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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118화

마지막 수첩의 빈 장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톱밥 내음과 아침의 공백

 

상도동 147번지 목공 작업실의 아침은 언제나 대패질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유리창 너머로 스며드는 새벽빛은 옅은 잿빛을 띠고 있었다.

 

어제 기상청 예보에서 흘러나왔던 50%의 강수 확률 때문인지, 서쪽 하늘에는 희뿌연 먹구름이 솜이불처럼 얇게 깔려 있었다.

 

강우진은 손에 쥔 평대패의 날을 엄지손가락 끝으로 조심스레 쓸어보았다.

 

서늘하고 예리한 쇠붙이의 감촉이 지문 사이로 파고들었다.

 

과거 시신경을 쥐어뜯던 편두통이나 관자놀이의 4cm 수술 흉터에서 느껴지던 찌르는 듯한 발열은 이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망막 위를 번쩍거리며 어지럽히던 푸른색 궤적선도, 사람들의 정수리 위에서 회전하던 기하학적인 도형들도 없었다.

 

오직 작업대 위에 놓인 팔십 년 된 홍천 느티나무 슬랩 상판만이 그 거친 숨결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었다.

 

바위틈을 피해 뒤틀리며 자라난 나뭇결은 인위적인 직선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갈라진 틈새마다 어제 정성껏 박아 넣은 흑단 나비장이 든든하게 박혀 있었다.

 

우진은 대패를 잡고 느티나무의 결을 따라 천천히 앞으로 밀어냈다.

 

스르륵, 사각거리며 얇은 대팻밥이 꽃잎처럼 말려 올라왔다.

 

코끝으로 알싸하면서도 묵직한 생나무의 피톤치드 향이 번져나갔다.

 

누군가 미리 계산해 둔 최적의 두께도, 허용 오차 몇 밀리미터를 지시하는 붉은색 경고등도 없었다.

 

오직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미세한 요철과 나무의 저항을 느끼며 오롯이 자신의 감각으로 힘을 조절할 뿐이었다.

 

우진은 대패질을 멈추고 허리를 펴며 숨을 깊게 내쉬었다.

 

마당 한편에 세워둔 백 년 된 벼락 맞은 참나무 거목이 아침 바람에 가볍게 흔들렸다.

 

테헤란로 시민 기억 생태 공원의 중심 쉼터가 될 저 거목 역시, 벼락을 맞아 거멓게 타버린 상처를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 주변의 세포들은 벼락의 충격을 버텨내기 위해 바위보다 단단한 옹이로 굳어 있었다.

 

상처는 결함이 아니라 살아남은 자의 가장 단단한 훈장이라는 진실을, 우진은 나무를 만지며 매일같이 체감하고 있었다.

 

2. 비정형 다이닝 테이블의 완성

 

"다리 결합부터 끝내야겠군."

 

우진은 작업대 아래에 놓아두었던 비대칭 삼각 지지 프레임을 들어 올렸다.

 

어제 제천에서 돌아와 늦은 밤까지 끌질과 장부맞춤으로 다듬어 둔 참나무 다리 세 개였다.

 

바닥이 제아무리 거칠고 울퉁불퉁해도, 세 발로 지탱하는 구조는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과거 그에게 세모(△)는 파멸과 급격한 추락, 목숨을 위협하는 궤도의 꺾임을 의미하는 공포의 기호였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놓인 세 개의 다리는 거친 세상을 버텨내는 가장 견고하고 유연한 디딤돌이었다.

 

우진은 느티나무 상판 뒤집힌 면에 파놓은 암장부 구멍에 천연 아교를 얇게 펴 발랐다.

 

이어 참나무 다리의 수장부를 홈에 정확히 맞추어 끼워 넣었다.

 

나무망치를 쥐고 탕, 탕 소리를 내며 조심스럽게 타격했다.

 

단단한 원목끼리 맞물리며 둔탁하면서도 경쾌한 파열음이 공방 안을 가득 메웠다.

 

억지로 끼워 맞춘 것이 아니라, 나무의 수축과 팽창을 계산해 0.1밀리미터의 숨구멍을 남겨둔 결합이었다.

 

세 개의 다리가 완벽하게 장부에 안착하자 우진은 클램프를 단단히 물려 고정했다.

 

마지막으로 천연 호두나무 오일을 헝겊에 듬뿍 묻혀 상판 전체에 스며들도록 문질렀다.

 

메말라 있던 느티나무의 표면이 황금빛을 머금으며 깊고 그윽한 용목 무늬를 드러냈다.

 

흑단 나비장은 짙은 밤색으로 빛나며 갈라진 상처를 더욱 아름답게 장식해주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표준 규격서에 단 한 줄도 적혀 있지 않은 오직 하나뿐인 식탁이었다.

 

도서출판 지평의 이현석 편집장이 원했던 '사각 규격을 벗어난 생명의 테이블'이 마침내 온전한 형상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작업을 마친 우진은 기름 묻은 장갑을 벗어 던지고 작업대 한구석에 걸터앉았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턱 끝을 타고 바닥의 톱밥 위로 툭 떨어졌다.

 

몸은 노곤했지만 가슴속은 시린 공백 대신 꽉 찬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3. 빗방울과 모퉁이의 온기

 

후두둑.

 

작업실 양철 지붕 위로 둔탁한 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우진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한 빗방울은 이내 자잘한 소나기가 되어 골목길 아스팔트를 적시기 시작했다.

 

'결국 50%의 확률이 비를 택했군.'

 

우진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과거 네모 프로젝트의 통제 아래 있던 세상이었다면, 비가 내리는 시각과 빗방울의 굵기, 심지어 행인들이 우산을 펴는 초 단위의 행동까지 중앙 코어의 알고리즘에 의해 오차 없이 집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리는 비는 어떤 수식도, 목적도 없이 그저 대기의 흐름과 구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자연스럽게 쏟아지는 하늘의 선물이었다.

 

우진은 작업복 셔츠를 털어내고 작업실 문을 열었다.

 

촉촉하게 젖어 드는 흙냄새와 비 냄새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골목길 저편에서 노란 우산을 쓴 꼬마 준우가 물웅덩이를 첨벙거리며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준우야, 뛰지 마라! 넘어진다!"

 

골목 어귀 복덕방 문을 열고 나온 할머니가 손부채를 흔들며 소리쳤다.

 

"할머니! 나 장화 신어서 안 미끄러져요!"

 

준우는 뒤를 돌아보며 배시시 웃더니 다시 힘차게 빗속을 내달렸다.

 

우진은 벽에 걸려 있던 검은 우산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섰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헌책방 겸 북카페인 '모퉁이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서자 맑은 풍경 소리와 함께 구수한 볶은 결명자차 냄새가 훅 풍겨왔다.

 

카운터 안에서 커피잔을 닦던 사장이 반갑게 고개를 들었다.

 

"강 목수님, 비가 꽤 쏟아지네요. 결국 기상청 예보가 맞았어요."

 

"그러게요. 딱 반반이었는데 비 쪽으로 기울었네요."

 

우진은 우산꽂이에 우산을 꽂아두고 창가 자리로 다가갔다.

 

창가 테이블 위에는 며칠 전 우진이 안성 폐화훼 농원에서 사 와 선물했던 보랏빛 벌개미취 화분이 단정하게 놓여 있었다.

 

창밖으로 흐르는 빗방울과 유리창 너머의 꽃잎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어제 면접 때문에 우산을 가져갈지 고민하던 여대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우산을 챙겨 들고 면접장으로 무사히 향했을 터였다.

 

사장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결명자차를 도자기 잔에 담아 우진의 앞에 내려놓았다.

 

"안색이 아주 좋아 보여요. 제천에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네, 부모님 모두 평안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좋은 말씀도 많이 해주셨고요."

 

우진은 따뜻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손끝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가 비에 젖은 서늘한 공기를 밀어냈다.

 

벽걸이 라디오에서는 아나운서의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넥스트 큐브 게이트에 연루되었던 정관계 인사들의 3차 공판 소식, 그리고 테헤란로 시민 기억 생태 공원의 착공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는 뉴스였다.

 

세상은 여전히 수많은 사건과 갈등으로 시끄러웠지만, 그 누구도 보이지 않는 꼭두각시 줄에 매달려 억지로 춤추고 있지 않았다.

 

모두가 각자의 몫만큼 분노하고, 각자의 몫만큼 반성하며 스스로의 내일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 불완전함이야말로 살아있는 인간 사회의 진짜 호흡이었다.

 

4. 가슴 품에서 꺼낸 순백의 수첩

 

우진은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묵직하고 매끄러운 가죽의 감촉이 닿았다.

 

제천의 흔들리는 소나무 숲길에서 아버지 강정호가 떨리는 손으로 건네주었던 그 수첩이었다.

 

단단한 남색 양장 표지를 두른 손바닥만 한 수첩.

 

아버지가 서른 살 무렵 통계학 연구를 처음 시작할 때 선물 받았으나, 세상을 완벽한 수식에 가두려 했던 자신의 오만을 경계하며 30여 년 동안 단 한 자도 적지 않고 백지로 간직해 온 물건이었다.

 

'우진아, 인생은 정답을 맞추는 시험지가 아니란다. 빈칸을 공식으로 채우려 하지 마라. 그저 네 발로 딛고 선 오늘을 살아내는 것, 그 자체가 유일한 진실이란다.'

 

아버지가 휠체어 위에서 건넸던 음성이 귓가에 잔잔하게 맴돌았다.

 

우진은 조심스럽게 수첩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바지 주머니에서 흑연 심이 단단하게 깎인 낡은 연필 한 자루도 꺼냈다.

 

가죽 표지를 넘기자 사각거리는 소리와 함께 누렇게 바래지 않은 순백의 속지가 펼쳐졌다.

 

어제 제천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 적어 넣었던 짧은 문장이 첫 장 상단에 단정하게 새겨져 있었다.

 

[50%의 불확실성.

 

그것은 결과를 알 수 없기에 내가 스스로 우산을 챙길 수 있는 자유다.]

 

그 아래는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아무런 실선도, 모눈종이 같은 사각 격자도 없는 완벽한 공백이었다.

 

과거 우진의 품에는 항상 다른 수첩이 들려 있었다.

 

지하철 2호선과 테헤란로 빌딩 숲을 오가며 타인들의 머리 위에 뜨는 네모, 세모, 동그라미를 초 단위로 기록하던 관찰 수첩이었다.

 

누가 언제 파멸할지, 누구의 궤도가 몇 시 몇 분에 꺾여 나갈지를 편집증적으로 받아 적던 감시와 통제의 기록물.

 

그 수첩 속에서 인간은 살아있는 생명이 아니라 오차 없이 집행되어야 할 좌표와 데이터 찌꺼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 끔찍한 수첩은 광화문 지하 결전을 앞두고 상도동 작업실 아궁이 속에서 한 줌의 재로 타버렸다.

 

그리고 지금, 그의 손에는 타인을 관찰하고 재단하는 수첩이 아니라, 오직 자기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담아낼 새로운 백지가 놓여 있었다.

 

창밖의 빗줄기가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먹구름 사이로 희미한 은빛 햇살이 비치며 젖은 아스팔트 위로 반짝이는 물비늘을 만들어냈다.

 

우진은 연필을 쥐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밴 목수의 굳은살이 연필대를 단단하게 지탱했다.

 

5. 내가 선택한 오늘

 

우진은 순백의 종이 위에 천천히 연필을 대었다.

 

사각, 사각.

 

흑연이 종이의 미세한 결을 누르며 지나가는 소리가 찻잔의 김 서린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첫 줄 중앙에 또박또박 제목을 써 내려갔다.

 

[내가 선택한 오늘]

 

제목을 적어 넣는 순간, 가슴속 깊은 곳에서 형언할 수 없는 전율이 밀려왔다.

 

그것은 서지훈이 강요하던 완벽한 유토피아의 대본도 아니었고, 중앙 코어가 송출하던 차가운 궤도 각본도 아니었다.

 

오직 강우진이라는 한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살아낸 순수한 실존의 기록이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그 아래로 문장을 이어 나갔다.

 

- 아침 6시 30분에 눈을 떴다.

 

머리는 맑았고 관자놀이의 통증은 전혀 없었다.

 

- 비가 올 확률이 50%라는 뉴스를 들었지만, 비가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날씨는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맞이하는 것이니까.

 

- 오전 내내 홍천 느티나무 다이닝 테이블을 작업했다.

 

갈라진 틈을 메우지 않고 나비장으로 감싸 안았고, 흔들리지 않는 세 발 다리를 완성했다.

 

결함이라 불리던 것들이 가장 아름다운 중심이 되었다.

 

- 작업실을 나설 때 소나기가 쏟아졌다.

 

나는 내 손으로 직접 우산을 챙겨 들었다.

 

비에 젖지 않은 것은 시스템의 보호 덕분이 아니라, 내가 우산을 가져가기로 결단했기 때문이다.

 

- 모퉁이 서재에서 결명자차를 마시며 창밖의 꽃을 본다.

 

내일 서연 씨가 인쇄 감리를 마치고 완성된 식탁을 보러 오기로 했다.

 

저녁에는 함께 따뜻한 칼국수를 먹을 생각이다.

 

글을 써 내려가는 동안 우진의 입가에는 줄곧 잔잔한 미소가 머물러 있었다.

 

문장은 지극히 평범했고, 그 어떤 영웅적인 무용담이나 초자연적인 법칙에 대한 고찰도 들어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나열이야말로, 그가 15년 동안 목숨을 걸고 되찾고자 했던 가장 거룩하고 눈부신 기적이었다.

 

남이 써준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의 삶에는 일기가 필요 없다.

 

결과가 이미 확정되어 있다면 오늘의 고뇌와 선택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직 내일을 알 수 없는 인간만이, 오늘 자신이 내린 선택의 무게를 기록하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다.

 

우진은 연필을 멈추고 자신이 적어 내려간 글귀들을 찬찬히 눈으로 훑었다.

 

종이 위에는 네모도, 세모도, 동그라미도 없었다.

 

오직 흑연으로 눌러쓴 정직한 글자들만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6. 문을 두드리는 발소리

 

딸랑.

 

서재 문에 달린 풍경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우진이 고개를 들자 젖은 우산을 털며 안으로 들어서는 익숙한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한서연이었다.

 

코트 자락 끝에 빗방울이 몇 방울 맺혀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아침 햇살처럼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손에는 갓 인쇄소에서 들고 나온 듯 잉크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두툼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우진 씨! 여기 계실 줄 알았어요."

 

서연이 환하게 웃으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녀가 다가올 때마다 은은한 종이 냄새와 비 냄새가 섞여 작업실의 공기를 상쾌하게 흔들었다.

 

"서연 씨, 인쇄 감리는 오후에 끝난다고 하지 않았어요? 비도 오는데 어떻게 벌써 왔어요?"

 

우진이 놀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서연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진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인쇄소 기장님이 작업을 워낙 꼼꼼하고 빠르게 해주셔서요. 초판 인쇄본 첫 권이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우진 씨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택시 타고 달려왔죠."

 

서연은 품에 안고 있던 책을 조심스럽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짙은 청록색 표지 위에 은박으로 선명하게 박힌 제목이 우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선택할 권리 : 우리가 되찾은 불확실성과 무형의 내일》

 

표지 중앙에는 어떠한 기하학적 도형도 없이, 굽이치며 흘러가는 거친 나뭇결의 실루엣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우진이 공모전에서 규격 미달로 낙선했던 바로 그 호두나무 비대칭 테이블의 상처를 본뜬 디자인이었다.

 

"이거……."

 

우진이 떨리는 손으로 책 표지를 어루만졌다.

 

종이의 매끄러운 질감 아래로 15년간 그들이 함께 겪어낸 사투와 눈물의 시간들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는 듯했다.

 

"첫 장을 넘겨보세요. 우진 씨한테 가장 먼저 바치는 글이니까요."

 

서연이 눈을 반짝이며 재촉했다.

 

우진은 표지를 넘겼다.

 

속표지 다음 장, 정갈한 활자로 인쇄된 헌사가 우진의 눈시울을 붉어지게 만들었다.

 

[정해진 궤도를 부수고, 우리에게 실패할 자유와 불완전한 내일을 돌려준 목수 강우진에게 이 기록을 바칩니다.]

 

우진은 목이 메어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서연을 바라보았다.

 

서연의 맑은 눈동자 속에는 그 어떤 검은 그림자도, 흔들리는 불안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서로를 향한 온전한 신뢰와 애정만이 깊고 투명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고마워요, 서연 씨. 정말…… 아름다운 책이네요."

 

"제가 고맙죠. 우진 씨가 없었다면 이 책은 세상에 나올 수 없었을 테니까요. 아, 그런데 이건 뭐예요?"

 

서연의 시선이 우진의 찻잔 옆에 놓인 남색 양장 수첩으로 향했다.

 

우진이 방금 전까지 적어 내려가던 그 수첩이었다.

 

7. 백지 위에 남겨진 약속

 

"수첩 새로 장만하셨어요? 겉표지가 엄청 앤틱하고 멋있네요."

 

서연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우진은 수첩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수첩이에요. 30년 동안 세상을 수식으로 통제하려 했던 오만을 반성하시면서, 단 한 글자도 쓰지 않고 간직해 오셨던 백지 노트였죠."

 

"강 박사님께서요?"

 

"네. 이제는 정답을 맞추려 하지 말고, 내가 선택한 오늘을 내 손으로 직접 기록하라고 건네주셨어요."

 

우진은 수첩을 서연 쪽으로 살짝 돌려 보여주었다.

 

서연은 첫 장 상단에 적힌 [내가 선택한 오늘]이라는 제목과 그 아래 적힌 짤막한 일기들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문장을 읽어 내려가던 서연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나갔다.

 

"'저녁에는 함께 따뜻한 칼국수를 먹을 생각이다'…… 이 문장은 제 허락도 안 받고 미리 결론을 내리신 건가요?"

 

서연이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눈을 흘기며 물었다.

 

우진은 멋쩍은 듯 귓바퀴를 긁적이며 웃었다.

 

"50%의 확률에 베팅해 본 겁니다. 서연 씨가 거절하면 다른 걸 먹을 각오도 되어 있었고요. 실패할 권리가 저한테도 있으니까요."

 

"치, 거절할 리가 없다는 걸 다 알고 쓰셨으면서. 좋아요, 오늘 저녁은 제가 살게요. 인쇄본 나온 기념으로요."

 

서연은 가방에서 자신의 만년필을 꺼내 들었다.

 

"저도 한 줄 보태도 돼요? 이 수첩의 첫 장이잖아요."

 

"물론이죠."

 

우진이 수첩을 완전히 서연 앞으로 밀어주었다.

 

서연은 만년필 뚜껑을 열고, 우진이 적은 마지막 문장 바로 아래에 유려한 필체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사각거리는 만년필 촉의 소리가 우진의 가슴을 포근하게 간지럽혔다.

 

- 서연이 비를 뚫고 찾아왔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책을 품에 안고서.

 

우리는 이제 어떤 정해진 각본도 없이,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으며 나란히 걸어갈 것이다.

 

우리의 내일은 언제나 맑음 뒤 흐림, 혹은 흐림 뒤 맑음일 테니까.

 

글을 마친 서연이 만년필을 거두며 후, 입김을 불어 잉크를 말렸다.

 

우진과 서연의 글씨가 나란히 놓인 수첩의 첫 페이지는 세상 그 어떤 문학작품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깊은 유대감이 두 사람 사이를 가득 채웠다.

 

과거 그들을 얽어매던 넥스트 큐브의 사각 격자망도, 거대한 엔트로피의 보존 법칙도 이 작은 테이블 위의 온기를 앗아갈 수는 없었다.

 

창밖을 내다보자 어느새 소나기는 완전히 그쳐 있었다.

 

구름이 걷힌 푸른 하늘 위로 맑고 투명한 가을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마지막 낙수 물방울들이 햇빛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였다.

 

"우진 씨, 공방에 의뢰받았던 그 테이블 다 끝났다고 했죠?"

 

서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코트를 여몄다.

 

"네, 방금 다리 결합까지 완벽하게 끝냈어요. 보러 갈까요?"

 

"네! 당장 가서 보고 싶어요. 이현석 편집장님이 얼마나 감격할지 벌써 눈에 선하네요."

 

8. 지평선을 향해 열린 문

 

두 사람은 모퉁이 서재를 나와 상도동 골목길을 나란히 걸었다.

 

비 온 뒤의 골목길은 놀랍도록 상쾌하고 투명했다.

 

아스팔트 틈새마다 고인 빗물 위로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이 그림처럼 비쳐 들었다.

 

복덕방 앞 평상에는 동네 노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우진이 손수 고쳐준 원목 등받이에 기대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어이, 강 목수! 색시랑 어디 좋은 데 가나 보네?"

 

지나가던 세탁소 주인이 자전거를 세우며 쾌활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닙니다, 공방에 일하러 갑니다!"

 

우진이 손을 흔들며 밝은 목소리로 화답했다.

 

서연은 '색시'라는 말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우진의 팔을 꼭 쥐며 나란히 보폭을 맞추었다.

 

상도동 147번지 작업실 마당에 들어서자, 방금 칠한 호두나무 오일의 고소한 향과 젖은 흙냄새가 한데 섞여 코끝을 간질였다.

 

작업실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햇살을 듬뿍 받은 비정형 느티나무 다이닝 테이블이 눈부신 자태를 드러냈다.

 

서연은 탄성을 내지르며 식탁으로 다가갔다.

 

"세상에…… 우진 씨, 정말 대단해요. 이 굴곡 좀 봐요. 정말 살아 숨 쉬는 것 같아요."

 

서연은 손바닥으로 느티나무 상판의 결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흑단 나비장으로 붙잡아 둔 갈라진 틈새를 매만지는 그녀의 손길은 한없이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상처가 벌어지지 않게 붙잡아 주면서도, 억지로 메우지 않는 것. 그것이 우진 씨의 마음이군요."

 

"네. 우리 삶도 그렇잖아요. 흉터를 지우려 애쓰기보다는, 그 흉터와 함께 나란히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게 진짜 자유니까요."

 

우진은 서연의 곁에 서서 식탁을 함께 바라보았다.

 

세 발로 당당하게 바닥을 딛고 선 테이블은 그 어떤 흔들림도 없이 견고했다.

 

우진은 작업대 위에 놓아두었던 남색 양장 수첩을 집어 들었다.

 

첫 장에는 그와 서연이 함께 적어 넣은 오늘 하루의 선택이 단정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뒷장들은, 앞으로 그들이 살아갈 수천, 수만 일의 시간처럼 새하얗게 비어 있었다.

 

누군가 미리 결말을 적어두지 않은 책.

 

언제든 틀릴 수 있고, 언제든 잘못된 선을 그을 수 있지만, 그렇기에 매 순간 온 힘을 다해 살아낼 가치가 있는 인생이라는 이름의 백지.

 

우진은 수첩을 가슴 안주머니에 소중히 갈무리했다.

 

심장이 뛰는 박동에 맞추어 수첩의 단단한 가죽이 기분 좋은 압박감을 전해왔다.

 

바로 그때, 작업실 입구 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인기척이 들려왔다.

 

우진과 서연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작업실 마당 어귀, 백 년 된 참나무 거목의 그늘 아래 한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허름한 윈드브레이커 차림에 모자를 깊게 눌러쓴 사내.

 

목덜미 부근에는 과거 15년 전 연구소의 차가운 챔버에 갇혀 있었음을 증명하는 희미한 수술 흉터 자국이 남아 있었다.

 

어제 제천 사택 인근 솔숲에서 우진과 눈이 마주쳤던 바로 그 1세대 피실험자 사내였다.

 

사내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우진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광화문에서 백도현이 품었던 것과 같은 살기나 증오는 담겨 있지 않았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어떻게 걸어가야 할지 알지 못해 방황하는 자의, 길을 잃은 자의 깊은 갈망과 주저함이었다.

 

서연이 숨을 죽이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우진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천천히 사내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의 머리 위에는 어떤 무기나 이능도 없었다.

 

오직 목수의 거친 손과, 상처를 품어 안을 줄 아는 따뜻한 미소만이 그의 전부였다.

 

"길을 찾고 계십니까?"

 

우진의 나지막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마당의 고요한 공기를 갈랐다.

 

사내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바람이 불어와 작업대 위의 톱밥을 하얗게 흩날렸다.

 

새하얀 도화지 같은 세상 위로, 또 하나의 새로운 인연이 그 첫 번째 발자국을 내딛으려 하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