구히 사라져 있었다.
오직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칼과, 따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찡그리는 자연스러운 미간, 그리고 살아 숨 쉬는 사람들의 따뜻한 체온만이 그곳에 있었다.
쉼터 뒤편 자갈길을 천천히 굴러오는 휠체어 소리가 들렸다.
우진이 고개를 돌리자, 단정한 남색 니트를 입은 아버지 강정호가 휠체어에 앉아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휠체어를 밀고 있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지난 세월의 고단했던 그림자가 말끔히 가시고 은은한 평온함이 가득했다.
"아버지, 어머니. 오셨어요?"
우진이 성큼 다가가 부모님을 맞이했다.
강정호는 떨리는 손을 뻗어 참나무 중심 기둥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거칠고 우툴두툴한 나뭇결, 그리고 벼락을 견뎌내고 굳어버린 옹이의 감촉이 노학자의 손끝으로 전해졌다.
강정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15년 전, 자신이 오만하게 세상을 수식에 가두려 했던 바로 그 땅이었다.
수많은 인간의 운명을 사각의 격자망 안에 가두고 통제하려 했던 배후의 바벨탑이 무너진 자리에, 아들이 깎아 세운 무형의 쉼터가 서 있었다.
"참으로…… 단단하구나, 우진아."
강정호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규격도 없고, 대칭도 맞지 않는데…… 그 어떤 철골 구조물보다 평온하고 흔들림이 없어."
"나무가 제 상처를 견뎌낸 결대로 깎았으니까요."
우진이 휠체어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아버지의 거친 손을 감싸 쥐었다.
강정호는 아들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였다.
"내가 시작했던 죄악의 매듭을, 네가 이렇게 아름다운 안식으로 풀어주었구나. 고맙다. 정말로 고맙다……."
"아닙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계셨기에 저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두 사람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눈물을 훔쳤다.
과거의 고통과 비극은 더 이상 상처로 남아 있지 않았다.
그것은 비정형 테이블의 갈라진 틈을 붙잡아 준 흑단 나비장처럼, 가족을 가장 단단하게 결속시키는 삶의 옹이가 되어 있었다.
3. 잊힌 숫자의 세계
오후 세 시가 넘어가자, 테헤란로의 마천루 위로 푸른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기 시작했다.
쉼터 한쪽에서 사람들에게 따뜻한 둥굴레차를 나누어주던 한서연이 보온병을 정리하고 우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갈색 단발머리에 가을바람이 스치며 기분 좋은 풀 내음이 풍겼다.
"우진 씨, 잠깐 공원 외곽으로 걸을래요?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요."
서연이 내민 손을 우진은 자연스럽게 맞잡았다.
서로의 손바닥이 맞닿는 순간,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맥박이 두 사람의 호흡을 하나로 맞추었다.
두 사람은 인파를 벗어나 공원 동쪽, 완만한 잔디 언덕길을 따라 걸어 올라갔다.
언덕 너머로는 테헤란로의 거대한 8차선 대로와 역삼역 사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불과 수개월 전까지만 해도 저 아스팔트 위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전산 격자망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
차량의 간격, 신호등의 점멸 주기, 사람들의 걸음걸이 속도와 시선 방향까지 모두 중앙 코어의 알고리즘에 의해 초 단위로 감시되고 계산되던 공간.
하지만 지금 내려다보이는 사거리는 전혀 다른 활기로 요동치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자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제각각이었다.
누군가는 늦장을 부리며 핸드폰을 들여다보았고, 누군가는 친구의 어깨를 치며 깔깔 웃었고, 누군가는 길 한가운데서 신발 끈이 풀려 주저앉아 끈을 묶었다.
신호 대기선에 선 버스는 정차선을 살짝 넘겼고, 오토바이 한 대가 그 틈새를 요리조리 빠져나갔다.
완벽한 최적화의 관점에서 보면 오차투성이의 비효율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 어떤 기계도, 알고리즘도 흉내 낼 수 없는 살아있는 생명들만의 자유로운 불협화음이었다.
"저기 보세요, 우진 씨."
서연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역삼역 8번 출구 앞, 작은 가로수 화단이었다.
과거 우진이 난생처음으로 머리 위에 비정상적인 세모(△)를 띄운 대기업 임원 최 모 씨의 예정된 사망 사고를 목격했던 바로 그 비극의 진원지였다.
사고가 발생하기 3분 전에 언론 보도가 먼저 송고되었던 기괴한 인과 역전의 장소.
그 화단 앞에는 작은 표석 하나가 소박하게 놓여 있었다.
[우리가 되찾은 불확실한 오늘을 기억하며]
그 짧은 비문 아래로, 누군가 놓아둔 국화꽃 몇 송이와 테이크아웃 종이컵이 바람에 살랑이고 있었다.
"서지훈이 맹신했던 100%의 통제 사회는 결국 무너졌어요."
서연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우발적인 실수가 세상을 멸망시킬 거라고 믿었죠. 하지만 보세요. 정해진 시간표가 사라지고 각본이 불타버렸어도, 사람들은 도망치지 않고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하며 세상을 다시 직조해 내고 있어요."
우진은 서연의 말을 들으며 역삼역 사거리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관자놀이의 흉터는 아무런 통증도, 발열도 일으키지 않았다.
과거 심층 분석을 시도할 때마다 뇌수를 바늘로 쑤시듯 덮쳐오던 맹렬한 편두통도, 눈앞을 어지럽히던 푸른색 궤적선도 영원히 사라져 있었다.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왜곡된 압력을 해석하려 발버둥 치던 기형적인 공감각의 족쇄를 벗어던지고, 마침내 순수한 인간 본연의 눈으로 세상을 직시하게 된 것이었다.
우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기억납니까, 서연 씨? 처음 역삼역 지하철에서 당신과 마주쳤을 때요."
"그럼요. 당신, 지하철 플랫폼에서 넋이 나간 얼굴로 허공만 쳐다보고 있었잖아요. 눈빛이 꼭 유령이라도 본 사람 같았는데."
서연이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며 우진의 팔짱을 꼈다.
"그때 제 눈에는 세상 모든 사람의 머리 위에 얹힌 기하학적 도형들만 보였습니다. 저 사람은 닫힌 일상의 백색 네모, 저 사람은 곧 파멸할 검은 세모, 저 사람은 시스템을 거부하는 은빛 동그라미……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못하고, 움직이는 수식과 확률의 기호로만 보았죠."
우진이 서연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가을 햇살을 머금은 서연의 갈색 눈동자 속에, 자신의 얼굴이 오롯이 비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보입니다. 사람의 얼굴에 깃든 주름과, 눈빛의 떨림과, 입가에 번지는 온기 같은 것들이요. 도형이 지워진 자리에 비로소 진짜 인간이 남았습니다."
서연이 우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었다.
"네. 비로소 진짜 우리가 된 거예요."
4. 백지 위의 마지막 궤적
해 질 녘이 되자, 공원의 잔디밭은 붉고 황홀한 노을빛으로 물들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공원에는 낙엽 구르는 소리와 맑은 풀벌레 소리만이 평화롭게 울려 퍼졌다.
우진과 서연은 쉼터 한가운데 놓인 참나무 평상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우진은 가방에서 남색 가죽 양장본 수첩을 꺼냈다.
아버지가 30년간 백지로 간직하다 물려주었고, 어제 서연과 함께 상도동 작업실에서 첫 장을 열었던 그 수첩이었다.
수첩을 펼치자, 어제 두 사람이 함께 적어 넣었던 글귀와 나란히 찍힌 두 개의 붉은 엄지 지문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선택한 오늘]
'미래는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오차를 두려워하지 않고,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오늘 내가 내딛는 서툰 한 걸음을 온전히 사랑하겠다.'
우진은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잉크의 무게감이 손끝에 묵직하게 감겨왔다.
그는 책장을 한 장 넘겼다.
새하얗고 매끄러운 두 번째 페이지가 저녁 노을빛을 받아 은은한 주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어떤 밑줄도, 좌표 평면도 그어지지 않은 완전한 백지.
과거의 우진은 이 백지 위에 수많은 도형을 그렸었다.
안정과 질서에 안주하던 평범한 일상의 네모(□).
정체를 깨뜨리고 삶을 뒤흔들며 영혼을 각성시키던 위기와 고통의 세모(△).
그리고 기존의 시스템을 거부하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타인을 품어 안던 자유의 동그라미(○).
하지만 광화문 지하 40미터 공동구에서, 백도현의 15년 치 증오를 품에 안았을 때 우진은 깨달았었다.
그 세 가지 도형조차도 결국 인간의 삶을 특정한 범주에 가두고 재단하려던 또 다른 규격에 불과했다는 것을.
진정한 자유는 도형을 완성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형태를 지우개로 문질러 지워내고 텅 빈 백지로 돌아가는 용기에 있었다.
"우진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게 해요?"
서연이 따뜻한 손으로 우진의 뺨을 감싸며 물었다.
우진은 만년필을 쥔 채 백지를 가만히 응시했다.
"도형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요?"
"네. 어쩌면 모든 인간의 삶은 네모에서 출발하는지도 모릅니다. 태어나서 주어진 환경과 규칙 속에서 안전하게 반복되는 사각의 일상 말입니다."
우진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러다 어느 날 예기치 못한 비바람과 사고를 만나 삶이 급격하게 꺾이죠. 고통스럽고 날카로운 세모의 위기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그 상처를 딛고 일어선 사람만이 비로소 타인을 이해하고 품어 안는 둥근 동그라미의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죠."
우진은 만년필 뚜껑을 딸깍, 소리 내어 닫았다.
그는 펜을 백지 위에 대지 않았다.
선 하나도, 점 하나도 긋지 않았다.
그저 눈부시게 비어 있는 백지 그대로를 둔 채, 책장을 부드럽게 덮었다.
"하지만 그 어떤 도형도 우리 삶의 마지막 모습이 될 수는 없습니다. 동그라미조차도 결국 닫힌 선이니까요."
우진이 고개를 들어 노을이 타오르는 서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인생은 네모로 시작해 세모로 부딪히고 동그라미로 돌아올 수 있지만, 그 마지막 모양을 무엇으로 채울지는…… 오직 살아가는 사람 자신이 매 순간 결정하는 거니까요."
서연이 눈을 반짝이며 미소를 지었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는 게, 당신의 대답이군요."
"네. 비어 있어야 어디로든 갈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요."
우진이 수첩을 가슴 안주머니에 소중히 넣었다.
심장이 뛰는 자리 바로 위에 닿은 수첩의 온기가 가슴 전체로 따스하게 번져나갔다.
5. 이제 네가 그릴 차례다
노을이 잦아들고, 테헤란로의 마천루 위로 하나둘 따뜻한 불빛들이 켜지기 시작했다.
차가운 형광등 불빛이 아니었다.
가족을 기다리는 아파트 창가의 노란 불빛, 하루의 고단함을 털어내는 선술집의 붉은 등불, 가로등 아래서 버스를 기다리는 연인들의 스마트폰 화면 불빛.
도시 전체가 수천만 개의 제각기 다른 빛깔로 반짝이며 거대한 별자리처럼 밤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더 이상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히는 통제의 꼭두각시 줄은 없었다.
땅 위에서 저마다의 호흡으로 살아가는 인간들이 스스로 뿜어내는 온기의 그물망이었다.
우진은 쉼터 난간에 기대어 서서 그 찬란한 야경을 굽어보았다.
시원한 밤바람이 불어와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문득, 우진의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더 이상 어떤 도형도 뜨지 않는 맑고 투명한 허공.
하지만 우진은 알 수 있었다.
이 광막한 도시의 어딘가에서, 혹은 이 글을 읽고 있는 어떤 방 한구석에서, 여전히 자신만의 네모난 일상에 갇혀 답답해하고 있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뜻밖의 실패와 실연, 혹은 질병과 가난이라는 날카로운 세모의 칼날에 찔려 피를 흘리며 주저앉아 있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길을 잃고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 또 다른 나그네들이 있다는 것을.
우진은 그 보이지 않는 수많은 얼굴들을 향해,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담담하고도 깊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눈동자 속에 깊고 투명한 푸른빛이 일렁였다.
초능력의 잔재가 아닌, 세상의 모든 상처와 불완전함을 긍정하는 인간 본연의 맑은 시선이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진은 바람을 향해 소리 없이 속삭였다.
'궤도가 꺾였다고 해서 네 삶이 끝난 것은 아니다.'
'실패해도 괜찮다. 잘못된 길로 들어서 헤매어도 좋다. 네가 내딛는 모든 서툰 발걸음과 무릎의 흙먼지는, 훗날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을 너만의 가장 단단한 옹이가 되어줄 테니까.'
누군가 짜놓은 완벽한 정답 따위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
확률 100%의 안락함이란 결국 영혼을 가두는 차가운 감옥일 뿐이다.
내일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50%의 막막함이야말로, 우리가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가장 거룩한 증거이자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유일한 축복이다.
우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쉼터 처마 밑에서, 서연이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진 씨, 이제 갈까요?"
"네. 갑시다."
우진이 다가가 서연의 곁에 섰다.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꼭 쥐고, 사방으로 환하게 열린 참나무 쉼터의 계단을 천천히 내려섰다.
흙길 위로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란히 새겨졌다.
동서남북 어디로든 뻗어 나갈 수 있는 길.
어디로 가든 상관없었다.
우리가 함께 내딛는 이 길이 곧 새로운 세상의 궤도가 될 테니까.
우진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이 세상을 정면으로 마주 바라보았다.
눈이 시리도록 투명한 밤하늘 아래, 정해진 미래 없이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도화지를 향해.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가 세상의 모든 나그네를 향해 따스하게 번져나갔다.
'우리의 궤도는 여기서 끝났다.'
'이제는, 네가 그릴 차례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