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든 갈 수 있다
1. 빗물이 씻어낸 마당
장마처럼 쏟아지던 빗줄기는 정오를 넘기면서 서서히 잦아들었다.
기왓골을 타고 흘러내리던 낙숫물이 마당 한구석 흙바닥에 규칙적인 동심원을 그렸다.
처마 밑에 선 강우진은 축축하게 젖어든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비에 젖은 흙냄새와 마당 중앙을 묵직하게 차지하고 있는 백 년 참나무의 쌉싸름한 수액 냄새가 콧등을 스쳤다.
그것은 어떤 전산 격자도, 수학적 모델링도 계산해 낼 수 없는 계절과 자연 본연의 숨결이었다.
참나무 거목 아래 덩그러니 서 있던 사내는 인기척을 느끼고도 쉬이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 어깨를 웅크린 모습은 마치 세찬 비바람에 젖어 길을 잃은 거대한 맹수 같았다.
우진은 서두르지 않고 툇마루에서 내려섰다.
신발 밑창에 밟히는 자갈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빗소리가 멎은 마당에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그의 뒤를 따르던 한서연이 나직하게 숨을 삼키며 우진의 옷자락을 가볍게 잡았다가 놓았다.
경계심이라기보다는 오랜 시간 진실을 쫓으며 길러진 본능적인 신중함이었다.
우진은 뒤돌아 서연을 바라보며 말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괜찮아요.'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눈빛에 서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 물러서 우진의 등 뒤를 지켰다.
사내와의 거리가 대여섯 걸음 남짓으로 좁혀졌을 때, 사내가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챙이 넓은 모자 그늘 아래로 앙상하게 드러난 턱선과 굳게 다문 입술이 보였다.
그리고 빗물에 젖은 귓바퀴 뒤편, 목덜미를 따라 선명하게 그어진 가로 5센티미터가량의 거친 흉터가 드러났다.
15년 전, 테헤란로의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강제로 새겨졌던 생체 제어 칩의 적출 흔적이었다.
우진의 관자놀이에 남았던 상처와 똑같은 비극의 낙인이었다.
하지만 우진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푸른빛 미래 궤적선도, 상대의 과거를 들춰내는 자수정빛 잔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머리 위를 짓누르던 검은 세모도, 꼭두각시 줄도 없었다.
보이는 것은 오직 비에 젖어 떨고 있는 한 인간의 메마른 얼굴뿐이었다.
"제천에서 뵀었죠."
우진이 먼저 조용히 말을 건넸다.
목소리에는 경계도, 적의도 없었다.
그저 오랜 길을 걸어온 나그네를 맞이하는 담담한 온기만이 배어 있었다.
사내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움푹 파인 눈동자 속에 불신과 혼란, 그리고 깊은 허탈감이 뒤섞여 소용돌이쳤다.
"……알고 있었나."
사내의 목소리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거칠게 갈라져 있었다.
"그날 솔숲 어귀에 서 계셨을 때 느꼈습니다. 저를 쫓아오신 게 아니라,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서성이고 계셨다는 걸요."
우진의 말에 사내는 자조적인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젖은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도현이 형이…… 백도현이 네놈한테 지우개 따위를 건네받고 무너졌다는 얘길 들었다."
사내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15년이었다. 지하 7층 그 썩어빠진 냉동 챔버 안에서 우리가 얼어붙어 있던 시간이. 우리는 분노로 버텼어. 네 아비 강정호가 시스템을 만들었고, 네놈만 온전하게 살아남아 햇빛을 봤으니까. 그런데…… 코어가 터지고 세상에 나왔는데, 왜 다들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는 거지? 왜 아무도 우리한테 사죄하지 않는 거냐고."
그것은 광화문에서 백도현이 토해냈던 절규와 궤를 같이하는 아픔이었다.
세상을 향해 복수의 칼날을 갈았지만, 정작 그들이 증오하던 거대한 시스템은 이미 한 줌의 잿더미로 사라져 버렸다.
싸워야 할 괴물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것은 오직 15년이라는 텅 빈 공백과 영구히 박탈당한 청춘뿐이었다.
2. 비정형 테이블의 온기
우진은 사내의 메마른 분노를 가로막지 않고 온전히 끝까지 들어주었다.
누군가의 원망을 침묵으로 받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궤도를 부순 자가 감당해야 할 인간적인 책임이자 예의였다.
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 무렵, 우진은 마당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비가 다시 올 것 같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시죠. 따뜻한 차라도 한잔 드시면서 이야기해요."
"……뭐?"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 굳은 얼굴로 우진을 노려보았다.
"내가 널 죽이러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난 1세대 결손체 송태석이다. 목덜미가 타버렸어도, 내 손에는 여전히 콘크리트 벽을 부술 힘이 남아 있어."
태석의 말에 뒤편에 서 있던 서연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우진은 흔들림 없는 눈으로 태석의 메마른 손을 바라보았다.
손마디는 거칠게 부르터 있었고, 손톱 밑에는 흙먼지가 새까맣게 끼어 있었다.
그것은 파괴자의 손이 아니라,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며 서울 변두리를 헤매고 다닌 부랑자의 손이었다.
"죽이러 오신 게 아니라는 건 당신의 발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흙탕물에 다 젖은 낡은 운동화로, 여기까지 걸어오시는 동안 몇 번이나 망설이셨잖아요."
우진이 작업실 미닫이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문이 열리자 갓 깎아낸 느티나무의 향긋하고 깊은 원목 향이 빗물 냄새를 밀어내며 마당으로 퍼져나갔다.
"들어오세요. 송태석 씨."
자신의 진짜 이름을 불린 사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피실험체 09번'이라는 차가운 일련번호가 아니라, 15년 만에 불린 인간의 이름이었다.
태석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천천히 작업실 안으로 발을 디뎠다.
서연이 조용히 뒤따라 들어와 젖은 수건을 건넸다.
태석은 망설이다 수건을 받아 들고 머리에 묻은 빗물을 거칠게 닦아냈다.
작업실 중앙에는 방금 우진이 마감 작업을 끝낸 '비정형 느티나무 다이닝 테이블'이 은은한 윤기를 머금은 채 자리하고 있었다.
바위틈을 피해 뒤틀리며 자라난 80년 된 느티나무의 거친 곡선.
가뭄으로 쩍 갈라진 상처를 억지로 붙이지 않고, 흑단 나비장 세 개로 단단하게 물어놓은 비대칭의 상판.
그리고 어떤 울퉁불퉁한 바닥에서도 흔들리지 않도록 서로 다른 각도로 뻗어 있는 세 개의 다리.
태석의 시선이 그 기괴하면서도 단단한 테이블에 멎었다.
"이건…… 뭐지? 식탁인가? 왜 이렇게 삐뚤빼뚤해."
"공장에서 찍어낸 규격품이 아니니까요."
우진이 주전자에 물을 올려 가스레인지 불을 켰다.
푸른 불꽃이 냄비를 감싸며 이내 물 끓는 소리가 작업실에 낮게 깔렸다.
"이 나무는 홍천 바위틈에서 자랐습니다. 곧게 뻗을 수가 없어서 바위를 피해 온몸을 비틀며 자랐죠. 한쪽은 벼락을 맞아 갈라졌고요."
우진은 흑단 나비장이 박힌 균열부를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예전의 시스템이었다면 이 나무는 불량품으로 분류되어 땔감으로나 버려졌을 겁니다. 반듯한 사각형 규격에 맞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보십시오. 갈라진 틈을 억지로 메우지 않고 나비장으로 잡아주니, 그 어떤 반듯한 나무보다 단단해졌습니다. 옹이와 상처가 오히려 이 테이블에서 가장 질긴 중심축이 되었죠."
태석은 홀린 듯 다가가 떨리는 손끝으로 테이블 상판의 나뭇결을 만졌다.
거칠고 깊게 패인 굴곡이었지만, 날카롭지 않았다.
수만 번의 대패질과 사포질을 거쳐 둥글게 다듬어진 상처의 표면은 놀라울 만큼 부드럽고 따뜻했다.
"상처를…… 없애지 않아도 되는 건가."
태석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네. 없앨 필요 없습니다. 그 흉터는 당신이 살아남았다는 증거니까요."
우진이 찻잔에 따뜻한 결명자차를 따라 태석의 앞에 내려놓았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보며 태석은 주먹을 꽉 쥐었다.
"도현이 형은…… 어떻게 됐지?"
"검찰 특수본의 조사를 받고 있지만, 테러 미수 혐의 이전에 15년간 국가 불법 시스템에 의해 감금되었던 중대 피해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서연 씨의 기사와 책 덕분에 여론도 그들을 범죄자가 아닌 치유받아야 할 피해자로 바라보고 있고요. 지금은 국립중앙의료원에서 신경외과 치료를 받으며 재활을 준비 중입니다."
서연이 가방에서 갓 인쇄된 신간 《선택할 권리》를 꺼내 테이블 위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표지에 음각된 비대칭 나뭇결 문양을 보며 태석은 마른침을 삼켰다.
"치료…… 재활이라고? 우릴 가두지 않는단 말인가?"
"감옥에 가두기엔, 이미 당신들은 너무 오래 차가운 챔버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진의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다정했다.
"당신들이 세상에 갚아야 할 것은 파괴나 복수가 아닙니다. 빼앗겼던 15년의 삶을, 스스로의 발로 서서 다시 살아내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답입니다."
태석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뜨거운 차 한 모금이 얼어붙어 있던 그의 오장육부를 녹여 내렸다.
사내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마침내 굵은 눈물방울이 턱 끝을 타고 떨어져 느티나무 테이블 상판 위로 툭, 튀었다.
기하학적 도형도, 붉은 에러 코드도 뜨지 않는 순수한 인간의 눈물이었다.
3. 흉터를 품은 사람들
비가 완전히 그친 오후, 작업실 마당은 촉촉한 흙내음으로 가득 찼다.
태석은 한참 동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린 뒤에야 비로소 차분해진 얼굴로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는 목덜미의 흉터를 쓸어내리며, 넥스트 큐브 지하에서 탈출한 뒤 도심 변두리를 떠돌던 다른 결손체 동료들의 거처를 털어놓았다.
그들은 복수를 꿈꾸기보다, 세상의 낯선 소음과 불확실성에 겁을 먹고 폐공장 지대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 친구들도…… 데려와도 되겠나."
태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의 눈빛에서 독기는 완전히 가셔 있었고, 버림받은 형제들을 걱정하는 맏형 같은 불안함만이 남아 있었다.
"언제든 데려오십시오."
우진이 미소를 지으며 마당 중앙의 거대한 백 년 참나무를 가리켰다.
"마침 일손이 아주 많이 필요하던 참이었습니다. 테헤란로 옛 사옥 터에 들어설 공원 쉼터를 만들고 있거든요. 벼락을 맞아 거칠게 뒤틀린 이 참나무를 깎아서, 시민들이 누구나 비를 피하고 쉴 수 있는 기둥을 세울 겁니다. 혼자서는 벅찬 작업인데, 당신들의 거친 손이 도와준다면 훨씬 튼튼하게 지어질 겁니다."
태석이 멍하니 마당의 거목을 바라보았다.
벼락에 맞아 한쪽이 새까맣게 타버렸음에도, 그 상처를 감싸 안으며 수십 개의 단단한 옹이로 굳어 있는 백 년 묵은 참나무.
그것은 영락없이 자신들의 처지와 닮아 있었다.
"우리가…… 사람들을 위한 쉼터를 만든다고?"
"파괴하는 법을 배웠으니, 이제는 짓는 법을 배우면 됩니다. 나무를 만지는 일은 정직하거든요. 내가 깎아낸 만큼 정직하게 모양을 내어주니까요."
우진의 말에 태석의 입가에 난생처음으로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우진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우진아."
그것은 통제와 복수의 사슬이 완전히 끊어지고, 진정한 구원과 연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서연은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쉬며 미소를 지었다.
"제가 병원과 복지 재단 쪽에 연락해서 태석 씨와 다른 분들의 신원 보증과 긴급 주거 지원을 신청해 둘게요. 최현석 검사님께도 말씀드리면 정식 피해자 구제 절차를 밟을 수 있을 거예요."
"부탁드립니다, 서연 씨."
태석은 서연이 적어준 메모지와 따뜻한 외투를 걸치고 작업실을 나섰다.
작업실 문을 나서는 그의 걸음걸이는, 조금 전 들어올 때의 위태로운 망설임과 달리 한결 가볍고 확고해져 있었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태석의 뒷모습을 보며 우진과 서연은 나란히 처마 밑에 섰다.
구름 사이로 맑고 투명한 오후 햇살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젖어 있던 지붕과 아스팔트 바닥에서 하얀 수증기가 피어오르며 공기가 눈부시게 반짝였다.
"한 사람의 궤도를 억지로 꺾지 않아도, 세상은 이렇게 제자리를 찾아가네요."
서연이 우진의 어깨에 가볍게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네. 억지로 끌고 갈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걸어갈 힘을 품고 있으니까요."
우진이 서연의 손을 가만히 감싸 쥐었다.
살결을 타고 전해지는 따스한 맥박.
그것이야말로 어떤 알고리즘으로도 복제할 수 없는 생명의 온기였다.
4. 첫 번째 장의 서명
어느덧 작업실 안으로 붉은 노을빛이 길게 드리웠다.
우진과 서연은 비정형 느티나무 테이블 앞에 나란히 앉았다.
테이블 중앙에는 아버지가 물려주었던 남색 가죽 양장본 수첩이 펼쳐져 있었다.
조금 전 모퉁이 서재에서 서연과 함께 적기 시작했던 첫 페이지.
[내가 선택한 오늘]
그 정갈한 제목 아래로, 서연이 펜을 들어 적어 넣었던 유려한 글귀가 만년필 잉크의 푸른빛을 머금고 빛나고 있었다.
'정해진 궤도를 부수고 우리에게 실패할 자유와 불완전한 내일을 돌려준 목수 강우진에게.'
서연이 턱을 괴고 우진을 바라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자, 이제 당신 차례예요. 아버님이 30년 동안 비워두신 수첩이잖아요. 여기에 첫 줄을 채워 넣어야죠."
우진은 서연이 건넨 묵직한 만년필을 쥐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기분 좋게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과거의 우진이었다면 머리 위에 떠오르는 확률과 숫자를 적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사망 시간, 주가 폭락의 오차 범위, 인과율 결손 수치 따위의 차갑고 메마른 데이터들.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펼쳐진 백지는 텅 비어 있었다.
그 어떤 사각 격자도, 붉은 경고도 없는 완전한 자유의 공간.
우진은 숨을 고르고, 만년필 촉을 종이 위에 조심스럽게 내렸다.
사각, 사각.
만년필 촉이 종이의 결을 긁으며 잉크를 뿜어내는 소리가 조용한 작업실에 울렸다.
'미래는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다.'
'오차를 두려워하지 않고, 상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오늘 내가 내딛는 서툰 한 걸음을 온전히 사랑하겠다.'
마침표를 찍는 순간, 잉크가 종이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었다.
우진은 만년필을 내려놓고 자신이 적은 문장을 바라보았다.
거창한 선언도, 불멸의 진리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한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하루에 대한 담담한 고백이었다.
서연이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더니, 눈가를 붉히며 환하게 웃었다.
"참 당신다운 문장이네요."
"마음에 듭니까?"
"네. 아주 많이요."
서연은 가방에서 작은 인주를 꺼냈다.
그녀는 우진의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붉은 인주를 묻혀, 그 문장의 맨 끝자리에 꾹 눌렀다.
붉고 선명한 지문이 백지 위에 또렷하게 박혔다.
이어 서연 역시 자신의 엄지에 인주를 묻혀 우진의 지문 바로 곁에 나란히 포개어 찍었다.
두 사람의 지문이 겹쳐지며, 마치 비정형 테이블의 나비장처럼 단단한 결속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이걸로 첫 계약 완료예요."
서연이 장난스럽게 윙크를 던졌다.
"무슨 계약인데요?"
"평생 동안,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을 함께 즐기겠다는 계약이요."
우진은 참지 못하고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서연의 손을 끌어당겨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기꺼이 응하겠습니다. 그 계약."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더 이상 0.3초 뒤의 미래를 내다볼 필요가 없었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의 눈빛, 마주 잡은 손의 떨림만으로도 다음 순간은 이미 충만했으니까.
5. 사방으로 열린 아침
다음 날 아침, 눈부신 여명이 상도동 골목길을 가득 채웠다.
창살 틈새로 쏟아져 들어온 아침 햇살이 우진의 눈꺼풀을 간질였다.
우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시야를 어지럽히던 그 어떤 공감각적 왜곡도, 편두통의 잔재도 없었다.
오직 맑고 투명한 아침의 빛만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우진은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 마당으로 나섰다.
밤새 내린 비가 대지를 깨끗하게 씻어낸 덕분인지, 공기는 가을의 초입처럼 서늘하고 상쾌했다.
작업실 큰길 쪽 덧문을 젖히고 빗장을 풀었다.
끼이익 소리와 함께 육중한 원목 미닫이문이 활짝 열렸다.
눈이 시릴 만큼 찬란한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우진은 손을 들어 햇살을 받으며 작업실 문턱을 넘어섰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상도동 언덕길의 눈부신 아침 풍경이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뻗어 나간 골목길 위로 활기찬 세상의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다.
아래쪽 골목에서는 복덕방 할머니가 빗자루를 들고 나와 자갈길을 쓸고 있었다.
"어이구, 강 목수! 좋은 아침이야! 어제 비가 그렇게 오더니 오늘 날씨가 아주 쾌청하네!"
할머니가 허리를 펴며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아침 일찍부터 나오셨네요!"
우진도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위쪽 비탈길에서는 삼거리 슈퍼 트럭이 털털거리며 올라오고 있었고, 짐칸에는 신선한 배추와 과일 상자가 가득 실려 있었다.
모퉁이 서재의 창문이 활짝 열리더니 북카페 사장이 화분에 물을 주며 우진을 향해 목례를 건넸다.
창가에는 며칠 전 우진이 선물했던 보랏빛 벌개미취 꽃이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이슬을 머금고 있었다.
골목 저편에서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민호와 동네 꼬마들이 자전거를 타고 내리막길을 쌩하고 질주해 내려갔다.
속도를 주체하지 못해 비틀거리면서도, 아이들은 스스로 핸들을 꺾고 발을 굴러 넘어지지 않고 깔깔대며 코너를 돌아 나갔다.
누구의 머리 위에도 네모난 규격은 없었다.
누구의 등 뒤에도 허공으로 뻗은 검은 꼭두각시 줄은 매달려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걷고, 넘어질 뻔하다가도 스스로 균형을 잡고, 마주치는 이웃에게 정다운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
그것은 알고리즘이 짜놓은 완벽한 동선보다 훨씬 불완전하고 서툴렀지만, 그렇기에 비교할 수 없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생명의 풍경이었다.
골목길 모퉁이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한서연이 한 손에는 따뜻한 모닝커피 두 잔을, 다른 한 손에는 방금 가판대에서 사 온 조간신문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갈색 단발머리 사이로 드러난 서연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번졌다.
"좋은 아침이에요, 강 목수님!"
"일찍 오셨네요, 한 기자님."
우진이 다가가 커피 한 잔을 건네받았다.
종이컵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가 손바닥을 기분 좋게 덥혔다.
서연이 건넨 조간신문 1면에는 대검찰청 특수본의 최종 수사 결과 발표와 함께, 옛 넥스트 큐브 사옥 터에 들어설 '테헤란로 시민 기억 생태 공원'의 조감도가 큼직하게 실려 있었다.
[통제의 폐허 위에 피어나는 자유의 숲, 시민의 품으로 돌아오다]
헤드라인 활자를 바라보며 서연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오늘부터 공원 쉼터 기초 토목 공사가 시작된대요. 포천에서 온 참나무 기둥도 이번 주말에 현장으로 옮겨질 거고요."
"네. 태석 씨와 동료들도 오늘 오후에 작업실로 오기로 했습니다. 기초 치목 작업부터 함께 시작하기로 했어요."
우진의 대답에 서연이 눈을 반짝였다.
"정말요? 다행이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언덕 아래로 펼쳐진 서울 도심의 전경을 굽어보았다.
저 멀리 한강이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며 유유히 흐르고 있었고, 테헤란로의 빌딩 숲 위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거대한 사각 격자망 대신 눈부시게 파란 가을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동쪽으로 가면 산이 있고, 서쪽으로 가면 강이 있었다.
남쪽으로 가면 부모님이 계신 제천의 소나무 숲길로 이어졌고, 북쪽으로 가면 채린과 동생들이 새로운 꿈을 그리는 인사동 골목길이 나왔다.
정해진 레일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기에 인간은 이제, 동서남북 어디로든 걸어갈 수 있었다.
길을 잘못 들어 헤매더라도 상관없었다.
헤매는 길목에서 마주치는 우연한 인연이, 넘어지며 얻은 무릎의 흙먼지가 다시금 삶을 일으켜 세우는 단단한 옹이가 되어줄 테니까.
서연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우진을 올려다보았다.
"우진 씨, 오늘 작업 시작하기 전에…… 어디 잠깐 다녀오지 않을래요?"
"어디요?"
"어디든요. 발길 닿는 대로요. 정하지 않고 그냥 걸어보는 거예요."
서연의 맑은 눈동자가 아침 햇살을 받아 보석처럼 빛났다.
우진은 서연의 손을 꼭 쥐었다.
그의 얼굴에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고 평온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좋습니다. 어디든 가보죠."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옷자락을 기분 좋게 스치고 지나갔다.
머리 위의 하늘은 텅 비어 있었고, 그 비어 있음이야말로 무한한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었다.
우진은 서연과 함께 나란히 발을 내딛으며, 사방으로 환하게 열린 골목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