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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117화

내일의 날씨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귀경길의 차창

 

시외버스의 낡은 서스펜션이 도로의 요철을 지날 때마다 차체 하부에서 묵직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덜컹거리는 진동에 맞추어 창틀에 덧대어진 낡은 고무 실링이 잘게 비명을 질렀고, 유리에 맺힌 옅은 먼지 알갱이들이 햇살을 받아 희뿌옇게 흩어졌다.

 

차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중부고속도로변의 산자락은 막 늦여름의 짙푸른 녹음을 털어내고 황갈색이 감도는 완연한 초가을의 옷으로 갈아입는 중이었다.

 

가드레일 너머로 굽이치는 언덕과 이름 모를 마른 풀잎들이 바람에 고개를 꺾으며 지나갔다.

 

강우진은 덜컹거리는 차창 유리에 오른쪽 관자놀이를 가만히 기대었다.

 

차갑고 단단한 유리의 표면이 피부를 통해 두개골로 서늘한 온도를 전해왔다.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고속버스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옥 같은 고역이었다.

 

유리 표면에 반사되어 어른거리던 굴절 광선, 타인의 머리 위에 족쇄처럼 매달려 허공으로 뻗어 나가던 칠흑 같은 꼭두각시 줄선, 그리고 무엇보다 타인의 궤도를 억지로 해석하려 들 때마다 뇌간과 시신경을 날카로운 송곳으로 후벼 파듯 타오르던 4센티미터 수술 흉터의 박동 때문이었다.

 

그 시절의 관자놀이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처럼 뜨겁게 펄떡였고, 눈을 감아도 망막 위로 푸른빛의 미래 잔상과 붉은 경고음이 어지럽게 명멸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관자놀이는 한 점의 미열조차 품지 않은 채 지극히 잔잔했다.

 

맥박은 평온하게 뛰었고,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는 진동 속에서도 신경계를 짓누르던 감각 왜곡의 노이즈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우진은 유리창에 흐릿하게 맺힌 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초점을 잃고 날카롭게 번득이던 동공의 경계는 부드럽게 풀려 있었고, 허공을 가로세로로 가차 없이 분할하던 거대한 사각 통제 격자망의 잔영도 완전히 사그라져 있었다.

 

오직 버스 천장에 매달린 희미한 백색 형광등 불빛과 차창 밖 붉은 노을빛을 정직하게 담아내는 담담하고 맑은 눈동자만이 오롯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우진은 무릎 위에 단단히 얹어둔 묵직한 캔버스 가방의 지퍼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두터운 면 원단으로 감싼 가방 안쪽 주머니에는 제천의 숲 그늘 아래 폐교 분교 사택 뒤뜰에서 아버지가 두 손으로 건네주었던 순백의 양장 수첩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삼십 년 전, 세상을 완벽한 통계 공식과 기하학적 방정식으로 규정하려 했던 학문적 오만을 뼈아프게 경계하며 단 한 글자도 적지 않은 채 백지로 간직해 왔다던 아버지의 침묵.

 

'우진아, 인생은 억지로 맞춰가는 공식이 아니라 그저 온몸으로 살아내는 과정이란다.'

 

아버지가 휠체어 바퀴를 멈추고 소나무 숲길을 올려다보며 들려주었던 그 메마르고도 따스한 음성이, 버스 디젤 엔진의 깊은 울림을 타고 귓가를 부드럽게 감돌았다.

 

우진은 바지 주머니 속으로 손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손끝에 거친 흑연 연필 한 자루가 잡혔다.

 

목공 작업을 할 때 귀에 꽂아두고 목재의 결을 긋던 납작하고 뭉툭한 연필이었다.

 

제천 마을 어귀의 울창한 솔숲을 지날 때, 바람결을 타고 스쳐 지나갔던 그 낯익고 서늘한 기척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목덜미에 선명한 수술 흉터를 남긴 채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사내의 웅크린 실루엣.

 

15년 전의 비극 속에서 시스템의 규격 부적합 결손체로 낙인찍혀 차가운 챔버에 갇혔던 또 다른 피실험자의 그늘이었다.

 

하지만 그 그림자를 눈에 담았던 순간에도 우진의 심장은 과거처럼 불안으로 요동치지 않았다.

 

그것은 세상을 파멸로 몰고 갈 거대한 음모의 복귀가 아니었다.

 

무너져 내린 바벨탑의 거대한 폐허 속에서 이제 막 불완전하고 시린 현실로 기어 나온, 상처 입은 한 인간의 아픈 생채기일 뿐이었다.

 

그 상처 또한 상도동 공방의 느티나무 상판에 깊게 패인 갈라진 틈새처럼, 언젠가는 억지로 깎아내거나 메우지 않고 나비장으로 감싸 안아야 할 이 세상의 소중한 파편이었다.

 

"이번 정류장은 강남고속버스터미널, 서울고속버스터미널입니다. 두고 내리는 물건이 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오는 안내 방송의 무미건조한 음성이 나직하게 차내를 울렸다.

 

승객들이 부스럭거리며 짐을 챙기고 겉옷을 여미기 시작했다.

 

우진은 가방 끈을 고쳐 메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버스 문이 열리며 훅 끼쳐오는 매캐한 아스팔트 내음과 늦은 오후의 도심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더는 그 어떤 기하학적 도형도 공기의 흐름을 통제하지 않는, 날것 그대로의 서울이었다.

 

2. 비정형의 뼈대

 

상도동 147번지 언덕길을 오를 무렵에는 서쪽 노량진 방면의 하늘이 붉은 핏빛과 짙은 보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붉은 벽돌 다세대 주택들의 계단 사이로 이웃들의 찌개 끓이는 냄새와 생선 굽는 연기가 골목을 아늑하게 채우고 있었다.

 

오래된 쇠창살 대문을 밀고 작업실 앞마당으로 들어서자, 쌉싸름하면서도 구수한 참나무 껍질 내음과 건조된 목재의 은은한 톱밥 냄새가 코끝을 반갑게 감싸 안았다.

 

마당 한편에 든든하게 자리 잡고 있는 백 년 묵은 참나무 거목은 어제 새벽에 내렸던 서늘한 이슬을 머금어 한층 짙은 흑갈색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무의 옆구리에 벼락이 내리쳐 깊게 팬 거친 상처 부위는, 그 비바람을 버텨내기 위해 나무 스스로 굳혀낸 수십 개의 옹이들과 함께 강철보다 단단한 질감으로 굳어 있었다.

 

우진은 메고 있던 캔버스 가방을 툇마루 안쪽에 조심스럽게 모셔두고, 걸려 있던 두터운 캔버스 작업복 앞치마를 목에 둘렀다.

 

작업대 위에는 어제 한서연과 함께 땀을 흘리며 가공했던 팔십 년 된 홍천 느티나무 슬랩 상판이 웅장하게 누워 있었다.

 

도서출판 지평의 이현석 편집장이 사각 규격의 피로를 토로하며 간곡히 부탁했던 그 테이블의 중심이었다.

 

우진은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펴서 목재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바위틈을 피해 자라느라 기괴할 정도로 비틀린 나뭇결은 용의 비늘처럼 굽이치며 뻗어나가고 있었고, 가뭄의 고통으로 갈라진 상판 중앙의 깊은 균열부에는 정성스레 박아 넣은 검은 흑단 나비장 두 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벌어진 틈을 억지로 압착해 메우지 않고, 나비넥타이 모양의 단단한 쐐기를 박아 더 이상 멀어지지 않도록 서로를 붙잡아 주는 결속의 흔적.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나비장의 매끄러운 모서리와 거친 나뭇결의 대비는 인위적인 기계 가공으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숭고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제 다리를 올려야지."

 

우진은 작업대 아래 그늘진 목재 보관대에서 미리 치수를 가늠해 선별해 두었던 느티나무 각재 세 개를 꺼내 올렸다.

 

굵기가 제각각이고 나뭇결의 방향도 서로 다른 단단한 통각재들이었다.

 

일반적인 식탁이라면 네 모서리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반듯한 네 개의 다리를 붙이는 것이 규격서의 상식이었다.

 

하지만 우진이 이 테이블을 위해 구상한 구조는 달랐다.

 

세 점이 지면과 맞닿아 균형을 이루는 비대칭 삼각 지지 프레임이었다.

 

과거의 그에게 세모(△)라는 도형은 언제나 끔찍한 비극의 상징이었다.

 

삶의 궤도가 급격히 꺾여 죽음에 이르는 사고, 사회적 파멸, 횡령과 투신, 그리고 시스템이 희생 노드를 처분할 때 띄우던 칠흑 같은 저주의 낙인이었다.

 

하지만 나무를 만지고 끌을 쥐며 땀을 흘리는 동안, 우진은 삶의 또 다른 진실을 손끝으로 배웠다.

 

네 개의 다리를 가진 반듯한 가구는 공장에서 찍어낸 완벽한 수평의 대리석 바닥 위에서만 비로소 네모난 안정을 누린다.

 

지면이 조금만 거칠거나 울퉁불퉁한 흙바닥으로 바뀌는 순간, 네 개 중 어느 한쪽 다리는 허공에 떠서 끊임없이 덜컹거리며 위태롭게 흔들린다.

 

반면 세 개의 다리는 지면이 아무리 굴곡지고 경사져 있어도, 바위가 튀어나오고 흙이 패어 있어도 결코 덜컹거리지 않는다.

 

세 개의 점은 언제나 단 하나의 평면을 스스로 만들어내기 때문이었다.

 

세모는 궤도의 파열이나 저주가 아니었다.

 

세상의 온갖 모순과 굴곡진 풍파를 온몸으로 감싸 안으며 지면을 딛고 서는 가장 본질적이고 단단한 지지대였다.

 

우진은 작업대 옆 벽면에 걸려 있던 숫돌 대야를 끌어당겼다.

 

천연 숫돌 위에 맑은 물을 끼얹고, 손때 묻은 삼십 밀리미터 평끌의 날을 비스듬히 얹었다.

 

스윽, 스윽, 서걱.

 

규칙적이고 차분한 쇠붙이와 돌의 마찰음이 고요한 작업실 공기를 맑게 울렸다.

 

날끝의 거친 버(Burr)가 떨어져 나가며 은빛으로 서슬 퍼렇게 빛나기 시작하자, 우진은 각재의 나이테를 면밀히 살피며 연필로 장부촉의 자리를 그었다.

 

전동 라우터나 기계 톱을 쓰면 불과 몇 분 만에 반듯하게 홈을 파낼 수 있었지만, 우진은 손수 톱을 쥐고 끌을 내리치는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했다.

 

나무의 숨구멍이 숨 쉬는 방향, 겨울을 견뎌내며 단단해진 춘재와 추재의 밀도 차이를 손끝으로 오롯이 느끼기 위함이었다.

 

탁, 타악.

 

탕.

 

나무망치가 끌 자루의 쇠고리를 타격할 때마다 맑은 둔탁음이 울리며 향긋한 톱밥 부스러기가 작업대 위로 눈꽃처럼 흩날렸다.

 

나이테가 촘촘하고 옹이가 박힌 쪽에는 망치의 무게를 더 묵직하게 실었고, 결이 부드러운 쪽에서는 끌의 날을 유려하게 미끄러뜨렸다.

 

이마에서 솟아난 굵은 땀방울이 콧등을 타고 흘러내려 톱밥 위에 툭 떨어졌다.

 

그것은 피로가 아니었다.

 

뇌신경을 쥐어짜던 차가운 계산의 두통 대신, 순수한 육체의 노동을 통해 살갗으로 스며드는 깊고 충만한 몰입감이었다.

 

두 시간 넘게 이어진 정밀한 작업 끝에 마침내 세 개의 다리발에 암수 장부 결합부가 완성되었다.

 

서로 다른 각도로 비틀려 뻗어나가는 세 개의 다리는 저마다의 굴곡을 품고 있었지만, 상판을 받쳐 들 하부 에이프런 프레임과 맞물리는 순간 완벽한 상호 지지 구조를 형성하도록 정밀하게 깎여 있었다.

 

우진은 숨을 가다듬고 세 다리를 하부 프레임에 끼워 넣었다.

 

나무와 나무가 맞물리며 빈틈없이 딱 맞아떨어지는 서늘한 마찰음이 울렸다.

 

상판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프레임 위에 얹은 뒤, 우진은 숨을 몰아쉬며 가조립된 테이블을 작업실 바닥의 거친 시멘트 면 위에 내려놓았다.

 

쿵.

 

무게 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육중한 느티나무 테이블이 바닥에 안착했다.

 

바닥은 옛 참기름집 시절의 기름때와 요철이 그대로 남아 울퉁불퉁한 상태였다.

 

우진은 상판의 가장자리, 바위틈으로 뒤틀려 뻗어나간 가장 취약한 모서리 쪽에 두 손을 얹고 온몸의 체중을 실어 강하게 내리눌렀다.

 

삐걱거리는 소리도, 미세한 들뜸도 없었다.

 

세 개의 다리는 울퉁불퉁한 바닥의 요철을 제 발밑에 온전히 품어 안은 채, 마치 바위에 뿌리를 박은 거목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비대칭의 세모 구조가 상판의 거친 뒤틀림을 완벽한 균형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스스로 서 있구나."

 

우진은 가쁜 숨을 토해내며 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거친 톱밥 먼지 속에서 위풍당당하게 자리를 잡은 테이블을 바라보는 그의 입가에 깊고 후련한 미소가 떠올랐다.

 

3. 모퉁이 서재의 풍경

 

끌과 대패를 정돈하고 마당의 수돗가에서 차가운 지하수로 얼굴을 씻어낸 우진은 툇마루에서 면 남방을 챙겨 입었다.

 

어느덧 상도동 골목길 위로는 짙푸른 어스름이 깔려 있었고, 서늘해진 밤공기가 땀방울이 식은 목덜미를 기분 좋게 간질였다.

 

대문을 열고 골목길로 나서자마자 주황빛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 빗자루질 소리가 사각사각 들려왔다.

 

골목 모퉁이 복덕방 앞에서 플라스틱 빗자루를 들고 보도블록 틈새를 쓸어내리던 복덕방 할머니가 우진의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이구, 강 총각. 제천엔 탈 없이 잘 다녀왔누?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더니 얼굴이 아주 훤칠해졌네."

 

할머니가 빗자루를 한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세우며 환하게 웃었다.

 

"네, 어르신. 부모님 두 분 다 산골 공기 마시며 아주 건강하게 지내고 계십니다. 어머니가 동네 분들과 나눠 먹으라고 텃밭에서 갓 수확해 볶은 들깨를 한 자루 챙겨주셨는데, 내일 아침에 출근길에 꼭 가져다드릴게요."

 

"아이고, 참말로. 매번 뭘 그리 바리바리 얻어온대. 총각이 지난번에 그 기름집 평상에 덧대어준 버팀목 덕에 요새 우리 노인네들이 허리 안 아프다고 아주 난리도 아니여. 동네 골목이 총각 들어오고 나서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

 

할머니의 주름진 눈가에 번지는 미소는 계산도, 의도도 없는 순수한 온기였다.

 

그 이마 위에는 그 어떤 인과율의 낙인도, 보이지 않는 통제 시스템의 검은 실선도 걸려 있지 않았다.

 

그저 하루를 성실히 쓸어내고 저녁을 맞이하는 평범한 인간의 숭고한 주름만이 곱게 패어 있을 뿐이었다.

 

우진은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를 건넨 뒤, 골목길 아래편에 자리한 모퉁이 서재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미닫이 유리문을 옆으로 밀자, 경쾌한 황동 종소리가 딸랑이며 공간의 정적을 깨뜨렸다.

 

문이 열리는 틈새로 손때 묻은 수천 권의 중고 서적들이 뿜어내는 묵직한 마른 종이 냄새와, 주방 구석에서 끓고 있는 은은한 국화차의 증기가 훅 끼쳐왔다.

 

서재 내부는 여섯 개의 낡은 원목 테이블이 듬성듬성 놓인 아담한 구조였다.

 

책장 사이로 은은한 주황색 갓등이 켜져 있었고, 손님들은 저마다의 자리에 깊숙이 파묻혀 조용히 저녁의 시간을 향유하고 있었다.

 

카운터 안쪽에서 반납된 서적의 바코드를 찍고 먼지를 털어내던 육십 대 북카페 사장이 반색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강 목수님, 오셨어요? 제천 공기는 좀 맑던가요? 얼굴빛이 한결 편안해 보이십니다."

 

"네, 사장님. 덕분에요. 사장님이 지난번에 챙겨주신 벌개미취 화분을 어머니 사택 앞마당 돌 틈에 심어드렸는데, 보랏빛 꽃망울이 아주 곱게 맺혔더라고요. 어머니께서 참 고마워하셨습니다."

 

"거봐요, 내가 뭐랬어요. 그 녀석은 온실 속 화초가 아니라서 메마르고 척박한 땅에 던져두어야 제 색깔을 가장 진하게 피워내는 법이거든요."

 

사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찬장에서 손잡이가 두툼한 도자기 머그잔을 꺼내 들었다.

 

펄펄 끓는 주전자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진한 둥굴레차를 가득 따라 우진의 두 손에 쥐여주었다.

 

구수한 곡물 냄새가 언 손을 타고 가슴 한구석을 훈훈하게 덥혀주었다.

 

우진은 찻잔을 들고 창가 쪽 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번에 삐걱거리던 이음매를 단단한 쐐기로 고쳐주었던 창가 의자에는, 등산복 차림의 동네 노인이 돋보기를 코끝에 걸친 채 석간신문의 사회면을 바스락거리며 넘기고 있었다.

 

그 건너편 대각선 테이블에는 두꺼운 국가고시 수험서와 기출문제집을 산더미처럼 쌓아둔 여대생이 지우개 가루를 털어내며 공책 여백에 빼곡하게 볼펜을 굴리는 중이었다.

 

누구 하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거나 정해진 규격에 자신을 맞추려 애쓰지 않았다.

 

각자가 선택한 속도, 각자가 감내하는 무게를 온전히 짊어진 채 저마다의 삶을 묵묵히 호흡하고 있었다.

 

벽면 구석에 매달린 작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7시 뉴스 매거진이 낮은 볼륨으로 차분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화면 하단 자막에는 대검찰청 특별수사본부의 넥스트 큐브 정관계 결탁 세력 추가 기소 소식과 함께, 테헤란로 붕괴 참사 부지에 들어설 '시민 기억 생태 공원'의 전국 설계 공모 착공 소식이 스쳐 지나갔다.

 

우진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 차를 한 모금 천천히 머금었다.

 

뜨겁고 구수한 차 향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며 뱃속 깊은 곳까지 편안한 온기를 채웠다.

 

이 작고 평범한 서재,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소박한 저녁 풍경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었던가.

 

그 대가로 머리 위의 기하학적 도형과 미래를 내다보던 초인적인 감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그 공백이야말로 그가 되찾은 가장 위대한 인간의 영토였다.

 

4. 오십 퍼센트의 내일

 

"이어서 생활 기상 정보입니다."

 

경쾌한 실로폰 시그널 음악이 울리며 텔레비전 화면이 화사한 푸른빛 그래픽 지도로 전환되었다.

 

밝은 정장을 입은 기상 캐스터가 크로마키 화면 속 한반도 지도 앞으로 또각또각 걸어 나와 손을 짚었다.

 

화면 한가운데에는 서해 바다에서 동쪽으로 완만하게 밀려오는 엷은 비구름대의 애니메이션이 띄워져 있었다.

 

"내일 중부 지방은 서해상에서 느리게 동진하는 기압골의 영향을 차차 받겠는데요. 이에 따라 전국이 대체로 맑다가 정오를 기점으로 구름이 많아지겠습니다. 특히 서울과 경기 남부 등 내륙 지역을 중심으로는 오후 한때 대기 불안정으로 인한 국지성 소나기가 지날 가능성이 있겠습니다. 예상 강수 확률은 오십 퍼센트입니다."

 

오십 퍼센트.

 

기상 캐스터의 맑고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흘러나온 그 숫자가 스피커를 울리는 순간, 우진의 귓가에 벼락처럼 선명하게 꽂혔다.

 

창가 쪽에서 신문을 넘기던 등산복 차림의 노인이 돋보기를 벗어 탁자에 탁 내려놓으며 혀를 끌끌 찼다.

 

"쯧쯧, 저놈의 기상청은 매번 저따위여. 오십 퍼센트면 비가 온다는 소리여, 안 온다는 소리여? 올 거면 쏟아지고 말 거면 말지, 오십 대 오십이면 나 같은 늙은이도 점쟁이 노릇 하겠구먼. 날씨 하나 똑 부러지게 맞히는 꼴을 못 봐요."

 

노인의 투덜거림에 맞은편에서 수험서를 뒤적이던 여대생도 머리를 쥐어뜯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 진짜 어쩌라는 거지? 내일 오후에 시청 쪽으로 2차 면접 보러 가야 하는데, 정장 입고 구두 신었는데 비 오면 다 젖잖아. 큰 장우산을 들고 가자니 짐이 너무 무겁고 거치적거리고, 그렇다고 우산을 안 챙기자니 소나기 쏟아지면 망하는 건 난데…… 아, 진짜 우산 챙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여대생은 볼펜 꽁무니로 턱을 톡톡 치며 진지하게 괴로워했다.

 

카운터에서 행주로 유리잔을 뽀득뽀득 닦아내던 북카페 사장이 그 모습을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학생, 비가 백 퍼센트 쏟아진다고 정해진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 오십 퍼센트면 작은 3단 접이식 우산 하나 가방 구석에 찔러 넣고 가면 되지. 비가 안 오면 '에이, 다행이다' 하면 되는 거고, 비가 오면 '챙겨오길 잘했네' 하고 펼치면 그만이잖아."

 

우진은 손에 쥐고 있던 둥굴레차 머그잔을 탁자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텔레비전 화면 한구석에 선명하게 박혀 있는 '강수 확률 50%'라는 숫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참을 수 없이 맑고 유쾌한 웃음이 파도처럼 밀려 올라왔다.

 

그의 입술 끝이 완만한 호를 그리며 번져 나갔다.

 

불과 몇 달 전, 네모 프로젝트의 오르비스 시스템과 중앙 코어가 도시 전체를 틀어쥐고 있던 시절이었다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숫자였다.

 

그 닫힌 감옥 속에서 모든 인간의 미래는 소수점 아래 한 자리까지 '백 퍼센트'의 확률로 확정되어 있었다.

 

몇 시 몇 분에 어느 골목길에서 트럭의 브레이크 와이어가 끊어져 누구의 다리를 으스러뜨릴 것인지.

 

몇 시 몇 분에 여의도 증권가 객장에서 어떤 종목이 폭락하여 몇천 명의 투자자가 검은 세모를 띄우고 한강으로 뛰어들 것인지.

 

언제 암세포가 발현되고, 언제 공채 시험에서 떨어지며, 언제 사랑하는 이와 파탄을 맞이할 것인지까지.

 

모든 비극과 참사는 엔트로피의 항상성을 유지한다는 명목 아래 백 퍼센트의 확정된 각본으로 출력되었고, 사람들의 정수리 위로 굵은 동아줄 같은 칠흑빛 꼭두각시 선을 타고 가차 없이 내려꽂혔다.

 

그 완벽한 계산의 세상에서 인간은 선택하는 주체가 아니었다.

 

시스템이 지정한 시간표대로 걸어가 정해진 지점에서 쓰러져야 하는 가축이자 기계의 부품에 불과했다.

 

오차는 결함이었고, 우연은 시스템을 위협하는 버그였으며, 불확실성은 소거되어야 할 죄악이었다.

 

하지만 지금, 저 브라운관 화면 속에 떠 있는 숫자는 완벽한 반반, 바로 '오십 퍼센트'였다.

 

비가 내릴 수도 있고, 내리지 않을 수도 있는 세상.

 

우산을 정성껏 챙겨 들고 나갔다가 맑게 갠 햇살 아래서 머쓱하게 웃으며 우산을 지팡이 삼아 걸을 수도 있는 세상.

 

우산을 깜빡 잊고 나갔다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소나기에 흠뻑 젖은 채, 낯선 상가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가 처음 보는 이웃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떨어지는 빗방울을 구경할 수도 있는 세상.

 

결과가 정해져 있지 않기에, 인간은 비로소 오늘 밤 불 꺼진 방에서 '내일 우산을 챙길까 말까'라는 사소하고도 위대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그 고민과 망설임이야말로, 내일이라는 시간을 기계가 대신 결정해 주지 않는다는 가장 명백한 증거였다.

 

우진은 가만히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의 거친 굳은살 사이로 따뜻한 체온이 맥동하고 있었다.

 

'오십 퍼센트.'

 

그것은 무지와 혼란의 공포가 아니었다.

 

어떤 결말도 강요되지 않는다는 것, 내일의 도화지가 순백으로 비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오직 인간의 자유의지만이 그 빈칸을 채워나갈 수 있다는 우주의 가장 아름다운 축복이었다.

 

5. 작업실의 불빛

 

모퉁이 서재를 나와 골목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 가로등 불빛이 밤안개 속에서 따스한 주황색 원을 그리며 발밑을 비추고 있었다.

 

지나가는 이웃들의 머리 위는 깨끗했다.

 

그 어떤 사각형도, 삼각형도, 붉은 경고도 없는 완전한 밤하늘이었다.

 

상도동 147번지 마당에 들어서자, 주머니 속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리며 맑은 벨소리를 냈다.

 

우진은 액정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한서연' 석 자가 떠 있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며 작업실 문을 열어젖혔다.

 

"서연 씨."

 

- 우진 씨, 제천에서 무사히 잘 올라왔어요?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서연의 목소리는 지난 며칠간의 밤샘 취재와 원고 마감의 피로를 털어낸 듯 한결 맑고 청아했다.

 

배경 너머로 타닥타닥 울리는 경쾌한 기계식 키보드 소리와 교정지를 넘기는 종이의 파열음이 작게 섞여 들려왔다.

 

도서출판 지평의 편집실에서 단행본 《선택할 권리》 개정 증보판의 최종 인쇄 감리를 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 방금 작업실 들어왔어요. 제천 사택 뒤뜰 소나무들도 아주 푸르렀고, 부모님도 서연 씨 안부를 가장 먼저 물으시더라고요."

 

- 아, 어머님이요?

 

제천 내려갈 때 같이 갔어야 했는데, 이놈의 개정판 마감이 뭔지 발이 묶여서…… 죄송해서 어쩌죠.

 

"아니에요. 어머니가 서연 씨 주라고 텃밭에서 딴 말린 취나물이랑 들기름을 따로 챙겨두셨어요. 다음에 같이 내려갈 때 받으러 가요."

 

- 정말요?

 

꼭 갈게요.

 

아, 참, 우진 씨.

 

방금 출판사 로비 텔레비전에서 날씨 뉴스 봤어요?

 

내일 중부 지방 강수 확률이 오십 퍼센트라던데요.

 

서연의 목소리에 은은한 장난기와 웃음기가 묻어났다.

 

우진은 스위치를 켜지 않은 채, 작업실 창가에 기대어 서서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심의 매연이 걷힌 밤하늘 위로 북두칠성의 맑은 별빛들이 희미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네, 모퉁이 서재에서 어르신들이랑 방금 보고 나오는 길입니다."

 

- 그래서요?

 

세상의 궤도를 온몸으로 뚫고 나온 강 목수님께서는 내일 우산을 챙기실 건가요, 안 챙기실 건가요?

 

서연이 짐짓 진지한 어조로 물어왔다.

 

우진은 창틀을 짚은 손끝으로 밤바람의 습도를 느끼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글쎄요. 내일 아침에 눈떠서 창문 열어보고 결정하려고요. 하늘이 잔뜩 찌푸려 있으면 작은 우산 하나 주머니에 찔러 넣을 테고, 햇살이 눈부시면 그냥 빈손으로 나가려고요. 비가 오면 비를 좀 맞거나 버스 정류장 처마 밑에서 서연 씨를 기다리면 되고, 맑으면 맑은 대로 상도동 언덕길을 걸으면 되니까요."

 

수화기 너머에서 서연의 참을 수 없는 청량한 웃음소리가 은방울처럼 번져 나갔다.

 

- 완벽한 정답이네요.

 

백 점 만점에 백 점이에요.

 

내일 오후에 인쇄소 감리 최종 승인 떨어지면 곧바로 상도동 공방으로 넘어갈게요.

 

비 오면 작업실 툇마루에서 빗소리 들으면서 부추전에 막걸리나 한잔해요.

 

"좋습니다. 빗소리 들을 준비 하고 기다리고 있을게요. 조심해서 마무리하고 와요."

 

통화를 마치고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은 우진은 작업대 위의 낡은 관절형 스탠드 조명을 딸깍 켰다.

 

어두웠던 작업실 안으로 따스한 노란색 백열등 불빛이 부드럽게 퍼져 나갔다.

 

빛은 비대칭 삼각 다리로 굳건하게 버티고 선 느티나무 테이블의 아름다운 용목 무늬를 비추었고, 바닥에 흩어진 황금빛 톱밥 더미 위로 따뜻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우진은 툇마루로 걸어가 캔버스 가방의 지퍼를 열었다.

 

그리고 가방 깊숙한 곳에서 아버지가 건네준 순백의 양장 수첩을 경건하게 꺼내 들었다.

 

단단한 감청색 가죽 표지를 조심스럽게 넘기자, 질 좋은 중성지 특유의 담백하고 서늘한 종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어떤 사각 격자도, 어떤 미래 예측 수식도, 붉은 경고음도 찍혀 있지 않은 완전한 백지.

 

우진은 앞치마 주머니에서 납작한 흑연 연필을 꺼내 쥐었다.

 

손가락 마디마디에 박힌 단단한 굳은살의 감촉이 뭉툭한 연필 자루를 흔들림 없이 감싸 안았다.

 

그는 깊고 고요한 숨을 들이마신 뒤, 수첩의 첫 번째 페이지, 그 순백의 광야 위에 정성스럽게 한 자 한 자 글씨를 새겨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일 비가 올 확률은 50%다.

 

비가 쏟아질지, 맑은 햇살이 내리쬘지는 내일의 하늘만이 안다.

 

우산을 가방에 챙겨 들고 나갈지, 빈손으로 집을 나설지는 내일 아침 눈을 뜬 나의 몫이다.

 

우리는 100%로 정해진 안전한 궤도를 잃어버렸지만,

그 대신 내일을 스스로 고민하고 선택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50%의 불확실성을 되찾았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우리는 비로소 오늘을 살아낼 수 있다.'

 

사각거리는 연필의 마찰음이 멈추고, 흑연 가루가 종이의 결 사이로 단단하게 스며들었다.

 

우진은 연필을 내려놓고 작업실의 널찍한 여닫이창을 양옆으로 활짝 열어젖혔다.

 

가을의 깊은 숨결을 품은 서늘한 밤바람이 시원하게 밀려들어와 그의 머리칼을 흩날리고, 작업실 안에 머물던 향긋한 나무 냄새를 골목길 너머로 실어 보냈다.

 

저 멀리 관악산의 거대한 능선 위로 펼쳐진 서울의 밤하늘은, 그 어떤 기하학적 선도 그어지지 않은 채 무한한 불확실성을 품고 끝없이 깊고 푸르게 반짝이고 있었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