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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네모 세모 동그라미로 간다 · 제 113화

작은 기적들

📅 2026-10-02 18:10•✍️ 만우자•👁️ 0•

1. 흙 묻은 작업화와 아침 공기

 

충북 제천의 산자락을 휘감던 새벽안개가 걷히고 있었다.

 

폐교된 분교 사택 앞마당에는 전날 밤 내린 이슬을 머금은 흙냄새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강우진(姜宇鎭)은 삐걱거리는 나무 문을 조심스레 닫고 툇마루로 내려섰다.

 

낡은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는 손끝에 서늘하면서도 상쾌한 아침 공기가 와닿았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그의 시야를 짓누르던 기하학적 도형들은 이제 흔적조차 없었다.

 

머리 위 10센티미터 허공을 맴돌던 차가운 백색 네모도, 살의를 뿜어내던 검은 세모도, 보이지 않는 꼭두각시 줄선도 거짓말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망막을 찌르듯 파고들던 편두통과 오른쪽 관자놀이의 4센티미터 수술 흉터 역시 고요한 살갗의 감촉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우진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 가득 차오르는 풀잎의 비릿함과 축축한 흙의 온기는 어떤 정밀한 알고리즘도 연산해 낼 수 없는 순수한 현실의 감각이었다.

 

마당 한쪽, 어제 어머니가 무릎을 꿇고 정성스레 심어둔 화단으로 시선이 닿았다.

 

동그랗고 모난 돌들을 삐뚤빼뚤 둘러 만든 그 작은 틈새마다 채송화와 패랭이꽃이 막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머니는 새벽같이 일어나 그 곁에 물을 듬뿍 뿌려두고 안채로 들어간 모양이었다.

 

"벌써 일어났느냐, 우진아."

 

툇마루 뒤편 미닫이문이 열리며 휠체어를 탄 아버지 강정호(姜正浩)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다리의 신경이 온전치 못해 바퀴에 의지해야 했지만, 그의 야윈 얼굴에는 15년 동안 그를 갉아먹던 생체 프로세서의 그늘 대신 맑고 은은한 혈색이 돌고 있었다.

 

정호의 무릎 위에는 노란색 격자무늬 노트와 흑연 연필 한 자루가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우진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섰다.

 

"아버지도 일찍 깨셨네요. 공기가 차가운데 겉옷이라도 더 걸치시지 그러셨어요."

 

"산바람이 좋아 그렇다. 도시의 에어컨 바람이나 지하 코어의 액체 질소 냄새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달콤하거든."

 

정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마당 너머 먼 산등성이를 바라보았다.

 

"오늘 서울로 올라간다고 했지?"

 

"네. 상도동 작업실 마당에 포천에서 실어 온 참나무 원목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벼락 맞은 백 년 묵은 참나무라 결을 고르고 상처를 다듬으려면 손이 꽤 많이 갈 것 같습니다."

 

"좋은 나무를 구했더구나. 벼락을 맞고도 썩지 않고 제 몸의 진액으로 상처를 굳혀낸 나무는 강철보다 질기다. 그 옹이야말로 나무가 비바람을 이겨낸 뼈대지."

 

정호는 무릎 위의 노트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노트 안에는 복잡한 궤도 방정식 대신, 산새들의 울음 주기와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드는 각도 같은 소박한 자연의 기록들이 연필 선으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우진아."

 

"네, 아버지."

 

"인간이 만든 길은 언제나 가장 빠른 최단거리를 가리킨다. 직선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믿기 때문이지. 하지만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 흐르는 강물도, 뻗어 나가는 나뭇가지도, 심지어 우리 몸속의 핏줄조차 모두 굽이치며 돌아가지 않더냐."

 

정호는 따뜻한 눈빛으로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올라가는 길에 내비게이션을 끄고 가보렴. 기계가 정해주는 궤도 밖으로 벗어나 보류된 길들을 거닐다 보면, 계산되지 않은 삶이 숨겨둔 작은 선물들을 만나게 될 게다."

 

우진은 아버지의 말뜻을 온전히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할게요. 길을 잃는 것도 제 선택이니까요."

 

그때 안채 부엌문이 열리며 따스한 김과 함께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가 마당으로 흘러나왔다.

 

어머니가 앞치마에 젖은 손을 닦으며 환한 얼굴로 마당을 내다보았다.

 

"우진아, 밥 다 됐다. 얼른 들어와서 아침 먹어라. 서울 가는 길 든든해야지."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지난 15년간 가족을 짓누르던 도망자의 떨림이나 불안이 티끌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우진의 가슴 한구석이 벅차오르도록 따스해졌다.

 

이 평범하고 소박한 아침, 어머니의 된장찌개 끓는 소리와 아버지의 흑연 연필 사각거리는 소리야말로 그들이 모든 것을 걸고 지켜낸 가장 위대한 승리의 증거였다.

 

2. 국도의 샛길에서

 

어머니가 바리바리 싸준 밑반찬 상자와 볶은 보리차 보온병을 조수석에 실은 소형 트럭은 제천 외곽 국도를 시원하게 달렸다.

 

우진은 대시보드 거치대에 꽂혀 있던 스마트폰의 내비게이션 화면을 조용히 터치해 꺼버렸다.

 

'최적 경로를 재탐색합니다'라며 기계적인 음성으로 방향을 지시하던 푸른색 안내선이 검은 화면 속으로 사라졌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서울로 직결되는 번듯한 4차선 유료 고속도로 나들목이 나타났지만, 우진은 운전대를 왼쪽으로 돌렸다.

 

오래된 아스팔트 포장이 군데군데 덧대어진 완만한 2차선 구 국도였다.

 

차창을 반쯤 내리자 풋풋한 풀잎 향기와 서늘한 산바람이 뺨을 시원하게 스쳐 지나갔다.

 

속도를 굳이 시속 100킬로미터로 올릴 필요가 없었다.

 

앞서가는 경운기가 내뿜는 푸른 연기를 따라 천천히 시속 40킬로미터로 서행해도, 뒤에서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려대는 차량은 아무도 없었다.

 

경운기를 몰던 밀짚모자의 노인은 백미러로 우진의 트럭을 흘긋 보더니, 길가 비상주차 구역에 바퀴를 슬쩍 대며 먼저 지나가라는 듯 투박한 손짓을 건넸다.

 

우진은 비상 깜빡이를 두 번 켜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정해진 시간표와 초 단위 배차 간격에 쫓기던 도시의 도로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느긋한 양보였다.

 

한참을 달리던 국도는 산모퉁이를 돌아서자 갈림길을 마주했다.

 

이정표에는 빛바랜 페인트로 쓰인 지명들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우진은 지도 앱을 켜지 않고, 길가에 수국이 소담하게 피어 있는 쪽의 좁은 포장도로로 차머리를 밀어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야가 트이며 맑은 계곡물이 흐르는 자갈밭 강변이 나타났다.

 

여름의 문턱에서 물살은 햇살을 받아 잘게 부서지는 은비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강변 둔치 너머 버드나무 그늘 아래, 낡은 1톤 트럭 한 대가 보닛을 열어둔 채 멈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곁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 사내가 기름 묻은 장갑을 낀 채 난감한 표정으로 엔진룸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우진은 트럭을 길가 안전한 공터에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어르신, 어디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작업복 차림의 사내가 땀을 훔치며 고개를 돌렸다.

 

"아이고, 젊은이. 라디에이터 쪽 냉각수가 터진 모양인데, 이 근방에 정비소도 없고 전화 신호도 잘 안 잡혀서 애를 먹고 있었소. 읍내 장터에 참외를 부려줘야 하는데 영 발이 묶여버렸네."

 

사내의 트럭 적재함에는 노란 참외가 담긴 플라스틱 상자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우진은 다가가 엔진룸 안쪽을 살폈다.

 

과거 오르비스의 냉각 밸브나 양자 슈퍼컴퓨터의 초전도 라인을 들여다보던 날카로운 감각 대신, 손끝과 눈으로 기계의 상태를 살피는 목수의 감각이 차분하게 작동했다.

 

상부 호스의 클램프가 헐거워져 틈새로 냉각수가 뿜어져 나온 흔적이 역력했다.

 

호스 자체가 찢어진 것은 아니었다.

 

"호스가 파열된 건 아니네요. 연결 밴드가 진동 때문에 풀리면서 빠진 것 같습니다."

 

우진은 자신의 트럭 공구함으로 가 몽키스패너와 내열 실리콘 테이프, 그리고 비상용 워셔액과 생수병을 챙겨왔다.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호스를 끝까지 밀어 넣고 내열 테이프로 두껍게 감은 뒤, 스패너로 강철 클램프의 볼트를 단단히 조였다.

 

그리고 챙겨온 생수를 라디에이터 보조 탱크의 적정선까지 조심스럽게 채워 넣었다.

 

"자, 시동 한번 걸어보시겠어요?"

 

사내가 운전석으로 가 키를 돌리자, 트럭 엔진이 덜덜거리며 힘찬 맥동을 되찾았다.

 

냉각수는 더 이상 새지 않았고, 계기판의 온도 게이지도 정상 범위에 머물렀다.

 

"허허! 살아났네, 살아났어!"

 

사내는 운전석에서 뛰어나와 연신 우진의 두 손을 덥석 쥐었다.

 

"젊은이가 사람 하나 살렸소. 읍내 청과물 도매상이 문을 닫으면 이 참외를 전부 썩힐 뻔했는데…… 정말 고맙소! 공임이라도 줘야 할 텐데 가진 현금이 없어서 어쩌나."

 

사내는 적재함으로 달려가 가장 크고 노랗게 익은 참외 서너 개를 품에 안고 와 우진의 품에 안겨주었다.

 

달콤하고 싱그러운 참외 향기가 코끝을 확 풍겼다.

 

"사양 말고 받아요. 오늘 아침에 우리 밭에서 딴 첫물 참외요. 아주 달디달아."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어르신. 조심해서 운전하세요."

 

우진은 참외를 안고 웃었다.

 

만약 그가 고속도로를 타고 규격화된 내비게이션의 지시대로만 달렸다면, 결코 이 강변을 지나지 않았을 것이고 이 사내를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름길을 벗어난 우연이 만들어낸 작고 달콤한 기적이었다.

 

3. 버려진 화훼 농원의 할머니

 

참외를 든 채 다시 국도를 달리던 우진은 경기도 안성 부근의 한적한 시골 마을 어귀를 지나게 되었다.

 

나지막한 구릉 아래, 비닐이 찢겨 나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폐비닐하우스 단지가 보였다.

 

과거 넥스트 큐브의 차폐 벙커나 비밀 연구소를 연상시키는 쓸쓸한 풍경이었지만, 그 앞마당에는 뜻밖에도 형형색색의 야생화들이 화분에 담겨 가득 늘어서 있었다.

 

'꽃 팝니다'라는 삐뚤빼뚤한 팻말 하나가 녹슨 드럼통에 기대어 서 있었다.

 

우진은 문득 발걸음을 멈추듯 운전대를 꺾어 농원 마당으로 들어섰다.

 

차 소리를 듣고 낡은 컨테이너 가건물에서 허리가 조금 굽은 백발의 할머니가 걸어 나왔다.

 

손에는 작은 모종삽이 들려 있었다.

 

"어서 와요, 총각. 길을 잘못 들었는가? 여긴 국도변도 아니라 손님이 통 안 오는데."

 

할머니의 목소리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메말라 있었지만 온화했다.

 

우진은 트럭에서 내려 고개를 숙였다.

 

"지나가다 꽃들이 너무 예뻐서 들렀습니다. 혹시 마당이나 화단에 심기 좋은 들꽃이 있을까요?"

 

"화단? 들꽃이야 지천에 널린 게 들꽃이지. 저기 바위솔도 있고, 금잔화도 있고…… 저기 구석에 있는 저 녀석은 벌개미취인데, 돌멩이 틈바구니에서도 뿌리를 잘 내려요."

 

할머니는 우진을 이끌고 화분들이 늘어선 공터로 걸어갔다.

 

우진은 플라스틱 화분들에 담긴 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온실에서 일정한 온도와 인공조명을 받으며 완벽한 대칭으로 자라난 화원의 규격 꽃들과는 전혀 달랐다.

 

어떤 꽃은 줄기가 비바람에 꺾였다가 다시 기역 자로 굽어 자라났고, 어떤 꽃은 잎사귀에 벌레 먹은 자국이 선명했다.

 

하지만 그 불완전한 모양새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뻗어 올린 생명의 궤적이었다.

 

"원래는 우리 영감이 국화 농사를 크게 지었더랬지."

 

할머니가 흙 묻은 장갑을 털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십몇 년 전에 무슨 대기업인가 하는 데서 스마트 농장인지 뭔지 투자를 하라고 꼬드겨서 계약서를 썼는데…… 회사가 흔적도 없이 망해버렸어. 빚만 잔뜩 남기고 도망쳤지. 영감은 화병으로 먼저 떠나고, 하우스는 태풍에 찢겨 나가고."

 

우진의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큐브 네트웍스나 넥스트 큐브 같은 유령 페이퍼 컴퍼니들이 서민들의 고혈을 빨아먹고 파멸로 몰아넣었던 수많은 사건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 시스템의 톱니바퀴 아래서 얼마나 많은 평범한 이들이 피눈물을 흘렸던가.

 

"그땐 정말 세상이 다 끝난 줄 알았어. 죽으려고 약도 사다 놨었지."

 

할머니는 덤덤하게 웃으며 벌개미취 화분 하나를 매만졌다.

 

"그런데 봄이 되니까, 무너진 하우스 바닥 흙바닥을 뚫고 이 녀석들이 삐죽 고개를 내밀더라고. 비닐도 없고 거름도 안 줬는데, 지들끼리 비 맞고 바람 맞으면서 꽃을 피워. 그걸 보니까…… 아, 살아있는 건 그냥 사는 거구나. 누가 시켜서 사는 게 아니라, 살고 싶어서 피어나는 거구나 싶더라고."

 

할머니의 주름진 손이 꽃잎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서 그냥 남은 땅에 들꽃들을 주워다 심기 시작했지. 돈은 안 되지만, 이 녀석들 물 주고 흙 만지다 보면 하루가 참 따뜻해요."

 

우진은 무릎을 굽히고 앉아 벌개미취와 구절초 화분 서너 개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할머니, 이 녀석들 제가 다 사겠습니다. 제천에 계신 저희 어머니 화단에도 보내드리고, 서울 제 작업실 마당에도 두고 싶어서요."

 

"아이고, 고마워라. 그런데 총각, 차에 참외가 있네? 달콤한 냄새가 진동을 해."

 

우진은 조수석에서 아까 농부에게 받았던 노란 참외 두 개를 꺼내 할머니의 품에 쥐여드렸다.

 

"오다 길가에서 만난 농부 어르신께 받은 건데, 아주 달고 맛있습니다. 할머니 드세요."

 

할머니의 눈가에 잔잔한 주름이 번지며 눈물이 맺혔다.

 

"총각이 참 마음이 곱네. 길을 잘못 든 줄 알았더니, 복이 굴러들어 왔어."

 

화분 값을 치르고 차에 오르는 우진의 등 뒤로 할머니가 손을 흔들어주었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인연이었다.

 

비극의 폐허 위에서도 인간은 스스로 흙을 털고 일어나 들꽃처럼 다시 살아간다는 것, 그 거룩한 진실을 우진은 이 외딴 화훼 농원에서 다시금 배웠다.

 

4. 상도동 언덕길의 소년

 

서울로 접어들자 늦은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한강 다리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퇴근 시간의 번잡함을 피해 우진은 노량진을 거쳐 상도동 언덕길로 차를 몰았다.

 

빽빽하게 들어선 다세대 주택과 가파른 계단, 손때 묻은 골목길들이 그를 반겼다.

 

상도동 147번지 목공 작업실 앞 골목에 다다랐을 때, 익숙한 웃음소리와 함께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가 울려 퍼졌다.

 

"민호야! 브레이크 잡아! 거기 돌멩이 있다!"

 

"괜찮아! 안 넘어져!"

 

골목길 내리막에서 자전거를 타고 내달리던 중학생 민호와 그 뒤를 쫓아 뛰는 아이들이 보였다.

 

과거 시스템의 통제 아래 있었다면 '사고 확률 84%'라는 붉은색 경고와 함께 기계적으로 저지당했거나, 혹은 인과율 결손을 메우기 위한 희생양으로 내몰렸을지도 모를 위태로운 질주였다.

 

하지만 아이의 머리 위에는 어떤 세모도, 네모도 떠 있지 않았다.

 

덜컹!

 

민호의 자전거 앞바퀴가 보도블록 틈새의 작은 턱에 걸리며 차체가 크게 요동쳤다.

 

아이는 비명을 지르며 핸들을 꽉 쥐었고, 자전거는 비틀거리며 길가 전봇대 바로 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 섰다.

 

우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그는 달려가서 참견하는 대신 차창 너머로 조용히 지켜보았다.

 

"으아, 식겁했네! 야, 봤냐? 내 순발력?"

 

민호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씩 웃더니 바닥에 발을 딛고 섰다.

 

넘어질 뻔한 순간, 아이는 자신의 감각과 본능으로 균형을 되찾아낸 것이다.

 

스스로 위기를 넘기고 균형을 잡는 법을 배우는 과정, 그것이 바로 자유가 주는 가장 정직한 성장이었다.

 

골목 어귀 복덕방 문이 열리며 낯익은 할머니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 녀석들아! 골목에서 그렇게 내달리면 다친다고 몇 번을 말해! 어휴, 간 떨어질 뻔했네."

 

할머니의 타박 섞인 호통에 아이들은 배시시 웃으며 자전거를 끌고 골목 아래로 도망치듯 내려갔다.

 

그때 우진의 트럭을 발견한 복덕방 할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머, 강 총각! 이제 와?"

 

우진은 차를 작업실 앞마당에 대고 내렸다.

 

"할머니, 잘 계셨어요?"

 

"그럼 잘 있었지. 그런데 저 마당에 누워 있는 커다란 통나무는 대체 뭐래? 어제 집채만 한 화물차가 와서 부려놓고 가는데 동네 사람들이 다 구경 나왔잖아. 벼락 맞은 백 년 참나무라며?"

 

할머니는 마당 한가운데 묵직하게 자리 잡은 6미터 길이의 거대한 참나무 원목을 가리켰다.

 

한쪽 옆구리가 검게 그을려 깊게 패어 있었지만, 그 상처를 감싸 안으며 수십 개의 옹이가 단단한 굴곡을 이루고 있는 웅장한 거목이었다.

 

"네. 테헤란로에 새로 생길 시민 공원 쉼터 기둥이랑 벤치로 쓸 나무예요. 상처가 깊지만, 그만큼 속이 단단하거든요."

 

"세상에…… 그 흉측한 빌딩 무너진 자리에 우리 강 총각이 만든 나무 의자가 들어간다니, 동네 경사도 이런 경사가 없어. 참, 저기 모퉁이 서재 사장님이 총각 오면 전해주라고 이거 맡겨두고 갔어."

 

할머니가 품에서 건넨 것은 낡은 헌책 한 권이었다.

 

표지가 누렇게 바랜 조선 목가구 도감이었다.

 

책갈피 사이에는 북카페 사장의 정갈한 메모가 적혀 있었다.

 

[강 목수님, 서가 구석을 정리하다 발견했습니다.

 

규격화되지 않은 옛 선조들의 짜맞춤 기법이 담겨 있더군요.

 

테헤란로 쉼터를 만드시는 데 작은 영감이 되길 바랍니다.]

 

우진은 가슴이 뭉클해졌다.

 

동네 헌책방의 낡은 책 한 권이,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에 이렇게 다정한 손을 내밀어주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참, 이건 오다가 산에서 따온 참외예요. 하나 깎아 드세요."

 

우진이 남은 참외 하나를 건네자 할머니는 손사래를 치면서도 기분 좋게 받아 들었다.

 

"총각은 어쩜 이렇게 손이 따뜻해. 얼른 들어가 쉬어. 저녁엔 찌개 끓여서 좀 갖다 줄 테니까."

 

5. 모퉁이 서재의 불빛

 

짐을 풀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우진은 골목 모퉁이에 위치한 헌책방 '모퉁이 서재'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스름한 저녁노을이 골목을 덮자 서재의 쇼윈도 너머로 노란 백열전구 불빛이 따스하게 번져 나오고 있었다.

 

딸랑.

 

문 위에 달린 황동 종이 맑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벽면을 가득 채운 수천 권의 중고 서적들에서 풍겨 나오는 특유의 마른 종이 냄새가 코끝을 감쌌다.

 

카운터 안쪽에서 돋보기안경을 쓴 60대 여사장이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어머, 강 목수님! 제천 부모님 댁에는 잘 다녀오셨어요?"

 

"네, 사장님 덕분에요. 맡겨두신 책 정말 잘 받았습니다. 제가 찾고 있던 전통 목가구의 비대칭 짜맞춤 구조가 고스란히 담겨 있더라고요."

 

우진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사장은 손을 내저으며 환하게 웃었다.

 

"어울리는 임자를 찾아간 것뿐이에요. 십 년 넘게 먼지만 쌓여 있던 책인데, 강 목수님이 테헤란로 공원에 쉼터를 짓는다는 뉴스를 보고 문득 그 책 생각이 났지 뭐예요."

 

테이블 서너 개가 놓인 아담한 북카페 공간에는 이미 동네 단골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등산복 차림의 노인이 돋보기를 코끝에 걸친 채 신문을 읽고 있었고, 낡은 숄을 두른 여대생이 전공 서적 옆에 노트를 펼쳐두고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우진이 들어서자 노인이 신문을 내리며 반갑게 아는 체를 했다.

 

"어이, 강 목수! 왔는가? 그 마당에 있는 거목 말이야, 아까 낮에 슬쩍 봤는데 기운이 아주 대단하대. 벼락을 맞고도 살아남은 나무라며?"

 

"네, 어르신. 강원도 인제 산간 도로 공사 중에 베어진 나무인데, 상처가 깊어 아무도 사 가지 않던 걸 제가 데려왔습니다."

 

"허허, 상처가 깊을수록 나무는 더 단단해지는 법이지. 사람도 그렇고 말이야. 나도 젊을 적엔 실패투성이였어. 사업 말아먹고 길바닥에 나앉았을 땐 세상이 날 버린 줄 알았지. 그런데 그 세월을 버티고 나니까, 웬만한 바람엔 눈 하나 깜짝 안 하게 되더라고."

 

노인은 막걸리 잔 대신 따뜻한 둥굴레차를 홀짝이며 껄껄 웃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여대생도 쑥스러운 듯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저도 지난주에 최종 면접에서 떨어졌거든요. 예전 같았으면 미러 큐브 앱 점수만 탓하며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었을 텐데…… 오늘은 그냥 담담해요. 모퉁이 서재에 와서 책을 읽다 보니까, 이번 실패는 그냥 다른 길을 찾아보라는 신호 같더라고요."

 

우진은 여대생을 바라보며 깊은 공감을 표했다.

 

"맞습니다. 실패는 끝이 아니라, 정해진 궤도를 벗어나 나만의 길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저도 얼마 전 가구 공모전에서 1차 심사 탈락을 겪었습니다."

 

"어머, 강 목수님도요?"

 

"네. '규격 표준화 미달'이라는 이유였죠. 하지만 덕분에 저 백 년 된 참나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정해진 틀에 맞지 않는다는 건, 세상에 단 하나뿐인 형태를 가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서재 안에 은은한 웃음꽃이 피어났다.

 

누구 하나 타인을 평가하거나 등급을 매기지 않는 공간.

 

각자의 결핍과 상처를 털어놓으며 서로의 불완전함을 보듬어주는 이 소박한 연대야말로, 시스템이 그토록 두려워했던 인간의 진정한 회복력이었다.

 

우진은 안성 화훼 농원에서 가져온 벌개미취 작은 화분 하나를 카운터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았다.

 

"사장님, 오다 길가에서 구한 들꽃입니다. 서재 창가에 두면 잘 어울릴 것 같아서요."

 

보랏빛 꽃잎이 백열전구 불빛 아래서 수줍게 흔들렸다.

 

사장은 감격한 얼굴로 화분을 어루만졌다.

 

"어머나…… 벌개미취네요. 척박한 땅에서도 참 꿋꿋하게 피어나는 꽃인데. 고마워요, 강 목수님. 우리 서재가 한층 더 환해졌어요."

 

6. 백 년 참나무 아래서

 

서재를 나와 작업실로 돌아온 우진은 마당에 불을 밝혔다.

 

작업등 두 개가 백 년 된 참나무 원목을 환하게 비추었다.

 

길이 6미터, 지름 1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몸체.

 

껍질은 거칠게 트여 있었고, 벼락이 관통했던 한쪽 측면은 숯처럼 검게 탄 상흔이 깊은 계곡처럼 패어 있었다.

 

우진은 가죽 장갑을 벗고 맨손으로 나무의 표면을 쓸어내렸다.

 

투박하고 거친 나무껍질의 결을 따라 수십 년의 세월이 손끝으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의 시야에는 더 이상 어떤 푸른색 탄도 예측 선도, 0.3초 뒤의 미래를 계산하는 반투명한 잔상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나무가 품고 있는 나이테의 무게와 수분, 그리고 결의 방향을 오감으로 감지할 뿐이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목수님."

 

어둠 속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진이 고개를 돌리자, 얇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한서연 기자가 마당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테이크아웃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서연 씨, 오셨어요? 취재는 잘 끝났습니까?"

 

"네. 《선택할 권리》 개정판에 들어갈 윤채린 양의 인터뷰 원고를 방금 마감하고 오는 길이에요. 채린이가 서울대 제안을 거절하고 자갈밭을 걷겠다고 한 이야기, 반응이 아주 뜨거울 것 같아요."

 

서연은 커피 한 잔을 우진에게 건네며 거대한 참나무 곁으로 다가섰다.

 

그녀는 벼락 맞은 상처 부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게 그 포천에서 온 나무로군요. 정말…… 상처가 깊네요."

 

"네. 하지만 이 옹이진 부위를 보세요. 벼락에 타버린 부분을 나무 스스로 살려내기 위해 더 단단한 수지를 뿜어내서 상처를 굳혔습니다. 다른 부위보다 밀도가 두 배는 높아요."

 

우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미소를 지었다.

 

"테헤란로 공원 쉼터의 중심 기둥으로 세울 겁니다. 그리고 처마는 반듯한 사각형 대신, 바람이 지나가는 유선형 곡선으로 깎아 올릴 생각이에요."

 

"유선형 처마요?"

 

"제천에서 아버지가 그러시더군요.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고요. 강물도, 바람도, 핏줄도 모두 굽이치며 흐른다고 하셨습니다. 시스템은 인간을 사각형의 규격에 가두려 했지만, 원래 인간의 삶은 흐르는 강물처럼 곡선이어야 하니까요."

 

서연의 눈동자가 작업등 불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녀는 가만히 참나무의 옹이에 손을 얹었다.

 

"그 쉼터가 완성되면, 사람들이 비를 피하고 바람을 맞으며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겠네요. 상처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도 괜찮다는 걸, 이 나무가 온몸으로 보여줄 테니까요."

 

"서연 씨가 써준 책처럼요."

 

두 사람 사이에 잔잔하고 따스한 침묵이 흘렀다.

 

골목 너머에서 밤바람이 불어와 참나무 거목의 잎새 없는 가지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불과 몇 달 전, 테헤란로의 지하 100미터 어둠 속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서로의 목숨을 걸고 싸우던 기억들이 아득한 전생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 지옥 같은 시간을 지나, 마침내 그들은 이 평범하고 고요한 밤공기 아래 나란히 서 있었다.

 

우진은 서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어떤 궤도도, 각본도 없었다.

 

내일 그녀가 어떤 기사를 쓸지, 어떤 선택을 내릴지 우진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알 수 없기에, 지금 이 순간 그녀가 곁에 서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소중했다.

 

7. 밤하늘에 새겨진 무형의 궤적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서연을 배웅하고 돌아온 우진은 작업실 안쪽 책상 앞에 앉았다.

 

작업실 안은 짙은 나무 향과 대패밥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백지 한 장과 4B 연필, 그리고 그동안 그가 소중히 모아둔 작은 물건들이 놓여 있었다.

 

제천의 아버지가 건네준 낡은 지적도 메모 조각.

 

어머니의 화단 틈에서 자라난 들풀의 마른 잎사귀.

 

안성 화훼 농원 할머니가 주었던 벌개미취의 꽃잎 하나.

 

그리고 백도현의 가슴을 문질러 증오를 지워냈던, 모서리가 둥글게 닳아빠진 하얀 플라스틱 지우개.

 

우진은 연필을 쥐었다.

 

그는 켄트지 위에 벼락 맞은 백 년 참나무를 중심으로 펼쳐질 테헤란로 쉼터의 최종 투시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먼저 거목의 거칠고 깊은 상처를 있는 그대로 스케치했다.

 

인위적으로 깎아내거나 메우지 않고, 옹이의 굴곡을 그대로 살려 쉼터를 지탱하는 가장 든든한 중심 기둥으로 삼았다.

 

그 기둥 위로 뻗어 나가는 지붕의 선은 자를 대고 그은 직선이 아니었다.

 

바람의 흐름을 닮은 부드러운 호(弧), 계곡물이 바위를 감싸 안고 돌아가듯 완만하게 휘어지는 비대칭 곡선이었다.

 

누구나 비가 오면 발걸음을 멈추고 들어와 비를 피할 수 있는 넉넉한 처마.

 

그 아래에는 모퉁이 서재의 낡은 의자처럼,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앉아 불완전한 삶의 온기를 나눌 수 있는 넓은 평상형 원목 벤치가 자리를 잡았다.

 

스케치를 마친 우진은 연필을 내려놓았다.

 

도면 구석, 빈 여백에 그는 작은 글씨로 한 문장을 적어 넣었다.

 

[길을 잃어야만 만날 수 있는 기적들이 있다.]

 

그것은 내비게이션을 끄고 달려온 국도변에서, 참외를 건네주던 농부의 손에서, 무너진 하우스 틈에서 들꽃을 피워낸 할머니의 미소에서, 그리고 넘어질 뻔하다 스스로 균형을 잡은 소년의 웃음에서 그가 건져 올린 삶의 진실이었다.

 

인간은 정해진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헤매고, 넘어지고, 잘못된 길로 접어들었을 때 비로소 마주치게 되는 다정한 눈빛과 우연한 온기야말로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가장 거룩한 힘이었다.

 

우진은 작업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서울의 밤하늘은 테헤란로의 마천루들이 내뿜는 인공 불빛 너머로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과거 그 하늘을 거미줄처럼 뒤덮고 있던 검은 통제 격자망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해진 궤도가 지워진 밤하늘은 완벽하게 비어 있는 거대한 캔버스였다.

 

우진은 자신의 오른쪽 관자놀이를 가만히 짚었다.

 

4센티미터의 흉터는 이제 아무런 통증도, 푸른빛도 내뿜지 않았다.

 

그것은 그가 시스템의 노예가 아닌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살아남았음을 증명하는 가장 단단한 삶의 옹이였다.

 

바람이 불어와 작업대 위의 대패밥을 가볍게 흩날렸다.

 

정해지지 않은 내일이, 예측할 수 없어 눈부신 또 하루의 삶이 저 새벽 너머에서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우진은 가슴 가득 차오르는 벅찬 평온을 느끼며, 내일 아침 참나무를 향해 내리칠 첫 대패질을 준비하기 위해 조용히 불을 껐다.

독자님의 따뜻한 커피 한 잔과 추천이 작가님의 다음 이야기를 피워냅니다.